전환기의 공예, 자기 성찰의 시대 _ 최공호

80년대에 극단으로 치닫던 이른바 탈기능의 조형주의 경향을 나는 러시안 룰렛 게임에 비유한 적이 있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공예판 전체를 볼모삼아 자신들끼리만 즐기면 그만이라는 소아적·가학적 태도가 그 게임의 심리와 크게 다를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공예의 조형주의를 너그럽게 본다면, 근대 이후 수요의 주도권을 기계적 시스템에 넘겨준 데 이어 순수주의로 치달아온 미술의 중심부에서도 밀려나 설 땅을 잃은 나머지 겪게 된 정체성의 혼란으로 보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변변한 자기 반성의 기회조차 갖지 않은 채 너무 오랜시간을 끌어왔고, 더욱이 근대 이후에 전개된 공예의 참담한 상황을 떠올린다면 변명이 궁색해질 수 밖에 없다.

퇴락한 백자의 끝물과 그나마 공출로 숨이 끊긴 일제 때의 놋그릇 이후 우리의 그릇문화, 다시말해 문화의 이름을 허용할 만한 변변한 그릇이 어디 있었던가. 플라스틱과 양은·스테인리스로, 근대에 다시 싸구려 리어카 백자로 이어진 우리의 식탁이 핏기 잃은 물건들에 점령당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개발독재시대의 값싼 기능주의나 저급한 키치가 우리삶의 조건을 도배질하는 동안 이른바 대학출신 공예가들의 존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시대양식의 창출은커녕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매몰된 채 자신의 소임을 방기한 사회적 책임을 과연 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무엇으로 예술의 이름으로 삶의 토대를 외면한 이들의 제작경향이 궁극적으로는 공예계 전체를 온통 무기력 상태에 빠뜨리고, 나아가 존립기반 자체에도 심대한 위기를 초래한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적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나쁜 버릇인 줄 알지만 공예를 말할때면 예외없이 감정이 격해지곤 한다. 이런 고질병을 앓은지 벌써 15년도 훌쩍 넘었다. 이제 여기서 벗어날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허송했던 세월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아껴야 한다. 왜냐하면 공예의 지형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예를 둘러싼 최근의 담론은 과거와 비교해볼 때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한때는 미술계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역사적 퇴행으로까지 간주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문화적 생산과 유효한 경제적 활로라는 점에 모두들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동인은 공예계 내부로부터의 성과라기보다는 공예주변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주변여건의 변화가 거꾸로 공예의 존재태가 바뀌기를 촉구하고 있는 셈이다. 자의든 타의든 공예가 이와 같은 구조적 변동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근거로 로우테크(Low Tech)를 말하기도 하고, 스토리(Story)론이나 문중(門中)의 개념으로 새롭게 달라진 수요환경을 들 수 있다. 산업화 이후 효율이 최선이었던 생산의 개념이 해체되어가고,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를 말하는 동안 한발 더 나아가 미래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세분화된 취향으로 수요 패턴이 파편화해 갈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대량생산·대량소비가 20세기의 버전이라면, 새 세기에는 더 이상 전통의 수요·공급체계로는 대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최근, 이른바 에밀리아식 생산방식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탈리아의 소규모 공방 시스템이라든가 북유럽 전통기술의 문맥을 잇는 수공예공방들이 누리는 국제적 명성과 고부가가치가 주목을 받는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공예의 전망을 시사해주는 작은 사례일 뿐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정부의 문화상품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나 각 지자체의 공예산업 유치를 위한 움직임 등이 부분적이나마 가시화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문화관광부뿐 아니라 노동부와 산업자원부까지 나서서 전통공예기술에 적극적인 지원의지를 보여온 것도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아무튼 근래의 이러한 흐름은 공예에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부여하였을뿐만 아니라 공예가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과감한 자기 혁신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제작의 목표를 폐쇄적인 작가주의에서 이웃의 건강한 삶으로 바꾸는 중심이동이 필요하며, 작품과 상품으로 구분짓는 이분법적 인식 태도 또한 우리 공예계가 극복해야 할 댛상이다. 그 밖에도 전시장 중심의 발표방식이라든가, 전승공예 분야와의 차별적 인식태도 등 관행화된 숱한 걸림돌을 사려깊게 찾아내 버려야 할 것이다.

위기는 기휘의 뒷면에 묻어 온다고 했다. 실로 오랜만에 주어진 기회가 헛되지 않도록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2000년 월간아트 특집글
최공호 / 1957년 출생. 홍익대 공예과 및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과정 수료. 문화재 감정위언 및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재 마사박물관 관장, 서울대·홍익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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