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공예진흥원 사업방향 개괄


공예진흥원은 영국의 현대공예를 홍보합니다. 공예진흥원은 영국예술진흥원의 자금지원으로 운영되는 독립기관이며 국민과 공예인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공예진흥원의 새로운 사업방향

공예진흥원은 공예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문적 직업으로서 인식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즉, 즐거움을 위한 현대공예의 구매나 그것에의 투자, 공예품의 전시나 판매, 현대공예에 관해 더 많이 배우는 일, 또는 간단하게 그들이 살고있는 주변에서 공예를 소중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Details »

Who is Evo Morales?


BY ALEJANDRO RODRIGUEZ

In April 2000, Aguas de Tanari, a large multinational corporation, was due to take over the privatised water works in Cochabamba. Water prices were to increase and laws were passed to make it illegal to catch and use rain water. Water would be out of the reach of the majority of residents, 65% of whom live below the poverty line. Mass demonstrations erupted, roads were blocked and running battles where fought with the police and the army until the government gave in. The sell-off was defeated. Details »

일본 Curiosity의 건축물 C-1


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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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현대 컨셉슈얼 건축에서 ‘더욱 더 특별해지려고 하는 것’이나 ‘컨셉슈얼한?아이디어를 작품에 밀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일본 창작계의 ‘컨셉슈얼’이란, 아마도?언급된 바와 같은 부정적 의미들을 가지고있지 않은듯하다.?그들은 아직 컨셉슈얼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개발하기 위한 객체’로서 생각한다.

대부분의 서양문화권에서 컨셉슈얼은 추상예술의 하나로서나, 혹은?예술적 믿음 -?아이디어의 전달, 혹은?’작품 자체의 중요성의 거부’를 통한?관객과의 정신적인 관계성 -?으로 불려진다.?하지만 건축과 디자인에서는 너무 자주 그런 ‘객체의 중요성의 거부’가 아이디어 전달의 결과로서 보여지기보다는 디자이너의 개인적 개성으로 보여지며, 건축가들은 별거아닌 객체에 심오한 건축적 의미를 부여하는데?그런 방법을 오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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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슈얼한 건축은 육면체들을 만든다. 맞다. 이것은 하얗고 박스같다. 그러나 거기엔 수많은 세부들이 있다. 도쿄의 디자인 건축 스튜디오 Curiosity의 프랑스 출신 건축가?그외넬 니콜라스(gwaenel nicolas)와 일본인이자 그의 처인 레이코 미야모토는 구조와 공간간의 조화의 아이디어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유리로 된 주거공간으로 둘러싸인 소용돌이모양의 갤러리공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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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1 은 스토리보드와 시나리오를 가진 영화처럼 디자인되었다. 그 흥미로운 광경들은 이어진 방들간의 상호작용 뿐만 아니라 윗 방들과의 인터엑션에 의해 창조되었고, 계단들은 복도로서 확장되어진다. 디자인은 벽들과 층등에 의해?확연히 드러나지?않는 반면,?열려진 공간에서의 사용자의 움직임에 의해 드러난다.?마치 영화속의 다른 장면처럼 사용자는 층과 층 사이로 사라짐과 나타남을 반복할 것이다. 그가 이 회전체속에서 움직일 때, 그는 명상의 공간들을 돌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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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광경으로서의 여성

남성의 사회적 존재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존재는 외면적이고 외부로 향한다. 반대로 여성의 사회적 존재는 여성의 자신의 내면적 태도로 설명된다. 관찰하는 것과 관찰 당한다는 것은 여성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가에 있어 생각해야 할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이다. 여성은 항상 자신을 주시해야 하며 자신 스스로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것들을 설득 당해온 것이다. 곧 그녀가 남성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그녀의 처우를 결정짓는다.
어떤 면에서 남성은 스스로 행동하는 것에 그치지만 여성은 그 행동으로 평가받는다고 볼 수도 있다. 남성은 여성을 본다. 여성은 보여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 결국 그녀는 광경이 된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나체는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다. 또한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함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남성은 신의 대리인이 된다. 중세 동안에는 이런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인식이 지속되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회화는 부끄러움의 순간을 묘사하게 되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부끄러움은 바깥으로 나와서 감상자와 관계가 지어진다. 그 후 부끄러움은 ‘과시’로 변한다.
감상자가 그녀를 보아야만 그녀는 나체가 된다. 또한 그림에 등장하는 거울은 비난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점은 그것이 아니라 나체의 여인이 스스로 자신을 광경으로서 다루게 된다는 점이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남성은 여성의 나체를 심사한다. 넬게우스의 초상화에서 왕의 애인인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왕이 이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왕에 대한 복종심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아시아권의 미술에서 나체가 수동적이지 않은 점은 주목할 점이며 그것의 테마가 성적 매력에 관한 것이라면, 그 그림속의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이며 활발한 성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미투나 : 종교적으로 음양교합과 관련된 설이 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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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de와 Naked

케네스클락에 따르면 나체란 벗은 상태이고 누드란 예술의 한 가지 형태이다. 누드란 일종의 보는 방법이다. 하지만 단지 예술용어로서 누드의 의미를 설명할 수는 없다. 누드에 성적 특질이 관련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드는 타인에게 나체가 ‘보여진다는 것’이며 아직 스스로에게 인식되기 이전임을 의미한다. 나체의 육체가 누드가 되려면 우선 오브제-객체로서 보여져야한다. 나체와는 달리 누드는 인위적으로 변형되어 전시된다. 서양의 나체화에서 주체는 묘사되지 않는다. 감상자인 남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성은 그림 속에 존재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경우는 절대 없다. 항상 여인은 바깥을 쳐다본다. 반대로 동양권의 전통에서 남녀는 함께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의 성적 이미지는 모두 정면을 향한다. 왜냐하면 그 그림의 소유자 혹은 감상자가 성적 이미지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19세기 궁전회화에 이르러 이런 여성의 종속은 극에 달한다.

때로는 누드라 할 수 없는 그림들도 있는데 가령 작자의 실제 연인이 등장하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는 유럽 전체 회화들 중에서 소수에 불과한데 대략 화가의 시선과 등장하는 여성 사이의 관계가 너무 단단해서 관객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누드란 객체로서 관객을 주체로 만드는데 이미 주체가 되어버린 작가와 객체인 나체여성 사이에서 관객은 주체가 될 수 없다.
서양회화의 전통적 전형과 예외는 나체와 누드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나체 묘사의 문제가 처음 나타났을 때만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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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의 기능

나체는 평범한 남성과 여성상을 확인시켜주는 안정화의 기능을 한다. 즉 그녀/그는 보통 사람과 같은 여/남성이라는,,. 그림은 익명성의 바탕 위에서 그들의 성이 틀리다는 의미보다 그들의 성이 ‘안정화되어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우리는 나체를 보는 최초의 순간에 평범함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 평범함은 우리를 현실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인 성의 구조를 확연히 함으로써 공유될 수 있는 성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비의 상실은 그 신비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며 주체화와 객체화의 둘 사이를 넘나든다.
이렇듯 성적인 나체의 이미지화는 쉽지 않다. 생생한 성 체험의 광경은 상태가 아닌 과정이 되거나 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뛰어나게 풍부한 나체 사진들이 희귀한 이유도 된다. 사진가들은 여성을 누드로 만들어 성적 욕망을 신비한 환상으로 전환시킨다.

예외적인 나체 이미지인 루벤스의 그림에서, 여체는 망토를 둘러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즉 나체였을 그 순간과 그림에서의 가려진 모습은 다르다. 특별히 육체는 화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변형되었으며 상당히 화가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평범함은 이런 위대한 나체에서는 필수적이었는데 바로 육체의 풍만함과 부드러움이 이를 나타내고 있다.

서양회화에서 누드는 유럽적인 인본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와 연결된다. 이 회화의 전통에서 개인주의는 화가, 사상가, 후원자, 소유자의 개인주의였고 그들의 행위의 대상인 여성이 사물이나 추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뒤러가 이상적인 누드를 짜 맞추는 행위도 바로 남성을 위한 것이었고 이런 불평등은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심지어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음미하기에 이른다.
현대미술에서 누드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마네의 그림에서와 같이 도전적인 여성의 발견은 누드를 붕괴시킨다. 그러나 과거의 전통은 보존되고 있었고, ‘창부’와 같은 20세기 아방가르드 회화 등을 제외하면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전통이란 폭넓은 종류의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다. 헌데 아직도 여성을 보는 본질적인 방법은 변하지 않았다. 이상적인 감상자는 항상 남성이며 여성은 남성에게 잘 보여야 하는 그런 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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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_ 이미지(Ways of Seeing by John Burger) 번역서와 원서를 참고하여 요약한 글

Ozzyz님의 ‘어떤 분신자살’을 읽고


Ozzyz님이 어디선가 가져온 광화문에서 분신한 그 분의 전단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선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가자! 광화문에 동학혁명 정신으로!

  1.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연구 중단사태 진실규명을 위하여.
  2.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연구 재개를 위하여.
  3. 황우석 박사의 세계적 줄기세포 연구업적 진실조작 및 음해 도적질 음모세력 처단을 위하여.
  4. 나는 위와 같은 사태를 두 눈을 뜨고서는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5. 저 한줌의 무리들을 처단하지 않고 서는 우리들은 물론이고 자녀들의 미래는 없다.
  6. 진실을 조작하고 국민을 기만한 mbc의 매국질을 처단하자.
  7. 친일 매국질 수구어용 나팔수 반민족 반통일 반민주 반개혁 친외세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를 처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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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지 못해 뉴스만 가끔 보면서 내용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6개월 전에 이곳에 왔음) 뭔가 내용이 심각하게 뒤틀려져있다는 느낌이랄까, 상당히 묘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기까지의 진정성을?왈가왈부하는 것은 참 미안스러운 일이지만, 등장하는 정치적인 내용의 어구들이 서로 묶여있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천천히 살펴보면 위의 유서에는 (그나마)진보적이라는 MBC가 조중동과 한 배를 탔고, 줄기세포연구와 더 나아가 황우석이라는 인물 두 부분은 개혁과 진보성, 통일과 반외세의 민주적 요소로 떠올라있다.

나의 한국 정치판을 바라보는 인식이 잘못된 것일까?, 그것도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어찌보면 모든 일에 진보와 수구를 대입시켜야 뭔가 확실히 드러나보인다는 불안함이 내 머리속에서도 꿈틀대니까. 그야말로 Ozzyz님의 말대로 ‘어설픈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것은 나또한 예외가 아니다. 사실 내가 알고있는 여러가지 분야의 각 요소들에 드러나는?’진보’나 ‘수구’란 개념들이 완전히 통하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진보와 수구성을 판단하는 건 어떤 기준에 따라야 할까. 노무현이 ‘진보’일까, 아니면 한나라당이 ‘수구’일까? 그리고 나는 진보적이기 때문에 어떤 ‘진보성’에도 찬성하고 지원해야만 하는 것일까?

짧은 기간이나마 외국에 떨어져서 한국을 보고있어서인지, 혹은 그 6개월이라는 해외체류중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 관해 갑자기 무관심해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속칭 황까, 황빠간의?집단적인 여론몰이는 너무나 위험해보이고 그런 방식으로만 사안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나는 진보적이고 싶지만 진보의 탈을 쓴?집단적 생각몰이는 별로 관심 없다.

책장에 꼽혀있는 얼마안되는 책 중에 수전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이란?책이 있는데,?이런 상황에 약간 들어맞는 구절이 있다.?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그것을 일종의 ‘구경꺼리로 소비’해버리고?말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저반의 특권에 저항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겠다. 어설픈 연민은 해결책이 아니다.

디자인저널 만들기


테크노크라티, 딜리셔스 이 두가지의 신기한 물건을 오가면서 한 일이주를 보낸것같다.?하는 공부와?관련된 검색어들을 찾아보며 분주히 마우스 버튼을 눌러본 결과, 특이한, 아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가 모니터에 덜렁 남고 말았다. 영어권의 Observer(다수의 그라픽디자인 칼럼니스트들이 줄창 써대는 문화비평 블로그)나 Things Magazine(영국 RCA디자인사과정 프로젝트)과 같은 블로그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정보의 공유와 그를 통한 지식의 재생산이 우리나라의 블로그에서는 관찰되지 않고, 딜리셔스나 테크노크라티 대부분의 링크들은 웹디자이너(현업 웹디자이너분들이 아무래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의 링크가 대부분이라는 것. 검색중에 또하나 발견한 것은 디자인+이론+담론… 등과 같은 한글 검색어로 웹 정보들을 긁어보면 태반이 온라인 도서사이트의 책소개 페이지로 연결된다는 거다. 이점은 어찌보면 디자인도서 판매가 잘되는건가.. 하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온라인상에 띄워져있는 특정 정보의 양이 모자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지.?

온라인 정보는 나름의 단점과 장점을 가지고있다. 보관의 방법, 검색의 용이성, 자료의 정확도, 신뢰성과 관련된 수많은 논란들이 있지만,?비교적 온라인 정보교류의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들 중 하나로서?’담론 만들기와 나누기’의 기능을 들 수 있을것같다. 실제로 테크노크라티나 딜리셔스의 경우와 같은 툴들을 통해 그런 역할들은 증폭될 수 있음은 대형사건과 관련된 영어권 블로그의 사례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특히 디자인과 관련된 Observer나 Things Magazine과 같은 영어권 웹사이트들은 이미 딜리셔스나 테크노크라티와 같은 ‘인터넷 기술자’들의 전유물처럼 들리는 고차원적 서비스에 이미 단골 사이트로 수십, 수백명이상의 사용자에게 링크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 정보화에 관한 논의는 어느 분야에서건 서서히 증가되어왔지만 효과적인 도구로서의 의미라기보다는 고차원적인 장난감이나 선전도구로서 받아들여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줄창 선전해왔듯 세계최고품질의 기간통신망과 하드웨어시설을 곳곳에 구비한지 이미 오래이며, (관련분야 종사자로서 확언하건데) 제일 많은 수의 웹디자이너들이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대표적인 디자인 학술저널이 없다는건 불균형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딜리셔스인지 뭔지는 솔직히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다. 디자인과 관련된 사람으로서 무언가 말하려한다면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잘 찾아야만 할거같다는거다. 이미 인터넷은 잡탕밥처럼 뒤섞여가고 있는데, 아직까지 미적거리고만 있는건 정말 위험한 일.?한 공부한다는 학자분들이 학회나 세미나 대신 체신머리없이 인터넷에 뛰어들기를 주저한다면 디자이너들이라도 나설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생각했다.

앞으로 할일에 “인터넷에 디자인저널 만들기”를 포함.

생각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건 생각이 없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