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칼럼] 인문학의 위기?


또 다시 인문학의 위기가 왔다고 한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이 ‘인문학 위기’ 담론은 많은 논점을 생략한 채 자족적으로 선포되는 일이 예사다. 그 누락된 논점들 가운데 몇 개만 엿보자. 우선, 흔히 ‘문사철’(문학 역사학 철학)로 압축되는 인문학은 다른 분과학문들보다 내재적으로 더 가치 있는 학문인가? 6세기 한반도의 세 나라 국경을 획정하는 일이 DNA 분자구조를 해명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다고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테다.

인문학이라는 것의 개념과 경계도 흐릿하다. 손쉽게, 인문학을 인간 자체를 탐색하는 학문이라 정의해보자. 그럴 경우 인간의 DNA 분자구조를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인문학의 일감이다. 그렇다면 다시,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학문이라 정의해보자. 그 경우에도, 철학이나 문학 연구보다는 뇌신경학이나 인공지능 연구 쪽이 인문학의 목표에 더 적합하다.

● 학문의 위기냐, 교수들의 위기냐

소위 자연과학의 인간 탐구 방식은 소위 인문학의 그것과 너무 달라 이를 나란히 견줄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문학자들이 더러 경멸의 눈길을 건네는 경영학은 어떤가? 경영학의 인사관리론이야말로 인간 정신세계에 대한 섬세한 탐색의 결실이다.

인문학은 경영학 같은 응용학문이 아니라 기초학문이라고? 그 경우에, 인문학자들은 제 영역을 사회과학과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 난제에 부딪친다. 이를테면 심리학처럼 인간 존재에 밀착된 기초과학은 인문학인가 사회과학인가? 하나마나한 대답이 있다. 심리학과가 문과대학(인문대학)에 속해 있으면 인문학이고 사회과학대학에 속해 있으면 사회과학이라는.

이 모든 난점을 해결해도, ‘교배’와 ‘해체’의 문제가 남는다. 18세기 한국 경제 연구는 인문학(역사학)의 일감인가 아니면 사회과학(경제학)의 일감인가? 역사학자가 연구하면 인문학이고 경제학자가 연구하면 사회과학인가? 대뜸, 접근 방법이 다르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이를테면, 월러스틴을 빌려와, 경제학자의 18세기 경제 연구는 ‘법칙정립적’ 사회과학이고, 역사학자의 18세기 경제 연구는 ‘개성기술적’ 역사학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둘은 실천 수준에서 늘 뚜렷이 구분되는가? 사학과 교수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개성기술적’이고, 경제학과 교수 이영훈의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후기’는 ‘법칙정립적’인가?

그렇게 또렷이 구분된다는 것 자체가 믿기 어렵지만,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 거론되는 인문학 위기는 인문대학의 위기, 인문대학 교수의 위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 같다.

한국 인문학 수준이 날로 쇠퇴해간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법과대학의 법철학자, 의과대학의 의사학자(醫史學者), 언론학과의 기호학자들은 ‘인문학 위기’를 거론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인문학 위기는 인문대학 지망생들의 감소에 따른 인문대학 교수들의 존재론적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은 서로 모순되는 논거를 동시에 취한다. 학문이 시장원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돈벌이와 관련된 학문만 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와, 인문학이야말로 시장 친화적이라는(인문학이 제대로 돼야 돈이 벌린다는) 명제다. 최근에도 이런 모순되는 말이 한 인문학 교수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논리학은 인문학이 아닌 모양이다.

● 인문학ㆍ대학은 시장을 ‘넘어’ 가라

시장이 인문학에, 정확히는 문과대학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데 한국의 문과대학은 시장보다 나은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에서라면 마땅히 해체됐을 내부의 온갖 봉건적 권력관계와 연줄 문화에 포박돼 있지 않은가? 문과대학을 포함해 한국 대학은 대체로 시장 이전에 있다.

다시 말해 시장에 미달한다. 대학이 시장 너머로 나가려면 우선 시장을 통과해야 한다. 시장은 적어도 자신의 존립 근거인 ‘합리성’으로 대학을 지금보다는 민주화할 수 있다.

고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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