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zzyz님의 ‘어떤 분신자살’을 읽고

Ozzyz님이 어디선가 가져온 광화문에서 분신한 그 분의 전단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선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가자! 광화문에 동학혁명 정신으로!

  1.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연구 중단사태 진실규명을 위하여.
  2.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연구 재개를 위하여.
  3. 황우석 박사의 세계적 줄기세포 연구업적 진실조작 및 음해 도적질 음모세력 처단을 위하여.
  4. 나는 위와 같은 사태를 두 눈을 뜨고서는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5. 저 한줌의 무리들을 처단하지 않고 서는 우리들은 물론이고 자녀들의 미래는 없다.
  6. 진실을 조작하고 국민을 기만한 mbc의 매국질을 처단하자.
  7. 친일 매국질 수구어용 나팔수 반민족 반통일 반민주 반개혁 친외세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를 처단하자.

?

한국에 있지 못해 뉴스만 가끔 보면서 내용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6개월 전에 이곳에 왔음) 뭔가 내용이 심각하게 뒤틀려져있다는 느낌이랄까, 상당히 묘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기까지의 진정성을?왈가왈부하는 것은 참 미안스러운 일이지만, 등장하는 정치적인 내용의 어구들이 서로 묶여있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천천히 살펴보면 위의 유서에는 (그나마)진보적이라는 MBC가 조중동과 한 배를 탔고, 줄기세포연구와 더 나아가 황우석이라는 인물 두 부분은 개혁과 진보성, 통일과 반외세의 민주적 요소로 떠올라있다.

나의 한국 정치판을 바라보는 인식이 잘못된 것일까?, 그것도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어찌보면 모든 일에 진보와 수구를 대입시켜야 뭔가 확실히 드러나보인다는 불안함이 내 머리속에서도 꿈틀대니까. 그야말로 Ozzyz님의 말대로 ‘어설픈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것은 나또한 예외가 아니다. 사실 내가 알고있는 여러가지 분야의 각 요소들에 드러나는?’진보’나 ‘수구’란 개념들이 완전히 통하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진보와 수구성을 판단하는 건 어떤 기준에 따라야 할까. 노무현이 ‘진보’일까, 아니면 한나라당이 ‘수구’일까? 그리고 나는 진보적이기 때문에 어떤 ‘진보성’에도 찬성하고 지원해야만 하는 것일까?

짧은 기간이나마 외국에 떨어져서 한국을 보고있어서인지, 혹은 그 6개월이라는 해외체류중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 관해 갑자기 무관심해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속칭 황까, 황빠간의?집단적인 여론몰이는 너무나 위험해보이고 그런 방식으로만 사안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나는 진보적이고 싶지만 진보의 탈을 쓴?집단적 생각몰이는 별로 관심 없다.

책장에 꼽혀있는 얼마안되는 책 중에 수전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이란?책이 있는데,?이런 상황에 약간 들어맞는 구절이 있다.?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그것을 일종의 ‘구경꺼리로 소비’해버리고?말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저반의 특권에 저항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겠다. 어설픈 연민은 해결책이 아니다.

황우석박사, 한류, 몰아치기

걸리적 거리던 몇가지를 꼽아보자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별 이유없는 몰아치기가 참 많다는거다. 광기? 라고 할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는 그 도덕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나라 사람들도 과학연구를 참 잘들 하는구나..’싶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거야 어떤 국적을 가지고 한반도에 살던 사람으로서 처음 생각한 동물적인 것이었다. 이후 논쟁이 벌어졌던 윤리적 문제점들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만큼이나 당장 막막할 환자들의 의견도 쉽게 무시할 내용은 아닌 듯 싶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들 하는 그 몰아주기의 결과란 어떤 것일까. 언론과 정부까지 나서서 그 연구를 무한정 지원하기 시작했을 때는 역시나 또…. 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었다. 과학자의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나 그 연구성과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이나 이미 정해진 규칙과 공간에서 이뤄져야 한다. 누구 한 사람이 잘한다고 그때마다 ‘특별한’사례들을 만들어낸다면 한 나라의 조직과 정책은 부서질 수 밖에 없을거다. 그 황우석 박사만큼이나 같은 처지에 있을 수많은 과학자들은 ‘젠장 나는 딸리니까 접어야겠다.’라며 손가락이나 빨라는 것이니까.

이제 뉴스마다 황우석박사의 윤리적 문제를 논하는 분위기가 한창이지만, 더욱 문제는 이미 황우석박사의 연구는 보편적인 방법에 의해 논의되어지고 합의되어질 수 있는 수위를 넘어가버린 걸로 보인다는거다. 순식간에 띄워진 한사람의 과학자를 또한번의 깎아내리기로 무참하게 사살하는 걸 보는 건 참 우울한 일이 될 것 같다. 만약 황우석박사의 사례가 우울하게 마무리되었을 때, 그제서야 “과학자를 다 그렇게 보지 말자!”고 한들 누가 그걸 들어줄까…

한류라는 단어를 볼때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연예인도 아니도 일반적으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주류 예술에 가까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나라의 ‘문화’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뜨고 지고 할 수 있다고 과연 정부는, 언론은 생각하는 건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미국의 스크린쿼터 압박에는 당연한 반기를 들면서도 주변국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복종을 당연시하는, 그런 이기적 ‘문화 선진화’는 정말 허깨비같은거다.

문화에 ‘선진화 : 후진화’란 것이 말이 되는건가. 그 다른 차이를 찾고 즐기는 것이 ‘문화’란 것, ‘문화적’인 것 아니었나. 우월성을 따져서 1등 문화 되면 그걸로 뭘 할런지 모를 일이다. 문화적 혜택이란 건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동차가 주는 즐거움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와 함께 잘 섞일 때 그 중에서 우리의 문화적 독특함도 공평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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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 뉴스

美 새튼 박사, 황우석 박사와 결별

[연합뉴스 2005-11-13 00:57]

(워싱턴=연합뉴스) 박노황 특파원=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줄기세포 연구자이자 황우석 박사와 1년여 동안 호흡을 맞춰온 피츠버그 대학의 제럴드 새튼 박사가 연구에 사용된 난자 취득 과정의 윤리적 문제를 들어 황 박사가 추진중인 세계 줄기세포 허브 설립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12일 보도했다.

시각과_현대성_발제문

시각과 현대성 _ 주은우 #
3장 원근법과 현대성의 사회적 조건 20040418 수유+너머 _ 시각성 세미나 _ ‘시각과 현대성’ | 최 윤 호

3. 원근법과 권력의 응시

원근법은 초월적인 시각적 주체를 포함하며 이것은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탈육화된 주체를 의미한다. 원근법적 시각양식에서의 주체는 개인의 주체성으로서의 측면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개인을 초월적인 주체에 종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p323) 이 ‘종속으로서의 주체화’를 바로 원근법이 시각의 장에서 수행하는 것인데, 개별주체는 큰 타자의 응시의 위치에서 그 큰 타자의 시각으로 관찰하게 된다. 현대성의 주체가 텅 빈 형식일 때, 사회적 담론들은 그것을 채우게 되며, 푸코는 그것을 권력이 작동하는 통로로 보았고 라캉은 에고 형성을 위한 이미지의 제공통로로 생각했다. 하여간 그 둘 모두의 경우에서, 현대성의 시각 체제는 권력 체제이며 개별 주체의 시각은 큰 타자의 응시를 통해 권력의 시각에 종속됨으로써 구성된다. 17세기 이후의 절대 군주제에서 우리는 이런 권력의 응시가 작동하는 모습, 즉 원근법과 권력의 관계를 그 시대의 시각양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 군주권력의 응시

(1) <시녀들 _ Las meninas (Diego Velázquez, 1656, Prado, Madrid)> : 재현과 응시

푸코는 17세기 고전주의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시녀들’은 ‘고전주의 재현에 대한 재현’인데 그것은 그림에서 나타나듯 재현 자체를 묘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재현의 과정들은 생략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녀들’은 고전주의적 재현의 틀 안에서는 재현행위의 재현이 불가능함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_-;;

http://ssall.com/MT/archives/velazquez.meninas _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이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은 거울 속에 스펙터클로서 위치하는 왕과 왕비이다. 그림 속에서 왕과 왕비, 관람자인 나, 그리고 화가의 응시가 서로 수렴되는데, 실상 왕과 왕비는 그림 속에서 실체로서 등장하지 않으며, 그 숨겨진 거울 속의 응시는 관람자인 나의 응시와 같게 되는 것이고 ‘주권적인 중심’이다. 푸코는 이 중심이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라고 다루고 있다. 왕과 왕비가 관념적임과 동시에 실재하는 이 점에서 관람자는 재현과 연결되고, 연계성은 관람자 자신이 아닌 그림 내부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그림은 그림의 구성 자체에서 연역되며 구체적인 관람자 개인에게 준거하지 않는다는 원근법의 원리도 확인된다.

이 그림에서 주체는 생략되어있다. 시녀들의 작가로서의 주체, 관람자 자신의 주체, 돌아선 캔버스의 등장인물로서의 주체는 그림에서 드러나지 않는데, 이 생략을 푸코는 재현의 순수성과 투명성의 획득을 위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설은 화행이론의 관점에서 그의 입장을 비판했는데, 모든 회화적 명제가 가진 “나는 본다.”는 함축적 능동형이 그 비판이다. 즉 왕과 왕비가 이미 위치해버린 그곳에서 작가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인데, 벨라스케스가 군주의 시점에서 그림을 그리면서도 뒤돌아선 캔버스 뒤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실체로 드러나는 역설을 말한 것이다. 이후의 광학적 분석과 슈나이더와 코헨의 반박에서는 그 거울 속의 환영이 뒤돌아선 캔버스의 인물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나 그러한 논쟁은 ‘원근법의 구성이 그림 바깥의 실제적인 관람자의 시점에 준거한다.’는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벨라스케스는 이런 원근체계의 선입견을 역이용하고 있으며 그림에서 드러나는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이 그 함정?을 가려준다. 결론적으로 ‘시녀들’의 구도는 재현이 기하학적 조직화와 상상적 구조간의 계산된 불일치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푸코는 문과 거울의 경쟁을 지적하고 있으며 위에서 말한 불일치의 구성을 정확히 인식하고있다. 주체는 왕의 위치인 그림 외부의 중심점에서 등장하는데 그것은 권력의 시점이기도 하며 17세기의 현대성의 시각은 바로 이 권력의 시각이다.

벨라스케스는 사실보다 어둡게 그림 속에 자신을 등장시킴으로써 궁정사회의 위계와 조직화를 묘사했으며 왕이 원하는 왕 스스로의 모습을 표현했다. 왕은 드러나지 않은 채 응시를 유지하는데 이로써 권력의 응시는 더욱 강력해진다.

(2) 스펙터클과 감시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군주의 권력을 가시성의 권력으로 이해하였고, 군주의 권력이 현시되는 처형장이나 프랑스 혁명 후의 길로틴과 같은 스펙터클 속에 잔존하였다. 그러나 군주의 권력을 가시성 하나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앞의 그림에서도 드러나듯 권력의 응시는 근본적으로 비가시성의 영역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의 권력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결합, 즉 이미지 및 스펙터클의 동원과 응시 및 감시의 결합을 통해서 행사되는 것이다.

17세기 유럽의 군주제 국가들은 다양한 스펙터클들을 동원하는데, 프랑스의 궁정정원 _ 정형정원에서 드러나는 정치적인 예술형식의 이용이 대표적인 예이다. 극도로 정리된 방사형의 가로구조에서 우리는 군주의 시점과 통제를 확인한다. 가시성의 영역에 배치된 광기를 그 바깥에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고전주의 시대의 이성의 눈, 바로 이것이 현대성의 시각이며 ‘시녀들’에서의 권력의 응시와도 같다. 그러므로 스펙터클은 감시와 분리되지 않으며 가시영역의 스펙터클은 비가시적 영역의 권력의 응시에 의해 조직된다. 17세기부터는 거리에 공공적인 조명등이 설치되는데, 그 불빛은 가시성을 부과하고 감시를 행사하는 수단이었다. 대혁명을 비롯한 19세기까지의 혁명들에서 거리의 등이 1차적인 파괴의 대상이 된 것도 그런 이유이다.

2) 부르주아 감시권력의 응시

부르주아의 시대에서 감시의 권력은 그물망을 펼친 것과 같이 보편화된다. 예전의 스펙터클과 같은 것을 넘어서 개별적인 인간들의 신체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http://ssall.com/MT/archives/panopticon.gif

1791년 제레미벤담이 제안한 판옵티콘은 구조적으로 원형의 개별적인 방과 그 중심의 감시자를 두고 있다. 완전한 개인화와 편리한 감시, 특별히 감시되는 수감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 감시되고 있음’을 느낄 때 그것은 상당히 경제적이다. 모든 다양한 기능들이 모두 이러한 감시를 위한 것이며 이곳에서도 역시나 관찰자인 간수는 중앙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벤담은 이러한 도식을 사회전체로 확산하려 몽상했는데 이것을 푸코는 훈육적 사회의 형성이라고 규정했다. 나중에 언급되지만, 심지어 벤담은 공중개방의 방법으로 이런 통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 판옵티콘에서의 권력의 응시는 원근법적인 기하구조에 기초하며, 계몽주의에 기초한다. 벤담은 루소의 꿈에서의 개개의 완벽한 소통을 통한 투명한 사회에 더해 지배적인 응시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상태를 조직했던 것이고 그것은 즉 권력의 행사라는 것이었다. 판옵티콘에서 체화된 권력의 시선은 원근법적인 시각공간에서 작동하며 그 가시성의 배치는 ‘시녀들’에서의 절대군주의 시선 및 가시성의 배치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그림에서 군주가 자신의 흔적을 거울에 남겼다면, 판옵티콘에서의 응시에서는 그것마저 사라지고 그 비인격성이 전면화되어있다.

판옵티콘에서 수감자는 중앙의 감시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자신을 봄으로써 훈육된 주체, 길들여진 신체, ‘정신예방적인 주체‘가 된다. 한편 주체는 자신의 에고 역시 필요한데 ’시녀들‘에서 거울에 반영된 군주의 이미지가 그것이며 19세기 이후에 부르주아 체제가 스펙터클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판옵티콘에서는 그런 대칭적인 응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판옵티콘은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설득하는 학교로서 고안되기도 했는데, 그런 점에서 ‘감시의 옆에서는 그것과 나란히 상징적인 의미의 스펙터클이 계몽의 이름으로 ….’라는 말도 설명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위의 논의를 통해 이성은 감시, 현대성의 시각은 곧 권력의 시각이었다고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그 권력의 응시는 원근법적인 기하공간의 구도 속에 자리를 잡고 가시성의 배치를 조직하는 중심축으로서 기능했으며, 그것은 시각의 문제를 사회 정치적인 문제와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시각적 권력은 교묘하다.

* Author / Gathered from : 최윤호

관찰자의 기술

4. 관찰자의 기술 _ 최윤호 발제 (수유연구실 예술세미나 자료)

19세기 초의 괴테에 이르러 잔상과 같은 주관적 시각현상은 과거의 소외된 위치에서 벗어나 광학적 진리의 위치를 획득한다. 이런 ‘주관적 현상에 일치하는 새로운 객관성’이 갖는 의미는 아래와 같다.

# 잔상의 특권화로 인하여, 인간은 감각적 지각을 외부지시체와 어떤 필연적인 연계가 단절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의 감각의 출현, 잔상과 그것이 수반하는 변조는 주체에 의해서 생산되고, 주체 안에서 생산된 자발적인 시각의 이론적이고 경험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 시간성이 관찰의 구성요소가 되다.”’

그 당시, 시간 속에서 경험한 자기 자신의 주관성이 전환되는 과정은 ‘보는 행위’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는 대상에 완전한 초점을 두고 있는, 관찰자에 대한 데카르트적 이상을 해체시켜갔다. 잔상과 주관적 시각의 시간성의 문제는 19세기에 큰 인식론적 이슈가 되었다.

# 셀링(Schelling)의 ‘일시적 중첩에 기초한 시각’의 묘사 : … 단편적인 방식으로 조각조각 생산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 스스로 완성하기 위해서 각각의 사물은 특정 순간들을 통과해 간다. – 서로를 따라가는 과정들의 계열이, 뒤의 것들이 언제나 앞의 것을 포함하며 각각의 사물들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 헤겔 : 로크적 지각을 거부하고 일시적이고 역사적인 펼쳐짐 안에 지각을 전개. “진실은 조폐국에서 틀에 맞춰 발행되는 동전과 같지 않으며 … ” 감각지각의 명백한 확실성을 공격.
# 괴테 : “일종의 대립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눈은 극단과 극단을, 중간적인 것과 중간적인 것을 대조시키는 속에서 이런 대립적인 인상들을 조합한다. 인상이 연속적이건 동시적이건 전체를 구성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이룬다.”

로크와 꽁디악이 관찰을 감각들의 연속체로 이해했다면 괴테와 헤겔은 관찰을 힘과 관계들의 상호작용이라고 보았다. p154 당시의 다른 작가들은 지각을 연속적 과정, 일시적으로 퍼져있는 내용들의 흐름으로 묘사했다. 앙페르 : “연속적인 차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결과”

허바트(Johann Friedrich Herbart)는 정신적 경험을 지배하는 수학법칙을 공식화함으로써 “자극-반응 심리학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었다. 칸트가 경험을 종합하고 배열하는 정신의 수용능력을 고려했다면, 그는 주체의 내적 비일관성과 탈조직화에 대한 경계를 드러냈다. 그에게 있어 의식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무질서한 흐름으로부터 시작한다. 관념들은 이전이나 동시에 발생한 관념들 또는 ‘현시’와 융합되고 희석되며 뒤섞인다. 그는 관념들의 충돌과 융합의 과정에서 진실을 추출해낸다. 이런 지각을 수학화, 계량화하려는 복잡한 시도는 이후의 수량적 감각 연구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으며 한편으로 그의 작업은 훈육적, 도덕적인 관념의 주입과 관련한 그의 교육학적 이론과도 결부되어있었다.

1820년대까지 유럽 전역에서는 잔상에 대한 계량적 연구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독일의 푸르기니에는 잔상의 지속과 변조에 관한 괴테의 연구를 이어가게 되는데, 그의 연구는 잔상의 지속시간과 조건에 따른 변화와 관련한 것이었다. 다음세대의 연구자들은 푸르기니에의 경험적 연구와 허바트의 수학적 방법을 병행할 것이었다. p158,159그림 푸르기니에는 최초로 잔상의 상이한 형태를 구분했는데 그의 그림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이 역설적으로 객관적인 것임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연구는 17-8세기의 굴절계의 투명성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유효성과 적합성이라는 다양한 영역을 가진 생산적 영토로서 눈을 재배치했다.

1820년대 중반부터는 그동안의 경험적인 잔상연구의 결과로 수많은 광학기구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초기에 그것은 과학적 관찰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곧 대중의 오락물이 되었다. 그런 기구와 기술들은 지각이 순간적이지 않다는 개념과 대상 사이가 분리되었다는 개념을 사용했는데, 잔상연구는 감각이 혼합되거나 융합되는, 그런 ‘보는 행위와 얽힌 지속성’을 통해 지각의 변조와 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p161,162그림 회전판(thaumatrope, 1825 John Paris) _ “… 1/8초 동안 잔상이 지속된다. …” 이런 “철학적 장난감”의 단순함은 이미지의 직조되고 환각적인 본성과 지각과 그 대상 사이의 단절 모두를 명확하게 해주었다.

로제트(1825)와 물리학자 패러데이(Michel Faraday)는 회전하는 바퀴의 착시현상을 연구했으며 1820년대 후반에 벨기에의 플라토(Joseph Plateau)도 잔상의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매우 유력한 “시각의 잔존” 이론을 만들었다. p166 1830년대 초 그는 페니키스티코프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제트와 페러데이 등의 연구와 그의 연구를 통합한 것이었다. p164,166그림 이후의 쉬탐페의 스트로보스코프아래그림와 호너의 주트로프도 유사하다.

이런 장비의 영화사적 맥락에서의 접근은 각각의 장치가 가진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특이성들을 무시한다. 시각의 잔존이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설명력을 갖고 작동하는 조건과 환경들, 그리고 그것이 가정한 역사적 주체/관찰자이다. p169 모든 연구들에서 조사의 대상은 관찰자 자신의 자기-관찰과, 생활에서의 경험들이었다.

페니키스티스코프는 19세기에 “기술이 복잡한 훈련들로 인간의 감각중추를 지배해왔다.”는 벤야민의 주장을 구체화시킨다. 이 도구가 관찰자에게 요구한 물리적 위치는 ‘즉시 구경꾼이 되어버리는 개별적 육체’, ‘경험적 연구와 관찰의 주체’, ‘기계 생산의 한 요소’라는 세 가지의 혼재였다. 이점이 스펙터클과 감시가 대립하는 푸코의 주장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이다. p171 19세기 관찰자의 생산은 규율과 규제의 새로운 절차와 일치했다.

# 디오라마 : 움직이지 않는 관찰자를 기계 속에 통합. 자발성 제거 p172,173

1815년 브루스터경이 발명한 만화경은 페니키스티스코프의 훈육적인 구조와는 급진적으로 달라보였는데 그것은 보들레르에게는 근대성 그 자체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의식을 부여받은 만화경”이 되는 것은 “보편적인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목표였다. 한편 맑스와 엥겔스에게 만화경에서의 다중성은 거울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사진술을 제외하면 19세기 시각이미지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입체경이었는데 그것은 공간이 천부적인 것인지에 관한 당시의 공간지각 논쟁과 관련이 깊다. 1830년대에 과학자들은 보는 육체를 양안적이라고 규정하고 두 시각축의 각도상의 차이를 양화했으며 생리학적 근거를 설명했다. 특별히 1833년에 휘트스톤은 ‘근접한 대상’에 있어서의 시각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의 이론에 의하면 지각경험은 본질적으로 ‘두 눈의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브루스터도 그런 차이에 대해서 ‘그건 마술과 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라고 확신했다. p183@ 휘트스톤은 입체경을 통해 회화와 같은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물리적 물체의 존재를 ‘흉내’내려고 했다. 그는 이미지와 대상의 완전한 등치를 추구했고, 그런 면에서 디오라마에서 이용된 회화의 기술들과 달리 입체경의 ‘가까운 대상’이 더 생생하다고 생각했다. ‘만질 수 있는..’ 19세기의 어떠한 재현의 형태들도 실제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을 그만큼 융합시키지 못했다.

입체경의 조사

이미지 안의 두 시각축이 수렴하는 각도에서 중요한 변화를 요구하는 지점들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물체로 가득 찬 공간이어야 하고 당시의 부르주아들이 가졌던 비어있음에 대한 공포와도 연관된다. p178그림 이런 이미지에서의 깊이는 사진이나 회화에서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입체경에서의 이미지를 조직하는 것은 ‘평면’이다. 물체들 사이의 공간은 점진적인 후퇴가 아니며 형태는 불확실하게 분리되는데 이것은 고전적인 무대 디자인과도 유사하다.
입체경은 근본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모여 있기만 한 장(場)을 드러낸다. 우리 눈은 3차원 전 영역을 완전히 파악하기보다는 분리된 지역에 대한 국지경험으로서 인식한다. 19세기 회화의 범위는 집단들과 평면들 간의 비일관성에 주목했는데, 입체경과 회화에서는 동일하게, 새로이 구축된 시각공간의 출현과 광범위한 관찰자의 변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p191

재현의 수단으로서 입체경은 ‘외설적’이다. 그것은 카옵의 극장적인 배치에서의 무대장치 같은 관계, 즉 눈과 이미지와의 거리를 파괴했고, 벤야민이 ‘근대성의 시각문화’에서의 핵심으로 보았던 것의 완성이었다.

1838년 휘트스톤의 문제는 ‘물체 그 자체’와 평평한 표면에 투사되는 ‘그것’에 관한 것이었다. 입체경을 통해 보는 것은 이미 재생산된 조각난 세상을 두 개의 비정체적인 모델이며 기계적인 재구축을 통한 것이었다. p193 탈중심화된 관찰자와 입체경의 분산-중복된 기호들의 제도화는 수세기동안 관찰자와 대상에 상호 부여되었던 ‘조망점’의 근절을 뜻한다. p193그림 ‘바르뜨의 준거적 환영??’p194

입체경은 육체적 ‘근접성’과 ‘부동성’을 요구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눈과 시각기구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환유’가 된다. 둘은 동일한 활동 평면에 있는 인접한 장치였다. p195 시각장치는 맑스의 ‘도구’와 같은 변화를 겪는다. “적절한 도구가 인간에 의해 채택되는 순간, ….기계는 단순한 도구들을 대체한다.” p197 도구는 인간주체의 타고난 힘과 환유적인 관계였다. 19세기의 도구주의는 “인간의 본성은 도구가 되는 것, 그의 소명은 그의 지위에 의해 설정되고 일하기 위해 배치된다는 은연중의 가정”에 기초한다. p198

1830, 1840년대의 광학기구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들이 수반하는 억압의 형태와 작동구조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광학적인 경험은 기구 안의 이미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페나키스티스코프나 입체경들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발명과 개선과정의 일부로서가 아니었으며, 그 초기의 형태들이 당대의 욕구와 용도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라짐의 이유 중 하나로 ‘요술환등기’를 들 수 있는데, 그것과 달리 입체경에서는 그 생산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산이 엄폐되지 않는’ 입체경은 기구의 물리적 성질에 의존했다. 그 허상은 더욱 완전한 보전을 하는 형태에 자리를 내어준다. 카옵에서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직 사실적이라는 허구를 재생산하고 지속하게 했다. 사진은 자연스러운 그림코드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여겨졌는데, 사진은 좁은 범위의 기술적 가능성에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카옵에서의 관찰자와의 관계성을 이미 없애고 단일한 것이 되었으며 새로운 카메라를 관찰자와는 기본적으로 독립된 별개로 취급했다. 그러나 카메라는 자신을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비물질로 가장하고 있었다.

스펙터클의 앞선 역사, 그리고 모더니즘의 순수지각은 새롭게 발견된, 완전히 드러난 관찰자의 영역에 위치한다. 그러나 양자의 최종적 승리는 시각의 바탕으로서의 ‘육체의 부정’과 그 맥동 및 환영에 의존하고 있다.

* 관찰자의_기술을 요약함.

‘우정의 교육’과 ‘유목적 지식’을 위한 에세이

상당히 신기하고도 대단한 연구집단의 소개글입니다.
조금은 길지만 읽어들 보세요..
특히 대학원 진학자나 유학 고려중인 사람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련이 남는 사람들..은 더더욱..

‘우정의 교육’과 ‘유목적 지식’을 위한 에세이

고 미 숙

‘죽거나 나쁘거나’

하나의 괴담이 대학가를 배회하고 있다. ‘대학은 죽었다!’ 혹은 ‘인문학은 지금 벼랑끝에 서 있다.’는 스토리로 구성된. 90년대 후반부터 유포되기 시작한 이 공포물은 세기를 훌쩍 넘어 이제는 공공연하고도 범국가적(?)으로 산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대학이 언젠들 전환기 아닌 시절, 위기 아닌 국면이 있었을까마는, 그래도 지금 떠도는 기류엔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수반되고 있는 바 틀림없다. 무엇보다, 그 음산한 기운이 저 아득한 허공 속에서가 아니라, 대학과 대학 주변의 좁은 틈새를 가로질러 점차 그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긴 이런 사태야 진즉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근대, 근대성 전반에 대한 발본적인 물음들이 제방의 둑 터지듯 사방에서 쏟아졌던바, 근대성의 이념적 파수꾼 역할을 했던 대학 혹은 인문학이 더 이상 무풍지대에 남아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했던 것이다. 공교육 전반, 아니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견고한 대지가 흔들리는 마당에 대학이 마냥 평온하다면 차라리 그게 더 문제적인 게 아닐까?
어쨋든 풍문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당도했고, 당분간 이 회오리는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 숱한 위기의 담론들,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들이 분주하게 제출되는 것도 그 여파의 하나일 터이다. 그런데 근래의 담론들을 훝어보면, 대개 변화를 강요하는 현실을 탓하는 한편, 변화의 당위를 소리높여 외치는 이율배반을 취하면서, ‘세계화’니 ‘이성의 합리적 보편성’ 혹은 ‘인성교육’이니 하니 닳을 대로 닳은 구호를 고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의 구태는 그렇다치고, 이런 패턴에서는 어떠한 실천적 구상도 도출되기 어렵다. 그저, 추상적인 원칙을 둘러싼 지리한 탁상공론만을 반복할 뿐.
문제는 현장이다. 교육이든 지식이든 ‘지금, 여기’의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공허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정책이 어떻게 되든, 교육개혁이 어떻게 되든, 우선은 현장이 살아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교육이란 제도나 정책 이전에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고, 어떤 경로로 전수되는가 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 제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다고 해서 현장의 생동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언제 어디서든 상황과 배치를 변환하기 위한 싸움은 늘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팽팽한 긴장을 기꺼이 견디려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낡은 허상상에 사로잡혀 점점 더 고립되어 자기소멸해 가거나, 아니면 미봉적인 포장으로 근근히 연명하거나. 요컨대, ‘죽거나 나쁘거나’.

잘못된 전제 몇 가지

어떤 담론이든 그것이 생산적인 대화로 이어지려면, 문제를 극한까지 몰고갈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교육담론이 피상적인 수위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기저에 깔린 오도된 전제들을 묵인하면서 그저 표층에 떠오른 사안들만을 가지고 좌충우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의를 좀더 박진감있게 유도하기 위해서는, 때론 무의식적으로 간과되고, 때론 의도적으로 회피되는 심층의 전제들을 표면으로 부상시켜야 한다. 이런 작업은 무엇보다 추상적 구호로 착색된 담론을 그 외부, 곧 현장적 실천과 접목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1.
잘못된 전제, 그 첫 번째는 인문과학 내지 대학교육을 하나의 자명한 진리, 고정된 실체로 설정하는 점이다. 즉, 대학의 인문학은 인간의 본연적 가치를 다루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고유한 실체성을 지닌 것인 까닭에 이것을 뒤흔드는 사회현실은 그 자체로 부당한 것이라는 식의 사유체계가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 그 자체의 위기와 등치’될 수도 있다는 논리적 비약도 가능해진다. 신자유주의 내지 시장전체주의에의 포획이라는 정치경제학적 분석(혹은 분노?)이 이런 논법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아마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입장에 관계없이 대체로 이런 전제에 공감을 표명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처럼 신성하고도 고정된 실체 따위는 없다, 애시당초! 잘 알고 있듯이, 대학은 다른 공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봉건적 신민을 근대적 국민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근대기획의 일부였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그것이 표방한 인문주의나 기초학문, 교양지식 등의 명분은 근대성의 제가치들을 체계적으로 훈육하고 내면화시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시대적 배치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화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다른 한편, 기원의 문제는 그렇다치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과연 대학이 인문적 지식을 통해 능동적 가치를 생산한 적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지적 힘은 언제나 대학 외부에서 형성되었지, 대학이 자발적으로 변화를 주도한 적은 거의 없다. 어찌보면 대학교육의 주류는 ‘국수적 아집’이나 ‘서구추종’의 두 축 사이를 왕복달리기한 것이 전부였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마 대학이 사회변혁을 주도한 시기라면 80년대일 터인데, 그때도 이념적 활력이나 지적 에너지는 대학교육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이질적인 선분들이 교차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때는 마르크스주의가 대학을 좀먹는다고 분노를 터뜨리더니, 마르크스주의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에는 다시 신자유주의가 대학을 말아먹는다고 외쳐대는 것은 좀 몰염치한 것 아닌가. 이런 식의 논법에 전제되고 있는 인문학이나 대학교육이라는 실체는 늘상 시대변화에 관계없이 발목을 붙들어매는 기능을 할 뿐, 그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이것들은 구체적인 실천에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 변화를 강요하는 외부의 힘에 대해 도덕적 우월감을 보장해주는 ‘네가티브’한 역할만을 담당한다. 마치 패배와 모멸 속에서도 늘 정신적인 승리만으로 자족하는 노신의 ‘아큐’처럼.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 안에 고질적인 이분법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기초학문 내지 인문교양을 강조하는 사고의 기저에는 흔히 교양과 전문지식,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분과를 날카롭게 절단하는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 사실 인문학 분과가 흔들린다고 인간적 가치를 다루는 교양지식이 모조리 실종된다면, 과학분과는 아예 인간적 가치라든가 교양적 지식과는 무관한 ‘기술지’에 불과하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반인문적 사고가 아닐지. 현재 대학의 인문분과는 그저 여러 분과학문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인문분과와 과학은 긴밀히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것이다. 그간 이공분과가 그 점을 아예 도외시한 것도 문제지만, 인문분야가 그 점을 온통 떠맡은 듯이 나서는 것 또한 근대교육의 불구적 이분법을 그대로 묵수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음모나 시장경제의 악마성을 폭로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낡은 틀을 답습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궤적 혹은 운동보다 한발 더 앞서서 지식과 교육의 배치를 바꾸려는 과감한 시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이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로운 방편이 아닐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심정으로.

2.
잘못된 전제, 그 두 번째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다.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처음에는 인문학과 인성의 위기에 대한 한탄으로 시작하여 세부각론에 들어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면, 연구지원비의 확보 및 그를 둘러싼 공정한 분배에 관한 언급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대학에서는 연구지원비의 확보가 주요이슈로 ‘뜨고’ 있다. 연구지원비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이 일년의 주활동인 교수도 적지 않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각 대학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흘러들어가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연구의 생산성은 대폭 증가해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왜 이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항상 프로젝트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의 성과가 나름대로 수치화될 수 있는 이공계통과 달리, 인문과학분야는 뚜렷한 계수가 눈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수치가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항이나 실행방식은 잘 모른다. 하지만, 답은 늘 현장에 있는 법. 나의 견문으로는 연구지원비와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인문학 분야의 지적 에너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 대학원생들은 입학하자마자 지도교수 내지 능력있는 교수밑에서 이런 저런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것이 이즈음 대학원의 풍경이다. 수업이나 세미나는 뒷전이다. 물론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도 연구의 주요한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추동되지 않으면 그 자체는 한갖 소외된 ‘사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무리 전산화작업이 맹렬하게 이루어진들 그것이 새로운 지식생산으로 이어질 리 만무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문과학에는 논쟁이 사라졌다. 논쟁의 실종! 이보다 더 지적 황폐함을 증언하는 것이 있을까?
게다가 연구지원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업적이 특출나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수많은 학회들이 난립하고 있다. 온갖 장르, 전공별 지역별 학술대회가 족출하고, 저마다 전국적인 학회지를 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야만 연구지원비를 받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방법론적 모색이나 지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사를 위한 행사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열리고, 그래서 다시 학회는 더욱 황폐화되는 악순환이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사 및 학회지 출판에 필요한 갖가지 노동력은 주로 대학원생들 내지 전문연구자들이 무상으로(!) 헌납해야만 한다. 이건 정말이지, 80년대와 비교해도 퇴행적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수업할 시절에는 각종 세미나와 소그룹 스터디가 많아서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기타 번사를 줄이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번다한 일들 때문에 지적인 능력과 욕망을 억압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니, 오, 그 고달픔을 누가 짐작이나 할까!
내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는 주로 대학원에 몸담고 있거나 박사학위를 소지했지만 아직 대학에 진입하지 않은 전문연구자들 약 60명이 함께 하는 곳이다. 전공은 국문학과 사회학이 주류지만 기타 인문과학에 해당되는 대부분의 전공자가 두루 드나든다. 물론 출신대학도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이 다양한 종류의 지식인군상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 근본동기를 따져보면 현재 대학의 얼굴이 그대로 거울에 비쳐진다. 즉, 이들은 무엇보다 지적 욕구를 대학 안에서 전혀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전문지식인이 되고자 할 때 가장 근저에 있는 것은 앎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다. 그런데 그 초발심은 대학원에 들어서는 순간, 단번에 사라지고 만다.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정체불명의 커리들, 권태롭기 그지없는 강의현장, 그리고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한 끝도 없이 부과되는 학문외적 노동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연구실에 다양한 성격의 지식인들이 교차할 수 있는 힘은 대학의 황폐함 혹은 지적 무능력에 있는 셈이다. 결국 연구지원비의 확보가 주요관건이 되고, 다시 그것을 위해 메마르기 그지없는 논문을 양산하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지도학생들을 무상으로 착취하는, 이 지독한 악순환의 ‘먹이사슬’을 끊어내지 않는 한, 대학교육은 정말, 희망이 없다.

3.
학부제, 교수임용비리, 강사처우문제, 학벌주의 등. 대학교육을 이슈로 다룰 때면 늘상 열거되는 품목들이다. 강사제도나 학연,지연이 얽히고 섥힌 임용비리는 이미 고질적인 병폐가 된 지 오래고, 또 그것은 교육담당자들 모두의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당장에 해결될 전망도 없다. 뿌리뽑힐 때까지 기다리다간 ‘백년하청’일뿐더러, 어차피 번뇌 속에서 청정심이 피어나는 것이 ‘고금의 이치’일진대, 그런 제도적 비리와 싸우기 위해서도 능동적인 지식생산 외에 더 유효한 길은 없을 듯하다.
다른 한편, 학부제 시행은 앞의 사안들과는 분명 층위를 달리한다. 이 제도는 수요자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세계적 추세와 함께 분과로 쪼개진 학과체제로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창발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지식이 생산되기 어려우리라는 거시적 비전과 맞물려 있는 까닭이다. 이런 흐름이 크게 수정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제도는 시간차가 있긴 하겠으되, 결국은 전면적으로 시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학부제에 대한 기성학계의 입장은 대체로 성급한 시행의 오류, 그리고 기초학문의 파괴, 전공의 불균형 등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대응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이 제도가 교육을 상업주의로 몰고 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늘 그 이면에 수반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사안은 시행방식의 오류나 자본과 교육의 긴밀한 유착 이전에 교육과 지식의 구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내장하고 있다.
현재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설정한 전공분야, 그리고 커리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예컨대, 국문학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분화된다. 이것은 지식인을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전공과목을 설정하는 가장 일차적인 기준으로 기능한다. 언뜻 보아도 이런 분화는 시기적으로도 균형이 어그러졌을 뿐 아니라, 고전문학으로부터는 현대적 호흡을 박탈하고, 현대문학에는 고전적 깊이를 부재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재생산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구분법이 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시대나 신라시대로 가면 전공자가 거의 드물다. 지금 한국사 연구의 주류적 분야가 대개 조선시대나 식민지시대이고, 지도교수의 전공분야에 맞춰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구획선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전공 내에서도 정황이 이러한데, 하물며 국문학과 역사학, 철학 등 커다란 분야간에는 말이 인문학이지 지적 소통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기학과에 편중되어 전공간 균형이 깨어질 것이라는 한탄도 무색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인문학의 지적 불균형은 심각한 실정이고, 학부제 시행과 무관하게 이 문제는 앞으로도 해결의 전망이 요원하다. 그리고 어차피 전문연구는 대학원에서 주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학부교육에서 기초학문의 파괴 운운 하면서 분과체계를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현장적 설득력이 거의 없는 셈이다.
따라서 지금 절실하게 요청되는 작업은 고립되고 폐쇄된 분과의 벽을 넘어 지식이 자유롭게 흘러다닐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위적으로 학제간 연구를 조작할 것도 없이 다종다기한 테마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고, 그것들은 기초학문과 전문지식 사이의 벽도 넘어 수요자들에게 풍부한 지적 선택의 장을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학부제에 찬성하든, 아니면 그것에 전면 반발하든, 아무도 이러한 실천의 책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일단 지적 폐쇄성을 벗어던지만 하면, 수많은 테마들이 가능하다. 고전문학과 영화, 페미니즘으로 한시읽기, 문체반정과 새로운 글쓰기, 연암 박지원과 이탁오, 노신과 신채호 등등.
이런 식의 생성과 변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학생들은 외국어나 경영학 등 실용적인 방면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아무런 지적 촉발도 없는 기초학문을 듣느니 그나마 현실에 유용한 것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여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닌가. 100년 전 근대가 물밀 듯이 밀려올 때, 빈번하게 활용된 경구가 하나 있다. 이른바, 주역의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이 그것이다. 다시, 이 고전이 풍미될 시점이 도래한 것인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느니!

‘우정의 교육’, ‘유목적 지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짚어두어야 사항 하나 더. 워낙 우리 근현대사가 굴절과 혼돈의 연속이어서 그렇겠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닥치면, 일단 시야를 외국으로 돌려 선진화된 나라의 제도를 준거로 삼아 비판을 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습속이 있다. 그래서 우리 머리속에는 은연중에 ‘그 어느 먼나라’에서는 이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없다! ‘핑크플로이드의 벽’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같은 영화를 보라. 거기에 그려진 선진국의 학교들 역시 억압과 규율권력의 장소일 따름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태생적 불안정성 때문이든, 아니면 근대기획의 전반적 실패에 기인한 것이든, 앞으로 전세계에 걸쳐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테제는 필연적으로 붕괴되어 갈 것이다. 아울러 인터넷이 상징하듯, 학교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숱한 이질적인 배움터들이 출현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교육난국을 돌파하게 해줄 완벽한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근대라는 한국적 특수성론에 사로잡혀 그저 합리적인 선진제도에 의존하려 한다면, 다시금 시행착오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자기가 선 자리에서 ‘교육과 지식’의 낡은 배치를 근본적으로 변환시키는 실천을 수행하는 것이다.

1. ‘분자적 공명’과 우정의 교육

공간은 일종의 정치적 ‘기계’다. 그 배치에 따라 연기(緣起)작용이 달라지는. 그런 점에서 무릇 모든 교육은 먼저 교실의 배치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조금씩 변화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교실은 높은 교탁과 단상, 일렬로 배열된 책걸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의 구별이 확연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계몽주의의 공간적 투사이다. 즉, 교육이란 전문적이고 인격적 품성을 갖춘 스승이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것이라는. 위에서 아래로, 빛이 있는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이런 식의 전제가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의 내용은 기성품을 복제하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독창성이나 개성, 창발성 등을 강조한다 해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스승이 구획해 놓은 일정한 바운더리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은 이 구획과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체 앎의 영역에서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고정된 선으로 구획될 수 있을 것인가? 나이가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거나 지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특이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앎의 세계에는 그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앎의 흐름만이 있을 뿐. 명말 대표적인 비주류사상가인 이탁오의 다음의 말은 그 점에서 참, 감동적이다.

“나는 스승과 친구는 원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둘이 다르단 말인가? …만약 친구라서 사
배를 올리고 학업을 전수받을 수 없다면, 필시 그와 함께 친구가 될 수 없다. 스승이라서 마
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또한 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사표로 추앙받는 공자 또한 자신이 깨우친 도를 알아주고 토론할 벗을 찾아 천하를 주유했을 뿐, 누구에게도 자신을 배우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승이면서 친구인 것, 이것을 ‘우정의 교육학’이라 이름하면 어떨까. 이런 관계하에서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지식이 구성되고, 흘러 다니는 ‘힘과 힘의 역학’만이 작동하기 때문에 학문외적 권위나 위계 따위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구도는 단지 민주적이고 평등한 ‘인간화교육’이라는 휴머니즘적 구호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 연구실에는 수많은 세미나들이 있다. 일본어강독, 중국어강독, 중세미학, 수사학, 동아시아 근대성, 화폐와 철학 세미나 등등. 이 세미나는 누가 일률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저 구성원들의 지적 욕구에 따라 제안되었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장구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수요자의 학습구성권이 전폭적으로 보장되는 시스템인 셈이다.(반면, 지금 대학교육은 수요자는커녕, 교수들의 학습구성권조차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각각의 세미나는 또다른 변이형들을 끝없이 증식한다. 그래서 일본어강독을 하다가 느닷없이 과학사세미나로 번지기도 하고, 화폐와 철학 세미나를 하다가 일본어강독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세미나 구성원은 연령별로는 약 20년의 갭이 있고, 소위 선후배, 사제지간 등 각색의 인연으로 얽히고 섥혀 있지만, 그러한 위계들은 여기서는 아무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단지 각각의 능력이 교차하면서 ‘분자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일 뿐, 그 흐름에서 ‘고정된 자리’는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세미나의 성과가 업그래이드되어 강좌로 개설되는데, 여기서도 교사와 수요자 모두 자발성에 의해 결합되기 때문에 ‘지적 공명’만이 유일한 관건이 된다. 그래서 어떤 강좌에서는 선생이었던 이가 다른 강좌에서는 수강생이 되는 변환이 수시로 일어난다. 연구실을 열고 처음 공개강좌를 시작할 때 가장 신경을 쓴 일이라면 강의실의 공간적 배치를 수평화한 것이다. 원탁과 세미나 테이블, 개인 책상 따위를 그대로 죽 나열하고서 강의가 진행된다. 강사의 위치는 수시로 바뀔 수 있고,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난 해, 맑스주의 강의 때는 강의실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한참 넘어버려 더러는 책상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더러는 선생 뒤통수를 보면서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배치는 좀 무질서해보이지만 지식의 교류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일률적인 배열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이나 선생 모두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수강생들 사이의 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교실의 배치가 획일적인 되면, 학습자들 간의 소외 또한 심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의 중에는 오직 선생에게만 시선을 두어야 하고, 서로간의 접촉이(시선이나 대화 등)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인적 유대는 항상 강의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런 식으로 이원화되면 지적 소통이나 토론의 역동성은 현저하게 낮아지게 마련이다. 지식 그 자체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중심요소가 될 때, 비로서 스승과 친구가 하나인 교육이 가능한 법이다. 따라서 공간의 수평적 배치는 교사와 학생의 경계뿐 아니라, 학습자들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승시키는데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강의때나 세미나때나 항상 차와 간식을 준비하는 것도 그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함께 먹고 마시는 것보다 친화력을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강의를 하는 사람도 힘이 들지만, 열심히 듣기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가능한한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지적 공명의 주파수는 더욱 상승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여러 경위의 통과점을 지닌다. 직접적 전수 혹은 책을 통한 교류, 그리고 함께 힘을 북돋워주는 벗들, 공간적 배치 등등.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누구의 독점하에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강의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실감할 터이지만, 동일한 내용도 관계의 구성에 따라 현저하게 다른 공명과 촉발을 가져온다. 아울러 반드시 환기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보다 가르치는 사람 자체를 지적으로 훈련시키는 장이라는 점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어찌 주체와 대상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지적 즐거움을 증식하면서, 때로는 제자의 위치에 있다가, 때로는 스승의 자리에, 그리고 때로는 ‘붕우’가 되는 다양한 지점을 경쾌한 행보로 넘나들 수 있는 것, 새로운 세기는 바로 이런 교육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2. ‘수목형 위계’에서 ‘리좀적 증식’으로

학부제를 다루면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근대 이후 분과화된 학문체계는 현실정합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국어국문학과의 예를 다시 들어보면, 국문학과 국어학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가로놓여 있다. 또 국문학 안에서도 고전문학, 한문학, 현대문학은 ‘말의 길’이 끊긴 지 오래다. 기타 다른 학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자신의 분야에서 한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전문성의 실체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한분야를 심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심화가 아니라, 고립을 자초하면서 현실에 아무 쓸모도 없는 지식을 양산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생명은 에너지의 흐름이고, 앎 또한 그러하다. 흐름을 차단하여 경계를 긋는데 골몰하면서 대체 무슨 심화가 있으며, 확충이 가능할 것인가? 실제로 이런 분과체계와 학연, 지연 등 고질적인 병폐들의 재생산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적 흐름이 막히면 땅따먹기식의 전공분할이 더욱 가속화되고, 그것은 자연히 지식외적 관계들에 의존하는 습속을 강화시킨다. 학벌주의, 임용비리 등을 거세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통상적으로 그것이 이러한 지적 생산의 방식과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야말로 지식과 삶을 이원화하는 그물망에 나포된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벽을 넘어 흐르게 하는 것이다. 홈패인 공간에서 매끄러운 지대로!그런데 여기서 지식생산의 배치에 대한 새로운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학제간 연구라는 것을 기이한 종합이나 잡종교배 정도로 착각하는 해프닝이 반복될 것이다. 솔직히 요즘 분과적 체계를 넘는답시고 시도되는 대부분의 작업들이 담론의 생산과는 무관한 과시용 프로젝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촘촘하게 구획된 선들을 가로지르면서 예기치 않은 지적 흐름들이 생성되는 것은 그러한 인위적 혼합절충과는 무관하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우리 연구실의 세미나는 처음 한국 근대계몽기를 대상으로 하는 자료읽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개화기 신문자료를 읽다보면, 누구나 문학 텍스트에 한정해서는 도저히 이 시기의 지도를 그릴 수 없다는데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히 종교, 철학, 사상사 전반, 이를테면 근대성 담론의 영역으로 시선이 확장되고, 다른 한편 한국의 근대성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사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근대성론은 전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동반해야만 비로서 심층적 탐사가 가능한바, 중세미학이나 들뢰즈/가타리, 푸코 등 프랑스 현대철학과의 접속은 이렇게 해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을 하던 이들은 점차 동양적 사유로 눈을 돌리게 되고, 고전과 한문학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들은 서구 탈근대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전공간의 벽을 허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어진 코드와 습속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지만 않다면, 시선의 광할함은 자연스럽게 심연에 대한 열정을 함께 불러온다.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빌리면, 기존의 분과구분이 근원이 되는 뿌리가 있고, 그것에 바탕해서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일종의 수목적 위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면, 그에 반해 이러한 가로지르기는 뿌리줄기, 즉 중심도 지향도 없지만 무한히 분열되어 가면서, 어떤 것과도 접속할 수 있는 ‘리좀적 증식’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글쓰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맞물려 있다. 대학원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했겠지만, 학위를 받으려면 일정한 내용과 형식의 코드를 갖추고 있는 정형화된 글쓰기를 끝없이 수련해야 한다. 견고하게 위계화된 분과체계가 유지되는 것도 사실은 이런 식의 코드화시스템에 의해 받쳐지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체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글쓰기 문법을 내파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대중적이고 교양적 글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따위의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전문성과 대중성, 아카데믹한 스타일과 상업적인 스타일 등을 단절시키는 낡은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면서, 다채로운 수사학의 생성을 통해 지배적인 글쓰기 권력과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생산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적 주체 개개인의 신체가 자재로워야 한다. 즉, 쉬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증식을 통해 변이와 생성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조로현상은 정말 심각하다. 40이면 벌써 권위가 몸에 배고, 50이 넘으면 아예 스스로 원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대개 30대 후반에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하면, 결국 학위가 종착점이라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제도가 부여한 코스를 열심히 습득한 데서 멈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거야 뭐, ‘메아리소리만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거나 ‘그림자를 보고 앞에 있는 개가 짖으면 뒤에서 그대로 따라짖는 개’(이탁오)의 신세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잘알고 있겠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즉,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 여부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지적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가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명말의 대사상가 이탁오는 평생동안 유학의 경전을 탐구했으면서도, 54세 이후 다시 승려가 되어 불교에 입문하여 20여년을 쉬지 않고 유,불,도를 넘나드는 학문을 추구했고, 노신 역시 죽음 직전까지 시대와의 팽팽한 긴장을 잃지 않았으며, 들뢰즈나 가타리, 푸코 등 현대의 사상가들 역시 모두 그러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양상은 예외적 개인들의 속성이기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양태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주입된 습속과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는바, 그럼으로써 더한층 과감한 지적 모험을 감행하게 되는 순리가 아닌가 말이다. 그에 비하면, ‘조로증’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우리의 지적 풍토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새로운 담론의 생산은 이론의 내용 이전에 바로 이러한 지적 배치와 습속을 바꾸는 일,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전공, 세대, 학연, 성별간 위계라는 온갖 훈습에 찌든 ‘정착민적 근성’에서 벗어나, ‘생의 약동’에 몸을 맡기면서 늘 지적 초발심으로 돌아가 경쾌하고도 끈기있게 수행할 수 있는 신체, 이것이 ‘리좀적 증식’의 짝이 되는 ‘유목적 지식인’의 형상일 터이다.

3. ‘앎과 삶’의 일치, 그 생성의 윤리학을 위하여

나와 나의 친구들이 꿈꾸는 것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그것은 심포지움을 축제로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면, 상상력의 경계를 깨부수는 선정적인(?) 테마를 가지고서 다방면의 연구자들이 발제를 한다. 형식은 개별발표뿐 아니라, 듀엣으로 할 수도 있고, 여럿이서 한조가 되어서 할 수도 있다. 한 곳에는 음식과 차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다. 중간 중간 휴식 시간에는 락, 발라드, 클래식 등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서 친교를 나눈다. 주제와 관련된 슬라이드나 비디오가 상영될 수도 있다. 심포지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토론인데, 예의나 격식에 따른 언사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논쟁을 극한까지 몰고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매너라든가 형식의 구속이 없기 때문에 토론자나 발표자의 개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다. 시간제한도 없고, 배고픔과 지리함을 견뎌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지새워 토론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꿈이 실현된다면, 아마 단 하루 동안에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지적 수준은 비약적으로 고양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활동을 통해 교육과 연구, 지식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 모든 이들의 신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될 터이므로. 심포지움이란 일종의 지식인들의 라이브 공연이다. 밴드가 음반을 준비하듯, 평소에 세미나와 학습을 통해 갈고 닦은 내용들 가운데 그 에센스만을 간추려 대중앞에서 한판 쇼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을 통해 새로운 지적 동료들을 만나고 거기서 다시 새로운 유형의 팀이 조직되고… 이런 라이브 성과물들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매체로 집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억지로 기획하고 의무감에서 잡지를 내는 악전고투를 답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에서 대학교육의 여러 문제를 두루 짚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지식의 기쁨’이 사라졌다는 음울한 진단이 자리하고 있다. 온갖 풍요와 편리 속에서 생의 기쁨이 마모되어버린 근대적 일상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기쁨의 상실은 지식이 삶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짐으로써 초래된 것인바, 심포지움은 오직 근엄하고 지리한 학술대회여야하고, 삶의 기쁨은 다른 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고질적인 이분법은 그 괴리감의 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는 어떻게 이 간극을 넘어 일상의 실천과 지적 열정을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을 것인가일 터이다.
누구나 지식의 즐거움, 지적 능력의 증식을 통한 자유의 확대, 능동적인 관계의 확충 등을 원한다. 그런데 왜 모두 거꾸로 살고 있는가? 지식은 고된 노동이 되고, 학력이 높아질수록 신체는 더욱 부자연스럽게 되고, 그러는 사이 인적 유대와 지적 상상력은 완전 마모되는 이 악순환의 늪에서 주저앉아 있는가 말이다. 수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정치경제학적 분석도 가능하고, 문화적 토양, 교육제도의 비리와 모순 등등. 그러나 그 속내에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똬리를 틀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권에 진입해야 하고, 그러자니 스승, 선후배 등 파벌주의에 편승해야 되고 등등. 말하자면, 결국은 도시중산층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이념에 관계없이 지식인들 모두에게 그 지독한 악업(惡業)을 묵인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의 문제는 삶의 윤리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그말은 결국 앎의 자유를 되찾는 작업은 삶을 생성시키는 새로운 윤리학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솔직히 말해보자. 현대 중산층은 너무나 많은 비용을 행복과는 무관하게 지출한다. 오직 가족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둘러치기 위하여, 그리고 노후의 안정이라는 황당한 명제를 위하여. 사실 이것은 행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돈은 단지 수단일 뿐인데, 어느 순간 돈이 생애의 유일한 목표이자 표상이 되어버리는 이 기괴한 도착증! 자본주의가 그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는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지식이 현실을 변화시키고, 생동하게 하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지식은 곧바로 삶의 윤리적 토대로 전이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지식은 삶과 무관하고, 세상에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90년대 이후 제도권 외부에 많은 연구단체들이 생겨나고, 대학안에도 사회교육원 등이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어지면서 공교육 외부의 교육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런데도 지식의 에너지는 여전히 겹겹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것은 이런 매체들 역시 교육이나 지식에 대한 기존의 구도를 고스란히 변주하고 있어서, 거기서 형성되는 대부분의 교육이 일시적인 상품 이상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식에 대한 수요층은 확산되었지만, 전문가와 대중, 지식과 삶의 경계는 여전히 두텁다는 것이다. 우리 연구실에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아무런 대책없이 그저 공부가 좋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학원에 몸담고 있는, 이른바 전문지식인들보다 더 왕성한 지식욕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그것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윤리적 욕구와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으로 훨씬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이들이 대학교육만을 유일한 코스로 여겨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면, 그순간부터 지식은 기쁨이 아니라 질곡이 됨과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 또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 회로에서는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식의 생산과 삶의 윤리학은 맞물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대학체제가 구성원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이러한 불일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강렬한 유대에 기반한 지식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함께 모여 공부하고,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일상을 공유하면서 근본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차라리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어떤 교육매체보다도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함께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창 연습하고, 토론하고, 먹고, 마시고, 돈이 필요하면, 각종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모은 다음, 다시 모여서 노래하는.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지식생산은 너무나도 고립되어 있다. 일주일이나 한달에 한두 번 만나 세미나하는 정도로야 어떻게 집합적 흐름이 형성될 것이며, 삶과의 일치를 꾀할 수 있을 것인가? 성별, 세대별, 학연, 학벌 등 온갖 경직된 선들을 뛰어넘는 담론이 그 정도의 느슨한 접속을 통해 생성될 리 결코, 만무하다.
그리고 밴드들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공간만 확보되면 이러한 지식공동체의 구성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적으로 집필공간을 마련하고 도서를 구입하는 낭비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밥을 먹고, 함께 세미나를 조직하고, 성과물을 기획하는 일상의 공유는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적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왜냐면, 이때 지식과 삶은 그대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굳이 도회를 떠나 전원에 자리잡고 자연과 친화해야만 공동체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가장 전위적인 지식을 중심으로도 얼마든지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각기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하고, 각기 자기의 장점을 펼치게 하여, 한 사람도 알맞게 쓰이지 않는 사람이 없게”(이탁오)하는 것, 다시 말해 각자 서로의 길을 막지 않으면서 강도높은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 앎과 삶의 새로운 윤리학은 여기서부터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물론 이런 식의 지식공동체는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우리 연구실이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수많은 인적 관계들을 형성할 수 있고, 심심치 않게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지식사회가 얼마나 새로운 활로에 목말라 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토록 위기담론이 팽배했음에도 교육주체들이 실천적 모색의 측면에서 수동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터뷰를 할 때마다 항상 제도권 진입을 거부한다는 것이 주요 이슈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사실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나와 나의 친구들에게는 제도권이냐 아니냐는 사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의 목표는 교육과 연구를 하나로 융합시키면서, 인위적으로 경계지워진 장벽을 넘어 지적 에너지를 흘러 넘치게 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다만 제도권 진입이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먼저 시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도권 내부냐 외부냐로 설정하는 순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시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식의 가장 큰 적은 이분법 그 자체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고, 따라서 외부에서의 이런 흐름이 큰 힘을 구성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부를 변이하는 에너지로 투여될 것이다. ‘배움에는 자기도 없고, 남도 없’다고 했는데, 어찌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있을 것인가? 거듭 말하거니와, 완벽한 제도, 이상적인 모델은 어디에도 없다. 모범답안을 찾기보다 자신이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지식의 기쁨을 향유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열망, 그 초발심을 되찾고자 한다면,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 더구나, 다음의 글을 읽고 여전히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청년들이 금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
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
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할 것인가!”(노신, [청년과 지도자] 중에서)

미와 실용성 : (청주 공예비엔날레)

미와 실용성: 근대 조형예술에서의 문제

최 범

근대미학의 구조: 미와 실용성의 분리

근대미학에서 미美의 반대는 추醜가 아니라 용用이었다. 전통적으로 미의 대립물로 간주되었던 추가 미적 범주로 포섭되는 대신에, 고대로부터 자주 미와 결합되어온 실용성이 미와 분리되었다. 역사상 가장 높은 생산력을 과시하고 실용주의적 가치가 고취되었던 시기에, 이처럼 실용성이 미적인 것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사회는 미와 실용성을 분리함으로써 오히려 실용성을 전적으로 현실의 지배 속에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의 구조 내에서 미적 실천, 즉 예술이란 실용성의 장소인 일상과 대척점에 놓인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미와 실용성의 분리, 즉 과거의 모든 문화에서 언제나 일정 정도 뒤섞여 있었던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을 엄격하게 분리함으로써, 근대사회는 여기에서도 예의 근대적 합리성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적인 것은 언제나 예술과만 관계를 맺는 대신에 실용적인 것은 현실과만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근대적 인식과 실천의 내부에서 작동한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근대에서 미적인 것의 궤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즉 근대에서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언제나 대립적이거나 분리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 경계는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실용성을 배제한 순수한 미적 담지자로서의 예술과 미적 가치를 전혀 갖지 않고 오로지 실용성으로만 가득 찬 현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념적인 것이지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미학과 조형예술의 궤적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처럼 개념적으로 분리된 미와 실용성, 즉 예술과 현실이 뒤섞이고 역행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의 조형예술은 바로 그러한 진동을 보여준다. 근대 조형예술의 궤적에서 미적인 것과 분리된 실용적인 것이 다시 예술로 복귀하고 예술과 실용성이 결합하는 과정이야말로 모순적이면서도 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미와 실용성의 결합을 원했던 것은 예술보다는 오히려 현실이었다. 근대 시민사회의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은 현실적인 실용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현실은 오히려 미적인 것을 풍부하게 요구하였다. 미가 초월적인 영역보다는 현실과 더 많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인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는 서구 근대사회도 다른 모든 사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서구 근대사회는 시민 계급의 지배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미적인 것들을 생산해내었다. 오히려 순수한 미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은 그러한 미적인 상황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서구 근대에서 예술에 부여된 역할, 즉 합리적으로 조직된 일상 생활에서 결여된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보충물이자, 현실 세계가 실현시켜줄 수 없는 소망을 간직한 초월적인 진실의 세계로서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현실의 미화는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배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류 문화의 보편적 양상에 훨씬 더 가까운 현상이었다. 근대의 미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예술만을 주목한다면 그것은 미시적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대신에 예술은 물론이고, 예술을 벗어난 일상적 영역에서의 광범위한 미적 실천들까지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근대의 미적 구조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면 미와 실용성을 대립시킨 근대미학은 단지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일 뿐인가. 미를 순수한 것이며 현실적 필요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시대의 미적 태도들과 구분되는 근대미학의 독특한 관점이지만, 그것은 물론 나름대로의 인식론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현실에서 미와 실용성의 분리와 대립은 일종의 오류 또는 허구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자면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잘못 설정된 문제란 없다. 특정한 역사적인 문제 설정은 비록 그것이 다른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오류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동시대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서술적 진실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미학의 구조는 근대적인 에피스테메(인식 구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속에 자기 모순을 내장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미술과 공예: 주체와 타자화의 논리

미술이 발생하는 과정은 곧 공예가 타자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근대미학에서 미와 실용성의 분리는 각기 미술과 공예의 분리, 발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근대 조형예술의 독특한 위계적 구조가 생겨나게 된다. 요컨대 미술과 공예의 분리는 단순한 세포 분열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미술이 자신을 미적 주체로 정립하는 대신에 공예를 미적인 것을 벗어난 일상적인 기술과 노동의 영역으로 내몰아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미술은 ‘미적인 것’을, 공예는 ‘실용적인 것’을 담당하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자 문화적 의식이 되는 것은 근대미학의 정해진 행로인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과 공예의 조형적 차이가 아니라, 미적인 것을 기준으로 한 주체와 타자화의 논리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존의 미술사와 공예사, 아니 문화사의 전제를 다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공예와 미술의 발생과 분화, 그리고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이를테면 미술은 공예로부터 파생된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어떤 것인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공예가 미술에 선행先行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근대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공예는 오히려 미술에 후행後行하거나 아니면 동시 발생한 것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술이라는 대립물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공예는 차별화된 영역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미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공예는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 전체를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의 공예 개념은 상대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차라리 무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미술은 어떻게 (공예와 달리)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게 되었을까.

물론 근대 이전에도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 그 자체로서의 공예와 구분된 활동과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의 경우,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이어져온 고급한 학예, 즉 인문학liberal arts의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학문(과학)과 예술이 혼합된 영역이었다. 그리고 공예를 타자화시킨 서구 최초의 미술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미와 실용성의 분리, 즉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태로서의 미술과 공예가 처음으로 분리되는 것은 18-19세기의 가까운 근대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대략 15-16세기에 전통적인 기술(공예)로부터 벗어난 몇몇 분야-건축, 조각, 회화-가 인문학의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서구 최초의 미술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디세뇨의 기술arti del disegno’이라고 불린 미술은 ‘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인 것’으로서 오늘날의 미술보다는 과학이나 학문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도 미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이었다. 당시의 미술은 기술도 아니고, 오늘날과 같은 예술도 아닌, 인문학이었다. 아무튼 ‘미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공통점은 그것이 ‘고급한 학예liberal arts’라는 점이며, 따라서 ‘비천한 기술vulgar arts’인 공예와 구분되었던 것이다. 이제 목공이나 석공과 주물 기술 과 같은 직인의 기술이 아닌 고급한 학예로서의 미술은 기술이나 재료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떤 능력에 따라 구분되고 인식되었으며, 그리하여 요구된 것이 통합된 미술 개념이었다.

이제까지의 서구 문화사는 두 개의 통합된 미술 개념을 보여준다. 하나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의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18-19세기에 정립된 ‘파인 아트fine arts’이다. 르네상스의 ‘디세뇨’는 오늘날 디자인의 형태적 어원이 되는데, 여기에는 서구 조형예술사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디세뇨로부터 파인 아트로의 이행 과정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미술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것이 저 먼 르네상스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파인 아트임은 당연하다.

미술의 이중구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18-19세기경 서구의 조형예술은 새로운 구조를 형성한다. 이른바 ‘순수미술fine arts’과 ‘응용미술applied arts’이라는 이원적인 구조가 그것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과 저급 기술(공예)이라는 이분법의 근대적 버전이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먼저 순수미술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의 기술’과는 달리 순수한 미적 실천이라는 근대미학의 교의에 직결된 것이었고, 지식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근대는 예술과 기술만이 아니라 예술과 과학도 대립시켰기 때문이다. 근대의 예술-순수미술을 포함하여-은 18세기 칸트의 미학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다. 칸트는 미를 ‘무관심적 관심’이라고 정의하였고 예술로부터 모두 현실적 효용성을 배제하였다. 이와는 달리 현실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것을 ‘부용미附庸美’라고 불렀는데, 이른바 응용미술은 이와 관련되었다.

사실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에서 응용미술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르네상스적인 고급과 저급의 분리가 근본적으로 변화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응용미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조형예술의 한 부분을 이루는 미술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응용미술은 단순한 기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본격적인 순수미술도 아닌, 미술과 기술의 중간 영역 정도 되는 것이었다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 ‘순수미술의 조형적 원리를 실용적인 영역에 응용하는 것’이라는 응용미술의 정의가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응용미술은 완전한 미술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술이 ‘응용된applied’ 어떤 것, 즉 불완전한 미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응용미술이 조형적 성격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시대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응용미술을 르네상스의 저급 기술과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디자인의 과도기적인 중간 단계로 보는 것은 18-19세기의 응용미술의 독자성을 주목하지 않고 역사를 지나치게 발전사적으로 보는 태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미술과 기술의 중간 영역으로서의 응용미술의 위상을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저 근대의 이분법은 생각보다 악명(?) 높은 것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과 저급 기술의 대립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문화적 부작용을 낳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에 속한 분야는 사실상 몇 가지의 제한 목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근대적인 이분법은 이 세계의 훨씬 더 커다란 부분을 분할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한 것임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차별 구조를 모순이라고 여기고 변혁시키고자 한 사람은 바로 윌리엄 모리스였다. 모리스는 예술의 ‘민주화’와 ‘생활화’를 주장하였는데, 여기에는 바로 살롱예술로 전락하여버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합일시키려는 의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모리스는 ‘장인으로서의 예술가artisan artiste’와 ‘예술가로서의 장인artiste artisan’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의 진정한 의미는 미술과 공예의 동일성 주장에 다름아닌 것이다.(Arts와 Crafts 사이에 있는 ‘and’는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후에도 오랫동안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위계적인 차별은 계속되지만 적어도 이념적 차원에서 그것은 윌리엄 모리스에게서 극복된다.

물론 18-19세기에 응용미술은 비록 미학적으로는 낮게 평가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응용미술은 더욱 각광을 받았다.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계급적 지배를 확인해줄 문화적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과 일상용품에서의 장식미술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고, 날로 발전해가는 산업은 매우 현실적인 목적에 따라서 미술을 필요로 했다. 19세기에 응용미술은 미술 제조art manufacturing라고 불리면서 점차 현실적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근대 디자인과 새로운 통합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디자인은 근대 조형예술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구조 변동을 가져왔다. 그것은 디자인이, 르네상스 또는 18-19세기 이후 분리되어온 미와 실용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하면서 조형예술의 질서를 재편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가 서구 최초의 통합적인 미술 개념이었다면, 디자인은 20세기의 새로운 통합 조형 개념이었다. 디자인은 미와 실용성을 적극적으로 통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명 공예의 역사적 계승자이며 낡은 의미의 순수미술과는 대립적이었지만, 그러나 디자인과 공예, 미술의 관계들이 결코 일면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디자인은 분명 전통적인 조형예술들과의 인식론적, 실천적 단절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또한 각 장르들과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며 선별적 친화성도 가진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먼저 디자인은 공예와 마찬가지로 실용 조형의 역사적인 한 형태이기 때문에, 공예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의 조형적 형식은 오히려 동시대의 미술과 동질성을 가지며 사회문화적 기능도 공예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물론 미와 실용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야 할 가치로 본다는 점에서 디자인은 전통적인 순수미술을 부정한다. 나아가 근대 디자인Modern Design의 경우에는 아예 미술과 디자인의 구분 자체를 부정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예술과 현실의 분리 자체를 극복하고자 했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근대 디자인은 조형예술 전체를 포괄하고자 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이후 디자인은 또 하나의 조형예술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공예를 대신하여 미술과 새로운 장르적 대립 구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미와 실용성의 구분이라는 저 근대적인 이분법은 20세기 동안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견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디자인, 특히 20세기 초 근대 디자인의 관점에서 본 미와 실용성은 어떤 것이었으며, 또 근대 디자인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합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물론 근대 디자인에서 말하는 미는 순수미술에서와 같은 초월적인 미가 아니며 실용성 역시도 전통적인 공예에서와 같이 토속적인vernacular 것이 아니었다. 근대 디자인은 건축이나 일상용품 같은 실제적인 오브제를 통해서 미와 실용성의 결합을 추구하였는데, 이때의 미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형식미이며 실용성이란 요소화된 기능의 복합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고 조작 가능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근대 디자인이 추구하는 미와 실용성은 일단 전통적인 미술과 공예의 그것과는 단절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근대 디자인에서 말하는 미와 실용성의 결합 역시 자연발생적인 것도, 19세기의 장식미술처럼 표피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철저히 선험적이고 원리적이며 구조적인 것이었다. 이는 근대 디자인의 미학적 이념이자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교의에서 잘 드러난다. 기능주의는 기본적으로 미(형태)와 기능이 일치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데, 이는 기능에 충실하면 할수록-어떤 선험적 원리에 의해(?)-형태도 아름다워진다는 믿음이다. 이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선미일치善美一致(Kalokagathia) 사상의 현대적인 판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기능주의의 모토는 그러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디자인은 이러한 기능주의의 교의에 따라 형태와 기능을 조작하여 완전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디자인은 일종의 사이버네틱스이자 기호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디자인이 추구한 것이 사물이 아니라 구성이며 실체가 아니라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은 장 보드리야르의 설명을 들으면 아주 분명해진다. 보드리야르는 바우하우스를 예로 들면서, 디자인은 단순히 생산물produit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기호화된 물건objet을 만드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산업사회에서 디자인된 물건은 단순한 효용성의 담지체가 아니라 기능적 기호로서 조작되고 사회화된 것이라는 얘기이다. 바로 이점이 실용 조형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통 공예와 근대 디자인을 구분해주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공예에 대한 디자인의 단절은 조형성, 생산방식, 사회적 기능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지만, 초기 근대 디자인이 보여준 반反장식주의는 공예와 디자인의 차이, 그리고 근대 디자인이 공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징후로 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돌프 로스와 같은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은 전통적인 장식을 극렬히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는 장식이 미개한 문명 상태의 증거이며 과잉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근대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장식은 비합리적이며 비현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현대적인 생산방식과 기술, 그리고 미학의 구성물로서 디자인은 분명 비합리적인 장식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장식은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오히려 장식이야말로 전통 조형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공예의 본질에서 장식성을 부정하고 실용성만을 보려는 태도야말로 근대적인 인식틀의 전도된 투사가 아닐까. 아마도 전통사회에서 공예의 본질은 실용성 못지 않게 장식성에서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공예의 장식이란 바로 문화적 상징의 표현이자 그 자체로 조형적 문법이며, 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나 기능과 뗄 수 없는 심층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디자인이 장식을 부정한 것은 전통사회의 문화와 질서 자체를 부정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물론 근대 디자인이 전통 공예의 상징성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근대적 질서와 생산방식에 따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조형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문명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 디자인이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미와 분석적인 기능의 결합을 지향한 것도 결국은 의미의 제로 상태에서 일종의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이란 모더니스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며 그다지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근대 디자인이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20세기 디자인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현실을 더 결정적으로 지배한 것은 키치Kitsch와 같은 비합리적인 조형과 소비주의 디자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현대사회의 디자인 역시 비합리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전통 조형에서의 장식이나 현대 소비주의 디자인에서의 스타일링이나 모두 문화적 상징성에 기반하여 인간이 가진 비합리주의적인 욕망에 호소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앞서 말했다시피 20세기 초의 근대 디자인은 전통적인 공예보다는 동시대의 미술과 조형적으로 훨씬 더 동질적이었다. 디자인은 아방가르드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혁명의 일부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자인은 단순히 통합적인 조형이거나 새로운 장르의 하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이후의 순수미술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전복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바우하우스는 정확히 순수미술의 이념을 뒤집는다.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순수미술은 고급하고 완전한 것이기는커녕 오히려 디자인보다 저급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미와 기능을 함께 갖춘 실제적인 산물만이 완전한 조형이며, 순수미술과 같이 감상을 위한 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 차원이 결여된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바우하우스의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와 인식틀을 정반대로 뒤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우하우스에서도 소묘나 회화, 조각을 가르쳤지만, 그와 관련된 공방이나 학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소묘나 회화, 조각은 건축이나 디자인을 위한 조형적 기초이자 연습일 뿐이며 그 자체로 독립된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대 디자인 운동의 정점을 이루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러시아 구성주의에서 오히려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서구에서 전통적인 미술의 역할, 즉 외부 세계를 모방하는 것은 현대미술에 의해 부정되지만 러시아 구성주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의자를 그리지 않고 추상화를 그리는 것이 예술적이라면, 아예 실제 의자를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예술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에서는 예술과 기술, 창작과 생산의 구분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러시아 구성주의에 의해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혹시 미와 실용성의 거대한 분리가 존재하기 이전의 그리스적 유년기, 분화되지 않은 덩어리 그 자체로서의 카오스 또는 모든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가 그 자체로 예술이었던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바우하우스가 순수미술을 전도시키기 이전에, 이미 말레비치에 의해 회화는 논리적으로 최후를 맞았고 구성주의에 의해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은 지워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알다시피 러시아 구성주의가 결코 역사의 종점은 아니었다.

공예의 위기: 변용과 일탈

공예의 위기는 반복된다. 한번은 근대적인 생산방식과 산업사회의 대두로 인해, 그리고 또 한번 공예의 자기 부정에 의해.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면, 과연 공예의 경우에도 그런 것일까. 역사의 물질적인 전개 과정 그 자체는 차라리 냉정한 것일지언정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예의 자기 부정은 분명 희극이면서도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공예의 자기 부정과 일탈은 말 그대로 공예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더 이상 공예사에서 다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현상이 현대 공예사의 한 장면에서 ‘공예의 이름으로’ 빚어지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정작 서구보다도 비서구 제3세계 지역에서 매우 심각하게 나타남을 보게 되는데, 이는 서구의 미적 근대성이 비서구 사회에 남긴 식민의 흔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공예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산업화에 의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양상이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에서 산업화는 공예에 치명적이었지만 또 다른 사회에서는 공예가 산업화와 비교적 잘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산업화가 분명 공예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지도만큼이나 공예의 문화지리학도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일본, 스칸디나비아 등과 같이 산업화되었지만 오래된 공예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산업화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는 사회, 영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보수적인 전통으로 인해 생활 속에 공예가 살아 있는 사회, 그리고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여전히 공예가 생활의 주요 수단이 되어 있는 전前산업사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오래된 공예 전통이 없는 까닭에, 공예와 현대 미술의 구분이 불분명하여 공예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진, 그런 만큼 개념적 혼란의 원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과 같은 사회도 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공예의 성격과 위상이 주변적이고 중간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예도 물건으로서 엄연히 현대 사회의 물질적 체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그러나 현대의 지배적인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주변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주변적인 존재방식으로 인해 현재의 직접적인 물질적인 욕구와 관심성에서 비켜나 있는 만큼, 문화의 원초적 통합성을 보존하고 전산업사회의 역사적 기억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간 예술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예의 주변적이고 중간적인 성격은 일단 현대사회에서 공예의 약점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흥미로운 문화 전략적 가치를 가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전통 공예를 보존하고 지원하는 것은 집단의 문화적 기억을 유지함으로써 국민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정치적인 프로젝트의 일부라고 이해하더라도, 서구의 일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모더니즘 예술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비판 또는 여성성의 발견을 위한 수단으로서 공예적 요소들을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현대적 실천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공예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목도하게 되는 가장 심각한 현상은, 공예의 주변성과 중간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공예적 가치를 전략적으로 실천하는 대신에, 현대 문화의 중심성에 매몰되어 공예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예의 자기 부정 또는 일탈 현상이 가장 무책임하게 나타나는 곳은 한국과 같이 식민지 근대화를 경험한 사회가 아닌가 한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전산업사회의 단계에 있는 국가들이고 다른 하나는 뒤늦게 산업화가 이루어진 후발 산업국가들이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후발 산업국가들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문제는 산업화 자체가 지나치게 물신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에서는 식민지의 경험이 근대화에 대한 실패와 낙오의 산물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사회 구성원들에게 산업화는 서구보다 훨씬 더 절대적이며 강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근대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대량생산품이 전통적인 수공예품보다도 더 좋은 것이고 심지어 고급한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공예의 가치는 매우 폄하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공예의 위기는 단지 공예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착잡한 구조에 근거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공예 제도 자체가 공예의 부정에 기초해있다는 점인데, 이러한 구조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배태된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경우 전통 공예가 쇠락한 상태에서 식민지 문화 정책에 의해 자리잡은 의식과 제도가 공예 분야에도 지배적으로 작용하면서 공예의 본질을 크게 왜곡,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19세기 말 이후 전통 사회의 붕괴에 따라 전통 공예가 산업적, 문화적 기반을 급격히 상실해간 반면, 일부 공예가 1930년대의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와 같은 식민지 미술 제도 속으로 흡수되면서 감상용의 살롱 미술로 변용되어갔던 것이다.(물론 예로부터 완상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귀족 공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술공예는 근대적인 전시회 제도의 틀 내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해방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0-90년대에 오면 미국 유학생들에 의해 유입된 이른바 ‘탈기능적’ 경향이 확산되면서 한국 공예계는 마침내 ‘공예의 이름으로’ 공예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미술공예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인 공예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반면, 이른바 ‘탈기능적’ 경향은 아예 공예의 기본적인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예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 자체의 오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근본적인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거의 미술공예 속에 이미 반反공예로서의 ‘탈기능적’ 경향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용성으로부터 감상용으로 중심 이동한 미술공예에서 이미 반공예적 경향은 첫발을 내디딘 것이며, 따라서 예의 ‘탈기능적’ 경향은 그 논리적 귀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공예를 실용적인 것과 감상용, 이른바 ‘미술공예’(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와는 다르다)로 구분한 것은 바로 비서구 지역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된 일본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미술과 서구 미술, 공예(산업)와 미술이 여러 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공예가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산업화된 공예와는 달리, 미술의 일부로서 감상용의 미술공예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미술공예는 공예의 주류도 아니었으며 전통 공예의 현대화와 산업화에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주체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 과정을 통해 이식된 미술공예가 뿌리를 내리면서 향후 지속적으로 공예 제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식민지 미술 제도를 통해서든 식민지 이후의 대학 교육을 통해서든,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상관없이 외삽된 제도로서의 현대 공예는 그저 식민지적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는 모더니즘 미학이 무분별하게 공예에까지 적용된 결과이고 한국의 현대 공예가들에게 공예 장르의 역사성과 현실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반공예를 공예라고 주장하면서 담론적 합리화를 시도하고 대학 공예 교육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서구의 미적 근대성이 제3세계의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모순적으로 증폭되어 나타나는가를 잘 보여주는 징후라 할 것이다. 디자인에서의 근대 프로젝트를 통해서 전통적인 공예와 산업, 그리고 미술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결해나간 서구와는 달리, 비서구 지역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공예와 디자인, 미술이 상호 충돌하면서 갈등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는 서구의 미적 근대성 자체를 넘어서는 탈근대적 전망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근대적 분리를 넘어서: 탈근대적 전망

이제까지 우리는 서구 근대미학과 조형예술이 어떻게 가치들의 분리와 위계에 기반하여 성립되었는지, 그러나 실제 그것의 내부적인 모순과 한계가 역사적 과정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사실 어떠한 시대, 어떠한 영역, 어떠한 규범도 일정한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의해 주조될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근대 역시 자신의 고유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 일정한 현실을 생산해왔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러한 근대의 미적 인식과 실천의 모순과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할 역사적 단계에 서있음도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서구의 근대예술이 근대사회의 특수한 구조적 산물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통합적인 세계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그 결과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가치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예술은 그러한 직접적인 현실 연관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으로써 비판적 기능을 행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서구 근대예술의 전제였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적극적으로 ‘쓸모 없음’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보다 넓은 현실의 맥락에서 볼 때 모순일 수밖에 없고 실제적으로도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위해 쓸모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근대의 강박관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류 문화의 보편성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근대의 복합적인 현실과도 일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근대적 강박관념은 이른바 공예의 ‘탈기능적’ 경향이라는 것에서 가장 극단적이고전도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탈기능적’이라는 것이야말로 (전통적인) 공예의 본질을 ‘기능’으로 본다는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근대미학이 보장해주는 예술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능을 추구하든 부정하든 간에, 결국 ‘기능’을 중심으로 공예를 사고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생각보다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 ‘기능’이야말로 지극히 근대적인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예의 ‘탈기능적’ 경향은 ‘탈근대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전도된 방식으로 ‘근대적’인 것이다.

문제는 기능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능을 강박관념으로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공예의 본질은 아마도 훨씬 더 복합적일 것이다. 공예는 제의와 상징성, 미와 질서 감각, 기술과 실용성 같은 다양한 가치들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예의 복합적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기능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적인 구도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탈근대적’인 것이며 매우 역사적인 것이기도할 것이다.

공예를 실용적인 기술로 보고 저급하다고 판단한 근대적 인식은 실은 스스로가 공리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일종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근대미학의 무의식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냐 실용성이냐, 순수냐 응용이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치들이 우리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이다. 때문에 우리는 서구 근대가 분리시킨 이러한 가치들을 다시 통합하여 새로운 관계로 재배치해야 할 과제를 간직하고 있다. 새로운 탈근대적 구도 내에서 그러한 가치들은 더 이상 미적인 위계 질서가 아니라 삶에 반영된 문화적인 가치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