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es

저번달 27일, 베를린에 도착한 후 발견한 나와 이곳의 차이는 온도에 대한 것이었다. 더위에 지친 나는 에어콘 안달린 버스와 얼음 안섞인 쎄븐업, 그리고 노랗다 못해 거무튀튀한 저녁세상에서 처음 차이를 끄집어내었다.

세련된 그라픽의 버스표지판이 달려있는 보도블럭은 오십년은 되어보이듯 고풍스러웠고 현란한 조각품이 놓여있는 거리의 벤치는 칠이 벗겨져 너덜거렸다. 웬지 시스테마틱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럽 첫 도시인 베를린은 겉으로 보아서는 서울과 차이가 있어보이지 않았다.

동독이었던 지역은 서독이었던 현재의 중심부와 비교해서 과거의 도시체계가 엿보이는 지대이다. 트램이라는 구별되는 교통수단 이외에도 공산권에서 전형적인 스탈린식의 건축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거리방향으로 늘어선 그런 건물의 외형들은 상당히 규모있는 정방형의 모습을 하고있어서 곧게 뻗은 길과 함께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중국, 북경의 그런 건물들이 현대에 와서 도시계획에 의해 대규모의 호텔이나 쇼핑센터로 변한것을 보면 동독의 거리들도 머지않아 상당히 번화한 지대로 변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무ㅡㅓ..이미 로자룩셈부르크라는 동서 경계지역은 서울로 치면 신촌이나 압구정과 같은 번화가로 바뀌었다.

자전거여행 가능한가?

Q. 왜 자전거로 힘들게 가나..

A. 사실 평지의 도로에서 견고한 차체의 자전거는 최대시속 40KM를 오간다. 평균속도는 15-20KM정도 될 것이다. 고로, 그렇게 힘 들이지 않고서도 종암동에서 광화문 사이, 적어도 종로까지는 버스를 갈아타거나 기다리는 지루함 없이 논스톱으로 오갈 수 있는 편한 수단이라는 말이다. 물론 현재 서울의 도심을 익숙하게 오가는 데에는 몇일간의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대략 종암동에서 종로통까지는 30-4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며, 서울의 자전거도로망인 석계역 옆의 자전거전용로에서 의정부까지도 3-40분이면 너끈하다. 석계역 잔차도로에서 한강을 지나 신촌까지는 대략 한시간 반정도가 걸렸다. 아무래도 풍경이 좋고 자주 쉬면서 가게되어 그런 듯 하다. 이 서울에 요새들어 완비된 강변 잔차도로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효율적이다. 나의 경우에도 석계역과 용산 전자상가를 오가는 데엔 꽤 효율적이었다.
아무튼 평속 20KM라고 쳤을 때 하루 다섯시간을 달린다면 경이적인 거리 100KM를 갈 수가 있다. 이노무 20KM는 정말로 천천히 가는 속도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람. 유럽의 잔차도로라고 평지만일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한강변 잔차도로의 노면수준은 될 것이며 그 높낮이가 서울의 미아리고개나 정릉고개 그 이상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대충 유럽 전역의 고저차를 따져봤을 때에도 알프스 근방을 제외하고는 평이한 수준이다.

Q. 자전거를 어케 들고 갈꺼니?

A. 잔차는 내가 드는것이 아니고 비행기가 들고 간다. 심지어 공항버스가 들고가기까지… ^^ 아무튼 이것도 문제가 아니다. 시중에서 3-40만원대 이상인 잔차들은 대부분 표준에 따라 부품이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바퀴나 안장과 싯포스트 등이 손과 손가락만한 렌치 하나로 쉽게 분리된다. 이것을 포장하면 가로세로 1미터를 조금 넘는 크기.. 무게는 내꺼의 경우 13KG이다. 대충 비수무리한 잔차의 경우 15KG내외일 것이다. 가까운 공항버스 정류장까지만 옮기면 사실 낑낑대고 손으로 옮길 일도 없다. 유럽에 도착해서는 당근 계속 타고 가거나 이 잔차를 실을 수 있는 기차나 페리가 있으니 걱정없다. 그러니깐, 나에게 이 잔차는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는 교통수단이기도 하지만 당장 브라이튼에 도착한 후에는 가장 중요한 생활용품으로 쓰여질 것이다. 비싼 돈주고 산 잔차를 2년이나 한국에 묵혀둘 수는 없다.!

할인항공권

할인 항공권의 개요 #

여행사와 항공사간의 경쟁에 의해 생겨난 항공권이 할인 항공권이기 때문에 분명한 규정은 없다. 요금의 할인율, 조건등은 여행사와 항공사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종류로는 본래 현지의 숙박비등을 포함하는 포괄 여행용의 운임으로서 설정된 IT운임의 티켓을 파는 것과, 각 항공사가 시장의 실태에 맞게 파는것이 있다. 후자의 경우의 할인 항공권중에는 3개월 오픈(구간이 정해지고 있어도 귀국편등의 예약이 들어 있지 않은 것)과 보통 운임과 틀리지 않는 1년 오픈의 것등도 있다.
구입은 항공사로부터는 할수는 없고 여행 대리점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어쨌든 조건, 가격등이 천차만별인 티켓이 매일 생기고 있으므로 항공권을 구입전 전문가와 필히 상담하여 구입하는것이 좋다.

항공권 구입시 고려사항

정해진 룰이 없는 항공권이기에 같은 값의 할인항공권 중에서도 요금의 고저등이 존재한다.
살때에 주의해야 할점들은 주의깊게 살핀 후 구입하자.

◆ 적절한 회사를 이용한다

각 여행사는 1∼2사정도의 항공사와는 특히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할인 항공권을 구입시 여러가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미국 방면은 맡겨 주세요」라고 하는 광고도 좋아 보이겠지만 이것은 미국계의 항공사에 강요할수도 있다는 뉘앙스도 풍기는 것이다.
특정 항공 회사를 희망하는 경우는 물론 자신의 가는 방면에 강하다고 생각되는 회사를 체크 해야하지만 또한 반드시 큰 여행사가 싸고 작은여행사는 비싸리라는 편견을 갖지말고 요조모조 잘 따져보고 가장 싸고 유리한 항공권을 구입하자.

◆ 출발일이 가까워지면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처럼 시기를 떠나 할인 항공권 구하기가 힘든때야 계획이 서는데로 바로 예약을 해야 하지만 항공권의 특성상 같은 티켓도 출발일이 가까워지면 요금이 내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잘만 이용하면 더 저렴하게 항공권을 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그 티켓의 잔여분이 남아 있는 경우에 여행사가 값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기다려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 주의 1 : 좌석의 확보는 뒷전

이것은 모든 할인 항공권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사항으로 자리의 예약 우선도는 모든 티켓 중에서 가장 낮다. 그 차이는 성수기에 여실히 드러난다.
보통 할인 항공권의 예약은 출발의 3~4개월전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고, 1개월전이 되면 항공 회사가 예약 명부를 체크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예약이 확정되는 것은 정규 운임과 팩스운임으로의 이용자와 초과 고가의 투어 참가자등이 우선이고, 할인 항공권이용자에 OK가 나오는 것은 2번째의 좌석 조정이 되는 출발의 2주전 이후가 된다. 만석의 경우는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만약 자리가 부족할 경우는 여행사의 담당자가 미리 가르쳐 주므로 출발의 시기를 바꾸는 등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 주의 2 : 일정의 분량은 예약하기 힘들다

성수기에는 효율적으로 승객을 탑승시키기 위해서 여행의 일정이 거의 한정되어 있어 여러가지로 불합리한 고객은 예약의 우선 순위가 낮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연말의 경우 로스엔젤리스 5∼7일, 홍콩은 4일, 싱가폴은 5일 등이 기본 패턴으로 되어 있다.

◆ 주의 3 : 여러군데에 똑같은 예약은 손해를 본다

만약 ‘예약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라는 불안감 때문에 몇몇 여행사에 중복으로 예약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 때문에 예약을 하기 어려운 원인이 되는 것이 있다. 예약을 넣은 사람의 이름은 항공 회사의 컴퓨터에 입력되므로, 몇개씩 예약을 하고 있으면 출국이 임박해서 최종적으로 체크할 때에 예약을 제일 마지막으로 미루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은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자리의 확보를 뒷전으로 미루는 경우가 많다.

싼 항공권 구하는 방법

개별 배낭 여행자로 항공권만 싸게 구하려는 사람은 우선 티켓 전문 여행사를 찾아가자.

이런 업체들은 물론 여권 대행 수속이나 때에 따라선 호텔 예약업무도 대행해 주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 여행사에서는 항공권을 구입하기만 하고 나머지 모든 일은 스스로 해결해 내야만 한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수시로 변하는 항공사 사정에 따라 가끔씩 등장하는 엄청 싼 티켓을 이곳에서 운좋게 살 수 있다.
탑 항공을 방문하면 사무실 곳곳에 ‘몇월 몇일 얼마짜리 항공권 몇명 모집’의 공문이 가끔씩 등장하기 때문에 운만 좋다면 그런 티켓을 살 수도 있다.

학생의 신분을 최대한 이용해도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다.
국제 학생증을 마련하면 현지에 가서 많은 할인을 적용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 가기 전에도 그 학생증은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

배낭여행은 시간과 돈의 반비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예산을 줄일 수 있고 시간을 절약하려면 많은 돈을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비교적 예외없이 적용되는데 이는 싼 항공권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없어 아무 여행사에 들어가 항공권을 살 수도 있지만 시간이 충분하기만 하다면 배낭여행을 취급하는 여러 여행사를 비교하고 검토한 후에 그 중에 저렴한 곳을 골라 항공 티켓을 사는 것이 싼 티켓을 구하는 한 방법이 된다.
단 되도록이면 그 지역에 관한 노하우를 많이 가지고 있는 전문 여행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좋다.
그 외에도 어부지리를 노리면 비교적 싼 티켓을 구할 수 있다.
가끔 패키지 여행팀 중 갑자기 여행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럴 때 여행사 직원을 설득해 티켓만을 구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날짜를 팀과 상관없이 오픈시키면 만사 O.K

방법은 사실 배낭 여행 초창기 시절 많이 이용되는 방법으로 우리나라로 취항하는 공사들이 많지 않았을 때 주로 쓰던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방콕이나 홍콩까지만 공권을 사고 할인 티켓을 많이 파는 그곳에 도착해서 다시 유럽행 티켓을 구하는 법이다.
이 방법은 유럽 항공사들이 많이 취항하고 있는 요즘 들어 큰 효과는 볼 없지만 동남아 지역과 유럽을 묶어 여행해 보고 싶은 이들이 한번쯤 눈여겨 볼만 한 법으로 방콕은 카오산 로드에 밀집해 있는 중소 여행사에서, 그리고 홍콩은 매일 발간되는 일간지 광고 부분을 뒤져 보면 의외로 저렴한 가격의 항공권을 구할 수 있기도 하다.

각 배낭여행사들이 내놓은 가장 싼 티켓(7월~8월 요금)
각 여행사에서 내 놓은 비행기 티켓들은 주로 단체 요금을 적용 받은 할인 요금으로 각각의 티켓마다 장.단점이 있다.
어떤 티켓은 경유지가 없는 직항이라 빠르고 어떤 것의 경우에는 경유 도시에 대한 가이드 관광이 포함되어 있거나 출발 일정이 포함되 거나 혹은 자신이 정할 수 있는 등 굉장히 다양한 조건들이 티켓마다 있으므로 사기 전에 꼼꼼하게 경유지나 도착지, 출발지에 대한 질문을 해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항공권을 구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종 할인요금 제도

항공 요금은 같은 목적지, 같은 등급(클래스), 같은 시기(성수기,비수기), 심지어는 같은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사람들 조차도 서로 차이가 날수 있다. 물론 국제적으로 국제항공운임협회(IATA)에서 정해 놓은 요금이 있기는 하지만 이 요금으로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이 여러가지의 할인 요금을 적용 받거나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이용해 싸게 티켓을 구입하고 있다. 그러나 할인 티켓 사용시 명심할 것은 여기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고 싼 만큼 제한도 많기 때문에 잘 알아보고 구입해야 한다.

기간별 할인요금/개별여행요금

항공사에서 정해준 기간 내에 여행을 마치게 될 경우 할인해 주는 것으로 개별여행 요금 또는 기간별 할인요금으로 부른다. 이 요금은 항공사들의 특별세일과 같은 것이어서 경쟁이 심한 노선에서는 더 높은 할인율이 적용되어 항공사간에 승객 유치가 치열해 진다. 이 요금을 내고 탄 승객이라 할지라도 똑같은 일반석에 앉고 혜택 내용에도 일반석과 차이가 없다. 즉, 30~55%까지 돈을 적게 내고도 모든 동일한 기본 서비스를 제공받는 셈이다.

단체할인요금(GIT)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이후에 대학생의 배낭여행이 많아지며 활발해진 할인요금제도이다. 이는 단체여행(패키지여행)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통 15명 이상이면 적용되며 요금체계 역시 매우 다양하다.
왜냐하면 그룹요금은 항공사와 여행사가 여행 일자와 목적지에 맞추어 가격조정을 하게 된다. 따라서 한 지역에 15명 이상 단체가 동시에 출발하여 동시에 귀국해야 하며 유효기간은 1달 이내이어야 한다는 기본 규칙이 있으나 현재는 약간의 유동성이 주어지는 것에 착안해야 할 것이다. 비록 혼자 가는 배낭여행 이라해도 이 단체할인요금을 적용받는 것이 경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이 할인 티켓은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동, 유아요금

아동요금은 성인이 동반하는 만 2세 이상 12세 미만의 어린이에게 적용되며, 성인의 80%를 지불한다. 이 때 아동은 따로 좌석을 제공 받고 화물 허용 기준도 성인과 같다.
유아요금은 만 2세 미만의 아기인 경우이며, 성인요금의 10%가 적용되는데, 좌석배정이 없고 유아용품이외엔 어떤 화물도 허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단거리 여행일때는 무릎에 안고 여행을 해도 괜찮지만, 장거리 여행일 때는 유아라도 따로 요금을 내고 좌석을 배정 받는 것이 훨씬 편하다. 유아요금은 성인 1명이 유아 1명을 동반할 경우에만 적용되고 성인 1명이 유아 2명을 동반할 경우는 유아 1명은 유아요금을, 나머지는 아동요금을 내고 자리를 배정 받아야 한다.

청소년 및 학생 할인

청소년 요금은 25세 이하의 청소년 또는 그보다 약간 나이가 많더라도 학생인 경우 요금의 25%를 할인해 준다.
학생할인은 청소년 할인과 비슷하나 출발지와 목적지가 본국과 교육기관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항공사 상용고객우대제도

일반적인 할인제도 뿐만 아니라 각 항공사마다 마련하고 있는 상용고객우대제도 (Frequent Flyer Program)에 의해 무료 항공권을 받거나 요금할인을 받을 수 있다.

대표적인 항공기 할인요금

아펙스/슈퍼아펙스 티켓(APEX/SUPER APEX)
새롭게 나온 항공 할인요금으로 개별 항공여행 요금도 싼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상용목적의 여행자나 일반 개인여행자들이 원하는 날짜에 출발했다가 원하는 날짜에 귀국이 가능한 티켓으로 APEX 요금석은 일반석과 동일한 서비스를 받지만 실제요금은 최대 50%까지도 적게 내게 된다.
그 대신에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항공요금을 말할 때 적용되는 요금으로, 유효기간은 3개월이고, 최소한 40일에서 60일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예약시에는 최소한의 체류기간을 알려 줘야 하며 이동중 스탑오버는 허용되지 않는다. 또 예약을 취소할 경우는 최소료를 내야 하는데 그 액수는 티켓 금액의 10% 정도다. 아울러 이 티켓은 보통 왕복 항공권에만 있기 때문에 최초의 도착지와 귀국하는 장소가 동일해야 한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갑이라는 사람이 이 티켓을 이용해서 배낭여행을 하는데 그가 한국을 출발해서 파리에 맨 먼저 도착했다면,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는 장소 역시 파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을 짜는데 있어서 약간의 제한을 받게 되겠지만 그렇게 큰 무리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SUPER APEX는 요금이 보다 저렴하며 제한 규정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 티켓 역시 할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항공사마다 혹은 이 티켓을 판매하고 있는 여행사마다 각기 요금이 다르므로 항공권 구입시 주의가 요구된다.

전세기(Charters)
대형 여행사가 전세기를 빌려 패키지 상품에 이용하는 것으로 좌석단위 가격으로 계산하여 무척 싼 편이다.

펙스/슈퍼 펙스티켓
주로 유럽에서 단거리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할인 항공권으로 아펙스와 다른 점은 즉시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코노미 클래스에 한하며 최소할 경우 수수료가 비싸다. 최근에는 장거리 노선에도 적용되고 있다.

SCHEDULED CONSOLIDATION FARES
이는 최소 체제일을 명시한 후 차터 가격으로 주는 티켓으로 주로 여행사들이 블록을 잡아 여행객들에게 다시 팔 때 많이 사용되는 할인 항공권이다.

ITX
주로 대형 여행사들에게 적용되는 체계로 이 경우 항공요금에 호텔숙박요금, 아침식사, 공항에서 호텔간 왕복 교통편, 오전이나 오후 관광안내 등의 요금이 전부 포함되어 패키지 형식으로 제공되어 진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호텔예약이나 관광, 교통편을 따로 따로 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다.

예비석 요금 (STANDBY FARES)
여행자가 이용할 수 있는 최저의 요금이지만,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항공사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이 티켓은 항공사 직원에게만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공사의 사정이나 요금이 끊임없이 변하므로 여행하고자 하는 시기에 즈음해서 그러한 티켓이 나올지 여부를 문의해 보는 것도 좋다. 이 할인티켓은 편도/왕복 가릴 것 없이 언제나 살 수 있지만 이를 이용하려면 비행기 출발전 팔리지 않은 자리가 있어야 하고, 좌석도 먼저 않는 사람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일단 좌석을 확보하면 일반석과 동일한 대우를 받고 가격도 상당히 싸지만 자기가 원하는 날짜에 떠나리라는 보장이 없다. 주로 인구이동이 많은 노선의 경우 발매하는 티켓이다. 미국 국내선에서 많이 쓰인다.

DIY 항공요금
DO IT YOURSELF!
즉 모든 것을 그때 상황에 따라 자신이 직접 처리하는 것이다. 여행 경험이 풍부하고 시간, 경제적 제약이 그리 크지 않은 사람이라면 RTW로 커버 되지 않는 모스크바나 북경 같은 도시를 들러 보고 싶을 때 그 나라 항공사의 할인티켓을 구입, 여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할인 항공권을 늘 구입할 수 있다는 보장은 물론 없다.

COURIER SERVICE
이는 배달 서비스 회사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통용되고 있지 않지만 홍콩이나 미국 등에서는 신문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즉, DHL이나 FEDERAL EXPRESS 등의 회사에 의뢰하여 정확한 체재기간 및 출발 일시를 알려 주고 대신 갈 때는 이 회사들의 간단한 수하물을 소지하고 배달물을 관리, 공항의 지정된 장소로 옮겨 주고 올 때 역시 배달물을 관리하여 돌어 오는 것이다. 일반적인 여행자라면 힘들 수 있지만, 배낭여행자라면 경비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체재기간은 보통 7∼14일 정도에 한하며 주의 할 점은 반드시 공신력 있는 회사를 택해야 한다. 만일 개인적인 부탁 등으로 물건을 대신 옮겨주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에어패스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서 사용하는 자국내 주유권으로 보통 60일 이내라면 그 나라 내의 어디든지 둘러 볼 수 있다. 이 때 타고 내리는 횟수는 항공사 마다 다른데 제일 비싼 델타항공의 경우 8번까지 이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진행방향을 되돌아 올 수 없으며 떠난 곳과 마지막 종착지가 같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다.

세계 일주 항공권 (RTW:?Round The World Air Fares)
할인 항공권의 대명사로 불리 우는 편리한 제도이지만 제한 규정이 복잡하므로 충분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가격은 중간 기착지의 수와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이 항공권의 편리한 점은 출발일시와 항공편은 정해져 있지만 스케쥴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노선이라면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예약해야 한다. 구입은 여행사나 항공사 어디에서도 할 수 있지만 RTW 전문여행사에서 하는 편이 가장 바람직하다.

* 저자 / 출처 : http://blog.naver.com/etrangers/80012039894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발제문

4. 인상주의 (2) _ 최윤호 발제 (수유연구실 예술세미나 자료)

영국에서의 모더니즘

1660년의 왕정복고 이후의 영국에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처럼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는 없었다. ‘대불황(1870)’을 거치면서 영국의 시민계급은 자신감을 상실했고 부르주아지들에게 있어 확고했던 경제적 자유주의가 쇠퇴했으며 사회주의 운동이 힘을 얻게 된다. 이런 변화들 – 경쟁력 있는 외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식 – 은 외국으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특별히 프랑스의 문학은 당시 영국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러시아소설, 바그너, 입센, 니체 등의 영향이 프랑스로부터의 자극을 보완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부르주아지들의 자기의식이 동요되었다는 점인데, ‘영국만이 유일한 신의 사명을 가졌다는 믿음’이 흔들린 점과 ‘1880년대의 새로운 사회주의운동의 대두’가 그것이다. 이후 영국의 정신적 태도는 모든 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시기, 젊은 세대의 미학적·도덕적 표어는 모더니즘이었다. 이들이 부르짖는 자기실현이라는 말이 매우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세계의 도덕적 안정은 무너지고 말았으며, 사회생활의 모든 규범은 구속력을 상실했고 모든 것은 문젯거리가 되었고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880년대 영국 문예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비정치적인 개인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철저히 반부르주아적이었지만 결코 민주주의자들이거나 사회주의자들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의 향락적인 감각주의와 쾌락주의는 반사회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반속운동(反俗運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에 대한 반대였다. 이러한 속물혐오는 인습이 되고 마는데 영국의 모더니즘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속물혐오의 경향이며 인상주의가 영국에서 겪는 많은 변화는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속물혐오는 이미 과거의 일이었고, 상징주의자들은 보수적인 부르주아지에 대해 일종의 공감마저 느꼈다. 그에 반해 영국의 데까당스 문학은 – 프랑스에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가 각각 나누어 행했던 – 파괴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 시기의 영국문학은 ‘경박스런 표현방법에 대한 집착’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현상은 단순한 반항 심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본래의 목적은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려는데 있었다.

댄디즘

댄디즘 예술가의 언사나 사고방식, 그리고 특이성과 매너리즘은 예술의 멋을 모르는 위선적인 속물적 세계관에 대한 항의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댄디가 보헤미안의 대응현상 이었듯이, 영국에서는 댄디의 일부가 보헤미안의 지위를 차지한다. 보헤미안이 프롤레타리아트로 떨어진 예술가라고 한다면, 댄디는 상층계급 쪽으로 탈락해나간 부르주아 지식인인 셈이다. 둘 다 기계적이고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삶에 대한 항의의 표현인데, 영국인에게는 댄디의 모습이 더 선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댄디즘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탁월함과 독립이며, 일체의 존재와 행동에 있어 아무런 실제적인 목표나 동기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들레르는 댄디를 예술가보다도 상위에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들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종의 장인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댄디는 추구하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댄디의 이런 태도는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명예마저 던져버리겠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오스카와일드 가 자신의 생활을 예술작품화하고 자신의 문학작품보다 더 높게 평가한 것을 보면, 그가 어떤 효용이나 동기,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보들레르의 댄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가 자만심과 교태가 가득하다는 점이 영국 데까당스의 특색인 딜레땅띠즘과 유미주의의 결합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에서는 예술의 장식적인 면과 정교하고 화려한 면이 부각되며, 예술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며 완성된다. 프랑스에서 회화가 모든 예술의 표본이었다면 영국에서는 귀금속 세공이 표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체험의 결실이 아니라 체험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다…. 이 황홀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의 성공을 의미한다.”라고 페이터는 그의 저서에서 말하는데, 이 몇 마디에 모든 유미주의 운동의 강령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월터 페이터는 러스킨에서 시작하여 윌리엄모리스로 이어지는 발전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선구자들의 사회적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심미적 체험의 강도를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그의 경우, 인상주의는 향락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유미주의 운동과 프랑스 인상주의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비어즐리의 미술인데,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공예적·장식적인 필법은 프랑스의 거장들이 피했던 방법이며, 부르주아지들이 애호하는 세속적인 삽화화가와 무대장식가들을 낳게 되는 일련의 발전, 인상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발전의 시발점인 것이다.

지성주의

프랑스 문학에서 직관주의의 흐름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경향을 이루는 지성주의는 영국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와일드는 비평가를 예술가보다 상위에 두어, 세계를 비평가의 눈으로 보고자 했다. 동시대인들의 딜레땅뜨 적 인상은 여기서 연유한다. 이 지성주의의 기반 위에 메레디스와 헨리제임즈가 있다. 영국 문학사에서, 죠지엘리어트가 지적 수준은 높으나 훨씬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는데 반하여, 메레디스와 헨리제임즈의 작품은 극소수의 지식층만이 읽었을 뿐이었고,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나 다양한 인물들보다는 흠잡을 데 없는 문체와 인생에 대한 원숙하며 권위 있는 판단을 요구했다. 두 작가 중 헨리제임즈의 경우, 흔히 지적 정열에까지 도달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두 작가 모두가 현실에 대해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관련을 갖는 예술을 대표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국제적 인상주의

19세기말에 이르러 인상주의는 유럽 전역에 걸쳐 주도적인 양식이 된다. 시인들의 관심사는 객관적 현실이 아닌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이었으며 이런 기분과 분위기의 예술이 문학의 모든 형식을 서정위주, 혹은 이미지와 음악, 색조와 뉘앙스로 변하게 한다.

프랑스 이외의 경우 묘사의 인상주의적 특징들은 상징주의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나, 프랑스 문학만을 염두에 둔다면 인상주의는 상징주의와 동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적이요 감각주의적인 데 반해, 상징주의는 어디까지나 관념론적이며 정신주의적이다. 결정적으로 프랑스의 상징주의는 항상 행동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으나, 빈·독일·러시아·이탈리아의 인상주의는 수동적이며 환경에 무저항적인 탐닉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양자 모두가 가진 비합리적 요소는 수동성마저도 분별없는 행동주의로 변하게 하기도 했다. 일체의 행동성을 외면하는 인상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대표하는 것은 빈의 시인들인데, 빈의 인상주의가 그 특유의 섬세하고 수동적인 성격을 갖게 된 데에는 도시가 가진 특성이 한 몫을 했다. 빈의 문학은 부르주아지의 자식들을 비롯한, 제2세들의 신명 없는 쾌락주의를 표현하는 문학인데, 회의적이고 자기 풍자적이며 인상주의의 잠재적 내용인 ‘먼 것과 가까운 것의 합치’,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들의 서먹서먹함’, ‘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되어있다는 느낌’ 등이 그 기본적 체험이 된다.
“어찌 된 일인가, 바로 어제 같은 나날들이 영원히 흘러가서 완전히 없어져버린 것은?”이라는 호프만스탈의 물음과,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죽는다.”는 발자끄의 말에서, 소외와 고독의 의식이 1830년 이후의 유럽사회에 지배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호프

유럽의 인상주의 역사에서, 러시아가 인상주의를 받아들여서 인상주의운동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체호프와 같은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까지는 계몽주의적인 분위기였으며, 유미주의나 데까당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러시아에서 그런 인물을 대하게 되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기술발달로 인하여 사상이 빠르게 전파되었고, 서구의 산업화된 경제형태가 도입되었으며, 그로 인해 서구와 유사한 지식인에 해당하는 계층과 ‘권태‘ 비슷한 생활감정을 낳는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드가가 중요한 부분을 그림의 가장자리로 몰아내어 액자에 의해 끊어지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호프는 그의 소설과 희곡을 ‘발단’에서 끝맺음으로써 작품이 도중에 중단되었거나 우연히 아무렇게나 끝맺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정공법과는 반대되는 우연의 형식원리를 따르고 있다. ‘잘 만들어진 각본’의 경우 중요한 특색이던 여러 효과들을 포기하기에 이르는데, 과거 무대에 잘 맞는 희곡이 플롯의 통일성, 완결성, 균형성의 형식원리를 따름으로써 성공했던 데 비해, 체호프의 인상주의 희곡은 사건이 적고 극적인 갈등조차 전무했다. 등장인물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서서히 망해가며, 아무 사건도 시간도 없는 삶의 일상성 속에 휩쓸려 들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인생을 고스란히 내맡기는데, 이 운명은 파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환멸을 통해 완성된다.

자연주의 연극의 문제

플롯이나 극적 진전이 없는 이런 연극의 존재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어왔다. ‘잘 만들어진 각본’의 연극은 비록 그것이 자연주의의 어떤 요소들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희곡의 무대기술적 관습과 영웅적 주인공의 이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주의가 극예술을 정복하는 것은 1880년대, 즉 소설에서의 자연주의가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다음이다. 앙리베끄와 그의 후계자들은 발자끄나 플로베르에 의해 이미 문학의 공유재산이 된 것을 무대에 써먹은 것에 불과했지만 부르주아 관객들의 반응은 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연주의 연극은 프랑스 바깥에서, 즉 스칸디나비아제국과 독일 및 러시아에서 형성되었다. 자연주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자연주의 연극의 관습을 받아들였으며 적어도 입센, 브리외, 쇼 등의 희곡에 한해서는 그들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해 공격적인 그 태도를 탓할 뿐, 연극양식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드디어는 반부르주아적인 희곡 자체도 부르주아 관객들을 사로잡아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자신의 생존능력을 스스로 증명한 자연주의 연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와 미학자들은 고전주의적인 희곡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고전주의 연극에서의 간결성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는 점, 공연시간에 제한이 없는 점, 그리고 극중 대화가 잡다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운명, 성격, 행동의 고찰이 아니라 현실의 세부적인 복사’라면서 자연주의 연극을 비판했다. 하지만 실제로 자연주의 연극에서 달라진 것은, 현실 자체가 구체적 제약과 더불어 ‘운명’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라는 것이 다면적이고 복잡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는 것뿐이다.

연극에서 사건의 줄거리가 사라져가는 것은, ‘이야기적 요소가 제거되어가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예술분야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었는데, 미술 분야에서 일화적 회화를 옹호하던 평론이 거의 없었던데 반해, 연극에서는 플롯 경시에 대한 격렬한 비난이 있었다. 특히 독일에서 가장 심했던 자연주의 연극에 대한 반대에는 여러 가지의 상이한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반동의 경향은 간접적인 것에 불과했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념비적 연극’이라는 구상이 갖는 유혹이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함께 자라난 자연주의보다도, 과거의 귀족 및 부르주아지의 고전주의 쪽을 장래의 민중연극을 위한 양식으로 생각했던 것은 당시의 개념혼란을 여실히 보여준다.
새로운 연극에 가해진 가장 격렬한 비판은 그 결정론과 상대주의에 대한 것이다. 내적 자유·외적 자유가 없고 절대적 가치나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도덕률이 없는데 어떻게 진정한 희곡(비극적인 희곡)이 가능하겠냐고 새로운 연극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윤리적 규범이 상대적인 것이고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 인정된다면 진정한 극적 갈등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런 일련의 논의는 개념의 혼동, 사이비문제들과 궤변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는 비극적 희곡을 희곡 전체와 혼동하거나 적어도 이상적 희곡의 형식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이런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상대적인 가치로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얼마든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 비극적 효과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신봉하는 관중에게 그러한 가치위협의 현상을 꼭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관중 자신이 그러한 가치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말이다.

입센

입센은 당대의 세계관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가장 강렬하게 희곡으로 표현한 사람이었다. 입센의 윤리적 정열, 선택과 결단해야만 한다는 의식, 자신에 대한 심판으로써의 작품 활동 등, 이 모든 것은 키에르 케고르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전적으로 비 낭만적이요 일체의 유미주의와 결별한 그의 윤리관 자체가 키에르 케고르의 영향인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들이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키에르 케고르는 이러한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종교적·윤리적 체험이 미나 천재와 전혀 무관하며, 신앙상의 영웅이란 예술적인 천재와 전혀 별개의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의 비현실주의란 것은 당대의 일반적 과제들 중 하나로서, 이 문제와의 대결을 위해서 특별한 자극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전체가 이상과 현실, 시와 진실, 시와 산문의 갈등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었으며 19세기의 중요한 사상가들은 누구나 현대문화의 치명적 불행이 현실감각의 결여에 있음을 지적했다. 이 점에서 입센은 여러 선구자들의 싸움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입센이 이 공동의 적에 가한 치명타는 바로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에 내재하는 희비극성의 폭로였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그 주인공에게 동정으로 대했던 것에 비해, 입센은 브란드나 페르귄트와 같은 그의 인물들을 도덕적으로 철저히 파멸시킨다. 이런 낭만주의적 인물들의 이상적 요구는 이기주의이며, 그 냉혹성은 순진함 만으로 완화되지는 않는다. 돈키호테의 이상주의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서 준열했던 데 반해 입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은 오로지 남에 대해서만 준엄한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입센이 당시의 젊은이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 것은 그의 개인주의에서 비롯된다. 그는 근본적으로는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로서 개성적 자유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았으며, ‘개인은 그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사회는 개인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라고도 했다. 그는 사회문제 자체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다. 그의 사고는 개인적 윤리문제를 중심과제로 삼았고, 사회 자체는 그에게 있어 ‘악의 원리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사회에서 어리석음과 편견과 폭력의 지배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성향은 결국 귀족적, 보수적 영웅주의 윤리에 도달하게 된다.

유럽에서 그가 진보적 인사로 통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조국 노르웨이에서는 비외론슨의 급진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파의 대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영향력은 작품에서보다는 그의 선동가적·교훈자적 역할에 힘입은 바가 컸고, 사람들은 그를 불굴의 투사로서 존경했지만 정치가로서의 입센은 적극적인 무언가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부르주아적 편견과 기존의 사회에 맞섰지만 자유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가 믿지 않았고, 종국에 가서는 서글픈 숙명론자로서의 정체가 드러나고 마는 개혁가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인 루베크는 예술가에 대한 입센의 생각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인물이다. “이레네여, 그대와 함께, 아 그대와 함께 비다에서 하루의 여름밤을 보낼 수 있었더라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었을 것을!” 하고 부르짖는 이 절규야말로 현대예술 전체에 대한 심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버나드 쇼

버나드 쇼는 낭만주의에 대한 입센의 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계속하고, 유럽이 당면한 중대한 문제에 관한 토론을 심화시킨 유일한 작가이다. 이때에 이르러 낭만주의적 영웅들의 극적이고 비극적인 거창한 제스처에 대한 신앙이 깨뜨려진다. 순전히 장식적인 것, 거창하게 영웅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것들이 모두 회의의 대상이 되고, 일체의 감상성과 비현실주의가 속임수요 엉터리 수작임이 폭로된다. 자기기만의 심리학은 쇼 문학의 근원이다.
그는 거짓말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와 사회적 욕망에 의해 제약되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이 지나친 합리적 사고로 인해서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따라서 쇼의 목표는 합리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이며 그의 주인공들의 주요 정신능력은 이성이 아닌 의지였던 것이다. 그가 극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문학형식 중 제일 동적인 장르에서 그의 사상에 가장 알맞은 형식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지성주의적·주지주의적 성격을 띠었는데 그것은 비극적인 효과를 만들기 위한 측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연극을 ‘극적 토론’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연극이 소화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은 사람들이 인기 있는 오락적 작품들에 둘러싸여있었기 때문이며, 비평가와 관객이 모두 이런 새로운 연극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들이 과거의 선구자들보다도 더 엄격한 지성주의를 유지했던 반면에,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수준 높은 관객들은 그의 연극들을 즐기기에 더없이 적당했다.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쇼의 공격이 그들의 돈을 빼앗아가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순간, 쇼의 현란한 지적 곡예조차 안심하고 즐겼던 것이다. 결국에 가서 밝혀진 일이지만, 쇼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계급과의 연대감에서 움직인 작가였고, 예로부터 이 계급의 정신적 습성의 하나인 ‘자기비판의 메가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폭로의 심리학

전환기에 있어 세계관의 기본 방향을 규정해주는 심리학은 ‘폭로의 심리학’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정신생활의 표면이 감정 및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하거나 왜곡한 것이라는 인식을 했었는데, 이런 기만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창시 후의 인간타락에 있었으며, 이런 인간의 나약함과 원한을 윤리적 가치와 이타적·금욕적 이상으로 내세우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들의 폭로작업에 동원된 사고방식은 역사적 유물론에서 처음 쓰인 방식이었는데, 맑스가 강조하는 것 역시 ‘인간의 의식은 왜곡되고 상처 입은 것이며, 의식은 그 자체의 편향된 시각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에서의 ‘합리화’의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형성, ‘허위의식’의 개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맑스의 역사철학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은 ‘계급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올바른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통찰’이다.

한편으로, 이런 역사적 유물론 자체는 그 폭로의 대상이었던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세계관의 한 소산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가 서구의 의식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가 되기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이래의 새로운 사고방식의 근본원칙은 바로 ‘의심의 태도’였는데, 이미 널리 퍼져있었던 만큼 개개인의 사상가와 학자가 자신이 역사적 유물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이런 폭로의 이념은 이 세기의 공통의 재산으로서, 니체와 맑스, 프로이트간에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느냐를 말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들이 시대의 위기적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유럽이 그 넘치는 자신감을 상실한 심리상태의 표현이었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이론 또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론 형성이 상당히 진전되어서야 정신분석의 여러 문제들의 근원이 된 기본적 체험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그 기본적 체험이란 바로 ‘문명에 대한 거북스러움’이었다. 그는 그 ‘불안한 균형의 느낌’이 인간의 본능생활, 특히 성애충동에 가해진 억압에서 연유한다고 보았다.
노이로제는 삶의 요소들 중에서 경제·사회·정치적 부분들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없지만, 프로이트는 철저히 자연과학적인 그의 세계관으로 인해서 사회학적 요인들을 올바로 포착하지 못했다. 그에 의하면 문명의 형태는 역사적·사회적 형성물이 아닌, 여러 충돌들의 기계적 발현이다.
성욕충동을 모든 창조적·정신적 원천으로 삼는 그의 이론은 ‘인간본성’이라는 불변의 설정으로 인해서 보수적 관념론의 잔재를 보존하고 있다며 맑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그 비난은 타당하다. 반면에 정신분석이 부르주아지들의 퇴폐적 산물이요, 이 계급과 동시에 사라질 운명이라고 하는 맑시스트들의 비난은 독선이다.
토마스만은 프로이트가 세기말의 비합리주의에 연루되어있음을 강조하지만, 단지 인간내면의 어두움에 집중한 신낭만주의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만이 아니라, 문명과 이성 이전의 경지를 논하려는 낭만주의적 사고 전체의 시작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정신분석의 위험은 원시적 인간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그것이 근본적으로 충동과 생물학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험적으로 주어져 변화가 불가능한 모든 비변증법적 인간개념에는 비합리주의적 보수주의적 경향이 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비관주의자이거나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성에 대한 회의를 품었지만 동시에 충동을 지배하는 수단으로서 우리의 지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했다.

그의 폭로의 심리학은 인상주의적 생활감정이나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만의 개념은 하나의 인상주의적 사상이며 프로이트가 말한 ‘인간은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모두 숨겨진 삶을 산다.’는 이론은 인상주의가 나오기 이전에는 아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사고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실용주의

니체는 ‘진리가 어떤 절대의 팔에 매달려 있던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진리라고 일컫는 것들은 실상 삶을 촉진시키고 삶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하며 권력을 고양시키는 거짓말 들이라고 그는 주장하는데, 실용주의의 진리개념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행동주의적·공리주의적 성격의 것이다.
효과적이고 유용하고 쓸모 있는 것, 세월에 견뎌내는 것, 윌리엄 제임즈의 표현대로 ‘수지가 맞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것인데, 인상주의와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인식이론은 상상하기 어렵다. 모든 진리는 일정한 현실성을 지닐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된다. 그것 자체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느 것과도 무관하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이란 떼어놓을 수 없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서 그 개별적인 구성요소는 서로서로의 의존관계를 떠나서는 규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실용주의는 예술가의 인상주의적 체험에서 나왔다.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이 진리에 대해 갖는 관계야말로 실용주의 철학이 경험 일반에 대해 설정하는 관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베르그쏭과 프루스트

인상주의적 사고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 특히 인상주의의 본질에 밀착된 모체인 ‘시간’에 대한 베르그쏭의 해석에서 가장 순수한 표현을 얻는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되풀이되지 않을 ‘순간의 일회성’이라는 것이 19세기의 기본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주의 소설 전체가, 그중에서도 특히 플로베르의 작품은 이러한 체험의 묘사이자 분석이었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베르그쏭의 세계관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는, 플로베르는 아직도 인생의 이상적 실체를 갉아먹는 하나의 ‘파괴요인’으로 시간을 파악했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시간관, 그리고 체험적 현실 전체에 대한 평가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서 먼저 인상파의 그림에서, 다음에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 끝으로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며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오히려 지나가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이런 프루스트의 소설에 와서 베르그쏭의 시간관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최선의 것이 고뇌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열반으로 생각하리라.

사람들은 낭만주의가 나타난 이후, 거듭 되풀이하여 인생의 상실에 대한 책임을 예술에게 물어왔고, 플로베르가 말하는 인생의 소유와 표현간의 선택을 비극적인 양자택일로 보아왔다. 이에 반해 관조, 회상, 예술의 길이 우리가 인생을 소유하고 체험하는 오직 단 하나의 가능한 형식이라고 본 최초의 인물이 프루스트이다. 버뜨,,,,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간관이 이시대의 유미주의 자체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런 것은 외관상의 온순함일 뿐, 왜냐 하면 프루스트에 의한 인생가치의 전도는 병든 한 인간의, 생매장된 한 인간의 자위와 자기기만이었기 때문이다.

* Author / Gathered from : 최윤호가 ?문학과_예술의_사회사 부분을 요약함

관찰자의 기술

4. 관찰자의 기술 _ 최윤호 발제 (수유연구실 예술세미나 자료)

19세기 초의 괴테에 이르러 잔상과 같은 주관적 시각현상은 과거의 소외된 위치에서 벗어나 광학적 진리의 위치를 획득한다. 이런 ‘주관적 현상에 일치하는 새로운 객관성’이 갖는 의미는 아래와 같다.

# 잔상의 특권화로 인하여, 인간은 감각적 지각을 외부지시체와 어떤 필연적인 연계가 단절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의 감각의 출현, 잔상과 그것이 수반하는 변조는 주체에 의해서 생산되고, 주체 안에서 생산된 자발적인 시각의 이론적이고 경험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 시간성이 관찰의 구성요소가 되다.”’

그 당시, 시간 속에서 경험한 자기 자신의 주관성이 전환되는 과정은 ‘보는 행위’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는 대상에 완전한 초점을 두고 있는, 관찰자에 대한 데카르트적 이상을 해체시켜갔다. 잔상과 주관적 시각의 시간성의 문제는 19세기에 큰 인식론적 이슈가 되었다.

# 셀링(Schelling)의 ‘일시적 중첩에 기초한 시각’의 묘사 : … 단편적인 방식으로 조각조각 생산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 스스로 완성하기 위해서 각각의 사물은 특정 순간들을 통과해 간다. – 서로를 따라가는 과정들의 계열이, 뒤의 것들이 언제나 앞의 것을 포함하며 각각의 사물들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 헤겔 : 로크적 지각을 거부하고 일시적이고 역사적인 펼쳐짐 안에 지각을 전개. “진실은 조폐국에서 틀에 맞춰 발행되는 동전과 같지 않으며 … ” 감각지각의 명백한 확실성을 공격.
# 괴테 : “일종의 대립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눈은 극단과 극단을, 중간적인 것과 중간적인 것을 대조시키는 속에서 이런 대립적인 인상들을 조합한다. 인상이 연속적이건 동시적이건 전체를 구성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이룬다.”

로크와 꽁디악이 관찰을 감각들의 연속체로 이해했다면 괴테와 헤겔은 관찰을 힘과 관계들의 상호작용이라고 보았다. p154 당시의 다른 작가들은 지각을 연속적 과정, 일시적으로 퍼져있는 내용들의 흐름으로 묘사했다. 앙페르 : “연속적인 차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결과”

허바트(Johann Friedrich Herbart)는 정신적 경험을 지배하는 수학법칙을 공식화함으로써 “자극-반응 심리학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었다. 칸트가 경험을 종합하고 배열하는 정신의 수용능력을 고려했다면, 그는 주체의 내적 비일관성과 탈조직화에 대한 경계를 드러냈다. 그에게 있어 의식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무질서한 흐름으로부터 시작한다. 관념들은 이전이나 동시에 발생한 관념들 또는 ‘현시’와 융합되고 희석되며 뒤섞인다. 그는 관념들의 충돌과 융합의 과정에서 진실을 추출해낸다. 이런 지각을 수학화, 계량화하려는 복잡한 시도는 이후의 수량적 감각 연구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으며 한편으로 그의 작업은 훈육적, 도덕적인 관념의 주입과 관련한 그의 교육학적 이론과도 결부되어있었다.

1820년대까지 유럽 전역에서는 잔상에 대한 계량적 연구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독일의 푸르기니에는 잔상의 지속과 변조에 관한 괴테의 연구를 이어가게 되는데, 그의 연구는 잔상의 지속시간과 조건에 따른 변화와 관련한 것이었다. 다음세대의 연구자들은 푸르기니에의 경험적 연구와 허바트의 수학적 방법을 병행할 것이었다. p158,159그림 푸르기니에는 최초로 잔상의 상이한 형태를 구분했는데 그의 그림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이 역설적으로 객관적인 것임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연구는 17-8세기의 굴절계의 투명성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유효성과 적합성이라는 다양한 영역을 가진 생산적 영토로서 눈을 재배치했다.

1820년대 중반부터는 그동안의 경험적인 잔상연구의 결과로 수많은 광학기구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초기에 그것은 과학적 관찰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곧 대중의 오락물이 되었다. 그런 기구와 기술들은 지각이 순간적이지 않다는 개념과 대상 사이가 분리되었다는 개념을 사용했는데, 잔상연구는 감각이 혼합되거나 융합되는, 그런 ‘보는 행위와 얽힌 지속성’을 통해 지각의 변조와 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p161,162그림 회전판(thaumatrope, 1825 John Paris) _ “… 1/8초 동안 잔상이 지속된다. …” 이런 “철학적 장난감”의 단순함은 이미지의 직조되고 환각적인 본성과 지각과 그 대상 사이의 단절 모두를 명확하게 해주었다.

로제트(1825)와 물리학자 패러데이(Michel Faraday)는 회전하는 바퀴의 착시현상을 연구했으며 1820년대 후반에 벨기에의 플라토(Joseph Plateau)도 잔상의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매우 유력한 “시각의 잔존” 이론을 만들었다. p166 1830년대 초 그는 페니키스티코프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제트와 페러데이 등의 연구와 그의 연구를 통합한 것이었다. p164,166그림 이후의 쉬탐페의 스트로보스코프아래그림와 호너의 주트로프도 유사하다.

이런 장비의 영화사적 맥락에서의 접근은 각각의 장치가 가진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특이성들을 무시한다. 시각의 잔존이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설명력을 갖고 작동하는 조건과 환경들, 그리고 그것이 가정한 역사적 주체/관찰자이다. p169 모든 연구들에서 조사의 대상은 관찰자 자신의 자기-관찰과, 생활에서의 경험들이었다.

페니키스티스코프는 19세기에 “기술이 복잡한 훈련들로 인간의 감각중추를 지배해왔다.”는 벤야민의 주장을 구체화시킨다. 이 도구가 관찰자에게 요구한 물리적 위치는 ‘즉시 구경꾼이 되어버리는 개별적 육체’, ‘경험적 연구와 관찰의 주체’, ‘기계 생산의 한 요소’라는 세 가지의 혼재였다. 이점이 스펙터클과 감시가 대립하는 푸코의 주장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이다. p171 19세기 관찰자의 생산은 규율과 규제의 새로운 절차와 일치했다.

# 디오라마 : 움직이지 않는 관찰자를 기계 속에 통합. 자발성 제거 p172,173

1815년 브루스터경이 발명한 만화경은 페니키스티스코프의 훈육적인 구조와는 급진적으로 달라보였는데 그것은 보들레르에게는 근대성 그 자체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의식을 부여받은 만화경”이 되는 것은 “보편적인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목표였다. 한편 맑스와 엥겔스에게 만화경에서의 다중성은 거울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사진술을 제외하면 19세기 시각이미지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입체경이었는데 그것은 공간이 천부적인 것인지에 관한 당시의 공간지각 논쟁과 관련이 깊다. 1830년대에 과학자들은 보는 육체를 양안적이라고 규정하고 두 시각축의 각도상의 차이를 양화했으며 생리학적 근거를 설명했다. 특별히 1833년에 휘트스톤은 ‘근접한 대상’에 있어서의 시각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의 이론에 의하면 지각경험은 본질적으로 ‘두 눈의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브루스터도 그런 차이에 대해서 ‘그건 마술과 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라고 확신했다. p183@ 휘트스톤은 입체경을 통해 회화와 같은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물리적 물체의 존재를 ‘흉내’내려고 했다. 그는 이미지와 대상의 완전한 등치를 추구했고, 그런 면에서 디오라마에서 이용된 회화의 기술들과 달리 입체경의 ‘가까운 대상’이 더 생생하다고 생각했다. ‘만질 수 있는..’ 19세기의 어떠한 재현의 형태들도 실제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을 그만큼 융합시키지 못했다.

입체경의 조사

이미지 안의 두 시각축이 수렴하는 각도에서 중요한 변화를 요구하는 지점들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물체로 가득 찬 공간이어야 하고 당시의 부르주아들이 가졌던 비어있음에 대한 공포와도 연관된다. p178그림 이런 이미지에서의 깊이는 사진이나 회화에서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입체경에서의 이미지를 조직하는 것은 ‘평면’이다. 물체들 사이의 공간은 점진적인 후퇴가 아니며 형태는 불확실하게 분리되는데 이것은 고전적인 무대 디자인과도 유사하다.
입체경은 근본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모여 있기만 한 장(場)을 드러낸다. 우리 눈은 3차원 전 영역을 완전히 파악하기보다는 분리된 지역에 대한 국지경험으로서 인식한다. 19세기 회화의 범위는 집단들과 평면들 간의 비일관성에 주목했는데, 입체경과 회화에서는 동일하게, 새로이 구축된 시각공간의 출현과 광범위한 관찰자의 변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p191

재현의 수단으로서 입체경은 ‘외설적’이다. 그것은 카옵의 극장적인 배치에서의 무대장치 같은 관계, 즉 눈과 이미지와의 거리를 파괴했고, 벤야민이 ‘근대성의 시각문화’에서의 핵심으로 보았던 것의 완성이었다.

1838년 휘트스톤의 문제는 ‘물체 그 자체’와 평평한 표면에 투사되는 ‘그것’에 관한 것이었다. 입체경을 통해 보는 것은 이미 재생산된 조각난 세상을 두 개의 비정체적인 모델이며 기계적인 재구축을 통한 것이었다. p193 탈중심화된 관찰자와 입체경의 분산-중복된 기호들의 제도화는 수세기동안 관찰자와 대상에 상호 부여되었던 ‘조망점’의 근절을 뜻한다. p193그림 ‘바르뜨의 준거적 환영??’p194

입체경은 육체적 ‘근접성’과 ‘부동성’을 요구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눈과 시각기구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환유’가 된다. 둘은 동일한 활동 평면에 있는 인접한 장치였다. p195 시각장치는 맑스의 ‘도구’와 같은 변화를 겪는다. “적절한 도구가 인간에 의해 채택되는 순간, ….기계는 단순한 도구들을 대체한다.” p197 도구는 인간주체의 타고난 힘과 환유적인 관계였다. 19세기의 도구주의는 “인간의 본성은 도구가 되는 것, 그의 소명은 그의 지위에 의해 설정되고 일하기 위해 배치된다는 은연중의 가정”에 기초한다. p198

1830, 1840년대의 광학기구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들이 수반하는 억압의 형태와 작동구조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광학적인 경험은 기구 안의 이미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페나키스티스코프나 입체경들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발명과 개선과정의 일부로서가 아니었으며, 그 초기의 형태들이 당대의 욕구와 용도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라짐의 이유 중 하나로 ‘요술환등기’를 들 수 있는데, 그것과 달리 입체경에서는 그 생산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산이 엄폐되지 않는’ 입체경은 기구의 물리적 성질에 의존했다. 그 허상은 더욱 완전한 보전을 하는 형태에 자리를 내어준다. 카옵에서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직 사실적이라는 허구를 재생산하고 지속하게 했다. 사진은 자연스러운 그림코드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여겨졌는데, 사진은 좁은 범위의 기술적 가능성에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카옵에서의 관찰자와의 관계성을 이미 없애고 단일한 것이 되었으며 새로운 카메라를 관찰자와는 기본적으로 독립된 별개로 취급했다. 그러나 카메라는 자신을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비물질로 가장하고 있었다.

스펙터클의 앞선 역사, 그리고 모더니즘의 순수지각은 새롭게 발견된, 완전히 드러난 관찰자의 영역에 위치한다. 그러나 양자의 최종적 승리는 시각의 바탕으로서의 ‘육체의 부정’과 그 맥동 및 환영에 의존하고 있다.

* 관찰자의_기술을 요약함.

2005년 국민대논문 조각글들 모음

110. 연구목적과 방법

이 연구는 현재의 특정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에서 드러나는 대안성을 디자인사의 흐름 위에서 고찰하는 작업이다. 어떤 방식이 대안(代案) 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대신하여 변화하였다는 의미와 같다.
2000년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디자이너스브랜드와 같은 디자이너의 독립적 사업들이 출현했고, 영국, 일본 등의 해외에서는 특정한 디자이너그룹에 의해서, 과거와는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디자인전시행사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예로 든 이러한 각각의 활동들은, 디자인 외부에 의해서 통합적으로 시작되거나 관리되지 않았고, 경계 를 인정하지 않고 뒤섞이는 등, 전반적으로 과거의 통념과 거리를 두는 편이어서, 혁신을 원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흥미로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그 다양성만큼이나 산만한 모습들로 인하여 과연 이것이 일정한 비교의 대상으로 묶여질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전체를 흐르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디자인 생산, 유통과정에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이 디자인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작업은, 현재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에서 발견되는 대안성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특히 1930년대를 전후하여, 영향력 있는 유통방식으로서 디자인사에 등장하는 디자인컨설턴시, 고용디자인 등의 방식들은, 오래된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상존하는 비교대상이다. 이 논문은 크게 디자인 개념이 등장한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주된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을 다루는 부분과 대안으로서 새로이 등장한 현재의 방식을 알아보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디자인사를 다루는 여러 문헌자료들을 찾아보는 일, 특히 디자인컨설턴시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살피는 일이 과거의 상황을 살펴보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디자인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쓰여졌던 방법은, 능력 있는 개인에 집중하거나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물의 외형적 흐름을 읽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들이 담고 있는 디자이너의 눈부신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영웅들의 이야기는 현재의 디자이너들에게 설득력 있는 과거의 경험이기보다는 무용담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자는 시대의 사회상과 디자인이 가진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변화의 원인을 찾는 에이드리언 포티의 디자인 연구방법을 택했으며 , 사고의 기준을 그에 맞추려 노력했다. 이런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된 사물의 형태나 색채가 아니라 그 주변의 상세한 상황들이다.
논문에서 대안적이라고 언급되는 현재의 활동들은, 주도적으로 이뤄지는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들에 비하여 명확히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가 대안적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이 앞으로 성공할 방식임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정작 연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점을 읽는 보다 지혜로운 눈을 가지는 일이다. 새로이 등장한 대안이라는 것 또한 영원히 지켜질 무엇이기보다는, 언젠가는 또 다른 대안에 의해 사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2. 산업 디자인

1. 1750, 산업 디자인의 시작
2. 산업 디자인의 생산(디자이너)과 유통(제품)

200. 산업 디자인

영국의 산업혁명과 기계화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인 반면에, 디자인을 단순히 제품 생산에 있어 필요한 종속적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기계화가 대량생산체계를 확립하던 때에, 그것을 좀 더 잘 팔리도록 형상화하기 위해서 디자인이 시작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바로 그것인데, 대량생산과 유통의 방식이 확립된 시점인 산업혁명기나 1920년대의 미국을 본격적인 디자인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그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런 종류의 견해에 대하여, 영국의 디자인이론가 에이드리언 포티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일군의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나타났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주장하든지 그들을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이몬드 로위나 헨리 드뤼피스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이 어떤 산업분야에서는 이미 한 세기 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가 주목했던 점은 산업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확실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시점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다, 사회적 취향과 제조기술의 융합 을 이끌어내는 과정으로서의 산업 디자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점이었고, 그 기준에 의하면 두 시기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실제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8세기 영국의 웨지우드(Wedgwood) 나 매슈볼턴(Matthew Boulton) 의 회사에서는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이 제작 과정에서 분리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를 통해 생산, 소비 양측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이후의 컨설턴트 디자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디자인의 등장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결과물인 제품이나 디자이너의 성공여부에 집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핵심이, 생산공정 상에서 ‘복잡한 사회적 요소의 합성’ 인 디자인 작업이 분리된 것이며, 그러한 생산방식의 변화요인은 디자이너의 품성이나 제품 등의 결과물보다도 당시의 사회시스템에 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10. 디자인의 분리

211-0. 중세유럽의 생산

16세기 초반에 유럽의 교역량이 전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뉘렌베르크나 피렌체 등의 신흥도시들에는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 그리고 성직자들을 위한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대형공방들이 생겨났다. 이런 공방들에서는 물건들을 제작할 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공적 방법을 사용했던 반면에, 전문성은 과거에 비해 한층 높아진 상태였고, 단일한 물품들을 반복적으로 복제해냈다. 존 헤스켓(John Heskett) 에 의하면, 이 시기의 예술가와 기술자의 구분은 훈련에 의해 성취 가능한 기술적 능력에 따라 행해지는 유동적 구분이었다. 한편으로, 교역의 증가에 따라 생산양도 늘어났는데, 이에 발맞춰 물품의 외형을 보다 돋보이게 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져서 생산과정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패턴북 은 이런 요구를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응용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가구나 직물 등의 산업 전반에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고, 출판술의 발달로 인해 광범위한 영역으로 보급되었다. 결과적으로 패턴북의 사용으로 인해, 생산과정에서 장식작업에 들여야 할 직공들의 노력이 감소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될 수 있었다. 이런 패턴북이,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에 속해있던 숙련공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고, 구분된 집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제작된 것은, 디자인이 생산과정에서 분리됨으로써 비로소 구분된다는 특성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다.
국가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의 유럽은 정치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의 측면에서 근대적인 발전이 두드러지지만 과거의 봉건적 요소나 세력이 남아있는 시기였다. 이런 절대왕정국가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행정, 사법, 군사의 측면에서 중앙집권이 달성되었다. 한편으로, 국제무역이 성행하던 16세기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에 입각한 자본주의가 도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절대왕정의 핵심이었던 관료제적 중앙집권과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왜냐하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국가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상업의 중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16세기의 급격한 호황에 뒤이어 17세기의 유럽 전반은 암흑의 세기(Black Century)로 불릴 정도로 상대적인 침체를 맞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17세기는 팽창의 시기였으며 유럽 경제의 중심은 이전의 지중해로부터 북서유럽으로 이동하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그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해 궁정예술가들과 장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왕실은 다수의 공장들을 세우고 부속 학교까지 세웠는데, 1667년에 파리의 고블랭(Gobelins)에 세워진 공장의 경우 수백 명의 장인들이 일할 정도였다. 당시의 중, 서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고, 다른 중, 소 군주국들에도 프랑스식의 궁정스타일과 중상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각국의 예술, 장인 지원체계 또한 왕실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생산되는 물품을 군주들이 통제했다. 한편으로, 당시의 유럽 도자기들은 전반적으로 그 질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각국의 왕실들이 도자기공방을 세우는데 영향을 주었다. 북부 독일의 작센(Sachsen, Saxony) 지방에는 1709년에 메상(Meissen)공방이 설립되었다. 초기에 이 공방에서 만들어지던 물품들은 궁정예술가들에 의해서 장식되었으나 1720년대 중반에는 미술학교를 통해 배출된 조각가들이 고용되어 모델링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주된 디자인 소스였던 패턴북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의 물품들은 주로 왕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이 물품의 생산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물품의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는 왕실재정악화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시민계급(bourgeoisie)의 급격한 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18세기 중반, 세력이 커진 시민계급과 중산층에 걸쳐 차와 커피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도자기의 수요 또한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장의 형성으로 인해, 왕실을 대상으로 한 예술성 중심의 생산방식은 상업적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공방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서 판로의 확장, 즉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공방의 상업적 성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으로 인해 왕실이 붕괴되어 후원을 바랄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 상업적 성공에 매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의 사회상은 다른 유럽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대륙의 절대군주제하에서 왕실이 물품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것에 반해, 영국은 의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들의 지지로 웨지우드, 치펀데일(Chippendale), 매슈볼턴과 같은 사업가와 기술혁신가들의 자유무역과 개인적 이윤추구가 보장되었다.

211. 웨지우드

1759년 웨지우드는 독립적인 도자기 생산 회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의 영국 도자기 수요는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고, 식민지의 개척으로 인해 해외시장 또한 확대되었다. 과거의 주된 판매지역이었던 회사주변 지역보다, 폭넓게 확대된 국내외의 시장에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는 공장의 생산방식이 보다 효율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포티가 “웨지우드의 놀라운 성공은 공장에서의 합리적 생산방식, 뛰어난 마케팅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제품에 대한 열정에 기인하고 있다.” 고 한 것과 같이, 웨지우드는 신고전주의의 도입이나 소지의 개발과 같은 일련의 실험들을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당면한 효율화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웨지우드는 새로운 판매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매장에 방문한 고객이 견본을 보고 주문을 하면, 그 수에 따라 생산을 하는 방식, 즉 수요와 공급을 보다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주문생산방식은 불필요한 재고로 인해 자본이 묶이는 위험 에서 회사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후 웨지우드는 견본을 소지한 영업사원을 고용하여 소비자를 찾아 다니거나, 제품 카탈로그를 찍어 배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판매방식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판매 방식이 기존의 생산방식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된 품목이었던 그린웨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새 판매방식에 대한 기존 생산방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1760년대 초반, 웨지우드의 주요 상품이던 그린웨어(녹색유 도자기)로는 물건을 안정적으로 균일하게 생산할 수 없었다. 그린웨어는 틀로 찍어낸 요철 무늬에 유약이 입혀지면서 그 특성이 살아나는 것이어서 유약을 입히는 직공에 따라, 그리고 가마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어서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유약 효과의 다양함이 그린웨어의 매력이었으나 결코 균일한 상품을 만들지 못했고, 따라서 웨지우드가 도입한 판매 방식에 적합하지 않았다.”
새로운 주문판매방식을 도입함에 있어서 필요한 전제조건은, 제품의 질과 형태가 항상 균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판매방식에서, 고객들은 직접 진열된 제품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제품을 구입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에서는 소수의 견본만이 매장에 진열되었고, 그것마저 직접 구입하는 것이 아닌 주문을 위한 구경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 매장에서의 견본이나 인쇄된 카탈로그에서 보여지는 제품의 모습이 자신이 구입할 물건과 동일하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했다.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웨지우드는 그의 해박한 도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우선 그는 그린웨어 대신 크림웨어 로 주 생산품목을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균일한 결과를 얻어내는 한편, 일정한 효과를 내는 유약을 개발했다. 또한 상회전사기법 의 도입을 통해서, 직접 손으로 그리는 장식 때문에 균일도가 떨어지고 대량생산에 부적합해지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당시의 제품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쓰여졌던 것이 분명한 만큼, 기술적 개발과는 다른 균일화를 위한 요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력을 보다 실수가 없고 일정하도록 유지해가는 일이었다.

212. 공정의 세분화와 원형제작과정의 분리

직공들의 숙련도 는 균일화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였다. 17 ~ 18세기 사이의 스테포드셔 에서, 제작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의 공예적 생산방식은 자취를 감추었고, 작업과정의 분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상태였는데, 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이렇다.
“늦어도 1730년대부터 도공들은 전체 작업 과정 중 물레차기나 손잡이 달기, 유약과 이장 만들기 등, 한 가지 과정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다. …… 1750년대 월던의 공방에서는 전체 제작 과정이 최소한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직공들은 대개 그 중의 한 가지 작업에만 종사하였다. 하나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예닐곱 명의 도공들이 분담하고 있는 셈이라, 그 중 어느 누구도 제품의 특성을 크게 바꿀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체 공정들이 이미 어느 정도 분화된 상태에서 웨지우드회사의 제품들은 더욱 균일화되어야 했는데, 직공들이 빈번히 저지르는 실수를 줄이는, 일종의 인간기계를 만드는 변혁은 그래서 필요했다. 웨지우드는 공정을 더욱 세분화하여 직공들에게 부여될 개별 공정의 난이도를 줄여나가게 된다. 그들에 대한 재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이용되었으나, 진척속도가 느리고 직공들의 호응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각 공정이 더욱 세밀히 분화되고 그에 따라 직공들의 작업이 단순화되는 시점에 필요한 또 하나의 작업이 요구되었다. 과거, 하나의 도공이 모든 작업의 과정을 관리하면서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나갈 때와는 달리, 구분된 하나의 반복기계와 같은 임무를 지녔던 직공들이 따르기 위해 필요한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공정의 세분화 과정에서, 도자기의 원형을 제작하는 작업은 독립적인 단계로서 다른 공정과 뚜렷이 구분되게 되고, 또한 다른 공정들의 지침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해갔다. 동일한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는, 개별적인 직공들이 수많은 공정에서 다양한 차이점들을 만들어낼 소지가 많았고, 그것은 곧 균일화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금전적 가치는 상당했는데 이점에 대하여 포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확한 디자인을 기획하는 모델러의 가치는 그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모델러는 어떤 의미에서 도자기를 한 개 만들 때 마다 작업의 일정부분을 대신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델러가 하는 일의 금전적 가치는 실상 이 일정 부분의 가치를 모두 합친 것과 같다.”
생산량과 수익의 정도는 원형제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원형의 질에 상당히 의존적이었으며, 또한 제대로 된 원형의 금전적 가치는 생산량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한 직공들의 작업에 비해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은 중요하게 평가되었으며, 그들은 일반 직공들의 두 배에 가까운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보수가 실제 그들이 가진 금전적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았는데, 고용직으로 일했던 모델러들, 그리고 프리랜스제로 일했던 모델러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당부분의 추가적 이익들이 모두 고용주에게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는 착취의 징후가 보여진다.
한편으로, 웨지우드는 다양한 미술가들을 회사의 모델제작에 이용했다. 신고전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주 고객이었던 중, 상류계층은 그들을 타 계층과 구별하기 위해 최신의 양식들에 몰두했다. 새로운 유행인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에, 전통적인 도자기제작방식에 익숙해있던 도공 출신 모델러들은 미술가들에 비해 어려움이 많았다. 신고전주의스타일은 런던과 같은 유행의 중심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스테포드셔의 노동자계급 출신 도공들이 새로운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회사에 고용된 미술가들이 가졌던 모델러로서의 능력과는 다소 상관없이, 그들은 조직체계 안에서 곧바로 적응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규칙들이 엄격히 지켜지던 조직체계에서 그들의 다양하고도 제어 불가능한 독립적 성향들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웨지우드는 그들을 회사조직 바깥에서 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대도시에 위치한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구입하거나 의뢰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이로써 디자인작업은 제작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유행은 웨지우드가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제품 생산에 사용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독립적인 디자이너, 디자인작업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노동분화로 인해서 쪼개어진 세부적인 공정들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3. 생산방식의 변화와 디자인

제조업자들에게 필요한 디자이너란 것은, 무엇보다도 균일하고 정확한 제품생산을 가능하게 해내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모든 디자인은, 기계든 손이든 활용 가능한 생산 수단으로 작업해서 얻은 제품에, 개별적인 차이와 다양성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 인용)웨지우드의 퀸스웨어에 관한 많은 디자인사연구가 퀸스웨어의 신고전주의적 특성에 집중하지만 실로 그것은 신고전주의의 미적 특성보다는 공장의 생산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기계의 도입이 디자인을 변화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제형물레의 선반을 회전시키는데 기계를 도입했다고 말하지만, 물레질, 틀 성형, 제형 물레 성형 등의 제조기술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왔던 전통적인 기법이었고 다만 속도를 빠르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웨지우드의 성공원인은 공장에서 노동인력을 조직하는 것과 관련한 그의 새로운 방식 때문이었다. (디자인과 제작방식의 연관관계)
그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사업 초반의 그린웨어는 다양한 형태와 유약의 효과로 유명했지만 필연적으로 균일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견본이나 카탈로그를 통한 판매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새로운 방식은, 형태의 다양성은 축소하면서도 표면에 들어갈 상회장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식이었다. 상회장식은 도자기가 구워진 이후에 작업을 하면 되는 일이었고, 주문을 받고서도 바로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장식방법을 상회로 바꾸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형태의 도자기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재고준비단계나 장식공정에서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장식의 가짓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러한 장식들이 모두 들어맞을 수 있는 특별한 도자기의 디자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웨지우드 초기에 생산되던 로코코스타일의 도자기들은 굴곡이 많고 형태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단순화가 필요했던 장식공정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반면, 신고전주의 스타일은 단순하고 평평한 표면을 만들어내는데 적합한 스타일이었고, 이후 웨지우드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생산되는 제품의 균일화, 그리고 당대를 살아가던 중상류층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조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고서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었다. 두 조건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절충안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웨지우드의 모델러들이었다. 포티는 이렇게 18세기의 모델러들이 담당했던, 생산과 소비라는 두 측면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형태의 개발이라는 작업이 1920년대의 레이먼드 로위와 같은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했던 일과 다르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220. 19세기 영국의 디자인저급화와 기계화와의 관계

19세기.. 디자인 변질이 어떻게 전반적으로 걱정거리였는지 기술할 것.. 1111

기계화와 디자인의 연관성에 대하여, 기계 생산 방식의 등장이 디자인의 질을 저하시킨 주범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상태에서, 기계의 등장이 디자인 공정의 분리를 촉진했다는 그런 견해는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모리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었고 현대디자인 이론서에 자주 등장하는 니콜라우스 페브스너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재론되었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은 같은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상황을 배제한 편협한 견해일 수도 있다. 당시의 기계와 디자인의 관계를 해석한 포티의 견해에 의하면, 기계의 등장을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으로 보는 판단은 “제품의 형태에 미치는 장인의 영향력을 기계가 침탈했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다. 즉, 기계가, 외형을 다루는 과정을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분리시켜서 디자인 작업의 변질을 초래했고, 그것이 곧 제품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 생산방식이 도입되기 이전인 18세기 초에도 이미 공정의 분리를 통한 노동의 분업화가 이루어져있음을 웨지우드를 비롯한 예에서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공정의 분리가 기계의 등장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19세기의 산업체들에서 기계화가 차지하는 공정의 정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수공에 의한 생산공정이 그때까지도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수공생산은 보다 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의 장인이 작업해나가는 방식은 아니었다.
공정 분화현상은 비슷한 시기의 산업 전반에서 발견되며 이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언급된 자본주의 산업발달의 3단계과정과 들어맞는다. 그에 의하면, 개개의 장인들이 독립적으로 일해서 물건을 만드는 전 자본주의 사회가 지나면 자본주의의 첫단계가 시작된다고 했다. 첫 단계는 노동자들의 간단한 협업단계로 작업장을 공유하거나 같이 재료를 구입하고 같이 물건을 파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관리자의 지시 하에 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수공과정으로 분리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기계 그리고 공장체제의 등장이다.
18세기는 영국 대부분의 제조업분야에서 두번째 단계, 즉 수공 생산 상태에서의 분업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이는 독립적인 장인이 전체 생산과정에서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분화된 작업으로서 디자인이 새롭게 필요해졌음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인용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1725~1826)의 글을 보자.
“무지는 미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또한 산업의 어머니다. 심사숙고나 감각표현은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손이나 발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반복작업은 숙고나 감각표현과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제조업은 정신이 최소한으로 관여하는 곳, 또한 작업장을 …… 인간 부품이 장착된 엔진으로 간주할 때 번영한다.”
1767년의 이 글에서는 웨지우드 회사에서의 분업화와 작업지시체계로서의 디자인의 등장이 예견되고 있다. 디자인이 무지한 노동력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두번째 단계인 수공생산 상태에서 분업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였다.
기계의 도입은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의 변화에 작용하였던 요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노동의 분화를 더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계생산에 의해서 생산력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이 생산력의 증감여부에 생산방식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분화라는 생산방식은 생산력의 증가가 유지되는 한 함께 유지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어질 얘기 -> 기계화의 현상(직물,,, 등등 60페이지 이후의 사례들.. 그래서리,, 디자인변질의 원인은 기계화보다는 공정의 분화가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던 목판나염술은 1750년에 이르러 동판나염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방법을 이용해 공장에서는 보다 큰 면적에 보다 정교한 무늬를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수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는데, 염료를 묻히는 과정과 판을 잘 맞추어내는 것, 그리고 적당한 압력을 가해 찍어내는 작업은 날염공들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1796년에는 동판나염에 이어 롤러날염기계가 개발되었고 뒤이은 증기기관의 이용에 힘입어 생산의 속도는 열 배 이상 증가하였다. 날염작업이 수작업에서 증기 날염기계로 대체되자 기존의 장인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생산량의 증가로 인하여 새로운 디자인의 요구가 높아졌고 디자이너의 수 또한 늘어났다.
한편으로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일부의 고용된 디자이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리랜서로 자신의 디자인을 제조업자에게 파는 식으로 일했다. 그들의 보수는 당시의 다른 숙련 노동자들에 비해서 높았지만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수익에 따른 공정한 배분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날염업자들은 1830년대 초반, 저작권을 날염직물 디자인에까지 적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그것이 좀 더 좋은 디자인의 개발에 긍정적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나, 실상 저작권 적용의 목적은 그들의 재산권 확보에 있었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는 1851년의 대영박람회 디자인 부문 공식 보고서에서,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 중 하나는 롤러 날염기계의 도입에 의하여 디자이너가 통제가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고, 그들이 제조업자의 요구나 장식미술의 원리에 얽매여 쓸데없는 복잡한 식물의 곡선을 모방하는데 능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선호했던 다분히 개인적인 선호에 의한 단순한 형태의 결과물들은 보다 과거인 동판날염의 등장에 의해서 이미 사라졌던 것이었다. 사실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를 날염할 수 있었던 것은 롤러날염이 아닌 동판날염방식의 도입 때문이었다. 그는 수공으로 작업한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의 결과물들을 기계의 결과물이라고 여기며 혹평했고, 수공에 의한 완벽한 작업이라고 짐작했던 단순한 무늬의 결과물들은 실제로 날염기계에 의했던 것이었다. 디자인저급화가 기계에 의한 것이었다는 당시의 견해는 이처럼 부실한 선입견에 근거해있다.
디자인의 변질된 근본적 원인은 기계화가 아니라 양과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제조시스템이었고, 그것인 디자인을 공정에서 분리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결과물의 질을 악화시켰다. 근본적으로 이런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기득권을 가진 19세기의 디자인 개혁운동가들은 복잡한 사회문제보다는 지엽적인 생산기술상의 문제에 주력했다. 특이하게도,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모리스는, 존 러스킨처럼 물질적 진보를 모두 버리고 중세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대신에, 물질적 진보를 수용하는 대안의 가능성을 생각했었고, “디자인의 열악함이 자본주의의 탐욕 때문” 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반(反)기계적 성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반대했던 것은 단순한 생산기계 자체가 아니었다.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것은 철과 동으로 만들어진 실제의 기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억누르고 있는 포악한 상업성이라는 실체도 없는 커다란 기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