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켄야 <백> 메모

종이를 미디어라고 생각하여 종언을 평가하는 발상은 종이라는 물질의 의미를 너무 좁은 시야로 간주하고 있는 것(42)

그러고보면 ‘종이’는 단지 무언가를 매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자기술 따위로 조합된 다양한 매체들에 존재하는 ‘백’이라는 긴장성을 확인시켜준다.

흑백사진은 아름답지만 세상에서 색채가 사라져버린다면 흑백의 의미도 사라질 것이다.(48)

일본 Curiosity의 건축물 C-1

C-1? ?C-1

일본의 현대 컨셉슈얼 건축에서 ‘더욱 더 특별해지려고 하는 것’이나 ‘컨셉슈얼한?아이디어를 작품에 밀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일본 창작계의 ‘컨셉슈얼’이란, 아마도?언급된 바와 같은 부정적 의미들을 가지고있지 않은듯하다.?그들은 아직 컨셉슈얼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개발하기 위한 객체’로서 생각한다. 일본 Curiosity의 건축물 C-1 더보기

‘One Korea’ Feted in Osaka

[Captured Article]
The 2005 ‘Hana’ Festival attracts both 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thousands of 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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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estival banner, which reads “Hana” (One). ?2005 T. Mori

On the afternoon of Oct. 30, the “One Korea Festival 2005” entertained thousands of Japanese and Korean spectators at the “Sun Plaza” in Osakajo Park, Osaka.

This is a festival for Korean residents of Japan. The overall theme is the promotion of unific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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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ng Gap Su ?2005 T. Mori

I first went to the organizers’ headquarters and interviewed chairman Chong Gap Su.

“This year is the 60th anniversary of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 … Unification of Korea has already started, but it is a long process. But, it has already started,” Chong said.

“We will be brightening up the festival systematically in the future. I want young people to hold out hope for Asia and overcoming nationalism. A unity of citizens.”

I got the impression that Mr. Chong is the driving force behind the festival. I was moved deeply.

At 1 p.m. the “South Korea-Japan Friendship” committee took the stage for the opening ceremony. The South Korea-Japan friendship organization committee sponsored the event. Written on the curtain were two messages, “We are sorry for the longstanding hardships caused by Japan” and “We promise to work hard to create a splendid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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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man Chong Gap Su and members of staff demonstrate the festival’s message of solidarity. ?2005 T. Mori

Committee member Lee Bu Yeon declared, “What we want to say to the Japanese people is ‘one.’ Our mother country should unite into one. We crave peace.”

He added, “The Korean peninsula is uniting into one. We think that it also wants the Japanese to help. We should not hold a grudge against the Japanese any longer. Lend power so that peace may visit us in the future. This is what the Japanese should do.”

Applause filled the hall.

Lee Chang Bok, who is chairman of the committee, poignantly added, “We crave for peace. Japan should recognize that Japan tried to destroy peace.”

When the opening ceremony ended, the committee treated Korean residents in Japan to lunch. Moreover, Japanese over the age of 65 were also invited. I thought that the essence of the event was made clear by the coming together of both Koreans and Japanese over a nice meal.

Afterwards, a concert started. First was Jung Tae Chun and Park Eun Ok. Their beautiful singing voices were melodious. Song Byeong Ho led the audience in song. When Yu Jin Park played Khachaturian’s “Sword dance” on the electric violin, performing a comical and exciting dance, he gripped the audience’s attention.

Finally, the MC announced the final act as a “legendary singer in South Korea.”

The hall was filled with excitement when Ahn Chi Hwan appeared on stage. He sang “If I Am” and “In Front of Wire Entanglements” to great appreciation from the audience. And when he sang “The People Are More Beautiful than Flowers,” some in the audience began to dance.

“Our School” was last song, which cast a reflective mood over the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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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ll was filled with excitement when Ahn Chi Hwan appeared. ?2005 T. Mori

Korean children were also center stage at the event. “Palace Women Jangkeum,” a musical version of the popular Korean TV drama “Dae Jang Keum” was performed by students at KJ musical school.

After musical, Lim Ho, who is the actor who plays King Jungjong addressed the audience. The handsome actor’s mustache became him. He answered questions from some of the children who had performed in the musical.
Q: What is the most delicious dish that you ate in the drama?
Lim Ho: A dish with mixed bean paste and garlic.

Q: What is most difficult part of your performance?
Lim Ho: It is eating. It is considerably painful because I have to eat many times from morning. Though it looks delicious in the actual drama.

Q: Mr. Lim, you’re so good-looking. Please say, “Yum, that tastes good.” [The child’s line in the drama.]
Lim Ho: Yum, that tastes good. [The hall burst out in laughter.]
Next, the chairman took the opportunity to ask a question of Mr. Lim. “Which actor would you like to co-star with?” Lim replied Naoto Takenaka [a famous Japanese film actor].

The keyword of the One Korea Festival is “Hana. ” Korean residents in Japan shouted “Hana!” for South Korea, North Korea and Japan. The message is put across in their songs and dances, and it aims to bring the East Asian community closer together.

I sincerely wish for the unification of Korean peninsula. The festival prompted me to swear to do all I can to help in th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2005-11-02 05:06
?2005 OhmyNews

2005년 국민대논문 조각글들 모음

110. 연구목적과 방법

이 연구는 현재의 특정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에서 드러나는 대안성을 디자인사의 흐름 위에서 고찰하는 작업이다. 어떤 방식이 대안(代案) 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대신하여 변화하였다는 의미와 같다.
2000년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디자이너스브랜드와 같은 디자이너의 독립적 사업들이 출현했고, 영국, 일본 등의 해외에서는 특정한 디자이너그룹에 의해서, 과거와는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디자인전시행사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예로 든 이러한 각각의 활동들은, 디자인 외부에 의해서 통합적으로 시작되거나 관리되지 않았고, 경계 를 인정하지 않고 뒤섞이는 등, 전반적으로 과거의 통념과 거리를 두는 편이어서, 혁신을 원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흥미로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그 다양성만큼이나 산만한 모습들로 인하여 과연 이것이 일정한 비교의 대상으로 묶여질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전체를 흐르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디자인 생산, 유통과정에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이 디자인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작업은, 현재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에서 발견되는 대안성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특히 1930년대를 전후하여, 영향력 있는 유통방식으로서 디자인사에 등장하는 디자인컨설턴시, 고용디자인 등의 방식들은, 오래된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상존하는 비교대상이다. 이 논문은 크게 디자인 개념이 등장한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주된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을 다루는 부분과 대안으로서 새로이 등장한 현재의 방식을 알아보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디자인사를 다루는 여러 문헌자료들을 찾아보는 일, 특히 디자인컨설턴시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살피는 일이 과거의 상황을 살펴보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디자인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쓰여졌던 방법은, 능력 있는 개인에 집중하거나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물의 외형적 흐름을 읽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들이 담고 있는 디자이너의 눈부신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영웅들의 이야기는 현재의 디자이너들에게 설득력 있는 과거의 경험이기보다는 무용담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자는 시대의 사회상과 디자인이 가진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변화의 원인을 찾는 에이드리언 포티의 디자인 연구방법을 택했으며 , 사고의 기준을 그에 맞추려 노력했다. 이런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된 사물의 형태나 색채가 아니라 그 주변의 상세한 상황들이다.
논문에서 대안적이라고 언급되는 현재의 활동들은, 주도적으로 이뤄지는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들에 비하여 명확히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가 대안적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이 앞으로 성공할 방식임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정작 연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점을 읽는 보다 지혜로운 눈을 가지는 일이다. 새로이 등장한 대안이라는 것 또한 영원히 지켜질 무엇이기보다는, 언젠가는 또 다른 대안에 의해 사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2. 산업 디자인

1. 1750, 산업 디자인의 시작
2. 산업 디자인의 생산(디자이너)과 유통(제품)

200. 산업 디자인

영국의 산업혁명과 기계화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인 반면에, 디자인을 단순히 제품 생산에 있어 필요한 종속적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기계화가 대량생산체계를 확립하던 때에, 그것을 좀 더 잘 팔리도록 형상화하기 위해서 디자인이 시작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바로 그것인데, 대량생산과 유통의 방식이 확립된 시점인 산업혁명기나 1920년대의 미국을 본격적인 디자인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그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런 종류의 견해에 대하여, 영국의 디자인이론가 에이드리언 포티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일군의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나타났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주장하든지 그들을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이몬드 로위나 헨리 드뤼피스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이 어떤 산업분야에서는 이미 한 세기 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가 주목했던 점은 산업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확실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시점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다, 사회적 취향과 제조기술의 융합 을 이끌어내는 과정으로서의 산업 디자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점이었고, 그 기준에 의하면 두 시기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실제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8세기 영국의 웨지우드(Wedgwood) 나 매슈볼턴(Matthew Boulton) 의 회사에서는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이 제작 과정에서 분리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를 통해 생산, 소비 양측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이후의 컨설턴트 디자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디자인의 등장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결과물인 제품이나 디자이너의 성공여부에 집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핵심이, 생산공정 상에서 ‘복잡한 사회적 요소의 합성’ 인 디자인 작업이 분리된 것이며, 그러한 생산방식의 변화요인은 디자이너의 품성이나 제품 등의 결과물보다도 당시의 사회시스템에 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10. 디자인의 분리

211-0. 중세유럽의 생산

16세기 초반에 유럽의 교역량이 전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뉘렌베르크나 피렌체 등의 신흥도시들에는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 그리고 성직자들을 위한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대형공방들이 생겨났다. 이런 공방들에서는 물건들을 제작할 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공적 방법을 사용했던 반면에, 전문성은 과거에 비해 한층 높아진 상태였고, 단일한 물품들을 반복적으로 복제해냈다. 존 헤스켓(John Heskett) 에 의하면, 이 시기의 예술가와 기술자의 구분은 훈련에 의해 성취 가능한 기술적 능력에 따라 행해지는 유동적 구분이었다. 한편으로, 교역의 증가에 따라 생산양도 늘어났는데, 이에 발맞춰 물품의 외형을 보다 돋보이게 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져서 생산과정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패턴북 은 이런 요구를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응용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가구나 직물 등의 산업 전반에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고, 출판술의 발달로 인해 광범위한 영역으로 보급되었다. 결과적으로 패턴북의 사용으로 인해, 생산과정에서 장식작업에 들여야 할 직공들의 노력이 감소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될 수 있었다. 이런 패턴북이,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에 속해있던 숙련공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고, 구분된 집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제작된 것은, 디자인이 생산과정에서 분리됨으로써 비로소 구분된다는 특성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다.
국가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의 유럽은 정치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의 측면에서 근대적인 발전이 두드러지지만 과거의 봉건적 요소나 세력이 남아있는 시기였다. 이런 절대왕정국가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행정, 사법, 군사의 측면에서 중앙집권이 달성되었다. 한편으로, 국제무역이 성행하던 16세기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에 입각한 자본주의가 도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절대왕정의 핵심이었던 관료제적 중앙집권과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왜냐하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국가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상업의 중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16세기의 급격한 호황에 뒤이어 17세기의 유럽 전반은 암흑의 세기(Black Century)로 불릴 정도로 상대적인 침체를 맞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17세기는 팽창의 시기였으며 유럽 경제의 중심은 이전의 지중해로부터 북서유럽으로 이동하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그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해 궁정예술가들과 장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왕실은 다수의 공장들을 세우고 부속 학교까지 세웠는데, 1667년에 파리의 고블랭(Gobelins)에 세워진 공장의 경우 수백 명의 장인들이 일할 정도였다. 당시의 중, 서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고, 다른 중, 소 군주국들에도 프랑스식의 궁정스타일과 중상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각국의 예술, 장인 지원체계 또한 왕실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생산되는 물품을 군주들이 통제했다. 한편으로, 당시의 유럽 도자기들은 전반적으로 그 질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각국의 왕실들이 도자기공방을 세우는데 영향을 주었다. 북부 독일의 작센(Sachsen, Saxony) 지방에는 1709년에 메상(Meissen)공방이 설립되었다. 초기에 이 공방에서 만들어지던 물품들은 궁정예술가들에 의해서 장식되었으나 1720년대 중반에는 미술학교를 통해 배출된 조각가들이 고용되어 모델링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주된 디자인 소스였던 패턴북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의 물품들은 주로 왕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이 물품의 생산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물품의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는 왕실재정악화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시민계급(bourgeoisie)의 급격한 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18세기 중반, 세력이 커진 시민계급과 중산층에 걸쳐 차와 커피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도자기의 수요 또한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장의 형성으로 인해, 왕실을 대상으로 한 예술성 중심의 생산방식은 상업적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공방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서 판로의 확장, 즉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공방의 상업적 성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으로 인해 왕실이 붕괴되어 후원을 바랄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 상업적 성공에 매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의 사회상은 다른 유럽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대륙의 절대군주제하에서 왕실이 물품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것에 반해, 영국은 의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들의 지지로 웨지우드, 치펀데일(Chippendale), 매슈볼턴과 같은 사업가와 기술혁신가들의 자유무역과 개인적 이윤추구가 보장되었다.

211. 웨지우드

1759년 웨지우드는 독립적인 도자기 생산 회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의 영국 도자기 수요는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고, 식민지의 개척으로 인해 해외시장 또한 확대되었다. 과거의 주된 판매지역이었던 회사주변 지역보다, 폭넓게 확대된 국내외의 시장에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는 공장의 생산방식이 보다 효율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포티가 “웨지우드의 놀라운 성공은 공장에서의 합리적 생산방식, 뛰어난 마케팅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제품에 대한 열정에 기인하고 있다.” 고 한 것과 같이, 웨지우드는 신고전주의의 도입이나 소지의 개발과 같은 일련의 실험들을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당면한 효율화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웨지우드는 새로운 판매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매장에 방문한 고객이 견본을 보고 주문을 하면, 그 수에 따라 생산을 하는 방식, 즉 수요와 공급을 보다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주문생산방식은 불필요한 재고로 인해 자본이 묶이는 위험 에서 회사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후 웨지우드는 견본을 소지한 영업사원을 고용하여 소비자를 찾아 다니거나, 제품 카탈로그를 찍어 배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판매방식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판매 방식이 기존의 생산방식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된 품목이었던 그린웨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새 판매방식에 대한 기존 생산방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1760년대 초반, 웨지우드의 주요 상품이던 그린웨어(녹색유 도자기)로는 물건을 안정적으로 균일하게 생산할 수 없었다. 그린웨어는 틀로 찍어낸 요철 무늬에 유약이 입혀지면서 그 특성이 살아나는 것이어서 유약을 입히는 직공에 따라, 그리고 가마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어서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유약 효과의 다양함이 그린웨어의 매력이었으나 결코 균일한 상품을 만들지 못했고, 따라서 웨지우드가 도입한 판매 방식에 적합하지 않았다.”
새로운 주문판매방식을 도입함에 있어서 필요한 전제조건은, 제품의 질과 형태가 항상 균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판매방식에서, 고객들은 직접 진열된 제품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제품을 구입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에서는 소수의 견본만이 매장에 진열되었고, 그것마저 직접 구입하는 것이 아닌 주문을 위한 구경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 매장에서의 견본이나 인쇄된 카탈로그에서 보여지는 제품의 모습이 자신이 구입할 물건과 동일하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했다.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웨지우드는 그의 해박한 도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우선 그는 그린웨어 대신 크림웨어 로 주 생산품목을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균일한 결과를 얻어내는 한편, 일정한 효과를 내는 유약을 개발했다. 또한 상회전사기법 의 도입을 통해서, 직접 손으로 그리는 장식 때문에 균일도가 떨어지고 대량생산에 부적합해지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당시의 제품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쓰여졌던 것이 분명한 만큼, 기술적 개발과는 다른 균일화를 위한 요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력을 보다 실수가 없고 일정하도록 유지해가는 일이었다.

212. 공정의 세분화와 원형제작과정의 분리

직공들의 숙련도 는 균일화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였다. 17 ~ 18세기 사이의 스테포드셔 에서, 제작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의 공예적 생산방식은 자취를 감추었고, 작업과정의 분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상태였는데, 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이렇다.
“늦어도 1730년대부터 도공들은 전체 작업 과정 중 물레차기나 손잡이 달기, 유약과 이장 만들기 등, 한 가지 과정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다. …… 1750년대 월던의 공방에서는 전체 제작 과정이 최소한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직공들은 대개 그 중의 한 가지 작업에만 종사하였다. 하나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예닐곱 명의 도공들이 분담하고 있는 셈이라, 그 중 어느 누구도 제품의 특성을 크게 바꿀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체 공정들이 이미 어느 정도 분화된 상태에서 웨지우드회사의 제품들은 더욱 균일화되어야 했는데, 직공들이 빈번히 저지르는 실수를 줄이는, 일종의 인간기계를 만드는 변혁은 그래서 필요했다. 웨지우드는 공정을 더욱 세분화하여 직공들에게 부여될 개별 공정의 난이도를 줄여나가게 된다. 그들에 대한 재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이용되었으나, 진척속도가 느리고 직공들의 호응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각 공정이 더욱 세밀히 분화되고 그에 따라 직공들의 작업이 단순화되는 시점에 필요한 또 하나의 작업이 요구되었다. 과거, 하나의 도공이 모든 작업의 과정을 관리하면서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나갈 때와는 달리, 구분된 하나의 반복기계와 같은 임무를 지녔던 직공들이 따르기 위해 필요한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공정의 세분화 과정에서, 도자기의 원형을 제작하는 작업은 독립적인 단계로서 다른 공정과 뚜렷이 구분되게 되고, 또한 다른 공정들의 지침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해갔다. 동일한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는, 개별적인 직공들이 수많은 공정에서 다양한 차이점들을 만들어낼 소지가 많았고, 그것은 곧 균일화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금전적 가치는 상당했는데 이점에 대하여 포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확한 디자인을 기획하는 모델러의 가치는 그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모델러는 어떤 의미에서 도자기를 한 개 만들 때 마다 작업의 일정부분을 대신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델러가 하는 일의 금전적 가치는 실상 이 일정 부분의 가치를 모두 합친 것과 같다.”
생산량과 수익의 정도는 원형제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원형의 질에 상당히 의존적이었으며, 또한 제대로 된 원형의 금전적 가치는 생산량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한 직공들의 작업에 비해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은 중요하게 평가되었으며, 그들은 일반 직공들의 두 배에 가까운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보수가 실제 그들이 가진 금전적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았는데, 고용직으로 일했던 모델러들, 그리고 프리랜스제로 일했던 모델러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당부분의 추가적 이익들이 모두 고용주에게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는 착취의 징후가 보여진다.
한편으로, 웨지우드는 다양한 미술가들을 회사의 모델제작에 이용했다. 신고전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주 고객이었던 중, 상류계층은 그들을 타 계층과 구별하기 위해 최신의 양식들에 몰두했다. 새로운 유행인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에, 전통적인 도자기제작방식에 익숙해있던 도공 출신 모델러들은 미술가들에 비해 어려움이 많았다. 신고전주의스타일은 런던과 같은 유행의 중심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스테포드셔의 노동자계급 출신 도공들이 새로운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회사에 고용된 미술가들이 가졌던 모델러로서의 능력과는 다소 상관없이, 그들은 조직체계 안에서 곧바로 적응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규칙들이 엄격히 지켜지던 조직체계에서 그들의 다양하고도 제어 불가능한 독립적 성향들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웨지우드는 그들을 회사조직 바깥에서 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대도시에 위치한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구입하거나 의뢰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이로써 디자인작업은 제작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유행은 웨지우드가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제품 생산에 사용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독립적인 디자이너, 디자인작업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노동분화로 인해서 쪼개어진 세부적인 공정들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3. 생산방식의 변화와 디자인

제조업자들에게 필요한 디자이너란 것은, 무엇보다도 균일하고 정확한 제품생산을 가능하게 해내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모든 디자인은, 기계든 손이든 활용 가능한 생산 수단으로 작업해서 얻은 제품에, 개별적인 차이와 다양성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 인용)웨지우드의 퀸스웨어에 관한 많은 디자인사연구가 퀸스웨어의 신고전주의적 특성에 집중하지만 실로 그것은 신고전주의의 미적 특성보다는 공장의 생산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기계의 도입이 디자인을 변화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제형물레의 선반을 회전시키는데 기계를 도입했다고 말하지만, 물레질, 틀 성형, 제형 물레 성형 등의 제조기술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왔던 전통적인 기법이었고 다만 속도를 빠르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웨지우드의 성공원인은 공장에서 노동인력을 조직하는 것과 관련한 그의 새로운 방식 때문이었다. (디자인과 제작방식의 연관관계)
그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사업 초반의 그린웨어는 다양한 형태와 유약의 효과로 유명했지만 필연적으로 균일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견본이나 카탈로그를 통한 판매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새로운 방식은, 형태의 다양성은 축소하면서도 표면에 들어갈 상회장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식이었다. 상회장식은 도자기가 구워진 이후에 작업을 하면 되는 일이었고, 주문을 받고서도 바로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장식방법을 상회로 바꾸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형태의 도자기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재고준비단계나 장식공정에서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장식의 가짓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러한 장식들이 모두 들어맞을 수 있는 특별한 도자기의 디자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웨지우드 초기에 생산되던 로코코스타일의 도자기들은 굴곡이 많고 형태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단순화가 필요했던 장식공정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반면, 신고전주의 스타일은 단순하고 평평한 표면을 만들어내는데 적합한 스타일이었고, 이후 웨지우드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생산되는 제품의 균일화, 그리고 당대를 살아가던 중상류층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조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고서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었다. 두 조건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절충안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웨지우드의 모델러들이었다. 포티는 이렇게 18세기의 모델러들이 담당했던, 생산과 소비라는 두 측면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형태의 개발이라는 작업이 1920년대의 레이먼드 로위와 같은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했던 일과 다르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220. 19세기 영국의 디자인저급화와 기계화와의 관계

19세기.. 디자인 변질이 어떻게 전반적으로 걱정거리였는지 기술할 것.. 1111

기계화와 디자인의 연관성에 대하여, 기계 생산 방식의 등장이 디자인의 질을 저하시킨 주범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상태에서, 기계의 등장이 디자인 공정의 분리를 촉진했다는 그런 견해는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모리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었고 현대디자인 이론서에 자주 등장하는 니콜라우스 페브스너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재론되었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은 같은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상황을 배제한 편협한 견해일 수도 있다. 당시의 기계와 디자인의 관계를 해석한 포티의 견해에 의하면, 기계의 등장을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으로 보는 판단은 “제품의 형태에 미치는 장인의 영향력을 기계가 침탈했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다. 즉, 기계가, 외형을 다루는 과정을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분리시켜서 디자인 작업의 변질을 초래했고, 그것이 곧 제품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 생산방식이 도입되기 이전인 18세기 초에도 이미 공정의 분리를 통한 노동의 분업화가 이루어져있음을 웨지우드를 비롯한 예에서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공정의 분리가 기계의 등장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19세기의 산업체들에서 기계화가 차지하는 공정의 정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수공에 의한 생산공정이 그때까지도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수공생산은 보다 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의 장인이 작업해나가는 방식은 아니었다.
공정 분화현상은 비슷한 시기의 산업 전반에서 발견되며 이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언급된 자본주의 산업발달의 3단계과정과 들어맞는다. 그에 의하면, 개개의 장인들이 독립적으로 일해서 물건을 만드는 전 자본주의 사회가 지나면 자본주의의 첫단계가 시작된다고 했다. 첫 단계는 노동자들의 간단한 협업단계로 작업장을 공유하거나 같이 재료를 구입하고 같이 물건을 파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관리자의 지시 하에 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수공과정으로 분리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기계 그리고 공장체제의 등장이다.
18세기는 영국 대부분의 제조업분야에서 두번째 단계, 즉 수공 생산 상태에서의 분업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이는 독립적인 장인이 전체 생산과정에서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분화된 작업으로서 디자인이 새롭게 필요해졌음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인용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1725~1826)의 글을 보자.
“무지는 미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또한 산업의 어머니다. 심사숙고나 감각표현은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손이나 발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반복작업은 숙고나 감각표현과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제조업은 정신이 최소한으로 관여하는 곳, 또한 작업장을 …… 인간 부품이 장착된 엔진으로 간주할 때 번영한다.”
1767년의 이 글에서는 웨지우드 회사에서의 분업화와 작업지시체계로서의 디자인의 등장이 예견되고 있다. 디자인이 무지한 노동력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두번째 단계인 수공생산 상태에서 분업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였다.
기계의 도입은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의 변화에 작용하였던 요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노동의 분화를 더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계생산에 의해서 생산력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이 생산력의 증감여부에 생산방식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분화라는 생산방식은 생산력의 증가가 유지되는 한 함께 유지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어질 얘기 -> 기계화의 현상(직물,,, 등등 60페이지 이후의 사례들.. 그래서리,, 디자인변질의 원인은 기계화보다는 공정의 분화가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던 목판나염술은 1750년에 이르러 동판나염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방법을 이용해 공장에서는 보다 큰 면적에 보다 정교한 무늬를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수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는데, 염료를 묻히는 과정과 판을 잘 맞추어내는 것, 그리고 적당한 압력을 가해 찍어내는 작업은 날염공들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1796년에는 동판나염에 이어 롤러날염기계가 개발되었고 뒤이은 증기기관의 이용에 힘입어 생산의 속도는 열 배 이상 증가하였다. 날염작업이 수작업에서 증기 날염기계로 대체되자 기존의 장인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생산량의 증가로 인하여 새로운 디자인의 요구가 높아졌고 디자이너의 수 또한 늘어났다.
한편으로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일부의 고용된 디자이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리랜서로 자신의 디자인을 제조업자에게 파는 식으로 일했다. 그들의 보수는 당시의 다른 숙련 노동자들에 비해서 높았지만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수익에 따른 공정한 배분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날염업자들은 1830년대 초반, 저작권을 날염직물 디자인에까지 적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그것이 좀 더 좋은 디자인의 개발에 긍정적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나, 실상 저작권 적용의 목적은 그들의 재산권 확보에 있었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는 1851년의 대영박람회 디자인 부문 공식 보고서에서,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 중 하나는 롤러 날염기계의 도입에 의하여 디자이너가 통제가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고, 그들이 제조업자의 요구나 장식미술의 원리에 얽매여 쓸데없는 복잡한 식물의 곡선을 모방하는데 능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선호했던 다분히 개인적인 선호에 의한 단순한 형태의 결과물들은 보다 과거인 동판날염의 등장에 의해서 이미 사라졌던 것이었다. 사실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를 날염할 수 있었던 것은 롤러날염이 아닌 동판날염방식의 도입 때문이었다. 그는 수공으로 작업한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의 결과물들을 기계의 결과물이라고 여기며 혹평했고, 수공에 의한 완벽한 작업이라고 짐작했던 단순한 무늬의 결과물들은 실제로 날염기계에 의했던 것이었다. 디자인저급화가 기계에 의한 것이었다는 당시의 견해는 이처럼 부실한 선입견에 근거해있다.
디자인의 변질된 근본적 원인은 기계화가 아니라 양과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제조시스템이었고, 그것인 디자인을 공정에서 분리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결과물의 질을 악화시켰다. 근본적으로 이런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기득권을 가진 19세기의 디자인 개혁운동가들은 복잡한 사회문제보다는 지엽적인 생산기술상의 문제에 주력했다. 특이하게도,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모리스는, 존 러스킨처럼 물질적 진보를 모두 버리고 중세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대신에, 물질적 진보를 수용하는 대안의 가능성을 생각했었고, “디자인의 열악함이 자본주의의 탐욕 때문” 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반(反)기계적 성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반대했던 것은 단순한 생산기계 자체가 아니었다.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것은 철과 동으로 만들어진 실제의 기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억누르고 있는 포악한 상업성이라는 실체도 없는 커다란 기계다.”

Tokyo Designers block 2004

oct. 7 – 11, 2004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4

most pictures by janine parker, some by mno design. (디자인 붐 웹진의 실제 링크에 클로즈업한 사진자료 다수..)

1968…

‘1968 was the year that reflected the period of revolutions
and turbulence. music transcended the time and design reflected
the period. political movements such as may revolution in paris
and shinjuku riot in tokyo left impact on people’s life.
the impact of this year grows to become the hope for people to be
able to change the world by themselves.
but if we look back at those days, questions proposed at that time
may remain unsolved.

the unsolved question sparked nationalism and globalization.
new waves of incidents happened: short board surfing was
born in australian coasts.
young people putting on jeans pants showing part of their hips
were wandering on the streets. the beatles’ white album created
new phase of musical culture. these changes were revolutions
in 1968 that opened up people’s desire to answer the fundamental
questions.

SURF REVOLUTIONS LIFE REVOLUTIONS

this year, 2004, has the similarity in terms of desire for changes.
It is now that we question the fundamental questions once again
from universal views. what was the question that was asked all
around the world in those days? what are the questions we are
asking ourselves this year: what is the design?
what is the space design? what are life and living?
DESIGN REVOLUTION

we once again question the cultures born in 1968.
we create new values regardless of concepts that have already
been made. now, what truly changes the world is the design that
possesses the essential of living.
we are convinced of the power of the design.’

text by teruo kurosaki

the producer of this five-day event ‘tokyo designers block is
teruo kurosaki. he started an international empire of interior
innovation through his idée and sputnik furniture lines.
kurosaki wants now, via the staging of the fifth tokyo designers
block, to exhibit the virtues of japanese design culture to the
rest of the world. though not himself a designer, kurosaki has
been called the ’terence conran of japan’ and become synonymous
with a new wave of lifestyle design that is, first and foremost,
born out of tokyo’s peculiar urban milieu.
he studied physics and was supposed to be scientist or an
engineer but decided that he wanted to work with interiors,
architecture and the environment.
in the 1980s, kurosaki opened a small interior design workshop
in tokyo’s aoyama district and began making the acquaintance
of the then still unknown designers philippe starck and
marc newson. he exhibited his line ‘sputnik’ in the london
designers block and could relate with those people,
with their more edgy, alternative ways of showing design.
london designers block was the initial inspiration for the TDB.

* 저자 / 출처 : 디자인붐 http://www.designboom.com/snapshots/tdb04/1.html

언제부터 일본과 표준시를 함꼐썼을까..

HOCHAN.NET에서 발견한 표준시에 관한 얘기입니다.

놀랍게도 1961년에 친일인사들에의해서 규정되어졌다고 하는군요.

솔직히 영토문제에는 개인적으로 어떻다는 말을 하고싶지 않았지만 (실상 일본과의 분쟁에서는 우리자신들도 생각의 중심을 잃기 십상이라..) 표준시와 같은 실용적 측면까지 정치적인 문제들이 개입된 것은 여러모로 보아 꼭 고쳐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정의 교육’과 ‘유목적 지식’을 위한 에세이

상당히 신기하고도 대단한 연구집단의 소개글입니다.
조금은 길지만 읽어들 보세요..
특히 대학원 진학자나 유학 고려중인 사람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련이 남는 사람들..은 더더욱..

‘우정의 교육’과 ‘유목적 지식’을 위한 에세이

고 미 숙

‘죽거나 나쁘거나’

하나의 괴담이 대학가를 배회하고 있다. ‘대학은 죽었다!’ 혹은 ‘인문학은 지금 벼랑끝에 서 있다.’는 스토리로 구성된. 90년대 후반부터 유포되기 시작한 이 공포물은 세기를 훌쩍 넘어 이제는 공공연하고도 범국가적(?)으로 산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대학이 언젠들 전환기 아닌 시절, 위기 아닌 국면이 있었을까마는, 그래도 지금 떠도는 기류엔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수반되고 있는 바 틀림없다. 무엇보다, 그 음산한 기운이 저 아득한 허공 속에서가 아니라, 대학과 대학 주변의 좁은 틈새를 가로질러 점차 그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긴 이런 사태야 진즉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근대, 근대성 전반에 대한 발본적인 물음들이 제방의 둑 터지듯 사방에서 쏟아졌던바, 근대성의 이념적 파수꾼 역할을 했던 대학 혹은 인문학이 더 이상 무풍지대에 남아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했던 것이다. 공교육 전반, 아니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견고한 대지가 흔들리는 마당에 대학이 마냥 평온하다면 차라리 그게 더 문제적인 게 아닐까?
어쨋든 풍문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당도했고, 당분간 이 회오리는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 숱한 위기의 담론들,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들이 분주하게 제출되는 것도 그 여파의 하나일 터이다. 그런데 근래의 담론들을 훝어보면, 대개 변화를 강요하는 현실을 탓하는 한편, 변화의 당위를 소리높여 외치는 이율배반을 취하면서, ‘세계화’니 ‘이성의 합리적 보편성’ 혹은 ‘인성교육’이니 하니 닳을 대로 닳은 구호를 고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의 구태는 그렇다치고, 이런 패턴에서는 어떠한 실천적 구상도 도출되기 어렵다. 그저, 추상적인 원칙을 둘러싼 지리한 탁상공론만을 반복할 뿐.
문제는 현장이다. 교육이든 지식이든 ‘지금, 여기’의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공허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정책이 어떻게 되든, 교육개혁이 어떻게 되든, 우선은 현장이 살아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교육이란 제도나 정책 이전에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고, 어떤 경로로 전수되는가 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 제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다고 해서 현장의 생동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언제 어디서든 상황과 배치를 변환하기 위한 싸움은 늘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팽팽한 긴장을 기꺼이 견디려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낡은 허상상에 사로잡혀 점점 더 고립되어 자기소멸해 가거나, 아니면 미봉적인 포장으로 근근히 연명하거나. 요컨대, ‘죽거나 나쁘거나’.

잘못된 전제 몇 가지

어떤 담론이든 그것이 생산적인 대화로 이어지려면, 문제를 극한까지 몰고갈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교육담론이 피상적인 수위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기저에 깔린 오도된 전제들을 묵인하면서 그저 표층에 떠오른 사안들만을 가지고 좌충우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의를 좀더 박진감있게 유도하기 위해서는, 때론 무의식적으로 간과되고, 때론 의도적으로 회피되는 심층의 전제들을 표면으로 부상시켜야 한다. 이런 작업은 무엇보다 추상적 구호로 착색된 담론을 그 외부, 곧 현장적 실천과 접목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1.
잘못된 전제, 그 첫 번째는 인문과학 내지 대학교육을 하나의 자명한 진리, 고정된 실체로 설정하는 점이다. 즉, 대학의 인문학은 인간의 본연적 가치를 다루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고유한 실체성을 지닌 것인 까닭에 이것을 뒤흔드는 사회현실은 그 자체로 부당한 것이라는 식의 사유체계가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 그 자체의 위기와 등치’될 수도 있다는 논리적 비약도 가능해진다. 신자유주의 내지 시장전체주의에의 포획이라는 정치경제학적 분석(혹은 분노?)이 이런 논법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아마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입장에 관계없이 대체로 이런 전제에 공감을 표명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처럼 신성하고도 고정된 실체 따위는 없다, 애시당초! 잘 알고 있듯이, 대학은 다른 공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봉건적 신민을 근대적 국민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근대기획의 일부였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그것이 표방한 인문주의나 기초학문, 교양지식 등의 명분은 근대성의 제가치들을 체계적으로 훈육하고 내면화시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시대적 배치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화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다른 한편, 기원의 문제는 그렇다치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과연 대학이 인문적 지식을 통해 능동적 가치를 생산한 적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지적 힘은 언제나 대학 외부에서 형성되었지, 대학이 자발적으로 변화를 주도한 적은 거의 없다. 어찌보면 대학교육의 주류는 ‘국수적 아집’이나 ‘서구추종’의 두 축 사이를 왕복달리기한 것이 전부였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마 대학이 사회변혁을 주도한 시기라면 80년대일 터인데, 그때도 이념적 활력이나 지적 에너지는 대학교육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이질적인 선분들이 교차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때는 마르크스주의가 대학을 좀먹는다고 분노를 터뜨리더니, 마르크스주의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에는 다시 신자유주의가 대학을 말아먹는다고 외쳐대는 것은 좀 몰염치한 것 아닌가. 이런 식의 논법에 전제되고 있는 인문학이나 대학교육이라는 실체는 늘상 시대변화에 관계없이 발목을 붙들어매는 기능을 할 뿐, 그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이것들은 구체적인 실천에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 변화를 강요하는 외부의 힘에 대해 도덕적 우월감을 보장해주는 ‘네가티브’한 역할만을 담당한다. 마치 패배와 모멸 속에서도 늘 정신적인 승리만으로 자족하는 노신의 ‘아큐’처럼.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 안에 고질적인 이분법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기초학문 내지 인문교양을 강조하는 사고의 기저에는 흔히 교양과 전문지식,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분과를 날카롭게 절단하는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 사실 인문학 분과가 흔들린다고 인간적 가치를 다루는 교양지식이 모조리 실종된다면, 과학분과는 아예 인간적 가치라든가 교양적 지식과는 무관한 ‘기술지’에 불과하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반인문적 사고가 아닐지. 현재 대학의 인문분과는 그저 여러 분과학문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인문분과와 과학은 긴밀히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것이다. 그간 이공분과가 그 점을 아예 도외시한 것도 문제지만, 인문분야가 그 점을 온통 떠맡은 듯이 나서는 것 또한 근대교육의 불구적 이분법을 그대로 묵수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음모나 시장경제의 악마성을 폭로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낡은 틀을 답습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궤적 혹은 운동보다 한발 더 앞서서 지식과 교육의 배치를 바꾸려는 과감한 시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이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로운 방편이 아닐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심정으로.

2.
잘못된 전제, 그 두 번째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다.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처음에는 인문학과 인성의 위기에 대한 한탄으로 시작하여 세부각론에 들어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면, 연구지원비의 확보 및 그를 둘러싼 공정한 분배에 관한 언급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대학에서는 연구지원비의 확보가 주요이슈로 ‘뜨고’ 있다. 연구지원비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이 일년의 주활동인 교수도 적지 않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각 대학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흘러들어가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연구의 생산성은 대폭 증가해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왜 이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항상 프로젝트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의 성과가 나름대로 수치화될 수 있는 이공계통과 달리, 인문과학분야는 뚜렷한 계수가 눈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수치가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항이나 실행방식은 잘 모른다. 하지만, 답은 늘 현장에 있는 법. 나의 견문으로는 연구지원비와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인문학 분야의 지적 에너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 대학원생들은 입학하자마자 지도교수 내지 능력있는 교수밑에서 이런 저런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것이 이즈음 대학원의 풍경이다. 수업이나 세미나는 뒷전이다. 물론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도 연구의 주요한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추동되지 않으면 그 자체는 한갖 소외된 ‘사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무리 전산화작업이 맹렬하게 이루어진들 그것이 새로운 지식생산으로 이어질 리 만무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문과학에는 논쟁이 사라졌다. 논쟁의 실종! 이보다 더 지적 황폐함을 증언하는 것이 있을까?
게다가 연구지원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업적이 특출나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수많은 학회들이 난립하고 있다. 온갖 장르, 전공별 지역별 학술대회가 족출하고, 저마다 전국적인 학회지를 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야만 연구지원비를 받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방법론적 모색이나 지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사를 위한 행사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열리고, 그래서 다시 학회는 더욱 황폐화되는 악순환이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사 및 학회지 출판에 필요한 갖가지 노동력은 주로 대학원생들 내지 전문연구자들이 무상으로(!) 헌납해야만 한다. 이건 정말이지, 80년대와 비교해도 퇴행적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수업할 시절에는 각종 세미나와 소그룹 스터디가 많아서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기타 번사를 줄이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번다한 일들 때문에 지적인 능력과 욕망을 억압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니, 오, 그 고달픔을 누가 짐작이나 할까!
내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는 주로 대학원에 몸담고 있거나 박사학위를 소지했지만 아직 대학에 진입하지 않은 전문연구자들 약 60명이 함께 하는 곳이다. 전공은 국문학과 사회학이 주류지만 기타 인문과학에 해당되는 대부분의 전공자가 두루 드나든다. 물론 출신대학도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이 다양한 종류의 지식인군상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 근본동기를 따져보면 현재 대학의 얼굴이 그대로 거울에 비쳐진다. 즉, 이들은 무엇보다 지적 욕구를 대학 안에서 전혀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전문지식인이 되고자 할 때 가장 근저에 있는 것은 앎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다. 그런데 그 초발심은 대학원에 들어서는 순간, 단번에 사라지고 만다.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정체불명의 커리들, 권태롭기 그지없는 강의현장, 그리고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한 끝도 없이 부과되는 학문외적 노동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연구실에 다양한 성격의 지식인들이 교차할 수 있는 힘은 대학의 황폐함 혹은 지적 무능력에 있는 셈이다. 결국 연구지원비의 확보가 주요관건이 되고, 다시 그것을 위해 메마르기 그지없는 논문을 양산하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지도학생들을 무상으로 착취하는, 이 지독한 악순환의 ‘먹이사슬’을 끊어내지 않는 한, 대학교육은 정말, 희망이 없다.

3.
학부제, 교수임용비리, 강사처우문제, 학벌주의 등. 대학교육을 이슈로 다룰 때면 늘상 열거되는 품목들이다. 강사제도나 학연,지연이 얽히고 섥힌 임용비리는 이미 고질적인 병폐가 된 지 오래고, 또 그것은 교육담당자들 모두의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당장에 해결될 전망도 없다. 뿌리뽑힐 때까지 기다리다간 ‘백년하청’일뿐더러, 어차피 번뇌 속에서 청정심이 피어나는 것이 ‘고금의 이치’일진대, 그런 제도적 비리와 싸우기 위해서도 능동적인 지식생산 외에 더 유효한 길은 없을 듯하다.
다른 한편, 학부제 시행은 앞의 사안들과는 분명 층위를 달리한다. 이 제도는 수요자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세계적 추세와 함께 분과로 쪼개진 학과체제로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창발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지식이 생산되기 어려우리라는 거시적 비전과 맞물려 있는 까닭이다. 이런 흐름이 크게 수정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제도는 시간차가 있긴 하겠으되, 결국은 전면적으로 시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학부제에 대한 기성학계의 입장은 대체로 성급한 시행의 오류, 그리고 기초학문의 파괴, 전공의 불균형 등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대응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이 제도가 교육을 상업주의로 몰고 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늘 그 이면에 수반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사안은 시행방식의 오류나 자본과 교육의 긴밀한 유착 이전에 교육과 지식의 구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내장하고 있다.
현재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설정한 전공분야, 그리고 커리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예컨대, 국문학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분화된다. 이것은 지식인을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전공과목을 설정하는 가장 일차적인 기준으로 기능한다. 언뜻 보아도 이런 분화는 시기적으로도 균형이 어그러졌을 뿐 아니라, 고전문학으로부터는 현대적 호흡을 박탈하고, 현대문학에는 고전적 깊이를 부재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재생산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구분법이 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시대나 신라시대로 가면 전공자가 거의 드물다. 지금 한국사 연구의 주류적 분야가 대개 조선시대나 식민지시대이고, 지도교수의 전공분야에 맞춰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구획선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전공 내에서도 정황이 이러한데, 하물며 국문학과 역사학, 철학 등 커다란 분야간에는 말이 인문학이지 지적 소통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기학과에 편중되어 전공간 균형이 깨어질 것이라는 한탄도 무색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인문학의 지적 불균형은 심각한 실정이고, 학부제 시행과 무관하게 이 문제는 앞으로도 해결의 전망이 요원하다. 그리고 어차피 전문연구는 대학원에서 주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학부교육에서 기초학문의 파괴 운운 하면서 분과체계를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현장적 설득력이 거의 없는 셈이다.
따라서 지금 절실하게 요청되는 작업은 고립되고 폐쇄된 분과의 벽을 넘어 지식이 자유롭게 흘러다닐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위적으로 학제간 연구를 조작할 것도 없이 다종다기한 테마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고, 그것들은 기초학문과 전문지식 사이의 벽도 넘어 수요자들에게 풍부한 지적 선택의 장을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학부제에 찬성하든, 아니면 그것에 전면 반발하든, 아무도 이러한 실천의 책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일단 지적 폐쇄성을 벗어던지만 하면, 수많은 테마들이 가능하다. 고전문학과 영화, 페미니즘으로 한시읽기, 문체반정과 새로운 글쓰기, 연암 박지원과 이탁오, 노신과 신채호 등등.
이런 식의 생성과 변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학생들은 외국어나 경영학 등 실용적인 방면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아무런 지적 촉발도 없는 기초학문을 듣느니 그나마 현실에 유용한 것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여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닌가. 100년 전 근대가 물밀 듯이 밀려올 때, 빈번하게 활용된 경구가 하나 있다. 이른바, 주역의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이 그것이다. 다시, 이 고전이 풍미될 시점이 도래한 것인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느니!

‘우정의 교육’, ‘유목적 지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짚어두어야 사항 하나 더. 워낙 우리 근현대사가 굴절과 혼돈의 연속이어서 그렇겠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닥치면, 일단 시야를 외국으로 돌려 선진화된 나라의 제도를 준거로 삼아 비판을 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습속이 있다. 그래서 우리 머리속에는 은연중에 ‘그 어느 먼나라’에서는 이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없다! ‘핑크플로이드의 벽’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같은 영화를 보라. 거기에 그려진 선진국의 학교들 역시 억압과 규율권력의 장소일 따름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태생적 불안정성 때문이든, 아니면 근대기획의 전반적 실패에 기인한 것이든, 앞으로 전세계에 걸쳐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테제는 필연적으로 붕괴되어 갈 것이다. 아울러 인터넷이 상징하듯, 학교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숱한 이질적인 배움터들이 출현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교육난국을 돌파하게 해줄 완벽한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근대라는 한국적 특수성론에 사로잡혀 그저 합리적인 선진제도에 의존하려 한다면, 다시금 시행착오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자기가 선 자리에서 ‘교육과 지식’의 낡은 배치를 근본적으로 변환시키는 실천을 수행하는 것이다.

1. ‘분자적 공명’과 우정의 교육

공간은 일종의 정치적 ‘기계’다. 그 배치에 따라 연기(緣起)작용이 달라지는. 그런 점에서 무릇 모든 교육은 먼저 교실의 배치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조금씩 변화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교실은 높은 교탁과 단상, 일렬로 배열된 책걸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의 구별이 확연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계몽주의의 공간적 투사이다. 즉, 교육이란 전문적이고 인격적 품성을 갖춘 스승이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것이라는. 위에서 아래로, 빛이 있는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이런 식의 전제가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의 내용은 기성품을 복제하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독창성이나 개성, 창발성 등을 강조한다 해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스승이 구획해 놓은 일정한 바운더리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은 이 구획과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체 앎의 영역에서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고정된 선으로 구획될 수 있을 것인가? 나이가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거나 지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특이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앎의 세계에는 그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앎의 흐름만이 있을 뿐. 명말 대표적인 비주류사상가인 이탁오의 다음의 말은 그 점에서 참, 감동적이다.

“나는 스승과 친구는 원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둘이 다르단 말인가? …만약 친구라서 사
배를 올리고 학업을 전수받을 수 없다면, 필시 그와 함께 친구가 될 수 없다. 스승이라서 마
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또한 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사표로 추앙받는 공자 또한 자신이 깨우친 도를 알아주고 토론할 벗을 찾아 천하를 주유했을 뿐, 누구에게도 자신을 배우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승이면서 친구인 것, 이것을 ‘우정의 교육학’이라 이름하면 어떨까. 이런 관계하에서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지식이 구성되고, 흘러 다니는 ‘힘과 힘의 역학’만이 작동하기 때문에 학문외적 권위나 위계 따위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구도는 단지 민주적이고 평등한 ‘인간화교육’이라는 휴머니즘적 구호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 연구실에는 수많은 세미나들이 있다. 일본어강독, 중국어강독, 중세미학, 수사학, 동아시아 근대성, 화폐와 철학 세미나 등등. 이 세미나는 누가 일률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저 구성원들의 지적 욕구에 따라 제안되었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장구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수요자의 학습구성권이 전폭적으로 보장되는 시스템인 셈이다.(반면, 지금 대학교육은 수요자는커녕, 교수들의 학습구성권조차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각각의 세미나는 또다른 변이형들을 끝없이 증식한다. 그래서 일본어강독을 하다가 느닷없이 과학사세미나로 번지기도 하고, 화폐와 철학 세미나를 하다가 일본어강독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세미나 구성원은 연령별로는 약 20년의 갭이 있고, 소위 선후배, 사제지간 등 각색의 인연으로 얽히고 섥혀 있지만, 그러한 위계들은 여기서는 아무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단지 각각의 능력이 교차하면서 ‘분자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일 뿐, 그 흐름에서 ‘고정된 자리’는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세미나의 성과가 업그래이드되어 강좌로 개설되는데, 여기서도 교사와 수요자 모두 자발성에 의해 결합되기 때문에 ‘지적 공명’만이 유일한 관건이 된다. 그래서 어떤 강좌에서는 선생이었던 이가 다른 강좌에서는 수강생이 되는 변환이 수시로 일어난다. 연구실을 열고 처음 공개강좌를 시작할 때 가장 신경을 쓴 일이라면 강의실의 공간적 배치를 수평화한 것이다. 원탁과 세미나 테이블, 개인 책상 따위를 그대로 죽 나열하고서 강의가 진행된다. 강사의 위치는 수시로 바뀔 수 있고,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난 해, 맑스주의 강의 때는 강의실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한참 넘어버려 더러는 책상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더러는 선생 뒤통수를 보면서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배치는 좀 무질서해보이지만 지식의 교류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일률적인 배열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이나 선생 모두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수강생들 사이의 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교실의 배치가 획일적인 되면, 학습자들 간의 소외 또한 심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의 중에는 오직 선생에게만 시선을 두어야 하고, 서로간의 접촉이(시선이나 대화 등)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인적 유대는 항상 강의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런 식으로 이원화되면 지적 소통이나 토론의 역동성은 현저하게 낮아지게 마련이다. 지식 그 자체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중심요소가 될 때, 비로서 스승과 친구가 하나인 교육이 가능한 법이다. 따라서 공간의 수평적 배치는 교사와 학생의 경계뿐 아니라, 학습자들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승시키는데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강의때나 세미나때나 항상 차와 간식을 준비하는 것도 그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함께 먹고 마시는 것보다 친화력을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강의를 하는 사람도 힘이 들지만, 열심히 듣기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가능한한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지적 공명의 주파수는 더욱 상승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여러 경위의 통과점을 지닌다. 직접적 전수 혹은 책을 통한 교류, 그리고 함께 힘을 북돋워주는 벗들, 공간적 배치 등등.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누구의 독점하에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강의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실감할 터이지만, 동일한 내용도 관계의 구성에 따라 현저하게 다른 공명과 촉발을 가져온다. 아울러 반드시 환기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보다 가르치는 사람 자체를 지적으로 훈련시키는 장이라는 점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어찌 주체와 대상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지적 즐거움을 증식하면서, 때로는 제자의 위치에 있다가, 때로는 스승의 자리에, 그리고 때로는 ‘붕우’가 되는 다양한 지점을 경쾌한 행보로 넘나들 수 있는 것, 새로운 세기는 바로 이런 교육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2. ‘수목형 위계’에서 ‘리좀적 증식’으로

학부제를 다루면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근대 이후 분과화된 학문체계는 현실정합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국어국문학과의 예를 다시 들어보면, 국문학과 국어학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가로놓여 있다. 또 국문학 안에서도 고전문학, 한문학, 현대문학은 ‘말의 길’이 끊긴 지 오래다. 기타 다른 학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자신의 분야에서 한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전문성의 실체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한분야를 심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심화가 아니라, 고립을 자초하면서 현실에 아무 쓸모도 없는 지식을 양산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생명은 에너지의 흐름이고, 앎 또한 그러하다. 흐름을 차단하여 경계를 긋는데 골몰하면서 대체 무슨 심화가 있으며, 확충이 가능할 것인가? 실제로 이런 분과체계와 학연, 지연 등 고질적인 병폐들의 재생산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적 흐름이 막히면 땅따먹기식의 전공분할이 더욱 가속화되고, 그것은 자연히 지식외적 관계들에 의존하는 습속을 강화시킨다. 학벌주의, 임용비리 등을 거세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통상적으로 그것이 이러한 지적 생산의 방식과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야말로 지식과 삶을 이원화하는 그물망에 나포된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벽을 넘어 흐르게 하는 것이다. 홈패인 공간에서 매끄러운 지대로!그런데 여기서 지식생산의 배치에 대한 새로운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학제간 연구라는 것을 기이한 종합이나 잡종교배 정도로 착각하는 해프닝이 반복될 것이다. 솔직히 요즘 분과적 체계를 넘는답시고 시도되는 대부분의 작업들이 담론의 생산과는 무관한 과시용 프로젝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촘촘하게 구획된 선들을 가로지르면서 예기치 않은 지적 흐름들이 생성되는 것은 그러한 인위적 혼합절충과는 무관하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우리 연구실의 세미나는 처음 한국 근대계몽기를 대상으로 하는 자료읽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개화기 신문자료를 읽다보면, 누구나 문학 텍스트에 한정해서는 도저히 이 시기의 지도를 그릴 수 없다는데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히 종교, 철학, 사상사 전반, 이를테면 근대성 담론의 영역으로 시선이 확장되고, 다른 한편 한국의 근대성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사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근대성론은 전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동반해야만 비로서 심층적 탐사가 가능한바, 중세미학이나 들뢰즈/가타리, 푸코 등 프랑스 현대철학과의 접속은 이렇게 해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을 하던 이들은 점차 동양적 사유로 눈을 돌리게 되고, 고전과 한문학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들은 서구 탈근대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전공간의 벽을 허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어진 코드와 습속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지만 않다면, 시선의 광할함은 자연스럽게 심연에 대한 열정을 함께 불러온다.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빌리면, 기존의 분과구분이 근원이 되는 뿌리가 있고, 그것에 바탕해서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일종의 수목적 위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면, 그에 반해 이러한 가로지르기는 뿌리줄기, 즉 중심도 지향도 없지만 무한히 분열되어 가면서, 어떤 것과도 접속할 수 있는 ‘리좀적 증식’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글쓰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맞물려 있다. 대학원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했겠지만, 학위를 받으려면 일정한 내용과 형식의 코드를 갖추고 있는 정형화된 글쓰기를 끝없이 수련해야 한다. 견고하게 위계화된 분과체계가 유지되는 것도 사실은 이런 식의 코드화시스템에 의해 받쳐지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체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글쓰기 문법을 내파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대중적이고 교양적 글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따위의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전문성과 대중성, 아카데믹한 스타일과 상업적인 스타일 등을 단절시키는 낡은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면서, 다채로운 수사학의 생성을 통해 지배적인 글쓰기 권력과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생산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적 주체 개개인의 신체가 자재로워야 한다. 즉, 쉬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증식을 통해 변이와 생성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조로현상은 정말 심각하다. 40이면 벌써 권위가 몸에 배고, 50이 넘으면 아예 스스로 원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대개 30대 후반에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하면, 결국 학위가 종착점이라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제도가 부여한 코스를 열심히 습득한 데서 멈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거야 뭐, ‘메아리소리만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거나 ‘그림자를 보고 앞에 있는 개가 짖으면 뒤에서 그대로 따라짖는 개’(이탁오)의 신세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잘알고 있겠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즉,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 여부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지적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가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명말의 대사상가 이탁오는 평생동안 유학의 경전을 탐구했으면서도, 54세 이후 다시 승려가 되어 불교에 입문하여 20여년을 쉬지 않고 유,불,도를 넘나드는 학문을 추구했고, 노신 역시 죽음 직전까지 시대와의 팽팽한 긴장을 잃지 않았으며, 들뢰즈나 가타리, 푸코 등 현대의 사상가들 역시 모두 그러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양상은 예외적 개인들의 속성이기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양태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주입된 습속과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는바, 그럼으로써 더한층 과감한 지적 모험을 감행하게 되는 순리가 아닌가 말이다. 그에 비하면, ‘조로증’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우리의 지적 풍토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새로운 담론의 생산은 이론의 내용 이전에 바로 이러한 지적 배치와 습속을 바꾸는 일,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전공, 세대, 학연, 성별간 위계라는 온갖 훈습에 찌든 ‘정착민적 근성’에서 벗어나, ‘생의 약동’에 몸을 맡기면서 늘 지적 초발심으로 돌아가 경쾌하고도 끈기있게 수행할 수 있는 신체, 이것이 ‘리좀적 증식’의 짝이 되는 ‘유목적 지식인’의 형상일 터이다.

3. ‘앎과 삶’의 일치, 그 생성의 윤리학을 위하여

나와 나의 친구들이 꿈꾸는 것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그것은 심포지움을 축제로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면, 상상력의 경계를 깨부수는 선정적인(?) 테마를 가지고서 다방면의 연구자들이 발제를 한다. 형식은 개별발표뿐 아니라, 듀엣으로 할 수도 있고, 여럿이서 한조가 되어서 할 수도 있다. 한 곳에는 음식과 차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다. 중간 중간 휴식 시간에는 락, 발라드, 클래식 등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서 친교를 나눈다. 주제와 관련된 슬라이드나 비디오가 상영될 수도 있다. 심포지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토론인데, 예의나 격식에 따른 언사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논쟁을 극한까지 몰고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매너라든가 형식의 구속이 없기 때문에 토론자나 발표자의 개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다. 시간제한도 없고, 배고픔과 지리함을 견뎌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지새워 토론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꿈이 실현된다면, 아마 단 하루 동안에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지적 수준은 비약적으로 고양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활동을 통해 교육과 연구, 지식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 모든 이들의 신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될 터이므로. 심포지움이란 일종의 지식인들의 라이브 공연이다. 밴드가 음반을 준비하듯, 평소에 세미나와 학습을 통해 갈고 닦은 내용들 가운데 그 에센스만을 간추려 대중앞에서 한판 쇼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을 통해 새로운 지적 동료들을 만나고 거기서 다시 새로운 유형의 팀이 조직되고… 이런 라이브 성과물들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매체로 집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억지로 기획하고 의무감에서 잡지를 내는 악전고투를 답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에서 대학교육의 여러 문제를 두루 짚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지식의 기쁨’이 사라졌다는 음울한 진단이 자리하고 있다. 온갖 풍요와 편리 속에서 생의 기쁨이 마모되어버린 근대적 일상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기쁨의 상실은 지식이 삶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짐으로써 초래된 것인바, 심포지움은 오직 근엄하고 지리한 학술대회여야하고, 삶의 기쁨은 다른 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고질적인 이분법은 그 괴리감의 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는 어떻게 이 간극을 넘어 일상의 실천과 지적 열정을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을 것인가일 터이다.
누구나 지식의 즐거움, 지적 능력의 증식을 통한 자유의 확대, 능동적인 관계의 확충 등을 원한다. 그런데 왜 모두 거꾸로 살고 있는가? 지식은 고된 노동이 되고, 학력이 높아질수록 신체는 더욱 부자연스럽게 되고, 그러는 사이 인적 유대와 지적 상상력은 완전 마모되는 이 악순환의 늪에서 주저앉아 있는가 말이다. 수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정치경제학적 분석도 가능하고, 문화적 토양, 교육제도의 비리와 모순 등등. 그러나 그 속내에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똬리를 틀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권에 진입해야 하고, 그러자니 스승, 선후배 등 파벌주의에 편승해야 되고 등등. 말하자면, 결국은 도시중산층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이념에 관계없이 지식인들 모두에게 그 지독한 악업(惡業)을 묵인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의 문제는 삶의 윤리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그말은 결국 앎의 자유를 되찾는 작업은 삶을 생성시키는 새로운 윤리학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솔직히 말해보자. 현대 중산층은 너무나 많은 비용을 행복과는 무관하게 지출한다. 오직 가족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둘러치기 위하여, 그리고 노후의 안정이라는 황당한 명제를 위하여. 사실 이것은 행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돈은 단지 수단일 뿐인데, 어느 순간 돈이 생애의 유일한 목표이자 표상이 되어버리는 이 기괴한 도착증! 자본주의가 그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는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지식이 현실을 변화시키고, 생동하게 하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지식은 곧바로 삶의 윤리적 토대로 전이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지식은 삶과 무관하고, 세상에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90년대 이후 제도권 외부에 많은 연구단체들이 생겨나고, 대학안에도 사회교육원 등이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어지면서 공교육 외부의 교육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런데도 지식의 에너지는 여전히 겹겹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것은 이런 매체들 역시 교육이나 지식에 대한 기존의 구도를 고스란히 변주하고 있어서, 거기서 형성되는 대부분의 교육이 일시적인 상품 이상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식에 대한 수요층은 확산되었지만, 전문가와 대중, 지식과 삶의 경계는 여전히 두텁다는 것이다. 우리 연구실에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아무런 대책없이 그저 공부가 좋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학원에 몸담고 있는, 이른바 전문지식인들보다 더 왕성한 지식욕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그것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윤리적 욕구와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으로 훨씬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이들이 대학교육만을 유일한 코스로 여겨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면, 그순간부터 지식은 기쁨이 아니라 질곡이 됨과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 또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 회로에서는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식의 생산과 삶의 윤리학은 맞물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대학체제가 구성원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이러한 불일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강렬한 유대에 기반한 지식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함께 모여 공부하고,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일상을 공유하면서 근본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차라리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어떤 교육매체보다도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함께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창 연습하고, 토론하고, 먹고, 마시고, 돈이 필요하면, 각종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모은 다음, 다시 모여서 노래하는.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지식생산은 너무나도 고립되어 있다. 일주일이나 한달에 한두 번 만나 세미나하는 정도로야 어떻게 집합적 흐름이 형성될 것이며, 삶과의 일치를 꾀할 수 있을 것인가? 성별, 세대별, 학연, 학벌 등 온갖 경직된 선들을 뛰어넘는 담론이 그 정도의 느슨한 접속을 통해 생성될 리 결코, 만무하다.
그리고 밴드들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공간만 확보되면 이러한 지식공동체의 구성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적으로 집필공간을 마련하고 도서를 구입하는 낭비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밥을 먹고, 함께 세미나를 조직하고, 성과물을 기획하는 일상의 공유는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적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왜냐면, 이때 지식과 삶은 그대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굳이 도회를 떠나 전원에 자리잡고 자연과 친화해야만 공동체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가장 전위적인 지식을 중심으로도 얼마든지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각기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하고, 각기 자기의 장점을 펼치게 하여, 한 사람도 알맞게 쓰이지 않는 사람이 없게”(이탁오)하는 것, 다시 말해 각자 서로의 길을 막지 않으면서 강도높은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 앎과 삶의 새로운 윤리학은 여기서부터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물론 이런 식의 지식공동체는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우리 연구실이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수많은 인적 관계들을 형성할 수 있고, 심심치 않게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지식사회가 얼마나 새로운 활로에 목말라 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토록 위기담론이 팽배했음에도 교육주체들이 실천적 모색의 측면에서 수동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터뷰를 할 때마다 항상 제도권 진입을 거부한다는 것이 주요 이슈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사실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나와 나의 친구들에게는 제도권이냐 아니냐는 사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의 목표는 교육과 연구를 하나로 융합시키면서, 인위적으로 경계지워진 장벽을 넘어 지적 에너지를 흘러 넘치게 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다만 제도권 진입이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먼저 시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도권 내부냐 외부냐로 설정하는 순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시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식의 가장 큰 적은 이분법 그 자체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고, 따라서 외부에서의 이런 흐름이 큰 힘을 구성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부를 변이하는 에너지로 투여될 것이다. ‘배움에는 자기도 없고, 남도 없’다고 했는데, 어찌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있을 것인가? 거듭 말하거니와, 완벽한 제도, 이상적인 모델은 어디에도 없다. 모범답안을 찾기보다 자신이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지식의 기쁨을 향유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열망, 그 초발심을 되찾고자 한다면,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 더구나, 다음의 글을 읽고 여전히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청년들이 금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
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
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할 것인가!”(노신, [청년과 지도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