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o: 브랜드 폭격

No Logo
No Logo *photo:Flickr _ KayVee.INC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원제 <No Logo>, 나오미 클라인 지음, 2000년 초판 발행)>의 6장을 요약한 메모.

다국적 기업들은 다양성에 대해 말하지만 실상 눈에 보이는 것은 마케터들의 말대로 유니폼을 입고 아무 생각 없이 쇼핑몰로 행진하는 10대 무리뿐이다. 다인종 이미지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시장 주도형 세계화는 다양성을 원하지 않는다. 만화경처럼 쏟아지는 ‘다양성이 통합된 거리’ 이미지부터 “어디로 가고 싶어요?”라고 묻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꼬임까지, 우리는 매일 광고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경제면에 나오는 세계는 검정색 하나뿐이고, 사방의 문은 모두 쾅 닫혀 있다. 새로운 회사 매입 소식도 있고, 갑작스런 부도 소식에 대규모 합병 이야기도 들린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선택지가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라는 질문의 본 뜻은 “내가 원하는 곳에 당신이 가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이다. No Logo: 브랜드 폭격 더보기

되찾은 靜寂 – 자전거를 위하여

되찾은 靜寂 – 자전거를 위하여 볼프강 작스 《녹색평론》제16호 1994년 5-6월호

미래의 이미지는 현재와 대조되어 그 빛깔을 얻는다. 본래 자동차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현대인들을 짓누르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자동차가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한군데 매여있거나 나날의 생활 속에 갇혀 지내면서 연약한 육체의 힘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자동차는 약속했던 것이다. 사회적 폐쇄공포증이라는 토양 속에서만 움직임에 대한 열광이 번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대안적인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는 것은 이제 더이상 움직임이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고향상실에서 오는 번뇌였다. 바퀴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더 큰 속도나 더 많은 엔진의 힘을 약속한다는 것은 별로 매력이 없는 일이다. 도처에 자동차가 있지만 아무도 도착하는 사람이 없고, 모든 사람이 길 위에 있지만 아무와도 유대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다른 종류의 욕망이 생겨난다. 어네스트 칼렌바흐는 그의 책《에코토피아》에서 자동차가 없는 유토피아를 묘사하고 있다.

나는 가방을 챙겨갖고 바깥으로 나갔다. 내가 거리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낯선 정적이 깔려 있었다. 나는 적어도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택시가 달려들며, 사람들이 도시생활의 서두름 속에서 밀쳐대는 ― 현대 도시의 부산스러움 같은 것을 기대하였다. 최초의 놀람을 극복하였을 때 내가 발견한 것은 한때 거대한 가로로서 도시를 관통하여 부두까지 뻗어있던〈시장거리〉가 수천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책로로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전기택시와 미니버스와 짐수레들이 다니고 있는 차도는 이제는 2차선으로 줄어 있었다. 방대한 넓이의 나머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전거도로, 분수, 조각, 정자(亭子), 그리고 벤치들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정원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 위에 거의 음산한 정적이 깃들어 있었고, 이따금 급히 달려가는 자전거 소리와 아이들의 외침소리가 정적을 깨트리곤 했다. 심지어 새의 노래가 들릴 때도 있었는데, 이것은 여기가 수도의 가장 복잡한 중심가로 여겨지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 물론 소수이지만 그러나 소리높이 ― 숲이 베어지고, 동네가 찻길로 뚫어지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였고, 지난 20년 동안 자연경관이 포장되는 것에 저항하여 싸워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동차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를 정당하게 부각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는 주민투표에 반영되었다.

지난날의 약속이 그 가치를 잃어버렸고, 개인 자동차의 대중적 소유는 온갖 강제와 임무의 그물을 수반하였으며,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더욱 힘들어졌다. ― 이러한 경험은 1960년대 이후 계속하여 증가되어왔고,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구가되던 자동차주의가 이제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변화에 민감한 것은 아니다. 주민투표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본질적으로 일치된 반응을 보여주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육을 받은 스무살에서 서른 다섯살 사이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자기네 아버지들의 믿음을 포기하고 있다. 따져보면 1960년대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형성되던 연대였다 ― 그들은 자동차의 부족이 아니라 지나침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희망을 보여주던 경제적 기적의 시기에 자란 이 아이들이〈성장〉에 대한 그들 아버지들의 열광에 대하여 나타낸 것은 경멸뿐이었다. 비슷한 역사적 체험으로 인하여 그들이 갖게된 공통한 견해는 그들로 하여금 단순한 세대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집단으로서〈진보라고? 사절합니다!〉라고 하는 새로운 수정주의적 상호적 삶의 감각 속에 뭉치게 하였다.
이들의 경멸감을 자극한 것은 무엇보다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옛 열광의 표시였다. 즉, 고속도로의 새로운 연장은 사람들에게 강한 비판적 감각을 불러일으켰고, 도로를 내기 위하여 나무들이 베어넘어지는 일은 복종적인 시민들까지도 환경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자동차는〈환경의 적(敵) 제1호〉가 되었다. 운전거리 십만킬로미터마다 자동차가 공기중에 일킬로의 납을 불어넣을 때, 콘스탄스호(湖)주변 도로들로 말미암아 그곳 경관이 평균 6.3평방킬로미터의 고립된 섬들로 바뀌고, 그렇게됨으로써 보행자는 3킬로미터마다 또다른 교차로에 맞딱뜨려야만 하게 될 때, 그리고 서독에서만 거의 50만의 인명이 자동차를 위한 제단(祭壇)에 희생당해 왔다면, 자동차의 문화적 발흥을 부추겨왔던 진보에의 믿음은 어느날엔가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그린벨트 또는 목재로 지어진 오두막의 보존문제를 둘러싼 갈등들은 개별적인 사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동력을 얻는다. 실제로, 위험에 처한 나무 앞에 완강히 버티고 선 사람들은 흔히 그전에는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를 구별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대립들을 통하여 분명하게된 것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던 진보에의 환상이 깨어진 일이다. 그 환상에 의하면 미래는 약속에 가득찬 것으로서 언제나 현재를 능가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역사를 상승시키는 데는 재화의 수효에 있어서 꾸준한 증가가 계속되면 족하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베어넘겨진 나무와 해체된 오두막은 이러한 진보가 실상은 불균형한 비용전가(費用轉嫁) ― 운전자의 즐거움을 위하여 사회는 쓰레기장으로 되고 마는 ― 에 의존하고 있다는 통찰의 상징이 되었다.
쓰레기가 증가함에 따라 삶의 질이 떨어졌다.〈더 크게, 더 멀리, 더 빨리〉가 우리를 좋은 삶에 좀더 가까이 데려다 주었다는 믿음, 미래에의 강박적 관심 ― 이것이 없었다면 신기한 것과 스트레스에 대한 중독은 말할 것도 없고, 속도에 대한 광분도 번창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은 끝나버렸다. 진보와 더불어 퇴보가 나란히 행진해왔고,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을 노예화함으로써 해방시켜왔던 것으로 보였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도피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었다. 되돌아 갈 길도 막혔고, 대안들은 파괴되었으며, 미래는 식민지화되었다. 이른바 객관성의 명령이 지배하는 곳에서 미래는 그 희망과 함께 완전히 소진되어버렸다. 총체적인 자동차 사회로 전락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선택은 그 사회를 관리하는 것 뿐이다. 아무런 미래도 없다. 소수의 사람들이 말해온 것이 이제는 인구의 대다수 속에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알렌스바하의 한 조사에 의하면, 1956년에 56퍼센트가 여전히〈사람들은 보다 나은 미래로 가고 있다〉라고 믿었는데, 1980년에는 오직 28퍼센트만이 그러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한 때 사람들이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인 것은 터널과 비행기의 항로로 둘러싸인 세계였고, 환상은 어디서나 관통할 수 있는 공간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다 명상적인 이미지가 흔하게 되었다. 녹색의 풀과 자전거와 분수와 조각들, 그리고 당연히 새들의 노래로 둘러싸인 아파트 구역의 이미지가 그러한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 있어서 창조성은 낭만적 전통에 뿌리내려진 개념들과 함께 꽃피어난다. 기계들의 위압적인 힘에 의해서 건드려지지 않은 채 유지되는 삶에 대한 욕망 ― 이것은 반핵 및 평화운동뿐만 아니라 교통주민운동 속에 흐르고 있는 라이트모티브이다. 논쟁의 주의제(主議題)는 이제 진보의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삶의 식민화를 어떻게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다.〈객관성〉의 지배에 맞서는 투쟁에서〈자연〉,〈건강〉,〈자율성〉이 관건적인 단어가 되었다. 숲을 보호하려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건 건강식품에 열광하는 사람이건 또는 풀뿌리자원봉사자이건 그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은 경제적 제국주의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삶을 유지하는 일이다. 욕망의 역사는 이제 자동차의 역사에 결별을 고하려고 한다. 바퀴(자동차)로부터 아직도 자기자신을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나쁜 믿음〉으로 괴로움을 당해야 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보다 부드러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열망은 자동차와 공유하는 것이 없다. 그 열망은 자전거에 훨씬 더 많이 애착을 갖는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타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이동할 수 있는 대가들이 아닌가? 한 때 운송(運送)의 신데렐라였던 자전거는 이제 별안간 인간적인 기술의 한 상징으로서 부각되었다. 그 체인과 볼 베아링과 가벼운 금속 뼈대를 가지고 자전거는 진보된 기술의 이점(利点)을 제공하면서, 환경을 위협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행위는 힘이 드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전거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자기자신에게 달려있다. 자동차에서처럼 몸과 두뇌가 안락한 구조물 속에 들어앉아 있지 않다. 자전거타기는 기계에 우선하는 도덕적 기초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연과 육체성(肉體性)을 요구한다. 이것이 자전거의 정치적 의미이다. 자기자신의 삶의 방향을 제어하고, 단순한 고객과 소비자로서의 생존을 넘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 그들은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함부르크에 사는 카롤 카를 – 짐은 1982년에 잡지《브리기테》에서 설명하였다.

나는 매일 아침 사무실까지 15분 동안 자동차를 운전해 가야 하고, 주차할 곳을 찾느라고 그 구역 주변을 같은 시간 만큼 소비해야 하는 데 지쳐버렸다. 나는 혼자 말하였다. 함부르크는 평평하고, 비교적 많은 자전거 길을 가지고 있다. 자전거를 타면 언제든 내리고 싶을 때 내릴 수 있고, 신경을 쑤셔대는 교통혼잡 속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 자전거 타기로써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사무실에 도착하게 되고, 시간도 돈도 절약할 수 있다.

자전거와 더불어 갑자기 오래된 동기(動機)들이 되돌아왔다. 내리고 싶을 때 내리고, 우회하거나 멈출 필요가 없고, 짜증나는 교통혼잡 속에서 기다리며 앉아있을 필요가 없는 상황 ― 통근자와 승객의 시대에, 독립성에 대한 욕구가 자전거를 찾게 하는 것이다. 꽉 메인 거리도, 지각하는 일도, 수리공장으로의 방문도, 지불해야 할 보험료도 이제 더이상 없다. 자동차의 대중화로 말미암아 특이한 물건으로서의 자동차의 위엄이 박탈되고, 그것이 단지 하나의 자동 운송기계로 전락해버린 이후에 한때 자동차와 철도 사이의 대조를 규정하던 경험적 모티프가 자전거와 자동차 사이의 대조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교통체증, 고속도 경사로, 주유소, 하부구조계획, 송유관, 유조선 등등으로부터 독립한 존재로서 자전거가 등장한 것이다.
결국 자동차는 겉보기에만 자동적인 것이었다. 개인 자동차를 갖고 우리는 서로서로에게서 갈수록 독립적으로 되었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더욱 의존적으로 되었다. 석유 공급이 중단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중동에서 한 암살자가 어딘가에서 자신의 목표물을 습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부구조의 힘에 대한 조용한 두려움이 자전거에 자율성의 분위기를 부여한다. 자전거라는 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비용도 거의 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재빠르다. 자동차 한대를 사는 것은 수송기계에 대한 예속의 몸짓인 것에 반해서, 자전거 한대를 산다는 것은 사람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실제로, 자동차를 포기한다는 일은 사회적 우월성의 한 상징이 되기까지 한다. 그것은 흔히 자전거가 상품광고의 배경으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에 시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골롸즈 담배를 위한 한 광고에서, 한 젊은이가 자동차들로 몹시 붐비는 거리에서 자전거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조용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광고의 설명문에는 자동차 없이 지내는 한 생활스타일이 칭송되고 있다.〈이 남자는 어디서든 더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에 천천히 다닌다. 그는 마력(馬力)의 도움 없이 이렇게할 만큼 충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힘을 얻는다. 그는 진정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운운.〉 ― 요컨대 그는 남들보다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교통체증, 스트레스, 승객으로서의 일반적인 운명에 직면하여, 자전거 타기는 전체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우월성의 표지가 된다. 자전거 타기로써 독립성과 정숙(靜肅)함과 신체적 자신감 ― 간단히 말하여 비순응주의 ― 을 실천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함으로써 자기자신들이 아직도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자동차 운전자들과의 사이에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동차 대중화 사회에서 그들 자신이 장거리와 속도의 지배아래 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주권(主權)확보의 분위기가 자전거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진실로 자기자신의 주인들이다. 그들은 강제적 수송체계에 코웃음을 칠 수 있으며, 연료비의 상승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사정이 허락한다면 그들은 자동차 구입을 위한 돈을 저축하기 위해서 임금노동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 주 30시간으로써 그들은 더많은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다! 이제 자동차 없이 지내는 생활스타일이야말로 희소성의 꽃다발을 받는다. 대다수가 자동차를 운전하도록 강요되고 있는 곳에서 자동차 없는 사람들의 삶은 새로운 매력의 힘이 된다.

1920년대에 베르너 베르겐그루엔은 자전거를 타면서 경험하는 지각(知覺)의 풍부성에 관하여 말하였다.

내가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자전거 한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내게 동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실은, 나는 자동차를 원하지 않는다 ― 내게는 속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여행의 강도이다. 여행의 강도에 기여하는 것은 가장 미세한 차이들, 뉴앙스에 대한 경험이다 ― 자동차 운전자는 다만 큰 것들의 움직임 또는 조잡한 차이들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한 풍경에서 다른 풍경으로 또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점진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소한 세부를 경험한다.

오랫동안 자동차의 유리창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거의 감각이 죽어버린 사람들이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게 될 때 그들은 자기들이 뚫고 지나가는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다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 놀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숨겨진 길과 뜻밖의 광경을 발견한다. 세상은 그 작은 세부의 풍성한 보물을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 드러내준다. 자동차의 핸들 위에 앉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냄새나지도 않는다. 자동차의 앞창을 통해서 보는 시각(視覺)은 공간을 죽이고, 모든 공간을 단순한 수송 루트로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있는 모든 것들이 보다 예각화되어 나타난다. 자전거와 보조를 맞추는 것은 멀리 가닿는 응시가 아니라 근접한 것에 대한 주의(注意)이다.
게다가, 자전거 여행은 자동차와 같은 단조롭고 직선적인 장거리 통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전거 여행은 작은 모험과 단절을 동반하면서 진행된다. 자전거는 4 내지 5 킬로미터 거리내의 집앞에서 집앞까지 사람을 싣고 가는 어떤 다른 수송수단보다도 더 다루기 쉽고, 분명 더 빠르다.《브리기테》잡지 보고기사에서 한 응답자는 말하였다.〈내 자전거는 결과적으로 나에게 보다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나는 내게 더 자주 말하지요 ― 어떻든 내가 그 근처를 가니까 그걸 실어야지, 또는 그쪽에 볼일이 있어 가는 동안 내 여자친구도 방문해야지. 자동차라면 내가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주차할 곳을 찾아서 그 구역주변을 세번이나 돌아다녀야 할테니까요.〉
자전거로 인해 가까이 있는 세계를 우리가 소유할 수 있게 된만큼, 자전거는 탈자동차 시대의 한 이상을 대변한다. 즉, 근접지역이 우리의 집으로 탈바꿈된다는 이상 말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거리, 동네 구멍가게들, 녹색의 잔디밭, 옥상의 정원들, 태양열 집열기들 ― 우리의 희망은 도시가 이렇게 삶의 공간으로 생태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자동차에 의해 강제되어온 낡은 생활양식에 반대되는 이미지들이다. 자전거는 지역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적 참여를 필요로 하는 테크놀로지의 모범이 된다. 자전거는 보행자보다도 몇배나 큰 이동성을 모든 사람 ― 부자나 가난뱅이나 젊은이나 늙은이나 ― 이 누리게 하면서도, 그 움직임의 자유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제약을 받지 않게 하는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자전거의 부흥은 진보의 개념에 강박적으로 붙들린 정신으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찾는 사람들의 노력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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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작스 (Wolfgang Sachs) ― 독일 에쎈에 있는 Institute for Cultural Studies 의 연구원. 本誌 제8호(1993년 1-2월호)에〈개발 – 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연속에세이의 일부가 소개된 바 있다. 이 글은 최근 英譯 출간된 그의 새로운 책 For Love of the Automobile : Looking Back into the History of our Desires (1992)의 한 장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우정의 교육’과 ‘유목적 지식’을 위한 에세이

상당히 신기하고도 대단한 연구집단의 소개글입니다.
조금은 길지만 읽어들 보세요..
특히 대학원 진학자나 유학 고려중인 사람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련이 남는 사람들..은 더더욱..

‘우정의 교육’과 ‘유목적 지식’을 위한 에세이

고 미 숙

‘죽거나 나쁘거나’

하나의 괴담이 대학가를 배회하고 있다. ‘대학은 죽었다!’ 혹은 ‘인문학은 지금 벼랑끝에 서 있다.’는 스토리로 구성된. 90년대 후반부터 유포되기 시작한 이 공포물은 세기를 훌쩍 넘어 이제는 공공연하고도 범국가적(?)으로 산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대학이 언젠들 전환기 아닌 시절, 위기 아닌 국면이 있었을까마는, 그래도 지금 떠도는 기류엔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수반되고 있는 바 틀림없다. 무엇보다, 그 음산한 기운이 저 아득한 허공 속에서가 아니라, 대학과 대학 주변의 좁은 틈새를 가로질러 점차 그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긴 이런 사태야 진즉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근대, 근대성 전반에 대한 발본적인 물음들이 제방의 둑 터지듯 사방에서 쏟아졌던바, 근대성의 이념적 파수꾼 역할을 했던 대학 혹은 인문학이 더 이상 무풍지대에 남아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했던 것이다. 공교육 전반, 아니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견고한 대지가 흔들리는 마당에 대학이 마냥 평온하다면 차라리 그게 더 문제적인 게 아닐까?
어쨋든 풍문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당도했고, 당분간 이 회오리는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 숱한 위기의 담론들,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들이 분주하게 제출되는 것도 그 여파의 하나일 터이다. 그런데 근래의 담론들을 훝어보면, 대개 변화를 강요하는 현실을 탓하는 한편, 변화의 당위를 소리높여 외치는 이율배반을 취하면서, ‘세계화’니 ‘이성의 합리적 보편성’ 혹은 ‘인성교육’이니 하니 닳을 대로 닳은 구호를 고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의 구태는 그렇다치고, 이런 패턴에서는 어떠한 실천적 구상도 도출되기 어렵다. 그저, 추상적인 원칙을 둘러싼 지리한 탁상공론만을 반복할 뿐.
문제는 현장이다. 교육이든 지식이든 ‘지금, 여기’의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공허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정책이 어떻게 되든, 교육개혁이 어떻게 되든, 우선은 현장이 살아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교육이란 제도나 정책 이전에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고, 어떤 경로로 전수되는가 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 제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다고 해서 현장의 생동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언제 어디서든 상황과 배치를 변환하기 위한 싸움은 늘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팽팽한 긴장을 기꺼이 견디려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낡은 허상상에 사로잡혀 점점 더 고립되어 자기소멸해 가거나, 아니면 미봉적인 포장으로 근근히 연명하거나. 요컨대, ‘죽거나 나쁘거나’.

잘못된 전제 몇 가지

어떤 담론이든 그것이 생산적인 대화로 이어지려면, 문제를 극한까지 몰고갈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교육담론이 피상적인 수위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기저에 깔린 오도된 전제들을 묵인하면서 그저 표층에 떠오른 사안들만을 가지고 좌충우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의를 좀더 박진감있게 유도하기 위해서는, 때론 무의식적으로 간과되고, 때론 의도적으로 회피되는 심층의 전제들을 표면으로 부상시켜야 한다. 이런 작업은 무엇보다 추상적 구호로 착색된 담론을 그 외부, 곧 현장적 실천과 접목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1.
잘못된 전제, 그 첫 번째는 인문과학 내지 대학교육을 하나의 자명한 진리, 고정된 실체로 설정하는 점이다. 즉, 대학의 인문학은 인간의 본연적 가치를 다루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고유한 실체성을 지닌 것인 까닭에 이것을 뒤흔드는 사회현실은 그 자체로 부당한 것이라는 식의 사유체계가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 그 자체의 위기와 등치’될 수도 있다는 논리적 비약도 가능해진다. 신자유주의 내지 시장전체주의에의 포획이라는 정치경제학적 분석(혹은 분노?)이 이런 논법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아마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입장에 관계없이 대체로 이런 전제에 공감을 표명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처럼 신성하고도 고정된 실체 따위는 없다, 애시당초! 잘 알고 있듯이, 대학은 다른 공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봉건적 신민을 근대적 국민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근대기획의 일부였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그것이 표방한 인문주의나 기초학문, 교양지식 등의 명분은 근대성의 제가치들을 체계적으로 훈육하고 내면화시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시대적 배치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화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다른 한편, 기원의 문제는 그렇다치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과연 대학이 인문적 지식을 통해 능동적 가치를 생산한 적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지적 힘은 언제나 대학 외부에서 형성되었지, 대학이 자발적으로 변화를 주도한 적은 거의 없다. 어찌보면 대학교육의 주류는 ‘국수적 아집’이나 ‘서구추종’의 두 축 사이를 왕복달리기한 것이 전부였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마 대학이 사회변혁을 주도한 시기라면 80년대일 터인데, 그때도 이념적 활력이나 지적 에너지는 대학교육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이질적인 선분들이 교차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때는 마르크스주의가 대학을 좀먹는다고 분노를 터뜨리더니, 마르크스주의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에는 다시 신자유주의가 대학을 말아먹는다고 외쳐대는 것은 좀 몰염치한 것 아닌가. 이런 식의 논법에 전제되고 있는 인문학이나 대학교육이라는 실체는 늘상 시대변화에 관계없이 발목을 붙들어매는 기능을 할 뿐, 그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이것들은 구체적인 실천에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 변화를 강요하는 외부의 힘에 대해 도덕적 우월감을 보장해주는 ‘네가티브’한 역할만을 담당한다. 마치 패배와 모멸 속에서도 늘 정신적인 승리만으로 자족하는 노신의 ‘아큐’처럼.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 안에 고질적인 이분법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기초학문 내지 인문교양을 강조하는 사고의 기저에는 흔히 교양과 전문지식,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분과를 날카롭게 절단하는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 사실 인문학 분과가 흔들린다고 인간적 가치를 다루는 교양지식이 모조리 실종된다면, 과학분과는 아예 인간적 가치라든가 교양적 지식과는 무관한 ‘기술지’에 불과하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반인문적 사고가 아닐지. 현재 대학의 인문분과는 그저 여러 분과학문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인문분과와 과학은 긴밀히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것이다. 그간 이공분과가 그 점을 아예 도외시한 것도 문제지만, 인문분야가 그 점을 온통 떠맡은 듯이 나서는 것 또한 근대교육의 불구적 이분법을 그대로 묵수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음모나 시장경제의 악마성을 폭로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낡은 틀을 답습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궤적 혹은 운동보다 한발 더 앞서서 지식과 교육의 배치를 바꾸려는 과감한 시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이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로운 방편이 아닐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심정으로.

2.
잘못된 전제, 그 두 번째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다.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처음에는 인문학과 인성의 위기에 대한 한탄으로 시작하여 세부각론에 들어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면, 연구지원비의 확보 및 그를 둘러싼 공정한 분배에 관한 언급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대학에서는 연구지원비의 확보가 주요이슈로 ‘뜨고’ 있다. 연구지원비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이 일년의 주활동인 교수도 적지 않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각 대학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흘러들어가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연구의 생산성은 대폭 증가해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왜 이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항상 프로젝트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의 성과가 나름대로 수치화될 수 있는 이공계통과 달리, 인문과학분야는 뚜렷한 계수가 눈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수치가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항이나 실행방식은 잘 모른다. 하지만, 답은 늘 현장에 있는 법. 나의 견문으로는 연구지원비와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인문학 분야의 지적 에너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 대학원생들은 입학하자마자 지도교수 내지 능력있는 교수밑에서 이런 저런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것이 이즈음 대학원의 풍경이다. 수업이나 세미나는 뒷전이다. 물론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도 연구의 주요한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추동되지 않으면 그 자체는 한갖 소외된 ‘사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무리 전산화작업이 맹렬하게 이루어진들 그것이 새로운 지식생산으로 이어질 리 만무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문과학에는 논쟁이 사라졌다. 논쟁의 실종! 이보다 더 지적 황폐함을 증언하는 것이 있을까?
게다가 연구지원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업적이 특출나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수많은 학회들이 난립하고 있다. 온갖 장르, 전공별 지역별 학술대회가 족출하고, 저마다 전국적인 학회지를 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야만 연구지원비를 받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방법론적 모색이나 지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사를 위한 행사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열리고, 그래서 다시 학회는 더욱 황폐화되는 악순환이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사 및 학회지 출판에 필요한 갖가지 노동력은 주로 대학원생들 내지 전문연구자들이 무상으로(!) 헌납해야만 한다. 이건 정말이지, 80년대와 비교해도 퇴행적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수업할 시절에는 각종 세미나와 소그룹 스터디가 많아서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기타 번사를 줄이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번다한 일들 때문에 지적인 능력과 욕망을 억압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니, 오, 그 고달픔을 누가 짐작이나 할까!
내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는 주로 대학원에 몸담고 있거나 박사학위를 소지했지만 아직 대학에 진입하지 않은 전문연구자들 약 60명이 함께 하는 곳이다. 전공은 국문학과 사회학이 주류지만 기타 인문과학에 해당되는 대부분의 전공자가 두루 드나든다. 물론 출신대학도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이 다양한 종류의 지식인군상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 근본동기를 따져보면 현재 대학의 얼굴이 그대로 거울에 비쳐진다. 즉, 이들은 무엇보다 지적 욕구를 대학 안에서 전혀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전문지식인이 되고자 할 때 가장 근저에 있는 것은 앎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다. 그런데 그 초발심은 대학원에 들어서는 순간, 단번에 사라지고 만다.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정체불명의 커리들, 권태롭기 그지없는 강의현장, 그리고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한 끝도 없이 부과되는 학문외적 노동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연구실에 다양한 성격의 지식인들이 교차할 수 있는 힘은 대학의 황폐함 혹은 지적 무능력에 있는 셈이다. 결국 연구지원비의 확보가 주요관건이 되고, 다시 그것을 위해 메마르기 그지없는 논문을 양산하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지도학생들을 무상으로 착취하는, 이 지독한 악순환의 ‘먹이사슬’을 끊어내지 않는 한, 대학교육은 정말, 희망이 없다.

3.
학부제, 교수임용비리, 강사처우문제, 학벌주의 등. 대학교육을 이슈로 다룰 때면 늘상 열거되는 품목들이다. 강사제도나 학연,지연이 얽히고 섥힌 임용비리는 이미 고질적인 병폐가 된 지 오래고, 또 그것은 교육담당자들 모두의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당장에 해결될 전망도 없다. 뿌리뽑힐 때까지 기다리다간 ‘백년하청’일뿐더러, 어차피 번뇌 속에서 청정심이 피어나는 것이 ‘고금의 이치’일진대, 그런 제도적 비리와 싸우기 위해서도 능동적인 지식생산 외에 더 유효한 길은 없을 듯하다.
다른 한편, 학부제 시행은 앞의 사안들과는 분명 층위를 달리한다. 이 제도는 수요자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세계적 추세와 함께 분과로 쪼개진 학과체제로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창발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지식이 생산되기 어려우리라는 거시적 비전과 맞물려 있는 까닭이다. 이런 흐름이 크게 수정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제도는 시간차가 있긴 하겠으되, 결국은 전면적으로 시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학부제에 대한 기성학계의 입장은 대체로 성급한 시행의 오류, 그리고 기초학문의 파괴, 전공의 불균형 등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대응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이 제도가 교육을 상업주의로 몰고 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늘 그 이면에 수반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사안은 시행방식의 오류나 자본과 교육의 긴밀한 유착 이전에 교육과 지식의 구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내장하고 있다.
현재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설정한 전공분야, 그리고 커리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예컨대, 국문학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분화된다. 이것은 지식인을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전공과목을 설정하는 가장 일차적인 기준으로 기능한다. 언뜻 보아도 이런 분화는 시기적으로도 균형이 어그러졌을 뿐 아니라, 고전문학으로부터는 현대적 호흡을 박탈하고, 현대문학에는 고전적 깊이를 부재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재생산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구분법이 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시대나 신라시대로 가면 전공자가 거의 드물다. 지금 한국사 연구의 주류적 분야가 대개 조선시대나 식민지시대이고, 지도교수의 전공분야에 맞춰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구획선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전공 내에서도 정황이 이러한데, 하물며 국문학과 역사학, 철학 등 커다란 분야간에는 말이 인문학이지 지적 소통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기학과에 편중되어 전공간 균형이 깨어질 것이라는 한탄도 무색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인문학의 지적 불균형은 심각한 실정이고, 학부제 시행과 무관하게 이 문제는 앞으로도 해결의 전망이 요원하다. 그리고 어차피 전문연구는 대학원에서 주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학부교육에서 기초학문의 파괴 운운 하면서 분과체계를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현장적 설득력이 거의 없는 셈이다.
따라서 지금 절실하게 요청되는 작업은 고립되고 폐쇄된 분과의 벽을 넘어 지식이 자유롭게 흘러다닐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위적으로 학제간 연구를 조작할 것도 없이 다종다기한 테마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고, 그것들은 기초학문과 전문지식 사이의 벽도 넘어 수요자들에게 풍부한 지적 선택의 장을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학부제에 찬성하든, 아니면 그것에 전면 반발하든, 아무도 이러한 실천의 책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일단 지적 폐쇄성을 벗어던지만 하면, 수많은 테마들이 가능하다. 고전문학과 영화, 페미니즘으로 한시읽기, 문체반정과 새로운 글쓰기, 연암 박지원과 이탁오, 노신과 신채호 등등.
이런 식의 생성과 변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학생들은 외국어나 경영학 등 실용적인 방면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아무런 지적 촉발도 없는 기초학문을 듣느니 그나마 현실에 유용한 것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여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닌가. 100년 전 근대가 물밀 듯이 밀려올 때, 빈번하게 활용된 경구가 하나 있다. 이른바, 주역의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이 그것이다. 다시, 이 고전이 풍미될 시점이 도래한 것인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느니!

‘우정의 교육’, ‘유목적 지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짚어두어야 사항 하나 더. 워낙 우리 근현대사가 굴절과 혼돈의 연속이어서 그렇겠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닥치면, 일단 시야를 외국으로 돌려 선진화된 나라의 제도를 준거로 삼아 비판을 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습속이 있다. 그래서 우리 머리속에는 은연중에 ‘그 어느 먼나라’에서는 이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없다! ‘핑크플로이드의 벽’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같은 영화를 보라. 거기에 그려진 선진국의 학교들 역시 억압과 규율권력의 장소일 따름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태생적 불안정성 때문이든, 아니면 근대기획의 전반적 실패에 기인한 것이든, 앞으로 전세계에 걸쳐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테제는 필연적으로 붕괴되어 갈 것이다. 아울러 인터넷이 상징하듯, 학교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숱한 이질적인 배움터들이 출현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교육난국을 돌파하게 해줄 완벽한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근대라는 한국적 특수성론에 사로잡혀 그저 합리적인 선진제도에 의존하려 한다면, 다시금 시행착오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자기가 선 자리에서 ‘교육과 지식’의 낡은 배치를 근본적으로 변환시키는 실천을 수행하는 것이다.

1. ‘분자적 공명’과 우정의 교육

공간은 일종의 정치적 ‘기계’다. 그 배치에 따라 연기(緣起)작용이 달라지는. 그런 점에서 무릇 모든 교육은 먼저 교실의 배치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조금씩 변화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교실은 높은 교탁과 단상, 일렬로 배열된 책걸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의 구별이 확연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계몽주의의 공간적 투사이다. 즉, 교육이란 전문적이고 인격적 품성을 갖춘 스승이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것이라는. 위에서 아래로, 빛이 있는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이런 식의 전제가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의 내용은 기성품을 복제하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독창성이나 개성, 창발성 등을 강조한다 해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스승이 구획해 놓은 일정한 바운더리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은 이 구획과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체 앎의 영역에서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고정된 선으로 구획될 수 있을 것인가? 나이가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거나 지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특이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앎의 세계에는 그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앎의 흐름만이 있을 뿐. 명말 대표적인 비주류사상가인 이탁오의 다음의 말은 그 점에서 참, 감동적이다.

“나는 스승과 친구는 원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둘이 다르단 말인가? …만약 친구라서 사
배를 올리고 학업을 전수받을 수 없다면, 필시 그와 함께 친구가 될 수 없다. 스승이라서 마
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또한 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사표로 추앙받는 공자 또한 자신이 깨우친 도를 알아주고 토론할 벗을 찾아 천하를 주유했을 뿐, 누구에게도 자신을 배우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승이면서 친구인 것, 이것을 ‘우정의 교육학’이라 이름하면 어떨까. 이런 관계하에서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지식이 구성되고, 흘러 다니는 ‘힘과 힘의 역학’만이 작동하기 때문에 학문외적 권위나 위계 따위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구도는 단지 민주적이고 평등한 ‘인간화교육’이라는 휴머니즘적 구호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 연구실에는 수많은 세미나들이 있다. 일본어강독, 중국어강독, 중세미학, 수사학, 동아시아 근대성, 화폐와 철학 세미나 등등. 이 세미나는 누가 일률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저 구성원들의 지적 욕구에 따라 제안되었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장구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수요자의 학습구성권이 전폭적으로 보장되는 시스템인 셈이다.(반면, 지금 대학교육은 수요자는커녕, 교수들의 학습구성권조차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각각의 세미나는 또다른 변이형들을 끝없이 증식한다. 그래서 일본어강독을 하다가 느닷없이 과학사세미나로 번지기도 하고, 화폐와 철학 세미나를 하다가 일본어강독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세미나 구성원은 연령별로는 약 20년의 갭이 있고, 소위 선후배, 사제지간 등 각색의 인연으로 얽히고 섥혀 있지만, 그러한 위계들은 여기서는 아무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단지 각각의 능력이 교차하면서 ‘분자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일 뿐, 그 흐름에서 ‘고정된 자리’는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세미나의 성과가 업그래이드되어 강좌로 개설되는데, 여기서도 교사와 수요자 모두 자발성에 의해 결합되기 때문에 ‘지적 공명’만이 유일한 관건이 된다. 그래서 어떤 강좌에서는 선생이었던 이가 다른 강좌에서는 수강생이 되는 변환이 수시로 일어난다. 연구실을 열고 처음 공개강좌를 시작할 때 가장 신경을 쓴 일이라면 강의실의 공간적 배치를 수평화한 것이다. 원탁과 세미나 테이블, 개인 책상 따위를 그대로 죽 나열하고서 강의가 진행된다. 강사의 위치는 수시로 바뀔 수 있고,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난 해, 맑스주의 강의 때는 강의실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한참 넘어버려 더러는 책상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더러는 선생 뒤통수를 보면서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배치는 좀 무질서해보이지만 지식의 교류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일률적인 배열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이나 선생 모두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수강생들 사이의 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교실의 배치가 획일적인 되면, 학습자들 간의 소외 또한 심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의 중에는 오직 선생에게만 시선을 두어야 하고, 서로간의 접촉이(시선이나 대화 등)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인적 유대는 항상 강의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런 식으로 이원화되면 지적 소통이나 토론의 역동성은 현저하게 낮아지게 마련이다. 지식 그 자체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중심요소가 될 때, 비로서 스승과 친구가 하나인 교육이 가능한 법이다. 따라서 공간의 수평적 배치는 교사와 학생의 경계뿐 아니라, 학습자들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승시키는데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강의때나 세미나때나 항상 차와 간식을 준비하는 것도 그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함께 먹고 마시는 것보다 친화력을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강의를 하는 사람도 힘이 들지만, 열심히 듣기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가능한한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지적 공명의 주파수는 더욱 상승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여러 경위의 통과점을 지닌다. 직접적 전수 혹은 책을 통한 교류, 그리고 함께 힘을 북돋워주는 벗들, 공간적 배치 등등.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누구의 독점하에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강의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실감할 터이지만, 동일한 내용도 관계의 구성에 따라 현저하게 다른 공명과 촉발을 가져온다. 아울러 반드시 환기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보다 가르치는 사람 자체를 지적으로 훈련시키는 장이라는 점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어찌 주체와 대상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지적 즐거움을 증식하면서, 때로는 제자의 위치에 있다가, 때로는 스승의 자리에, 그리고 때로는 ‘붕우’가 되는 다양한 지점을 경쾌한 행보로 넘나들 수 있는 것, 새로운 세기는 바로 이런 교육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2. ‘수목형 위계’에서 ‘리좀적 증식’으로

학부제를 다루면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근대 이후 분과화된 학문체계는 현실정합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국어국문학과의 예를 다시 들어보면, 국문학과 국어학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가로놓여 있다. 또 국문학 안에서도 고전문학, 한문학, 현대문학은 ‘말의 길’이 끊긴 지 오래다. 기타 다른 학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자신의 분야에서 한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전문성의 실체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한분야를 심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심화가 아니라, 고립을 자초하면서 현실에 아무 쓸모도 없는 지식을 양산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생명은 에너지의 흐름이고, 앎 또한 그러하다. 흐름을 차단하여 경계를 긋는데 골몰하면서 대체 무슨 심화가 있으며, 확충이 가능할 것인가? 실제로 이런 분과체계와 학연, 지연 등 고질적인 병폐들의 재생산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적 흐름이 막히면 땅따먹기식의 전공분할이 더욱 가속화되고, 그것은 자연히 지식외적 관계들에 의존하는 습속을 강화시킨다. 학벌주의, 임용비리 등을 거세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통상적으로 그것이 이러한 지적 생산의 방식과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야말로 지식과 삶을 이원화하는 그물망에 나포된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벽을 넘어 흐르게 하는 것이다. 홈패인 공간에서 매끄러운 지대로!그런데 여기서 지식생산의 배치에 대한 새로운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학제간 연구라는 것을 기이한 종합이나 잡종교배 정도로 착각하는 해프닝이 반복될 것이다. 솔직히 요즘 분과적 체계를 넘는답시고 시도되는 대부분의 작업들이 담론의 생산과는 무관한 과시용 프로젝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촘촘하게 구획된 선들을 가로지르면서 예기치 않은 지적 흐름들이 생성되는 것은 그러한 인위적 혼합절충과는 무관하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우리 연구실의 세미나는 처음 한국 근대계몽기를 대상으로 하는 자료읽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개화기 신문자료를 읽다보면, 누구나 문학 텍스트에 한정해서는 도저히 이 시기의 지도를 그릴 수 없다는데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히 종교, 철학, 사상사 전반, 이를테면 근대성 담론의 영역으로 시선이 확장되고, 다른 한편 한국의 근대성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사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근대성론은 전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동반해야만 비로서 심층적 탐사가 가능한바, 중세미학이나 들뢰즈/가타리, 푸코 등 프랑스 현대철학과의 접속은 이렇게 해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을 하던 이들은 점차 동양적 사유로 눈을 돌리게 되고, 고전과 한문학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들은 서구 탈근대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전공간의 벽을 허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어진 코드와 습속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지만 않다면, 시선의 광할함은 자연스럽게 심연에 대한 열정을 함께 불러온다.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빌리면, 기존의 분과구분이 근원이 되는 뿌리가 있고, 그것에 바탕해서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일종의 수목적 위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면, 그에 반해 이러한 가로지르기는 뿌리줄기, 즉 중심도 지향도 없지만 무한히 분열되어 가면서, 어떤 것과도 접속할 수 있는 ‘리좀적 증식’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글쓰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맞물려 있다. 대학원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했겠지만, 학위를 받으려면 일정한 내용과 형식의 코드를 갖추고 있는 정형화된 글쓰기를 끝없이 수련해야 한다. 견고하게 위계화된 분과체계가 유지되는 것도 사실은 이런 식의 코드화시스템에 의해 받쳐지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체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글쓰기 문법을 내파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대중적이고 교양적 글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따위의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전문성과 대중성, 아카데믹한 스타일과 상업적인 스타일 등을 단절시키는 낡은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면서, 다채로운 수사학의 생성을 통해 지배적인 글쓰기 권력과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생산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적 주체 개개인의 신체가 자재로워야 한다. 즉, 쉬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증식을 통해 변이와 생성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조로현상은 정말 심각하다. 40이면 벌써 권위가 몸에 배고, 50이 넘으면 아예 스스로 원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대개 30대 후반에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하면, 결국 학위가 종착점이라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제도가 부여한 코스를 열심히 습득한 데서 멈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거야 뭐, ‘메아리소리만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거나 ‘그림자를 보고 앞에 있는 개가 짖으면 뒤에서 그대로 따라짖는 개’(이탁오)의 신세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잘알고 있겠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즉,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 여부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지적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가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명말의 대사상가 이탁오는 평생동안 유학의 경전을 탐구했으면서도, 54세 이후 다시 승려가 되어 불교에 입문하여 20여년을 쉬지 않고 유,불,도를 넘나드는 학문을 추구했고, 노신 역시 죽음 직전까지 시대와의 팽팽한 긴장을 잃지 않았으며, 들뢰즈나 가타리, 푸코 등 현대의 사상가들 역시 모두 그러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양상은 예외적 개인들의 속성이기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양태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주입된 습속과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는바, 그럼으로써 더한층 과감한 지적 모험을 감행하게 되는 순리가 아닌가 말이다. 그에 비하면, ‘조로증’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우리의 지적 풍토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새로운 담론의 생산은 이론의 내용 이전에 바로 이러한 지적 배치와 습속을 바꾸는 일,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전공, 세대, 학연, 성별간 위계라는 온갖 훈습에 찌든 ‘정착민적 근성’에서 벗어나, ‘생의 약동’에 몸을 맡기면서 늘 지적 초발심으로 돌아가 경쾌하고도 끈기있게 수행할 수 있는 신체, 이것이 ‘리좀적 증식’의 짝이 되는 ‘유목적 지식인’의 형상일 터이다.

3. ‘앎과 삶’의 일치, 그 생성의 윤리학을 위하여

나와 나의 친구들이 꿈꾸는 것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그것은 심포지움을 축제로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면, 상상력의 경계를 깨부수는 선정적인(?) 테마를 가지고서 다방면의 연구자들이 발제를 한다. 형식은 개별발표뿐 아니라, 듀엣으로 할 수도 있고, 여럿이서 한조가 되어서 할 수도 있다. 한 곳에는 음식과 차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다. 중간 중간 휴식 시간에는 락, 발라드, 클래식 등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서 친교를 나눈다. 주제와 관련된 슬라이드나 비디오가 상영될 수도 있다. 심포지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토론인데, 예의나 격식에 따른 언사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논쟁을 극한까지 몰고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매너라든가 형식의 구속이 없기 때문에 토론자나 발표자의 개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다. 시간제한도 없고, 배고픔과 지리함을 견뎌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지새워 토론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꿈이 실현된다면, 아마 단 하루 동안에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지적 수준은 비약적으로 고양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활동을 통해 교육과 연구, 지식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 모든 이들의 신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될 터이므로. 심포지움이란 일종의 지식인들의 라이브 공연이다. 밴드가 음반을 준비하듯, 평소에 세미나와 학습을 통해 갈고 닦은 내용들 가운데 그 에센스만을 간추려 대중앞에서 한판 쇼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을 통해 새로운 지적 동료들을 만나고 거기서 다시 새로운 유형의 팀이 조직되고… 이런 라이브 성과물들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매체로 집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억지로 기획하고 의무감에서 잡지를 내는 악전고투를 답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에서 대학교육의 여러 문제를 두루 짚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지식의 기쁨’이 사라졌다는 음울한 진단이 자리하고 있다. 온갖 풍요와 편리 속에서 생의 기쁨이 마모되어버린 근대적 일상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기쁨의 상실은 지식이 삶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짐으로써 초래된 것인바, 심포지움은 오직 근엄하고 지리한 학술대회여야하고, 삶의 기쁨은 다른 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고질적인 이분법은 그 괴리감의 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는 어떻게 이 간극을 넘어 일상의 실천과 지적 열정을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을 것인가일 터이다.
누구나 지식의 즐거움, 지적 능력의 증식을 통한 자유의 확대, 능동적인 관계의 확충 등을 원한다. 그런데 왜 모두 거꾸로 살고 있는가? 지식은 고된 노동이 되고, 학력이 높아질수록 신체는 더욱 부자연스럽게 되고, 그러는 사이 인적 유대와 지적 상상력은 완전 마모되는 이 악순환의 늪에서 주저앉아 있는가 말이다. 수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정치경제학적 분석도 가능하고, 문화적 토양, 교육제도의 비리와 모순 등등. 그러나 그 속내에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똬리를 틀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권에 진입해야 하고, 그러자니 스승, 선후배 등 파벌주의에 편승해야 되고 등등. 말하자면, 결국은 도시중산층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이념에 관계없이 지식인들 모두에게 그 지독한 악업(惡業)을 묵인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의 문제는 삶의 윤리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그말은 결국 앎의 자유를 되찾는 작업은 삶을 생성시키는 새로운 윤리학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솔직히 말해보자. 현대 중산층은 너무나 많은 비용을 행복과는 무관하게 지출한다. 오직 가족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둘러치기 위하여, 그리고 노후의 안정이라는 황당한 명제를 위하여. 사실 이것은 행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돈은 단지 수단일 뿐인데, 어느 순간 돈이 생애의 유일한 목표이자 표상이 되어버리는 이 기괴한 도착증! 자본주의가 그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는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지식이 현실을 변화시키고, 생동하게 하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지식은 곧바로 삶의 윤리적 토대로 전이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지식은 삶과 무관하고, 세상에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90년대 이후 제도권 외부에 많은 연구단체들이 생겨나고, 대학안에도 사회교육원 등이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어지면서 공교육 외부의 교육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런데도 지식의 에너지는 여전히 겹겹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것은 이런 매체들 역시 교육이나 지식에 대한 기존의 구도를 고스란히 변주하고 있어서, 거기서 형성되는 대부분의 교육이 일시적인 상품 이상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식에 대한 수요층은 확산되었지만, 전문가와 대중, 지식과 삶의 경계는 여전히 두텁다는 것이다. 우리 연구실에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아무런 대책없이 그저 공부가 좋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학원에 몸담고 있는, 이른바 전문지식인들보다 더 왕성한 지식욕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그것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윤리적 욕구와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으로 훨씬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이들이 대학교육만을 유일한 코스로 여겨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면, 그순간부터 지식은 기쁨이 아니라 질곡이 됨과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 또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 회로에서는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식의 생산과 삶의 윤리학은 맞물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대학체제가 구성원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이러한 불일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강렬한 유대에 기반한 지식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함께 모여 공부하고,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일상을 공유하면서 근본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차라리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어떤 교육매체보다도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함께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창 연습하고, 토론하고, 먹고, 마시고, 돈이 필요하면, 각종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모은 다음, 다시 모여서 노래하는.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지식생산은 너무나도 고립되어 있다. 일주일이나 한달에 한두 번 만나 세미나하는 정도로야 어떻게 집합적 흐름이 형성될 것이며, 삶과의 일치를 꾀할 수 있을 것인가? 성별, 세대별, 학연, 학벌 등 온갖 경직된 선들을 뛰어넘는 담론이 그 정도의 느슨한 접속을 통해 생성될 리 결코, 만무하다.
그리고 밴드들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공간만 확보되면 이러한 지식공동체의 구성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적으로 집필공간을 마련하고 도서를 구입하는 낭비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밥을 먹고, 함께 세미나를 조직하고, 성과물을 기획하는 일상의 공유는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적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왜냐면, 이때 지식과 삶은 그대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굳이 도회를 떠나 전원에 자리잡고 자연과 친화해야만 공동체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가장 전위적인 지식을 중심으로도 얼마든지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각기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하고, 각기 자기의 장점을 펼치게 하여, 한 사람도 알맞게 쓰이지 않는 사람이 없게”(이탁오)하는 것, 다시 말해 각자 서로의 길을 막지 않으면서 강도높은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 앎과 삶의 새로운 윤리학은 여기서부터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물론 이런 식의 지식공동체는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우리 연구실이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수많은 인적 관계들을 형성할 수 있고, 심심치 않게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지식사회가 얼마나 새로운 활로에 목말라 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토록 위기담론이 팽배했음에도 교육주체들이 실천적 모색의 측면에서 수동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터뷰를 할 때마다 항상 제도권 진입을 거부한다는 것이 주요 이슈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사실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나와 나의 친구들에게는 제도권이냐 아니냐는 사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의 목표는 교육과 연구를 하나로 융합시키면서, 인위적으로 경계지워진 장벽을 넘어 지적 에너지를 흘러 넘치게 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다만 제도권 진입이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먼저 시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도권 내부냐 외부냐로 설정하는 순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시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식의 가장 큰 적은 이분법 그 자체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고, 따라서 외부에서의 이런 흐름이 큰 힘을 구성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부를 변이하는 에너지로 투여될 것이다. ‘배움에는 자기도 없고, 남도 없’다고 했는데, 어찌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있을 것인가? 거듭 말하거니와, 완벽한 제도, 이상적인 모델은 어디에도 없다. 모범답안을 찾기보다 자신이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지식의 기쁨을 향유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열망, 그 초발심을 되찾고자 한다면,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 더구나, 다음의 글을 읽고 여전히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청년들이 금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
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
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할 것인가!”(노신, [청년과 지도자] 중에서)

CBT TOEFL FAQ

한미교육위원단에 올라와있는 TOEFL Frequeltly Asked Questions 입니다.

Frequently Asked Questions

토플시험 일정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지금 등록하면 언제쯤 시험을 볼 수 있는지..

토플시험은 평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두차례씩 실시되고 있습니다. (오전 9:00, 오후 1:30, 공휴일, 토요일,
일요일은 제외) 수험생은 한달에 한번씩만 시험을 볼 수 있으므로 원하는 시험 날짜를 정하시어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등록은 선착순 마감이므로 원하는 날짜가 마감될 수 있으니, 넉넉하게 시간 여유를 두시고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원하는 시험날짜로부터 Business day로 3일전 12시까지는 등록을 해야 하며, 그이후는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토플시험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등록을 해야 할지, 등록 방법에 대해 안내해 주십시요.

등록은 전화와 우편, 팩스로 가능하며 방문등록은 받지 않습니다. 전화 등록시 해외에서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비자, 마스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필기도구, 메모지를 준비하시어 02-3211-1233 으로 등록을 하시면 됩니다. 등록후 본인의
시험 장소와 날짜, 확인번호를 잘 보관하시어 불이익이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등록후 따로 시험에 관한 확인서가 발송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편등록시에는 Bulletin 안에 있는 International Scheduling Form (웹사이트에서
다운받을 수 있음)을 작성하시어 등기로 한미교육위원단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주소 : 서울 마포구 염리동 168-15,
121-874) 신용카드 사용을 원하지 않으시면 은행에 가시어 Bank Check(달러수표, 수취인은 ETS-TOEFL로
작성) $130을 끊어 원서와 함께 등기로 보내셔야 합니다. 팩스 등록시, International Scheduling
Form 을 작성하시어 3275-4029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단, 우편등록시 원하는 시험날짜로부터 3주전까지는 원서를
보내셔야 합니다. 팩스 등록시에는 원하는 시험날짜로부터 1주일전까지는 원서를 보내야 등록이 가능합니다.

시험을 보았는데 언제쯤 성적을 받을 수 있을까요?

Writing Section 에서 Hand-written Essay로 시험을 보신 경우에는 약 6주 정도의 시일이 소요되며,
Computer-typed Essay로 보실 경우에는 4주 정도의 시일이 걸립니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생길 수 있으니
1주 정도는 여유를 두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래전에
시험을 보았는데 아직 성적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성적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받을 시기가 충분히 지났음에도 성적을 받지 못하시면 먼저 3211-1233으로 전화하시어 반송 명단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미교육위원단으로 성적이 반송되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등록비가 지불되지 않아도 성적이 늦춰질 수 있으니
Credit Card 에서 등록비가 지불되었는지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적표가 분실되었거나 기타 이유로 성적표를
받지 못하신 경우에는 Fulbright Website의 ‘CBT Score Report Inquiries’ 양식을작성하여
ETS측에 직접 전자우편으로 요청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토플성적을
학교나 기관에 보내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가요?

성적자료는 한미교육위원단이 아닌 미국 ETS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적표 발부 및 다른 기관으로 보내는
절차는 TOEFL Bulletin에 있는 Additional Score Request Form을 작성하시어 Fax나 우편으로
요청하실 수 있습니다. 한 학교당 $15의 비용이 듭니다. 전화로 보내실 경우에는, 해외에서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 (Visa,
Master, Amex 카드 중 한가지)를 준비하시어 1-609-771-7267로 직접 신청하시면 됩니다.

시험
당일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시험 당일에는 본인 확인이 가능한 I.D. Card를 반드시 준비하셔야만 합니다.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은 여권,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중 한가지) 다른 준비물은 필요치 않습니다.

Reschedule,
Cancel을 원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TOEFL 시험의 등록일 변경과 취소는 시험날로부터 Business day로 적어도 3일전 오전 12시까지는 등록센터로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이기간을 놓칠 경우에는 변경이나 취소가 안됩니다. 날짜변경을 할 경우에 $40의 추가비용이 있으며,
취소할 경우에는 등록비 $130중에서 $65만이 환불됩니다.

Cancel하고
나서 언제 Partial Refund를 받을 수 있을까요?

토플시험을 취소하고 나서 적어도 60일안에 Bulletin안에 있는 Partial Refund Request Form을
미국 ETS로 팩스나 우편으로 보내셔야 Partial Refund $65을 받을 수 있으며 이양식을 보내지 않을 경우에는
부분 환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약 10주 정도가 소요됩니다.

토플등록후,
카드가 Declined 되었다고 미국 ETS에서 편지를 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험은 보실수 있으나 등록비가 지불되지 않는 한, 성적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편지의 내용대로 Bank Check
(Money Order)을 미국 ETS로 편지와 함께 보내시면 됩니다.

여권과
등록된 영문이름이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가 되나요?

여권에 나와 있는 이름을 가지고 등록을 하셔야만 합니다. 일단 이름이 일치가 안된다면, 시험센터의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야
하고, 그과정에서 시험을 보실 수 없는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토플시험을
다른 지방에서도 볼 수 있는지요?

토플시험은 서울의 두 곳(종로, 마포 한미교육위원단)과 대구의 한 곳(중구 포정동 서울은행 9F)에서만 보실수 있으며
그외의 지방에서는 시험을 보실 수가 없습니다.

CBT
Score를 PBT Score로어떻게환산할수있을까요?

TOEFL Bulletin 37-40쪽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TOEFL Bulletin은 한미교육위원단 Website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시험
당일날 시험장에 개인필기도구나 물 등 음료수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까?

시험장에는 신분증 이외에는 어떠한 지참물도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핸드폰, 카메라와 같은 물건은 물론 모자나
필기도구 등 모든 개인 소지품은 입실전 개인보관함에 보관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적발시에는 퇴실과 같은 불이익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CBT
시험시 신분증 제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여권 이외에 다른 신분증도 가능한지요?

신분증은 CBT 시험 당일 가장 중요한 지참물입니다. 성인일 경우 여권,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을 제시하시면 됩니다.
단, 기간이 만료된 신분증을지참하실 경우에는 시험장 입실이 거부됨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신분증이 없는 중고등학생들의
경우는 기간 만료되지 않은 여권이나 학생증과 함께 학교장이 발행한 Letter of Identity(신분확인서신)을 제출하여야
합니다.

CBT
토플이 무엇인가요, CAT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CBT란 Computer Based Test의 약자로 컴퓨터로 보는 시험을 말합니다. 그러나 단지 종이시험을 화면에
옮긴 것이 아니고 문제 내용과 시험 방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변화는 청취와 문법 부분이, 앞문제의
답을 맞추는 여부에 따라 다음 문제의 난이도가 결정되는 CAT(Computer-Adaptive Test) 방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시험내용의
구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CBT TOEFL은 Listening, Structure, Reading, 그리고 Writing의 4 Section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존 PBT시험이 3 Section인것에비해 Writing이필수로 추가되었으며 4 Section 중
Listening과 Structure는 CAT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각 section의 문항 수와 시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Listening
Structure
Break
Reading
Writing
문제수
30~50
20~25
44~55
1
시간(분)
40~60
5~20
5
70~90
30

어떻게
하여야 토플 안내책자를 받을 수 있나요?

토플을 포함한 ETS CBT Bulletine은 서울 마포에 위치하고 있는 한미교육위원단과 각 지방의 각 주요대학에
비치되어 있으며, 인터넷으로도(www.toefl.org 또는 www.fulbright.or.kr)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시험보고
나서 점수를 cancel하고 그달에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나요?

취소를 했지만 시험을 이미 본것으로 간주되므로 그달에 다시 시험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다시 시험을 볼 경우에는 ETS의
규정에 따라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시험장소의
위치를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가나요?

토플시험은 서울의 두곳과 대구 한곳에서 보실 수 있으면 그외 지방에는 없습니다.

  • 서울 종로구 안국동 고합빌딩 4층(지하철 3호선안국역 5번출구에서 30-40미터 – 2002년 3월 이전 예정)
  •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미교육위원단빌딩 (지하철 5호선공덕역 1번출구, 건강보험회관옆)
  • 대구 중구 포정동 서울은행빌딩 9층(지하철중앙역 4번출구)
  • 자세한지도는 http://www.fulbright.or.kr
    로들어가시면보실수있습니다

지하철
고장등 사정이 생겨서 늦으면 어떻게 하나요?

시험 응시자는 시험시간 30분전에 시험장에 도착하여야 하지만 사정이 생겨 늦을 경우, 시험시간으로부터 30분이 경과한
지각 응시자의 경우 각 시험실의 감독관 판단에 따라 입실 여부가 결정됩니다. 지각으로 시험을 못 보시게 되는 경우 환불이나
변경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갑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분증을 가지고 갈 수가 없는데…

적합한 신분증이 없으면 시험을 보실 수 없습니다. 동사무소에서 발급하는 주민등록확인서나 주민등록등본도 신분증으로 대치될
수 없습니다.

시험에
필요한 scratch paper는주나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토플 시험 처음 두 Section인 Listening과 Structure에서는 메모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scratch paper는 휴식시간 이후에 드리며 에세이를 손으로 쓰실 경우에는 연필과 답안지를 따로 드립니다.
시험이 끝날 때 사용하신 scratch paper와 연필은 감독관에게 돌려 주셔야 합니다.

CBT
TOEFL 시험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Tutorials와 Test를 모두 끝내는데 4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Tutorials에 시간 제한은 없으며 각 Section의
시험 시간에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CBT와
PBT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CBT가 더 어렵다고 하던데..

CBT로 바뀌어도 문제의 난이도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단 이전의 PBT 시험과 비교할 때 다른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Writing Section이 추가되었습니다.
  2. Listening과 Structure가 CAT 형식으로 바뀌었습니다.
  3. Listening Section에 문제에 관련된 화상이 제시됩니다. 또한 개인마다 헤드폰이 주어져서 보다 깨끗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4. 문제유형으로 기존의 4지선다형 이외 여러유형의 문제가 첨가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컴퓨터 기술이 필요한가요?

컴퓨터 경험이 없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시험 시작이전에 컴퓨터에 제시된 Tutorials을 통해 시험에 필요한
기술적인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토플시험
등록 후에 안내문을 받게 됩니까?

CBT로 변경된 이후로는 Confirmation Letter가 별도로 가지 않습니다. 확인을 원하시면 시험 며칠전에
등록센터로 전화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우편등록이나 팩스등록시에는 우편으로 확인 편지가 우송됩니다. 등록자가 원했던 첫번째
시험일로부터 3일전까지 확인편지가 우송되지 않을 경우에는 우편사고가 생긴 경우로 생각을 하여 꼭 등록센터로 확인전화를
하여 본인의 등록상황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시험날짜를 놓칠수 있습니다.

전화로
등록을 마치고 ETS측에서 신용카드에 문제가 있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카드가 Decline된 경우입니다. 토플인 경우 편지에쓰인 금액만큼 ($130 또는 $225)을 시중은행 외환계에서
달러수표로 바꾸어 동봉된 봉투에 넣어 보내시면 됩니다. 시험을 보시는데는 지장이 없으나 속히 보내셔야 성적을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GRE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나 GMAT는 약간 다릅니다. ETS에서 취소되었다고 연락이 오면 정해진 날 시험을
보실 수가 없습니다. 다만, 등록센터로 먼저 전화를 해서 취소된 것을 꼭 확인하신 후 다시 재등록을 하시면 원하시는 날에
시험을 보실 수 있습니다.

CBT
TOEFL 시험의 비용은 얼마이며 어떻게 지불하나요?

비용은 US $130이며 지불방법은, 전화나 fax로 등록하시는 경우에는 신용카드 (해외에서 사용 가능한 Visa,
Master, American Express)로 지불하며우편으로 등록하시는 경우에는 은행에서 만들어 주는 bank check
(수취인 ETS-TOEFL)으로 지불하실 수 있습니다.

시험은
얼마나 자주 볼수 있나요?

시험은 매일 두차례씩 있지만 응시자는 한달에 한번 보실수 있습니다. 같은 달에 두번 보게 되면 두번째 시험은 점수를
받을 수 없으며 환불도 불가능합니다.

CBT
등록을 인터넷으로 할수 있나요?

아직은 계획이 없습니다.

시험
중간에 도움이 필요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시험 지시사항이나 Tutorials에 나오는 사항은‘Help” icon을 누르시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 문제가
발생하였거나 그외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는 손을 들어 감독관에게 도움을 청하시면 됩니다.

TOEFL
시험 중간에 쉬는 시간이 5분이라는데 그시간을 넘으면 어떻게 되나요?

주어진 휴식 시간을 넘기면 시험이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감독관은 ETS에 이사실을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여러번 보았으면 Tutorials을 안하고 넘어가도되나요?

Tutorials에 소요되는 시간은 전체 소요시간에 포함되지 않으니 이미 아시는 사항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넘어가시는것이 좋습니다.

Listening
Section에서 메모가 가능한가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입실할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신분증 뿐이며 scratch paper는 휴식 이후 Writing
Section에서만 주어집니다.

모든문제가
4지(5지)선다형인가요?

TOEFL시험이 Paper에서 CBT로 바뀌면서 문제의 유형이 다양해졌습니다. Listening 에서는 답을 화면에
직접 표시하는 문제도 있으며, ordering 또는 matching type, 2-answers type 등 다양한 문제가
출제됩니다.

Writing
Section인 경우 몇단어 이내로 써야 합니까?

그런 규정은 없습니다.

각문제에
제한 시간이 있나요?

각문제에 대한 제한시간은 없으나 모든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골고루 시간을 할당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중
screen 위에 있는 bar 오른쪽에 해당 section의 배당 시간중 남은 시간이 표시되고 있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CBT의
점수가 PBT의 점수와 어떻게 다른가요?

PBT 만점이 677점인데 반해 CBT는 300점이 만점입니다. CBT의 Section별 등급은 각각 0-30이며,
에세이는 0-6으로 Structure Section에 포함됩니다. 각 Section을 등급 숫자를 합하여 10으로 곱한
다음 3으로 나누면 총점수가 나옵니다. (2001-2002 Bulletin 39쪽참조)

에세이는
어떤 기준으로 등급을 매기나요?

에세이는 두명의 채점자가 독자적으로 채점합니다. 그기준은 2000-2001 TOEFL Bulletin 17쪽(2001-2002
Bulletin 36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에세이가
전체점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나요?

Structure/Essay Section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1/3이며 자체 Section에서 Essay가 차지하는
비중은 1/2입니다. 따라서 에세이의 비중은 전체의 1/6이 됩니다.

CBT
TOEFL 점수의 유효기간은?

TOEFL Program 에서는 각 점수를 database에 2년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응시자의 요청에 따라 시험날짜로부터
2년내의 점수를 보내주고 있으므로 시험날짜로부터 2년이 지난 점수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몇학교까지
비용없이 성적을 보낼 수 있나요?

시험응시자는 시험후 4학교까지 비용없이 성적을 보낼 수 있습니다. 성적 report를 원하시면 스크린에 나오는 학교중
희망학교 이름에 click하시면됩니다. 그 학교 명단은 TOEFL Bulletin에 나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명단에
원하는 학교이름이 없는 경우는 감독관에게 따로 서면으로 요청하셔야 합니다. 이때 각학교의 정확한 이름과 자세한 주소를
기입하셔야 하니 미리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시험당일
성적을 볼 수 있나요? 점수취소는 어떻게 하나요?

시험이 끝난 후 바로 unofficial score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에세이가 아직 채점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가능한
점수의 범위(예: 210~270)를 보실 수있습니다. TOEFL은 GRE나 GMAT와는 달리 점수를 보고 난 다음 취소시킬
수 있습니다. 점수를 취소하고 난 다음에는 성적표가 나오지 않으며 그시험에 대한 환불이나 날짜변경, 같은 달의 재시험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취소시킨 점수를 복원시키고 싶으시면 취소시킨 날짜로부터 60일이내에 우편으로 TOEFL Service로
연락하셔야 합니다. (주소 : ETS PO Box 6151 Princeton, NJ 08541-6151) 비용은 $10
이며 자세한 내용은 TOEFL Bulletin 20쪽(2001-2002 Bulletin 40쪽)에 나와 있습니다.

TOEFL
시험도 여러번 보면 점수가 누적되나요?

누적되지 않습니다. 여러번 보신 시험중에서 본인이 원하시는 점수만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TOEFL
성적을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나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거주지가
미국인데 한국에 나와서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미국에서 받아볼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등록하실 때에 주소를 미국으로 해놓으시면 됩니다.

추가성적표
신청은 전화로 가능한가요?

전화로 시험성적을 추가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시험을 보시고 난 2주후 (에세이를 handwriting으로 작성하였을
경우 5주후)에 미국 1-609-771-7267로 전화 신청하시면 됩니다. 한통화에 4학교까지 신청하실 수 있으며 그이상의
학교는 다시 통화하셔야 합니다. 우편으로 신청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한학교당 $15의 비용을 지불하셔야 하며 통화당 $12을
추가로 더 지불하셔야 합니다. (2001-2002 Bulletin 41쪽 참조)

시험
끝에 학교로 점수를 보내도록 신청하려면 학교 code를 가지고 가야 하나요? code가 없는 학교는 어떻게 신청해야 하나요?

시험 끝에 점수를 신청한다고 하면 학교이름들이 화면에 나옵니다. 원하는 학교 이름에 click하시면 되므로 학교 code가
따로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명단에 원하는 학교 이름이 없으면 종이에 따로 정확한 학교 이름과 자세한 주소를 적어야
하므로 미리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컴퓨터 스크린에 나오는 학교 명단은 TOEFL Bulleting에 나와 있는 것과
같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성적을
빨리 받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또는추가 신청한 성적표를 빨리 받아볼 수 있나요?

응시자에게 오는 성적표를 빨리 받아보실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날짜로부터 2주후 전화 (미국 1-609-771-7167,
2001-2002 TOEFL Bulletin 41쪽)로 점수를 들을 수는 있습니다. 비용은 $10 이며 전화하시기 전에
Bulletin에 나와 있는 사항을 준비하시면 좋습니다. 추가신청의 경우 우편보다는 Fax(TOEFL Bulletin
61쪽)이 빠르며 전화로 신청하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미국1-609-771-7267)

성적표를
잃어버렸는데 다시 본인의 주소로 받으려면 어떻게 신청을 해야 하나요?

추가성적 신청양식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TOEFL Bulletin 61쪽에 있는 Additional Score Request
Form을 마련하여 성적을 보내고 싶은 학교난에‘Examinee’s Copy’라고 써서 61쪽에 나와 있는 주소나 Fax번호로
보내시면 본인에게도 성적표가 옵니다. 본인 성적표는 전화로는 신청할 수 없습니다.

TOEFL
시험을 두번 보았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에세이 성적이 첫번째에 비해 너무 낮게 나왔습니다. 다시 채점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나요?

에세이 Section에 대해서 다시 채점해 줄 것을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TOEFL Bulletin 60쪽에 양식이
있습니다. 작성하셔서 미국으로 Fax나 우편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비용은 $50입니다.

ETS에서
나온 시험준비자료를 구할수 있나요?

한미교육위원단에서 따로 판매하는 시험준비자료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내 유명서적에서 여러 종류의 책자가 판매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한미교육위원단 내에 있는 컴퓨터에 2회 시험분량의 TOEFL Powerprep이 내장되어
있으니 오셔서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시험을
보는 도중 컴퓨터의 기술상의 문제로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을 경우 어떠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

간혹 시험을 보는 도중에 기술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시험을 끝까지 볼 수 없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다른
날짜에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조처를 해드립니다. 재시험이 가능치 않을 경우 전액 환불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밖의
보상은 현재로서는 어렵습니다.

등록상의
개인 정보를 수정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일단 등록이 끝난 후에는 등록센터에서는 정정이 불가능합니다. 정정은 시험 당일날 check-in 때만 가능합니다. (이름
정정과 ??

칸쿤회의 시위 한국농민 할복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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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연합뉴스) 김영섭 특파원=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10일 멕시코 휴양지 칸쿤에서 개막된 가운데 현지에서 WTO협상 반대시위를 벌이던 이경해(56) 전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이하 한농연) 회장이 흉기로 왼쪽 가슴을 찔러 칸쿤 시내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숨졌다. 칸쿤회의 시위 한국농민 할복 자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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