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의자 디자인, 허먼 밀러 회사 _ Herman Miller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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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2010년 4월 5일, 라이언 아담스Ryan A. Adams _ 텍사스 대학교 디자인사 연구실

1930~40년대, 디프리D.J. Defree와 그의 장인 허먼 밀러Herman Miller는 허먼 밀러 회사Herman Miller Company를 키워냈다. 이 둘은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잘 나가던 당대의 가구 디자이너들을 고용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최신의 모더니즘 디자인을 통해 가정과 사무용 가구들, 그리고 작업 공간의 격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허먼 밀러 회사에서 일했던 디자이너들 가운데 가장 유력했던 인물로 조지 넬슨George Nelson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디프리에 의해 허먼 밀러 회사의 디자인 디렉터로 선임되어 회사의 초창기 디자인을 이끌었다. 넬슨은 흔히 그의 디자인 방법론과 관련하여 모험가로 불리며, 어떤 이들은 그가 디자인을 재정립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일 대학교Yale Univ.와 로마에서 건축을 배우긴 했지만 그가 가장 성공한 분야는 글 쓰기와 가구 디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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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도시들, ‘거대 광역 도시’를 형성 _ 국제연합UN 리포트


홍콩, 선전, 광저우가 연결되어 형성된 세계 최초의 메가시티mega-city 모습, 총 인구는 1억 2천만이다. * 사진: NASA

글 : 영국 <가디언>지 2010.3.22일자 기사  _ 환경 전문 에디터 존 바이달John Vidal

전 세계의 대형 도시들이 거대한 ‘거대 광역mega-regions’을 형성하기 위해 통합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도시는 국경을 가로질러 수 백 킬로미터나 확장되는 동시에 1억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게 될 것이라고 국제연합UN의 리포트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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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Korea Make a D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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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es N. Korea Really Want to Make a Deal?
[Interview] Peter Beck, the North East Asia project director for the International Crisis Group


Peter Beck ?2005 Cheong 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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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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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브룩에서 유학중인 후배 정지원의 졸업작품인 Ballistic vase라는 작업.
911사건을 비롯한 폭력과 전쟁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이 작업은 젤라틴 재질의 덩어리에 직접 탄환을 관통시킴으로써 신체의 파열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을 투명한 신체대응재질의 파열을 통해 직접적인 시각 이미지로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이 작업은 꽃병이라는 다소 ‘아름다운’ 용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능은 인체의 탄환에 대한 관통 저항력과 유사한 젤라틴에 만들어진 ‘관통공’에 의해서 완성된다. 꽃병에 꽃을 꼽는 관람자/이용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극히 끔찍한 살상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수도 있다.

일상에서 경험한 충격에 대한 표현의 노력은 또하나의 충격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작업자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느정도 수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작업을 통해서 나는 또하나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은 ‘폭력의 일상화’였다.

작업한 정지원씨의 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작품사진입니다. 주제는 {Ballistic vase}
오른쪽에 보이는 노란색 은 Ballistic gelatin (탄도젤라틴)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화병입니다. FBI나 test Lab에서는 같은 물질로 블럭을 만들어 총을 쏘아보아 총알의 성능을 조사합니다. 특별히 이 재료가 쓰여지는 이유는 10%의 ballistic gelatin은 인간 체조직과 매우 비슷한 물질적 성격 을 가지고있기때문입니다. (Ballistic gelatin is designed to simulate living soft tissue… and the direct relation of gelatin test results to effectiveness of firearms against humans ../ Report:Ballistic Gelatin / Applied research Laboratory_Penn state university)
그간 저는 상징적 요소(사회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제품디자인에 대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특히, 총은 그간의 9.11 terror를 비롯한 각종 지역분쟁과 테러로 민감해진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폭력, 전쟁]의 의미를 담은 아이콘으로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총과 관련된 작업으로서 졸업 작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화병은 실제 총으로 쏘아져 만들어졌습니다. 총알이 지나가면서 만든 터널은 꽃을 꽂을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그 엄청난 폭발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주변의 상처나 튕겨나간 파편들은 (끔찍하나) 아름답게도 장식적인 요소가 됩니다.

옆에 있는 초록색의 화병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Gelatin이 천연재료인 이유로 방부제를 넣었다 하더라도 건조로 인해 오랫동안 간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볼수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 젤라틴과 비슷한 강도를 갖고 있는 실리콘으로 화병을 만들었습니다.

오는 여름에 덕원 갤러리에서 크랜브룩 졸업생들의 전시회가 있습니다.
부디 관심과 방문을

프레시안에 뜬 “볼링 포 콜럼바인” 영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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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와 위험한 다큐멘터리 라는 이름으로 프레시안에 올라온 Bowling for Columbine에 대한 비판글.

결과적으로 판단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인것이다.

마이클 무어와 위험한 다큐멘터리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Bowling for Columbine’
2004-01-28 오후 6:16:41

영어에 ‘preaching to the choir’라는 표현이 있다. 목사가 ‘성가대원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뜻으로, 이미 내 편이거나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회유하거나 설득하려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비유다. 모르긴 몰라도, 성가대를 향해 복음의 메시지를 갈파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거나 스릴이 있는 일은 아닐 듯싶다. 결론은 이미 나 있는 바,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열성 신자들이 목사의 설교를 비판의식이나 적대감을 품고 들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교말씀의 논리가 허술하거나 억지 주장이 있더라도, 신앙적 대전제만 내 것과 일치한다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2003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포함하여 웬만한 다큐멘터리상은 죄다 휩쓴 마이클 무어 감독의 ‘Bowling for Columbine’(2002)은 ‘성가대원들에게 설교하는’ 그런 영화다. 미국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미국인을 포함한)에게 이 영화는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을 테고,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듯한 통쾌한 시각의 연속이며, 화자와 더불어 미국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한편 “아, 미국인도 이럴 수 있구나” 하며 감탄까지 하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실로 이 영화가 제기하는 미국의 폭력 문화의 문제는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Bowling for Columbine’은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 주 리틀톤에 있는 콜럼바인 고교에서 발생한 대형 총기사건을 출발점으로, 미국의 기형적 총기문화와 유혈 낭자한 폭력의 역사에 대한 고발을 시도한다. 졸업을 한달 앞둔 두 학생이 중무장을 하고 학교에 나타나 13명을 쏴 죽이고 자신들 스스로 자결한 이 사건의 원천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무어 감독은 일상화된 폭력에 멍든 미국의 치부를 들춰내고, 평온한 듯한 표면아래 깔려있는 미국인들의 공포에 질린 모습들을 찾아낸다.

이 영화는 무어 감독 특유의 블루 칼라식 접근과 비아냥조의 인터뷰가 어우러져 직설적이면서도 반어적인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그 설정과 주제 모두 가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영화가 반미감정이 팽배해 있는 유럽과 한국 등지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음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이나 유럽의 관객들은 그 유머와 재치에 매료되어 웃고 즐기는 와중에 그 논리의 허점과 뒤틀린 시각을 대충 흘려버린 것 같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자명하게 나타나는 무어 감독의 편향적 시각과 삼단논법적 논리, 그리고 선동적 화법은 이미 그와 시각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약간이라도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보는 사람은 그 속에 당치않은 결론과 함량미달의 내용이 다분히 있음을 느끼게 된다. 특히 미국 권리장전 2조의 ‘무기를 소지할 권리’를 성역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이 영화가 이 권리에 대한 여론을 호도하려는 진보주의자의 허튼 수작에 불과한 것으로 비춰진다.

미국은 지금 파랑(민주당)과 빨강(공화당)으로 뚜렷이 이분되어 있다. 크게 나누어 진보 쪽으로 기우는 민주당은 총기규제를 지지하고, 보수파인 공화당은 총기규제를 반대한다. 극도로 단순화하여, 미국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보수들이 총기규제를 반대하는데, 이들은 마이클 무어 같은 리버럴에 대한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있다. 총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마치 광기 어린 저급시민으로 묘사하는 이 영화에 대한 그들의 시선이 곱지 않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 가정의 42%가 집에 총기를 두고 있다는 통계(2000년 갤럽)를 볼 때 더욱 그렇다.

무어 감독은 이같이 가뜩이나 편이 확연하게 갈려있는 이슈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루면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치밀하고 신중한 자세로 임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사우스파크’식 애니메이션을 통해 1871년에 창립된 전국총기협회(NRA)가 마치 1866년에 창립된 KKK의 자매단체인양 묘사한 것과, 미국의 총기관련 살인 건수를 영국· 호주· 캐나다 등 타국의 수치와 비교하면서 단순하게 숫자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실제 인구대비 건수보다 훨씬 높다는 느낌을 받게 한 것 등, 불성실한 아전인수식 논리가 곳곳에 보이는 것이다.

필자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대목은, 무어 감독이 공군사관학교에 모셔져 있는 B-52기의 명판이 이 전투기가 “7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베트남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있다”고 한 부분이다. 실제로 이 명판에 새겨진 문구는 “72년 크리스마스 이브 공중전 끝에 미그기를 추락시켰다”(일부 발췌)라고 되어 있다. 무어는 여기에서 “미그기를 추락시켰다”는 부분을 “베트남사람을 죽였다”로 ‘의역’함으로써 교묘하게 민간인 학살을 연상케 하는 반칙을 범하고 있다.

마이클 무어는 ‘Bowling for Columbine’의 흥행을 계기로 뭇 총기소지자 단체를 비롯한 미국의 우익으로부터 만만치 않은 공격을 받고 있다. 그가 이 영화에서 시종 보여주는 우월감과 비아냥거림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 영화의 ‘사실 전달’ 부분을 조목조목 해부하고 여기저기서 루머를 취합해 무어의 ‘거짓’을 까발리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진위를 모두 가릴 수는 없겠으나, 우익은 물론이고 뉴욕타임스· 뉴요커·빌리지 보이스 등을 포함한 진보 언론에서까지 이 영화의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지적할 정도면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논리구조의 엉성함이 ‘옥에 티’ 이상의 수준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사실 필자가 발견한 오류만 해도 대여섯 가지가 되니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문제의 근원은 마이클 무어가 이데올로그라는 것이다. 특정이념(‘자학적 리버럴리즘’이라고 할까)에 치우친 그가 자신이 설정한 전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왜곡된 팩트로 점철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데 문제가 있고, 아울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진실의 추구보다는 편향적 메시지의 전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의 논지에는 이념과 액티비즘이 너무도 짙게 배어 있다. 그의 영화는 그 주제의 신선함이나 설득력이나 당위성의 여부를 떠나, 그 주제를 자신이 갖고 있는 이념의 도약판으로 이용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념은 여러 면에서 종교와 비슷한 양상을 띰으로, 논리나 타협이 설 자리가 변변치 않다. 그런 견지에서 이념이 원천인 무어의 작품은 결국 프로퍼갠더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프로퍼갠더의 기본 의도는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로는 46년 만에 처음으로 칸느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여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마이클 무어의 ‘Bowling for Columbine’은 프로퍼갠더 영화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무어가 ‘부시 몰아내기’를 선언하고 요즘 민주당 대통령 예비선거에 출마한 웨슬리 클라크의 열렬한 지지자로 나선 것은 그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것에 비추어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다큐멘터리의 생명은 그 차가운 시선에 있다. 차가운 눈으로 현실을 보고, 맑은 시각으로 이념이나 감정에 흐려지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여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과 같은 혼을 갖고 있다. 이만큼을 전제로, 나는 프로퍼갠더로서의 예술의 한계를 새삼 생각해 본다. 만일 ‘Bowling for Columbine’이 참으로 현실을 충실하게, 치우침 없이 파헤치고 그 의미를 전달한 작품이라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반미이든 친미이든 골고루 감동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바탕 웃고 즐기고 나서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 메시지의 거부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숙연케 하고, 고요한 성찰을 이끌어 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우익과 좌익간의 싸움을 야기하는 작품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Bowling for Columbine’은 엔터테인먼트로서는 분명 성공한 작품이나, 솔직히 다큐멘터리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성가대를 향해 하는 설교를 성가대원의 입장에서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진실을 전달한다고 하는 매개체들 속에는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것이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서 있는 요즘, 중립에 꿋꿋이 선 이들의 이념에 흐려지지 않은 차가운 시선이 아쉽다.

김명훈/재미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