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조리 물 빼버리고 무지개 빛으로 물들였으면 좋겠어요.
구케으원 선거에는 주황색도 나오더니
교육감 선거에는 초록색이 최대한계로군요.
빨간색 배경의 디자인으로 전단을 만는 후보가 나온다면
…
딴나라당이라도 찍어야 하는거 아닌지
자유로운 색의 자유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그런 선생님을 보고싶습니다.
thinks the skeleton in the cupboard
모조리 물 빼버리고 무지개 빛으로 물들였으면 좋겠어요.
구케으원 선거에는 주황색도 나오더니
교육감 선거에는 초록색이 최대한계로군요.
빨간색 배경의 디자인으로 전단을 만는 후보가 나온다면
…
딴나라당이라도 찍어야 하는거 아닌지
자유로운 색의 자유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그런 선생님을 보고싶습니다.
광경으로서의 여성
남성의 사회적 존재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존재는 외면적이고 외부로 향한다. 반대로 여성의 사회적 존재는 여성의 자신의 내면적 태도로 설명된다. 관찰하는 것과 관찰 당한다는 것은 여성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가에 있어 생각해야 할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이다. 여성은 항상 자신을 주시해야 하며 자신 스스로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것들을 설득 당해온 것이다. 곧 그녀가 남성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그녀의 처우를 결정짓는다.
어떤 면에서 남성은 스스로 행동하는 것에 그치지만 여성은 그 행동으로 평가받는다고 볼 수도 있다. 남성은 여성을 본다. 여성은 보여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 결국 그녀는 광경이 된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나체는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다. 또한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함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남성은 신의 대리인이 된다. 중세 동안에는 이런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인식이 지속되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회화는 부끄러움의 순간을 묘사하게 되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부끄러움은 바깥으로 나와서 감상자와 관계가 지어진다. 그 후 부끄러움은 ‘과시’로 변한다.
감상자가 그녀를 보아야만 그녀는 나체가 된다. 또한 그림에 등장하는 거울은 비난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점은 그것이 아니라 나체의 여인이 스스로 자신을 광경으로서 다루게 된다는 점이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남성은 여성의 나체를 심사한다. 넬게우스의 초상화에서 왕의 애인인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왕이 이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왕에 대한 복종심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아시아권의 미술에서 나체가 수동적이지 않은 점은 주목할 점이며 그것의 테마가 성적 매력에 관한 것이라면, 그 그림속의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이며 활발한 성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미투나 : 종교적으로 음양교합과 관련된 설이 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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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de와 Naked
케네스클락에 따르면 나체란 벗은 상태이고 누드란 예술의 한 가지 형태이다. 누드란 일종의 보는 방법이다. 하지만 단지 예술용어로서 누드의 의미를 설명할 수는 없다. 누드에 성적 특질이 관련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드는 타인에게 나체가 ‘보여진다는 것’이며 아직 스스로에게 인식되기 이전임을 의미한다. 나체의 육체가 누드가 되려면 우선 오브제-객체로서 보여져야한다. 나체와는 달리 누드는 인위적으로 변형되어 전시된다. 서양의 나체화에서 주체는 묘사되지 않는다. 감상자인 남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성은 그림 속에 존재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경우는 절대 없다. 항상 여인은 바깥을 쳐다본다. 반대로 동양권의 전통에서 남녀는 함께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의 성적 이미지는 모두 정면을 향한다. 왜냐하면 그 그림의 소유자 혹은 감상자가 성적 이미지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19세기 궁전회화에 이르러 이런 여성의 종속은 극에 달한다.
때로는 누드라 할 수 없는 그림들도 있는데 가령 작자의 실제 연인이 등장하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는 유럽 전체 회화들 중에서 소수에 불과한데 대략 화가의 시선과 등장하는 여성 사이의 관계가 너무 단단해서 관객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누드란 객체로서 관객을 주체로 만드는데 이미 주체가 되어버린 작가와 객체인 나체여성 사이에서 관객은 주체가 될 수 없다.
서양회화의 전통적 전형과 예외는 나체와 누드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나체 묘사의 문제가 처음 나타났을 때만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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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의 기능
나체는 평범한 남성과 여성상을 확인시켜주는 안정화의 기능을 한다. 즉 그녀/그는 보통 사람과 같은 여/남성이라는,,. 그림은 익명성의 바탕 위에서 그들의 성이 틀리다는 의미보다 그들의 성이 ‘안정화되어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우리는 나체를 보는 최초의 순간에 평범함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 평범함은 우리를 현실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인 성의 구조를 확연히 함으로써 공유될 수 있는 성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비의 상실은 그 신비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며 주체화와 객체화의 둘 사이를 넘나든다.
이렇듯 성적인 나체의 이미지화는 쉽지 않다. 생생한 성 체험의 광경은 상태가 아닌 과정이 되거나 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뛰어나게 풍부한 나체 사진들이 희귀한 이유도 된다. 사진가들은 여성을 누드로 만들어 성적 욕망을 신비한 환상으로 전환시킨다.
예외적인 나체 이미지인 루벤스의 그림에서, 여체는 망토를 둘러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즉 나체였을 그 순간과 그림에서의 가려진 모습은 다르다. 특별히 육체는 화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변형되었으며 상당히 화가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평범함은 이런 위대한 나체에서는 필수적이었는데 바로 육체의 풍만함과 부드러움이 이를 나타내고 있다.
서양회화에서 누드는 유럽적인 인본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와 연결된다. 이 회화의 전통에서 개인주의는 화가, 사상가, 후원자, 소유자의 개인주의였고 그들의 행위의 대상인 여성이 사물이나 추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뒤러가 이상적인 누드를 짜 맞추는 행위도 바로 남성을 위한 것이었고 이런 불평등은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심지어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음미하기에 이른다.
현대미술에서 누드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마네의 그림에서와 같이 도전적인 여성의 발견은 누드를 붕괴시킨다. 그러나 과거의 전통은 보존되고 있었고, ‘창부’와 같은 20세기 아방가르드 회화 등을 제외하면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전통이란 폭넓은 종류의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다. 헌데 아직도 여성을 보는 본질적인 방법은 변하지 않았다. 이상적인 감상자는 항상 남성이며 여성은 남성에게 잘 보여야 하는 그런 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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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_ 이미지(Ways of Seeing by John Burger) 번역서와 원서를 참고하여 요약한 글

나 스스로, 날이 갈수록 파란색에 대한 선입견이 높아져서 걱정이다. 이러다 나이를 먹으면, 누굴 보고 파란갱이.. 파란갱이…. 그러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 독립기념관 소장.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 ⓒ2004 네이버 백과사전
선관위에서 프리챌의 노란색을 열린우리당의 상징색과 같다는 이유로 경고조치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보통 승용차는 모두 자민련 차량이고, SK텔레콤은 한나라당인가..?
각 정당에서 색을 이용하는 것을 먼 산 보듯 바라보다가, 불쑥 노란색에 대한 트집을 잡는 일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선거운동에 어떤 이미지를 도입하느냐, 마느냐는 논란거리임에 틀림없지만, 선관위에서는 사전에 일관적인 기준을 마련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요즘의 선관위는 기준 없이 왔다 갔다 하는 통에 그 의도를 파악하기도 힘이 든다.
현대사회에서 광고의 효과는 실로 막대하며, 미디어수단이 발달할수록 광고방법은 더욱 더 직관적, 선정적으로 변해간다. 광고시장에서는 그에 맞춰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규칙이란 것이 있다. 상표와 의장에 관련된 법률도 그중의 하나이다. 법률은 기업들이 자신의 기업이미지나 상품에 대한 아이덴티티 작업에 투자한 노력을 지키기 위해서 일정한 규칙을 적용한다. 그러나 치열한 기업들의 광고시장에도 색에 대한 원초적인 규제는 없다. 색의 분류란 것은 그 소유권이 어디에 있다고 가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용되는 과정에서의 도안(디자인)작업을 통해서 그 권리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선관위가 말한 진노란색 위주로 사이트를 구성한 것‘에 대한 규제는 잘못된 것이며, 잘못되다 못해 바보스럽다. 혼란한 상황에 대해서 일정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명확하고도 수긍할 수 있는 기준이 먼저 만들어졌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번의 선거를 통해서 어떤 색에 대한 우리나라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이 왜곡될 것 같아 안타깝다. 색채에 대한 선입견은 한 나라의 시각문화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얼마간 논란거리였던 ‘살색과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가 색 하나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이야기했던 것 처럼,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빨강색을 쓰는데 자유스럽지 않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태극기의 빨강과 파랑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나이가 먹어서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 거기에 더해 주황색까지 선거전에 모두 뛰어든 지금의 현실은, 정책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부실한 정치권의 단면을 보여준다. 디자이너로서, 요즘의 정치권에서 색깔론, 색깔론 하며 색 운운하는 것은 그래서 더 짜증난다.
색 장난 좀 그만 치자.

소비문화를 비판하는 시사+그래픽 전문지인 Ad Busters에서 가져온 그림입니다.
경제학을 배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를 한눈에 파악될까???,, 궁금합니다.
전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이유없는 (직관적인) 반감만 자꾸 쌓여가니 ..
헛,, 섬뜩한 것이..
이미지 : Adbusters

Adversters Campaign : TV Turn Off Week
TV의 전원선을 가위로 끊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드는 생각.
“아얘 박살을 내버릴 걸…-_-”
다음 차례는 핸드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