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에 나붙은 대자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thinks the skeleton in the cupboard
고려대에 나붙은 대자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웨인라이트(Wainwright) 빌딩, 미국 세인트루이스, 1891.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이미지 by whitewall buick
* 타 프로젝트에 사용된 자료를 재구성하였습니다.
형태와 기능(form and function)’에 대한 고민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 오늘날의 현대적 풍경과 생활환경의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모던디자인운동의 초기, 정확히 말해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이념과 맞닿아있습니다. 물론 20세기는 모더니즘/모던디자인운동이 지배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더니즘만으로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한 것이 오늘날의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요즘 시장에서 팔려나가는 소비재들 가운데 기능 이외의 다른 특별함으로 성공하는 경우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고, 소비자의 요구 또한 날이 갈수록 복잡다단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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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상태 : 번역중
친구들이여, 나는 당신이 상업으로의 예술의 관계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상업은 일반적인 의미 바로 그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날 상업이 취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는 오직 하나뿐인 형식, 즉 시장에서의 경쟁체계인 것이지요.
예술이 상업보다 큰 권력을 가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예술이 정말 필요했고 우리가 이해하는 단어인 상업이 별것이 아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반대로 상업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고 예술이 별것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점은 내가 예상하는 것이지만, 모두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것이기도 합니다. Details »

* 디자인정글 아카데미의 자료입니다. 작성한 강사분의 이름은 알 수가 없네요.
19세기 산업사회
19세기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특이할 만한 것은 바로 대박람회(Great Exhibition)이다. 대박림회는 The 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ies of All Nations의 줄임말로 말 그대로 세계 여러나라의 산업 제작물을 전시하는 거대한 박람회였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났고 그에 따른 산업의 발전이 가장 앞선 것을 다른 나라에 과시하고 이를 토대로 세계를 계속 지배하려는 야심찬 제국주의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삼았다. 1851년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처음 개최 하였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의 기술력을 총결집시켰다. 이 대박람회는 중세적인 궁전을 디자인하는 등 5개월 반동안 전시 기간을 가졌으며 국내외에서 600만명의 관람객이 참여 하였다. 실상 산업혁명으로 새로이 지도층으로 등극한 부르조아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이 새로운 지도층으로 자리잡은 것은 사실이나 정신 문화적으로 아직 미흡한 상태였으므로 대박람회와 미술관 등 각종 전시회 및 행사를 통해 그들의 정신적인 지도력의 부재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19세기는 산업화에 따른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본격적으로 촉진되던 사회였으며, 이에 따라 귀족의 전유물이였던 예술이 물건의 소비를 위해 디자인의 형태로 일상생활에 침투하였다. 새로운 지도층인 부르조아와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아직까지 중세의 귀족 제도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채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미술 공예 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
이러한 산업사회에서 미술 공예 운동은 예술가들 뿐만 아니라 사회사상가, 건축가, 디자이너, 공예가 등이 참여하여 시작되었다. 미술 공예 운동가들은 19세기 후반 산업사회의 삭막함에 반기를 들고 미술 공예 건축 등을 통해 사회를 정신적으로 보다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였다. 따라서 미술 공예 운동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작품의 특징도 보다 자연적인 것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형태와 모양은 단순하고 식물의 줄기에서 보이는 선적이거나 유기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예를 들면 식물, 새, 동물의 형태을 패턴화하였다.
▲ (좌)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Burne-Jones),스테인레스 창, 1880
▲ (우) 존 러스킨의 ‘허영의 세상에서의 이상의 실현’(The Realization of the Ideal from Vanity Fair), 1871
그들이 주장한 주요한 슬로건은 세 가지로 예술가들의 창작성(Individualism), 기계가 아닌 손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것, 디자인 재료로 사용되었던 기존의 것을 재 평가하자는 것이였다. 즉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있어 인간의 유기적인 공동체성이 기계의 대량생산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생각하고, 산업사회에 접어들어 피폐화된 공동체성을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기계가 아닌 손으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산업혁명 직후 생산된 물건들은 기계의 속이 훤히 보여서 미적인 측면을 상실하였고, 대량생산을 위해 다양한 디자인을 추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술 공예 운동의 목적은 산업화가 가져온 폐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세의 성당 건축과 마찬가지로 건축가, 디자이너, 공예가가 결합하여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어지는 물건까지도 예술가의 손으로 만들어 보다 공동체적이며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에 있었다. 사실 이러한 이념은 산업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적인 사고에 기반한 것이다.
미술 공예 운동 사상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사회 사상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으로 그는 건축에 있어서 장식은 손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의 감성과 노동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예술가의 창작성의 주요성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산업 생산품이 예술가를 소외시키기 때문에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물건의 가치를 하락시킨다고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디자인은 인간의 기쁨과 행복을 반영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자연적인 형태와 재료가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존 러스킨은 인간의 노동이 없는 물건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을 하지 않는 부르조아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부르조아는 부지런하고 단호하며, 자존심이 강하고 탐욕스러우며, 잽싸고 규율적이며, 상상력이 없고 둔감하며, 무식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위의 그림에서 정확히 표현하였다. 큰 머리를 가진 신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에 걸맞는 조직 형태는 중세의 건축가와 공예가, 미술가들의 조직인 길드(Guild)를 그 모델로 삼았다. 길드는 중세의 장인 조직으로 하나의 건축물을 건축하고 장식하
기 위해 건축가, 공예가, 미술가가 서로를 도와 통일된 디자인을 추구하였고, 새로 입회한 구성원에 대하여 교육도 병행하였다. 존 러스킨은 이러한 중세의 길드 조직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길드 조직인 세인트 조지(St George)를 1871년에 설립하여 그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세인트 조지 길드의 사장은 존 러스킨이였으며 구성원은 공동 작업와 그에 따른 이윤을 공동 분배하였으며 노동과 생활의 통합화를 추구하였다. 예를 들면 구성원은 그들의 수입 중 10분의 1을 공동체를 위해 헌납하여 그 돈은 토지을 구입하는 것에 사용되었는데,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여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사회주의 사상을 길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 수공예 길드 노동자들(Guild of Handicraft), 1902이전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이러한 존 러스킨의 사상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근대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엄모리스(William Morris, 1834 – 1896)였다. 윌리엄 모리스는 사회주의 실천가일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과 함께 길드를 조직하여 디자인을 통해 그의 사상을 실현하고 실천하였다.
윌리엄 모리스는 공동체성과 종합성이 산업화의 기계 생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물건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가 디자인이 인간의 감성 및 사고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예술가의 손에 의한 디자인에 의해 피폐화된 산업사회의 생활을 변혁하고자 하였다.
윌리엄 모리스는 1857년 확 에드워드 번-존스(Edward Burn-Jones)와 함께 런던에 자신의 스튜디오 를 개설하고 그들 스스로가 직접 일상생활에 필요한 집가나 가구 등을 디자인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붉은 집(Red House)을 건축한 것인데, 이는 윌리엄 모리스와 그의 아내 제인의 신혼집으로 집의 설계 및 건축, 그에 안에 들어가는 모든 장식품, 가구, 집기 등을 직접 디자인하였다.
▲ 붉은 집(Red House), 필립 웹(Philip Webb), 1859 – 60
1861년에는 붉은 집 등에서 실천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보기 흉한 물건들과 싸울 것을 선언하고 번 존스, 매독 브라운, 필립 웹 등과 함께 그 유명한 모리스 마샬 포크너 회사 (Morris, Marshall, Faulkner & Co.)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신고딕 및 중세양식의 스타일의 물건을 전문적으로 디자인 하였다. 1875년에는 모리스 마샬 포크너 회사를 확장 이전하여 모리스 회사 (Morris & Co)를 설립한다.
▲ 모리스 회사 (Morris & Co) 에서 제작한 ‘Saville’라는 의자, 1890
이 회사는 여러 곳에 회사를 설립하는 일종의 계열사를 두고 양탄자와 도자기 등도 생산한다. 모리스 회사의 취지문을 보면,
첫째, 벽장식. 주택이나 교회 또는 공공건물의 회화. 패턴 모양 그리고 단순한 색채배합.
둘째, 벽면에 사용되는 조각 일반.
셋째, 벽장식과 조화되는 스테인드 글라스.
넷째, 모든 종류의 금속공예와 보석세공.
다섯째, 가구, 그 자체의 디자인 혹은 지금까지 간과해 왔던 새로운 소재의 응용에 의한 조형물, 혹은 도형과 패턴 모형을 붙인 조형물 그리고 이 항목에는 다양한 종류의 자수, 압형의 피혁세공, 기타 이러한 소재의 장식 작품과 덧붙여 가정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필수품이 포함.
그리고 다음을 부가한다. 말하자면 위의 각 항목에 대한 작업은 비즈니스와 같은 작업 방식으로 견적되고 실시될 것이다. 그리고 비용의 사치로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취향의 사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좋은 장식은 사실 생각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1861년 4월 11일
이처럼 윌리엄 모리스는 주거에서 공공건물에 이르기까지 실내에서 사용되는 가구 및 생활용품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서 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예술의 정신이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종합화 되어야 한다는 그의 유토피아적 이념을 반명한 것으로 윌리엄 모리스 뿐만 아니라 근대 아방가르드들의 꿈이기도 하다.
윌리엄 모리스와 미술 공예 운동의 특징
윌리엄 모리스와 미술 공예 운동의 특징은 일상생활에서 예술의 혼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시작하였으며 이를 과거 예술이 귀족이나 종교에 복무하였던 한계를 넘어서 일상생활로 침투하려했다는 측면에서 근대적인 운동이지만 반면에 점차 대두되는 기계화를 거부하려 하였기 때문에 반근대화 운동인 측면도 있다. 즉 디자인을 통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였지만 이를 실천함에서 예술가 자신의 연합과 실천에만 그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디자인 양식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과거 중세의 양식을 모방하거나 절충하는 것에 그쳤다. 또한 손으로 물건을 디자인한 것은 기계로 대량생산된 것보다 값이 저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고 이는 그들의 추구한 사회주의 꿈에 반대하는 커다란 모순이기도 하였다.
이 대목에서 과연 디자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사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가속화된 20세기 부터는 디자인이 철저히 자본주의 체계에 예속되었는데, 즉 디자인의 이상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모리스와 미술 공예 운동의 이념이 상실되고 디자인이라는 것이 단순히 물건을 외관상으로 보기 좋게 만드는 것에 국한 되었다. 과연 과거 선조들이 지향하였던 디자인의 이념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가하는 것이다.
길드, 사회주의의 꿈
당시에 많은 길드가 조직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82년에 맥크머도(A.H. Mackmurdo, 1851 – 1942)가 설립한 센츄리 길드(Century Guild)이다. 맥크머도는 이 센츄리 길드를 설립하기 전에는 존 러스킨과 함께 이테리와 프랑스 등을 탐방하면서 유기체적인 디자인이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였다. 맥크머도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보다는 디자인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부적절하다고 비판하고 노동자을 위한 클럽 및 중산 계층을 위한 집 등을 설계하였다. 센츄리 길드는 기계적인 대칭과 빅토리안의 장식적인 양식을 배제하고 디자인에 있어서 간결하며 리듬감 있는 역동성을 자연의 식물 줄기 등에서 찾아서 표현하였다. 이러한 센츄리 길드의 양식은 아르노의 양식을 개척하는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윌리엄 모리스와 달리 기계 전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기계를 적절히 사용한다면 디자인에 있어 보다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센츄리 길드는 구성원들 간의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통한 종합적인 디자인을 추구하였는데 특히 자신들의 전문성과 구성원간의 동료애 또는 형제애를 중요시 하였다.
1884에는 레더비 (William Richard Lethaby, 1857 – 1931)에 의해 예술 노동자 길드 (Art-Workers Guild)가 설립되었다. 이 길드는 센츄리 길드와 마찬가지로 미적 예술의 통합을 디자인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고 포럼을 통해 구성원들 간의 사상과 이론 등을 교환하였다.
1888년에 애슈비(Charles Robert Ashbee, 1863 – 1942)는 수공예 길드(Guild of Handicraft)와 수공예 학교(School of Handicraft)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길드 조직은 자신들의 이념과는 달리 대중과 멀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1880년대 중반 부터는 길드 간의 교류 및 대중으로의 접근을 위해 공동 전시회 등을 개최한다. 길드 조직들은 민주적인 원칙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일반 대중의 생활의 풍요와 윤택함을 위해 물건을 디자인 하였다. 이처럼 길드 조직은 미술 공예 운동가들에게 있어 그의 이념을 실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실천 양식이었다.
▲(좌) 윌리엄 모리스의 Kelmscott Press, 1894
▲(우) 예술 노동자 길드(Art-Workers Guild) 잡지, 1893
왜 현대 디자인 개념을 미술 공예 운동에서 찾는가?
윌리엄 모리스는 그의 소설 유토피아 소식(News from Nowhere)에서“불평등의 시대에는 부르조아계급은 그들 생활의 근본적인 조건으로부터 자신들의 생활을 장식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그들이 더럽고 궁핍한 생활을 강요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만들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1883년 사회당에 가입하면서 말한 바 “만약 당신이 예술을 노동자와 공유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교양있는 사람도, 문화시민도 아니다. 예술은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과도 같은 것이다.”에서
▲모리스의 주장, 세속의 역설(Earthly Paradox), Fun 잡지, 1888
당시 산업 사회의 사람들의 생활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그저 산업 제품을 보기 좋게 꾸미고 그것을 포장하고 선전하기 위해 잡지와 포스터 등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이 그 생명력을 갖는 것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물건 및 기호 등이 인간 생활의 정서와 감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 공예 운동 및 길드 조직의 활동 방식에는 우리는 현대 디자인의 이념과 그 한계를 명확히 볼 수 있다. 그들은 인간 생활의 변혁을 디자인을 통해 추구하였고 그 구체적인 실천을 물건을 디자인하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길드 조직을 민주적으로 운영함으로서 실현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디자인은 길드 조직 자체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예술가 스스로가 일반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자기 도취 의식은 이미 기계사회로 변화해가는 사회를 거부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대중으로 부터 오히려 소외되는 한계를 나았고 그들이 디자인한 값비싼 물건을 일반 대중은 구입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혐오하던 부르조아만이 그들의 고객이 되었다. 기계에 의해 대량생산된 볼품없는 물건은 일반대중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었고 그들 스스로가 그 물건
의 소비자가 되었다.
이처럼 미술 공예 운동은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해 디자인되어야 한다는 현대 디자인 개념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와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
무하마드 유누스의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은행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하마드 유누스라는 사람이 누구냐구요? 바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을 설립한 사람입니다.
이 은행은 무담보로 소액대출을 한 후 지속적으로 상환을 관리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빈곤층의 자활을 돕고있습니다. 은행의 직원들은 일주일 내내 융자자들이 빌려간 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모니터링하고 자활의 방법을 교육시킨다고 합니다.
실제로 세계최빈국인 방글라데시에서 출발한 이 은행의 융자 상환율은 놀랍게도 일반 시중은행의 담보대출 상환율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수학자이자 대학교수였던 유누스가 학교 주변에서부터 시작한 이 무담보 소액융자활동은 만연된 빈곤을 퇴치하는데 은행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고, 활동을 시작한지 수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은행으로부터 막대한 자금 지원까지 받아내어 은행의 융자활동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요즘들어 우리나라의 신용불량자가 30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신용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제도권 금융이 왕따를 시키는 것. 결국 자금사정이 좋은 사람은 낮은 이자로 재산을 더 불리고, 자금사정이 나쁜 사람은 비싼 사채까지 써가며 상황을 악화시키게 되는 거죠.
이런 우리나라에서 무담보 소액대출활동을 하고있는 단체가 있는데 바로 신나는조합과 아름다운재단 등의 단체들입니다. 특히 신나는 조합의 5명-500만원 융자는 세계 최빈국이라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에서 원조를 받은 자금으로 운영된다고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름다운가게를 운영하는 아름다운가게는 어느 기업의 후원을 받아 1인당 최대 1000만원의 융자가 가능하다고 하네요.
덧붙여, 신나는 조합의 ‘무담보소액대출’은 우리나라의 사정이 아주 않좋았던 IMF이후, 국내에 영업을 하고있던 외국계은행인 CITIBANK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국내의 은행이나 금융권들이 카드영업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이지요.. -_-

18일(현지시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데이비드 베컴을 놓고 영국의 주요언론은 주가가 떨어지기 전 다른 구단에 선수를 팔아야 한다는 베컴의 전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사업적 선택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스타선수가 명문구단들의 이적료 놀음에 놀아나는 상품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비즈니스를 위해 선수를 상품처럼 팔고 사는 축구구단들의 태도를 비난하고 나섰다.
‘보스만 법’ 탄생이후 선수 상품화현상 가속화
미국의 4대 스포츠인 프로야구, 미식축구, 농구, 아이스하키와는 달리 축구구단들은 선수를 다른 팀에 내 줄 때 그 대가로 이적료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신인유망주를 잘 키우는 네덜란드 프로팀이나 유망주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프로팀들이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등의 큰 축구시장으로 선수를 보내면서 받는 이적료는 구단운영을 하는 데 필요한 재정확보를 하는 수단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1995년 “유럽연합국가 소속으로 계약기간이 끝나면 팀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는 보스만 법이 제정된 이후 세계축구계는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중소 축구구단은 신인유망주를 키워도 계약기간이 끝나면 시장가격보다 훨씬 적은 이적료를 받을 수밖에 없어 재정이 더욱 악화됐으며, 반면에 재정규모가 탄탄한 명문구단들은 상품성 있는 어린선수와도 서슴없이 다년 계약을 체결했고 계약기간 만료 전에 다른 명문구단에게 선수를 팔아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
축구선수들의 자유보장을 위해 생긴 보스만 법은 오히려 구단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부추겼고 구단들의 이적료 챙기기로 악용되며 선수들의 상품화 현상을 촉진시키는 부메랑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보스만 법 제정이후 거의 매년 이적료 세계신기록이 바뀌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베컴의 이적배경에도 계약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이적료를 충분히 챙기겠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의지가 크게 반영됐다. 물론 베컴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알렉스 퍼거슨 간의 갈등도 베컴 이적에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바르셀로나의 사장후보였던 라포르타의 공약을 잘 활용해 TV 중계권료 하락으로 유럽축구시장이 불황중인 데도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베컴을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팀 레알 마드리드에 이적시킬 수 있었다.
국내선수에게도 불똥 튀어
축구구단들의 이적료 챙기기는 비단 유럽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국내에서도 이런 문제는 선수들의 유럽진출과 함께 불거졌다.
축구구단들은 간판급 선수를 내주는 대신 유럽구단으로부터 많은 이적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고 이에 따라 에이전트사는 선수들의 실제 상품가치보다 높게 책정된 이적료를 받아내기 위해 이적협상에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안정환은 2002 한-일 월드컵 미국과 이탈리아 전에서 결정적인 골을 넣는 등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지만 유럽행에는 실패했다. 안정환의 유럽행 실패원인은 사실상 에이전트의 무능력함 때문이 아니라 구단의 이기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월드컵 이전부터 원소속팀 부산 아이콘스와 임대로 뛰었던 이탈리아 축구팀 페루자와의 이적료 파동의 희생양이 됐던 안정환은 이적료로 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은 3백10만달러를 주장하는 페루자의 고집으로 유럽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최근 유럽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안정환은 일본 소속사인 PM이 2백80만달러의 이적료를 제시해 또다시 유럽구단과의 계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0년 유럽명문축구구단 14개 팀이 G14을 형성해 그들의 이익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고 대부분의 구단들이 보스만 법을 악용하는 ‘이적료 챙기기’로 선수들의 상품화 현상이 가속화되자 세계축구계는 우려를 표명했다.
어차피 프로스포츠는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지만 제도개선을 통해 선수가 구단의 세 불리기와 경영전략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게 축구계의 주장이다.
프레시안 이종성/기자

소비문화를 비판하는 시사+그래픽 전문지인 Ad Busters에서 가져온 그림입니다.
경제학을 배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를 한눈에 파악될까???,, 궁금합니다.
전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이유없는 (직관적인) 반감만 자꾸 쌓여가니 ..
헛,, 섬뜩한 것이..
이미지 : Adbus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