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의자 디자인, 허먼 밀러 회사 _ Herman Miller Company

글 : 2010년 4월 5일, 라이언 아담스Ryan A. Adams _ 텍사스 대학교 디자인사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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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40년대, 디프리D.J. Defree와 그의 장인 허먼 밀러Herman Miller는 허먼 밀러 회사Herman Miller Company를 키워냈다. 이 둘은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잘 나가던 당대의 가구 디자이너들을 고용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최신의 모더니즘 디자인을 통해 가정과 사무용 가구들, 그리고 작업 공간의 격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허먼 밀러 회사에서 일했던 디자이너들 가운데 가장 유력했던 인물로 조지 넬슨George Nelson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디프리에 의해 허먼 밀러 회사의 디자인 디렉터로 선임되어 회사의 초창기 디자인을 이끌었다. 넬슨은 흔히 그의 디자인 방법론과 관련하여 모험가로 불리며, 어떤 이들은 그가 디자인을 재정립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일 대학교Yale Univ.와 로마에서 건축을 배우긴 했지만 그가 가장 성공한 분야는 글 쓰기와 가구 디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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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빗은 런던의 에펠탑이 될 것인가?

아니쉬 카푸의 오빗Orbit 타워 공개 석상에서 디자인은 로즈의 조각상Colossus of Rhodes과 바벨탑에 비견되었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음의 역사란 그리 상서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를 더듬어 보면 로즈의 조각상은 겨우 몇 십년 간 서 있다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바벨탑은 창세기가 들려주듯 그걸 쌓아 올린 자들을 미화하기 위해 지어졌었다.

계획 중인 아르셀로미탈 오빗ArcelorMittal Orbit이 과연 어느 정도로 보리스 존슨, 카푸, 락슈미 미탈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지 나 자신도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올림픽의 기업 홍보적 기능이 조형물의 세부 요소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오빗은 그다지 예술 작품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거지같은 비교는 아르셀로미탈 오빗을 에펠탑과 함께 놓는 일이다. (역주 : 아르셀로미탈 철강회사는 오빗의 건축비를 후원하며, 그에 따라 이 조형물의 이름은 아르셀로미탈 오빗이다. 락슈미 미탈은 이 회사의 총수)

구스타프 에펠이 디자인한 파리의 상징적인 타워는 애초에 공공 미술 작품으로 디자인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20년 이상 파리에 남아있을 계획도 없었다. 그건 단지 1889년의 파리 세계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의 입구였고, 해체하기 쉽도록 디자인되었다. 에펠탑은 파리 예술계의 반대에 부딛혔지만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예술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실용성 때문에 사라지는 일을 면했다. 에펠탑은 20세기 초, 초기 라디오 전파의 실험에 이용되었고, 1910년에는 우주광선cosmic rays의 감지에 동원되었다. 오늘날까지 그 꼭대기는 안테나로 가득하고, 바닥은 관광객들로 인해 분주하다.

카푸가 디자인한 구조물을 에펠과 비교하면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파리의 에펠탑을 보기에 그럴 듯 하게 만드는 건, 그 형태가 바람의 힘을 감안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기반한 형태가 아니라. 에펠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 타워를 디자인하면서 주로 고려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람에 대한 저항성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저는 구조물의 다리 넷의 바깥쪽으로 만곡선을 적용했습니다. 수학적 계산 결과에 따른 이 방식은 대단히 강한 느낌과 아름다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강력함이 관찰자의 시선 앞에 드러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자연의 힘을 따르는 방식에 의해서 에펠탑의 거대한 철골 구조는 우아함을 차츰 보여주기 시작했고, 거의 자연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이에 비해 카푸의 구조물은 자연을 압도하는 인간의 지배력을 과시하려는 좋은 사례일 뿐이다. 그 구불구불한 모양은 마치 롤러코스터가 녹아내린 듯 한데, 어느 트위터 유저는 “그건 엉겨 붙은 창자같다.”고 말한다. 이런 끔찍함은 (또한 끔찍한) 데미안 허스트가 아니라 카푸가 디자인 계약을 따냈다는 사실을 내 마음에 곧 바로 상기시킨다.

그러나 카푸와 에펠의 비교에 있어서 최악의 부분은 런던이 쇠붙이로 만든 타워 따위에서 파리라는 경쟁자를 필요로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관념이다. 런던은 이미 2012 올림픽의 유치 경쟁에서 승리하고서도 프랑스의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짓을 하고 있다. 누군가 카푸의 오빗이 파리의 에펠탑보다 100미터가 낮을 것이고, 꼬맹이인 블랙풀 타워Blackpool Tower에 비해서도 20미터가 짧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복제된 런던판 에펠탑의 부족한 독창성은 패러디에 가까운 일이 될 뿐이다.

오빗이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점유할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할 진정한 요인은 그것을 받아들일 런던 사람들의 의사일수밖에 없다. 오늘날 에펠탑을 혐오하는 파리지앵들을 찾기는 어렵다. 보리스 존슨 시장은 카푸의 오빗 타워에 20년 간의 시기 제한을 두어야 한다. 그 후 공공의 의사를 묻고 그 결정에 따르도록 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2032년에 오빗이 스트랏포드Stratford의 거주민들에게 외면받는다면, 곧 바로 철거되어야만 한다. 오빗은 철골로 만들어질 것이므로 안전하게 재활용될 수 있다.

이런 기본 절차는 적어도 한 번 런던의 다른 상징물에 적용된 적이 있다. 거대한 관람차인 런던 아이London Eye는 공학적 솜씨와 우아한 형태가 결합된 것으로서 애초에 임시 관광시설이었다. 런던 아이는 그 후 시험 기간을 거쳐왔고, 이제 당분간 테임즈 강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로써 런던은 이미 에펠에 대적할 수 있는 경쟁 상대를 가진 셈이다. 파노라마처럼 런던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이미 런던 아이에서 가능한 일이다.

건축 비평가인 톰 다이크호프Tom Dyckhoff는 카푸의 오빗을 일컬어 “거대한 쓰레기 씨Mr Messy”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차분히들 생각하시라. 그래야 카푸의 오빗이 거대한 혈전(막혀버린 피 덩어리)처럼 당신의 혈압을 높이게 되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당신이 오빗을 좋아하건 혐오하건 간에, “오빗이 구스타브 에펠을 압도할 거”라고 말한 존슨 시장에게 최후의 발언을 해야만 한다.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via Will the Orbit become London’s Eiffel? | John Graham-Cumming | Comment is free | guardian.co.uk.

Modernism, 형태와 기능을 둘러싼 이야기들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웨인라이트(Wainwright) 빌딩, 미국 세인트루이스, 1891.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이미지 by whitewall buick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웨인라이트(Wainwright) 빌딩, 미국 세인트루이스, 1891.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이미지 by whitewall buick

* 타 프로젝트에 사용된 자료를 재구성하였습니다.

형태와 기능(form and function)에 대한 고민은 모던 디자인 운동에서 빠지지 않는 화두였다. 더욱 정확히 하자면, 20세기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 오늘날의 현대적 풍광과 생활환경의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모던디자인운동의 초기,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이념과 맞닿은 질문이었다. 20세기는 모더니즘, 혹은 모던디자인운동이 지배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그 모더니즘만으로 설명하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오늘날의 디자인이다. 실제로 요즘의 시장에서 팔려나가는 소비재들 가운데 기능 이외의 다른 특별함으로 성공하는 경우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고, 소비자의 요구 또한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서 일련의 해석 과정을 필요로 한다.

모더니즘 디자인 논의에 자주 등장하는 두 개념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루스가 1908년에 주장한 “장식은 범죄(ornament is a crime)”라는 개념, 그리고 미국의 조각가인 호레이쇼 그리너에 의해 처음 논의되고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1896년에 주장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ever follows function)”는 개념이 바로 그것. 기능이 없는 장식이 지닌 무의미함을 비판함과 동시에 기능성에 근거한 조형을 강조하는 이 두 가지 개념은 – 예컨대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건물의 장식은 건축주나 입주자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거리를 지나는 행인은 장식을 통해 그 건물을 다른 건물과 구별할 수도 있는 등의 – 이견이 없지 않았음에도 기능주의의 원리로 정착되어 이후의 20세기 모던디자인 경향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철 골조로 디자인된 마천루건축을 처음 확립한 인물이었고,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루이스 설리번. 그는 19세기 말엽부터 미국에서 고층빌딩의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던 인물이다. 당시의 미국은 엘리베이터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 철과 같은 신소재의 대량생산, 새로운 취향에 대한 요구, 강성해진 경제력 등이 한꺼번에 융합되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도시는 보다 대규모의 건축물을 필요로 했다. 건축가였던 그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형태가 관습을 따라(form follows precedent)” 과거의 경향을 답습하던 당시의 건축에 반대하고, 목적에 근거한 건축디자인, 즉 건물의 사용목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더도 덜도 없는 기능적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가 디자인한 웨인라이트 빌딩은 완전한 모더니즘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장식적 문양을 차용하는 등 절충적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합목적적 디자인’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이후 설리번의 합목적적 디자인상은 제자였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비롯한 수많은 건축가, 디자이너들에 의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계승되었다. 예컨대 1950년대에 자동차나 기관차와 같은 운송수단의 디자인에 폭넓게 유행한 유선형(streamlining) 스타일에서도 공기역학적인 합목적성을 추구한 기능주의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시점을 현재로 옮겨보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된 합목적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의 주장이 되어버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선언 대신 “형태는 재미를 따른다(form follows fun)”거나 “형태는 감성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는 주장들, 혹은 “형태는 욕망을 따른다(form follows desire)”는 다소 비판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 속에서 디자인의 의미를 이야기할 때마다 이 명제는 거듭 변형되고 있다. 달리 말해 이러한 현상은 모더니즘 이후의 디자인에서 어떤 ‘가치’들이 기능을 대신해 중요시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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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icy Salif, 레몬 스퀴저, 필립 스탁 디자인, 알레시 제작, 1990.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이미지 by Just Bru

형태가 기능을 따르지 않는 경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필립 스탁의 ‘주시 살리프(Juicy Salif)’를 꼽을 수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즙 짜개’라는 엄연한 기능을 갖고 있는 주시 살리프. 알레시가 1990년부터 제조하기 시작한 베스트셀러 주시 살리프는 우리나라의 백화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주시 살리프는 그 불합리성 때문에 더 유명해졌고 역으로 이러한 엉뚱함이 판매를 지속시키는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영국의 디자인학자 가이 줄리어(Guy Julier)가 다소 비꼬아 기술한 주시 살리프에 대한 해석은 그 불합리성을 잘 설명해준다.

가냘픈 세 다리는 섬세한 발목 위로 뻗어 올라간다. 이상하리만치 높은 무릎에서 꺾인 곡선은 세로로 홈이 파인, 중앙의 눈물 방울처럼 생긴 덩어리와 맞닿는다. 항공공학적인 형상을 지닌 거미 모양의 받침은 그것을 감탄의 시선이 향할 천상의 위치에 올려놓는다. 최상의 ‘외관’을 갖도록 완벽하게 만들어진 이 삼각대는 이 도구의 알뿌리 같고도 남성숭배적인 머리의 노골적인 모습을 하늘 위로 떠받들고 있다. 사용하려면 기술과 힘 모두 필요하다. 누군가 과일을 쥐고 비틀고 누르기를 반복할 때면 이 레몬스퀴저의 받침은 약간 기우뚱거린다. 레몬은 아래로 부서져 내리고, 손은 힘으로 쥐어짠 후 남겨진 찌꺼기로 범벅이 된다. 머리를 장식하는 홈들을 따라 흘러내린 과즙은 아래의 뾰족한 부분으로 천천히 흘러 모여든다. 그 후엔 반짝이는 흘러내림, 그리고 배설의 만족스러움이 깃든 소리와 함께 아래의 그릇으로 떨어진다.

가이 줄리어는 주시 살리프의 기능적 불완전함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금속(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이 도구는 실제 사용에 있어서 특징적인 형태로 인해 사용자에게 과도한 집중을 요구한다. 또한 개방된 구조나 강산성인 레몬과 화학적으로 반응하는 재질 때문에 비위생적이기도 해서 부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물건이다. 그렇지만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알레시가 꾸준히 주시 살리프를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아닌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담긴 독특한 상징성 때문이다. 가이 줄리어의 말대로 주시 살리프는 “성 도착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디자이너인 필립 스탁 스스로 주시 살리프의 “또 다른 기능”이라고 이야기한 ‘스타가 디자인한 물건 써보기’ 정도의 의미를 떠올릴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재미 삼아 사용해보려고 이 물건을 구입할 것이다. 변형된 설리번의 명제들로 이 제품을 설명하자면, 주시 살리프는 “형태가 욕망을 따른” 경우이거나 “형태가 재미를 따라” 디자인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가이 줄리어는 비판적인 시각이긴 해도 이러한 주시 살리프의 다양한 ‘변태적 의미들’ 자체가 이 제품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듯 하다.

이미 형태와 기능을 고민하는 디자인은 ‘공식적’으로 폐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광경으로서의 여성

남성의 사회적 존재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존재는 외면적이고 외부로 향한다. 반대로 여성의 사회적 존재는 여성의 자신의 내면적 태도로 설명된다. 관찰하는 것과 관찰 당한다는 것은 여성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가에 있어 생각해야 할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이다. 여성은 항상 자신을 주시해야 하며 자신 스스로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것들을 설득 당해온 것이다. 곧 그녀가 남성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그녀의 처우를 결정짓는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더보기

논문자료목록

== 대안전시 신문, 잡지, 웹진 기사 ==
LDB. [HiddenArt_Article02] Designersblock, Interview
LDB. [Core77_Article01] 2003 런던디자인페스티벌 리뷰, 100%디자인전, LDB, 등에 대한 소개와 평가.
LDB. [http://www.google.com/custom?domains=designboom.com&q=designersblock&sitesearch=designboom.com&client=pub-1803347774687458&forid=1&ie=ISO-8859-1&oe=ISO-8859-1&cof=GALT%3A%23008000%3BGL%3A1%3BDIV%3A%23FFFFFF%3BVLC%3A663399%3BAH%3Acenter%3BBGC%3AFFFFFF%3BLBGC%3AFFFFFF%3BALC%3A0000FF%3BLC%3A0000FF%3BT%3A000000%3BGFNT%3A0000FF%3BGIMP%3A0000FF%3BLH%3A49%3BLW%3A228%3BL%3Ahttp%3A%2F%2Fwww.designboom.com%2Feng%2Fimg3%2F111logo.gif%3BS%3Ahttp%3A%2F%2Fwww.designboom.com%3BFORID%3A1%3B&hl=en DesignBoom_Article List] 디자인붐에는 런던 디자이너스블록과 관련한 2001년부터의 리뷰가 저장되어있음.
LDB. [Icon_Article01] _ Icon 매거진 LDB를 처음 생각한 사람과의 인터뷰,

TDB. [HiddenArt_Article01] “Anything Goes, Design Flows, Tokyo 2003”
TDB. [AsianWeek_Article01] “Patron To The Stars” 테루오쿠로사키 아시안위크 기사
TDB. [DesignBoom_Article01] 테루오쿠로사키 디자인붐기사
TDW. 도쿄디자이너스위크 디자인붐 사진기사 _ 프린트

DDNY. http://www.designboom.com/contemporary/downtown.html 디자인붐에 소개된 디자인다운타운 사진기사.

== 대안전시 주최측 자료와 공식 웹페이지 ==

LDF. 런던디자인페스티발 http://www.londondesignfestival.com
LDB. 런던디자이너스블록 http://www.designersblock.org.uk
LDB. 2003 런던디자이너스블록 브로슈어 : Risk IT이라는 기업연계 스폰서 프로그램 관련 텍스트와 참여자 프로필

TDB. 도쿄디자이너스블록 메인 웹사이트(블로그)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 _ /2002~2004 _ 자료 저장요함..
TDB. 2003년 행사때 사용된 숨겨진 웹사이트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3/designer/
TDB. 2004년 행사 모토 [TDB2004_AIM]
TDB. 2004년 기타 모집관련사항 [TDB2004_REG]
TDB. 2003년 언론홍보용 보도자료 [TDB2003_PRSKIT]
TDB. 2003년 행사 모토 [TDB2003_AIM]
TDB. 2003년 기타 모집 관련사항 [TDB2003_AWD] [TDB2003_REG]
TDB. 2002년 행사 모토 [TDB2002_AIM]

SDP. 2004년 서울 디자이너스플래닛 행사 프레스킷 ‘디자이너스플래닛 2004 성과보고서’
전체예산, 소요경비, 관객 추정치, 추정 효과 등의 내용이 포함된 텍스트자료. 별도의 CD에 행사 소개와 과정을 담은 디지털이미지 수록
SDP. 2004년 기획서(모집, 장소섭외시 사용한)
행사 진행에 관한 헛점을 많이 드러내고 있음. 동기가 사라지고 목표의식이 흐려진..
SDP. 2003년 행사 기획서 ‘Designers Planet Information’
첫 행사를 기획하게 된 동기에 대한 문서화된 자료.

DDNY. http://www.designdowntown.com/ 디자인다운타운 뉴욕 웹사이트
DDNY. 2004년 뉴욕 디자인다운타운 언론홍보용 프레스킷

DFT. DesignFesta http://www.designfesta.com 디자인페스타 도쿄 _ 제한 없는 실험장, 시장같은 디자인전, 창조성.. 등과 같은 검증과정은 실제 전시상황의 각각의 부스에서 이루어진다. 1600여부스 (참고: 세계디자인박람회디렉토리2003, 디자인네트, D745.2 디7169, p242 + LDB, TDB관련 리뷰 수록)

== 인터뷰 자료 ==
SDP. 박치동씨 인터뷰한 내용 : 행사 기획의도, 동기, 과정, 효과와 문제점들, 주로 파티문화에 관계된 감성적인 것이 동기였다는 내용..
LDB.TDB. 배수열이 인터뷰 : 1.디자이너스블록과 서울디자인페스티벌(디자인하우스)의 뒷관계들, 2.도쿄디자이너스블록의 IDEE관련 부분, 3.도쿄IDEE도산과 그에 따른 TDB의 문제점들.
DDNY. 정지원에게 부탁하여 행사 기획 동기에 관한 인터뷰중..

=== 기타등등 ===
”’DesignersBlock”’
3-4. http://www.pepper-mint.com/designersblock_2001.html _ 참가한 한 업체/디자이너
3-4-1. http://www.loop.ph/new/dbmilan03.html _ 참가업체
3-4-2. http://www.mnodesign.nl/photopage/showsDB2001a.htm _ 참가업체 / 참가업체나 디자이너들이 주류 디자인전시와 함께 참가하는 경우 그 이유는?
3-4-3. http://www.bdmdesign.com/new%20files/designersblockpage.html _ 참가업체
3-6. http://www.blueverticalstudio.com/05/archives/001650.html _ 블로그
3-7. http://formexvar.stofair.se/common/press/ListPublishedPressreleases.asp?NEWS_ID=9326&TYPE=1&index=0 _ 기사
3-8. http://www.pokelondon.com/wire.php _ 레트로폰 블록 전시사례
3-9. http://www.100percentdesign.co.uk/page.cfm?Action=misctable&TableID=4&EntryID=9 _ 100%디자인전 관련 내용 수집용
3-10. http://www.dsmsomos.com/pressroom/press_releases/2003/somos2003-06-Future_Manufacturing/en/somospr2003-06_en.htm _ 디자이너스블록/100%디자인전 참여업체와 글인것같음. 검토요망
3-11. http://www1.britishcouncil.org/jp/japan-press-release-designersblock.htm _ 일영문화원+디자이너스블록 연계

5. http://www.massivechange.com/ 어느 디자인전 미국

”’Design Downtown Newyork”’
6-2. http://www.wallpaperfromthe70s.com/kundenfotos.html 참여업체 _ 텍스타일 월페이퍼
6-3. http://www.dutchdesignevents.com/design_academy.html 참여학교 _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디자인대학
6-4. http://www.eastman.com/News_Center/News_Archive/Product_News/2004/040411.asp 참여업체에 올라있는 소개글
6-5. http://www.buscaferias.net/ingles/noticias_newsletter/Downtown%E2%80%94New%20York%C2%B4s%20alternative%20design%20event%20announces%20its%202004%20shows%20dates.htm 국제이벤트 검색엔진에 올라있는 소개글임.
6-6. http://icff.com/icff_connected.cfm ICFF 국제현대가구페어에 올라있는 디자인다운타운정보

”’제품디자인 관련 국제전시들”’
7. http://www.sharedutchdesign.nl/internationaldesign/designevents.htm 제품디자인 국제전시 리스트
7-1. http://www.buscaferias.net 국제 페어 검색기
7-2. http://www.tsnn.com/ 국제 페어 검색기
7-3. http://www.tradeshowbiz.com 국제 페어 검색기 _ 검색어 _ design + home

”’정말 기타”’
8. http://www.sharedutchdesign.nl 네덜란드 디자인 소스
8-1. http://www.dutchdesignevents.com 뉴욕 내의 네덜란드 디자인이벤트 목록
9. http://www.core77.com/reactor/firstop/ FirStop 관련 Core77 기사

=== 검색엔진 검색용 URL ===
1. http://www.google.co.kr/search?q=designdowntown+New+York&hl=ko&lr=&newwindow=1&start=10&sa=N 요기는 디자인다운타운 뉴욕 관련 검색할 부분
2. http://www.google.co.kr/search?q=designersblock&hl=ko&lr=&newwindow=1&start=30&sa=N _ 요기부터 검색 다시
http://www.core77.com/reactor/firstop/ FirStop 관련 + 구글 FirStop 관련 검색할 것.
3. http://www.google.co.kr/search?hl=ko&q=teruo+kurosaki&lr= _ 테루오구로사키(TDB 프로듀서)관련 정보

=== 기타등등 2 ===
1. http://www.designhistorysociety.org/
2. 버밍엄 디자인 리서치 그룹 http://www.biad.uce.ac.uk/home.htm
3. http://www.sharpeworld.com/main/ 뉴욕의 과거 잡지자료, 문화관련자료 열람

= 디자인 컨설턴시, 익명의디자인 =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 Adrian Forty : 컨설턴시, 익명성의 디자이너를 설명하는 근거
”'[“사회를 위한 디자인”]”’ 나이젤 휘틀리 : 디자인윤리, 그린디자인, 소비주의 디자인비판, 페미니즘과 디자인 ”’전체읽기”’
”'[“디자인사 연구”]”’ 강현주 : 한국의 컨설턴시, 독립디자이너에 대한 언급
”'[“20세기 디자인”]”’ 샬로트 & 피터 필 / 박혜수 역
”'[“열두 줄의 20세기 디자인사”]”’ 강현주 외 : 소비와 디자인, 이외 핫 이쓔들 ”’전체읽기”’
”'[“산업 디자인의 역사”]”’ 존 헤스켓 정무환 역 : 컨설턴시를 구분해서 기술 ”’전체읽기”’
”'[“현대 디자인의 전개”]”’페니스파크 외 / 편.역
”'[“산업디자인150년”]”’ 정시화
”'[“디자인의 역사”]”’ 페니스파크 : 개별 인물들을 비쥬얼하게 소개한 책, 도윈티그, 로위,, 등등
”'[“American design in the twentieth century”]”’ by Greg Votolato :
컨설턴시와 유명디자이너, 익명디자이너의 관계를 다룬 챕터가 있음. ”’전체읽기”’
”'[“Twentieth-Century Design”]”’ by Jonathan M. Woodham : 개설서 ”’전체읽기”’
”'[“현대 디자인의 역사”]”’ 레이몽 기도 : 약간은 생뚱맞은 프랑스의 모던디자인, 울름조형주의 설명
”'[“현대 디자인의 의미”]”’ 피터돌머, 김태원외 공역 : 공예, 디자인, 예술 + 자본주의, 중앙계획… 등의 교차비교, 공예에 대한 많은 분석 ”’전체읽기”’
”'[“History of Modern Design”]”’ David Raizman : 전과처럼 많은 양, 연대기별 디자인사. 컨설턴시, 일본.. 등
”'[“American Design Ethic”]”’ Arthur J. Pulos : 로위, 도윈티그에 대한 언급이 있음. 개괄서
”'[“Ulm Design”]”’ Herbert Lindinger
”'[“A History of Industrial Design”]”’ Edward Lucie-Smith : 베르크분트, 집안의 기계들, 비즈니스와 디자인..
”'[“Design since 1945″]”’ 피터돌머, 강현주외 공역 : 장르별로 나눈 디자인사, 초반에 컨설턴시 부분 참고
”'[“20세기 디자인과 문화”]”’ 페니스파크 외, 최범 역 : 컨설턴시등의 자세한 기술 + 개괄서 ”’전체읽기”’
”'[“디자인의_역사”]”’ 존 에이 워커, 정진국 역 :
익명디자인, 컨설턴시.. 등 자세한 기술, 미들섹스.. so 들어본 용어 많이 등장 디자인사 공부에 관한 기본지식 ”’전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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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 Gathered from : 최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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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StudyAndResearch

참고 가능한 웹사이트 검색 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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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디자인전시 관련 임시 참고문헌 #
1. 도쿄디자이너스블록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 _ /2002~2004 _ 자료 저장요함..
1-1. 2003 TDB 가려진 사이트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3/designer/

1. ?TDB2004_AIM b. ?TDB2004_REG c. TDB2003_PRSKIT d. ?TDB2003_AIM e. ?TDB2003_AWD f. TDB2003_REG g. ?TDB2002_AIM

1-2. 테루오쿠로사키 아시안위크 기사 http://www.timeinc.net/asiaweek/magazine/life/0,8782,178022,00.html
1-3. 테루오쿠로사키 디자인붐기사 http://www.designboom.com/snapshots/tdb04/1.html
2. 런던디자인페스티발 http://www.londondesignfestival.com
3. 런던디자이너스블록 http://www.designersblock.org.uk
3-1. http://www.core77.com/reactor/10.03_designersblock.asp
3-2. http://www.designboom.com/snapshots/milan03/designersblock.html
3-3. http://www.icon-magazine.co.uk/issues/october/designersblock.htm _ Icon 매거진
3-4. http://www.pepper-mint.com/designersblock_2001.html _ 참가한 한 업체/디자이너
3-4-1. http://www.loop.ph/new/dbmilan03.html _ 참가업체
3-4-2. http://www.mnodesign.nl/photopage/showsDB2001a.htm _ 참가업체 / 참가업체나 디자이너들이 주류 디자인전시와 함께 참가하는 경우 그 이유는?
3-4-3. http://www.bdmdesign.com/new%20files/designersblockpage.html _ 참가업체
3-5. http://www.hiddenart.com/venue.asp?ve_id=291 _ Hidden Art 웹진 _ 검색어검색- 기사 다수
3-6. http://www.blueverticalstudio.com/05/archives/001650.html _ 블로그
3-7. http://formexvar.stofair.se/common/press/ListPublishedPressreleases.asp?NEWS_ID=9326&TYPE=1&index=0 _ 기사
3-8. http://www.pokelondon.com/wire.php _ 레트로폰 블록 전시사례
3-9. http://www.100percentdesign.co.uk/page.cfm?Action=misctable&TableID=4&EntryID=9 _ 100%디자인전 관련 내용 수집용
3-10. http://www.dsmsomos.com/pressroom/press_releases/2003/somos2003-06-Future_Manufacturing/en/somospr2003-06_en.htm _ 디자이너스블록/100%디자인전 참여업체와 글인것같음. 검토요망
3-11. http://www1.britishcouncil.org/jp/japan-press-release-designersblock.htm _ 일영문화원+디자이너스블록 연계
4. 각 디자인 전시에 참가한 업체, 혹은 인물의 인터뷰 따기
5. http://www.massivechange.com/ 어느 디자인전 미국
6. http://www.designdowntown.com/ 디자인다운타운 뉴욕 웹사이트
6-1. http://www.designboom.com/contemporary/downtown.html 디자인붐에 소개된 이미지들.
6-2. http://www.wallpaperfromthe70s.com/kundenfotos.html 참여업체 _ 텍스타일 월페이퍼
6-3. http://www.dutchdesignevents.com/design_academy.html 참여학교 _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디자인대학
6-4. http://www.eastman.com/News_Center/News_Archive/Product_News/2004/040411.asp 참여업체에 올라있는 소개글
6-5. http://www.buscaferias.net/ingles/noticias_newsletter/Downtown%E2%80%94New%20York%C2%B4s%20alternative%20design%20event%20announces%20its%202004%20shows%20dates.htm 국제이벤트 검색엔진에 올라있는 소개글임.
6-6. http://icff.com/icff_connected.cfm ICFF 국제현대가구페어에 올라있는 디자인다운타운정보

7. http://www.sharedutchdesign.nl/internationaldesign/designevents.htm 제품디자인 국제전시 리스트
7-1. http://www.buscaferias.net 국제 페어 검색기
7-2. http://www.tsnn.com/ 국제 페어 검색기
7-3. http://www.tradeshowbiz.com 국제 페어 검색기 _ 검색어 _ design + home

8. http://www.sharedutchdesign.nl 네덜란드 디자인 소스
8-1. http://www.dutchdesignevents.com 뉴욕 내의 네덜란드 디자인이벤트 목록

9. http://www.core77.com/reactor/firstop/ ?FirStop 관련 Core77 기사

[edit]
추가 검색URL 요목 #
1. http://www.google.co.kr/search?q=designdowntown+New+York&hl=ko&lr=&newwindow=1&start=10&sa=N 요기는 디자인다운타운 뉴욕 관련 검색할 부분
2. http://www.google.co.kr/search?q=designersblock&hl=ko&lr=&newwindow=1&start=30&sa=N _ 요기부터 검색 다시
http://www.core77.com/reactor/firstop/ ?FirStop 관련 + 구글 ?FirStop 관련 검색할 것.
3. http://www.google.co.kr/search?hl=ko&q=teruo+kurosaki&lr= _ 테루오구로사키(TDB 프로듀서)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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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사, 이론 관련 임시 참고문헌 #
1. http://www.designhistorysociety.org/
2. 버밍엄 디자인 리서치 그룹 http://www.biad.uce.ac.uk/home.htm _ 사회학적 디자인사 검색용 초기 URL
3. http://www.sharpeworld.com/main/ 뉴욕의 과거 잡지자료, 문화관련자료 열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발제문

4. 인상주의 (2) _ 최윤호 발제 (수유연구실 예술세미나 자료)

영국에서의 모더니즘

1660년의 왕정복고 이후의 영국에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처럼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는 없었다. ‘대불황(1870)’을 거치면서 영국의 시민계급은 자신감을 상실했고 부르주아지들에게 있어 확고했던 경제적 자유주의가 쇠퇴했으며 사회주의 운동이 힘을 얻게 된다. 이런 변화들 – 경쟁력 있는 외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식 – 은 외국으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특별히 프랑스의 문학은 당시 영국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러시아소설, 바그너, 입센, 니체 등의 영향이 프랑스로부터의 자극을 보완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부르주아지들의 자기의식이 동요되었다는 점인데, ‘영국만이 유일한 신의 사명을 가졌다는 믿음’이 흔들린 점과 ‘1880년대의 새로운 사회주의운동의 대두’가 그것이다. 이후 영국의 정신적 태도는 모든 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시기, 젊은 세대의 미학적·도덕적 표어는 모더니즘이었다. 이들이 부르짖는 자기실현이라는 말이 매우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세계의 도덕적 안정은 무너지고 말았으며, 사회생활의 모든 규범은 구속력을 상실했고 모든 것은 문젯거리가 되었고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880년대 영국 문예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비정치적인 개인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철저히 반부르주아적이었지만 결코 민주주의자들이거나 사회주의자들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의 향락적인 감각주의와 쾌락주의는 반사회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반속운동(反俗運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에 대한 반대였다. 이러한 속물혐오는 인습이 되고 마는데 영국의 모더니즘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속물혐오의 경향이며 인상주의가 영국에서 겪는 많은 변화는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속물혐오는 이미 과거의 일이었고, 상징주의자들은 보수적인 부르주아지에 대해 일종의 공감마저 느꼈다. 그에 반해 영국의 데까당스 문학은 – 프랑스에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가 각각 나누어 행했던 – 파괴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 시기의 영국문학은 ‘경박스런 표현방법에 대한 집착’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현상은 단순한 반항 심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본래의 목적은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려는데 있었다.

댄디즘

댄디즘 예술가의 언사나 사고방식, 그리고 특이성과 매너리즘은 예술의 멋을 모르는 위선적인 속물적 세계관에 대한 항의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댄디가 보헤미안의 대응현상 이었듯이, 영국에서는 댄디의 일부가 보헤미안의 지위를 차지한다. 보헤미안이 프롤레타리아트로 떨어진 예술가라고 한다면, 댄디는 상층계급 쪽으로 탈락해나간 부르주아 지식인인 셈이다. 둘 다 기계적이고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삶에 대한 항의의 표현인데, 영국인에게는 댄디의 모습이 더 선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댄디즘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탁월함과 독립이며, 일체의 존재와 행동에 있어 아무런 실제적인 목표나 동기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들레르는 댄디를 예술가보다도 상위에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들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종의 장인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댄디는 추구하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댄디의 이런 태도는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명예마저 던져버리겠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오스카와일드 가 자신의 생활을 예술작품화하고 자신의 문학작품보다 더 높게 평가한 것을 보면, 그가 어떤 효용이나 동기,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보들레르의 댄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가 자만심과 교태가 가득하다는 점이 영국 데까당스의 특색인 딜레땅띠즘과 유미주의의 결합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에서는 예술의 장식적인 면과 정교하고 화려한 면이 부각되며, 예술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며 완성된다. 프랑스에서 회화가 모든 예술의 표본이었다면 영국에서는 귀금속 세공이 표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체험의 결실이 아니라 체험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다…. 이 황홀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의 성공을 의미한다.”라고 페이터는 그의 저서에서 말하는데, 이 몇 마디에 모든 유미주의 운동의 강령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월터 페이터는 러스킨에서 시작하여 윌리엄모리스로 이어지는 발전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선구자들의 사회적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심미적 체험의 강도를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그의 경우, 인상주의는 향락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유미주의 운동과 프랑스 인상주의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비어즐리의 미술인데,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공예적·장식적인 필법은 프랑스의 거장들이 피했던 방법이며, 부르주아지들이 애호하는 세속적인 삽화화가와 무대장식가들을 낳게 되는 일련의 발전, 인상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발전의 시발점인 것이다.

지성주의

프랑스 문학에서 직관주의의 흐름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경향을 이루는 지성주의는 영국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와일드는 비평가를 예술가보다 상위에 두어, 세계를 비평가의 눈으로 보고자 했다. 동시대인들의 딜레땅뜨 적 인상은 여기서 연유한다. 이 지성주의의 기반 위에 메레디스와 헨리제임즈가 있다. 영국 문학사에서, 죠지엘리어트가 지적 수준은 높으나 훨씬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는데 반하여, 메레디스와 헨리제임즈의 작품은 극소수의 지식층만이 읽었을 뿐이었고,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나 다양한 인물들보다는 흠잡을 데 없는 문체와 인생에 대한 원숙하며 권위 있는 판단을 요구했다. 두 작가 중 헨리제임즈의 경우, 흔히 지적 정열에까지 도달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두 작가 모두가 현실에 대해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관련을 갖는 예술을 대표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국제적 인상주의

19세기말에 이르러 인상주의는 유럽 전역에 걸쳐 주도적인 양식이 된다. 시인들의 관심사는 객관적 현실이 아닌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이었으며 이런 기분과 분위기의 예술이 문학의 모든 형식을 서정위주, 혹은 이미지와 음악, 색조와 뉘앙스로 변하게 한다.

프랑스 이외의 경우 묘사의 인상주의적 특징들은 상징주의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나, 프랑스 문학만을 염두에 둔다면 인상주의는 상징주의와 동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적이요 감각주의적인 데 반해, 상징주의는 어디까지나 관념론적이며 정신주의적이다. 결정적으로 프랑스의 상징주의는 항상 행동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으나, 빈·독일·러시아·이탈리아의 인상주의는 수동적이며 환경에 무저항적인 탐닉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양자 모두가 가진 비합리적 요소는 수동성마저도 분별없는 행동주의로 변하게 하기도 했다. 일체의 행동성을 외면하는 인상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대표하는 것은 빈의 시인들인데, 빈의 인상주의가 그 특유의 섬세하고 수동적인 성격을 갖게 된 데에는 도시가 가진 특성이 한 몫을 했다. 빈의 문학은 부르주아지의 자식들을 비롯한, 제2세들의 신명 없는 쾌락주의를 표현하는 문학인데, 회의적이고 자기 풍자적이며 인상주의의 잠재적 내용인 ‘먼 것과 가까운 것의 합치’,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들의 서먹서먹함’, ‘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되어있다는 느낌’ 등이 그 기본적 체험이 된다.
“어찌 된 일인가, 바로 어제 같은 나날들이 영원히 흘러가서 완전히 없어져버린 것은?”이라는 호프만스탈의 물음과,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죽는다.”는 발자끄의 말에서, 소외와 고독의 의식이 1830년 이후의 유럽사회에 지배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호프

유럽의 인상주의 역사에서, 러시아가 인상주의를 받아들여서 인상주의운동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체호프와 같은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까지는 계몽주의적인 분위기였으며, 유미주의나 데까당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러시아에서 그런 인물을 대하게 되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기술발달로 인하여 사상이 빠르게 전파되었고, 서구의 산업화된 경제형태가 도입되었으며, 그로 인해 서구와 유사한 지식인에 해당하는 계층과 ‘권태‘ 비슷한 생활감정을 낳는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드가가 중요한 부분을 그림의 가장자리로 몰아내어 액자에 의해 끊어지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호프는 그의 소설과 희곡을 ‘발단’에서 끝맺음으로써 작품이 도중에 중단되었거나 우연히 아무렇게나 끝맺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정공법과는 반대되는 우연의 형식원리를 따르고 있다. ‘잘 만들어진 각본’의 경우 중요한 특색이던 여러 효과들을 포기하기에 이르는데, 과거 무대에 잘 맞는 희곡이 플롯의 통일성, 완결성, 균형성의 형식원리를 따름으로써 성공했던 데 비해, 체호프의 인상주의 희곡은 사건이 적고 극적인 갈등조차 전무했다. 등장인물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서서히 망해가며, 아무 사건도 시간도 없는 삶의 일상성 속에 휩쓸려 들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인생을 고스란히 내맡기는데, 이 운명은 파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환멸을 통해 완성된다.

자연주의 연극의 문제

플롯이나 극적 진전이 없는 이런 연극의 존재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어왔다. ‘잘 만들어진 각본’의 연극은 비록 그것이 자연주의의 어떤 요소들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희곡의 무대기술적 관습과 영웅적 주인공의 이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주의가 극예술을 정복하는 것은 1880년대, 즉 소설에서의 자연주의가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다음이다. 앙리베끄와 그의 후계자들은 발자끄나 플로베르에 의해 이미 문학의 공유재산이 된 것을 무대에 써먹은 것에 불과했지만 부르주아 관객들의 반응은 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연주의 연극은 프랑스 바깥에서, 즉 스칸디나비아제국과 독일 및 러시아에서 형성되었다. 자연주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자연주의 연극의 관습을 받아들였으며 적어도 입센, 브리외, 쇼 등의 희곡에 한해서는 그들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해 공격적인 그 태도를 탓할 뿐, 연극양식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드디어는 반부르주아적인 희곡 자체도 부르주아 관객들을 사로잡아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자신의 생존능력을 스스로 증명한 자연주의 연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와 미학자들은 고전주의적인 희곡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고전주의 연극에서의 간결성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는 점, 공연시간에 제한이 없는 점, 그리고 극중 대화가 잡다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운명, 성격, 행동의 고찰이 아니라 현실의 세부적인 복사’라면서 자연주의 연극을 비판했다. 하지만 실제로 자연주의 연극에서 달라진 것은, 현실 자체가 구체적 제약과 더불어 ‘운명’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라는 것이 다면적이고 복잡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는 것뿐이다.

연극에서 사건의 줄거리가 사라져가는 것은, ‘이야기적 요소가 제거되어가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예술분야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었는데, 미술 분야에서 일화적 회화를 옹호하던 평론이 거의 없었던데 반해, 연극에서는 플롯 경시에 대한 격렬한 비난이 있었다. 특히 독일에서 가장 심했던 자연주의 연극에 대한 반대에는 여러 가지의 상이한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반동의 경향은 간접적인 것에 불과했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념비적 연극’이라는 구상이 갖는 유혹이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함께 자라난 자연주의보다도, 과거의 귀족 및 부르주아지의 고전주의 쪽을 장래의 민중연극을 위한 양식으로 생각했던 것은 당시의 개념혼란을 여실히 보여준다.
새로운 연극에 가해진 가장 격렬한 비판은 그 결정론과 상대주의에 대한 것이다. 내적 자유·외적 자유가 없고 절대적 가치나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도덕률이 없는데 어떻게 진정한 희곡(비극적인 희곡)이 가능하겠냐고 새로운 연극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윤리적 규범이 상대적인 것이고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 인정된다면 진정한 극적 갈등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런 일련의 논의는 개념의 혼동, 사이비문제들과 궤변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는 비극적 희곡을 희곡 전체와 혼동하거나 적어도 이상적 희곡의 형식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이런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상대적인 가치로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얼마든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 비극적 효과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신봉하는 관중에게 그러한 가치위협의 현상을 꼭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관중 자신이 그러한 가치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말이다.

입센

입센은 당대의 세계관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가장 강렬하게 희곡으로 표현한 사람이었다. 입센의 윤리적 정열, 선택과 결단해야만 한다는 의식, 자신에 대한 심판으로써의 작품 활동 등, 이 모든 것은 키에르 케고르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전적으로 비 낭만적이요 일체의 유미주의와 결별한 그의 윤리관 자체가 키에르 케고르의 영향인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들이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키에르 케고르는 이러한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종교적·윤리적 체험이 미나 천재와 전혀 무관하며, 신앙상의 영웅이란 예술적인 천재와 전혀 별개의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의 비현실주의란 것은 당대의 일반적 과제들 중 하나로서, 이 문제와의 대결을 위해서 특별한 자극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전체가 이상과 현실, 시와 진실, 시와 산문의 갈등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었으며 19세기의 중요한 사상가들은 누구나 현대문화의 치명적 불행이 현실감각의 결여에 있음을 지적했다. 이 점에서 입센은 여러 선구자들의 싸움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입센이 이 공동의 적에 가한 치명타는 바로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에 내재하는 희비극성의 폭로였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그 주인공에게 동정으로 대했던 것에 비해, 입센은 브란드나 페르귄트와 같은 그의 인물들을 도덕적으로 철저히 파멸시킨다. 이런 낭만주의적 인물들의 이상적 요구는 이기주의이며, 그 냉혹성은 순진함 만으로 완화되지는 않는다. 돈키호테의 이상주의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서 준열했던 데 반해 입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은 오로지 남에 대해서만 준엄한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입센이 당시의 젊은이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 것은 그의 개인주의에서 비롯된다. 그는 근본적으로는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로서 개성적 자유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았으며, ‘개인은 그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사회는 개인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라고도 했다. 그는 사회문제 자체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다. 그의 사고는 개인적 윤리문제를 중심과제로 삼았고, 사회 자체는 그에게 있어 ‘악의 원리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사회에서 어리석음과 편견과 폭력의 지배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성향은 결국 귀족적, 보수적 영웅주의 윤리에 도달하게 된다.

유럽에서 그가 진보적 인사로 통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조국 노르웨이에서는 비외론슨의 급진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파의 대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영향력은 작품에서보다는 그의 선동가적·교훈자적 역할에 힘입은 바가 컸고, 사람들은 그를 불굴의 투사로서 존경했지만 정치가로서의 입센은 적극적인 무언가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부르주아적 편견과 기존의 사회에 맞섰지만 자유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가 믿지 않았고, 종국에 가서는 서글픈 숙명론자로서의 정체가 드러나고 마는 개혁가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인 루베크는 예술가에 대한 입센의 생각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인물이다. “이레네여, 그대와 함께, 아 그대와 함께 비다에서 하루의 여름밤을 보낼 수 있었더라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었을 것을!” 하고 부르짖는 이 절규야말로 현대예술 전체에 대한 심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버나드 쇼

버나드 쇼는 낭만주의에 대한 입센의 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계속하고, 유럽이 당면한 중대한 문제에 관한 토론을 심화시킨 유일한 작가이다. 이때에 이르러 낭만주의적 영웅들의 극적이고 비극적인 거창한 제스처에 대한 신앙이 깨뜨려진다. 순전히 장식적인 것, 거창하게 영웅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것들이 모두 회의의 대상이 되고, 일체의 감상성과 비현실주의가 속임수요 엉터리 수작임이 폭로된다. 자기기만의 심리학은 쇼 문학의 근원이다.
그는 거짓말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와 사회적 욕망에 의해 제약되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이 지나친 합리적 사고로 인해서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따라서 쇼의 목표는 합리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이며 그의 주인공들의 주요 정신능력은 이성이 아닌 의지였던 것이다. 그가 극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문학형식 중 제일 동적인 장르에서 그의 사상에 가장 알맞은 형식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지성주의적·주지주의적 성격을 띠었는데 그것은 비극적인 효과를 만들기 위한 측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연극을 ‘극적 토론’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연극이 소화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은 사람들이 인기 있는 오락적 작품들에 둘러싸여있었기 때문이며, 비평가와 관객이 모두 이런 새로운 연극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들이 과거의 선구자들보다도 더 엄격한 지성주의를 유지했던 반면에,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수준 높은 관객들은 그의 연극들을 즐기기에 더없이 적당했다.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쇼의 공격이 그들의 돈을 빼앗아가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순간, 쇼의 현란한 지적 곡예조차 안심하고 즐겼던 것이다. 결국에 가서 밝혀진 일이지만, 쇼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계급과의 연대감에서 움직인 작가였고, 예로부터 이 계급의 정신적 습성의 하나인 ‘자기비판의 메가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폭로의 심리학

전환기에 있어 세계관의 기본 방향을 규정해주는 심리학은 ‘폭로의 심리학’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정신생활의 표면이 감정 및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하거나 왜곡한 것이라는 인식을 했었는데, 이런 기만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창시 후의 인간타락에 있었으며, 이런 인간의 나약함과 원한을 윤리적 가치와 이타적·금욕적 이상으로 내세우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들의 폭로작업에 동원된 사고방식은 역사적 유물론에서 처음 쓰인 방식이었는데, 맑스가 강조하는 것 역시 ‘인간의 의식은 왜곡되고 상처 입은 것이며, 의식은 그 자체의 편향된 시각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에서의 ‘합리화’의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형성, ‘허위의식’의 개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맑스의 역사철학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은 ‘계급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올바른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통찰’이다.

한편으로, 이런 역사적 유물론 자체는 그 폭로의 대상이었던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세계관의 한 소산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가 서구의 의식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가 되기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이래의 새로운 사고방식의 근본원칙은 바로 ‘의심의 태도’였는데, 이미 널리 퍼져있었던 만큼 개개인의 사상가와 학자가 자신이 역사적 유물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이런 폭로의 이념은 이 세기의 공통의 재산으로서, 니체와 맑스, 프로이트간에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느냐를 말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들이 시대의 위기적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유럽이 그 넘치는 자신감을 상실한 심리상태의 표현이었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이론 또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론 형성이 상당히 진전되어서야 정신분석의 여러 문제들의 근원이 된 기본적 체험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그 기본적 체험이란 바로 ‘문명에 대한 거북스러움’이었다. 그는 그 ‘불안한 균형의 느낌’이 인간의 본능생활, 특히 성애충동에 가해진 억압에서 연유한다고 보았다.
노이로제는 삶의 요소들 중에서 경제·사회·정치적 부분들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없지만, 프로이트는 철저히 자연과학적인 그의 세계관으로 인해서 사회학적 요인들을 올바로 포착하지 못했다. 그에 의하면 문명의 형태는 역사적·사회적 형성물이 아닌, 여러 충돌들의 기계적 발현이다.
성욕충동을 모든 창조적·정신적 원천으로 삼는 그의 이론은 ‘인간본성’이라는 불변의 설정으로 인해서 보수적 관념론의 잔재를 보존하고 있다며 맑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그 비난은 타당하다. 반면에 정신분석이 부르주아지들의 퇴폐적 산물이요, 이 계급과 동시에 사라질 운명이라고 하는 맑시스트들의 비난은 독선이다.
토마스만은 프로이트가 세기말의 비합리주의에 연루되어있음을 강조하지만, 단지 인간내면의 어두움에 집중한 신낭만주의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만이 아니라, 문명과 이성 이전의 경지를 논하려는 낭만주의적 사고 전체의 시작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정신분석의 위험은 원시적 인간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그것이 근본적으로 충동과 생물학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험적으로 주어져 변화가 불가능한 모든 비변증법적 인간개념에는 비합리주의적 보수주의적 경향이 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비관주의자이거나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성에 대한 회의를 품었지만 동시에 충동을 지배하는 수단으로서 우리의 지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했다.

그의 폭로의 심리학은 인상주의적 생활감정이나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만의 개념은 하나의 인상주의적 사상이며 프로이트가 말한 ‘인간은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모두 숨겨진 삶을 산다.’는 이론은 인상주의가 나오기 이전에는 아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사고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실용주의

니체는 ‘진리가 어떤 절대의 팔에 매달려 있던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진리라고 일컫는 것들은 실상 삶을 촉진시키고 삶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하며 권력을 고양시키는 거짓말 들이라고 그는 주장하는데, 실용주의의 진리개념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행동주의적·공리주의적 성격의 것이다.
효과적이고 유용하고 쓸모 있는 것, 세월에 견뎌내는 것, 윌리엄 제임즈의 표현대로 ‘수지가 맞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것인데, 인상주의와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인식이론은 상상하기 어렵다. 모든 진리는 일정한 현실성을 지닐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된다. 그것 자체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느 것과도 무관하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이란 떼어놓을 수 없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서 그 개별적인 구성요소는 서로서로의 의존관계를 떠나서는 규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실용주의는 예술가의 인상주의적 체험에서 나왔다.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이 진리에 대해 갖는 관계야말로 실용주의 철학이 경험 일반에 대해 설정하는 관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베르그쏭과 프루스트

인상주의적 사고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 특히 인상주의의 본질에 밀착된 모체인 ‘시간’에 대한 베르그쏭의 해석에서 가장 순수한 표현을 얻는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되풀이되지 않을 ‘순간의 일회성’이라는 것이 19세기의 기본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주의 소설 전체가, 그중에서도 특히 플로베르의 작품은 이러한 체험의 묘사이자 분석이었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베르그쏭의 세계관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는, 플로베르는 아직도 인생의 이상적 실체를 갉아먹는 하나의 ‘파괴요인’으로 시간을 파악했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시간관, 그리고 체험적 현실 전체에 대한 평가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서 먼저 인상파의 그림에서, 다음에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 끝으로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며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오히려 지나가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이런 프루스트의 소설에 와서 베르그쏭의 시간관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최선의 것이 고뇌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열반으로 생각하리라.

사람들은 낭만주의가 나타난 이후, 거듭 되풀이하여 인생의 상실에 대한 책임을 예술에게 물어왔고, 플로베르가 말하는 인생의 소유와 표현간의 선택을 비극적인 양자택일로 보아왔다. 이에 반해 관조, 회상, 예술의 길이 우리가 인생을 소유하고 체험하는 오직 단 하나의 가능한 형식이라고 본 최초의 인물이 프루스트이다. 버뜨,,,,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간관이 이시대의 유미주의 자체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런 것은 외관상의 온순함일 뿐, 왜냐 하면 프루스트에 의한 인생가치의 전도는 병든 한 인간의, 생매장된 한 인간의 자위와 자기기만이었기 때문이다.

* Author / Gathered from : 최윤호가 ?문학과_예술의_사회사 부분을 요약함

욕망의_사물_디자인의_사회사

8. 전기-미래의 연료 #

1910년대 이후 50년간의 제품의 기술적, 시각적 변화는 앞서 다뤘던 ‘위생담론’으로 충분히 설명되기 어렵다. 기술사는 이런 현상을 오로지 기술적인 ‘진보의 행진’으로 보고 있으나 실상 그 이면에는 ‘전기생산의 폭발적 증가’라는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영국의 전기공급
1881년, 전기판매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판매되는 전기가 쓰여질 제품은 고작 조명용품이 전부였고 전기발전 부하율을 불규칙적으로 만들었다. 전기소비가 일부 제품 혹은 일부 계층에 불균형적으로 집중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만 대전기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가된 전기발전산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가정 내 전기 사용률 높이기

조명용도에서 발열용으로 전기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전력산업체의 요구에 따라 교육기관에서는 전기발열의 장점을 교육시켰으며 이런 상황은 가정용 전자제품 개발의 발단을 제공했다. 한편, 예상과 달리 전기는 가정용으로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당시의 전기료는 상당히 높아서 부유층에게 주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사용되던 가스에 비해 전기를 두렵게 보는 시각도 있었다. 당시 그러한 이유로 가정보다는 산업체의 수요가 많았으며 1900년대에는 전기 부하율도 개선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가정용 전력수요가 부하율 조절에 결정적인 점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가전제품의 개발이 절실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1905년에서 1914년 사이, 전력공급 엔지니어들은 부하율 개선의 초점인 가전제품의 개발에 큰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전기를 사용하는 요리기구나 난방기구가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져야 가스기구보다 우월하게 인식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14년 이전부터 가전제품이 생산되었으나 시장규모가 작아서 극소량의 디자인만 제작되었다. 1914년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가전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 디자인들은 기존의 기기에 전기장치만을 붙인 조악한 것이었으며 새롭게 만들어진 용도의 전기제품들도 특성을 잘 보여주는 디자인은 아니었다. P232,233_그림 아직도 전기를 쓰는 실제 가구수는 너무 적어서 부하율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군수산업체의 수요가 많아져서 가정용에 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에는 원래와 같은 불규칙한 부하율에 고민했다. 이 무렵 총 전기배선에서 가정용 전기의 배선율은 6%였는데 1963년에는 41%로 증가되었다. 아무튼 양차대전은 전체 전기사용을 높이는 계기였고, 그 시기에는 수요증가의 장해요인들을 없애는 것이 전력산업의 급선무였다.

첫째 장해요인인 요금과 관련하여, 1939년에 실시된 2부 관세 – 균일요금 상태에서의 전기료 인하 – 로 양차 대전 사이의 가정 수요가 늘어났으나 전기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비싼 연료였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점에 대한 대안으로 연료의 특성을 살린 가전제품들이 만들어졌다.

둘째 요인인 전력선의 부족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1918년부터 1939년 사이에 있었고 그로 인해 전체 가구의 배선율이 6%에서 67%로 크게 늘어났다.

셋째 요인은 전기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이는 전기의 원리에 대한 이성적 교육으로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자체가 비이성적인 부분이라서 완전히 극복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전력산업체들은 현대적 이미지로서의 전기상을 알리는 방법을 썼다. “…남는 인간 에너지는 생활을 즐기고 무언가를 배우고 예술적 능력을 배양하고 자유가 필요한 유익한 여가활동을 하는데 쓰일 수 있다. 여가는 더 이상 부유한 사람들의 독점이 아니며 만인이 즐길 수 있는 것으로 확대될 것이다.” 1920년대의 전기는 미래적이며 과학이 가져다 준 최고의 혜택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편, 가스산업은 미래상에 의존적인 전기에 비해서 현실적인 에너지였다. 그들은 전기를 ‘발명되지도 않은 모호한 에너지’로 폄하함으로써 가스의 가치를 선전했다. 만약 당시의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경제관을 바탕으로 에너지를 선택했다면 전기사용량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리 증가하지 않았을 것이나, 실제로 전기는 소비자에게 상대적으로 빈약한 비용가치 이외의 다른 부분들-미래의 에너지로서의 전기-에 선전을 집중시느막館?그 사용량을 증가시켰다. 그것을 믿느냐 마느냐는 바로 그 제품이 보여지는 모습에 달려있었고 그것은 바로 전기제품 디자인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전자제품 디자인과 전기의 이미지

전력 공급사를 위해 가정용 전기기구는 효율성과 미래상의 전달이라는 두 가지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으나 1930년대까지 대부분의 전기기구는 이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공급사의 불만도 커져갔다. 1920년대에는 전기제품의 수요가 너무나 적어서 디자인 향상을 위한 자극을 받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가전제품은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제조사는 효율과 디자인의 향상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 중요한 이유는 전기료의 하락으로 인해 대량의 판매시장을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된, 미래상을 구현해야 제품에 대한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점은 디자인 개선의 좋은 이유였다.

한편 미국은 당시 전기산업이 영국보다 더 발달되었었고 ‘현대적 이미지’의 상업성을 앞서 발견했기 때문에 뚜렷한 진보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었다. 몇몇 업체들은 영국에 공장을 세웠고 영국 제조사들은 그들의 디자인을 모방했다. 1930년대 당시의 성공적 디자인들은 바로 전기의 첨단기술적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P243_기술적 이미지의 반영, P246_전기는 가전제품을 통해서만 효율적으로 판매될 수 있다. 가전제품은 소비자에게 첨단기술이나 첨단기술의 이미지를 선사해야만 한다.

현대성과 미래를 상징하는 스타일, 전기가 가져다 줄 미래상에 대한 신화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런 미래기술 지향주의 Technological Futurism은 디자인의 문제를 넘어서 전력산업체의 목표 – 비싼 에너지를 사람들이 좋아하게 만드는 – 와 결부되어있다. 가전제품 디자인은 사람들에게 전기에 대한 호의적 관념을 전달해서 이전의 선입견과 거부감을 떨치고 전기를 사용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무선 라디오

라디오는 테크놀로지가 삶의 모든 면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준, 과학발달의 상징물로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서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반도체를 이용한 휴대용 계산기처럼 가장 최신의 개발품을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게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무선라디오의 디자인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초기의 라디오에 있어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바로 기술적인 혁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당시의 라디오들은 부품들을 주로 드러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조잡한 조립품과 같은 것이었다. 주된 양산모델들은 주로 캐비닛 생산자들에 의해 주문 생산되었다. 1920년대 말에는 라디오제조산업의 인기가 급등했다 막연한 전기주방기구에 대한 의문 대신에 라디오는 보다 확실한 즐거움을 즉각적으로 소비자들에게 가져다 주었고 이점은 전력산업체들에게도 환영 받을 일이었다. 라디오제조산업은 급속도로 혁신을 이끌어갔고 최신의 모델들이 서로 경쟁했다. 그러나 1929년에 이르러 기술발전의 속도는 점차 떨어지게 된다.

2단계의 라디오디자인은 바로 캐비닛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기술부흥기에는 기술을 드러내는 디자인이 유행했다면, 침체기인 이 시기의 소비자들은 상당히 과학적인 이 기기를 거실에 두드러지게 배치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라디오들은 나무 캐비닛에 넣어져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가구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따라서 거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특별한 어떤 장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실과 같은 수도 있다는 착각에 사람들은 빠져들었다. 제작사는 어두운 방에서 라디오를 듣기를 권하기도 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현실감과 관련된 딜레마는 텔레비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그것들이 사실 그 자체라고 믿어버림으로써 그 딜레마를 피했다. 화성침공과 관련된 해프닝은 그 일례이다. 이 기괴한 허구적 사실성을 감추는데 있어 라디오의 가구화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대안이기도 했다. 반면에 이런 디자인은 앞서 유지되었던 미래와 진보의 상징으로서의 라디오상을 알리는데 있어 장애요인이었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캐비닛의 디자인을 일반적인 가구와 달리 현대적으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런 라디오의 가구화 전체는 라디오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라디오 디자인의 3단계는 바로 미래지향주의였다. 베이클라이트의 개발과 더불어 제작자들은 훨씬 싼 값에 합성수지만의 특색 있는 장점을 가진 캐비닛들을 생산해냈다. P252 하지만 진공관을 사용하는 한 부피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라디오를 가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2차 대전 후 트랜지스터가 개발되자 라디오의 디자인은 변화되어야만 했고 여러 가지의 방법들이 고안되었는데 이로써 라디오는 가구와 결별한다. P254_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그 흥미로운 예이다. * 중앙처리장치의 변화 : 전구 – 진공관(에니악/라디오) – 트랜지스터(기타전자제품/소형라디오) – 반도체를 이용한 집적회로(퍼스널컴퓨터/라디오 회로는 칩 한 개로 충분) – 지속적인 집적화. 소형화를 감당할 전자제품의 소형화와 다각화가 이루어짐. 예) 인체용 나노급 로보트 개발

1960년대까지 대부분의 제작사들은 앞서 언급된 콜사가 발전시킨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 현대적 모습의 라디오 만들기에 주력했고 라디오는 기술을 상징하는 현대적 산물로 확실히 인지되었다. 1950년대 이후 라디오디자인의 기술적 발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제조업자들은 라디오를 마치 과학의 한계를 허물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데 주력했다. 그러한 집착은 우주개발과 관련한 이미지를 라디오 디자인에 사용하기도 하도록 만들었고 반도체가 개발되고 수많은 전자 개발품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후에도 라디오를 지속적으로 미래상으로 유지되도록 만들었다.

미래상에 대한 이미지를 디자인에 이용하는 것은 20세기 디자인사에 흔하게 반복되었던 일이다. 정말 놀라운 것은, 디자이너들이 특정한 메시지를 과거와 다른 방법-글이나 그림의 도움이 아닌-으로 생명이 없는 물체를 통해 전달하는 완벽하게 새로운 방법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과학과 기술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불안과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미래상의 전파에 성공한 ‘디자인’은 20세기의 희한한 현상 중에 하나이다.

20040910 최윤호 발제

* Author / Gathered from : 욕망의_사물_디자인의_사회사 에이드리언 포티, 허보윤 역 / 최윤호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