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후기

lposter017590.jpg

샌드위치를 들고 들어간 극장 안에서 나는 왼편의 스피커 옆에 앉아있었다. 영화는 이미 시작되었는지 어느 노인이 등장하다가 이내 해방 이후의 거리로 바뀌었다. 오십년대의 시장통에서 벌어졌을법한 수수한 일상, 그 속에서 살던 한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왼편의 스피커가 웬지 이상하더라니, 영화를 보는 내내 깜짝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총소리가 작을 수 있겠느냐 마는, 꼭 전투가 시작되는 첫 총성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앞사람의 의자를 치기도 하고, 놀라서 고개를 돌리느라 중요한 장면을 놓치기도 하였다. 그만큼 이 영화는 소리조절과 화면조절을 상당히 급박하게 전환되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나는 전쟁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평소엔 영화를 정말 안보는 편이지만, 전쟁영화는 그나마 찾아서 본 편이다. 나는 전쟁영화를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평온한 세상을 확인하고 안도하지만, 그런 안도감의 이면에는 상황을 언제건 뒤바꿀 수 있을 불안요인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함께 느끼게 된다. 전쟁영화의 시나리오나 원작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하는지 알 수 없으나 무작정 그것은 다큐멘터리라고 믿어버리기도 한다.

어설픈 점이 보였다. 반합도 모자랐을 시절에 등장하는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식판, 많이 들어서 알고 봤던 어색한 전투기 그래픽들, 그리고 잔인하게도 – 형제가 같이 끌려가서 서로 겨누다가 동생이 살아오는 – 전체적인 스토리 또한 그리 놀랍지는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눈을 적시게 된 이유는, 그런 어설픈 부분에 비해서 너무나 고마운 진일보한 균형감각 때문이었다. 형의 동생 살리기는 그래서 더 눈물겹다.

우리는 헐리우드의 눈을 통해서, 혹은 과거 군사정권의 시각을 빌린 영화들을 통해서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만났었다. 그 모든 전쟁에는 선악이 뚜렸했다. 하다못해 그 태극기마저 윗쪽의 빨간색보다 아랬쪽의 파란색이 크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원래 빨갱이만 들고 있어야 할 죽창을 들고 어색하게도 빨갱이들을 죽이는 장면과, 웬지 하면 맞을것 같은 말인 “씨팔 일정때는 나라지킬라고 싸웠지만 지금 이게 뭐하는 지랄이냐. (필자 주)”라는 공형진의 대사는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 부분, 형이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북쪽을 향해서 다시 총질을 해대고, 그런 형으로 인해 동생은 남쪽으로 살아 돌아와 어머니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그 땅,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땅이 바로 남한 땅이다. 그런 총질로 만들어진 긴장의 땅인가보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는 남쪽에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남쪽으로 돌아오는 동생으로 그려졌겠지만, 언젠가 시간이 더 흐르면 그 반대편 북쪽의 눈물나는 전쟁스토리도 들어볼 날이 있을 것이다.

덧말 : 나도 한번 아주 길게!! 써보자는 다짐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는데 결과적으로 뭐 만족스럽진 못하다. 하지만 대충 내가 이 영화를 본 느낌 중에서 중요한 몇몇은 드러난 것같다. 이런것도 막상 써보려니 어렵네그려..

아, 그리고… 이 영화속, 전장에서의 장동건의 모습은 해안선이라는 영화를 다시 생각나게 하였따.

글쓴이

Yoonho Choi

independent researcher in design, media, and locality & working as a technology evangelist in both design and media industries

“‘태극기 휘날리며’ 후기”에 대한 8개의 생각

댓글 남기기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