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 프레시안 연재 _ 창랑지수(29)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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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 안 선생님 댁에 가서 바둑을 두었는데,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한 판을 졌다. 내가 한숨을 짓자, 그가 말했다.
“자네 오늘 마음이 별로 편치 않은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지고 나서도 마음이 편하다면,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시 한 판?”
바둑판을 준비하며 저절로 또 한숨이 나왔다.
“왜 그래, 지군 자네 오늘?”
그러면서 손을 멈추었다. 나도 따라서 손을 멈추었다.
“이런 염량(炎凉) 세태에 어떻게 기분 좋을 수가 있습니까?”
“지군, 여태까지 그걸 한탄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자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야. 진작 그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지. 세상이 염량한 지는 이미 몇 천 몇 만 년이야. 마치 우리 몸에 손발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런 일인데, 자네가 한숨쉰다고 세상이 자넬 위해 변해줄 것 같은가? 1 더하기 1은 2야!”
“역시 한숨을 쉬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다른 사람이 잘 나가는 것은 그의 능력인데, 내가 한숨을 쉬어본들 어쩌겠어요? 생각해 보니, 아직 제 수련이 덜 된 것 같네요.”
“참선(參禪)을 한다고 누구나 다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 수 있는 건 아니야. 도대체 사람이 뭔가, 사람이? 자네가 만약 사람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넨 평생 동안 고생 안 끝날 거야.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으면 오히려 희망이 생기지.‘사람들과 싸우니, 그 즐거움 한이 없다’. 이런 말이 왜 생겼겠나? 내가 젊었을 때는 자네보다 더 청렴하고 고상했어. 하지만 그 결과 지금은 청렴만 하고 고상하지는 못해. 완전히 공짜로 다른 사람들의 발판이나 돼주고 말았어. 결국 이루어 놓은 거 하나 없고, 벌어 놓은 돈 한 푼 없고, 가진 거 하나 없는,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어.”
그의 말을 들으니 나의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걸 감추기 위해 나는 일부러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 선생님, 말씀 끝까지 해 보시죠.”
“내가 한평생 살면서 실패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야. 만약 실패하고 깨달은 것도 깨달은 것으로 친다면 말이야.”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지군, 자네를 보고 있으면 어떤 때는 계속 참고 봐줄 수가 없을 때가 있어. 자네 고생할 날은 아직도 뒤에 남아 있어. 앞으로 몇 년 지나면 자네보다 훨씬 젊은 사람들이 자네 상관이 될 거야.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야.”
“저도 상황 돌아가는 걸 전혀 모르는 건 아닙니다. 어떤 때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대세에 따라서 그 판에 끼어들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그 대세를 따라가 주지 않아요. 성격 때문에 그 판에 낄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해요. 그 판에 끼어드는 고통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보다 훨씬 크다면, 내가 뭣 때문에 그런 작은 행복을 위해 큰 고통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대소의 구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경중을 재는 저울도 각각 다르므로, 정말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만 있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러나 사람은 어쨌든 사람이야(人總是一個人啊)!ꡓ
“역사상 큰 인물들은 대세에 역류(逆流)하며 살았어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정말로 인물들이에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게. 자네의 그런 성격으로 해낼 수 있겠나? 자네는 대세에 따르는 것과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자네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통 축에도 들지 못해.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못할 바엔 자네 일찌감치 위생청을 떠나서 한의(漢醫) 실무에나 종사하게. 그렇게 되면 평생 동안 지금처럼 관리도, 상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공중에 매달려 있지 않아도 되잖아.”
“안 선생님은 역시 경험자시네요.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을 다 아시고. 그런 좋은 점이 정말로 있느냐 없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에게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고 웃는 얼굴을 꾸미느냐 아니냐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바로 그렇게 공중에 매달려서 땅을 밟지 못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더럽다는 것이고, 뭐를 해야 좋을지 모른다는 것이며,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자기가 살아 있음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여태껏 걸어왔던 길로 계속 그냥 걸어가야 하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옛날의 과거시험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부 한 장소에 모아놓고 시험 한 번 보고 나면 끝이고, 내가 얼마나 깨끗하고 고상한지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고 말이에요.”
“지군, 자네 입장을 분명히 정해야 하네. 자네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뭔가? 담장 위에 올라타고 앉아 이쪽저쪽 쳐다봐서는 안 돼!”
“안 선생님 말씀은, 제 말이 분명한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애매모호하기도 하다는 것이군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나에겐 확실히 나 자신을 드러내 보여줄 무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운 사람일수록 그런 무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무대가 없다면 두렵고 불안해서 하루도 견딜 수 없다. 안 선생님은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 차는 천천히 마셔야 그 맛을 알 수 있네.”
“저는 아무 맛도 모르겠는데요.”
“그건 자네 감각이 너무 둔해서 그래. 군산모첨(群山毛尖)이란 차야. 찻잎을 보면 하나하나 다 서 있지. 호남(湖南)의 친구가 보내준 거야.ꡓ
찻잔을 들고 살펴보니 과연 모든 찻잎들이 다 서 있었다.
내가 말했다.
“좋은 찻잎은 모두 성깔이 있네요. 일어 서 있고….”
“옛날 그분들의 성격을 우러러보고 흠모하는 거야 괜찮지만 따라서 배우려고 하면 안 돼. 나도 평생 동안 우러러보고 평생 동안 배웠지만,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자네가 보고 있잖아.”
그는 말을 하면서 자기 손목을 비비고 팔뚝을 주물렀다. 마치 자기 자신을 애석해하는 듯, 스스로 아쉬워하는 듯 보였다. 한참 있다가 그가 말했다.
“다시 한 판 때릴까?”
그날 안 선생님 댁에서 나오면서 문 입구에 이르렀을 때 나는 농담 한 마디를 했다. 그도 나를 따라서 농담을 했다. 마치 우리가 무슨 심각한 얘기는 나눈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달관한 듯한 태도로 마음속의 떨림을 감추려 했다. 놀랍게도 나 자신의 신념이 그리 강인하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받은 나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것도 알고 보니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친의 한 평생은 값어치 있는 삶이 아니었던가? 나는 감히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미 선택한 이상, 자꾸만‘왜’라는 질문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념은 어디까지나 신념이고, 지금의 문제는 일종의 감정의 선택이다. 감정의 선택을 이성으로 계속 되짚어 생각하고 끝없이 질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숭고하고 신성한 것도 끝없는 질문을 견뎌낼 수는 없다. 일체의 것들을 궁극까지 묻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체의 것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회의 정신에 겁이 났다. 발아래의 땅이 흔들리면 사람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게 된다. 나는 감히 더 이상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시 더 깊이 질문해 들어가고 생각해 들어가면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러나 나는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다. 나는 지식인이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한 생각할 권리도 있다. 이성이 있는 한,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이 두려워졌다. 일종의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음습한 기운이 점점 더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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