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심해린의 대자보

‘김예슬 선언’ 릴레이 답글들 _ 퍼온 글

이화여대 심해린의 대자보
김예슬 선언에 이어 이화여대 07학번 심해린씨가 <‘김예슬 선언’ 앞에 교수님들의 양심을 묻습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고려대와 이화여대에 붙였다.

고대 김예슬씨의 대자보에 대자보로 답하는 릴레이가 벌어지는 분위기입니다. 그 가운데 이대 심혜린씨의 대자보 글, 그리고 고대 강수돌 교수, 이대 강사 김명석의 글이 오마이뉴스에 소개되었습니다. _ ssall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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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교수님들께 묻습니다. 왜 침묵하십니까? 언제까지 침묵하고 계실 겁니까?

(이대, 고대에 대자보로 게시)

이화여대 심혜린

‘김예슬 선언’에 저는 심장을 찔렸습니다. 김예슬씨가 대학을 거부한 직후 많은 대학생들, 수백만 네티즌들은 잠 못 이루며 토론하고 슬퍼하고 분노했습니다. 대자보 옆에 장미꽃을 달아준 학생, 아이들과 대자보 전문을 함께 읽다 끝내 울어버렸다는 선생님과 중학생들, 내 마음과 똑같지만 함께하지 못해 부끄럽다던 대학생들,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학부모님들의 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김예슬 선언은 MBC 9시 뉴스와 TV, 일간지 1면에 보도되었고, 모든 포털의 메인에까지 올랐습니다. 저는 이제 대학, 교육, 청년실업 이야기만 나와도 본능적으로 ‘김예슬 선언’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억합니다. 대학, 국가, 기업 그리고 기성세대의 ‘큰 탓’을 물으면서도, 잘못된 체제의 유지자였던 자신의 ‘작은 탓’을 물으며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던 그녀의 용기를. 우리 대학생이, 젊은 세대가, 우리 사회가 이런 거울 하나를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김예슬 선언의 사회적 파장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은 언론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이 사건을 외면했습니다. ‘자유·정의·진리’, ‘진·선·미’,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등 건립이념은 버린 채 ‘대학大學’을 취업학원으로 전락시킨 각 대학 총장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그들에겐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진보적이라는 언론조차 이 의미를 알아채지도, 제대로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진리를 논하며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던 진보 지식인과 교수님들조차 거의 모두가 침묵했습니다. 몇몇 분들은 “거의 눈물 날 정도로 기뻤”다, “뒤늦은 성년식을 축하한다”며 좋은 소리를 하면서도 정작 교수직인 자신에 대한 성찰은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말로는 좋은 세상을 외치면서 정작 자신의 존재로 좋은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존경받는 교수님이라는 직위는, 월급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언제까지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고통받는 청년들을 외면하실 겁니까? 수많은 교수님들이 시장만능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며 ‘인문학의 위기’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항인 ‘김예슬 선언’에는 왜 침묵하십니까? 죽어있는 ‘학문’이 아닌 ‘삶’을 보여주십시오.

저는 기다립니다. ‘오늘 나는 대학 교수직을 그만 둡니다, 아니 거부합니다’라는 양심있는 교수님들의 선언을. 설령 김예슬씨처럼 대학 기득권을 던지지는 못하더라도, 지지건 비판이건 본인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진리라고 믿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십시오. 저 또한 이대로 대학 모순이 묻혀 버리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면 저 또한 대학을 버리겠습니다.

“학문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현존의 노고를 덜어주는 데 있다” -브레히트

출처 : 교수님들의 양심을 묻습니다 _ ‘김예슬 선언’엔 왜 침묵하십니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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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과 오늘의 대학 – 한 대학 교수의 부끄러운 고백과 제언

강수돌 (ksdksd) 고대 세종캠퍼스 교수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와 학원가에는 ‘SKY대’ 입학을 목표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수십만 명의 수험생들이 ‘열공’ 중이다. 나 자신도 꼭 30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 낙방한 뒤 재수 학원에서 ‘열공’한 바 있다. 당시로서는 이른바 ‘일류대’에 입학하는 것이 내 인생 최고의 목표였다. 마침내 나는 그 목표를 이루었다.

그러나 막상 대학을 들어가고 나니, 내가 배우는 공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들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대접받으며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가르쳐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갈수록 내가 느낀 건, 내가 바라는 공부는 강의실 안에서는 얻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강의실 밖에서 만났던 선생님들이 더 인간적이었고 인생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다. 그러던 도중에 나는 내 삶의 방향을 세울 수 있었다.

1970년 11월, 청년 전태일이 외치며 죽어간 것처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다운 삶’을 평생의 화두로 삼기로 했다. 공부를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이런 방향으로 탐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처럼, 내가 바로 그 ‘대학생 친구’ 아니 ‘대학교수 친구’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대학 교수가 되었고, (나 혼자 짝사랑인지는 모르나 전태일의 친구인) 대학교수로서 13년이 흐른 지금, 나는 ‘김예슬 선언’ 앞에 서 있다.

김예슬 선언 앞에 선 나 ‘올 게 왔군’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2010년 3월 10일 오후, 고려대 서울 교정에 나붙은 대자보의 제목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SKY대’의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예슬씨가 주인공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김씨가 대자보까지 쓰며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배경을 날카롭게 지적한 대목이다. 나는 이 대목을 보면서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사실, 김씨가 말하기 이전에도 많은 대학생들이나 양심적인 교수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걸 것인가?’하는 물음처럼,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막상 이 ‘불편한 진실’을 누가 까발리고 누가 먼저 나서 대안적 실천을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모두들 마음속으로만 앓고 있었던 게 아닌가.

큰 배움 없는 ‘大學 없는 대학’에서 우리 20대는 ‘적자세대’가 돼 부모 앞에 죄송하다.

이 부분에 이르면 나는 과연 대학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큰 배움’을 얻을 수 있게 잘 도와주고 있는지 자성하게 된다. 나아가 1년에 1천만 원 가까운 등록금을 내는 대학생들이 취업도 잘 안 되는 지금, 결국은 미래의 불안정한 노동력을 미리 저당 잡힌 채 부모들의 어깨만 무겁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 보면, 대학 졸업 이후에 대기업이나 공무원으로 취업을 쉽게 하던 시절은 이미 지난 것 같다. 게다가 보다 엄밀히 따지면 대학이 글자 그대로 큰 배움을 얻는 곳이라면 (실은 취업과 무관하게) 세상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자신과 사회의 참된 발전을 위해 실력을 쌓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전에 취업이 잘 되던 시절조차 대학 본연의 진리탐구나 사회 공헌을 제대로 했는지도 의심이 간다.

다만, 졸업 이후에 취업이 잘 되는 것만으로도 그저 대학 생활을 잘 한 것으로 대충 넘어간 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졸업하기만 하면 먹고사는 걱정이 별로 없던 시절이니만큼 ‘스펙 쌓기’나 장래 걱정에 안달하기보다는 대학생으로서의 낭만을 즐기기도 하고 사회 비판 의식으로 저항과 대안을 모색할 수도 있던 것이 아닌가?

기업처럼 변한 대학, 광장의 대학으로 바뀌려면

그러나 오늘날 학생들의 사정은 너무나 다르다. 4년간 대학 등록금이 약 4천만 원에 이르고 있지만 고교에서 대학 진학률은 80%를 넘어 세계 최고의 수치를 기록한 지 오래고, 또 막상 대학 졸업식이 곧 ‘실업식’이라는 자조 섞인 공식마저 떠돈 지 오래다. 그러니 대학 입학을 하자마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각종 공부, 즉, 영어, 기술사, 취업 준비 학원, 해외 연수 등에 몰입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낭만을 즐길 수도, 비판적 지성을 연마할 수도 없다. 그러니 ‘큰 배움’을 얻는다는 건 한가한 소리로 밖에 치부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렇게 비싼 돈을 내면서 대학에 힘겹게 들어왔으면서도 큰 배움보다는 기껏해야 취업 준비만 하는 현실이 계속될수록 우리 사회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진다. 좋은 ‘스펙’을 쌓은 일부 학생들이야 구제받겠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취업이 어렵다. 게다가 큰 배움을 위해 교수와 학생들이 좋은 책을 읽고 진지한 토론을 벌이면서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 사라질수록 사회 전체에 빛을 밝히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실제로, 오늘의 대학은 참된 이치를 밝히고 희망의 빛을 던지는, 그야말로 ‘진리 탐구’의 전당으로부터 멀어간 지 오래다. 기껏해야 ‘100% 취업이 보장되는 대학’이라든지, ‘브랜드 가치를 올려주는 대학’이라는 구호로 기업을 위한 인력 공급처 역할을 할 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대학이 스스로 기업처럼 변했다는 것이다. ‘교육을 통한 사회 발전’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돈벌이’를 추구하는 것이 문제다.

학생들을 고객으로, 등록금을 수익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문제다. 대학 교정에는 각종 민간 기업들이 장사를 하기 일쑤이고 대학은 임대료 수입을 거두기 바쁘다. 기업들은 각종 건물을 지어주는 대신 그 회사 홍보를 해주기 바라고 돈벌이에 좋은 연구 결과와 인적자원을 대주기 바란다. 심지어 대학이 기업을 설립해 지식이나 정보를 곧장 상품화한다.

예슬씨가 쓴 대로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그의 걱정처럼 “길을 잃고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훨씬 더 당당하고도 멋있게 살아갈 것임을 굳게 믿는다. 김예슬씨의 획기적인 ‘대학 거부’를 마음으로 존중하면서도,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더 이상 그러한 개별적 탈출 운동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 즉 대학이 명실상부 ‘大學’으로서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일, 이것을 우리 모두의 사회적 과제로 끌어안는 일이다.

대학 교수인 내가 김예슬씨처럼 “나도 오늘 대학을 떠난다, 아니, 거부한다”고 대자보를 써 붙이며 멋있게 양심 고백을 하지 못해 정말 부끄럽다. 그러나 대학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늘 ‘김예슬 선언’을 생각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노력할 것이다. 무엇이 삶의 참된 이치이고 무엇이 대학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인지 더욱 더 진지하게 탐구하고 토론할 것이다.

물론 대학의 안이나 밖이냐, 하는 기준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다. 안과 밖에서 모두가 본연의 양심으로, 진리탐구의 정신으로, 만나야 한다. 그리하여 ‘스트레스 사회’가 아닌 ‘행복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내고 실천할 것인지, ‘스펙 쌓기 대학’이 아닌 ‘희망 찾기 대학’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돈벌이 경제’가 아닌 ‘살림살이 경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보다 광범위하게 보다 진실한 모습으로 한걸음씩 걸어 나가야 한다.

학교 교문을 당당히 걸어 나간 김예슬씨는 물론, 교문 안에서도 길을 찾고 있는 수많은 다른 ‘김예슬’씨들을 만나 이런 개방적 토론을 하고 싶다. ‘제도권 대학’에만 갇히지 않고 ‘광장의 대학’에서 참된 삶이 무엇인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더불어 개방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다.

대학생들이여, 전문가 백치 대신 철학있는 실력자가 돼라

내가 사는 조치원 신안리 마을엔 작은 마을도서관이 있다. 내가 마을 이장으로서 지난 5년 간 활동하는 동안 마지막 숙원 사업이었다. 이미 작년 가을 이후로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어린이 책과 성인이 볼 책을 구분하여 라벨을 붙이고 분류기호를 일일이 붙였다. 연기군의 지원으로, 한 아이가 태어나 초중고를 거치며 자라 어른이 되어 삶을 마감할 때까지 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을 모아 놓았다. 그리고 이번 학기부터는 그 마을도서관에서 마을 공부방을 열었다.

물론 총괄 지도는 내가 하지만 우리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로 선생님 역할을 한다.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오후 7시만 되면 유치원 나이의 아이들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이 마을공부방으로 달려온다. 또 한 달에 한 번 수요일이면 좋은 영화도 본다. 작은 ‘마을 극장’이다. 마을도서관, 마을공부방에서 마을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공동체 문화를 만들고 경험하는 일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이 이런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본다. 물론 대학생들 마음속으로는 ‘스펙쌓기’나 ‘장래취업’도 걱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을과 대학이 만나는 이런 과정 속에서 대학생들도 많은 느낌과 생각을 갖게 될 것이고, 많이 배울 것이다. 또 이런 작은 체험의 싹들이 모여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는다.

물론 이런 ‘작은’ 활동만으로 세상이 모두 바뀌진 않는다. 사회 전체를 겨냥하는 큰 그림도 함께 그려나가야 한다. 그러나 과연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인가? 나부터, 우리로부터, 작은 모임이나 만남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소박하게 시작해보자. 대학생들이여, 자신만의 멋있는 삶의 목표를 정하라. 자신의 끼를 찾아라. 진정으로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아 배워라. 남들의 눈치를 보지 마라. 생계나 생존의 문제에 묶여 빌빌거리지 마라. 자신만의 ‘꿈의 길’을 가라. 그리하여 실력자가 되어라. 그러나 ‘전문가 백치’가 아니라 ‘철학 있는 실력자’가 돼라. 그리하여 그 실력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새 세상을 만드는 데 힘껏 발휘하라.

이것만이 희망의 근거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가는 데마다 나눠보자. 둘러보면 군데군데 훌륭한 실천가들도 많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떠나 온 몸으로 도전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분들과 마음으로 연결하고 같이 힘을 북돋우자. 기껏해야 80년 정도 사는 인생, 소신껏 아름답고 멋있게 살아야 후회가 없지 않겠는가.

출처 : ‘ 김예슬 선언’과 오늘의 대학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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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기, 대학을 그만 두는 것만 있을까요 _ 이대 비정규직 교수가 심해린 배움동무에게

김명석 (풀벌레) 이화여대 비정규직 교수

심해린 배움동무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심해린 배움동무와 같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비정규직 교수입니다. 저는 학생에게든 교수에게든 ‘이 더러운’ 대학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학은 우리 인류의 오래된 유산입니다. 그 유산을 현행 대학교의 행정적 지배자들이나 국가의 관료들 또는 시장의 보스들이 독점하게 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그 유산을 지키고 드높일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제 위치에서, 제 탐구에서, 제 성찰에서 그런 의무와 권리를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은 김예슬 배움동무의 행동이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그의 글과 실천을 보고 그가 선지자처럼 느껴졌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뜻을 같이 하는 배움동무들과 힘을 합쳐 진짜 대학을 만들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철학을 가르치니까, 만일 김예슬 배움동무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저는 그 한 사람을 위한 철학 교수가 될 수도 있어요. 아니면 언젠가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해도 강하고 숭고한 그의 정신이 훼손되지 않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저항하기, 대학을 그만 두는 것만 있을까요

심해린 배움동무는 선생 중에서 대학을 박차고 나오는 그런 선지자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올곧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김예슬의 방식은 그 다양한 것 중에 하나이고 몹시도 아프지만 아름다운 방식이었습니다. 다수는 아니지만 일부 선생들은 지금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 봅시다.

저는 김예슬 선언에 공감하는 이 나라 모든 배움동무들이 대학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를 희망합니다. 대학교에 다니는 것을 그만 두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정말로 없을까요?

김예슬 배움동무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대학을 그만 두는 것조차 희망과 용기의 산물이 아니라 어쩌면 절망과 두려움의 산물인지도 모릅니다(아 여기서 김예슬 배움동무의 결행을 가치절하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대학에 남아 있는 것이 반드시 순응과 좌절을 함축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라면서 대학교 안에서 싸워보는 방법도 가능한 스타일 중 하나입니다.

먼저 아주 작은 실천을 해보도록 합시다.

가령 소위 명문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꿀 수 있습니다. ‘듣보잡대(듣지도 보지도 못한잡대학’, ‘지잡대(지방 잡대학)’라는 낱말과 관념은 대학의 이념을 왜곡시키는 악성 밈들 중 하나입니다.

한 대학이 단순히 서울에서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 대학을 저질 대학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대체로 고등학교 때 성적이 나빴다는 사실은 그 대학을 저질 대학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동생들이 대학들을 평가하는 방식이 대학 행정가들의 정책을 좌우하게 됩니다. 하나의 관념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처럼 보입니까? 하나의 관념을 바꾸기 위해서 생각의 전반을 바꾸어야 할지 모릅니다.

악성 밈들은 이뿐만 아닙니다. 높은 연봉이 보장된 직장을 추구하는 우리의 열망과 욕구는 결국 잘 나가는 기업과 직종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길들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열망과 욕구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줄일 수 없을까요?

조금만 줄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걸 줄이게 되면, 친구들이 비웃기 시작할 겁니다. 네가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했다고, 이류 인생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사소한 욕망 하나라도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정말이지 그런 실천은 지성과 절제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20대가 피해자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많은 힘과 에너지가 동원되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본이 투입되어 있고 토지가 투입되어 있으며 제도가 투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투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열망과 욕구입니다.

균형발전이고 뭐고, 지속가능한 성장이고 뭐고 관계없이, 세금 적게 내는 대신 자기 연봉이 더 많아지고,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기를 희망한다면, 이명박 같은 모리배가 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고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 제도 아래에서 이익이 증대되는 시장의 보스들과 의견 통제자들은 이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더욱 강력하게 결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대학 4년 동안 자신이 가진 관념과 생각과 욕구와 열망을 되짚어보고 검토할 시간을 얼마나 가질까요? 우리 사회가 그대에게 그렇게 할 시간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학교의 선생들이 그런 것을 반성할 지성적 힘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성찰해야 할 때, 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이런 방식의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낸 원래 동인인 바로 그 욕망들을 더욱 가열해야 했으며, 그런 욕망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선생을 찾아 다녔고, 선생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했을 것입니다(김예슬 배움동무나 심해린 배움동무가 그렇게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20대들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20대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데 전체 인구에서 20대가 차지하는 만큼의 기여를 했습니다. 20대들이 숭상하는 인간상들이 우리 사회가 숭상하고 있는 인간상을 부분적으로 형성합니다. 20대들이 이건희나 이재용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도 어느 정도 그들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20대조차 박정희를 최고의 대통령으로 존경하면, 박정희는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분량보다 더 많은 존경을 우리 사회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20대가 조중동의 의견들에 흡족해 한다면, 그만큼 그들의 불량의견들이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이 유통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20대가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대학교의 현재 형태를 일정 정도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성한 노동과 실천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숭고한 뜻과 깔끔하고 또렷하고 새로운 생각들도 세상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것, 우리가 우러러 보는 사람, 우리의 시간과 열정을 바치는 곳을 변화시키면, 우리 사회 시스템도 그에 따라 약간은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패보다 무능력이 더 나쁘다고 믿게 되면 우리 사회도 권력을 맘대로 부리면서 부패한 자들이 판을 치는 방식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삶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제 말의 요점은 젊디 젊은 그대 배움동무들이 본디 힘이 없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대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했고 능동적으로 자기 욕망을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중에 나쁜 결과를 낳게 될 줄 모른 채, 너나 나나할 것 없이 명문대를 추구했고, 돈 잘 버는 학과를 선택했고, 학점과 자격증에 매달렸으며, 거대 자본에 복무하는 ‘부품’이 되는 걸 동의했고, 이런 식으로 육체를 돌보는 데 바빠 철학적 성찰과 탐구에 게을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것은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에 따라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주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삶에서 성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승리한 삶이 아닐까요? 결국 저는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배움을 계속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삶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더 아름답고 더 착하고 더 참된 것을 찾는 삶이 우리가 좇아야 할 삶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되는 게 진짜로 성공한 삶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요? 한때가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렇게 믿을 용기가 있나요? 혹시 그것이 성공한 삶이 아니라면 어쩔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지금 대학교를 다니고 있지는 않나요? 대학교를 박차고 나오든지, 대학교를 지금처럼 계속 다니든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살아야 할 삶, 알아야 할 앎, 사랑해야 할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실 김예슬 선언은 제가 말한 거의 모든 것을 이미 담고 있습니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정말이지 ‘대학’은 단순히 현행 제도나 건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큰 배움, 보편적인 배움, 통합적인 배움을 뜻해야 할 것입니다. 대학교 다니는 것을 이제는 그만 두겠다는 말은 그런 참된 큰 배움에 자기를 내던지겠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했던 그런 독립투사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저의 아주 오랜 배움동무들인 소크라테스도 스피노자도 감행했던 일입니다.

출처 : 저항하기, 대학을 그만 두는 것만 있을까요 – 오마이뉴스

글쓴이

최 윤호

Independent Researcher & Writer in Design +++ Visit my PROFILE page to find out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