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누군가 한국의 현대공예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공예의 개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개념의 혼란, 한국 현대공예의 현실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오늘날 이곳에서 공예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공예의 부재와 소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한국 현대공예라 함은 단일한 개념이나 장르 또는 존재방식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차라리 급격한 산업화와 전통의 단절, 개념의 혼란, 제도의 지배와 소외된 존재방식 등을 공통된 배경과 특성으로 삼으면서 전통공예, 미술공예, 순수공예, 오브제공예, 산업공예 등 온갖 불투명한 개념들이 바벨탑과 같은 양상을 보이면서 전개되는 현실을 전체적으로 이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문화행태들 중에서도 산업사회의 대두에 따라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분야가 공예임은 분명하다, 산업화와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방식의 일반화에 따라 전통적인 수공예적 실천이 설 자리를 잃고 사라지게 되었음은 물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온갖 문화적, 상징적 의미체계들마저도 동일한 운명에 처해졌음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산업화된 사회에서의 상황을 일반화한 설명일 뿐, 산업사회에서의 공예가 반드시 그러한 길만을 밟아간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거기에는 산업화의 조건과 과정 및 속도, 전통문화의 영향력과 새로운 문화의 탄력성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한국의 현대공예는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에서의 모순, 즉 전통은 낭만적인 방식으로 과거화하고, 실제 근대화는 계몽 없는 산업화로 대체되는 가운데 빚어진 전통과 현대의 극단적인 모순이 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 현대공예의 문제점으로, 전통의 단절, 공예 개념의 혼란, 소외된 존재방식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전통의 단절은 물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다. 다른 많은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대화는 식민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모든 전통적인 것에 대한 폄하와 왜곡, 그리고 왜래적인 것의 숭상과 지배라는 구조를 일반화시켰다. 그리하여 전통과 현대는 이질화되고 대립되기조차하였다. 공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제도적 측면에서나 실제적 측면에서 전통 공예와 현대공예의 분리와 대립은 다른 어느 분야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현대공예는 대부분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에 의해 이식된 것이지, 전통 공예의 젖줄로부터 성장한 것이 아니다. 그 결과 현대공예는 우리의 전통과 아무런 연관도 맺지 못한 채 다른 토양에 의식해놓은 식물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제도적으로도 전통공예를 하는 이들은 인간문화재 아니면 공예산업 종사자, 현대공예를 하는 이들은 대학 출신의 예술가라는 식으로 일종의 계급적 구분의 성격마저 띠며 고착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공예의 불행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공예적 전통이 계승하지 못한 한국의 현대디자인 역시 뿌리 없는 나무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필자는 어디에선가 ‘껍데기뿐인 공예와 뿌리 없는 디자인’이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았다. 이는 결국 공예와 디자인이 역사저, 문화적 연속성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각기 따로 노는 비생산적인 이원구조로 연결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예의 개념 자체에 혼란이 초래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공예를 둘러싼 왜곡된 상황의 반영으로서, 공예의 현실적인 존재방식과 담론의 불일치로 나타난다. 비록 그것이 조잡하든 싸구려이든간에 오늘날 공예의 본래적인 개념에 들어맞는 것은 대체로 대학 출신 공예가들의 작품에서가 아니라, 남대문시장이나 관광지의 기념품 가게, 그리고 인사동의 공동품 가게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공예 대한 공식적인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대학 출신의 공예가들은 상당 부분 공예라고 볼 수 없는 작업들을 공예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현실과 말, 대상과 언어가 불일치하는 상황에서 어찌 개념의 혼란이 초래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재하는 공예품들을 전통 공예의 모조품, 싸구려, 장치들의 물건으로 치부해버리는 대학 출신의 엘리트 공예가들은, 정작 그러한 현실에 개입해서 변화시키려는 노력 대신 자신들만의 세계와 작업을 정당화 하기 위해 제도와 언어의 보호막을 두르는 데만 몰두해 있다.
대학 출신 공예가들이 배운 조형관이란 어김없이 서구의 근대미술 중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데다, 현실공예라는 것이 예술이라기보다 산업에 가까운 것이다 보니 그들이 어느 한쪽으로만 편향되는 것을 심정적으로는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공예일 수 없는 것이 개념의 확대니 장르의 해체니 하며 정당하는 자기 기만의 상황이다. 정녕 그들의 주장대로 개념이 확대되고 장르가 해체되어야 한다면 왜 끝까지 공예라는 이름은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문제는 그들이 ‘공예가로서의 예술가’가 되기보다는 ‘예술가로서의 공예가’가 되고자 한다는 데 있다. 이는 결국 현실적으로 대학을 중심으로 한 공예제도 내에서 보장된 자기 기반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의식적으로는 그것을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에 다름아닌 것이다. 말로는 공예를 주장하지만 내심으로는 고급한 예술가 의식에 충만해 있는 공예가 아닌 공예가들, 결국 그들의 제스처는 소외된 예술가 의식의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예술사를 보면, 예술의 개념과 영역을 끊임없이 변화되어왔으며 특정한 예술의 탄생과 사멸이 반복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특정 예술의 개념과 영역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좋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변인과 장르적 실천간의 변증법적 상관관계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며, 적어도 그러한 역사적 전망하에서 특정 예술의 운명을 이해할 때 올바른 인식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되는 셈이다.
공예의 소외된 존재방식은 바로 그러한 소외된 공예가 상(像)이 그 원인이자 또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대학과 그를 둘러싼 극히 제한된 제도(전시회, 협회 등)를 벗어나면, 싸구려 키치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공예품을 접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대학에 공예 관련 학과의 수도 적지 않고 공예 전시회도 빈번히 열리건만 정작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공예. 이는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어쩌면 순수미술과 산업 디자인으로 양분된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 내에서 공예를 위한 제3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예와 공예가의 정체성이 분열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주체적인 노력이다. 공예가이기를 포기하고 순수미술가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자신이 공예가라는 시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과연 오늘날 공예가 자리할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공예가 더 이상 전통적인 지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음은 시대적 필연이며 돌이킬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공예가 완전히 소멸되었다거나 필요하지 않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작금의 탈근대적인 상황 속에서 공예는 다시 일정한 역할을 확보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오늘날 공예가 비록 과거의 같은 지배적인 장르로서의 자리는 내어주었을지라도,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고 자연과의 친밀한 조화를 꾀하고 노동의 유기적 통합성을 추구해야 할 소명은 버릴 수 없으며 또한 지켜가야 할 덕성이다. 문제는 이러한 실천은 어설픈 예술가 의식만을 앞세워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윌리엄 모리스는 ‘장인적 예술가’와 ‘예술가적 장인’의 일치를 주장하지 않았던가.
앞서도 말했다시피 갈수록 다원화되어가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공예의 과제 역시 단일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겨냥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순수미술과 산업디자인이라는 양극 체제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조형적 질서 속에서 제3의 존재이자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제고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을 가까운 일본이나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사회에서 공예는 결코 뒷전으로 밀려난 예술도, 전시장 속에 들어가 있는 장식품도 아닌, 엄연히 살아있는 동시대의 생활예술인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소외된 방식으로 연명해 온 한국 현대공예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공예가 지신이 공예를 외면한다면 과연 누가 공예의 미래를 보듬고 가려 하겠는가. 지금 현재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대단한 이념이나 논리가 아니라, 공예를 공예로 보는 정직한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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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디자인평론가
(월간아트 2000년 7월 특집 ‘오늘의 공예를 진단한다’중)
최범씨는 1957년생.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및 동 대학원 미학과 졸업. ‘월간디자인’ 편집차장 및 한국공예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현재 홍익대, 경원대 강사.
공예가의 피해의식이 공예작품의 속성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려운 현실에서 나온 현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97학번 공예전공자로서 지금 공예의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현대에서의 공예의 소명이 공예의 속성은 이미 뿌리가 디자인이고 이 디자인이 공예에서 시작되었기에 공예가 디자인의 모토가 되는 위치가 되어야 함인데 공예의 포지셔닝 전략과 사회의 인식, 대중의 인식변화 등 시간이 오래걸릴 숙제들이 많이 있네요. 깊이있는 글 감사히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