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o: 공장 폐쇄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원제 <No Logo>, 나오미 클라인 지음, 2000년 초판 발행)>의 9장을 요약한 메모.

이제 기업은 브랜드에 깊고 내밀한 의미를 담아내려고 하며 광고대행사는 자신이 제품을 선전해서 파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대신 참된 가치를 짜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브랜드 구축자들은 지식경제에서 제 1의 생산자들인 셈이다. 고용 환경은 변화했다. 슈퍼 브랜드 기업들은 영혼을 세우고 성가신 육체를 잘라냈다. 슈퍼 브랜드 구축과 운영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생산 관련 투자비의 축소로 해결했다. 기업의 우선순위가 바뀌자 공장 노동자와 장인으로 대표되는 실제 생산자들의 위치가 불안해졌다. 과거 생산가:소매가 1:1에 만족했던 기업들은 이제 1:4의 이윤율을 낼 정도의 저가생산처를 찾아다닌다. 생산과정과 생산자는 평가절하되고 있으며 브랜딩은 부가가치를 독차지한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배설물처럼 다뤄진다. 기업들은 제품 생산을 마치 자원 취급 기업이 구리나 나무를 조달하는 것처럼 제품을 조달한다. 생산 부문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제조업체가 노동 인력을 책임진다는 전통적 사고도 함께 빠져나간다.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근로 조건에 대한 책임을 하청 업체에게 떠넘긴다. 그리고 그저 물건을 아주 싸게 만들라고 말하면 끝이다. No Logo: 공장 폐쇄 더보기

19세기 초기산업의 디자이너들

19세기에 걸쳐 ‘디자이너’라는 말은 명확하지 않고 혼란스러움에 둘러싸여있었다. 이른바 하나의 직업적 책임으로서, ‘디자이너’는 순수예술가, 건축가, 공예가, 기술자(엔지니어), 발명가, 기술자 그리고 낮게는 ‘고용자’로서 다뤄졌다. 19세기는 무자비한 변화의 시기였으며, 디자이너 ? 그 모든 변화들과 함께했던 – 는 패턴북을 만들어내던 18세기의 순수예술가들과, 디자인팀이나 메니지먼트 구조를 바탕으로 일하던 20세기의 산업디자이너들,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 두 축은 그 정체성 – 19세기를 산업디자이너의 출현에 아주 중대한 기반형성기로 자리매김한 – 을 확립하기 위한 셀수없는 노력들 위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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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디자인산업과 교육에 관한 통계기사

[영문 기사 “교육, 훈련(training), 그리고 기술(skill)은 디자인산업의 장래를 위한 생존조건”번역 전제]
‘디자인 비즈니스 리포트 : 디자인 산업 연구’ – 디자이너들은 건축가들이나 정보통신 엔지니어들과 같은 다른 분야의 전문인들에 비해 적은 직업관련 훈련을 받고있다.

현재 영국의 디자인산업은 작고

2005년 국민대논문 조각글들 모음

110. 연구목적과 방법

이 연구는 현재의 특정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에서 드러나는 대안성을 디자인사의 흐름 위에서 고찰하는 작업이다. 어떤 방식이 대안(代案) 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대신하여 변화하였다는 의미와 같다.
2000년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디자이너스브랜드와 같은 디자이너의 독립적 사업들이 출현했고, 영국, 일본 등의 해외에서는 특정한 디자이너그룹에 의해서, 과거와는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디자인전시행사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예로 든 이러한 각각의 활동들은, 디자인 외부에 의해서 통합적으로 시작되거나 관리되지 않았고, 경계 를 인정하지 않고 뒤섞이는 등, 전반적으로 과거의 통념과 거리를 두는 편이어서, 혁신을 원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흥미로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그 다양성만큼이나 산만한 모습들로 인하여 과연 이것이 일정한 비교의 대상으로 묶여질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전체를 흐르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디자인 생산, 유통과정에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이 디자인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작업은, 현재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에서 발견되는 대안성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특히 1930년대를 전후하여, 영향력 있는 유통방식으로서 디자인사에 등장하는 디자인컨설턴시, 고용디자인 등의 방식들은, 오래된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상존하는 비교대상이다. 이 논문은 크게 디자인 개념이 등장한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주된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을 다루는 부분과 대안으로서 새로이 등장한 현재의 방식을 알아보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디자인사를 다루는 여러 문헌자료들을 찾아보는 일, 특히 디자인컨설턴시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살피는 일이 과거의 상황을 살펴보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디자인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쓰여졌던 방법은, 능력 있는 개인에 집중하거나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물의 외형적 흐름을 읽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들이 담고 있는 디자이너의 눈부신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영웅들의 이야기는 현재의 디자이너들에게 설득력 있는 과거의 경험이기보다는 무용담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자는 시대의 사회상과 디자인이 가진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변화의 원인을 찾는 에이드리언 포티의 디자인 연구방법을 택했으며 , 사고의 기준을 그에 맞추려 노력했다. 이런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된 사물의 형태나 색채가 아니라 그 주변의 상세한 상황들이다.
논문에서 대안적이라고 언급되는 현재의 활동들은, 주도적으로 이뤄지는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들에 비하여 명확히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가 대안적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이 앞으로 성공할 방식임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정작 연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점을 읽는 보다 지혜로운 눈을 가지는 일이다. 새로이 등장한 대안이라는 것 또한 영원히 지켜질 무엇이기보다는, 언젠가는 또 다른 대안에 의해 사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2. 산업 디자인

1. 1750, 산업 디자인의 시작
2. 산업 디자인의 생산(디자이너)과 유통(제품)

200. 산업 디자인

영국의 산업혁명과 기계화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인 반면에, 디자인을 단순히 제품 생산에 있어 필요한 종속적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기계화가 대량생산체계를 확립하던 때에, 그것을 좀 더 잘 팔리도록 형상화하기 위해서 디자인이 시작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바로 그것인데, 대량생산과 유통의 방식이 확립된 시점인 산업혁명기나 1920년대의 미국을 본격적인 디자인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그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런 종류의 견해에 대하여, 영국의 디자인이론가 에이드리언 포티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일군의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나타났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주장하든지 그들을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이몬드 로위나 헨리 드뤼피스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이 어떤 산업분야에서는 이미 한 세기 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가 주목했던 점은 산업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확실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시점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다, 사회적 취향과 제조기술의 융합 을 이끌어내는 과정으로서의 산업 디자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점이었고, 그 기준에 의하면 두 시기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실제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8세기 영국의 웨지우드(Wedgwood) 나 매슈볼턴(Matthew Boulton) 의 회사에서는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이 제작 과정에서 분리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를 통해 생산, 소비 양측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이후의 컨설턴트 디자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디자인의 등장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결과물인 제품이나 디자이너의 성공여부에 집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핵심이, 생산공정 상에서 ‘복잡한 사회적 요소의 합성’ 인 디자인 작업이 분리된 것이며, 그러한 생산방식의 변화요인은 디자이너의 품성이나 제품 등의 결과물보다도 당시의 사회시스템에 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10. 디자인의 분리

211-0. 중세유럽의 생산

16세기 초반에 유럽의 교역량이 전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뉘렌베르크나 피렌체 등의 신흥도시들에는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 그리고 성직자들을 위한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대형공방들이 생겨났다. 이런 공방들에서는 물건들을 제작할 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공적 방법을 사용했던 반면에, 전문성은 과거에 비해 한층 높아진 상태였고, 단일한 물품들을 반복적으로 복제해냈다. 존 헤스켓(John Heskett) 에 의하면, 이 시기의 예술가와 기술자의 구분은 훈련에 의해 성취 가능한 기술적 능력에 따라 행해지는 유동적 구분이었다. 한편으로, 교역의 증가에 따라 생산양도 늘어났는데, 이에 발맞춰 물품의 외형을 보다 돋보이게 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져서 생산과정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패턴북 은 이런 요구를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응용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가구나 직물 등의 산업 전반에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고, 출판술의 발달로 인해 광범위한 영역으로 보급되었다. 결과적으로 패턴북의 사용으로 인해, 생산과정에서 장식작업에 들여야 할 직공들의 노력이 감소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될 수 있었다. 이런 패턴북이,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에 속해있던 숙련공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고, 구분된 집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제작된 것은, 디자인이 생산과정에서 분리됨으로써 비로소 구분된다는 특성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다.
국가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의 유럽은 정치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의 측면에서 근대적인 발전이 두드러지지만 과거의 봉건적 요소나 세력이 남아있는 시기였다. 이런 절대왕정국가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행정, 사법, 군사의 측면에서 중앙집권이 달성되었다. 한편으로, 국제무역이 성행하던 16세기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에 입각한 자본주의가 도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절대왕정의 핵심이었던 관료제적 중앙집권과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왜냐하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국가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상업의 중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16세기의 급격한 호황에 뒤이어 17세기의 유럽 전반은 암흑의 세기(Black Century)로 불릴 정도로 상대적인 침체를 맞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17세기는 팽창의 시기였으며 유럽 경제의 중심은 이전의 지중해로부터 북서유럽으로 이동하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그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해 궁정예술가들과 장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왕실은 다수의 공장들을 세우고 부속 학교까지 세웠는데, 1667년에 파리의 고블랭(Gobelins)에 세워진 공장의 경우 수백 명의 장인들이 일할 정도였다. 당시의 중, 서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고, 다른 중, 소 군주국들에도 프랑스식의 궁정스타일과 중상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각국의 예술, 장인 지원체계 또한 왕실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생산되는 물품을 군주들이 통제했다. 한편으로, 당시의 유럽 도자기들은 전반적으로 그 질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각국의 왕실들이 도자기공방을 세우는데 영향을 주었다. 북부 독일의 작센(Sachsen, Saxony) 지방에는 1709년에 메상(Meissen)공방이 설립되었다. 초기에 이 공방에서 만들어지던 물품들은 궁정예술가들에 의해서 장식되었으나 1720년대 중반에는 미술학교를 통해 배출된 조각가들이 고용되어 모델링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주된 디자인 소스였던 패턴북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의 물품들은 주로 왕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이 물품의 생산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물품의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는 왕실재정악화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시민계급(bourgeoisie)의 급격한 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18세기 중반, 세력이 커진 시민계급과 중산층에 걸쳐 차와 커피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도자기의 수요 또한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장의 형성으로 인해, 왕실을 대상으로 한 예술성 중심의 생산방식은 상업적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공방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서 판로의 확장, 즉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공방의 상업적 성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으로 인해 왕실이 붕괴되어 후원을 바랄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 상업적 성공에 매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의 사회상은 다른 유럽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대륙의 절대군주제하에서 왕실이 물품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것에 반해, 영국은 의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들의 지지로 웨지우드, 치펀데일(Chippendale), 매슈볼턴과 같은 사업가와 기술혁신가들의 자유무역과 개인적 이윤추구가 보장되었다.

211. 웨지우드

1759년 웨지우드는 독립적인 도자기 생산 회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의 영국 도자기 수요는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고, 식민지의 개척으로 인해 해외시장 또한 확대되었다. 과거의 주된 판매지역이었던 회사주변 지역보다, 폭넓게 확대된 국내외의 시장에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는 공장의 생산방식이 보다 효율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포티가 “웨지우드의 놀라운 성공은 공장에서의 합리적 생산방식, 뛰어난 마케팅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제품에 대한 열정에 기인하고 있다.” 고 한 것과 같이, 웨지우드는 신고전주의의 도입이나 소지의 개발과 같은 일련의 실험들을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당면한 효율화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웨지우드는 새로운 판매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매장에 방문한 고객이 견본을 보고 주문을 하면, 그 수에 따라 생산을 하는 방식, 즉 수요와 공급을 보다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주문생산방식은 불필요한 재고로 인해 자본이 묶이는 위험 에서 회사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후 웨지우드는 견본을 소지한 영업사원을 고용하여 소비자를 찾아 다니거나, 제품 카탈로그를 찍어 배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판매방식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판매 방식이 기존의 생산방식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된 품목이었던 그린웨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새 판매방식에 대한 기존 생산방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1760년대 초반, 웨지우드의 주요 상품이던 그린웨어(녹색유 도자기)로는 물건을 안정적으로 균일하게 생산할 수 없었다. 그린웨어는 틀로 찍어낸 요철 무늬에 유약이 입혀지면서 그 특성이 살아나는 것이어서 유약을 입히는 직공에 따라, 그리고 가마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어서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유약 효과의 다양함이 그린웨어의 매력이었으나 결코 균일한 상품을 만들지 못했고, 따라서 웨지우드가 도입한 판매 방식에 적합하지 않았다.”
새로운 주문판매방식을 도입함에 있어서 필요한 전제조건은, 제품의 질과 형태가 항상 균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판매방식에서, 고객들은 직접 진열된 제품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제품을 구입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에서는 소수의 견본만이 매장에 진열되었고, 그것마저 직접 구입하는 것이 아닌 주문을 위한 구경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 매장에서의 견본이나 인쇄된 카탈로그에서 보여지는 제품의 모습이 자신이 구입할 물건과 동일하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했다.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웨지우드는 그의 해박한 도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우선 그는 그린웨어 대신 크림웨어 로 주 생산품목을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균일한 결과를 얻어내는 한편, 일정한 효과를 내는 유약을 개발했다. 또한 상회전사기법 의 도입을 통해서, 직접 손으로 그리는 장식 때문에 균일도가 떨어지고 대량생산에 부적합해지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당시의 제품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쓰여졌던 것이 분명한 만큼, 기술적 개발과는 다른 균일화를 위한 요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력을 보다 실수가 없고 일정하도록 유지해가는 일이었다.

212. 공정의 세분화와 원형제작과정의 분리

직공들의 숙련도 는 균일화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였다. 17 ~ 18세기 사이의 스테포드셔 에서, 제작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의 공예적 생산방식은 자취를 감추었고, 작업과정의 분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상태였는데, 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이렇다.
“늦어도 1730년대부터 도공들은 전체 작업 과정 중 물레차기나 손잡이 달기, 유약과 이장 만들기 등, 한 가지 과정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다. …… 1750년대 월던의 공방에서는 전체 제작 과정이 최소한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직공들은 대개 그 중의 한 가지 작업에만 종사하였다. 하나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예닐곱 명의 도공들이 분담하고 있는 셈이라, 그 중 어느 누구도 제품의 특성을 크게 바꿀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체 공정들이 이미 어느 정도 분화된 상태에서 웨지우드회사의 제품들은 더욱 균일화되어야 했는데, 직공들이 빈번히 저지르는 실수를 줄이는, 일종의 인간기계를 만드는 변혁은 그래서 필요했다. 웨지우드는 공정을 더욱 세분화하여 직공들에게 부여될 개별 공정의 난이도를 줄여나가게 된다. 그들에 대한 재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이용되었으나, 진척속도가 느리고 직공들의 호응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각 공정이 더욱 세밀히 분화되고 그에 따라 직공들의 작업이 단순화되는 시점에 필요한 또 하나의 작업이 요구되었다. 과거, 하나의 도공이 모든 작업의 과정을 관리하면서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나갈 때와는 달리, 구분된 하나의 반복기계와 같은 임무를 지녔던 직공들이 따르기 위해 필요한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공정의 세분화 과정에서, 도자기의 원형을 제작하는 작업은 독립적인 단계로서 다른 공정과 뚜렷이 구분되게 되고, 또한 다른 공정들의 지침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해갔다. 동일한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는, 개별적인 직공들이 수많은 공정에서 다양한 차이점들을 만들어낼 소지가 많았고, 그것은 곧 균일화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금전적 가치는 상당했는데 이점에 대하여 포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확한 디자인을 기획하는 모델러의 가치는 그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모델러는 어떤 의미에서 도자기를 한 개 만들 때 마다 작업의 일정부분을 대신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델러가 하는 일의 금전적 가치는 실상 이 일정 부분의 가치를 모두 합친 것과 같다.”
생산량과 수익의 정도는 원형제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원형의 질에 상당히 의존적이었으며, 또한 제대로 된 원형의 금전적 가치는 생산량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한 직공들의 작업에 비해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은 중요하게 평가되었으며, 그들은 일반 직공들의 두 배에 가까운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보수가 실제 그들이 가진 금전적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았는데, 고용직으로 일했던 모델러들, 그리고 프리랜스제로 일했던 모델러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당부분의 추가적 이익들이 모두 고용주에게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는 착취의 징후가 보여진다.
한편으로, 웨지우드는 다양한 미술가들을 회사의 모델제작에 이용했다. 신고전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주 고객이었던 중, 상류계층은 그들을 타 계층과 구별하기 위해 최신의 양식들에 몰두했다. 새로운 유행인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에, 전통적인 도자기제작방식에 익숙해있던 도공 출신 모델러들은 미술가들에 비해 어려움이 많았다. 신고전주의스타일은 런던과 같은 유행의 중심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스테포드셔의 노동자계급 출신 도공들이 새로운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회사에 고용된 미술가들이 가졌던 모델러로서의 능력과는 다소 상관없이, 그들은 조직체계 안에서 곧바로 적응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규칙들이 엄격히 지켜지던 조직체계에서 그들의 다양하고도 제어 불가능한 독립적 성향들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웨지우드는 그들을 회사조직 바깥에서 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대도시에 위치한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구입하거나 의뢰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이로써 디자인작업은 제작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유행은 웨지우드가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제품 생산에 사용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독립적인 디자이너, 디자인작업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노동분화로 인해서 쪼개어진 세부적인 공정들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3. 생산방식의 변화와 디자인

제조업자들에게 필요한 디자이너란 것은, 무엇보다도 균일하고 정확한 제품생산을 가능하게 해내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모든 디자인은, 기계든 손이든 활용 가능한 생산 수단으로 작업해서 얻은 제품에, 개별적인 차이와 다양성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 인용)웨지우드의 퀸스웨어에 관한 많은 디자인사연구가 퀸스웨어의 신고전주의적 특성에 집중하지만 실로 그것은 신고전주의의 미적 특성보다는 공장의 생산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기계의 도입이 디자인을 변화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제형물레의 선반을 회전시키는데 기계를 도입했다고 말하지만, 물레질, 틀 성형, 제형 물레 성형 등의 제조기술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왔던 전통적인 기법이었고 다만 속도를 빠르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웨지우드의 성공원인은 공장에서 노동인력을 조직하는 것과 관련한 그의 새로운 방식 때문이었다. (디자인과 제작방식의 연관관계)
그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사업 초반의 그린웨어는 다양한 형태와 유약의 효과로 유명했지만 필연적으로 균일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견본이나 카탈로그를 통한 판매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새로운 방식은, 형태의 다양성은 축소하면서도 표면에 들어갈 상회장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식이었다. 상회장식은 도자기가 구워진 이후에 작업을 하면 되는 일이었고, 주문을 받고서도 바로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장식방법을 상회로 바꾸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형태의 도자기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재고준비단계나 장식공정에서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장식의 가짓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러한 장식들이 모두 들어맞을 수 있는 특별한 도자기의 디자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웨지우드 초기에 생산되던 로코코스타일의 도자기들은 굴곡이 많고 형태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단순화가 필요했던 장식공정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반면, 신고전주의 스타일은 단순하고 평평한 표면을 만들어내는데 적합한 스타일이었고, 이후 웨지우드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생산되는 제품의 균일화, 그리고 당대를 살아가던 중상류층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조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고서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었다. 두 조건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절충안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웨지우드의 모델러들이었다. 포티는 이렇게 18세기의 모델러들이 담당했던, 생산과 소비라는 두 측면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형태의 개발이라는 작업이 1920년대의 레이먼드 로위와 같은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했던 일과 다르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220. 19세기 영국의 디자인저급화와 기계화와의 관계

19세기.. 디자인 변질이 어떻게 전반적으로 걱정거리였는지 기술할 것.. 1111

기계화와 디자인의 연관성에 대하여, 기계 생산 방식의 등장이 디자인의 질을 저하시킨 주범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상태에서, 기계의 등장이 디자인 공정의 분리를 촉진했다는 그런 견해는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모리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었고 현대디자인 이론서에 자주 등장하는 니콜라우스 페브스너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재론되었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은 같은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상황을 배제한 편협한 견해일 수도 있다. 당시의 기계와 디자인의 관계를 해석한 포티의 견해에 의하면, 기계의 등장을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으로 보는 판단은 “제품의 형태에 미치는 장인의 영향력을 기계가 침탈했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다. 즉, 기계가, 외형을 다루는 과정을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분리시켜서 디자인 작업의 변질을 초래했고, 그것이 곧 제품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 생산방식이 도입되기 이전인 18세기 초에도 이미 공정의 분리를 통한 노동의 분업화가 이루어져있음을 웨지우드를 비롯한 예에서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공정의 분리가 기계의 등장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19세기의 산업체들에서 기계화가 차지하는 공정의 정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수공에 의한 생산공정이 그때까지도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수공생산은 보다 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의 장인이 작업해나가는 방식은 아니었다.
공정 분화현상은 비슷한 시기의 산업 전반에서 발견되며 이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언급된 자본주의 산업발달의 3단계과정과 들어맞는다. 그에 의하면, 개개의 장인들이 독립적으로 일해서 물건을 만드는 전 자본주의 사회가 지나면 자본주의의 첫단계가 시작된다고 했다. 첫 단계는 노동자들의 간단한 협업단계로 작업장을 공유하거나 같이 재료를 구입하고 같이 물건을 파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관리자의 지시 하에 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수공과정으로 분리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기계 그리고 공장체제의 등장이다.
18세기는 영국 대부분의 제조업분야에서 두번째 단계, 즉 수공 생산 상태에서의 분업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이는 독립적인 장인이 전체 생산과정에서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분화된 작업으로서 디자인이 새롭게 필요해졌음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인용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1725~1826)의 글을 보자.
“무지는 미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또한 산업의 어머니다. 심사숙고나 감각표현은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손이나 발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반복작업은 숙고나 감각표현과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제조업은 정신이 최소한으로 관여하는 곳, 또한 작업장을 …… 인간 부품이 장착된 엔진으로 간주할 때 번영한다.”
1767년의 이 글에서는 웨지우드 회사에서의 분업화와 작업지시체계로서의 디자인의 등장이 예견되고 있다. 디자인이 무지한 노동력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두번째 단계인 수공생산 상태에서 분업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였다.
기계의 도입은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의 변화에 작용하였던 요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노동의 분화를 더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계생산에 의해서 생산력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이 생산력의 증감여부에 생산방식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분화라는 생산방식은 생산력의 증가가 유지되는 한 함께 유지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어질 얘기 -> 기계화의 현상(직물,,, 등등 60페이지 이후의 사례들.. 그래서리,, 디자인변질의 원인은 기계화보다는 공정의 분화가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던 목판나염술은 1750년에 이르러 동판나염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방법을 이용해 공장에서는 보다 큰 면적에 보다 정교한 무늬를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수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는데, 염료를 묻히는 과정과 판을 잘 맞추어내는 것, 그리고 적당한 압력을 가해 찍어내는 작업은 날염공들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1796년에는 동판나염에 이어 롤러날염기계가 개발되었고 뒤이은 증기기관의 이용에 힘입어 생산의 속도는 열 배 이상 증가하였다. 날염작업이 수작업에서 증기 날염기계로 대체되자 기존의 장인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생산량의 증가로 인하여 새로운 디자인의 요구가 높아졌고 디자이너의 수 또한 늘어났다.
한편으로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일부의 고용된 디자이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리랜서로 자신의 디자인을 제조업자에게 파는 식으로 일했다. 그들의 보수는 당시의 다른 숙련 노동자들에 비해서 높았지만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수익에 따른 공정한 배분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날염업자들은 1830년대 초반, 저작권을 날염직물 디자인에까지 적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그것이 좀 더 좋은 디자인의 개발에 긍정적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나, 실상 저작권 적용의 목적은 그들의 재산권 확보에 있었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는 1851년의 대영박람회 디자인 부문 공식 보고서에서,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 중 하나는 롤러 날염기계의 도입에 의하여 디자이너가 통제가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고, 그들이 제조업자의 요구나 장식미술의 원리에 얽매여 쓸데없는 복잡한 식물의 곡선을 모방하는데 능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선호했던 다분히 개인적인 선호에 의한 단순한 형태의 결과물들은 보다 과거인 동판날염의 등장에 의해서 이미 사라졌던 것이었다. 사실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를 날염할 수 있었던 것은 롤러날염이 아닌 동판날염방식의 도입 때문이었다. 그는 수공으로 작업한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의 결과물들을 기계의 결과물이라고 여기며 혹평했고, 수공에 의한 완벽한 작업이라고 짐작했던 단순한 무늬의 결과물들은 실제로 날염기계에 의했던 것이었다. 디자인저급화가 기계에 의한 것이었다는 당시의 견해는 이처럼 부실한 선입견에 근거해있다.
디자인의 변질된 근본적 원인은 기계화가 아니라 양과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제조시스템이었고, 그것인 디자인을 공정에서 분리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결과물의 질을 악화시켰다. 근본적으로 이런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기득권을 가진 19세기의 디자인 개혁운동가들은 복잡한 사회문제보다는 지엽적인 생산기술상의 문제에 주력했다. 특이하게도,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모리스는, 존 러스킨처럼 물질적 진보를 모두 버리고 중세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대신에, 물질적 진보를 수용하는 대안의 가능성을 생각했었고, “디자인의 열악함이 자본주의의 탐욕 때문” 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반(反)기계적 성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반대했던 것은 단순한 생산기계 자체가 아니었다.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것은 철과 동으로 만들어진 실제의 기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억누르고 있는 포악한 상업성이라는 실체도 없는 커다란 기계다.”

논문 메모 2004

아이디어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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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일 교수 면담 때 기록한 내용 전부 20041120 #
– 지역적, 대안+ 둘의 상하관계는?
– 대안적 소통방식에 지역적 특성이 들어가거나, 대안적 특성과 지역적 특성이 대등한 관계이거나..
– 작업의 측면과 소통방식에 관한 두 측면을 모두 다뤄볼 수 있다.
– 대안적 측면은 보여지는 내용과 보여지는 방식, 두 가지에 모두 담겨있다.
– ‘대안디자인’이 현 시점의 모든 활동들을 포괄하는가?
– 어떤 기능이, 혹은 경향이 대안적인가?, 그것이 환경과 관련된 측면이 있는가?
– 대안디자인의 사전적 정의를 시도할 수 있다.
– ‘전시’ 와 같은 구체화된 용어의 정의는 부적절하다. 소통방식, 활동, 보여주기… 등등의 다른 용어를 찾아본다.
– 어찌 되었건 개념의 명확히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 지역성을 끌어내는 소스로서의 공예의 측면도 있다.
– 제한생산과 매스프로덕션과의 관계 속에서 ?공예는 생산+소통의 측면에서 그 장점을 찾을 수 있고 ?디자인은 대안적인 핸드메이드, 직접생산소통의 측면에서 장점을 갖는다.
– 만약 과거 공예가는 각개격파, -> 대안적인 네트워크… 활동
– 그렇다면 대안디자인전시는 공예와 디자인의 두 측면을 소통방식의 부분에서 모두 포괄하는 방법일 수 있겠다. (윤호)
– 전시행사가 각 나라에서 유통의 측면으로 얼마나 연결되어있는가?, 그 각각의 구조는 어떠한가?
– 목차에서, ‘소통방식’은 하나의 구분으로, 별개로 다룰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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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보윤 선생 면담 때 기록한 내용들 20041122 #

– 사례연구 논문으로 그칠 소재가 아니다.
– 전체적인 논문의 ‘질문’이 될만한 명확한 물음이 무엇인가?
– 왜 대안인가?, 그리고 무엇이 대안인가?
– 기존의 생산방식이 어떻게 달라져서 대안인가?
– 관행적인 유통방식이 어떤 것이었길래 대안인가?
– ‘지역적’이라는 항목은 하부항목 3장.. 으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
– 새롭게 등장한 연구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명확히 해야만 사례연구도 명확해진다.
– ‘지역적’이라는 단어는 제목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 사례들의 다른 점 보다 사례들의 공통점을 주로 기술한다.
– 개념이 정의된 후 사례연구를 하라.
– 이전의 전시형태가 아닌 ‘생산을 포함한 유통방식’의 문제에 대해 접근하라.
– 생산방식의 차이, 즉 팔 것을 생각하느냐 안하느냐..
– MMMG와 대안디자인방법론은 생산과 유통을 포괄하여 다루는 새로운 개념이다.
– 제품디자인의 주된 흐름에 관한 새로운 방식이다. 문화적인 변화가 개입되어있다.
– 과거의 컨설턴트디자인, 기업소속 디자인은 자율적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새로운 방법들이 자율의 부분을 늘려가고 있다. 생산의 자율화.
– 디자이너의 교육은 그 동안 예술위주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비 자율의 디자인흐름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 전시에 집중하지 말고 방식 자체의 개념정립에 투자할 것.
– 2장 부분은 대안디자인, 문화적 변화의 부분, 개념과 관련된 부분을 다룬다.
– 지역적 부분은 뒤로 축소.
– 사례연구는 마지막에 한다.
– 한국의 경우…
– 1930년대(레이먼드로위..)등의 펌 디자인구조, 그리고 고용관계의 익명디자인(소니..)과 같은 개념이 붕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과거의 디자이너들은 생산시스템에 관여하지 않았다.
– 독립디자이너 – 거의예술가 들과의 상관관계
– 이런 선상에서 예의 위치는 어디인가?
–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 시스템인가? 왜 그런가?
– Mapp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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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제목과 관련한 전용일교수 면담내용 #
_ 가장 최근의 제목에서 쓰인 용어인 ‘대안적 소통방식’은 아래의 조언을 참고해서 수정.
– 지역적, 대안+ 둘의 상하관계는?
– 대안적 소통방식에 지역적 특성이 들어가거나, 대안적 특성과 지역적 특성이 대등한 관계이거나..
– 작업의 측면과 소통방식에 관한 두 측면의 ‘대안적 부분’을 모두 검토한다.
– 대안적 측면은 보여지는 내용과 보여지는 방식, 두 가지에 모두 담겨있다.
– ‘대안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다루려는 일정한 수준의 활동들을 포괄하는가?
– 어떤 기능이, 혹은 경향이 대안적인가?
– 혹시 그것이 환경과 관련된 측면이 있는가?
– ‘전시’라는 용어는 이미 이 논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내용을 담기엔 진부하지 않은가? 특히 이 논문이 보여주는 과정의 대안적 의미를 말하려 한다면 ‘전시’와는 다른, 선입견이 개입되지 않은 용어를 골라야 하는 것 아닌가?
– 이상, 20041120 지도교수와의 마지막 면담에서 제목과 관련, 기록한 아이디어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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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기억해두기 #
1. 디자인페어의 성격을 산업 제품 비지니스페어와 구분할 수 있는가?
2. 그렇다면 디자이너스블록과 같은, 특수성을 집어낼 수 있는 곳곳의 행사를 구별해야만한다.
3. 런던 디자이너스블록의 키워드 _ Alternative, All Design-Relates, Regionalism with Internationalism, Young, New, Way To Company(?RiskIt)
4. 도쿄 디자이너스블록의 키워드 _ Alternative, Kitch, Revival, Commercialism, Internationalism with Regionalism, Young, New, Way To Express or Sell Directly or Individually
5. 디자이너스플래닛 서울 _ Young, Way To Express, Weak, Individualism
6. 불필요한 정규자료의 수집은 뒤로 미룬다. 가능한 모든 자료를 순리적으로 수집할 것..
7. 조직의 문제, 과연 돈이 필요한가?, 인내가 필요한가? 개인의 문제로서 한정될 수 있는가?(가령 너만 끈기있게 버텨봐..)

8. 한, 영, 미 디자인교육 수치 비교와 함께, 전시의 수 비교, 질 언급, 생산량 비교, 연구성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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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된 이전 아이디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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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계획의 수립 관련 #

1. 주제 : 한국 공예.디자인과 사회, 1960~1992 _ 에이드리언 포티의 사회사적 디자인론을 바탕으로
Crafts, Design & Society of Korea, from 1960 to 1992 _ based on A Social History of Design by Adrian Forty
1-1. 주제2 : 주요국가 지역-대안-디자인전시행사의 비교 분석 _ 사회학적 디자인이론을 바탕으로
1-1-1. 주제 2-1 : 선행 ?대안공예/디자인행사의 지역적, 사회적 비교와 분석

2. 논문 성격 : 에이드리언 포티의 사회사적 디자인론과 주변이론을 바탕으로 1960년부터 1992년 까지의 한국 공예와 디자인을 사회사적으로 역사기술하고 실증적 분석을 진행한다. (참고:?1960-1992_한국현대사_자료)
2.1. 논문성격2 : 선정한 몇개국에서 벌어지는 지역 디자인전시에 대하여 조사, 분석한다. 행사의 발생과 진행성과를 검토하며 사회, 산업과의 연관성을 주로 다룬다.

3. 시간계획의 수립 : ?시간계획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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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유형 #
1. 제도 혹은 사례와 관련된 디자인/공예이론에 대한 실증적 분석과 동시에 이를 통한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유형. _ 변경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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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요건 #
1. 가장 흥미있는 주제를 키워드로 간략하게 뽑아보자면 한국, 디자인, 공예, 왜곡상황, 왜곡이유, 사회학적디자인이론, 자본주의 (계속추가)
1-1.

2. 자료수집 가능성, 명확한 결론도출 가능성, 제한 시간 내 완성 가능성 검토
ㄱ. 자료수집은 주로 국립도서관을 통한다. 절대적으로 자료수집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디자인晥?분야 또한 이론적 혹은 사료적 자료들은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학위논문의 양은 초기 1300여 권에서 내용을 검토하며 골라내면 가치있는 100여권 내외의 논문이 쓰일 수 있을 듯 하다. 또한 학회의 자료, 연구자들의 발표된 자료들 또한 소수이기는 하지만 양질이며 비교적 명확한 분석을 담고있다. 최공호님의 논문 이외의 다른 시각을 찾는 것을 주로 생각하며 문헌을 검토했었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디자인, 공예사 관련 석사학위 논문들이 그의 저서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보다 다양한 이론의 가지들을 찾는 것이 급선무.
ㄴ. 명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잘 알 수 있거나 그 속에 있어서 판단을 할 수 있는 당사자의 위치를 가지는 경우(즉 내가 가령 월곡동 40번지를 논한다면 그것은 타당성을 더 가질 수 있다는 것.), 충분한 반응을 가져올 수 있어서 논문의 타당함을 검증받을 수 있는 경우(독자의 반응이 없는 주제가 만들어낸 결론은 무의미), 구체적인 접근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경우
ㄷ. 2004년 11월중 예비심사에 맞춘다.

3. 일반적인 인물나열, 시대나열의 공예사/디자인사는 그리 독창적이지 못하다. 1. 단순히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역사기술, 2. 현상과 역사의 관계를 함께, 사회사적 디자인사의 경우와 인물사로서의 디자인사 사이의 차이점., 우리 사회에서 시간적, 환경적으로 타당한 역사기술방법인가를 강조해야 한다.

4. 시간, 장소, 현상에 따르는 주제의 집중화
ㄱ. 일제시대-현대의 한국 디자인사 > 일제시대-1960 한국 디자인사 || 1960 – 현대 한국디자인사 > 현대 한국디자인사
ㄴ. 1960 이후의 세계 디자인의 흐름 > 1960- 한국 디자인의 흐름 > 1960- 서울의 디자인문화 > 1960- 서울 5대 백화점의 디자인상품 연구 > 1960-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 연구
ㄷ. 한국의 상품사 > 한국의 소비재 역사 > 한국의 문구용품사 > 한국의 ‘스테이셔너리’ 제조사 > …

5. 충분한 학문적 깊이가 있는 문제인가? 기존문헌과 방증자료를 가진 주제인 경우 예) 디자인의 사회사와 같은 접근법을 이용한 논문의 경우

6. 자료수집이 가능한 문제를 택한다. 2. 완성가능성.. 항목과 중복되는 부분. 학자들의 학술논문도 거의 없는 문제들은 주제로서의 가치도 희박한 법. 그러나 독창적인 주제와 이 항목을 혼동하여 판단하지 말 것.

* Author / Gathered from : 최윤호

예술 하고 계십니까?

어쩌다 들른 심스페이스란 곳의 발제문을 옮겼습니다.
대충 둘러보니 온라인 미술 커뮤니티인듯,,
썩 좋은 결과를 내고 있는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냥 ‘이런것도 있더라’라고 알려드리기 위해서.. ^^ 회원명단에는 많이 보던 이름들도 있습니다..

제가 임의로 굵은글자로 바꿨구요,
http://www.simspace.com 로부터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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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하고도 유일한 《심스페이스》의 비젼

오늘날 자의건 자의가 아니건 작가들은 사회로부터 적잖게 소외되어 있다. 점점 더 ‘예술’을덜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새로운 산업적 구조 속에서 작가들은 이전에 차지했던 권좌를 상실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산업화, 구조화되어 가고 있고, 그 흐름은 완전히 제도적으로 진행된다. ‘성공적인 예술’은 갈수록 더 설명이 난처한 개념이 되어가고 있고, 그럴수록 ‘성공한 예술가’의 개념이 그 자치를 차지해 가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기업의 기금들과 정부의 보조금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따라서 기회는 결탁한 전문가들, (좀 구식 표현을 쓰자면) 어용 작가들과 관료주의에 흥건히 젖은 이론가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흐름은 그 안에서 ‘예술’이란 것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안락한 물결 같은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이 거대하고도 도도한 흐름, 대학과 출판과 비엔날레 같은 체계 전반의 동원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조성되어지는 이 급류에 의해 점점 더 성형되어 질뿐인 하류의 돌맹이 같은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언젠가 곰브리치가 말했듯, 현대는 예술이란 식물을 키워내기에 적절한 토양이 아니다. 예술은 점점 더 그 의미를 왜곡시키려 다짐이라도 한 듯한 세계 안에서 위태로운 생존을 연명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를 빌자면 ‘예술 생산계’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현대로 올수록 예술생산이란 변별된 영역을 위한 최소한의 독립성조차 보장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소통의 황홀경’ 안에서 이끌기보다는 이끌려 가는 사람들의 부류로 재빠르게 밀려나고 있다. 그들은 영향을주기보다는 광고와 영화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부터 동일하게 영향받는다. 자신이 되려는 몰입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의지도 점점 더 이전처럼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지 못 한다.

역설적인 것은 이 희미해져가고 있는 가치들과는 상반되게 작품들은 점점 더 대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장기간과 더 많은 비용과 사람을 요구하는 것으로 되어가면서 점점 더 작가 혼자서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범주들을 넘어서고 있다. 작품생산이 점점 더 산업 생산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객들은 이전처럼 취향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취향을 대중매체에 위임하면서 인식의 파편화를 확인시켜 줄뿐이다. 그들은 그저 더 유명하고 알려진 것들을 품질로 간주하는 매체시대의 진실에 방치되면서 저널의 전략에 고스란히 넘어간다. 더구나 이젠 정보화의 시대다. 스스로를 네트웍에 노출시키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는 그런 시대. 소통은 더할 수 없이 활성화되었지만, 점점 더 한정된 네트웍에 가담해야만 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소통의 독점, 혹 독점적 소통이랄까, “어떻든 이제 쳐 박혀 있으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다!”

이같은 환경에선 스타급 작가, 거대한 상업갤러리, 그리고 유수한 미술관의 권위라는 색인표를 가진 식물들만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그리고 상황과 조건들은 이 몇몇 진정한 주체들에 의해 떡주무르듯 유연하게 조절될 수 있는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경매와 같은 미술시장 시스템은 이와 같은 질서들에 정당성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강화해 나가는데 최적의 조건들을 마련해 주고 있다.

21세기의 벽두인 이 시점은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 이전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세기초만 해도 신진 작가들은 그들을 모르는 척 하는 권력과 시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이곤 했다. 자신들과 자신들의 예술에 하등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카데미로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호흡을 같이 할 동료들, 화상과 이론가들을 찾았고, 왕래했으며 때론 밤을 세워가며 토론했다. 그렇게 피사로나 모네 인상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얼마 후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와 그룹이 출범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이었다. 젊은 작가들은 전쟁 중에도 취리히의 한 카바레에서 다다를 시작함으로써 이전엔 일면식도 없었던 프랑스의 화가와 아일랜드의 시인이 만날 수 있는 장을 스스로 마련했다. 그런가하면 에른스트나 달리 같은 화가들은 그들에게 이론과 문장을 제공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앙드레 부르통과 만났다. 이들 초현실주의자 동료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선술집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연애를 실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을 만인 앞에 알리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 작가들은 더 이상 모이기를 즐기지 않는다. 때론 의미부여조차 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점점 더 모임을 즐기지 않도록-혹 못하도록- 사회적으로 학습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동료들과 자리를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각자 철저하게 단절되는 것을 (이전과는 다르게) 창작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작가들과 이론가들, 이론가들과 화상들이 하나의 예술을 위해 모이는 일은 오늘날 지극히 드문 현상이다.

그들은 이제 다른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기다린다. 그렇다고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수록 그들 모두는 자신들에게 덜 관대해져 가는 변화된 환경에 더 절망적으로 포위되어 갈 뿐이다. 예컨대 작가들은 점점 더 눈치를 살피다가 운 좋게 캐스팅되는 배우들을 닮아가고 있다. 물론 작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사 같은 이론의 영역은 자진해서 대학 안으로 움츠려들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술사가건 기획자건 이제 어떤 호출을 기다리는 일들이 부쩍 늘었다. (이들 중 소수는 기다리는 대신 먼저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앞서 활용한다) 이 모두가 이전엔 분명 그들 손에 있었던 뭔가가 빠르게 보다 상위의 권위로 이양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대략 되어 가는 현상은 이렇다. 어떤 거대하고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있고, 작가와 같은 개인적인 전문가들은 너무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면의 진실을 목격하거나 그것과 대립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 흐름을 개인적으로 수용해 적절하게 내면화하거나 그러지 않거나(그럴 수 없거나)를 그나마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대다수는 자의건 아니건 전자를 선택한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들은 점점 더 개인화, 파편화됨으로써 불리해져 가는 계약에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노동자들을 닮아가고 있다. 이렇게 예술은 그 안에서 그 다양한 양상들이 벌어질 뿐인 생존의 영역으로 유입되고 있다.

반면, 그 흐름은 훨씬 더 우월한 박수갈채와 지원 안에서 스스로를 더 생생한 것으로 만들고, 개인적인 전문가들을 압박한다. 따라서 생각이 있는 작가와 이론가, 미술사가들이 이같은 환경에 대응하는 적절한 방식들을 찾아낼 확률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포기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와 명분을 더욱 쇠약하게 하는 쪽으로 기여함으로써, 작가와 이론가들의 개인화(파편화)를 더 부추길 수 있다.

그럼에도 작가와 미술사가와 평론가들과 미술 행정가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있다. 적어도 개인의 꿈과 그 양식화들이 이미 사회화된 그것들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표현이 지니는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겐 서로 자리를 함께 하고 나누는 것이 여전히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거나 드러낼 난처한 도전들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한 응전을 논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의 의미 같은 것….

그리고 원한다면 현시대 미술흐름의 난폭성과 조악성에 관해, 그리고 거의 노골적으로 표류하는 한국미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만나 각자의 두터운 생각들을 교환하고 내면화된 것들을 교류하며,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너나할 것 없이 서로 동료를 공감해야 할 동일하고 절박한 조건들에 맞서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실험들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몸에 벤 ‘예술의 전통’이 지시하는 것들, 즉 그 주체, 범주, 기능에 대해 재삼 헤아려 보는 자각으로부터 자신과 만나고 그것을 현재의 시간들과 교차시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진정으로’ 타자를 향하고 단절을 넘어서는 실험들에 이르기까지.

《심스페이스》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온라인 상의 한 가능성이다. 작가들과 이론가들과 감상자들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장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만남과 소통을 실현할 적절한 도구들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심스페이스》가 스스로를 출발시켰고, 또 유지해야 할 유일한 비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유의미한 출발을 앞서 포장할 필요는 없다. 《심스페이스》의 비젼은 너무나 필요한 것이지만, 이와 상반되는 상황과 조건, 심리들의 장벽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즉 장애들 속에서 소통과 만남을 꾀한다는 점에서 《심스페이스》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의 수단이며 방법론이다. 더 많은 작가들이 그 필요성에 공감하고 동참할 때, 비로소 그 유익함이 입증될 수 있을 하나의 방법론!
그러므로 현재로선 《심스페이스》와 같은 시도들이 조금씩이나마 성공을 거둠으로써, 예술에 대한 우리의 숙의들이 지속되고, 그것이 더 확대될 순 없을지라도 더 깊어질 순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볼 뿐이다.

심상용(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