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크라테스는 왕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왕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거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힌 왕의 반지를 높은 탑 위에서 바다로 던졌다.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던진 반지는 물고기가 삼켰고 물고기는 한 어부에게 잡혔다. 어부는 물고기로부터 찾은 그 왕의 반지를 다시 폴리크라테스에게 가져다주었다.
신들이 정한 운명을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것이며 여기서 반지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상징이 된다. 왕에게 내린 신탁, 인간과 신의 깰 수 없는 언약의 징표였던 것이다.
신화 속의 반지는 현대인의 판타지 속에서도 여행을 계속한다. 환상의 나라에 사는 난장이 종족의 한 청년에게 우연히 쥐어진 반지. 그러나 그 속에 이 세상의 모든 운명이 담겨있다면…
본래 악의 신이 주조한 이 반지는 세상의 어떤 힘도 당해낼 수 없는 마력을 가졌다. 그리고 무소불위의 그 힘은 어쩔 수 없이 세계를 장악하려는 악마의 손으로 다시 쥐어질 운명에 놓인다. 이제 세상을 구하는 일은 처음 그것이 주조된 거대한 화산의 용암 속에 다시 던져 넣어 반지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일뿐이다. 청년은 반지를 품을 채 친구들과 함께 동쪽 운명의 산을 향해 목숨을 건 환상의 원정을 떠난다.
우리 말의 ‘반지(斑指 혹은 半指)’는 본래 두 짝으로 이루진 가락지(쌍가락지)의 한쪽 ‘반半’ 을 의미한다. 부녀자들은 주로 가락지를, 처녀들은 주로 반지를 끼었다고 전한다. 가락지는 양반 집에서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 친정어머니로부터 딸에게 가보로 전해졌고 부를 자랑하는 패물로 간직되었다.
금, 은, 구리 등으로 제작되고 칠보로 장식되기도 한 전통의 반지들은 그 자체가 풍부한 시각적 산물이며, 손의 움직임 위에서 타인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치장물이 되었다.
반지는 또한 각종의 길상 문양을 새기고 장식한 기복과 염원의 매개체, 상징물로의 기능을 담당했다. 가락지는 주로 손가락에 착용했지만 옷고름에 달기도 했다. 이중 월패라고 불리웠던 옷고름에 단 반지는 아녀자가 남편에게 자신의 생리를 알리는 수단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반지에는 애환도 많다. 고려시대에는 부녀자들이 몽고에 끌려갈 때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반지를 정표로 받아 끼고 갔으며 고려 여인들의 이 가락지는 몽고에서 곧 대유행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각종 사화로 인해 화를 입고 뿔뿔이 헤어지는 가족들이 모두 가락지를 신표로 나누어 가졌다가 후에 죄가 씻어지면 혈육을 찾는 증거물로 삼았다.
아녀자들은 남편이 죽을 경우 가락지 한 짝, 즉 반지 한 개를 관에 넣고 나머지 한 짝은 옷고름에 달아 여생 동안 어루만지며 한을 달랬다고 한다. 저 세상에 가서 짝을 찾을 때 신표가 되리라는 기대도 했을 것이다. 조선의 반지는 이 같은 이유 등으로 대부분 쌍雙으로 제작되었다고 짐작하며 착용성보다는 비교적 큰 사이즈로 두툼하게 제작되어 오래 간직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반지의 뿌리는 매우 깊다. 고대 이집트의 청동기 문명에서부터 발견된 반지는 금, 조개, 돌 등의 소재로 제작되어 권력과 부의 상징물로, 시각적 예술품으로 의미를 더해갔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만인 앞에서 자신의 반지를 벗어 후계자에게 끼워줌으로써 권력의 승계를 공표했다고 한다.
반지는 또한 도구적 기능도 수행했다. 권력의 구체적 집행이라 할수 있는 봉인封印을 위해 역시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된 인장 반지가 서신, 문서, 소유권 등에 사용되었다. 봉납(봉해지는 부분에 밀납을 녹여 붙임)과 도장 반지의 전통은 서구에 지금까지 이어진다.
히브리와 이집트의 셈족 그리고 로마인들에게도 반지는 신분의 구체적인 표징이다. 손가락 위의 착용은 자신이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계급임을 상징하였고 이는 서양의 성직자, 귀족들에게 이어졌다. 재료 자체도 신분을 상징해 로마의 경우 원로원 의원은 금, 일반 귀족은 은, 노예는 철반지를 끼었다고 한다
중세의 성직자들에게는 그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돌(보석)의 사용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르네상스의 반지는 조각, 돋을새김, 칠보, 보석세팅 등으로 역사상 어느 시기의 반지보다도 화려했다. 영국의 헨리8세 왕은 234점의 보석반지를 애용하면서 방문객들에게 마음껏 자랑했다고 한다.
여섯 명의 왕비와 결혼해 세 명의 왕비를 처형했던 그가 어떤 반지들을 끼고 이 일들을 맞이했을까 궁금하다. 반지는 그에게도 카리스마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16세기경 이후 유럽에서는 여러 가지 글이나 이니셜, 경구 등을 반지 표면에 새긴 포우지 링posy ring이 나타나 종교적 맹세, 애정, 약속, 신의의 상징으로 유행한다. 모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글귀는 대표적이다. 이들 글과 함께 반지 속에 공간을 만들어 죽은 자의 머리카락이나 유골, 향, 약 등을 담기도 했다.
그러나 반지가 일반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장신구의 대명사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결혼과 약혼으로 대표되는 의식의 징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반지가 결혼과 관련지어 사용된 문헌상의 기록은 로마시대로 소급된다.
이 시대에는 약혼서약의 증표로서 반지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주로 단순한 금가락지 혹은 철반지를 사용했으며 신부는 이를 왼손에 착용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때 반지는 치장보다는 배우자에 대한 신의 혹은 귀속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서약의식의 증표는 그 많은 장신구들 중에서도 왜 반지일까? 그것은 그리스 로마 문명에 영향을 준 바빌론과 이집트문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 그 연원을 갖는다고 한다.
하나는 태양신의 상징으로서 원형, 동그라미가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불멸성과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왕권의 상징인 인장의 기능을 가진 것이 반지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신탁에서부터 형성된 절대 권력의 징표인 반지가 교회와 의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속으로 내려와 사랑과 언약의 징표로 바뀐 것이다. 이보다 의미 있는 상징이 있을까?
한편, 결혼반지의 전통은 유태인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유태인의 결혼과 약혼식의 반지사용 풍습이 기독교를 승계한 초대 로마교회의 의식으로 관행화 되면서 점차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는 설이다. 교회의 혼인과 반지사용은 수도원 내에서 동정녀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어 신과 자신의 일치를 상징하는 서원반지로서 수녀들이 착용하기도 한다.
근대 산업시대 이후의 반지의 여행길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묶던 상징과 미의 징표는 어느덧 대량 소비시대의 상업주의와 결속하면서 짙은 화장을 시작했다.
많은 이들에게 반지는 바로 귀금속과 보석의 동의어가 되었으며, 이제 각종 기념일과 반지의 역사성, 그 장식적 품위를 가장 열심히 말하는 사람들도 드비어스 사원들과 광고업자들이 되었다.
각종의 보석반지와 캐러트 등급은 새 시대의 유산계층을 지시하는 계급장이 되어 백화점의 쇼케이스에서, 여성잡지에서, TV광고에서 선정적으로 몸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 소비의 다른 반대편 끝에는 선진 자본들이 파헤친 아프리카의 보석 광산들과 원주민들의 노동, 각종 이권이 야기하는 분쟁과 피흘림의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 있음을 우리는 본다.
이것이 또한 현대의 공예가들과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독자적인 장신구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업주의와 대량소비시대에 반성적 계기를 마련하면서 세계 여러 곳의 개인공예가들과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미감과 수공기술을 통해 반지와 장신구를 제작하고 있다.
중세의 연금술사alchemist들이 그렇듯이 이들은 물질의 차원을 끊임없이 높이려는 자들이다. 산업시대의 끝자락에서 가장 즉물적으로 전락한 장신구들 위에, 잃어버린 정신의 세계, 미적 체험의 다양성을 제시하며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3회를 맞아 특별전으로 마련한 알케미스츠전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우리의 공예문화를 이끌 젊은 작가와 디자이너들 그리고 국내 정상의 장신구작가들이 한 자리에서, 반지라는 공동의 유산을 해석하며 그들의 상상력과 조형능력을 함께 드러낸다. 작가들간의 나눔은 또 다른 생산자들 – 특히 대량생산자들 – 과의 나눔으로 이어져 우리의 장신구문화에 작지만 의미 있는 파동을 만들 것이다.
이 반지특별전은 또한 가나아트의 믿음과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양한 미술적 소재와 문화상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젊은 작가들을 과감하게 발굴하려는 의지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88인의 작가들이 빚은 반지의 영토, 700개의 형상과 상징과 이야기를 만나보자. 그리고 우리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롭기를 기대해보자.
글/전용일
(2002 알케미스츠전” 700개의 언약, 반지특별전” 서문)
* 반지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황호근, 클레어 필립스의 저서들; 장성희, 김승희의 학위논문; 이완희사제의 인터넷글 등에서 인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