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의 미 – 퍼온 글

야나기무네요시와 한국의 미 그리고 신간 ‘인간부흥의 공예’와 관련된 글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당시로선 극히 이례적인 글이 실리게 된다. 일본 문화는 조선의 은혜를 입었다는 파격적 주장이었다. 나라(奈良)박물관의 전시품만 해도 그걸 증명하고 있지만,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 문화를 죽이고 있다는 개탄도 담겼다. 폭탄선언 ‘조선인을 생각한다’를 쓴 이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였다. 도쿄대 출신의 종교철학자이자 휴머니스트가 그였다.

이듬해 동아일보가 그 글을 전재하며 야나기는 ‘한국인의 친구’로 성큼 다가왔다. 그 글과 ‘한국의 벗에게 보내는 글’등을 모은 단행본 ‘조선과 그 예술’ (1922년)을 펴냈던 야나기의 활동은 과연 고맙기 이를데 없었다. 과장이지만, 그가 없었더라면 얼마전 광화문 앞 월드컵 개선식도 불가능했다. 당시 광화문 해체 움직임에 급브레이크를 걸었던 공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있다. 그 야나기는 분명 아마추어 미술사학자였다. 한데도 그의 어설픈 미술이론은 과도한 영향력을 해방 후 반세기 넘은 지금까지도 행세해오고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가 주창했던 민예론은 선사시대 이후 한국미술 전체의 특징을 설명하는 거대이론으로 격상됐다. ‘무기교의 기교’ ‘질박한 아름다움’ ‘백색(白色)과 곡선으로 이뤄진 슬픔의 미학’…. 어디 많이 들어본 말들의 원산지가 바로 야나기다. 그게 왜 잘못인지 어리둥절하시다고? 당연하다. 그건 ‘교육이란 이름의 최면’ 때문이다. 미술사 분야의 최고학자들인 우현(又玄)고유섭, 삼불(三佛) 김원룡, 그리고 전 국립박물관장 정양모 등이 야나기 이론을 확대 재생산해온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의 찬양 속에 식민지 시절 아마추어 학자의 ‘정확지 않은 칭찬’ ‘잘못된 덕담’이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걸 밝혀준 것이 지난주 일간지에서 두루 소개했던 이데카와 나오키의 저술 ‘인간 부흥의 공예’ (학고재)였다. 기억해둘 것은 또 있다. 지난해 말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가 펴낸 책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월간미술)이 그점을 정면에서 지적했다. 그렇다. 강우방과 이데카와의 지적대로 ‘슬픔과 곡선의 미학’ 따위란 거의 완전한 억지다. 왜 그럴까. 야나기가 푹 빠졌던 공예 등이란 미술사의 주류가 아니다. 외려 불상.회화 등 파인아트의 걸작품들에서 미술이론의 핵심을 도출해야 하는데, 그것부터 잘못됐다.

‘한국 미술=슬픔과 애수의 미학’이란 등식은 더 어불성설이다. 한국인 특유의 못말리는 생명력 내지 에너지는 과연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를테면 월드컵 때 터져나온 에너지가 한국 고유의 것이다. 고대 이래로 우리에겐 무언가 혼란스러울 정도의 에너지가 있다고 봐야한다. 흰 옷? 야나기는 흰옷에서 슬픔의 미학을 이끌어내려 했지만, 그건 망발이다. 아랍.인도 등지에서도 흰옷을 입지만, 그걸 슬픔의 미학으로 포장하려한 시도는 유례가 없다. 따라서 야나기의 이론에는 싱싱한 인간의 냄새가 증발했다는 지적이 이 참에 터져나온 것이다. 암묵적으로 ‘유약한 한국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는 혐의도 없지 않다.

자, 결론을 내리자. 강우방과 이데카와의 책 두권의 문제제기는 간단치 않은 파장을 안겨준다. 우선 인문학의 꽃 중의 하나인 미술사, 특히 한국미술사란 거의 전면적으로 새롭게 연구돼야 한다는 점이다. 또 있다. 학문도 때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허위의식의 집적물’일 수도 있으니 그걸 경계할 필요도 있다. 지난 시절의 연구를 재검토하는 건 이제 ‘충분한 시간을 번’ 우리 시대 지식대중들을 포함한 젊은 미술사학자들의 몫이다. 털어놓고 말하자면 지금도 한국인들 사이에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패배의식이 상당부분 존재한다. 그것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야나기 등 식민지 시대의 검증되지 않은 학문적 가설에 주눅들었던 결과물일수도 있으니까.

조우석 출판팀장(중앙일보)

글쓴이

최 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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