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

일상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 – 사회민주주의의 생활습관과 윤리가 돋보였던 스칸디나비아의 첫 인상에 관하여
– 박노자

노르웨이에서 보냈던 초기의 날들은 필자에게는 놀라움과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그 정도로 폭력과 규율이 배제된 사회란 과연 있을 수 있을까?”라는 놀라움을 떨쳐버릴 수 없음과 동시에, “이 나라의 시민이 이토록 행복한데, 왜 한국의 국민은 지금처럼 고생해야 하는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은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물론, 1인당 국민소득과 국토면적, 그리고 국제체제에서의 위치상으로, 노르웨이와 한국을 단순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자를 서글프고 억울하게 하는 것이 양국간의 부와 사회제도 차이에 의한 절망감 때문만은 아니다. 타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태도, 그리고 일상생활의 개방성과 이른바 ‘진보성’이 사회·경제적인 여건뿐만 아니라 국민의식, 사회통념에서도 기인되었음을 말하고 싶다.

노르웨이에 온 첫날부터 오슬로 시내에서 왔다갔다해야 했던 필자가 맨 처음 놀란 것은,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훨씬 더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대학의 경우에는, 학생·직원·교수들은 너나없이 거의 모두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자동차를 끌고 나가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체력 쇠약 등의 이유로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 대중교통을 사용한다. 자동차에 대한 이러한 혐오증은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 일차적으로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보편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과시적 소비는 완전히 무의미

(사진/검표기기가 없는 오슬로의 전철역. 그러나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무임승차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사실, 오슬로의 공기가 서울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깨끗하고 수돗물도 안 끓이고 그냥 마신다는 것이, 이러한 환경의식 덕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회적인 이념의 차원에서는, 자기 개인의 편리함보다 전체 공동체의 공익(즉, 대기오염 문제)부터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아식 사회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자동차를 안 타도 되게끔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도 이 사회민주주의의 윤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스칸디나비아사회에서 자신의 부(富)를 과시할 필요도 없고, 과시하면 안 된다는 게 상식이다. “나도 중산층”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 되도록 더 비싼 자동차를 산다는 이야기는, 이 사회에서는 과거 70년 전의 사회민주주의 개혁 이전 일로 들린다. 빈부 격차가 아직 있었던 그 당시의 노르웨이사회에서도 과시적 소비가 의미있었지만, 현실과 이념상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지금의 노르웨이에서는 완전히 무의미하다. 그리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상황에서 자동차 기름을 돈들여 산다는 것은, 근검절약에 익숙한 노르웨이인들에게는 괴이한 이야기로 들린다. 광고 등의 세뇌 수단을 통해서 시민들에게 자동차 구매를 사실상 강요하고 있는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노르웨이에는 없다는 것도, 환경과 시민 건강증진에 크게 도움이 된다.

자전거로 가기 어려운 장거리면, 오슬로 시민들은 보통 지하철, 버스, 전차 등의 매우 다양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이 대중교통에 대해서 필자가 가장 놀랐던 것은, 검표제도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지하철역에서는 검표기계가 아예 설치되어 있지도 않다. 매표 여부를 검사하는 매표소 직원들도 전혀 안 보인다. 자동 매표 기기에서 표를 사서 스스로 이를 한번 찍어 바로 승차하면 된다. 차 안에서 검표하는 보안요원들이 드물게 나타나지만, 노르웨이에서 5개월 이상 살았던 필자도 그들을 딱 한번 만났다. 무임승차를 계속해도 벌금이 물릴 위험성이 없는 이 상황에서도,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무임승차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차를 놓치면서까지 자동 매표 기기에서 꼭 자신의 표를 꼼꼼히 찍는 ‘작은 의인’들을, 필자가 몇 차례에 걸쳐서 목격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서 “남의 것을 훔치면 천벌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대다수 노르웨이인들의 종교 심성도 엿보이지만, 그것보다도 “공익에 해를 끼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회민주주의의 윤리가 읽힌다. 국가가 시민들의 의식의 성숙성을 믿어 매표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르웨이사회 내에 국가와 시민 사이의 ‘상호 신뢰도’가 어느 정도 높은가를 잘 보여준다.

버스기사 월급이 교수와 비슷

(사진/노르웨이의 버스운전기사. 자기 직업에 대한 그의 긍지는 정말 놀라웠다)

지하철 이외에 많은 시민들은 버스를 사용한다. ‘버스’라고 하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승객이 가득 찬 ‘만원 버스’가 덜컥덜컥 돌진하듯이 질주하는 광경이 생각날 것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버스를 탔다가 그 갑작스러운 시동이나 급정거에 넘어지면서 “아니, 저 기사 아저씨가 화가 나 있는가? 왜 운전을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하나?”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을 가진 적이 많았다. 그리고 필자말고도 ‘한국 버스’와 접해 본 많은 국내 외국인들은 기사들의 불친절에 적지 않은 모욕감을 느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운전기사라는 직업 자체가 워낙 고된 노동이라서, 부드러운 운전을 하거나 승객들에게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 버스를 몇번 타보니 그 생각이 굉장한 단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운전기사들은 운전도 부드럽고 여유로운 자세로 할 뿐만 아니라 승객들에게 길을 매우 자세히 가르쳐주고 외국인이면 노르웨이 이야기도 유창한 영어로 해줄 만큼 직업과 고객에 충실하다. 한국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여기에서 모르는 장소를 찾아갈 때, 가장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기사들의 설명과 충고들이다. 이러한 차이가 왜 생겼을까? 민족윤리나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에서 주객 의례가 유럽보다 훨씬 더 발전되었다는 사실까지 상기한다면, 더욱 신기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점에서 바로 ‘자본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와 ‘노동·소비자 중심’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차이를 잘 느낄 수 있다. 돈도 없고, 돈으로 사는 교육도 잘 받지 못한 운전노동자가 천시를 받고 살아야만 하는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의 정글’과 달리, 노르웨이에서 운전기사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매우 귀중하게 여겨진다. 기사 자신들도 승객의 생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기사에게는 잔업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기사의 월급은 대학교수나 정부 공무원과 대충 비슷하거나 약간 높다. 그 어렵고 위험한 노동의 가치를 사회가 그만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이러한 인정에 대해 기사는 예절과 직업에의 충실로 보답한다. 만약에 한국 기사들에게 노르웨이 동료들이 받고 있는 사회적 존경과 보수가 주어졌다면- 아니, 기사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라도 조금 바뀌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이 버스 안에서 신경질적인 반말소리가 들리겠는가? ‘노동 중심’의 사회가 의식상으로라도 되지 않고서는, 노동자에게 자존심과 타인에 대한 예절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노르웨이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거장 근처에서는, 보통 신문, 잡지 등과 간단한 음식을 파는 작은 상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문이 놓여 있는 곳을 볼 때마다, 필자는 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규모가 작고 시내와 아주 먼 상점이라 해도 보통 소수만 보는 공산당 신문이나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의 다양한 신문들이 꼭 나열되어 있었다. 인접 스칸디나비아 국가인 스웨덴, 덴마크의 신문들이 보이지 않은 데는 아예 없었다. 보통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는 영어 이외에도 또 하나의 유럽 언어(독어, 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일반 노르웨이 사람들이, 지리적·문화적·이념적으로 아주 다양한 자료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노르웨이에서도 몇종의 상업적인 보수 일간지가 열독률이 가장 높지만, 다양성이 보장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보수 언론들이 왜곡된 보도로 노골적인 혹세무민을 할 가능성은 없다. 이념적으로 이질적인 신문이나 외국 신문을 일반인들이 평소에 읽는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한국에서 국제 정보 고립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원죄만으로…

(사진/자그마한 변두리 상점의 외국 신문들. 보통 소수만 보는 공산당 신문이나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의 다양한 신문들이 함께 나열되어 있다)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 대화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나, 버스운전기사들이 승객과 여유로운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매일 지켜보면서, 필자는 한 가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한국 국민이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봉건적인 자본주의의 멍에 밑에서 신음해야 하는가? 만약 객관적인 여건상 지금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로의 이동이 불가능하다 해도 왜 돈없고 교육없는 약자는 그토록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기죽어 살아야만 하는가. 노동에 대한 천시, 약자에 대한 괄시는 민주사회주의 건설 뒤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국민의식개혁을 통해서 근절시킬 수는 없을까. 노르웨이의 여유로운 노동자와 똑같은- 아니, 사실 훨씬 더 많은- 고생을 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르웨이가 아닌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원죄만으로 왜 인간적 존엄성을 빼앗겨야 하는가. 하루빨리 그들에 대한 사회의식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역사의 컴컴한 터널 속에서 해방의 새벽을 몇십년, 몇백년 동안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필자는 행복한 노르웨이 노동자를 만날 때마다, 기업주와의 잉여가치의 불평등한 분배와 사회적 멸시, 가난, 그리고 살인적인 경쟁 밑에서 마음의 날개를 마음껏 펼 수 없는 한국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치 떠오르는 것이다.

글쓴이

Yoonho Choi

independent researcher in design, media, and locality & working as a technology evangelist in both design and media industries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