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사 거리는 이미 중국의 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수도 라사에서 머문 지도 일주일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루었던 포탈라궁으로의 산책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도 인도의 타지마할같은 유명한 건축물들은 나에게 완벽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었기에 그 유명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보다는 시장 구석이나 한가로운 골목들을 돌아다니는데 더 몰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보고난 후의 실망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한 나는 쌀죽과 중국식 만두 두어개를 아침으로 먹고난 후 걸어서 30여 분 거리의 포탈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거리는 번화했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의 식당과 옷가게들, 그리고 외국의 유명한 전자회사와 스포츠상품 메이커들이 이미 라사 시내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습관적으로 개업 행사에 동원되는 도우미들이 댄스음악에 맞춰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새로 지은 듯한 쇼핑센터 앞쪽에는 바람을 불어넣은 홍보용 인형이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 팔 펄럭거리는 인형 말입니다..)
포탈라 궁성이 보였습니다. 그 옛날의 웅장했던 자취가 아직 가시지는 않아보였지만 한쪽에서는 외벽을 치장하는 중국 정부의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앞 광장에는 말로만 듣던 새로 생긴 호수공원이 있더군요. 그 호수공원은 중국정부가 의도적으로 포탈라에 대한 경외심을 약화시키기 위해 만든 것 중의 하나인데 예전의 넓은 광장을 파서 인공호수를 만들고 보트를 타는 유원지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사실 라사의 여행자들이 수군거리는 말 중에는 이것 말고도 포탈라궁전 맞은 편의 텔레비전 송신탑 얘기가 더 유명합니다. 역시나 포탈라 지붕의 높이보다 일부러 탑 끝을 높게 만든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유치한 식민지에서의 악행의 흔적들이 없는 것이 아니어서 그리 기분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사원에 가면 모택동의 초상화가 벽면에 그려져 있고 ‘인민 해방 만세’라고 쓴 표어를 보게됩니다. 물론 중국 개방 이전의 문화혁명 때 이루어진 것들로 보입니다.
이렇듯 티벳의 유명하다는 도시의 문화와 경제력은 이미 중국에서 이주해온 중국인들에 의해 잠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무기로 티벳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어찌보면 순진한 티벳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은 이미 없는지도 모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달라이라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장기적으로 티벳 민중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승왕제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인도의 다름살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라마는 국가의 재건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부여받은 자신의 권위마저도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탈라궁 사진은 제가 이번 여행에서 찍은 사진 중 기억이 오래 남는 사진 중 하나입니다. 공사장의 노동자들과 겹쳐진 포탈라의 모습과 광장의 오성홍기,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도 보도블럭 위에서의 오체투지를 계속하던 티벳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때가 아마도 중국의 올림픽 유치로 아시아권이 떠들썩할 때였습니다.
포탈라 궁전을 비롯한 티벳 내의 라마교 사원들은 중국 침공 후 폐쇄되었다가 1980년을 전후해서 관광 진흥 정책과 함께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 다시 참배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티벳 내의 독립 세력에 대한 견제를 계속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많은 사원들의 승려 인원은 예전의 수준을 크게 밑돌고 있다고 합니다.
아래 글은 어느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티벳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첨부합니다.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을 받은 해, 달라이 라마는 열여섯 살이었다. 13세기 중엽 몽고군의 침입으로 청나라 시대까지 진행된 중국의 티베트 진주는 꽤나 오랜 정복의 역사이다. 근대에 접어들어 러시아, 영국 등의 열강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면서 달라이 라마 13세의 티베트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티베트의 영유권을 선언한 중국 공산당은, 1951년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달라이 라마 13세의 죽음과 함께 다음 대 달라이 라마로 선출된 14대 달라이 라마는 통치권자로서 전권을 위임받고, 티베트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의 중국 지도자들과 협상을 나누면서 티베트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그의 정치적 역경은, 위대한 자연과 부처의 존재 안에 머물러 있던 어린 소년을 크게 성장시켰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 고립된 왕국으로서 신의 말씀 안에 살았던 평화로운 이 나라가 격동의 현대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발언권은 극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59년 자신들의 달라이 라마를 지키기 위한 티베트인들의 봉기가 라싸에서 일어났다. 중국의 식민적 수탈과 정치적 탄압에 항거하여 티베트 국민들이 일제히 봉기했을 때 당시 6,000여 불교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12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학살되었다. 당시 젊은 나이의 달라이 라마로서는 고난 앞에서 국민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기가 충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 남아 티베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애정어린 호소에 그는 결국 인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40여 년에 걸친 그의 망명생활은 자유와 평화를 향한 쉬임없는 고행의 길이었다. 이 엄청난 민족적 비극 아래 비폭력을 신봉하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고뇌와, 현실적 폭력을 외면할 수 없는 정치 지도자로서 달라이 라마는 어떠한 사상적 편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는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억압받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세계평화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상을 받게 된 것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상이 변화를 위한 비폭력주의적 실천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세운 마하트마 간디에게 바쳐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분의 비폭력주의적인 삶은 저에게 교훈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욕망을 버리고 영혼의 정화를 갈구하는 티베트인들, 그러나 종교는 아편이라고 믿는 중국정부의 티베트 점령은 한 고립된 국가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중국 당국은 지금도 여전히 티베트의 민족적 문화적 고유성을 파괴하려는 계획적이고도 치밀한 책략을 시행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에게 있어 신앙은 생활이자 정신이다. 수많은 티베트인들을 이끌고 히말라야의 고지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운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고유문화의 보존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비폭력 평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 라마는 수상을 계기로 티베트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비폭력주의 노선에 입각한 그의 평화사상은 전 세계인의 지지를 받아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는 우호적인 전 세계 인류를 동지로 확보할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 – 티베트에서 온 편지> 중에서 (매튜 번슨 지음 ; 혜윰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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