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졌다. 날씨

와,, 오늘 날씨가 많이 추워졌네요. 의류가 부실한 저로서는 또 들어갈 옷값에 걱정만 앞서네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추운걸.

누가 그러더군요. ‘굳이 풍자를 하지 않아도 코메디가 되어버리는’것, 그놈의 정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처럼 느껴져 안타깝습니다. 더욱 회의적인 것은 그런 일들이 과연 ‘희망’을 전제에 두고 있는지가 점점 의문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부러 ‘이제 신경 안쓸래’ 라고 생각해도, 결코 신경 안써도 될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을테지만 때때로 그런 일들에 대해서 무덤덤해질 수 있도록 요리조리 생각의 범위를 조절해보고있긴합니다.

내년 봄에는 새로운 희망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전쟁 발발시, 하루 4천회 북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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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국제부와 모스크바 주재특파원을 지낸 이장훈 기자가 (미래 M&B 간)라는 주목할만한 저서를 펴냈다.

저자는 저서에서 미국의 매파들이 북한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작전 시나리오로 이미 ‘OPLAN 5027-03.04등을 구체적으로 마련한 상태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이 양면을 바다로 접한만큼 내륙국이었던 이라크에 행했던 하루 8백소티(sortie, 출격)의 공군기 출격의 다섯 배에 달하는 하루 4천회 출격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미군과 한국군은 북한을 30~60일에 결정적으로 패배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네오콘은 이런 전략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전쟁이 발발하면 희생될 수많은 민간인들은 그 현실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2백29쪽)고 강하게 비판했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 ‘네오콘’의 정체 밝혀

이 책에는 이밖에도 많은 충격적인 사실과 분석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세계평화를 무시하는 ‘깡패국가’를 응징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유지·확대하는 게 우리의 이상”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미국의 강경한 신보수주의자들을 일컫는 ‘네오콘’(Neocon)의 실체와 궁극적인 목표를 다양한 자료와 치밀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 핵심 부문에 다수 포진하고 있는 네오콘의 대부분이 유태인이며 뉴욕 등 동부지역의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로서 군사, 외교, 학계, 언론 등의 분야에서 학연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도 서로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다”며, 이들은“일종의 클랜(clan:일문) 또는 커밸(cabel:도당)”같은 성격의 집단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젊은 시절엔 좌파에 몸담거나 민주당원이기도 했지만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80년대에 ‘미국의 힘’에 의한 정의를 외치며 냉전을 승리로 이끈 후 그를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여기고, 클린턴이 집권한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간주하고 있다.

네오콘은 클린턴 집권 기간 동안에 학계와 싱크탱크로 물러나 있다가 조지 W.부시가 대통령에 집권하자 행정부와 언론의 전면에 나서며 ‘미국의 21세기’라는 군사적 우위를 기초로 한 강력한 대외전략을 밀고 나가려 했으나 전통적 보수주의자인 ‘온건보수세력’의 견제로 제대로 이를 추진하지 못해왔다.

하지만 미국 역사상 첫 본토 공격인 9.11테러를 계기로 여론이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고 이후 전면에 나서 미국과 세계를 자신들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게 하고 있다.

‘영구전쟁’의 정치철학과 선제공격으로 무장

저자가 분석한 네오콘의 사상적인 뿌리는 정치철학과 군사정책이라는 두 갈래로 나눠진다.

이들의 정치철학은 레오 스트라우스 시카고대 교수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스트라우스 교수는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하며, 평화는 인간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영구평화보다는 영구전쟁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긴 인물로 네오콘도 자신들을 스스로 ‘스트라우시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오콘의 무력을 기반으로 한 군사중심적인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 사람 역시 시카고대학 교수 출신으로 핵 전문가인 월 스테터. 그는 MD(미사일방어)체제의 구축이나 선제공격에 입각한 새로운 군사전략의 바탕이 되는 이론을 정립한 인물로, 네오콘은 그의 이론과 생각에 기초하여 중국을 잠재적인 적국으로 두는 MD체제와 이라크나 북한 같은 ‘불량국가’들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서고 있다.

네오콘의 실질적인 목표는 단순한 시오니즘이나 아랍문화에 대한 기독교문화의 혐오뿐 아니라 석유 등 에너지 자원에 대한 통제와 ‘달러화’로 대변되는 미국 중심의 세계경 체제 유지에 더 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군사적 압박을 통해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루려 하고 있다.

월포위츠 국방 부장관 , “독재자 혐오한다”며 전두환 지원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네오콘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부분이다.

저자는 네오콘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이 스스로 “독재자를 혐오한다”고 자주 발언하고 이라크 전쟁역시 “후세인이라는 독재자라는 몰아낸 것”이라며 침공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 혹독한 군사독재가 이뤄지던 80년대에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역임하며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환대한 인물임을 상기시킨다. 저자는 “월포위츠가 말하는 독재자에 대한 혐오감은 그 독재자가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이라는 단서조항을 붙여야 할 것”이라고 꼬집고 있다.

이 책은 또 월포위츠가 차관보 시절 중국의 한반도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와 남북관계의 진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막아낸 ‘장본인’이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월포위츠는 1983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시절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이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을 막은 바 있다. 최근 비밀 해제된 국가안보문서에 따르면 덩샤오핑이 남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베이징에서남북정상회담을 열자고 남북한에 각각 제안했으나 월포위츠가 이를 거부하도록 남한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2백18쪽)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결론은 간단하다. 이제 우리의 대외정책은 ‘네오콘’으로 대변되는 미국이나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강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의한, 한반도를 위한, 한반도의 대전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3 London Design Festival (1)

Core 77에 방금 올라온 2003 런던디자인축제(2003 London Design Festival)의 리뷰기사를 몇회에 나누어 번역 개제합니다.

번역은 이해되기 쉽도록? 아주 많이^^ 변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_-;;

글 : Human Beans / CORE77
번역 : SSALLZIP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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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London Design Festival

9월부터 속속 개최된 디자인 행사들의 행보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똑똑한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부끄러워하지않는 창조적인 디자이너들이 가득한 그 본거지에서, 일련의 혁신을 더욱 더 증폭시키는 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바로 2003 London Design Festival.

런던이 창조의 도시라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랬다. 우리는 저번주에 과연 어떤 일들이 런던에서 벌어졌었는지를 생각하며 위축된 디자인 산업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수의 디자인 비지니스가 살아있는 맨체스터로 돌아갔다. 디자인, 패션, 필름광고와 같은 것들은 지배적으로 런던을 기반으로 하고있다. 애석하게도 런던에 당신은 해마다 돈을 기부해야 할 판이다. 침체된 영국 경제에 더하여, 그 경제적인 부분과도 멀어지고 있는 런던. 해마다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디자인 학교들은 수많은 새로운 졸업생들을 마구마구 배출하고 있다.

문을 연 영국의 디자인 페스티발은 새로운 전시들로 채워진 디자이너스 블록과 여러가지의 컨퍼런스들과 같은 행사들이 모여져 구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많은 부분들은 개선의 여지를 남겨두고있다. 예를들면 The new jewel of the crown과 the World Creative Forum등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엉망이다. 1250파운드 + 세금인 티켓, 누구도 갈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티켓들은 분명히 가격이 너무 높으며, 명백히 디자이너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리 흥미롭지도 않다. 그런 누구도 찾지 않을 행사들은 감동적이지도 않고 기억에 남을리도 없으며 반쯤은 빈것 같은 깡통과 같다.

격정적인 한주가 지나고난후 디자이너들은 마지못해 회사로 돌아갔다. 공짜맥주들과^^ 열정적인 그들의 봉사는 거의 집단적인 저항(행사의 끝남을 아쉬워하는)을 무마시켰다. 당신을 위해서 이제 런던 디자인 축제 2003을 보여드리겠다.

Future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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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인스티튜트는 다섯개의 디자인 학교들의 모임이며, 이번에 참신한 느낌으로 도시들을 채우기 위한 많은 것들을 이뤄내었다. Future Map은 그 행사의 최고의 전시였으며 많은 이들을 다양한 디자인 학교들에서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들로 인도했다. 여기서 보여진 것은 정말 굉장한 Dress and Cat Hat이라는 작업이다. 이 작품은 성 마틴 디자인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하는 유리카 오하라씨의 작품이다.

Ceramics from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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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역시 성 마틴 디자인대학의 조지 딘의 “Ceramics from Memory”이라는 작품.
선반위에 놓여진 형태들, 즉 주전자와 그릇들은 사람들에게 기억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던 그 형태에 기초를 두고 있다.

DESIGNERSB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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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이나 된!! 강력한 디자이너스 블록이라는 행사는 이번주에 열린 행사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다. 매년마다 반(semi)추상 혹은 부분 개조의 형식으로 열리고있는 이 행사는 동방의 끝에 있는 정신적인 고향으로 돌아갔다.

디자이너스 블록을 구성하는 부분부분의 전시는 대량판매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쿄와 서울, 그리고 밀라노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경험과 희망에 찬 젊은 디자이너들이 이루는 국제적인 커뮤니티 속으로 우리들을 실증적으로 인도하고있다.

우리는 완벽하게 발전되지 못한 출품작들의 아이디어들에 대해서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디자이너스 블록에 참여한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이뤄낼 다양한 실험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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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스블록의 지하층에있는 Oxygenator를 구경하는 것은 마치 미래를 발견하는 것과 같았다.

날개들은 네개의 형광 튜브로 바람을 통과시키며 그 속에는 수경재배되는 잔디가 자라고있어서 그 튜브를 통과한 공기에 산소가 더해지는, 그야말로 인공 산소발생기였다.

우리는 나중에 어떻게 잔디를 베어낼 것인지 알 수 없고 그것이 실제 상품화가 될런지도 알 수 없으나 그 발상을 원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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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bottle 재생 시스템은 아르헨티나의 제품디자이너인 Miki Friedenbach & Asoc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것은 단지 보기 좋은 디자인 작업은 아니다. 이 도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플라스틱 페트병을 나선형으로 잘게 잘라낼 수 있으며 잘라낸 가는 섬유와 같은 플라스틱 선을 모아서 빗자루나 전등싸개등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아이디어는 현재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상품화를 진행중이며 이미 많은 곳에서 상업화 제의를 받고있는 상태이다. 디자이너들은 현재 제품의 질을 더 향상시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음료회사와 접촉을 시도하고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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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됩니다.

Anything Goes Design Follows

Tokyo Designersblock 2003 By Hiddenart

Just back from Tokyo Designersblock 2003, designer John Angelo Benson gives his impressions of this emerging design capital

Five days of design x Five nights of parties = One Hundred and Twenty hours of organised chaos care of the Japanese furniture empire Idée and its charismatic and sublime human generator Teruo Kurosaki.

Evolved from and indebted to our own London-based Designersblock, this Tokyo-based sibling has grown into a little monster consisting of over 250 designers (110 of them international, though few heavyweights in attendance) exhibiting their ideas and dreams at over 120 locations in and around Aoyama and Omotesandro: Tokyo’s equivalents of Chelsea, Sloane Street and Covent Garden.

Straight off the back of the shows I made during 100% Design in London, I was fortunate enough to find myself with offers to make two installations at Anything Goes Design Flows, the title of Tokyo’s 2003 Designers Block. They were to display The Mies Lobby Trap at Paul Smith’s main store in Shibuya and the other to take part in a group show curated by Rory and Piers of London’s Designersblock at the former Dutch Ambassadors residence, showing my ?McRoyce image and some vases from my Contained Inside collection. And so to Narita with excess baggage it was: me with my spikes, Rolls Royce and vases in tow, in search of the rising sun.

For those who haven’t been to Tokyo think back a moment to that experiment in science class with a magnet and iron filings where you sprinkled the filings chaotically onto paper and then magically got them to jump to alignment with the magnet underneath. That’s the place, a chaotic order that pulls in the same direction and works in the process. To a Londoner, the Japanese psyche of quiet patience and inner bow can be hard to frame at first, but with one’s openness, rapidly becomes intriguing and warm. I should also say that I loved their marriage between an observance of tradition and modernity’s expressway of acceleration.

So, to the design events themselves. I must confess that at first I had a negative impulse, thinking it all too disjointed, unorganised and underrepresented – in other words, a storm in a teacup. No Cappellini, no Interni guides, no Starcks or Rashids… But then I was brought back in by a refreshing note. With few luminaries in attendance, it made for a more even playing field and gave a wider freedom, experimental touch and greater emphasis for all us other, less publicised designers. By the end I was definitely won over and can positively say that I had an illuminating and fun time. They do know how to party and they have a lot of commitment and passion for design and figurative thoughts.

The work on show was mostly intelligent and personal, the energy and motivation high, the inter-relations open and friendly. And by the end, I can say one’s thoughts thoroughly enriched and on a good high.

John Angelo Benson, Tokyo, October 2003

©JAB2003

www.johnangelobenson.com

John Angelo Benson studied architecture as a mature student at the Bartlett, University College London and went on to work in the Milan architecture studio of Ettore Sottsass. His designs are mostly realised in limited and unique works, occupying a territory between art, theory and design. John Angelo Benson lives in London and works as a freelance multidisciplinary designer and as an art and creative director.

미와 실용성 : (청주 공예비엔날레)

미와 실용성: 근대 조형예술에서의 문제

최 범

근대미학의 구조: 미와 실용성의 분리

근대미학에서 미美의 반대는 추醜가 아니라 용用이었다. 전통적으로 미의 대립물로 간주되었던 추가 미적 범주로 포섭되는 대신에, 고대로부터 자주 미와 결합되어온 실용성이 미와 분리되었다. 역사상 가장 높은 생산력을 과시하고 실용주의적 가치가 고취되었던 시기에, 이처럼 실용성이 미적인 것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사회는 미와 실용성을 분리함으로써 오히려 실용성을 전적으로 현실의 지배 속에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의 구조 내에서 미적 실천, 즉 예술이란 실용성의 장소인 일상과 대척점에 놓인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미와 실용성의 분리, 즉 과거의 모든 문화에서 언제나 일정 정도 뒤섞여 있었던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을 엄격하게 분리함으로써, 근대사회는 여기에서도 예의 근대적 합리성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적인 것은 언제나 예술과만 관계를 맺는 대신에 실용적인 것은 현실과만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근대적 인식과 실천의 내부에서 작동한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근대에서 미적인 것의 궤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즉 근대에서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언제나 대립적이거나 분리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 경계는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실용성을 배제한 순수한 미적 담지자로서의 예술과 미적 가치를 전혀 갖지 않고 오로지 실용성으로만 가득 찬 현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념적인 것이지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미학과 조형예술의 궤적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처럼 개념적으로 분리된 미와 실용성, 즉 예술과 현실이 뒤섞이고 역행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의 조형예술은 바로 그러한 진동을 보여준다. 근대 조형예술의 궤적에서 미적인 것과 분리된 실용적인 것이 다시 예술로 복귀하고 예술과 실용성이 결합하는 과정이야말로 모순적이면서도 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미와 실용성의 결합을 원했던 것은 예술보다는 오히려 현실이었다. 근대 시민사회의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은 현실적인 실용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현실은 오히려 미적인 것을 풍부하게 요구하였다. 미가 초월적인 영역보다는 현실과 더 많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인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는 서구 근대사회도 다른 모든 사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서구 근대사회는 시민 계급의 지배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미적인 것들을 생산해내었다. 오히려 순수한 미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은 그러한 미적인 상황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서구 근대에서 예술에 부여된 역할, 즉 합리적으로 조직된 일상 생활에서 결여된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보충물이자, 현실 세계가 실현시켜줄 수 없는 소망을 간직한 초월적인 진실의 세계로서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현실의 미화는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배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류 문화의 보편적 양상에 훨씬 더 가까운 현상이었다. 근대의 미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예술만을 주목한다면 그것은 미시적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대신에 예술은 물론이고, 예술을 벗어난 일상적 영역에서의 광범위한 미적 실천들까지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근대의 미적 구조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면 미와 실용성을 대립시킨 근대미학은 단지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일 뿐인가. 미를 순수한 것이며 현실적 필요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시대의 미적 태도들과 구분되는 근대미학의 독특한 관점이지만, 그것은 물론 나름대로의 인식론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현실에서 미와 실용성의 분리와 대립은 일종의 오류 또는 허구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자면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잘못 설정된 문제란 없다. 특정한 역사적인 문제 설정은 비록 그것이 다른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오류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동시대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서술적 진실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미학의 구조는 근대적인 에피스테메(인식 구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속에 자기 모순을 내장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미술과 공예: 주체와 타자화의 논리

미술이 발생하는 과정은 곧 공예가 타자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근대미학에서 미와 실용성의 분리는 각기 미술과 공예의 분리, 발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근대 조형예술의 독특한 위계적 구조가 생겨나게 된다. 요컨대 미술과 공예의 분리는 단순한 세포 분열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미술이 자신을 미적 주체로 정립하는 대신에 공예를 미적인 것을 벗어난 일상적인 기술과 노동의 영역으로 내몰아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미술은 ‘미적인 것’을, 공예는 ‘실용적인 것’을 담당하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자 문화적 의식이 되는 것은 근대미학의 정해진 행로인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과 공예의 조형적 차이가 아니라, 미적인 것을 기준으로 한 주체와 타자화의 논리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존의 미술사와 공예사, 아니 문화사의 전제를 다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공예와 미술의 발생과 분화, 그리고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이를테면 미술은 공예로부터 파생된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어떤 것인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공예가 미술에 선행先行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근대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공예는 오히려 미술에 후행後行하거나 아니면 동시 발생한 것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술이라는 대립물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공예는 차별화된 영역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미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공예는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 전체를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의 공예 개념은 상대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차라리 무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미술은 어떻게 (공예와 달리)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게 되었을까.

물론 근대 이전에도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 그 자체로서의 공예와 구분된 활동과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의 경우,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이어져온 고급한 학예, 즉 인문학liberal arts의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학문(과학)과 예술이 혼합된 영역이었다. 그리고 공예를 타자화시킨 서구 최초의 미술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미와 실용성의 분리, 즉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태로서의 미술과 공예가 처음으로 분리되는 것은 18-19세기의 가까운 근대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대략 15-16세기에 전통적인 기술(공예)로부터 벗어난 몇몇 분야-건축, 조각, 회화-가 인문학의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서구 최초의 미술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디세뇨의 기술arti del disegno’이라고 불린 미술은 ‘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인 것’으로서 오늘날의 미술보다는 과학이나 학문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도 미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이었다. 당시의 미술은 기술도 아니고, 오늘날과 같은 예술도 아닌, 인문학이었다. 아무튼 ‘미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공통점은 그것이 ‘고급한 학예liberal arts’라는 점이며, 따라서 ‘비천한 기술vulgar arts’인 공예와 구분되었던 것이다. 이제 목공이나 석공과 주물 기술 과 같은 직인의 기술이 아닌 고급한 학예로서의 미술은 기술이나 재료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떤 능력에 따라 구분되고 인식되었으며, 그리하여 요구된 것이 통합된 미술 개념이었다.

이제까지의 서구 문화사는 두 개의 통합된 미술 개념을 보여준다. 하나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의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18-19세기에 정립된 ‘파인 아트fine arts’이다. 르네상스의 ‘디세뇨’는 오늘날 디자인의 형태적 어원이 되는데, 여기에는 서구 조형예술사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디세뇨로부터 파인 아트로의 이행 과정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미술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것이 저 먼 르네상스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파인 아트임은 당연하다.

미술의 이중구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18-19세기경 서구의 조형예술은 새로운 구조를 형성한다. 이른바 ‘순수미술fine arts’과 ‘응용미술applied arts’이라는 이원적인 구조가 그것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과 저급 기술(공예)이라는 이분법의 근대적 버전이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먼저 순수미술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의 기술’과는 달리 순수한 미적 실천이라는 근대미학의 교의에 직결된 것이었고, 지식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근대는 예술과 기술만이 아니라 예술과 과학도 대립시켰기 때문이다. 근대의 예술-순수미술을 포함하여-은 18세기 칸트의 미학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다. 칸트는 미를 ‘무관심적 관심’이라고 정의하였고 예술로부터 모두 현실적 효용성을 배제하였다. 이와는 달리 현실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것을 ‘부용미附庸美’라고 불렀는데, 이른바 응용미술은 이와 관련되었다.

사실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에서 응용미술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르네상스적인 고급과 저급의 분리가 근본적으로 변화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응용미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조형예술의 한 부분을 이루는 미술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응용미술은 단순한 기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본격적인 순수미술도 아닌, 미술과 기술의 중간 영역 정도 되는 것이었다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 ‘순수미술의 조형적 원리를 실용적인 영역에 응용하는 것’이라는 응용미술의 정의가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응용미술은 완전한 미술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술이 ‘응용된applied’ 어떤 것, 즉 불완전한 미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응용미술이 조형적 성격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시대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응용미술을 르네상스의 저급 기술과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디자인의 과도기적인 중간 단계로 보는 것은 18-19세기의 응용미술의 독자성을 주목하지 않고 역사를 지나치게 발전사적으로 보는 태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미술과 기술의 중간 영역으로서의 응용미술의 위상을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저 근대의 이분법은 생각보다 악명(?) 높은 것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과 저급 기술의 대립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문화적 부작용을 낳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에 속한 분야는 사실상 몇 가지의 제한 목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근대적인 이분법은 이 세계의 훨씬 더 커다란 부분을 분할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한 것임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차별 구조를 모순이라고 여기고 변혁시키고자 한 사람은 바로 윌리엄 모리스였다. 모리스는 예술의 ‘민주화’와 ‘생활화’를 주장하였는데, 여기에는 바로 살롱예술로 전락하여버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합일시키려는 의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모리스는 ‘장인으로서의 예술가artisan artiste’와 ‘예술가로서의 장인artiste artisan’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의 진정한 의미는 미술과 공예의 동일성 주장에 다름아닌 것이다.(Arts와 Crafts 사이에 있는 ‘and’는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후에도 오랫동안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위계적인 차별은 계속되지만 적어도 이념적 차원에서 그것은 윌리엄 모리스에게서 극복된다.

물론 18-19세기에 응용미술은 비록 미학적으로는 낮게 평가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응용미술은 더욱 각광을 받았다.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계급적 지배를 확인해줄 문화적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과 일상용품에서의 장식미술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고, 날로 발전해가는 산업은 매우 현실적인 목적에 따라서 미술을 필요로 했다. 19세기에 응용미술은 미술 제조art manufacturing라고 불리면서 점차 현실적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근대 디자인과 새로운 통합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디자인은 근대 조형예술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구조 변동을 가져왔다. 그것은 디자인이, 르네상스 또는 18-19세기 이후 분리되어온 미와 실용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하면서 조형예술의 질서를 재편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가 서구 최초의 통합적인 미술 개념이었다면, 디자인은 20세기의 새로운 통합 조형 개념이었다. 디자인은 미와 실용성을 적극적으로 통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명 공예의 역사적 계승자이며 낡은 의미의 순수미술과는 대립적이었지만, 그러나 디자인과 공예, 미술의 관계들이 결코 일면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디자인은 분명 전통적인 조형예술들과의 인식론적, 실천적 단절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또한 각 장르들과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며 선별적 친화성도 가진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먼저 디자인은 공예와 마찬가지로 실용 조형의 역사적인 한 형태이기 때문에, 공예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의 조형적 형식은 오히려 동시대의 미술과 동질성을 가지며 사회문화적 기능도 공예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물론 미와 실용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야 할 가치로 본다는 점에서 디자인은 전통적인 순수미술을 부정한다. 나아가 근대 디자인Modern Design의 경우에는 아예 미술과 디자인의 구분 자체를 부정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예술과 현실의 분리 자체를 극복하고자 했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근대 디자인은 조형예술 전체를 포괄하고자 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이후 디자인은 또 하나의 조형예술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공예를 대신하여 미술과 새로운 장르적 대립 구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미와 실용성의 구분이라는 저 근대적인 이분법은 20세기 동안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견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디자인, 특히 20세기 초 근대 디자인의 관점에서 본 미와 실용성은 어떤 것이었으며, 또 근대 디자인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합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물론 근대 디자인에서 말하는 미는 순수미술에서와 같은 초월적인 미가 아니며 실용성 역시도 전통적인 공예에서와 같이 토속적인vernacular 것이 아니었다. 근대 디자인은 건축이나 일상용품 같은 실제적인 오브제를 통해서 미와 실용성의 결합을 추구하였는데, 이때의 미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형식미이며 실용성이란 요소화된 기능의 복합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고 조작 가능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근대 디자인이 추구하는 미와 실용성은 일단 전통적인 미술과 공예의 그것과는 단절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근대 디자인에서 말하는 미와 실용성의 결합 역시 자연발생적인 것도, 19세기의 장식미술처럼 표피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철저히 선험적이고 원리적이며 구조적인 것이었다. 이는 근대 디자인의 미학적 이념이자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교의에서 잘 드러난다. 기능주의는 기본적으로 미(형태)와 기능이 일치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데, 이는 기능에 충실하면 할수록-어떤 선험적 원리에 의해(?)-형태도 아름다워진다는 믿음이다. 이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선미일치善美一致(Kalokagathia) 사상의 현대적인 판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기능주의의 모토는 그러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디자인은 이러한 기능주의의 교의에 따라 형태와 기능을 조작하여 완전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디자인은 일종의 사이버네틱스이자 기호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디자인이 추구한 것이 사물이 아니라 구성이며 실체가 아니라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은 장 보드리야르의 설명을 들으면 아주 분명해진다. 보드리야르는 바우하우스를 예로 들면서, 디자인은 단순히 생산물produit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기호화된 물건objet을 만드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산업사회에서 디자인된 물건은 단순한 효용성의 담지체가 아니라 기능적 기호로서 조작되고 사회화된 것이라는 얘기이다. 바로 이점이 실용 조형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통 공예와 근대 디자인을 구분해주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공예에 대한 디자인의 단절은 조형성, 생산방식, 사회적 기능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지만, 초기 근대 디자인이 보여준 반反장식주의는 공예와 디자인의 차이, 그리고 근대 디자인이 공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징후로 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돌프 로스와 같은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은 전통적인 장식을 극렬히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는 장식이 미개한 문명 상태의 증거이며 과잉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근대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장식은 비합리적이며 비현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현대적인 생산방식과 기술, 그리고 미학의 구성물로서 디자인은 분명 비합리적인 장식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장식은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오히려 장식이야말로 전통 조형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공예의 본질에서 장식성을 부정하고 실용성만을 보려는 태도야말로 근대적인 인식틀의 전도된 투사가 아닐까. 아마도 전통사회에서 공예의 본질은 실용성 못지 않게 장식성에서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공예의 장식이란 바로 문화적 상징의 표현이자 그 자체로 조형적 문법이며, 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나 기능과 뗄 수 없는 심층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디자인이 장식을 부정한 것은 전통사회의 문화와 질서 자체를 부정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물론 근대 디자인이 전통 공예의 상징성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근대적 질서와 생산방식에 따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조형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문명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 디자인이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미와 분석적인 기능의 결합을 지향한 것도 결국은 의미의 제로 상태에서 일종의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이란 모더니스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며 그다지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근대 디자인이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20세기 디자인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현실을 더 결정적으로 지배한 것은 키치Kitsch와 같은 비합리적인 조형과 소비주의 디자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현대사회의 디자인 역시 비합리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전통 조형에서의 장식이나 현대 소비주의 디자인에서의 스타일링이나 모두 문화적 상징성에 기반하여 인간이 가진 비합리주의적인 욕망에 호소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앞서 말했다시피 20세기 초의 근대 디자인은 전통적인 공예보다는 동시대의 미술과 조형적으로 훨씬 더 동질적이었다. 디자인은 아방가르드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혁명의 일부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자인은 단순히 통합적인 조형이거나 새로운 장르의 하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이후의 순수미술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전복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바우하우스는 정확히 순수미술의 이념을 뒤집는다.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순수미술은 고급하고 완전한 것이기는커녕 오히려 디자인보다 저급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미와 기능을 함께 갖춘 실제적인 산물만이 완전한 조형이며, 순수미술과 같이 감상을 위한 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 차원이 결여된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바우하우스의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와 인식틀을 정반대로 뒤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우하우스에서도 소묘나 회화, 조각을 가르쳤지만, 그와 관련된 공방이나 학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소묘나 회화, 조각은 건축이나 디자인을 위한 조형적 기초이자 연습일 뿐이며 그 자체로 독립된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대 디자인 운동의 정점을 이루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러시아 구성주의에서 오히려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서구에서 전통적인 미술의 역할, 즉 외부 세계를 모방하는 것은 현대미술에 의해 부정되지만 러시아 구성주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의자를 그리지 않고 추상화를 그리는 것이 예술적이라면, 아예 실제 의자를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예술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에서는 예술과 기술, 창작과 생산의 구분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러시아 구성주의에 의해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혹시 미와 실용성의 거대한 분리가 존재하기 이전의 그리스적 유년기, 분화되지 않은 덩어리 그 자체로서의 카오스 또는 모든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가 그 자체로 예술이었던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바우하우스가 순수미술을 전도시키기 이전에, 이미 말레비치에 의해 회화는 논리적으로 최후를 맞았고 구성주의에 의해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은 지워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알다시피 러시아 구성주의가 결코 역사의 종점은 아니었다.

공예의 위기: 변용과 일탈

공예의 위기는 반복된다. 한번은 근대적인 생산방식과 산업사회의 대두로 인해, 그리고 또 한번 공예의 자기 부정에 의해.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면, 과연 공예의 경우에도 그런 것일까. 역사의 물질적인 전개 과정 그 자체는 차라리 냉정한 것일지언정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예의 자기 부정은 분명 희극이면서도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공예의 자기 부정과 일탈은 말 그대로 공예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더 이상 공예사에서 다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현상이 현대 공예사의 한 장면에서 ‘공예의 이름으로’ 빚어지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정작 서구보다도 비서구 제3세계 지역에서 매우 심각하게 나타남을 보게 되는데, 이는 서구의 미적 근대성이 비서구 사회에 남긴 식민의 흔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공예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산업화에 의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양상이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에서 산업화는 공예에 치명적이었지만 또 다른 사회에서는 공예가 산업화와 비교적 잘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산업화가 분명 공예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지도만큼이나 공예의 문화지리학도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일본, 스칸디나비아 등과 같이 산업화되었지만 오래된 공예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산업화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는 사회, 영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보수적인 전통으로 인해 생활 속에 공예가 살아 있는 사회, 그리고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여전히 공예가 생활의 주요 수단이 되어 있는 전前산업사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오래된 공예 전통이 없는 까닭에, 공예와 현대 미술의 구분이 불분명하여 공예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진, 그런 만큼 개념적 혼란의 원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과 같은 사회도 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공예의 성격과 위상이 주변적이고 중간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예도 물건으로서 엄연히 현대 사회의 물질적 체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그러나 현대의 지배적인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주변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주변적인 존재방식으로 인해 현재의 직접적인 물질적인 욕구와 관심성에서 비켜나 있는 만큼, 문화의 원초적 통합성을 보존하고 전산업사회의 역사적 기억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간 예술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예의 주변적이고 중간적인 성격은 일단 현대사회에서 공예의 약점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흥미로운 문화 전략적 가치를 가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전통 공예를 보존하고 지원하는 것은 집단의 문화적 기억을 유지함으로써 국민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정치적인 프로젝트의 일부라고 이해하더라도, 서구의 일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모더니즘 예술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비판 또는 여성성의 발견을 위한 수단으로서 공예적 요소들을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현대적 실천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공예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목도하게 되는 가장 심각한 현상은, 공예의 주변성과 중간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공예적 가치를 전략적으로 실천하는 대신에, 현대 문화의 중심성에 매몰되어 공예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예의 자기 부정 또는 일탈 현상이 가장 무책임하게 나타나는 곳은 한국과 같이 식민지 근대화를 경험한 사회가 아닌가 한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전산업사회의 단계에 있는 국가들이고 다른 하나는 뒤늦게 산업화가 이루어진 후발 산업국가들이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후발 산업국가들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문제는 산업화 자체가 지나치게 물신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에서는 식민지의 경험이 근대화에 대한 실패와 낙오의 산물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사회 구성원들에게 산업화는 서구보다 훨씬 더 절대적이며 강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근대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대량생산품이 전통적인 수공예품보다도 더 좋은 것이고 심지어 고급한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공예의 가치는 매우 폄하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공예의 위기는 단지 공예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착잡한 구조에 근거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공예 제도 자체가 공예의 부정에 기초해있다는 점인데, 이러한 구조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배태된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경우 전통 공예가 쇠락한 상태에서 식민지 문화 정책에 의해 자리잡은 의식과 제도가 공예 분야에도 지배적으로 작용하면서 공예의 본질을 크게 왜곡,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19세기 말 이후 전통 사회의 붕괴에 따라 전통 공예가 산업적, 문화적 기반을 급격히 상실해간 반면, 일부 공예가 1930년대의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와 같은 식민지 미술 제도 속으로 흡수되면서 감상용의 살롱 미술로 변용되어갔던 것이다.(물론 예로부터 완상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귀족 공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술공예는 근대적인 전시회 제도의 틀 내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해방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0-90년대에 오면 미국 유학생들에 의해 유입된 이른바 ‘탈기능적’ 경향이 확산되면서 한국 공예계는 마침내 ‘공예의 이름으로’ 공예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미술공예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인 공예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반면, 이른바 ‘탈기능적’ 경향은 아예 공예의 기본적인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예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 자체의 오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근본적인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거의 미술공예 속에 이미 반反공예로서의 ‘탈기능적’ 경향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용성으로부터 감상용으로 중심 이동한 미술공예에서 이미 반공예적 경향은 첫발을 내디딘 것이며, 따라서 예의 ‘탈기능적’ 경향은 그 논리적 귀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공예를 실용적인 것과 감상용, 이른바 ‘미술공예’(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와는 다르다)로 구분한 것은 바로 비서구 지역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된 일본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미술과 서구 미술, 공예(산업)와 미술이 여러 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공예가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산업화된 공예와는 달리, 미술의 일부로서 감상용의 미술공예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미술공예는 공예의 주류도 아니었으며 전통 공예의 현대화와 산업화에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주체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 과정을 통해 이식된 미술공예가 뿌리를 내리면서 향후 지속적으로 공예 제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식민지 미술 제도를 통해서든 식민지 이후의 대학 교육을 통해서든,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상관없이 외삽된 제도로서의 현대 공예는 그저 식민지적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는 모더니즘 미학이 무분별하게 공예에까지 적용된 결과이고 한국의 현대 공예가들에게 공예 장르의 역사성과 현실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반공예를 공예라고 주장하면서 담론적 합리화를 시도하고 대학 공예 교육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서구의 미적 근대성이 제3세계의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모순적으로 증폭되어 나타나는가를 잘 보여주는 징후라 할 것이다. 디자인에서의 근대 프로젝트를 통해서 전통적인 공예와 산업, 그리고 미술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결해나간 서구와는 달리, 비서구 지역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공예와 디자인, 미술이 상호 충돌하면서 갈등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는 서구의 미적 근대성 자체를 넘어서는 탈근대적 전망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근대적 분리를 넘어서: 탈근대적 전망

이제까지 우리는 서구 근대미학과 조형예술이 어떻게 가치들의 분리와 위계에 기반하여 성립되었는지, 그러나 실제 그것의 내부적인 모순과 한계가 역사적 과정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사실 어떠한 시대, 어떠한 영역, 어떠한 규범도 일정한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의해 주조될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근대 역시 자신의 고유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 일정한 현실을 생산해왔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러한 근대의 미적 인식과 실천의 모순과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할 역사적 단계에 서있음도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서구의 근대예술이 근대사회의 특수한 구조적 산물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통합적인 세계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그 결과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가치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예술은 그러한 직접적인 현실 연관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으로써 비판적 기능을 행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서구 근대예술의 전제였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적극적으로 ‘쓸모 없음’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보다 넓은 현실의 맥락에서 볼 때 모순일 수밖에 없고 실제적으로도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위해 쓸모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근대의 강박관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류 문화의 보편성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근대의 복합적인 현실과도 일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근대적 강박관념은 이른바 공예의 ‘탈기능적’ 경향이라는 것에서 가장 극단적이고전도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탈기능적’이라는 것이야말로 (전통적인) 공예의 본질을 ‘기능’으로 본다는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근대미학이 보장해주는 예술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능을 추구하든 부정하든 간에, 결국 ‘기능’을 중심으로 공예를 사고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생각보다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 ‘기능’이야말로 지극히 근대적인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예의 ‘탈기능적’ 경향은 ‘탈근대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전도된 방식으로 ‘근대적’인 것이다.

문제는 기능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능을 강박관념으로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공예의 본질은 아마도 훨씬 더 복합적일 것이다. 공예는 제의와 상징성, 미와 질서 감각, 기술과 실용성 같은 다양한 가치들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예의 복합적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기능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적인 구도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탈근대적’인 것이며 매우 역사적인 것이기도할 것이다.

공예를 실용적인 기술로 보고 저급하다고 판단한 근대적 인식은 실은 스스로가 공리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일종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근대미학의 무의식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냐 실용성이냐, 순수냐 응용이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치들이 우리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이다. 때문에 우리는 서구 근대가 분리시킨 이러한 가치들을 다시 통합하여 새로운 관계로 재배치해야 할 과제를 간직하고 있다. 새로운 탈근대적 구도 내에서 그러한 가치들은 더 이상 미적인 위계 질서가 아니라 삶에 반영된 문화적인 가치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