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obe DPS – 다기기를 위한 렌디션(renditions)과 유료 폴리오(folio) 설정

어도브 디지털 퍼블리싱 수트

어도브 디지털 퍼블리싱 수트(Adobe Digital Publishing Suite)는 아이패드 출시와 함께 미국의 와이어드(Wired)지의 디지털 에디션 제작 도구로 시작된 범용 전자출판 솔루션이다. 시간이 흘러 이 저작도구가 출현한지도 거의 두 해가 지났다.

사실 전자출판을 다루는 몇몇 해외 블로그를 통해 알려진 이 도구에 대한 평가는 그리 희망적이지는 못하다. 모든 얘기를 이 포스트를 통해 하는 건 어려우니 뒤로 미루고, 한 가지만 보자면 이 도구는 어도브 인디자인이 지배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간의 편집 디자인 프로세스를 거의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전자출판 분야에서도 어도브의 지배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촛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관련된 여러 이슈에 대해서는 앞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Adobe DPS – 다기기를 위한 렌디션(renditions)과 유료 폴리오(folio) 설정 더보기

becoming

이정우씨가 쓴 <천하나의 고원-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에 대한 서평. 신문기사.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토대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되기(becoming)란 기존의 지배질서에 편승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는 일.

강정구와 공산주의

참 오래된 일인 것으로 기억된다. 북한의 김일성 생가 방문중에 방명록에다가 “만경대정신을 이어받겠다”는 투의 서명을 한 일로 불구속 기소된 동국대 강정구교수가 파면됐나보다.

알맹이가 가득한, 참된 사상일수록 대중들에게 가볍게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상이 무엇이건 어떤 사람에게 강요되고 지켜나가야만 하는 것으로 무겁게 결정지어진다면 그때부터 사람은 없고 공허한 생각만이 떠도는 상황이 되기 쉽지않나 싶다.. “맥아더 동상 철거”반대의 이유를 “지나가던 갈매기가 똥이라도 쌀 수 있다”고 한 어느 아는 분의 얘기처럼 일반의 가벼운 사상토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용인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같다. 지금도 대충 살맛은 나지만..

아무튼, 한국의 예술과 디자인 분야에 상상력이 부족하다면, 그 이유중에는 부족한 생각의 다양성도 들어갈거다. 그야말로 공산주의는 커녕 사회주의의 벽도 넘지 못한 한국의 민주주의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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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한 글입니다.

강정구 교수가 컬럼비아대 교수였다면
[해외리포트] 학자의 학문적 발언에 대한 두 대학의 다른 태도
강인규 _ 미국 위스콘신대 언론학 강사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과 한국의 동국대학. 두 대학교 모두 각 사회에 큰 기여를 해 온 유서 깊은 명문사학이다. 특히 동국대학교가 지식인과 학생들을 배출함으로써 한국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바는 컬럼비아대학이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에 속한 학자의 발언을 둘러싸고 보인 두 학교의 태도는 여러 모로 상반된다. 의 저자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컬럼비아대학교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사회적 발언에 소극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미국 대학사회에서 사이드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여러모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사이드는 미국의 중동정책을 맹렬히 비판했으며,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도 앞장섰다. 동양에 대한 서구사회, 특히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거리낌 없이 들춰내던 사이드의 연구와 발언은 미국 보수층의 심기를 대단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욕 먹어가면서 소속교수 보호한 컬럼비아대학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이드였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것은 그의 ‘돌팔매질’이었다. 그는 2000년에 레바논을 여행하던 중, 국경 넘어 이스라엘군 초소에 돌을 던졌다. 레바논 남부지역의 무력지배에 항의를 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당시 학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 그의 행동은 컬럼비아대학의 입장표명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당시 대학은 “그 돌은 특정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었기에 위법행위가 아니며, 당연히 학문적 발언의 하나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밝히며 징계를 거부했다. 학교 측의 이런 결정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이 결정에 반발한 사람들은 컬럼비아대학을 ‘포이즌 아이비(사악한 아이비리그 학교)’라고 비꼬았다.

미국에서 중동문제는 한국사회의 남북문제에 비견될 만큼 민감한 주제일 뿐 아니라, 유태계 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뉴욕시의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파장은 더욱 컸다. 그가 이스라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진이 미국언론에 공개되자, 보수언론은 물론 일부 동료교수와 학생들까지 그의 행동에 경악하며 파면을 요구했다. 그의 위험한 경거망동은 교수직을 박탈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은 사이드에게 대단히 가혹했다. 미국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일부 아랍 언론까지 비판에 가담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는 “아랍인들이 폭력적이라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애써 온 존경받는 교수가 이런 행동을 한 데 대해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썼다.

컬럼비아대학 측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사이드 교수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두고 교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회의와 토론을 벌여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대학은 학자의 발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당시 교수대표였던 조나단 콜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대학의 역할 가운데 학자 개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자는 사회의 다수가 믿고 있는 정치적 신념에 억눌려 자유로이 의사를 표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황 교수와 강 교수에 대한 이중적 태도

컬럼비아대학의 결정이 사이드의 행동을 지지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듯이, 적어도 이 순간 글의 목적은 강정구 교수의 발언을 옹호하는 데 있지 않다. 이 글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단 하나, 대학 내에서 지식인의 발언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발언마저 법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사회가 일반대중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만큼이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접근이 필요한 영역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인 근대사 연구는 줄기세포 연구보다 훨씬 큰 위험부담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대학의 역할이 사회의 통념을 재생산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학자들의 발언에는 일상적 담론 이상의 자율성과 관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맹목적 민족주의 담론이 황우석 교수를 성급하게 영웅으로 만들었듯이,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반공주의는 한 지식인을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매국노’로 만들었다. 한국 언론이 줄기세포의 근본적 한계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황 교수팀의 업적을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었듯이, 강정구 교수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고찰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 바빴다.

보수언론과 정계는 ‘국가를 위협하는 발언까지 학문적 발언으로 보호해줄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를 위협하지 않는 학문적 발언’이 어디까지인지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 논문이나 강의록 초고를 들고 국회나 법원, 혹은 신문사 편집부로 먼저 달려가라는 주문이 아니라면, 그 판단은 온전히 학계에 맡겨져야 한다.

사이드가 돌을 던진 뒤 5년 후 한국

에드워드 사이드는 2003년 9월, 오랫동안 앓아 온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모든 언론은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며 그의 ‘돌팔매’와 컬럼비아대학의 지지발언을 함께 거론했다. 이후로도 사이드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컬럼비아는 그의 지성을 지켜 낸 자유의 정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국대학교는 법원이 강 교수에 대해 국가보안법 기소결정을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 교수를 직위해제했다.

강정구 교수를 둘러싼 ‘논란’의 주범은 강 교수 자신만이 아니다. 오히려 학자의 발언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진지한 성찰과 토론을 이끌어 낼 인내심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회가 일으킨 소란이다. 한나라당의 의원도 말하지 않았던가. ‘한국이 성숙한 사회라면 강 교수의 주장을 무시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학자 한 명의 발언으로 ‘전복’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동국대학교는 이번 논란의 ‘주범’인 한국사회와 맞서기보다는 한 사람을 대학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간편한 길을 택했다. 물론 동국대학교로서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정 교수의 수업을 들은 졸업생들에게 취업상의 불이익을 준다’는 기상천외의 발상(이야말로 반민주적인 발언이 아닌가)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서 학교 측이 겪어야 했을 고통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어 낼 미래의 한국사회가 동국대학의 이번 조처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국대학교 측의 현명한 재고를 기대한다.

2005-12-27 15:50
ⓒ 2005 OhmyNews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발제문

4. 인상주의 (2) _ 최윤호 발제 (수유연구실 예술세미나 자료)

영국에서의 모더니즘

1660년의 왕정복고 이후의 영국에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처럼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는 없었다. ‘대불황(1870)’을 거치면서 영국의 시민계급은 자신감을 상실했고 부르주아지들에게 있어 확고했던 경제적 자유주의가 쇠퇴했으며 사회주의 운동이 힘을 얻게 된다. 이런 변화들 – 경쟁력 있는 외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식 – 은 외국으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특별히 프랑스의 문학은 당시 영국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러시아소설, 바그너, 입센, 니체 등의 영향이 프랑스로부터의 자극을 보완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부르주아지들의 자기의식이 동요되었다는 점인데, ‘영국만이 유일한 신의 사명을 가졌다는 믿음’이 흔들린 점과 ‘1880년대의 새로운 사회주의운동의 대두’가 그것이다. 이후 영국의 정신적 태도는 모든 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시기, 젊은 세대의 미학적·도덕적 표어는 모더니즘이었다. 이들이 부르짖는 자기실현이라는 말이 매우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세계의 도덕적 안정은 무너지고 말았으며, 사회생활의 모든 규범은 구속력을 상실했고 모든 것은 문젯거리가 되었고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880년대 영국 문예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비정치적인 개인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철저히 반부르주아적이었지만 결코 민주주의자들이거나 사회주의자들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의 향락적인 감각주의와 쾌락주의는 반사회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반속운동(反俗運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에 대한 반대였다. 이러한 속물혐오는 인습이 되고 마는데 영국의 모더니즘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속물혐오의 경향이며 인상주의가 영국에서 겪는 많은 변화는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속물혐오는 이미 과거의 일이었고, 상징주의자들은 보수적인 부르주아지에 대해 일종의 공감마저 느꼈다. 그에 반해 영국의 데까당스 문학은 – 프랑스에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가 각각 나누어 행했던 – 파괴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 시기의 영국문학은 ‘경박스런 표현방법에 대한 집착’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현상은 단순한 반항 심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본래의 목적은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려는데 있었다.

댄디즘

댄디즘 예술가의 언사나 사고방식, 그리고 특이성과 매너리즘은 예술의 멋을 모르는 위선적인 속물적 세계관에 대한 항의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댄디가 보헤미안의 대응현상 이었듯이, 영국에서는 댄디의 일부가 보헤미안의 지위를 차지한다. 보헤미안이 프롤레타리아트로 떨어진 예술가라고 한다면, 댄디는 상층계급 쪽으로 탈락해나간 부르주아 지식인인 셈이다. 둘 다 기계적이고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삶에 대한 항의의 표현인데, 영국인에게는 댄디의 모습이 더 선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댄디즘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탁월함과 독립이며, 일체의 존재와 행동에 있어 아무런 실제적인 목표나 동기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들레르는 댄디를 예술가보다도 상위에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들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종의 장인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댄디는 추구하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댄디의 이런 태도는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명예마저 던져버리겠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오스카와일드 가 자신의 생활을 예술작품화하고 자신의 문학작품보다 더 높게 평가한 것을 보면, 그가 어떤 효용이나 동기,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보들레르의 댄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가 자만심과 교태가 가득하다는 점이 영국 데까당스의 특색인 딜레땅띠즘과 유미주의의 결합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에서는 예술의 장식적인 면과 정교하고 화려한 면이 부각되며, 예술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며 완성된다. 프랑스에서 회화가 모든 예술의 표본이었다면 영국에서는 귀금속 세공이 표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체험의 결실이 아니라 체험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다…. 이 황홀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의 성공을 의미한다.”라고 페이터는 그의 저서에서 말하는데, 이 몇 마디에 모든 유미주의 운동의 강령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월터 페이터는 러스킨에서 시작하여 윌리엄모리스로 이어지는 발전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선구자들의 사회적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심미적 체험의 강도를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그의 경우, 인상주의는 향락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유미주의 운동과 프랑스 인상주의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비어즐리의 미술인데,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공예적·장식적인 필법은 프랑스의 거장들이 피했던 방법이며, 부르주아지들이 애호하는 세속적인 삽화화가와 무대장식가들을 낳게 되는 일련의 발전, 인상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발전의 시발점인 것이다.

지성주의

프랑스 문학에서 직관주의의 흐름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경향을 이루는 지성주의는 영국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와일드는 비평가를 예술가보다 상위에 두어, 세계를 비평가의 눈으로 보고자 했다. 동시대인들의 딜레땅뜨 적 인상은 여기서 연유한다. 이 지성주의의 기반 위에 메레디스와 헨리제임즈가 있다. 영국 문학사에서, 죠지엘리어트가 지적 수준은 높으나 훨씬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는데 반하여, 메레디스와 헨리제임즈의 작품은 극소수의 지식층만이 읽었을 뿐이었고,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나 다양한 인물들보다는 흠잡을 데 없는 문체와 인생에 대한 원숙하며 권위 있는 판단을 요구했다. 두 작가 중 헨리제임즈의 경우, 흔히 지적 정열에까지 도달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두 작가 모두가 현실에 대해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관련을 갖는 예술을 대표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국제적 인상주의

19세기말에 이르러 인상주의는 유럽 전역에 걸쳐 주도적인 양식이 된다. 시인들의 관심사는 객관적 현실이 아닌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이었으며 이런 기분과 분위기의 예술이 문학의 모든 형식을 서정위주, 혹은 이미지와 음악, 색조와 뉘앙스로 변하게 한다.

프랑스 이외의 경우 묘사의 인상주의적 특징들은 상징주의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나, 프랑스 문학만을 염두에 둔다면 인상주의는 상징주의와 동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적이요 감각주의적인 데 반해, 상징주의는 어디까지나 관념론적이며 정신주의적이다. 결정적으로 프랑스의 상징주의는 항상 행동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으나, 빈·독일·러시아·이탈리아의 인상주의는 수동적이며 환경에 무저항적인 탐닉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양자 모두가 가진 비합리적 요소는 수동성마저도 분별없는 행동주의로 변하게 하기도 했다. 일체의 행동성을 외면하는 인상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대표하는 것은 빈의 시인들인데, 빈의 인상주의가 그 특유의 섬세하고 수동적인 성격을 갖게 된 데에는 도시가 가진 특성이 한 몫을 했다. 빈의 문학은 부르주아지의 자식들을 비롯한, 제2세들의 신명 없는 쾌락주의를 표현하는 문학인데, 회의적이고 자기 풍자적이며 인상주의의 잠재적 내용인 ‘먼 것과 가까운 것의 합치’,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들의 서먹서먹함’, ‘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되어있다는 느낌’ 등이 그 기본적 체험이 된다.
“어찌 된 일인가, 바로 어제 같은 나날들이 영원히 흘러가서 완전히 없어져버린 것은?”이라는 호프만스탈의 물음과,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죽는다.”는 발자끄의 말에서, 소외와 고독의 의식이 1830년 이후의 유럽사회에 지배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호프

유럽의 인상주의 역사에서, 러시아가 인상주의를 받아들여서 인상주의운동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체호프와 같은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까지는 계몽주의적인 분위기였으며, 유미주의나 데까당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러시아에서 그런 인물을 대하게 되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기술발달로 인하여 사상이 빠르게 전파되었고, 서구의 산업화된 경제형태가 도입되었으며, 그로 인해 서구와 유사한 지식인에 해당하는 계층과 ‘권태‘ 비슷한 생활감정을 낳는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드가가 중요한 부분을 그림의 가장자리로 몰아내어 액자에 의해 끊어지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호프는 그의 소설과 희곡을 ‘발단’에서 끝맺음으로써 작품이 도중에 중단되었거나 우연히 아무렇게나 끝맺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정공법과는 반대되는 우연의 형식원리를 따르고 있다. ‘잘 만들어진 각본’의 경우 중요한 특색이던 여러 효과들을 포기하기에 이르는데, 과거 무대에 잘 맞는 희곡이 플롯의 통일성, 완결성, 균형성의 형식원리를 따름으로써 성공했던 데 비해, 체호프의 인상주의 희곡은 사건이 적고 극적인 갈등조차 전무했다. 등장인물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서서히 망해가며, 아무 사건도 시간도 없는 삶의 일상성 속에 휩쓸려 들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인생을 고스란히 내맡기는데, 이 운명은 파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환멸을 통해 완성된다.

자연주의 연극의 문제

플롯이나 극적 진전이 없는 이런 연극의 존재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어왔다. ‘잘 만들어진 각본’의 연극은 비록 그것이 자연주의의 어떤 요소들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희곡의 무대기술적 관습과 영웅적 주인공의 이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주의가 극예술을 정복하는 것은 1880년대, 즉 소설에서의 자연주의가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다음이다. 앙리베끄와 그의 후계자들은 발자끄나 플로베르에 의해 이미 문학의 공유재산이 된 것을 무대에 써먹은 것에 불과했지만 부르주아 관객들의 반응은 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연주의 연극은 프랑스 바깥에서, 즉 스칸디나비아제국과 독일 및 러시아에서 형성되었다. 자연주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자연주의 연극의 관습을 받아들였으며 적어도 입센, 브리외, 쇼 등의 희곡에 한해서는 그들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해 공격적인 그 태도를 탓할 뿐, 연극양식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드디어는 반부르주아적인 희곡 자체도 부르주아 관객들을 사로잡아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자신의 생존능력을 스스로 증명한 자연주의 연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와 미학자들은 고전주의적인 희곡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고전주의 연극에서의 간결성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는 점, 공연시간에 제한이 없는 점, 그리고 극중 대화가 잡다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운명, 성격, 행동의 고찰이 아니라 현실의 세부적인 복사’라면서 자연주의 연극을 비판했다. 하지만 실제로 자연주의 연극에서 달라진 것은, 현실 자체가 구체적 제약과 더불어 ‘운명’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라는 것이 다면적이고 복잡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는 것뿐이다.

연극에서 사건의 줄거리가 사라져가는 것은, ‘이야기적 요소가 제거되어가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예술분야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었는데, 미술 분야에서 일화적 회화를 옹호하던 평론이 거의 없었던데 반해, 연극에서는 플롯 경시에 대한 격렬한 비난이 있었다. 특히 독일에서 가장 심했던 자연주의 연극에 대한 반대에는 여러 가지의 상이한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반동의 경향은 간접적인 것에 불과했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념비적 연극’이라는 구상이 갖는 유혹이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함께 자라난 자연주의보다도, 과거의 귀족 및 부르주아지의 고전주의 쪽을 장래의 민중연극을 위한 양식으로 생각했던 것은 당시의 개념혼란을 여실히 보여준다.
새로운 연극에 가해진 가장 격렬한 비판은 그 결정론과 상대주의에 대한 것이다. 내적 자유·외적 자유가 없고 절대적 가치나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도덕률이 없는데 어떻게 진정한 희곡(비극적인 희곡)이 가능하겠냐고 새로운 연극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윤리적 규범이 상대적인 것이고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 인정된다면 진정한 극적 갈등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런 일련의 논의는 개념의 혼동, 사이비문제들과 궤변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는 비극적 희곡을 희곡 전체와 혼동하거나 적어도 이상적 희곡의 형식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이런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상대적인 가치로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얼마든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 비극적 효과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신봉하는 관중에게 그러한 가치위협의 현상을 꼭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관중 자신이 그러한 가치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말이다.

입센

입센은 당대의 세계관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가장 강렬하게 희곡으로 표현한 사람이었다. 입센의 윤리적 정열, 선택과 결단해야만 한다는 의식, 자신에 대한 심판으로써의 작품 활동 등, 이 모든 것은 키에르 케고르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전적으로 비 낭만적이요 일체의 유미주의와 결별한 그의 윤리관 자체가 키에르 케고르의 영향인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들이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키에르 케고르는 이러한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종교적·윤리적 체험이 미나 천재와 전혀 무관하며, 신앙상의 영웅이란 예술적인 천재와 전혀 별개의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의 비현실주의란 것은 당대의 일반적 과제들 중 하나로서, 이 문제와의 대결을 위해서 특별한 자극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전체가 이상과 현실, 시와 진실, 시와 산문의 갈등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었으며 19세기의 중요한 사상가들은 누구나 현대문화의 치명적 불행이 현실감각의 결여에 있음을 지적했다. 이 점에서 입센은 여러 선구자들의 싸움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입센이 이 공동의 적에 가한 치명타는 바로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에 내재하는 희비극성의 폭로였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그 주인공에게 동정으로 대했던 것에 비해, 입센은 브란드나 페르귄트와 같은 그의 인물들을 도덕적으로 철저히 파멸시킨다. 이런 낭만주의적 인물들의 이상적 요구는 이기주의이며, 그 냉혹성은 순진함 만으로 완화되지는 않는다. 돈키호테의 이상주의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서 준열했던 데 반해 입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은 오로지 남에 대해서만 준엄한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입센이 당시의 젊은이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 것은 그의 개인주의에서 비롯된다. 그는 근본적으로는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로서 개성적 자유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았으며, ‘개인은 그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사회는 개인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라고도 했다. 그는 사회문제 자체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다. 그의 사고는 개인적 윤리문제를 중심과제로 삼았고, 사회 자체는 그에게 있어 ‘악의 원리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사회에서 어리석음과 편견과 폭력의 지배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성향은 결국 귀족적, 보수적 영웅주의 윤리에 도달하게 된다.

유럽에서 그가 진보적 인사로 통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조국 노르웨이에서는 비외론슨의 급진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파의 대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영향력은 작품에서보다는 그의 선동가적·교훈자적 역할에 힘입은 바가 컸고, 사람들은 그를 불굴의 투사로서 존경했지만 정치가로서의 입센은 적극적인 무언가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부르주아적 편견과 기존의 사회에 맞섰지만 자유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가 믿지 않았고, 종국에 가서는 서글픈 숙명론자로서의 정체가 드러나고 마는 개혁가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인 루베크는 예술가에 대한 입센의 생각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인물이다. “이레네여, 그대와 함께, 아 그대와 함께 비다에서 하루의 여름밤을 보낼 수 있었더라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었을 것을!” 하고 부르짖는 이 절규야말로 현대예술 전체에 대한 심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버나드 쇼

버나드 쇼는 낭만주의에 대한 입센의 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계속하고, 유럽이 당면한 중대한 문제에 관한 토론을 심화시킨 유일한 작가이다. 이때에 이르러 낭만주의적 영웅들의 극적이고 비극적인 거창한 제스처에 대한 신앙이 깨뜨려진다. 순전히 장식적인 것, 거창하게 영웅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것들이 모두 회의의 대상이 되고, 일체의 감상성과 비현실주의가 속임수요 엉터리 수작임이 폭로된다. 자기기만의 심리학은 쇼 문학의 근원이다.
그는 거짓말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와 사회적 욕망에 의해 제약되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이 지나친 합리적 사고로 인해서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따라서 쇼의 목표는 합리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이며 그의 주인공들의 주요 정신능력은 이성이 아닌 의지였던 것이다. 그가 극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문학형식 중 제일 동적인 장르에서 그의 사상에 가장 알맞은 형식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지성주의적·주지주의적 성격을 띠었는데 그것은 비극적인 효과를 만들기 위한 측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연극을 ‘극적 토론’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연극이 소화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은 사람들이 인기 있는 오락적 작품들에 둘러싸여있었기 때문이며, 비평가와 관객이 모두 이런 새로운 연극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들이 과거의 선구자들보다도 더 엄격한 지성주의를 유지했던 반면에,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수준 높은 관객들은 그의 연극들을 즐기기에 더없이 적당했다.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쇼의 공격이 그들의 돈을 빼앗아가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순간, 쇼의 현란한 지적 곡예조차 안심하고 즐겼던 것이다. 결국에 가서 밝혀진 일이지만, 쇼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계급과의 연대감에서 움직인 작가였고, 예로부터 이 계급의 정신적 습성의 하나인 ‘자기비판의 메가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폭로의 심리학

전환기에 있어 세계관의 기본 방향을 규정해주는 심리학은 ‘폭로의 심리학’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정신생활의 표면이 감정 및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하거나 왜곡한 것이라는 인식을 했었는데, 이런 기만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창시 후의 인간타락에 있었으며, 이런 인간의 나약함과 원한을 윤리적 가치와 이타적·금욕적 이상으로 내세우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들의 폭로작업에 동원된 사고방식은 역사적 유물론에서 처음 쓰인 방식이었는데, 맑스가 강조하는 것 역시 ‘인간의 의식은 왜곡되고 상처 입은 것이며, 의식은 그 자체의 편향된 시각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에서의 ‘합리화’의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형성, ‘허위의식’의 개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맑스의 역사철학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은 ‘계급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올바른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통찰’이다.

한편으로, 이런 역사적 유물론 자체는 그 폭로의 대상이었던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세계관의 한 소산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가 서구의 의식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가 되기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이래의 새로운 사고방식의 근본원칙은 바로 ‘의심의 태도’였는데, 이미 널리 퍼져있었던 만큼 개개인의 사상가와 학자가 자신이 역사적 유물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이런 폭로의 이념은 이 세기의 공통의 재산으로서, 니체와 맑스, 프로이트간에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느냐를 말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들이 시대의 위기적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유럽이 그 넘치는 자신감을 상실한 심리상태의 표현이었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이론 또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론 형성이 상당히 진전되어서야 정신분석의 여러 문제들의 근원이 된 기본적 체험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그 기본적 체험이란 바로 ‘문명에 대한 거북스러움’이었다. 그는 그 ‘불안한 균형의 느낌’이 인간의 본능생활, 특히 성애충동에 가해진 억압에서 연유한다고 보았다.
노이로제는 삶의 요소들 중에서 경제·사회·정치적 부분들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없지만, 프로이트는 철저히 자연과학적인 그의 세계관으로 인해서 사회학적 요인들을 올바로 포착하지 못했다. 그에 의하면 문명의 형태는 역사적·사회적 형성물이 아닌, 여러 충돌들의 기계적 발현이다.
성욕충동을 모든 창조적·정신적 원천으로 삼는 그의 이론은 ‘인간본성’이라는 불변의 설정으로 인해서 보수적 관념론의 잔재를 보존하고 있다며 맑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그 비난은 타당하다. 반면에 정신분석이 부르주아지들의 퇴폐적 산물이요, 이 계급과 동시에 사라질 운명이라고 하는 맑시스트들의 비난은 독선이다.
토마스만은 프로이트가 세기말의 비합리주의에 연루되어있음을 강조하지만, 단지 인간내면의 어두움에 집중한 신낭만주의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만이 아니라, 문명과 이성 이전의 경지를 논하려는 낭만주의적 사고 전체의 시작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정신분석의 위험은 원시적 인간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그것이 근본적으로 충동과 생물학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험적으로 주어져 변화가 불가능한 모든 비변증법적 인간개념에는 비합리주의적 보수주의적 경향이 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비관주의자이거나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성에 대한 회의를 품었지만 동시에 충동을 지배하는 수단으로서 우리의 지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했다.

그의 폭로의 심리학은 인상주의적 생활감정이나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만의 개념은 하나의 인상주의적 사상이며 프로이트가 말한 ‘인간은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모두 숨겨진 삶을 산다.’는 이론은 인상주의가 나오기 이전에는 아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사고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실용주의

니체는 ‘진리가 어떤 절대의 팔에 매달려 있던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진리라고 일컫는 것들은 실상 삶을 촉진시키고 삶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하며 권력을 고양시키는 거짓말 들이라고 그는 주장하는데, 실용주의의 진리개념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행동주의적·공리주의적 성격의 것이다.
효과적이고 유용하고 쓸모 있는 것, 세월에 견뎌내는 것, 윌리엄 제임즈의 표현대로 ‘수지가 맞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것인데, 인상주의와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인식이론은 상상하기 어렵다. 모든 진리는 일정한 현실성을 지닐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된다. 그것 자체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느 것과도 무관하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이란 떼어놓을 수 없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서 그 개별적인 구성요소는 서로서로의 의존관계를 떠나서는 규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실용주의는 예술가의 인상주의적 체험에서 나왔다.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이 진리에 대해 갖는 관계야말로 실용주의 철학이 경험 일반에 대해 설정하는 관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베르그쏭과 프루스트

인상주의적 사고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 특히 인상주의의 본질에 밀착된 모체인 ‘시간’에 대한 베르그쏭의 해석에서 가장 순수한 표현을 얻는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되풀이되지 않을 ‘순간의 일회성’이라는 것이 19세기의 기본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주의 소설 전체가, 그중에서도 특히 플로베르의 작품은 이러한 체험의 묘사이자 분석이었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베르그쏭의 세계관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는, 플로베르는 아직도 인생의 이상적 실체를 갉아먹는 하나의 ‘파괴요인’으로 시간을 파악했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시간관, 그리고 체험적 현실 전체에 대한 평가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서 먼저 인상파의 그림에서, 다음에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 끝으로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며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오히려 지나가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이런 프루스트의 소설에 와서 베르그쏭의 시간관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최선의 것이 고뇌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열반으로 생각하리라.

사람들은 낭만주의가 나타난 이후, 거듭 되풀이하여 인생의 상실에 대한 책임을 예술에게 물어왔고, 플로베르가 말하는 인생의 소유와 표현간의 선택을 비극적인 양자택일로 보아왔다. 이에 반해 관조, 회상, 예술의 길이 우리가 인생을 소유하고 체험하는 오직 단 하나의 가능한 형식이라고 본 최초의 인물이 프루스트이다. 버뜨,,,,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간관이 이시대의 유미주의 자체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런 것은 외관상의 온순함일 뿐, 왜냐 하면 프루스트에 의한 인생가치의 전도는 병든 한 인간의, 생매장된 한 인간의 자위와 자기기만이었기 때문이다.

* Author / Gathered from : 최윤호가 ?문학과_예술의_사회사 부분을 요약함

예술사의 철학 _ 아르놀트 하우저

III. 심리학적 방법에 관하여 _ ~ p97 발제 최윤호 20040601

1. 승화와 상징화

프로이드에 의하면, 예술가는 ‘승화능력’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방어 매커니즘’을 통해서, 비현실적인 요구들을 정신영역 안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전화시킨다. 예술가는 그로인해 허구의 세계에 갇히게 되며 노이로제를 앓는 사람들과 같이 현실세계와 차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가와 노이로제 환자들과의 차이점은, 예술가들은 유연성을 가지고 현실에 다가서거나 멀어지는 것을 제어할 수 있으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은 예술작품에서 실현된 성취에 대신 참여하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의 결과를 통해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누린다. 프로이드는 예술을 통해서 얻어지는 만족의 ‘보상적인 성격’에 관한 진술과 더불어 형식의 아름다움도 관심을 ‘유인하기 위한 프리미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은 예술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며 ‘삶에 대한 문제’가 바로 예술의 목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과거에 간과되었던 예술가의 창조적 충동 및 리비도 충동간의 여러 관계를 드러내주었다.
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 얼마나 의미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예술창작 행위를 해석하는 데에 유용하느냐와 같은 물음이다. 프로이드의 ‘승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심리적 전환’에 불과한데, 예술이 성취된 즉 ‘승화’된 형식에서는 처음의 충동이 전환되는 과정은 볼 수 없고 그 목적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공적인 승화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과 주변여건을 알아야 하며 그 승화란 것이 충동 자체의 소산인지 아니면 예술가의 역사적 혹은 사회적 조건들에 의존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때에 따라 달라지는 충동-예술 사이의 전환과정에서의 ‘차이를 만드는 원리’를 찾지 못하는 한 승화이론으로 예술비평을 시작하기는 어렵다.
프로이드는 그런 승화의 미비한 부분을 수긍했는데, 욕구의 리비도적인 성질이 그것이 승화된 형태 속에 그대로 존속한다는 것과 그러한 욕구의 ‘환상적인 만족’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한 부분이 그것이다. 프로이드는 최종적으로 ‘승화란 충동으로부터 쾌락을 추구하고 그 쾌락을 부여하는 성질을 박탈하지 않은 채 그것의 공격성을 벗기는 일’이라고 함으로써 보다 합당한 진술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이론들과의 일치를 이룩했다.

본능적 충동은 반작용 형성과 승화를 통해서 그것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데 반작용 형성이 억압을 전제한데 반해 승화는 반대로 그것을 해소한다. 여기서 승화와 상징화의 구분이 필요하다. 상징과 승화는 유사한 역학적 기능을 가지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승화란 심리적 과정이 진행되는 요소들의 단순한 변경 – 이런 구조적 변경은 예술비평과 관련하여 아무런 말도 안한다. – 을 의미하지만 상징은 그와 달리 프로이드의 꿈에 대한 해석에서 이용되는 ‘다원적 결정에 의한 이미지’와 같아서 풍부한 업적을 예술비평에 남겼다. 그런 다원적으로 결정체로서의 상징은 예술가나 관객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어니스트존스처럼 자발적,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발생된다고 전제한다면 예술창조의 과정을 ‘신비화’시키는 일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으로 의식되어지지 않을 수는 있으나 무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문화발달에 대한 정신분석적 개념은 여전히 레비브륄과 같은 낭만주의적 인류학에 의존한다. 즉, 비합리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근원적인 것이라고 보는 낭만주의적 입장 말이다. 그러나 상징적 형식에서 특징을 찾는다면 그것은 불투명성이나 애매함이 아니라 해석의 가변성에 있다. 성적 상징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예술이 무의식적인 본능적 충동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욕구의 표현인 한, 예술이 성적 이미지로 가득 찬 상징언어를 – 수직선이 남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등의 –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면적인 예술을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단조로우며 실제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에서, 우리는 예술이 언제나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가져오기 쉽다. 그러므로 역사적 성격규정이나 예술작품의 해석은 단순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적합과 부적합, 자명한가와 촛점이 흐린가, 주제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가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지는 것이라야 한다.

정신분석은 그러나 수확이 없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감수성을 꿰뚫어 보면서, 예술에 새로운 특징들을 불어넣어 윤택하게 했다. 어떤 예술의 전체를 나타낼 수는 없으나 그 의미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포괄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이런 모티브의 고찰을 단념할 수는 없다.

2. 낭만주의와 잃어버린 현실

반 정신분석적 비평가들은 예술가를 노이로제 환자와 같은 범주로 묶은 프로이드의 해석에 반대했다. 프로이드의 해석에 따르게 되면 삶의 파탄이 곧 예술 창조의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노이로제와 예술은 현실로부터 심리적으로 떨어져있다. 그러나 노이로제가 현실의 부정이 아닌 망각인데 비해 예술은 현실을 대체하길 원한다. 정신분석적 예술해석이 사실세계의 파괴와 같은 감수성에 우리의 관심을 관련시켜주었다면 우리는 먼저 이런 해석의 낭만주의적 한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프로이드의 예술인식은 성급한 일반화에 기초한다. 예술은 변화무쌍하며 그렇게 조리가 정연한 정신적 태도를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다양한 형식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의 예술의 목적과 경향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가 진술한 의미에서의 예술가 개인의 요구와 사회 집단적 요망의 불일치는 바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졌다. 낭만주의 시대 이전의 예술은 삶과 교환하여 얻은 대용물로서의 의미가 아니었다. 낭만주의 이전 예술창작의 선행조건으로 삶의 상실을 드는 것은 그래서 들어맞지 않는다.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현실의 거부는 예술 창조에 동반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공적 예술 창작에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즉, 예술은 삶의 보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복사가 아닌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것은 삶의 향유라는 차원과 양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표현이지 소유가 아니며, 말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낭만주의 예술가는 그가 살고 싶었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낙오자였다.

정신분석적 예술이론에 내재되어있는 낭만주의적 성격은 예술적 창조성에서의 비합리적이고 직관적인 요소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낭만주의와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예술적 천재를 정의함에 있어서도 영감을 기교와 취미로 대체시켜버린다. 윌리엄모리스는 “영감에 대한 그 따위 이야기들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장인의 손재주에 불과하다.”라며 낭만주의 이전의 가치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예술가가 정신적인 선각자의 노릇을 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다. 과학과 결합한 예술은 지위를 획득하고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애매한 천재의 지위로 만들어 일반인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노이로제와 같은 낭만주의적 정신체질은 정신사적 맥락에서 보면 예술이 사회적 역할을 상실했을 때 두드러졌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에 걸쳐 드러나는 낭만주의적 기질은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도전자로서 보이고자 했던 -그러나 희생양에 불과했던 – 것에 불과하며 끊임없는 경쟁으로부터 야기된 초조함의 소산이며 물질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불안의 결과이다. 정신분석은 개인의 삶과 작품이, 그의 사생활과 공적인 기능이 따로따로 떨어진 두 영역으로 분리되어버린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3. 대용만족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언제나 삶의 교정이며 우리의 현존이 안고 있는 결함에 대한 보상을 표현하는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예술은 삶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수단을 지니고 있다. 예술의 효과는 운명의 압도적인 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괴로움을 충분히 지각 가능하게 만드는 점에서 단순한 마취적 효과와는 차이가 있다.

예술을 승화, 상징화, 대리만족의 수단으로 보는 정신분석적 설명은 하나의 본질적 특징을 공유하는데 바로 ‘예술체험의 역동성’이 그것이다.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세계와 끊임없는 불화관계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변화하는 ‘자아’에 대한 발견은 프로이드가 거둔 가장 큰 결실이다.
정신생활이 발생하는 것은 충동이 어떠한 저항, 즉 억압하는 힘의 저항에 부딪혔을 때이다. 정신에 있어 의식과 무의식은 항상 대립하는데, 충동을 억압하여 무의식 속에 잠겨두거나 밝은 의식으로 올려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억압은 더할 나위 없이 동적인 개념이다.

정신활동을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닌 감추어진 공격 . 방어적 책략으로 이해하는 노출심리학에 예술비평이 얼마나 힘입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정신분석이 예술이해에 근본적인 공헌을 한 점은, 예술작품의 근원이 리비도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등의 생물학적 정의에 있다기보다는, 예술 창작을 합리화시킨 데에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예술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흠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정신분석의 사고방식이 충분히 역동적이지 못했던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보다 융통성 있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면 예술의 독특한 형식과 가변성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며 훨씬 포괄적이고도 덜 독단적인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심리주의와 정신적 구조물의 자율성

정신분석학 이전의 심리학이 대체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차용하여 인간 정신을 비인격화시킨 것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어느 정도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적 체질을 생물학의 유일, 불가변적 표현으로 파악했다. 그것에 의하면 과거에 우연적으로 취급되던 비합리성, 불규칙성, 강박행동, 공포마저도 순전히 정신적으로 결정된 현상이다. 프로이드 학설의 의의는 이처럼 교육되어질 수 있는 최초의 심리학 이론이라는 데에 있다.

예술비평에 대해 정신분석이 갖고 있는 방법적인 특징은 으뜸간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형식적인 구조를 통해 표현되는 예술의 해석에 얼마나 올바르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이다.
정신은 작품의 생성을 가능하게는 하지만 작품을 이루고 있는 재료 자체는 아니다. 어떤 감정적 동기가 예술적 의미를 얻는 것은 그 동기가 들어가 있는 ‘작품의 전후관계’에 힘입은 것이지, 그 동기를 담고 있는 ‘체험의 전후관계’에 있지 않다. 우리가 ‘작품의 기원’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멀리 그것의 ‘예술적 의미’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작품을 작가의 전기에 지나치게 연관시키는 것은 심리학의 남용이다.

프로이드는 “작가의 창조력은 반드시 그의 의지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며, 작품은 때때로 작가와 맞서서 그와 독립된 낮선 존재가 되기도 한다.”라고 밝혔는데, 여기서 우리는 예술 창작과정에 비심리적인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의 모든 특징은 두가지 방식으로 결정된다. 첫째는, 그것이 겨냥하는 효과에 의해서이며 둘째는, 그것의 근원적 체험에 의해서이다. 예술작품은 여러 동기가 작용하는 다원적 결정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예술작품은 예술가를 제외한 채 예술비평이나 예술사로서 설명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그 예술작품이 생성되는 상황과 연관되지 않는 한 설명이 불가능한 것도 있다. 그럼 면에서 정신분석학은 정신의 의식적인 과정과 무의식적인 과정의 연관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추구하는 주관적인 태도에 대한 이론이지 객관적인 연관들을 밝힌 학설은 아니다. 그것이 설명하는 것은 정신의 매커니즘이다.

5. 정신분석, 사회학, 역사

정신분석의 관점은 반역사적이다. 프로이드는 사회학과 역사학을 심리학의 하위로 종속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 분석에 있어서 사회학적, 역사학적 개념을 흐려버렸다.
그가 정신분석이 유기적인 생물학적 사실 위에 세워진 체계라고 한 점은 타당하다. 그러나 애초의 ‘충동’이 ‘비본능적인 동기’에 의해 감시받고 억제되는 그런 정신구조에 ‘본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했던 것은, 정신분석에 따른 오류의 근원이기도 하다. 실지로 본능은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했다.

사회학은 심리학 보다 더 우위에 있다……

프로이트는 집단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개인만이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잊은 것이다…

정신분석적 개념이 갖고 있는 비역사적인 성격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출처가 자연과학에 있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정신분석과 관련한 사고 전체를 시간적인 범주보다는 공간적인 범주에 한정하여 ‘계량화’했다.

양적 평가는 정신의 표명에 적합하지 않다. 그가 예술향수와 위트의 효과를 에너지절약으로 설명하려 했을 때, 사실 그는 낡은 전(前)분석적 심리학의 기계론적 견해로 복귀한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그의 사고의 혁명적 영향력이 가장 적게 느껴지는 부분중 하나이다.

* Author / Gathered from : ?예술사의_철학 (아르놀트 하우저)의 부분을 SSALL이 요약

‘우정의 교육’과 ‘유목적 지식’을 위한 에세이

상당히 신기하고도 대단한 연구집단의 소개글입니다.
조금은 길지만 읽어들 보세요..
특히 대학원 진학자나 유학 고려중인 사람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련이 남는 사람들..은 더더욱..

‘우정의 교육’과 ‘유목적 지식’을 위한 에세이

고 미 숙

‘죽거나 나쁘거나’

하나의 괴담이 대학가를 배회하고 있다. ‘대학은 죽었다!’ 혹은 ‘인문학은 지금 벼랑끝에 서 있다.’는 스토리로 구성된. 90년대 후반부터 유포되기 시작한 이 공포물은 세기를 훌쩍 넘어 이제는 공공연하고도 범국가적(?)으로 산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대학이 언젠들 전환기 아닌 시절, 위기 아닌 국면이 있었을까마는, 그래도 지금 떠도는 기류엔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수반되고 있는 바 틀림없다. 무엇보다, 그 음산한 기운이 저 아득한 허공 속에서가 아니라, 대학과 대학 주변의 좁은 틈새를 가로질러 점차 그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긴 이런 사태야 진즉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근대, 근대성 전반에 대한 발본적인 물음들이 제방의 둑 터지듯 사방에서 쏟아졌던바, 근대성의 이념적 파수꾼 역할을 했던 대학 혹은 인문학이 더 이상 무풍지대에 남아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했던 것이다. 공교육 전반, 아니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견고한 대지가 흔들리는 마당에 대학이 마냥 평온하다면 차라리 그게 더 문제적인 게 아닐까?
어쨋든 풍문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당도했고, 당분간 이 회오리는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 숱한 위기의 담론들,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들이 분주하게 제출되는 것도 그 여파의 하나일 터이다. 그런데 근래의 담론들을 훝어보면, 대개 변화를 강요하는 현실을 탓하는 한편, 변화의 당위를 소리높여 외치는 이율배반을 취하면서, ‘세계화’니 ‘이성의 합리적 보편성’ 혹은 ‘인성교육’이니 하니 닳을 대로 닳은 구호를 고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의 구태는 그렇다치고, 이런 패턴에서는 어떠한 실천적 구상도 도출되기 어렵다. 그저, 추상적인 원칙을 둘러싼 지리한 탁상공론만을 반복할 뿐.
문제는 현장이다. 교육이든 지식이든 ‘지금, 여기’의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공허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정책이 어떻게 되든, 교육개혁이 어떻게 되든, 우선은 현장이 살아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교육이란 제도나 정책 이전에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고, 어떤 경로로 전수되는가 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 제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다고 해서 현장의 생동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언제 어디서든 상황과 배치를 변환하기 위한 싸움은 늘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팽팽한 긴장을 기꺼이 견디려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낡은 허상상에 사로잡혀 점점 더 고립되어 자기소멸해 가거나, 아니면 미봉적인 포장으로 근근히 연명하거나. 요컨대, ‘죽거나 나쁘거나’.

잘못된 전제 몇 가지

어떤 담론이든 그것이 생산적인 대화로 이어지려면, 문제를 극한까지 몰고갈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교육담론이 피상적인 수위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기저에 깔린 오도된 전제들을 묵인하면서 그저 표층에 떠오른 사안들만을 가지고 좌충우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의를 좀더 박진감있게 유도하기 위해서는, 때론 무의식적으로 간과되고, 때론 의도적으로 회피되는 심층의 전제들을 표면으로 부상시켜야 한다. 이런 작업은 무엇보다 추상적 구호로 착색된 담론을 그 외부, 곧 현장적 실천과 접목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1.
잘못된 전제, 그 첫 번째는 인문과학 내지 대학교육을 하나의 자명한 진리, 고정된 실체로 설정하는 점이다. 즉, 대학의 인문학은 인간의 본연적 가치를 다루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고유한 실체성을 지닌 것인 까닭에 이것을 뒤흔드는 사회현실은 그 자체로 부당한 것이라는 식의 사유체계가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 그 자체의 위기와 등치’될 수도 있다는 논리적 비약도 가능해진다. 신자유주의 내지 시장전체주의에의 포획이라는 정치경제학적 분석(혹은 분노?)이 이런 논법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아마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입장에 관계없이 대체로 이런 전제에 공감을 표명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처럼 신성하고도 고정된 실체 따위는 없다, 애시당초! 잘 알고 있듯이, 대학은 다른 공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봉건적 신민을 근대적 국민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근대기획의 일부였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그것이 표방한 인문주의나 기초학문, 교양지식 등의 명분은 근대성의 제가치들을 체계적으로 훈육하고 내면화시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시대적 배치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화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다른 한편, 기원의 문제는 그렇다치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과연 대학이 인문적 지식을 통해 능동적 가치를 생산한 적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지적 힘은 언제나 대학 외부에서 형성되었지, 대학이 자발적으로 변화를 주도한 적은 거의 없다. 어찌보면 대학교육의 주류는 ‘국수적 아집’이나 ‘서구추종’의 두 축 사이를 왕복달리기한 것이 전부였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마 대학이 사회변혁을 주도한 시기라면 80년대일 터인데, 그때도 이념적 활력이나 지적 에너지는 대학교육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이질적인 선분들이 교차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때는 마르크스주의가 대학을 좀먹는다고 분노를 터뜨리더니, 마르크스주의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에는 다시 신자유주의가 대학을 말아먹는다고 외쳐대는 것은 좀 몰염치한 것 아닌가. 이런 식의 논법에 전제되고 있는 인문학이나 대학교육이라는 실체는 늘상 시대변화에 관계없이 발목을 붙들어매는 기능을 할 뿐, 그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이것들은 구체적인 실천에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 변화를 강요하는 외부의 힘에 대해 도덕적 우월감을 보장해주는 ‘네가티브’한 역할만을 담당한다. 마치 패배와 모멸 속에서도 늘 정신적인 승리만으로 자족하는 노신의 ‘아큐’처럼.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 안에 고질적인 이분법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기초학문 내지 인문교양을 강조하는 사고의 기저에는 흔히 교양과 전문지식,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분과를 날카롭게 절단하는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 사실 인문학 분과가 흔들린다고 인간적 가치를 다루는 교양지식이 모조리 실종된다면, 과학분과는 아예 인간적 가치라든가 교양적 지식과는 무관한 ‘기술지’에 불과하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반인문적 사고가 아닐지. 현재 대학의 인문분과는 그저 여러 분과학문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인문분과와 과학은 긴밀히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것이다. 그간 이공분과가 그 점을 아예 도외시한 것도 문제지만, 인문분야가 그 점을 온통 떠맡은 듯이 나서는 것 또한 근대교육의 불구적 이분법을 그대로 묵수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음모나 시장경제의 악마성을 폭로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낡은 틀을 답습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궤적 혹은 운동보다 한발 더 앞서서 지식과 교육의 배치를 바꾸려는 과감한 시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이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로운 방편이 아닐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심정으로.

2.
잘못된 전제, 그 두 번째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다. 교육개혁에 관한 담론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처음에는 인문학과 인성의 위기에 대한 한탄으로 시작하여 세부각론에 들어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면, 연구지원비의 확보 및 그를 둘러싼 공정한 분배에 관한 언급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대학에서는 연구지원비의 확보가 주요이슈로 ‘뜨고’ 있다. 연구지원비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이 일년의 주활동인 교수도 적지 않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각 대학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흘러들어가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연구의 생산성은 대폭 증가해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왜 이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항상 프로젝트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의 성과가 나름대로 수치화될 수 있는 이공계통과 달리, 인문과학분야는 뚜렷한 계수가 눈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수치가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항이나 실행방식은 잘 모른다. 하지만, 답은 늘 현장에 있는 법. 나의 견문으로는 연구지원비와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인문학 분야의 지적 에너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 대학원생들은 입학하자마자 지도교수 내지 능력있는 교수밑에서 이런 저런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것이 이즈음 대학원의 풍경이다. 수업이나 세미나는 뒷전이다. 물론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도 연구의 주요한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추동되지 않으면 그 자체는 한갖 소외된 ‘사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무리 전산화작업이 맹렬하게 이루어진들 그것이 새로운 지식생산으로 이어질 리 만무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문과학에는 논쟁이 사라졌다. 논쟁의 실종! 이보다 더 지적 황폐함을 증언하는 것이 있을까?
게다가 연구지원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업적이 특출나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수많은 학회들이 난립하고 있다. 온갖 장르, 전공별 지역별 학술대회가 족출하고, 저마다 전국적인 학회지를 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야만 연구지원비를 받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방법론적 모색이나 지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사를 위한 행사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열리고, 그래서 다시 학회는 더욱 황폐화되는 악순환이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사 및 학회지 출판에 필요한 갖가지 노동력은 주로 대학원생들 내지 전문연구자들이 무상으로(!) 헌납해야만 한다. 이건 정말이지, 80년대와 비교해도 퇴행적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수업할 시절에는 각종 세미나와 소그룹 스터디가 많아서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기타 번사를 줄이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번다한 일들 때문에 지적인 능력과 욕망을 억압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니, 오, 그 고달픔을 누가 짐작이나 할까!
내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는 주로 대학원에 몸담고 있거나 박사학위를 소지했지만 아직 대학에 진입하지 않은 전문연구자들 약 60명이 함께 하는 곳이다. 전공은 국문학과 사회학이 주류지만 기타 인문과학에 해당되는 대부분의 전공자가 두루 드나든다. 물론 출신대학도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이 다양한 종류의 지식인군상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 근본동기를 따져보면 현재 대학의 얼굴이 그대로 거울에 비쳐진다. 즉, 이들은 무엇보다 지적 욕구를 대학 안에서 전혀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전문지식인이 되고자 할 때 가장 근저에 있는 것은 앎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다. 그런데 그 초발심은 대학원에 들어서는 순간, 단번에 사라지고 만다.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정체불명의 커리들, 권태롭기 그지없는 강의현장, 그리고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한 끝도 없이 부과되는 학문외적 노동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연구실에 다양한 성격의 지식인들이 교차할 수 있는 힘은 대학의 황폐함 혹은 지적 무능력에 있는 셈이다. 결국 연구지원비의 확보가 주요관건이 되고, 다시 그것을 위해 메마르기 그지없는 논문을 양산하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지도학생들을 무상으로 착취하는, 이 지독한 악순환의 ‘먹이사슬’을 끊어내지 않는 한, 대학교육은 정말, 희망이 없다.

3.
학부제, 교수임용비리, 강사처우문제, 학벌주의 등. 대학교육을 이슈로 다룰 때면 늘상 열거되는 품목들이다. 강사제도나 학연,지연이 얽히고 섥힌 임용비리는 이미 고질적인 병폐가 된 지 오래고, 또 그것은 교육담당자들 모두의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당장에 해결될 전망도 없다. 뿌리뽑힐 때까지 기다리다간 ‘백년하청’일뿐더러, 어차피 번뇌 속에서 청정심이 피어나는 것이 ‘고금의 이치’일진대, 그런 제도적 비리와 싸우기 위해서도 능동적인 지식생산 외에 더 유효한 길은 없을 듯하다.
다른 한편, 학부제 시행은 앞의 사안들과는 분명 층위를 달리한다. 이 제도는 수요자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세계적 추세와 함께 분과로 쪼개진 학과체제로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창발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지식이 생산되기 어려우리라는 거시적 비전과 맞물려 있는 까닭이다. 이런 흐름이 크게 수정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제도는 시간차가 있긴 하겠으되, 결국은 전면적으로 시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학부제에 대한 기성학계의 입장은 대체로 성급한 시행의 오류, 그리고 기초학문의 파괴, 전공의 불균형 등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대응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이 제도가 교육을 상업주의로 몰고 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늘 그 이면에 수반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사안은 시행방식의 오류나 자본과 교육의 긴밀한 유착 이전에 교육과 지식의 구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내장하고 있다.
현재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설정한 전공분야, 그리고 커리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예컨대, 국문학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분화된다. 이것은 지식인을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전공과목을 설정하는 가장 일차적인 기준으로 기능한다. 언뜻 보아도 이런 분화는 시기적으로도 균형이 어그러졌을 뿐 아니라, 고전문학으로부터는 현대적 호흡을 박탈하고, 현대문학에는 고전적 깊이를 부재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재생산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구분법이 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시대나 신라시대로 가면 전공자가 거의 드물다. 지금 한국사 연구의 주류적 분야가 대개 조선시대나 식민지시대이고, 지도교수의 전공분야에 맞춰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구획선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전공 내에서도 정황이 이러한데, 하물며 국문학과 역사학, 철학 등 커다란 분야간에는 말이 인문학이지 지적 소통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기학과에 편중되어 전공간 균형이 깨어질 것이라는 한탄도 무색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인문학의 지적 불균형은 심각한 실정이고, 학부제 시행과 무관하게 이 문제는 앞으로도 해결의 전망이 요원하다. 그리고 어차피 전문연구는 대학원에서 주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학부교육에서 기초학문의 파괴 운운 하면서 분과체계를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현장적 설득력이 거의 없는 셈이다.
따라서 지금 절실하게 요청되는 작업은 고립되고 폐쇄된 분과의 벽을 넘어 지식이 자유롭게 흘러다닐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위적으로 학제간 연구를 조작할 것도 없이 다종다기한 테마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고, 그것들은 기초학문과 전문지식 사이의 벽도 넘어 수요자들에게 풍부한 지적 선택의 장을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학부제에 찬성하든, 아니면 그것에 전면 반발하든, 아무도 이러한 실천의 책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일단 지적 폐쇄성을 벗어던지만 하면, 수많은 테마들이 가능하다. 고전문학과 영화, 페미니즘으로 한시읽기, 문체반정과 새로운 글쓰기, 연암 박지원과 이탁오, 노신과 신채호 등등.
이런 식의 생성과 변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학생들은 외국어나 경영학 등 실용적인 방면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아무런 지적 촉발도 없는 기초학문을 듣느니 그나마 현실에 유용한 것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여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닌가. 100년 전 근대가 물밀 듯이 밀려올 때, 빈번하게 활용된 경구가 하나 있다. 이른바, 주역의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이 그것이다. 다시, 이 고전이 풍미될 시점이 도래한 것인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느니!

‘우정의 교육’, ‘유목적 지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짚어두어야 사항 하나 더. 워낙 우리 근현대사가 굴절과 혼돈의 연속이어서 그렇겠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닥치면, 일단 시야를 외국으로 돌려 선진화된 나라의 제도를 준거로 삼아 비판을 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습속이 있다. 그래서 우리 머리속에는 은연중에 ‘그 어느 먼나라’에서는 이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없다! ‘핑크플로이드의 벽’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같은 영화를 보라. 거기에 그려진 선진국의 학교들 역시 억압과 규율권력의 장소일 따름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태생적 불안정성 때문이든, 아니면 근대기획의 전반적 실패에 기인한 것이든, 앞으로 전세계에 걸쳐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테제는 필연적으로 붕괴되어 갈 것이다. 아울러 인터넷이 상징하듯, 학교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숱한 이질적인 배움터들이 출현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교육난국을 돌파하게 해줄 완벽한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근대라는 한국적 특수성론에 사로잡혀 그저 합리적인 선진제도에 의존하려 한다면, 다시금 시행착오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자기가 선 자리에서 ‘교육과 지식’의 낡은 배치를 근본적으로 변환시키는 실천을 수행하는 것이다.

1. ‘분자적 공명’과 우정의 교육

공간은 일종의 정치적 ‘기계’다. 그 배치에 따라 연기(緣起)작용이 달라지는. 그런 점에서 무릇 모든 교육은 먼저 교실의 배치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조금씩 변화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교실은 높은 교탁과 단상, 일렬로 배열된 책걸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의 구별이 확연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계몽주의의 공간적 투사이다. 즉, 교육이란 전문적이고 인격적 품성을 갖춘 스승이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것이라는. 위에서 아래로, 빛이 있는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이런 식의 전제가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의 내용은 기성품을 복제하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독창성이나 개성, 창발성 등을 강조한다 해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스승이 구획해 놓은 일정한 바운더리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은 이 구획과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체 앎의 영역에서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고정된 선으로 구획될 수 있을 것인가? 나이가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거나 지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특이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앎의 세계에는 그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앎의 흐름만이 있을 뿐. 명말 대표적인 비주류사상가인 이탁오의 다음의 말은 그 점에서 참, 감동적이다.

“나는 스승과 친구는 원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둘이 다르단 말인가? …만약 친구라서 사
배를 올리고 학업을 전수받을 수 없다면, 필시 그와 함께 친구가 될 수 없다. 스승이라서 마
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또한 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사표로 추앙받는 공자 또한 자신이 깨우친 도를 알아주고 토론할 벗을 찾아 천하를 주유했을 뿐, 누구에게도 자신을 배우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승이면서 친구인 것, 이것을 ‘우정의 교육학’이라 이름하면 어떨까. 이런 관계하에서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지식이 구성되고, 흘러 다니는 ‘힘과 힘의 역학’만이 작동하기 때문에 학문외적 권위나 위계 따위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구도는 단지 민주적이고 평등한 ‘인간화교육’이라는 휴머니즘적 구호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 연구실에는 수많은 세미나들이 있다. 일본어강독, 중국어강독, 중세미학, 수사학, 동아시아 근대성, 화폐와 철학 세미나 등등. 이 세미나는 누가 일률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저 구성원들의 지적 욕구에 따라 제안되었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장구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수요자의 학습구성권이 전폭적으로 보장되는 시스템인 셈이다.(반면, 지금 대학교육은 수요자는커녕, 교수들의 학습구성권조차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각각의 세미나는 또다른 변이형들을 끝없이 증식한다. 그래서 일본어강독을 하다가 느닷없이 과학사세미나로 번지기도 하고, 화폐와 철학 세미나를 하다가 일본어강독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세미나 구성원은 연령별로는 약 20년의 갭이 있고, 소위 선후배, 사제지간 등 각색의 인연으로 얽히고 섥혀 있지만, 그러한 위계들은 여기서는 아무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단지 각각의 능력이 교차하면서 ‘분자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일 뿐, 그 흐름에서 ‘고정된 자리’는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세미나의 성과가 업그래이드되어 강좌로 개설되는데, 여기서도 교사와 수요자 모두 자발성에 의해 결합되기 때문에 ‘지적 공명’만이 유일한 관건이 된다. 그래서 어떤 강좌에서는 선생이었던 이가 다른 강좌에서는 수강생이 되는 변환이 수시로 일어난다. 연구실을 열고 처음 공개강좌를 시작할 때 가장 신경을 쓴 일이라면 강의실의 공간적 배치를 수평화한 것이다. 원탁과 세미나 테이블, 개인 책상 따위를 그대로 죽 나열하고서 강의가 진행된다. 강사의 위치는 수시로 바뀔 수 있고,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난 해, 맑스주의 강의 때는 강의실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한참 넘어버려 더러는 책상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더러는 선생 뒤통수를 보면서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배치는 좀 무질서해보이지만 지식의 교류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일률적인 배열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이나 선생 모두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수강생들 사이의 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교실의 배치가 획일적인 되면, 학습자들 간의 소외 또한 심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의 중에는 오직 선생에게만 시선을 두어야 하고, 서로간의 접촉이(시선이나 대화 등)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인적 유대는 항상 강의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런 식으로 이원화되면 지적 소통이나 토론의 역동성은 현저하게 낮아지게 마련이다. 지식 그 자체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중심요소가 될 때, 비로서 스승과 친구가 하나인 교육이 가능한 법이다. 따라서 공간의 수평적 배치는 교사와 학생의 경계뿐 아니라, 학습자들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승시키는데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강의때나 세미나때나 항상 차와 간식을 준비하는 것도 그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함께 먹고 마시는 것보다 친화력을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강의를 하는 사람도 힘이 들지만, 열심히 듣기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가능한한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지적 공명의 주파수는 더욱 상승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여러 경위의 통과점을 지닌다. 직접적 전수 혹은 책을 통한 교류, 그리고 함께 힘을 북돋워주는 벗들, 공간적 배치 등등.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누구의 독점하에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강의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실감할 터이지만, 동일한 내용도 관계의 구성에 따라 현저하게 다른 공명과 촉발을 가져온다. 아울러 반드시 환기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보다 가르치는 사람 자체를 지적으로 훈련시키는 장이라는 점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어찌 주체와 대상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지적 즐거움을 증식하면서, 때로는 제자의 위치에 있다가, 때로는 스승의 자리에, 그리고 때로는 ‘붕우’가 되는 다양한 지점을 경쾌한 행보로 넘나들 수 있는 것, 새로운 세기는 바로 이런 교육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2. ‘수목형 위계’에서 ‘리좀적 증식’으로

학부제를 다루면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근대 이후 분과화된 학문체계는 현실정합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국어국문학과의 예를 다시 들어보면, 국문학과 국어학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가로놓여 있다. 또 국문학 안에서도 고전문학, 한문학, 현대문학은 ‘말의 길’이 끊긴 지 오래다. 기타 다른 학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자신의 분야에서 한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전문성의 실체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한분야를 심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심화가 아니라, 고립을 자초하면서 현실에 아무 쓸모도 없는 지식을 양산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생명은 에너지의 흐름이고, 앎 또한 그러하다. 흐름을 차단하여 경계를 긋는데 골몰하면서 대체 무슨 심화가 있으며, 확충이 가능할 것인가? 실제로 이런 분과체계와 학연, 지연 등 고질적인 병폐들의 재생산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적 흐름이 막히면 땅따먹기식의 전공분할이 더욱 가속화되고, 그것은 자연히 지식외적 관계들에 의존하는 습속을 강화시킨다. 학벌주의, 임용비리 등을 거세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통상적으로 그것이 이러한 지적 생산의 방식과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야말로 지식과 삶을 이원화하는 그물망에 나포된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벽을 넘어 흐르게 하는 것이다. 홈패인 공간에서 매끄러운 지대로!그런데 여기서 지식생산의 배치에 대한 새로운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학제간 연구라는 것을 기이한 종합이나 잡종교배 정도로 착각하는 해프닝이 반복될 것이다. 솔직히 요즘 분과적 체계를 넘는답시고 시도되는 대부분의 작업들이 담론의 생산과는 무관한 과시용 프로젝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촘촘하게 구획된 선들을 가로지르면서 예기치 않은 지적 흐름들이 생성되는 것은 그러한 인위적 혼합절충과는 무관하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우리 연구실의 세미나는 처음 한국 근대계몽기를 대상으로 하는 자료읽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개화기 신문자료를 읽다보면, 누구나 문학 텍스트에 한정해서는 도저히 이 시기의 지도를 그릴 수 없다는데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히 종교, 철학, 사상사 전반, 이를테면 근대성 담론의 영역으로 시선이 확장되고, 다른 한편 한국의 근대성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사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근대성론은 전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동반해야만 비로서 심층적 탐사가 가능한바, 중세미학이나 들뢰즈/가타리, 푸코 등 프랑스 현대철학과의 접속은 이렇게 해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을 하던 이들은 점차 동양적 사유로 눈을 돌리게 되고, 고전과 한문학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들은 서구 탈근대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전공간의 벽을 허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어진 코드와 습속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지만 않다면, 시선의 광할함은 자연스럽게 심연에 대한 열정을 함께 불러온다.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빌리면, 기존의 분과구분이 근원이 되는 뿌리가 있고, 그것에 바탕해서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일종의 수목적 위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면, 그에 반해 이러한 가로지르기는 뿌리줄기, 즉 중심도 지향도 없지만 무한히 분열되어 가면서, 어떤 것과도 접속할 수 있는 ‘리좀적 증식’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글쓰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맞물려 있다. 대학원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했겠지만, 학위를 받으려면 일정한 내용과 형식의 코드를 갖추고 있는 정형화된 글쓰기를 끝없이 수련해야 한다. 견고하게 위계화된 분과체계가 유지되는 것도 사실은 이런 식의 코드화시스템에 의해 받쳐지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체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글쓰기 문법을 내파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대중적이고 교양적 글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따위의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전문성과 대중성, 아카데믹한 스타일과 상업적인 스타일 등을 단절시키는 낡은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면서, 다채로운 수사학의 생성을 통해 지배적인 글쓰기 권력과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생산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적 주체 개개인의 신체가 자재로워야 한다. 즉, 쉬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증식을 통해 변이와 생성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조로현상은 정말 심각하다. 40이면 벌써 권위가 몸에 배고, 50이 넘으면 아예 스스로 원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대개 30대 후반에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하면, 결국 학위가 종착점이라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제도가 부여한 코스를 열심히 습득한 데서 멈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거야 뭐, ‘메아리소리만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거나 ‘그림자를 보고 앞에 있는 개가 짖으면 뒤에서 그대로 따라짖는 개’(이탁오)의 신세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잘알고 있겠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즉,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 여부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지적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가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명말의 대사상가 이탁오는 평생동안 유학의 경전을 탐구했으면서도, 54세 이후 다시 승려가 되어 불교에 입문하여 20여년을 쉬지 않고 유,불,도를 넘나드는 학문을 추구했고, 노신 역시 죽음 직전까지 시대와의 팽팽한 긴장을 잃지 않았으며, 들뢰즈나 가타리, 푸코 등 현대의 사상가들 역시 모두 그러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양상은 예외적 개인들의 속성이기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양태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주입된 습속과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는바, 그럼으로써 더한층 과감한 지적 모험을 감행하게 되는 순리가 아닌가 말이다. 그에 비하면, ‘조로증’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우리의 지적 풍토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새로운 담론의 생산은 이론의 내용 이전에 바로 이러한 지적 배치와 습속을 바꾸는 일,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전공, 세대, 학연, 성별간 위계라는 온갖 훈습에 찌든 ‘정착민적 근성’에서 벗어나, ‘생의 약동’에 몸을 맡기면서 늘 지적 초발심으로 돌아가 경쾌하고도 끈기있게 수행할 수 있는 신체, 이것이 ‘리좀적 증식’의 짝이 되는 ‘유목적 지식인’의 형상일 터이다.

3. ‘앎과 삶’의 일치, 그 생성의 윤리학을 위하여

나와 나의 친구들이 꿈꾸는 것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그것은 심포지움을 축제로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면, 상상력의 경계를 깨부수는 선정적인(?) 테마를 가지고서 다방면의 연구자들이 발제를 한다. 형식은 개별발표뿐 아니라, 듀엣으로 할 수도 있고, 여럿이서 한조가 되어서 할 수도 있다. 한 곳에는 음식과 차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다. 중간 중간 휴식 시간에는 락, 발라드, 클래식 등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서 친교를 나눈다. 주제와 관련된 슬라이드나 비디오가 상영될 수도 있다. 심포지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토론인데, 예의나 격식에 따른 언사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논쟁을 극한까지 몰고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매너라든가 형식의 구속이 없기 때문에 토론자나 발표자의 개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다. 시간제한도 없고, 배고픔과 지리함을 견뎌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지새워 토론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꿈이 실현된다면, 아마 단 하루 동안에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지적 수준은 비약적으로 고양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활동을 통해 교육과 연구, 지식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 모든 이들의 신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될 터이므로. 심포지움이란 일종의 지식인들의 라이브 공연이다. 밴드가 음반을 준비하듯, 평소에 세미나와 학습을 통해 갈고 닦은 내용들 가운데 그 에센스만을 간추려 대중앞에서 한판 쇼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을 통해 새로운 지적 동료들을 만나고 거기서 다시 새로운 유형의 팀이 조직되고… 이런 라이브 성과물들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매체로 집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억지로 기획하고 의무감에서 잡지를 내는 악전고투를 답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에서 대학교육의 여러 문제를 두루 짚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지식의 기쁨’이 사라졌다는 음울한 진단이 자리하고 있다. 온갖 풍요와 편리 속에서 생의 기쁨이 마모되어버린 근대적 일상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기쁨의 상실은 지식이 삶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짐으로써 초래된 것인바, 심포지움은 오직 근엄하고 지리한 학술대회여야하고, 삶의 기쁨은 다른 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고질적인 이분법은 그 괴리감의 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는 어떻게 이 간극을 넘어 일상의 실천과 지적 열정을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을 것인가일 터이다.
누구나 지식의 즐거움, 지적 능력의 증식을 통한 자유의 확대, 능동적인 관계의 확충 등을 원한다. 그런데 왜 모두 거꾸로 살고 있는가? 지식은 고된 노동이 되고, 학력이 높아질수록 신체는 더욱 부자연스럽게 되고, 그러는 사이 인적 유대와 지적 상상력은 완전 마모되는 이 악순환의 늪에서 주저앉아 있는가 말이다. 수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정치경제학적 분석도 가능하고, 문화적 토양, 교육제도의 비리와 모순 등등. 그러나 그 속내에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똬리를 틀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권에 진입해야 하고, 그러자니 스승, 선후배 등 파벌주의에 편승해야 되고 등등. 말하자면, 결국은 도시중산층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이념에 관계없이 지식인들 모두에게 그 지독한 악업(惡業)을 묵인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의 문제는 삶의 윤리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그말은 결국 앎의 자유를 되찾는 작업은 삶을 생성시키는 새로운 윤리학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솔직히 말해보자. 현대 중산층은 너무나 많은 비용을 행복과는 무관하게 지출한다. 오직 가족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둘러치기 위하여, 그리고 노후의 안정이라는 황당한 명제를 위하여. 사실 이것은 행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돈은 단지 수단일 뿐인데, 어느 순간 돈이 생애의 유일한 목표이자 표상이 되어버리는 이 기괴한 도착증! 자본주의가 그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는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지식이 현실을 변화시키고, 생동하게 하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지식은 곧바로 삶의 윤리적 토대로 전이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지식은 삶과 무관하고, 세상에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90년대 이후 제도권 외부에 많은 연구단체들이 생겨나고, 대학안에도 사회교육원 등이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어지면서 공교육 외부의 교육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런데도 지식의 에너지는 여전히 겹겹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것은 이런 매체들 역시 교육이나 지식에 대한 기존의 구도를 고스란히 변주하고 있어서, 거기서 형성되는 대부분의 교육이 일시적인 상품 이상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식에 대한 수요층은 확산되었지만, 전문가와 대중, 지식과 삶의 경계는 여전히 두텁다는 것이다. 우리 연구실에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아무런 대책없이 그저 공부가 좋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학원에 몸담고 있는, 이른바 전문지식인들보다 더 왕성한 지식욕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그것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윤리적 욕구와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으로 훨씬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이들이 대학교육만을 유일한 코스로 여겨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면, 그순간부터 지식은 기쁨이 아니라 질곡이 됨과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 또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 회로에서는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식의 생산과 삶의 윤리학은 맞물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대학체제가 구성원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이러한 불일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강렬한 유대에 기반한 지식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함께 모여 공부하고,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일상을 공유하면서 근본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차라리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어떤 교육매체보다도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함께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창 연습하고, 토론하고, 먹고, 마시고, 돈이 필요하면, 각종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모은 다음, 다시 모여서 노래하는.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지식생산은 너무나도 고립되어 있다. 일주일이나 한달에 한두 번 만나 세미나하는 정도로야 어떻게 집합적 흐름이 형성될 것이며, 삶과의 일치를 꾀할 수 있을 것인가? 성별, 세대별, 학연, 학벌 등 온갖 경직된 선들을 뛰어넘는 담론이 그 정도의 느슨한 접속을 통해 생성될 리 결코, 만무하다.
그리고 밴드들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공간만 확보되면 이러한 지식공동체의 구성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적으로 집필공간을 마련하고 도서를 구입하는 낭비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밥을 먹고, 함께 세미나를 조직하고, 성과물을 기획하는 일상의 공유는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적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왜냐면, 이때 지식과 삶은 그대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굳이 도회를 떠나 전원에 자리잡고 자연과 친화해야만 공동체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가장 전위적인 지식을 중심으로도 얼마든지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각기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하고, 각기 자기의 장점을 펼치게 하여, 한 사람도 알맞게 쓰이지 않는 사람이 없게”(이탁오)하는 것, 다시 말해 각자 서로의 길을 막지 않으면서 강도높은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 앎과 삶의 새로운 윤리학은 여기서부터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물론 이런 식의 지식공동체는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우리 연구실이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수많은 인적 관계들을 형성할 수 있고, 심심치 않게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지식사회가 얼마나 새로운 활로에 목말라 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토록 위기담론이 팽배했음에도 교육주체들이 실천적 모색의 측면에서 수동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터뷰를 할 때마다 항상 제도권 진입을 거부한다는 것이 주요 이슈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사실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나와 나의 친구들에게는 제도권이냐 아니냐는 사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의 목표는 교육과 연구를 하나로 융합시키면서, 인위적으로 경계지워진 장벽을 넘어 지적 에너지를 흘러 넘치게 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다만 제도권 진입이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먼저 시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도권 내부냐 외부냐로 설정하는 순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시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식의 가장 큰 적은 이분법 그 자체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고, 따라서 외부에서의 이런 흐름이 큰 힘을 구성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부를 변이하는 에너지로 투여될 것이다. ‘배움에는 자기도 없고, 남도 없’다고 했는데, 어찌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있을 것인가? 거듭 말하거니와, 완벽한 제도, 이상적인 모델은 어디에도 없다. 모범답안을 찾기보다 자신이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지식의 기쁨을 향유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열망, 그 초발심을 되찾고자 한다면,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 더구나, 다음의 글을 읽고 여전히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청년들이 금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
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
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할 것인가!”(노신, [청년과 지도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