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ism, 형태와 기능을 둘러싼 이야기들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웨인라이트(Wainwright) 빌딩, 미국 세인트루이스, 1891.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이미지 by whitewall buick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웨인라이트(Wainwright) 빌딩, 미국 세인트루이스, 1891.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이미지 by whitewall buick

* 타 프로젝트에 사용된 자료를 재구성하였습니다.

형태와 기능(form and function)에 대한 고민은 모던 디자인 운동에서 빠지지 않는 화두였다. 더욱 정확히 하자면, 20세기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 오늘날의 현대적 풍광과 생활환경의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모던디자인운동의 초기,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이념과 맞닿은 질문이었다. 20세기는 모더니즘, 혹은 모던디자인운동이 지배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그 모더니즘만으로 설명하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오늘날의 디자인이다. 실제로 요즘의 시장에서 팔려나가는 소비재들 가운데 기능 이외의 다른 특별함으로 성공하는 경우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고, 소비자의 요구 또한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서 일련의 해석 과정을 필요로 한다.

모더니즘 디자인 논의에 자주 등장하는 두 개념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루스가 1908년에 주장한 “장식은 범죄(ornament is a crime)”라는 개념, 그리고 미국의 조각가인 호레이쇼 그리너에 의해 처음 논의되고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1896년에 주장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ever follows function)”는 개념이 바로 그것. 기능이 없는 장식이 지닌 무의미함을 비판함과 동시에 기능성에 근거한 조형을 강조하는 이 두 가지 개념은 – 예컨대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건물의 장식은 건축주나 입주자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거리를 지나는 행인은 장식을 통해 그 건물을 다른 건물과 구별할 수도 있는 등의 – 이견이 없지 않았음에도 기능주의의 원리로 정착되어 이후의 20세기 모던디자인 경향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철 골조로 디자인된 마천루건축을 처음 확립한 인물이었고,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루이스 설리번. 그는 19세기 말엽부터 미국에서 고층빌딩의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던 인물이다. 당시의 미국은 엘리베이터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 철과 같은 신소재의 대량생산, 새로운 취향에 대한 요구, 강성해진 경제력 등이 한꺼번에 융합되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도시는 보다 대규모의 건축물을 필요로 했다. 건축가였던 그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형태가 관습을 따라(form follows precedent)” 과거의 경향을 답습하던 당시의 건축에 반대하고, 목적에 근거한 건축디자인, 즉 건물의 사용목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더도 덜도 없는 기능적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가 디자인한 웨인라이트 빌딩은 완전한 모더니즘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장식적 문양을 차용하는 등 절충적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합목적적 디자인’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이후 설리번의 합목적적 디자인상은 제자였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비롯한 수많은 건축가, 디자이너들에 의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계승되었다. 예컨대 1950년대에 자동차나 기관차와 같은 운송수단의 디자인에 폭넓게 유행한 유선형(streamlining) 스타일에서도 공기역학적인 합목적성을 추구한 기능주의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시점을 현재로 옮겨보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된 합목적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의 주장이 되어버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선언 대신 “형태는 재미를 따른다(form follows fun)”거나 “형태는 감성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는 주장들, 혹은 “형태는 욕망을 따른다(form follows desire)”는 다소 비판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 속에서 디자인의 의미를 이야기할 때마다 이 명제는 거듭 변형되고 있다. 달리 말해 이러한 현상은 모더니즘 이후의 디자인에서 어떤 ‘가치’들이 기능을 대신해 중요시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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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icy Salif, 레몬 스퀴저, 필립 스탁 디자인, 알레시 제작, 1990.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이미지 by Just Bru

형태가 기능을 따르지 않는 경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필립 스탁의 ‘주시 살리프(Juicy Salif)’를 꼽을 수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즙 짜개’라는 엄연한 기능을 갖고 있는 주시 살리프. 알레시가 1990년부터 제조하기 시작한 베스트셀러 주시 살리프는 우리나라의 백화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주시 살리프는 그 불합리성 때문에 더 유명해졌고 역으로 이러한 엉뚱함이 판매를 지속시키는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영국의 디자인학자 가이 줄리어(Guy Julier)가 다소 비꼬아 기술한 주시 살리프에 대한 해석은 그 불합리성을 잘 설명해준다.

가냘픈 세 다리는 섬세한 발목 위로 뻗어 올라간다. 이상하리만치 높은 무릎에서 꺾인 곡선은 세로로 홈이 파인, 중앙의 눈물 방울처럼 생긴 덩어리와 맞닿는다. 항공공학적인 형상을 지닌 거미 모양의 받침은 그것을 감탄의 시선이 향할 천상의 위치에 올려놓는다. 최상의 ‘외관’을 갖도록 완벽하게 만들어진 이 삼각대는 이 도구의 알뿌리 같고도 남성숭배적인 머리의 노골적인 모습을 하늘 위로 떠받들고 있다. 사용하려면 기술과 힘 모두 필요하다. 누군가 과일을 쥐고 비틀고 누르기를 반복할 때면 이 레몬스퀴저의 받침은 약간 기우뚱거린다. 레몬은 아래로 부서져 내리고, 손은 힘으로 쥐어짠 후 남겨진 찌꺼기로 범벅이 된다. 머리를 장식하는 홈들을 따라 흘러내린 과즙은 아래의 뾰족한 부분으로 천천히 흘러 모여든다. 그 후엔 반짝이는 흘러내림, 그리고 배설의 만족스러움이 깃든 소리와 함께 아래의 그릇으로 떨어진다.

가이 줄리어는 주시 살리프의 기능적 불완전함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금속(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이 도구는 실제 사용에 있어서 특징적인 형태로 인해 사용자에게 과도한 집중을 요구한다. 또한 개방된 구조나 강산성인 레몬과 화학적으로 반응하는 재질 때문에 비위생적이기도 해서 부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물건이다. 그렇지만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알레시가 꾸준히 주시 살리프를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아닌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담긴 독특한 상징성 때문이다. 가이 줄리어의 말대로 주시 살리프는 “성 도착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디자이너인 필립 스탁 스스로 주시 살리프의 “또 다른 기능”이라고 이야기한 ‘스타가 디자인한 물건 써보기’ 정도의 의미를 떠올릴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재미 삼아 사용해보려고 이 물건을 구입할 것이다. 변형된 설리번의 명제들로 이 제품을 설명하자면, 주시 살리프는 “형태가 욕망을 따른” 경우이거나 “형태가 재미를 따라” 디자인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가이 줄리어는 비판적인 시각이긴 해도 이러한 주시 살리프의 다양한 ‘변태적 의미들’ 자체가 이 제품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듯 하다.

이미 형태와 기능을 고민하는 디자인은 ‘공식적’으로 폐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

예술사의 철학 _ 아르놀트 하우저

III. 심리학적 방법에 관하여 _ ~ p97 발제 최윤호 20040601

1. 승화와 상징화

프로이드에 의하면, 예술가는 ‘승화능력’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방어 매커니즘’을 통해서, 비현실적인 요구들을 정신영역 안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전화시킨다. 예술가는 그로인해 허구의 세계에 갇히게 되며 노이로제를 앓는 사람들과 같이 현실세계와 차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가와 노이로제 환자들과의 차이점은, 예술가들은 유연성을 가지고 현실에 다가서거나 멀어지는 것을 제어할 수 있으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은 예술작품에서 실현된 성취에 대신 참여하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의 결과를 통해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누린다. 프로이드는 예술을 통해서 얻어지는 만족의 ‘보상적인 성격’에 관한 진술과 더불어 형식의 아름다움도 관심을 ‘유인하기 위한 프리미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은 예술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며 ‘삶에 대한 문제’가 바로 예술의 목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과거에 간과되었던 예술가의 창조적 충동 및 리비도 충동간의 여러 관계를 드러내주었다.
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 얼마나 의미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예술창작 행위를 해석하는 데에 유용하느냐와 같은 물음이다. 프로이드의 ‘승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심리적 전환’에 불과한데, 예술이 성취된 즉 ‘승화’된 형식에서는 처음의 충동이 전환되는 과정은 볼 수 없고 그 목적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공적인 승화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과 주변여건을 알아야 하며 그 승화란 것이 충동 자체의 소산인지 아니면 예술가의 역사적 혹은 사회적 조건들에 의존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때에 따라 달라지는 충동-예술 사이의 전환과정에서의 ‘차이를 만드는 원리’를 찾지 못하는 한 승화이론으로 예술비평을 시작하기는 어렵다.
프로이드는 그런 승화의 미비한 부분을 수긍했는데, 욕구의 리비도적인 성질이 그것이 승화된 형태 속에 그대로 존속한다는 것과 그러한 욕구의 ‘환상적인 만족’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한 부분이 그것이다. 프로이드는 최종적으로 ‘승화란 충동으로부터 쾌락을 추구하고 그 쾌락을 부여하는 성질을 박탈하지 않은 채 그것의 공격성을 벗기는 일’이라고 함으로써 보다 합당한 진술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이론들과의 일치를 이룩했다.

본능적 충동은 반작용 형성과 승화를 통해서 그것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데 반작용 형성이 억압을 전제한데 반해 승화는 반대로 그것을 해소한다. 여기서 승화와 상징화의 구분이 필요하다. 상징과 승화는 유사한 역학적 기능을 가지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승화란 심리적 과정이 진행되는 요소들의 단순한 변경 – 이런 구조적 변경은 예술비평과 관련하여 아무런 말도 안한다. – 을 의미하지만 상징은 그와 달리 프로이드의 꿈에 대한 해석에서 이용되는 ‘다원적 결정에 의한 이미지’와 같아서 풍부한 업적을 예술비평에 남겼다. 그런 다원적으로 결정체로서의 상징은 예술가나 관객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어니스트존스처럼 자발적,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발생된다고 전제한다면 예술창조의 과정을 ‘신비화’시키는 일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으로 의식되어지지 않을 수는 있으나 무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문화발달에 대한 정신분석적 개념은 여전히 레비브륄과 같은 낭만주의적 인류학에 의존한다. 즉, 비합리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근원적인 것이라고 보는 낭만주의적 입장 말이다. 그러나 상징적 형식에서 특징을 찾는다면 그것은 불투명성이나 애매함이 아니라 해석의 가변성에 있다. 성적 상징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예술이 무의식적인 본능적 충동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욕구의 표현인 한, 예술이 성적 이미지로 가득 찬 상징언어를 – 수직선이 남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등의 –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면적인 예술을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단조로우며 실제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에서, 우리는 예술이 언제나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가져오기 쉽다. 그러므로 역사적 성격규정이나 예술작품의 해석은 단순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적합과 부적합, 자명한가와 촛점이 흐린가, 주제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가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지는 것이라야 한다.

정신분석은 그러나 수확이 없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감수성을 꿰뚫어 보면서, 예술에 새로운 특징들을 불어넣어 윤택하게 했다. 어떤 예술의 전체를 나타낼 수는 없으나 그 의미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포괄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이런 모티브의 고찰을 단념할 수는 없다.

2. 낭만주의와 잃어버린 현실

반 정신분석적 비평가들은 예술가를 노이로제 환자와 같은 범주로 묶은 프로이드의 해석에 반대했다. 프로이드의 해석에 따르게 되면 삶의 파탄이 곧 예술 창조의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노이로제와 예술은 현실로부터 심리적으로 떨어져있다. 그러나 노이로제가 현실의 부정이 아닌 망각인데 비해 예술은 현실을 대체하길 원한다. 정신분석적 예술해석이 사실세계의 파괴와 같은 감수성에 우리의 관심을 관련시켜주었다면 우리는 먼저 이런 해석의 낭만주의적 한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프로이드의 예술인식은 성급한 일반화에 기초한다. 예술은 변화무쌍하며 그렇게 조리가 정연한 정신적 태도를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다양한 형식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의 예술의 목적과 경향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가 진술한 의미에서의 예술가 개인의 요구와 사회 집단적 요망의 불일치는 바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졌다. 낭만주의 시대 이전의 예술은 삶과 교환하여 얻은 대용물로서의 의미가 아니었다. 낭만주의 이전 예술창작의 선행조건으로 삶의 상실을 드는 것은 그래서 들어맞지 않는다.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현실의 거부는 예술 창조에 동반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공적 예술 창작에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즉, 예술은 삶의 보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복사가 아닌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것은 삶의 향유라는 차원과 양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표현이지 소유가 아니며, 말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낭만주의 예술가는 그가 살고 싶었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낙오자였다.

정신분석적 예술이론에 내재되어있는 낭만주의적 성격은 예술적 창조성에서의 비합리적이고 직관적인 요소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낭만주의와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예술적 천재를 정의함에 있어서도 영감을 기교와 취미로 대체시켜버린다. 윌리엄모리스는 “영감에 대한 그 따위 이야기들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장인의 손재주에 불과하다.”라며 낭만주의 이전의 가치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예술가가 정신적인 선각자의 노릇을 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다. 과학과 결합한 예술은 지위를 획득하고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애매한 천재의 지위로 만들어 일반인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노이로제와 같은 낭만주의적 정신체질은 정신사적 맥락에서 보면 예술이 사회적 역할을 상실했을 때 두드러졌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에 걸쳐 드러나는 낭만주의적 기질은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도전자로서 보이고자 했던 -그러나 희생양에 불과했던 – 것에 불과하며 끊임없는 경쟁으로부터 야기된 초조함의 소산이며 물질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불안의 결과이다. 정신분석은 개인의 삶과 작품이, 그의 사생활과 공적인 기능이 따로따로 떨어진 두 영역으로 분리되어버린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3. 대용만족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언제나 삶의 교정이며 우리의 현존이 안고 있는 결함에 대한 보상을 표현하는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예술은 삶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수단을 지니고 있다. 예술의 효과는 운명의 압도적인 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괴로움을 충분히 지각 가능하게 만드는 점에서 단순한 마취적 효과와는 차이가 있다.

예술을 승화, 상징화, 대리만족의 수단으로 보는 정신분석적 설명은 하나의 본질적 특징을 공유하는데 바로 ‘예술체험의 역동성’이 그것이다.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세계와 끊임없는 불화관계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변화하는 ‘자아’에 대한 발견은 프로이드가 거둔 가장 큰 결실이다.
정신생활이 발생하는 것은 충동이 어떠한 저항, 즉 억압하는 힘의 저항에 부딪혔을 때이다. 정신에 있어 의식과 무의식은 항상 대립하는데, 충동을 억압하여 무의식 속에 잠겨두거나 밝은 의식으로 올려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억압은 더할 나위 없이 동적인 개념이다.

정신활동을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닌 감추어진 공격 . 방어적 책략으로 이해하는 노출심리학에 예술비평이 얼마나 힘입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정신분석이 예술이해에 근본적인 공헌을 한 점은, 예술작품의 근원이 리비도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등의 생물학적 정의에 있다기보다는, 예술 창작을 합리화시킨 데에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예술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흠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정신분석의 사고방식이 충분히 역동적이지 못했던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보다 융통성 있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면 예술의 독특한 형식과 가변성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며 훨씬 포괄적이고도 덜 독단적인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심리주의와 정신적 구조물의 자율성

정신분석학 이전의 심리학이 대체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차용하여 인간 정신을 비인격화시킨 것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어느 정도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적 체질을 생물학의 유일, 불가변적 표현으로 파악했다. 그것에 의하면 과거에 우연적으로 취급되던 비합리성, 불규칙성, 강박행동, 공포마저도 순전히 정신적으로 결정된 현상이다. 프로이드 학설의 의의는 이처럼 교육되어질 수 있는 최초의 심리학 이론이라는 데에 있다.

예술비평에 대해 정신분석이 갖고 있는 방법적인 특징은 으뜸간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형식적인 구조를 통해 표현되는 예술의 해석에 얼마나 올바르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이다.
정신은 작품의 생성을 가능하게는 하지만 작품을 이루고 있는 재료 자체는 아니다. 어떤 감정적 동기가 예술적 의미를 얻는 것은 그 동기가 들어가 있는 ‘작품의 전후관계’에 힘입은 것이지, 그 동기를 담고 있는 ‘체험의 전후관계’에 있지 않다. 우리가 ‘작품의 기원’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멀리 그것의 ‘예술적 의미’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작품을 작가의 전기에 지나치게 연관시키는 것은 심리학의 남용이다.

프로이드는 “작가의 창조력은 반드시 그의 의지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며, 작품은 때때로 작가와 맞서서 그와 독립된 낮선 존재가 되기도 한다.”라고 밝혔는데, 여기서 우리는 예술 창작과정에 비심리적인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의 모든 특징은 두가지 방식으로 결정된다. 첫째는, 그것이 겨냥하는 효과에 의해서이며 둘째는, 그것의 근원적 체험에 의해서이다. 예술작품은 여러 동기가 작용하는 다원적 결정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예술작품은 예술가를 제외한 채 예술비평이나 예술사로서 설명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그 예술작품이 생성되는 상황과 연관되지 않는 한 설명이 불가능한 것도 있다. 그럼 면에서 정신분석학은 정신의 의식적인 과정과 무의식적인 과정의 연관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추구하는 주관적인 태도에 대한 이론이지 객관적인 연관들을 밝힌 학설은 아니다. 그것이 설명하는 것은 정신의 매커니즘이다.

5. 정신분석, 사회학, 역사

정신분석의 관점은 반역사적이다. 프로이드는 사회학과 역사학을 심리학의 하위로 종속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 분석에 있어서 사회학적, 역사학적 개념을 흐려버렸다.
그가 정신분석이 유기적인 생물학적 사실 위에 세워진 체계라고 한 점은 타당하다. 그러나 애초의 ‘충동’이 ‘비본능적인 동기’에 의해 감시받고 억제되는 그런 정신구조에 ‘본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했던 것은, 정신분석에 따른 오류의 근원이기도 하다. 실지로 본능은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했다.

사회학은 심리학 보다 더 우위에 있다……

프로이트는 집단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개인만이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잊은 것이다…

정신분석적 개념이 갖고 있는 비역사적인 성격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출처가 자연과학에 있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정신분석과 관련한 사고 전체를 시간적인 범주보다는 공간적인 범주에 한정하여 ‘계량화’했다.

양적 평가는 정신의 표명에 적합하지 않다. 그가 예술향수와 위트의 효과를 에너지절약으로 설명하려 했을 때, 사실 그는 낡은 전(前)분석적 심리학의 기계론적 견해로 복귀한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그의 사고의 혁명적 영향력이 가장 적게 느껴지는 부분중 하나이다.

* Author / Gathered from : ?예술사의_철학 (아르놀트 하우저)의 부분을 SSALL이 요약

서구 현대장신구의 형상성 연구-1 _ 전용일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유럽과 미국의 현대장신구의 흐름과 주요 작가들을 개관한 논문
2002월 2월 전용일 작성 서구 현대장신구의 형상성 연구-1 _ 전용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