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kyo Designers block 2004

oct. 7 – 11, 2004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4

most pictures by janine parker, some by mno design. (디자인 붐 웹진의 실제 링크에 클로즈업한 사진자료 다수..)

1968…

‘1968 was the year that reflected the period of revolutions
and turbulence. music transcended the time and design reflected
the period. political movements such as may revolution in paris
and shinjuku riot in tokyo left impact on people’s life.
the impact of this year grows to become the hope for people to be
able to change the world by themselves.
but if we look back at those days, questions proposed at that time
may remain unsolved.

the unsolved question sparked nationalism and globalization.
new waves of incidents happened: short board surfing was
born in australian coasts.
young people putting on jeans pants showing part of their hips
were wandering on the streets. the beatles’ white album created
new phase of musical culture. these changes were revolutions
in 1968 that opened up people’s desire to answer the fundamental
questions.

SURF REVOLUTIONS LIFE REVOLUTIONS

this year, 2004, has the similarity in terms of desire for changes.
It is now that we question the fundamental questions once again
from universal views. what was the question that was asked all
around the world in those days? what are the questions we are
asking ourselves this year: what is the design?
what is the space design? what are life and living?
DESIGN REVOLUTION

we once again question the cultures born in 1968.
we create new values regardless of concepts that have already
been made. now, what truly changes the world is the design that
possesses the essential of living.
we are convinced of the power of the design.’

text by teruo kurosaki

the producer of this five-day event ‘tokyo designers block is
teruo kurosaki. he started an international empire of interior
innovation through his idée and sputnik furniture lines.
kurosaki wants now, via the staging of the fifth tokyo designers
block, to exhibit the virtues of japanese design culture to the
rest of the world. though not himself a designer, kurosaki has
been called the ’terence conran of japan’ and become synonymous
with a new wave of lifestyle design that is, first and foremost,
born out of tokyo’s peculiar urban milieu.
he studied physics and was supposed to be scientist or an
engineer but decided that he wanted to work with interiors,
architecture and the environment.
in the 1980s, kurosaki opened a small interior design workshop
in tokyo’s aoyama district and began making the acquaintance
of the then still unknown designers philippe starck and
marc newson. he exhibited his line ‘sputnik’ in the london
designers block and could relate with those people,
with their more edgy, alternative ways of showing design.
london designers block was the initial inspiration for the TDB.

* 저자 / 출처 : 디자인붐 http://www.designboom.com/snapshots/tdb04/1.html

독립운동

매머드급 변호인단 김희선 의원 ‘눈총’

지난 18일 제출된 김 의원의 공소장에는 천정배 전 원내대표를 비롯해 이종걸?최용규?문병호?양승조, 우윤근, 이원영, 정성호, 최재천, 이상경 의원 등 현역의원 10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특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 7명이 모두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김 의원측은 ‘인지상정’이라고 설명하지만, 예상치 못한 비난 여론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 하는 심정으로 저렇게 하는 것인가..

교수란 이름의 ‘황금 우리’

필자는 귀국하여 ‘교수님’으로 지칭될 때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 누구와도 이름만 부르는 사회에서 ‘타이틀’ 위주의 사회로 옮겨오면서 느끼는 ‘온도차’ 때문만은 아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으로 대학사회에 발을 내디뎠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교수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적 교수’라는 말을 들을 때 형용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내외 ‘강단 진보’의 맹점은 무엇인가? 마르쿠제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대학이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곳이라고 주장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은 기업을 닮아간다. 대학원생·시간강사의 착취가 심한 미국·한국과 대학 하급 구성원의 생계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유럽은 다른 면이 많지만, 정규직 교수가 비정규직 지식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수취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럽은 교수가 중간급 공무원에 해당되어 숙련 노동자 평균 연봉(약 3만달러)의 2~3배 봉급을 받는다. 임금차이가 심한(사립대학교의 경우) 미국에 비해 착취체제의 일원으로서의 지위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규직 교원의 ‘안정’이 비정규직 교원들의 희생으로 보장되는 점에서는 똑같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 한, 정규직 교수가 아무리 관념적 혁명의식을 지녔다해도 사회적 정의 실천에 앞장설 확률은 높지 않다.

정규교수들이 반체제 의식을 과시해도 실제 생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현재 위치의 유지·강화 (즉, 승진), 그리고 그 주된 수단인 연구를 위한 연구비 등을 구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국가관료나 대자본의 재단·기금들과의 ‘네트워크 만들기’도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소홀히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연구·저술할 때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원로·선배, 연구비 지급을 좌우하는 관리자들의 시각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저절로 성역들을 비켜가게 된다. 예컨대, 한국 관변 쪽 연구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해외 한국학 분야에서 과연 한국 사학재단의 내부 구조나 일상적 군사주의, 이주 노동자의 착취 문제에 대한 저서나 논문이 많은가? 그런데, 초미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진보적 내용의 연구라 해도 해당 학계를 의식하는 나머지 이론적 접근이나 의제 설정, 용어·문체 선택 등에서는 학계의 관례와 유행을 따르게 되어 그만큼 ‘일반’ 독자로부터 멀어진다. 이와 같은 일상적 순응주의에 빠지지 않고 꿋꿋하게 온갖 성역을 깨치고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한 간결한 문체로 저술하는 노엄 촘스키와 같은 사람도 있지만 아웃사이더 취급받는 그들의 저술을 학술 논문에서 언급할 수 없음은 불문율이다. 학계의 자기 완결적 구조는 무서운 배타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필자가 ‘상아탑’이 순응주의·서열의식을 강요하고 반체제적 실천을 원천 봉쇄하는 자만적 별천지라는 ‘자아비판’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필자를 포함한 강단의 자칭 진보파들은, 위계적·폐쇄적 공간에서 전개되는 ‘진보’ 담론이 과연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평등과 정의를 ‘바깥’을 향해서 외치기 전에 먼저 ‘우리’ 사회 안에서 실천해야 하지 않는지를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진보사회라 해도 교수집단의 일원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권력화하는 경향이 있는 바,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꿋꿋한 ‘진보 학자’였던 전직 교수가 장관이 된 뒤에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볼 수 있는데 이는 교수집단 ‘진보성’의 허와 실, 겉과 속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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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컬럼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5/03/001000000200503131919035.html

돌아보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수동적인 마음가짐처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을까 싶다. 모든 회피의 과정들을 신통치도 않은 껍질로 덮는 일도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나는 벽을 피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디자인이라는 일을 벗어나서 그것을 바로 보는, 최대한 충실하게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을 해야 할까? 몇권 안되는 책읽기?, 근처의 사람들 만나보기?, 이름 좀 있는 사람들과 친분 쌓기?.. 디자인이 하찮아보이는,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방향으로 큰소리 쳤던 디자인공부에 방해가 되기만 하는 그런일들은 아마도 나의 생각의 방향과 현실의 살아가는 모습간에 틈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돈이 필요한가? 직장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서 멀어졌다는 소외감은 생각보다 크다. 한편으로는 통제받지 않는 생활을 스스로 제어하는 모습을 나 스스로 보이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