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함’이라는 미신

누군가 암에 대한 미신을 이야기한 글을 보고 갑자기 알루미늄 그릇이 생각났다. 일본인들 상당수가 사용한다는 무수분냄비는 두꺼운 몸 전체가 알루미늄이고 그것 말고도 편수냄비같은 일본서 흔한 그릇들은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쓰면 치매 환자도 많을까?

막걸리 주전자는 어느때부턴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일본 그릇 시장엘 가면 대구 어느 공장이 만들어 수출한 코팅 안한 흰색 주전자가 흔하다. 한국인이 알루미늄을 워낙 싫어하다 보니 국내 시장엔 팔지 않고 수출만 한다나…. 재료학 서적을 보면 알루미늄은 공기중에서나 물을 넣고 끓이면 산화막을 형성해 외부로 성분이 용출되지 않는다. 아웃도어 용품점의 색색깔 용기들은 애노다이징한 알루미늄인데, 벌집같은 공극을 화학적으로 만든 후 색을 넣어주는 과정을 지나 마지막으로 물에 넣어 끓여주면 색이 벗겨지지 않는다.

https://www.forbes.com/sites/quora/2017/09/29/could-exposure-to-aluminum-cause-alzheimers-disease/

궁금해서 알아보다 찾아낸 내용들 가운데 좀 놀라웠던 건 60년대(아니면 아마도 그쯤 오래된 때) 미국의 어느 연구소가 발표한 알루미늄과 치매와의 연관성 연구 결과다. 꽤 주목을 받은 그 연구 결과는 이후 우리나라에서 언론을 통해 잊을만하면 한번씩 ‘알루미늄=치매’라는 등식으로 (대학 교수의 인터뷰를 덧붙여) 기사화되고 정설이 되어버렸는데, 정작 해당 연구소는 연구 내용을 오래 전에 철회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비슷한 연구는 그것 말고도 많았을 것 같긴 하고, 알루미늄 성분 자체가 치매와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걸 부정할 일은 아닐 거 같다. 그러나 이런 의문점에 대해 실험을 진행하고 분석한 서구 유수의 음식 매체들이 강조하는 지점은 안전한 그릇 재료가 무엇인가보다는 안전하게 그릇을 쓰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우린 왜 알루미늄 ‘그릇’에 이렇게 호들갑일까.

정리하면, 일상 생활에서 알루미늄에 비해 철이나 화학코팅이 된 것, 화학 성분의 칠을 한 목기나 납 성분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도자기 같은 그릇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볼 근거는 없고, 다 위험할 수 있다. 설거지를 한 후 물기를 닦지 않고 말려 쓰면 어떤 종류의 그릇이든 쉽게 손상되고, 김치찌개를 냄비째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하는 정도의 습관이라면 어떤 그릇이든 화학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충분한 것. 유리는 안전한가?? 유리 성분에 포함된 나트륨 이온과 물이 반응하면 투명한 유리가 하얗게 부식된다. 요즘 많이들 쓰는 주철 냄비에는 유리질의 유약을 발라 굽거나 화학코팅을 한 경우가 많고 스테인리스 스틸도 합금 성분(철, 니켈, 크롬)에 따라 화학반응이 충분히 일어난다. 그렇다면 화학반응은 모두 다 위험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낭설 하나 더 추가하면, 가마솥에 밥을 지어먹으면 철 성분이 체내로 들어와 몸에 좋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말도 안된다. 철 성분이든 미량의 알루미늄 성분이든 몸 안으로 들어오면 거의 대부분 똥오줌으로 빠져나갈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상한 그릇 미신에 휘둘리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un-over-prepared

산소 토치로 철골(=H빔)을 자르는 건설쪽 작업이 있다. 건물을 지을 때 땅을 파 내려가면서 주변 토양의 압력을 버티는 구조를 만드는데 철골로 짠 그릇같은 공간이다. 그 후 지하층을 포함한 지반에 해당하는 거푸집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부어 다 굳으면 바깥에 방수 처리를 한다. 마지막으로 맨 처음 만들었던 철골로 된 “그릇같은” 구조물을 산소 토치(산소와 LPG 가스를 섞어 만든 고압의 불꽃)로 하나씩 잘라내면서 크레인으로 끌어올리고, 동시에 흙을 메꾸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학 시절 방학 때 이런 용단(용융하여 절단하는) 작업에 투입되는 용접공의 보조로 알바를 해본 적이 있다. 목동 한국통신 사옥 공사. 십여 미터는 족히 되는 길이의 철골 양 끝 부분을 1센치 정도만 남긴 후 크레인에서 내려온 앙카를 연결하고 한쪽씩 마저 잘라낸다. 한쪽을 잘라낸 후 반대편에 손톱만큼만 남은 상태로 매달려 있는 철골의 마지막 부분을 잘라낼 때엔 매우 조심을 해야 한다. 크레인에 매달려있긴 해도 철커덩 하는 굉음을 내면서 요동을 치기도 하기 때문에 운이 없으면 튕겨 나온 철골에 맞아서 크게 다치거나, 높은 곳이라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

그런데 그 시절의 안전 감각이란 이런 거였다. 내가 꽤 무게가 나가는 토치와 가스줄을 들고 삼사층 높이의 철골을 거의 기어서 가느라고 정신이 없었다면, 숙련된 용접공 아저씨는 점심 나절에 사이다컵으로 마신 깡소주에 취기가 오른 상태로 이리 저리 원숭이처럼 하늘 위를 누비곤 했으니까. 어쩔 땐 얼굴이 뻘개진 상태로 무거운 전기용접기를 들고도 그 위를 휘청거리면서 얼마나 잘 걸어다니시던지… 직접 목격을 하진 못했지만, 결국 그 용접공 아저씨도 자르던 철골에 맞아 다쳤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금속공예를 전공한 학교에서도 위험한 게 많았다. 크고 작은 기계와 날카롭고 위험한 도구들. 기본적인 안전 개념을 챙기기 시작한 건 대학원에 들어간 2000년대 이후였던 거 같다. 3학년때 교환학생으로 온 캐나다 친구가 실톱질을 할 때에도 보안경을 쓰는 걸 보고 왜 그러냐고 물을 정도로 많이 한심했다.

아마도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뭐가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다. 그저 싸고 빠르게 내달려야만 한다는 강박과 불안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욱 강화된 거 아닌지. 요즘 가장 어이없는 고공 크레인 사고를 보더라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지만 요행으로 피할 수 있었던 위험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만 할 뿐이니까.

안전한 환경. 제도와 교육 외에도 어떤 문화적, 사회적 공감대가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일텐데. 공무원의 수보다 대처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도, 대처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공무원의 수를 늘려야 한다는 말도 딱히 결정적인 해답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새해에는 이런 식의 황망한 죽음이 더 이상은 없기를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