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는 버려야 할 말인가? _ 전용일

한국의 공예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고 할 수 있는 홍익대학교에서 최근 ‘금속공예과’의 명칭을 바꾸었다. 바뀐 이름은 ‘금속조형디자인과’. 이로서 도예과, 섬유미술과, 목조형가구과 등과 함께 이들 공예관련 학과의 이름에서 ‘공예’라는 말은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동교 출신의 금속공예가 모임인 ‘홍익금속공예가회'(홍금회)의 명칭도 ‘홍익금속조형작가회’로 개칭했다. 잠시 외국에 머물다 온 나에게 ‘공예’라는 말이 빠진 새 명칭들은 무척 생소했다.

홍익대학교의 영향인지 이후 지방에서 보내주는 단체전, 동문전들의 팜플렛에서는 점점 ‘ 공예가회’, ‘ 공예전’이라는 말 대신 ‘ 작가회’이니 ‘ 조형전’등의 명칭을 자주 대하게 된다. 이들 단체들의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새 명칭들이 후배 공예가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공예’라는 용어가 이들의 말에서 뇌리에서 점점 멀어질 것 같은 생각이다.

서울대학교에서는 공예과 2개 전공과 산업디자인과 2개 전공이 통합되면서 ‘공예’라는 말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는 ‘디자인학부’라는 간판을 달았다. 공예전공을 생각하며 이 디자인학부를 응시하는 ‘고마운’ 학생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학부제의 진통을 겪으며 많은 대학들에서 유사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새 명칭들에 대한 생소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려로 변한다.

이름과 학과명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가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한 개인의 이름이나 동네의 분식점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개인이나 분식점의 이름도 물론 중요하다) 공예가들 스스로 그렇게 말해 왔듯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 문화영역이며 지금도 한해 6천명정도의 전공자를 배출하는 조형교육의 대단위 영역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이 용어로 인해 우리 분야의 고유 영역이 설정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어 속에, 이 분야가 다른 인접분야와 다르다는 지시가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의 성격과 자리매김은 아주 불투명해질 것이다. 이 용어가 하나의 ‘기호’로서 ‘이 분야’와 ‘이분야가 아닌 것’을 구별짓지 못한다면 그것은 대명사로서 부적합하다. 한 분야의 정체성Identity를 분명히 지시하고 있는 용어를 정립하고 사용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이들 명칭중에서도 특히 대학의 학과명은 중요하다. 대부분의 분야가 그렇듯이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에 그 영역이 설정됨을 봄으로써 우리는 그 분야의 존재를 실감한다. 대학의 학과명, 전공명은 한 분야의 창구 역할을 하는 대명사로서 일반인들과 미래의 교육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 때문이다.

대학으로부터 ‘경영학’라는 말을 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경영’이라는 것이 하나의 학문적인 분야 –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야 –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인류학’이라는 학과명이 대학에 없다면… ‘해양학’이 없다면… 그 분야를 일반인들이 다른 경로를 통해 알기란 훨씬 어려울 것이다. 대학에서 ‘공예’라는 말이 빠져나가고 있는 점을 우려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변화와 열등감

공예학과들의 명칭이 바뀌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공예’라는 말이 빠져야 학생들이 더 지원한다는 것이다. 슬픈 얘기다. 그래서 ‘공예’를 아예 빼거나 ‘디자인’ 혹은 ‘예술’등의 용어와 얼버무린 신조어들이 탄생된다.

당장 미달사태를 맞는 학과의 사정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손님부르기’를 위한 새 이름짓기는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새 이름으로도 학생들이 더 지원하지 않는다면… 계속 이름을 바꿔나갈 것인가?
또 서울대학교의 경우와 같이 학부제로의 이행에서 적당치 않은 이름을 달고 통합되는 경우도 여럿 있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새 이름의 채택이 힘의 논리에 의한 강제이었는지 공예과 교수들의 안일함과 무능함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학부제의 가장 부정적 측면이 서울대학교 공예전공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디자인학부’라는 간판을 보고 ‘디자인’을 하려고 입학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3학년부터 ‘여기 공예전공도 있으니 정원의 반은 이 전공을 택해야 한다’ 는 결과가 되었다. 학생들에게 전공선택은 인생의 선택이다. 생각해보지 않은 전공, 원하지 않는 인생을 성적순으로 강요할 것인가? 이들속에서 공예분야의 지도자들을 키우겠다는 것인가?

지원자의 감소, 혼돈스런 제도개혁, 힘의 논리, 젊은 세대에 대한 편승 등의 여러 이유가 공예교육자들로 하여금 학과명을 바꾸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더한다면 오히려 근본적인 것이다. 공예가들 자신의 이 ‘용어’에 대한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주변의 공예가들로부터 ‘공예’에 대한 철학이나 신념보다는 열등감을 자주 본다.

아직 이 말에 믿음을 갖기에는 이른 후배들은 그렇다치고라도 공예계의 리더라고 자처하는 선배 공예가들 중에서 개인의 여러 목적에 따라, 상황에 따라 공예가라는 자신의 명함을 슬쩍 바꾸거나 가리고 싶어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늘 미술계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 머물고 있다는 의식과 함께 그 원인을 ‘공예’라는 배경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공예는 이제 안돼’ 라던가 ‘공예 말고 뭐 다른말 없나?’ 하는 식의 발언들을 한다. 이는 열등감이며 자신의 노력의 부재, 능력의 한계를 엉뚱한 곳에 연결시키려는 자기합리화다. 이런 공예가들이 용어에 관해, 그 선택에 관해 깊게 생각할 리 없다.

용어에 대한 생각

어느 미술대학에 한 과 이름은 회화과이고 이웃의 다른 과 이름이 동양화과라면 우리는 웃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영역의 구분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화과와 동양화과이거나, 회화과와 ‘회화과가 아닌, 그림이 아닌 것을 다루는 어떤 과’일 때 비로소 그 설정이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우선 금속공예 분야의 예를들어, ‘금속조형’이라는 말을 문제삼는다. ‘금속조형’이라는 명칭은 ‘(금속)조각’과 영역을 구분시키지 못한다. 공예가들이야 ‘같은 금속을 다루지만 사실 내용은 좀 다릅니다’할 지 모르지만 그건 우리끼리 얘기다. 한 문화영역의 대명사를 논하면서 우리의 얘기만을 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객관성이 있어야 하며 통용되는 의미만큼 말 자체의 뜻에서 적합해야 한다.

앞에서의 예와 같이 한 미술대학에 ‘조각과’가 있는 옆에 ‘금속조형과’가 있다면 웃음거리다. 조형(造形)이라는 말은 형태를 다루는 예술행위, 즉 ‘미술’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금속이라는 말이 앞에 붙는다고 해서 그 의미가 특정화되지는 않는다. 매체의 고유성이 강한 도자나 유리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편적 재료인 금속이나 나무 등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같은 이유로 ‘금속디자인’이라는 말도 제품디자인이라는 용어 속에 하위개념으로 포개질 수 밖에 없다. 고유영역을 설정하지 못한다. 제품디자인학과(혹은 산업디자인학과)옆에 금속디자인학과가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금속조형’과 ‘금속디자인’이 합성된 ‘금속조형디자인’이라는 말이라면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까? 복합적일 뿐이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전히 고유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의미상으로는 현대의 공예가 소위 ‘순수조형’과 디자인의 영역을 함께 관여하고 있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용어상으로 이 명칭은 혼돈스럽다. 자칫 조각과 디자인의 사이에서 불분명한 아류의 이미지를 더하는게 아닌가 우려가 된다.

공예가가 ‘조형작가’라는 명함을 사용하는 것도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혹 ‘조형’이라는 말이, ‘작가’라는 말이 더 포괄적이고 근사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래서 대외적으로 융통성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한편, 자신이 기반을 둔 영역의 고유성을 희석시키는 일이다. 더 명료하게 부각하려 애써야 할 사람들이 공예가 자신이 아닌가?

또, 학과명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공예디자인’, 그리고 ‘공예디자이너’라는 말도 의미의 중복성 때문에 거북하다. 공예라는 용어속에 이미 디자인의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신세대의 고객들을 위한 합성용어이거나, 디자인이라는 말에 대한 사대주의 같은 느낌이다.

정체성의 중심은 ‘공예’라는 말

영어권의 서구에서도 공예가들에게 말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러나 craft라는 말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이 말이 가진 뉘앙스를 안다면 훨씬 이해될 수 있다. craft의 어감은 우리의 ‘공예’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며 일반인들의 이 말에 대한 선입감은 예술적 활동 보다는 상대적으로 취미활동, 특정기술 등으로 먼저 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예작가들이 craft라는 용어를 버리지 않고 예술적 활동을 통해 이 말은 빛내고 있다. 과거의 용어가 아니라 이 시대의 용어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공예분야의 모든 영역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공예잡지인 Craft(영국), Amerian Craft(미국)도 건재하다.

영국의 디자인, 공예분야의 이론가인 Mike Press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craft라는 말이 마치 사회주의(socialism)라는 말과 같이 광범위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라 했을 때 어떤 이는 구소련의 공산주의, 무시무시한 북한의 전제주의를 떠올리지만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가 현대 유럽에 가져다준 복지제도의 변화와 남녀평등 등을 먼저 떠올린다. 공예 역시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용어이다. 가장 창조적인 조형행위에서부터 전형적인 아마츄어리즘의 소일거리까지 포괄한다. 이런 광범위함 때문에 공예작가들이 이 말을 버린다는 것은 어리석다. 이 말을 끌어올리고 빛낼 사람들은 역시 공예가다.’

craft에 비한다면 공예(工藝)라는 말을 가진 우리는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일반인들에 대한 ‘공예’, ‘공예품’이라는 어감은, 그래도 고급스럽고 뭔가 예술적인, 창조적인 어떤 것을 연상시킨다. 간혹 ‘옛 것’, ‘골동품’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연상이 고려청자나 금관에 가깝지 짚신이나 여물통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어떠한가. ‘공예’는 그렇게 불리한 용어인가? ‘디자인’, ‘패션’등과 같이 시류(時流)의 복판에 있지 않다는 책임이 이 용어 자체에 있는가? 그 시류의 허실을 안다면 이 남들의 떡이 하나도 부럽지 않거니와, 나는 ‘공예’라는 말이 새 시대에 새 세대에 맞지 않다는 어떤 이유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공예’가 젊은 학생들에게 생소하고 멀다면 그 이유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있다. 디자인계 사람들이 그동안 노력한 만큼, 영화인들이, 만화인들이, 컴퓨터쟁이들이, 일반인과 학생들에게 다가가려고 부단히 기울인 그 노력을 공예인들은 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에 있다.

우리 분야의 가장 뚜렷한 정체성은 ‘공예’라는 말 속에 들어있다. 이 분야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공예분야는 무엇인가? 그것은, 재료와 기술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주로 수공 방식에 의해 조형물을 제작하는 행위이며 영역이다. 수공이라는 생산방식과 가치로 인해 산업디자인과 구분되며, 생산물이 인간의 실존적인 생활공간과 밀접하게(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조각과 구분된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이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지시하고 있는 용어는 ‘공예’다. 이 의미를 다른 말에 옮겨 실어야 할 필요도 없고 옮겨 실을 말도 적당치 않다.

‘공예’라는 말을 우리는 이 분야의 창구에서 자신있게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자주 사용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공예가들이다. 말도 그러하며 글도 그러하다. 공예가 개인도 그렇고 단체나 대학도 그렇다. 그것이 우리 분야를 지키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다. 우리나라 대학의 모든 공예관련 학과, 전공의 명칭에서 일관되게 ‘공예’라는 용어가 뚜렷이 보여도, 대외적 인지도에서 큰 차이를 만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다시 생각해보자. 간판을 바꾸려는 여러 궁리보다 어떻게 해야 공예계가, 공예교육이 내실을 가질 수 있나 고민해 보자. 무엇이 궁극적으로 이 분야에 젊은이들을 모을 수 있는 일인지를 생각해 보자.

1999년 전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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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전용일 교수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글쓴이

최 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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