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천장을 직접 보았습니다

▲ ‘드리쿵사원’과 ‘천장장’ 요약도
드리쿵 사원은 라사에서 차량으로 5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쿤둔, 천장(天裝)

언젠가 카트만두의 한 비디오방에서 기억에 남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카트만두에는 비디오(DVD)를 틀어주는 여행자를 위한 식당이 몇 곳 있는데 음식의 종류야 특별히 좋을 것이 없지만 가끔 가다 아주 유명한(매트릭스, 타이타닉, 에너미오브 스테이트 등등의 블럭버스터 영화들) 영화들을 틀어주기 때문에 서양권 여행자들은 그곳을 많이 찾게 됩니다.

제가 묵었던 숙소의 지하에는 그런 영화식당이 있었습니다. 자주 보아 안면이 있던 그 식당의 주인은 내가 가끔 가다 음식도 안 시키고 앉아 있어도 그냥 봐주기도 했고 그렇게 몇 편의 영화를 보게 되었죠.

평소에 티벳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았던 나는 아주 생소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 제목이 바로 우리나라에도 늦게나마 들어왔던 ‘쿤둔’이었습니다.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영화를 보고 실망이 컸던 나는 그 영화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어느 즈음에선가 그 영화 속에는 ‘천장’을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시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한 노 스님이 썩둑 썩둑 팔을 써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호숫가였지요 아마…

그렇게 마지막 20세기를 보낸 저는 그 쿤둔이라는 영화 속의 천장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라사에서 남초호수, 그리고 드리쿵 사원으로

한해가 흐른 후 이번 여행에서 티벳을 염두에 둘 때에도 천장이라는 것을 굳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도의 바라나시에 처음 가보았을 때 날마다 들르던 화장터도 나중엔 별 느낌이 없어지고 기분도 그리 유쾌하지를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 걸 보면서 인생이 어떻고 삶이 어떻고 하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라사의 숙소 주변에는 인근의 남초호수나 다른 여러 사원으로 짧은 트래킹과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팀원모집벽보’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대중교통수단이 그리 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현지인들도 여러 명(보통 6명)이 한꺼번에 랜드크루저(도요다의 4륜구동차 / 티벳전체의 4륜구동차 중 적어도 50% 이상을 점유)를 빌려서 이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사에서 뒹군 지 3일째 되던 날에는 네팔에서 같이 국경을 넘어왔던(같은 랜드크루저를 함께 타고 왔던 이스라엘, 대만, 캐나다인)사람들이 모여서 2박3일간의 남초호수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남초호수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남초호수에서 하루를 보낸 후 돌아오는 길에 ‘드리쿵 모나스트리’라는 곳에 들렀습니다. 티벳에서는 거의 모든 사원이 오지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곳 또한 한참을 계곡 속으로 들어간 후에나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꽤 높은 산 옆면에 어찌 만들었는지 모를 건물들이 군데군데 자리잡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나즈막한 아랫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었죠.

비오는 구불구불하고 협소한 비포장 진입로를 겨우 겨우 차를 타고 30여 분을 올라가니 아주 어둡고 낡아보이는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서는 아랫쪽 마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모양을 약간만 바꾼다면 중세 영주의 성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티벳은 정교일치의 국가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간의 시주를 하고 그곳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습니다. 숙소가 낡기는 했지만 전망이 너무 좋은 곳이었습니다. 산 꼭대기에 위치한 사원이라…

아무튼 우리는 구내에 있는 매점에서 대만에서 수입되온 사발면을 하나씩 샀습니다. 티벳도 중국령인지라 중국에 널리 생산되는 여러 종류의 사발면과 대만에서 수입된 사발면을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발면보다는 좀 심하게 기름기가 많긴 하지만 소세지가 통째로 별도 부록으로 들어 있는 종류도 있고 일회용 포크가 들어 있기도 해서 재미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중국어가 유창할 수밖에 없는 대만 친구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로 ‘스카이 배리’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다가 늦게서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아랫마을의 한 사람이 며칠 전 죽었고 그 장례를 내일아침에 이 사원의 ‘천장장’에서 치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당연히 봐야겠다는 말들을 했었는데 시간이 갈 수록 한 사람 두 사람씩 망설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는 망설이던 사람들을 제외한, 나와 몇 사람이 천장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천장

비가 축축히 내리는 아침이었습니다. 나는 디지털 카메라를 만지작 만지작하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찍으면 절 대 안된다고 하긴 하던데… 아냐 그래도 찍어야지… 아닌데…. ‘

우선 카메라를 그냥 가져가기로 마음을 정한 후 바깥으로 나와서 우리가 묵은 숙소 바깥 마당을 보니 장례에 참석하는 가족인 듯 한 사람들이 아랫마을에서 힘들게 올라와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원의 윗쪽에 있는 ‘천장장’으로 가기 시작하면서 우리도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습니다. 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천장장은 산 기슭의 넓은 곳을 방책으로 막아놓은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 꼭대기 쪽에는 중학생의 몸집만한 독수리 여러 마리가 날개짓과 함께 괴성을 지르며 서성였습니다. 50마리는 족히 돼보였습니다.

초르텐과 흰 천으로 둘러싸인 방책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에는 자갈로 된 기단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곳을 지나가자 알 수 없는 비린 냄새가 약간씩 나는 것 같았었고 이미 그 자갈 위가 심상치 않은 곳인 걸 알아차렸지만 무슨 생선냄새와도 같은 것이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도 들어와서 자갈밭 옆에 모여서자 한쪽에서는 봉화대 비슷한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불을 쬐려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장례도중의 역한 냄새를 조금이라도 덮기 위한 연기를 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묵었던 절에서 온 젊은 승려(천장사)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자 한 팔 길이는 될 듯한 긴 칼과 갈고리가 있었고 큰 돌멩이가 매달린 돌망치와 보릿가루가 든 바가지가 나왔습니다. 그 승려는 연신 웃음을 지으며 큰 칼을 숫돌에 갈아대었고 죽은이의 가족들은 무엇인지 모를 주문(아마도 불경을 외는 것)을 중얼거렸습니다.

멀리서 지게를 지고 오는 모자쓴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 지게 위에는 힌 천으로 이리저리 감아놓은 시신이 올려져 있었는데 마치 쌀가마같이 둥그렇게 감싸여 있었습니다. 모자를 쓴 그 사람은 둥그런 자갈밭 주위를 맴돌며 중얼거리다가 중앙에다 그 흰 천으로 싸인 시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시신이 도착하자 칼을 갈던 천장사가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위쪽에 모여 있던 독수리 떼들이 그 사실을 훤히 알고 자갈밭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죠. 새는 지능이 별로 높지 않다지만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독수리들의 모습은 마치 사람을 보는 듯했습니다.

망자의 가족중 몇몇 사람이 나서서 미리 준비한 초르텐이 달린 긴 장대를 들고 “훠이…훠이”소리를 내며 독수리들이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도록 막는 동안 천장사가 시신을 감은 두루마리 천을 갈고리와 긴 칼을 이용해 풀고 잘랐습니다.

그리고 검푸르게 변색된 시신이 자갈 위로 힘없이 떨어졌습니다. 대만에서 왔다는 나의 룸메이트는 얼굴을 돌리며 역겨운 표정을 지었고 몇몇 가족들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인도의 화장이나 티벳의 천장 때 가족들이 덤덤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가족들을 많이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음, 영원한 헤어짐은 종교적인 신념을 통한 억제력보다도 더 강한 추억을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천장사의 손놀림은 흡사 고기를 발라내는 정육점 아저씨처럼 능숙하고 빨랐습니다. 그 때부터 그 시신은 고깃덩어리가 되었고 갈고리로 들어올려진 후 그 긴 칼로 이리 저리 발라졌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서있던 주위로 표현할 수 없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는데 냄새를 가라앉힌다는 연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먼저 둔부에 칼집을 내고 허벅지의 군살을 발라내었죠. 조그마한 덩어리들이 자갈 위로 떨어졌습니다. 독수리들은 더욱 큰 괴성을 질러대며, 다가오는 것을 막는 가족들 앞을 날뛰었습니다. 시신의 두꺼운 부분을 발라낸 천장사는 마지막으로 머리 뒷쪽을 갈고리로 찍어 벗겨내었습니다. 사람의 피부도 질긴가봅니다. 한 번에 벗겨지는 머릿가죽의 모습이 내 기억에 강하게 각인되었습니다.

어릴 때 백과사전에서 본 인체의 근육모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그 시신은 벌건 속살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독수리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전쟁, 살육, 다툼, 욕심……’

그 독수리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 시신을 뜯었고 우리는 그때부터 한 20여 분 동안 시신을 볼 수 없었는데 너무도 많은 독수리들이 서로 밟고 올라서며 좋은 부위를 먹기 위해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지러운 순간이 지나간 후 천장사가 다시 자갈밭으로 들어섰고 가족들은 독수리를 산 위로 다시 쫓아내었습니다. 천장사는 커다란 돌망치를 가지고 들어섰고 완벽하게 뼈만 남은 시신을 들었습니다. 뼈와 뼈 사이는 신기하게도 모두 붙어 있어서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뼈들을 자르고 부숴서 가루로 만든 후 라마교 사원에서 신성시되는 보릿가루(참파)를 뼈와 잘 섞어서 독수리에게 뿌려주자 식욕이 오른 독수리들이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두개골이었습니다.

두개골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천장사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긴 돌망치를 하늘로 치켜올린 천장사의 마지막 주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망치 끝의 돌덩어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두개골을 내리쳤습니다.

‘쩌억’

부서진 두개골을 손으로 벌린 천장사는 뇌를 꺼내어 참파와 잘 섞고 으깨어 독수리에게 뿌려주었고 두개골 또한 부순 후 참파와 섞어 뿌려주었습니다.

가족들은 두개골을 돌망치로 깨는 순간부터 자갈밭을 떠나 주위의 탑을 돌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생각하건대 아마도 그것이 장례의 마지막이라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잃고 제자리로 돌아간 독수리들에게도 다가가서 마치 대화를 나누듯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남은 것과 떠나간 것

이렇게 나의 천장 구경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고보니 내 품 속의 카메라는 나와보지도 못했죠. 같이 올라왔던 여행 동료들은 저마다 상기된 얼굴을 서로 바라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장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참혹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는 것은 두려우면서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만심과 우월감과 허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냥 드는 생각은 정육점의 고깃덩어리 같았다는 것이죠. 우습게도 여러 곳의 적나라한 장례행위를 볼 때, 그리고 우연치 않게 여행 중 목격한 죽음의 장면들은 곧장 뻘건 고깃덩어리를 연상시켰습니다.

어설픈 선문답을 늘어놓을 만한 인격이 못 되기에 나는 여기서 이 글을 더 쓸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그 사원을 방문했던 며칠간은 단 한장의 사진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장
조장은 과거 유목민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건조한 기후의 지역에서 주로 거주했던 몽골리안에게서 보여지는 장례풍습입니다. 독수리 등의 조류에게 시신을 먹이로 내어놓는 독특한 방식의 이 풍습은 티벳의 경우 천장(하늘로 돌아가게한다.)으로 불리웁니다.

천장은 공식적으로 외부인의 참관이 허락되지 않으며 그 형식 또한 여러 가지라고 합니다. 이런 조장의 풍습은 우리의 원류와도 연결되는 몽골리안의 전통이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PS1_정정합니다.
룽다 = 티벳 사람들이 축복을 기원하는 오색의 경전이 씌여진 깃발
초르텐 = 티벳 사람들이 길목이나 고개, 사원등에 기도를 목적으로 세워놓은 돌탑
PS2
몽고 본토와 티벳, 부탄, 그리고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 등 각 민족에 따라서 조금씩 틀리지만 ‘몽골리안’의 대표적인 장례풍습은 바로 ‘정신은 하늘로, 시신은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티벳 안에서도

글쓴이

최 윤호

Independent Researcher & Writer in Design +++ Visit my PROFILE page to find out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