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교수가 검찰총장에게 띄우는 공개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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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단죄는 법치주의 확립 분수령 될 것

오마이뉴스(news)

검찰이 24일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 사건과 관련,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에 근무했던 관련자 1∼2명을 주중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로 기소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미국 씨에틀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곽노현 교수(방송대 법학과)가 A4용지 8장 분량의 글을 에 긴급 기고해왔다. 곽 교수는 지난 2000년 전국 법대 교수들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임직원들을 배임혐의로 고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편집자 주

삼성그룹의 3세 경영권 세습과정에서 되풀이된 이건희 회장의 특별배임혐의를 고발한 43인 법학교수를 대표하여 이 사안 수사의 역사적 의미와 적용법리, 그리고 몇 가지 당부사항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총장님은 요즘 대선자금 수사지휘에 바쁜 나머지 삼성 이건희 회장의 배임혐의에 대해 신경을 못 쓰고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법치주의의 관점, 즉 특권 및 부패와 투쟁의 관점에서 정치권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와 재계의 불법 승계과정 수사는 달리 볼 여지가 없으리만큼 ‘쌍둥이 사안’입니다. 역사적 비중과 현실적 의미에서 어느 하나 소홀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일란성 쌍둥이 : 정치권 불법 대선자금과 재계 불법 승계

불법 대선자금에 의한 정치권력의 창출과정과 배임성 저가발행에 의한 경제권력의 창출과정은 우리 사회의 최정상 권력들이 권력 영속화를 목적으로 벌여온 불법과 편법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언뜻 보기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국가와 시장의 최고권력 창출과정은 머리가 하나인 불행한 쌍둥이처럼 서로 뗄 수 없게 연결돼 있습니다.

재벌일가는 집단적으로 정치권에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배임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비자금 조성을 묵인받고 족벌승계를 묵인받았습니다. 정경유착 구조의 궁극적인 수혜자는 재벌일가들이었습니다. 재벌총수들은 정치자금을 대줌으로써 정치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분식회계, 특혜거래, 무세(無稅)세습 등을 도모하며 사회적 지배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권력형 부패, 리스트 정치, 재벌가의 특권계급화 등 반민주적인 ‘재벌공화국 증후군’과 법과 당국에 대한 ‘불신냉소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 건 그 결과입니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와 배임 승계과정 수사는 불법 정치자금의 대가로 재벌들에게 치외법권이 주어졌던 어두웠던 한 시대의 종언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시대의 검찰과 법은 정치권력을 시중들며 정치권력의 돈줄인 재벌총수의 불법편법에 관대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수사권을 발동도 않거니와 별건 수사 중에 범법 단서를 포착해도 서둘러 덮고 축소하기 바빴습니다. 정치권력의 보호막 안에서 저질러진 불법과 비리가 워낙 뿌리가 깊었기 때문에 ‘국민경제에 미칠 악영향과 대외신인도를 감안해서’ 수사와 처벌의 시늉만 내고 덮어버리기를 거듭했습니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손아귀에서 놓아줬고, 검찰 역시 거듭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삼성그룹의 배임세습 사안은 7년을 질질 끈 끝에 결국 독립검찰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재벌총수의 입장에서는 고양이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인 이 사건에서 무서운 역사의 교지(狡智)를 읽게 됩니다. 불법 정치자금과 불법 족벌승계를 두 기둥으로 삼아온 한국 정치경제체제를 이 참에 확실히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열라는 역사의 강력한 요구를 읽게 됩니다.

독립검찰의 손에 넘겨진 삼성의 배임세습, 지금이 기회다

상호의존적이고 상호보강적인 구조적 불법비리에 대해서는 강도 높은 동시 단죄로 동시 척결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은 한쪽이 반드시 다른 한쪽을 되살려 다시 유착구조를 만들게 돼 있습니다.

급물살을 타고 있는 대선자금 수사가 정치권의 부패특권을 다스릴 최상의 기회라면, 삼성사안 수사는 재계의 배임특권, 곧 계열사 재산과 기업가치를 개인재산인양 제멋대로 빼돌리며 몸집을 불려온 재벌총수의 파렴치한 자기거래 관행을 다스릴 최상의 기회입니다.

다행히 대선자금 수사에 비해 삼성사안 수사는 훨씬 간단하고 용이합니다. 대법원의 배임죄 관련판례와 지난 6월의 SK 배임사안에 대한 1심 판결, 그리고 며칠 전 삼성전자의 비상장주식 저가양도에 대한 2심 판결에 비추어볼 때 삼성사안 수사는 고의입증과 공범인정 등 배임법리 적용에 복잡하고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이미 총장님의 ‘법대로’ 판단만 남아 있는 상태일 겁니다.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국민들이 바라는 것이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반민주적 정경유착의 총체적 진실인 것처럼, 삼성사안 수사를 통해 국민들이 바라는 건 상속·증여세를 바보세로 만들면서 2세·3세들에게 보란 듯이 그룹경영권을 대물림해온 연금술적 세습과정에 숨어있던 반시장적 반기업적 불법·편법의 총체적 진실입니다. 검찰은 지금까지 술집과 지하를 배회해온 이 두 가지 진실을 이제 밝은 세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민의 부릅뜬 눈으로 똑같은 불법의 재발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최상층권력의 불법 앞에 법이 멈춰 섰던 구시대를 마감할 수 있습니다.

동시척결, 한쪽을 놔두면 반드시 다른 한쪽을 되살린다

정치권력의 자발적 검찰통제 포기에서 비롯된 한국법치주의의 선순환은 삼성총수의 배임승계 단죄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오직 검찰의 기존입장 수정입니다. 검찰은 지금까지 재벌총수의 계열사 노략질을 기업내부 사항으로 보고 매우 관대한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사법제는 업무상 배임범죄, 특히 회사경영진의 업무상 배임행위를 엄벌에 처하는 입법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반형법에 배임죄를 둬서 배임행위 전반을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업무상배임죄와 이사 등의 특별배임죄를 따로 둬 형량을 높였고, 이것으로도 안심이 안 돼 배임액수가 큰 경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가중처벌을 명할 정도입니다. 배임관련 형사법제는 시장경제와 시민사회의 신뢰기반을 보호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핵심형법으로서 검찰이 강도 높게 집행해야 마땅합니다.

재벌총수는 계열사 경영진에 대해 절대권력을 갖고 있으므로 계열사를 상대로 각종 거래(자금거래·토지거래·주식거래·용역거래·주식발행·주식상장·회사합병 등)를 도모할 때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조건을 정하기 쉽습니다. 현실적으로 재벌총수와 계열사간 거래는 재벌총수의 쌍방대리이자 자기거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총수의 계열사 노략질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정한 선을 넘으면 이 때는 배임죄로 다스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강력합니다. 이런 경우 국세청의 증여세 추징이나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혹은 사외이사의 통제나 주주의 대표소송은 정의에 반하거나 실효성이 없습니다.

상속증여세법의 증여의제 조항에는 재벌총수들이 계열사들을 봉으로 삼아 사복을 채워온 다양한 배임수법들이 열거돼 있습니다. 삼성사안에 대해서도 마치 증여의제 조항의 적용여부가 문제인 것처럼, 따라서 증여세 추징여부가 문제인 것처럼 잘못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계열사 경영진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제3자에게 회사 재산이나 기업 가치를 증여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헐값발행이나 헐값양도를 통해 실질증여를 결과할 경우에는 월권과 배임으로 민형사상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룹총수와 계열사간 일방거래의 실질을 계열사의 ‘증여행위’로 보고 증여세 부과에서 해법을 찾는 입장은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물론 재벌총수의 배임범죄를 은폐·왜곡하는 결과를 빚습니다. 계열사에 과징금을 부과하는 공정위의 방식 역시 수혜자의 부당이득을 그대로 놓아두고 피해자인 계열사를 이중처벌하는 점에서 부적절합니다.

회사법에 정한 사인간 소송이 검찰의 배임통제역할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재벌체제는 회사법의 무덤입니다. 독립법인을 상정한 회사법의 통제장치는 재벌체제에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회사법이 정한 주주대표소송은 비상장재벌계열사에서 전혀 듣지 않습니다. 총수 가족과 계열사들, 그리고 임직원으로 이뤄진 주주 구성상 대표소송을 제기할 독립주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버랜드의 기존주주도 중앙일보를 위시한 몇 계열사들과 총수의 일가붙이였습니다. 에버랜드 경영진이 헐값발행을 단행함으로서 계열사의 지분율은 종전의 37.5% 수준으로 희석된 반면, 이를 상쇄할만한 기업가치 증대는 수반되지 않았습니다. 현금 96억 원, 혹은 자산규모의 1%, 혹은 주당 5000원이 늘었을 뿐이니 무시해도 됩니다. 따라서 기존주주가 보유한 주식가치 역시 종전 대비 37.5% 선으로 급락했습니다.

일반 주주 같으면 이렇게 심각한 이익침해를 당하고 그냥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주 계열사의 경영진 입장에서는 하등 아쉬울 게 없습니다. 어차피 대차대조표에 에버랜드 주식가치를 액면가로 계상해 왔고 보유주식 수에 변동이 없기 때문에 장부상으로는 조금의 손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에버랜드 주식은 회사의 자금사정에 따라 경영진이 재량껏 처분할 수 있는 ‘연성재산’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경영진 입장에서 에버랜드 주식은 남의 재산과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계열사의 모든 출자지분이 똑같습니다. 내부출자 여부 및 내부지분 관리에 관한 한, 계열사 경영진은 아무런 결정권한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총수의, 총수에 의한, 총수를 위한 결정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재벌체제의 특징입니다.

그룹전체의 지배주주로 볼 수 있는 재벌총수의 이익은 다른 주주들인 계열사들 및 그 주주집단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배주주인 재벌총수 가족의 지분율이 채 5%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분구조에서는 총수의 이익과 그룹전체의 이익도 일치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총수의 이익과 개별 계열사의 이익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체제는 법적 권한과 책임의 괴리 및 경제적 유인과 부담의 불일치, 다시 말해서 대리비용(agency cost)이 극대화되는 비효율적 기업체제입니다. 재벌기업에서 회사법의 주주 및 이사 중심 통제장치는 유효한 맥락과 현실적 의미를 상실합니다. 회사법의 사인(私人)중심 통제장치는 제왕적 사인을 통제하기에는 너무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공권력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며 재벌총수의 배임과 전횡을 방치해왔습니다.

한마디로 재벌총수는 시장적, 조직적, 법적 통제의 공백상태에서 마음껏 계열사들을 봉으로 삼아 자기이익을 추구했습니다. 계열사들이 모든 위험을 안고 총수는 지배의 단맛만 누렸습니다. 비상장계열사에 대해서는 약탈적 가격에 신주를 발행받는 방식으로 그 기업가치를 대부분 사유화했습니다. 자식들이 크면 자식들에게 계열사의 기업가치를 부당이전함으로써 경영권 세습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재벌체제의 심화확대로 말미암아 재벌총수의 사회적 위상은 날로 강화됐습니다. 어느새 대한민국은 재벌공화국이 돼 버렸습니다.

이런 사정은 98년 외환위기 이후 소액주주운동과 재벌감시운동이 일어나고 국가채권자 IMF의 영향 아래 회사법과 공정거래법의 통제장치를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줄기에서는 변화가 없습니다. 요컨대 재벌체제의 정화 및 약화를 위해서는 재벌총수를 부당하게 살찌워온 총수와 계열사의 내부거래 및 계열사간의 내부거래에 대해 검찰이 눈에 불을 켜고 배임죄로 단속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삼성 총수의 배임승계 단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지난 10월 초 검찰의 수사보류 결정이 발표됐을 때 시중에는 무혐의불기소로 결론이 났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대선자금 수사를 빌미로 대충 넘어가는 게 아닌가 걱정되었습니다. 정치권력에서 독립한 검찰이 경제권력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가 걱정되었습니다.

정말이지 검찰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위에서 몇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최소한 다음 사항들만 제대로 수사해도 감히 무혐의처분을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첫째, 에버랜드는 96억 원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환사채를 사모(私募)발행했다고 주장합니다. 96억원이라는 특정금액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도 궁금하지만, 에버랜드가 과연 이 정도의 금융편의를 위해 금융권의 융자 대신 사채발행을 해야 했는지, 그것도 전환사채의 형식으로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지 않는 이상 사채 소화가 불가능한 형편이었는지, 사모인수인을 이재용으로 어떻게 특정했으며, 인수조건을 최대한 유리하게 하기 위해 인수인과 무슨 교섭을 했는지 조사하여야 합니다.

둘째, 여기서 발행된 전환사채는 주식전환시 기존주식의 167%에 달하는 물량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환과 동시에 사모인수인이 바로 지배주주가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에 올라온 의결자료에 이 사실이 적시되고 그에 따라 경영권 프레미엄 할증율을 얼마로 잡았는지를 명시해야 옳습니다. 설령 상속증여법상의 평가방식에 따라 엉터리 주식가치를 산출한 경우에도 거기에 최소한 50%에서 200% 정도의 경영권 프레미엄을 붙여 증액했어야 말이라도 되는 겁니다. 과연 주당 전환가액 7700원이 그렇게 결정된 것인지 조사하여야 합니다.

사실 하나마나한 조사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의중과 지시에 따라 비서실이 만든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일에 이런 정상적인 고려사항들이 끼여들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에버랜드건 주주계열사건 실무자건 경영진이건 무조건 회장님이 원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비서실이 불러주는 대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여기엔 절대권력자 총수에 대한 맹종만이 있을 뿐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한 독자적 경영판단은 전혀 없습니다. 제왕적 총수가 자기 아들에게 지배권을 양위하겠다며 일종의 친위 쿠데타안을 상정시킨 마당에 질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이사들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그 침묵과 외면이 법적으로 배임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삼성측은 그래도 배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비상장기업이라 자사주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알기 어렵고 당시 실거래실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부득이 상속증여세법에 정한 평가방식에 따랐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겁니다. 가격만큼은 ‘법대로’ 쳐서 받았다고 항변하는 셈이지만, 상속증여세법의 보충적 평가방식은 국세청이 상속증여세를 법대로 부과했는지를 판단하는 법적 기준일 뿐 사기업이 거래가를 제대로 책정했는지를 판단하는 법적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속증여세법에 따른 평가방식은 국세청의 조세업무 수행을 보조하기 위해 규정된 것이지 사기업의 발행업무 수행을 보조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사기업이 이 평가방식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경우란 상속증여세 부과처분에 다툼이 있을 때 뿐입니다.

비상장주식에 대한 상속증여세법의 보충적 평가방식은 최근 대차대조표와 최근 3년간 손익계산서만 있으면 누구든지 계산할 수 있는 기계적인 평가방법입니다. 상속증여세법 시행령이 규정한 순자산가치 방식이건 순손익가치 방식이건 기업가치 평가의 핵심요소인 사업전망 기타 미래예측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죽은 평가방식인 건 동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법상 평가액과 실제가치 사이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추정시가보다 형편없이 높게 나오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추정시가보다 형편없이 낮게 나옵니다.

다만 이것이 상속증여세법상의 가치평가액인 한 이 평가액을 초과하는 금액으로 거래된 비상장주식에 대해 국세청이 상속증여세를 부과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 결과 재벌총수들은 이중으로 이익을 챙겨왔습니다. 형편없는 헐값으로 평가액이 나온 계열사 보유 비상장지분은 이 가격에 사들인 반면 터무니없는 고가로 평가액이 나온 총수 보유의 비상장지분은 이 가격에 팔아치웠습니다. 이것이 재벌가들이 세법상의 평가액을 애지중지해온 진짜 이유입니다.

재벌총수가 상속증여세법의 평가액에 따라 계열사와 비상장주식을 거래한 경우 열이면 열 모두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그룹총수의 임무를 위배하여 자신이 지배하는 계열사와 그 주주들에 손해를 끼친’ 배임행위를 한 겁니다. 직접 실행하지 않아도 자신이 지휘감독하는 계열사 사장의 배임행위를 특수교사한 셈이고, 이런 경우 형법은 직접실행범인 계열사 이사진보다 교사범인 재벌총수를 몸통으로 인식해서 가중처벌을 주문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에버랜드는 기업평가 전문기관인 삼성증권을 자매계열사로 둔 삼성그룹의 핵심계열사로 대한민국의 일급 대기업입니다. 98년의 자산재평가 전에도 이미 자산규모가 1조원에 달했던 대기업입니다. 이런 거대기업이 기존주식 물량의 167%에 해당하는 전환사채를 신규 발행하는 형식으로 제3자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기로 결정한 겁니다.

만에 하나 이 결정이 경영진의 독자적인 경영 필요와 판단에 따른 것이라면 당연히 국내외의 두세 군데 전문평가기관에 기업가치 평가를 의뢰한 후, 그렇게 산출된 평균금액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최대한 붙여서 인수상대방과 치열한 가격교섭에 들어갔을 겁니다. 이러한 정상적 상황과 에버랜드의 실제 상황의 차이가 바로 존중되어야 할 경영판단과 단죄되어야 할 배임행위의 차이입니다.

몇가지만 조사해보라, 배임이고 배임교사다

부끄럽게도 전 검찰조직은 이렇듯 분명한 배임법리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SDS 배임사안에서 서울지검이 무혐의처분의 근거로 만들어내고 서울고검과 대검찰청이 그에 대한 항고와 재항고를 기각함으로써 확립한 사이비 법리에 따르면 ‘상속증여세법상의 보충적 평가방식을 적용하여 발행주가를 책정할 경우 배임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더 이상 뻔한 논거를 제출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상의 사례를 드는 것으로 검찰측 법리해석의 문제점을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검찰의 사이비 법리에 한껏 고무된 비상장계열사 고용사장이 자기 아들한테 똑같은 조건으로 전환사채를 발행해줬습니다. 그룹감사실은 당연히 이 간 큰 사장을 업무상배임죄로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고용사장은 세법상 평가액을 따랐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며 검찰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이 경우 검찰은 어떻게 할 겁니까?

자산재평가를 실시한 1998년에 와서야 에버랜드의 기업가치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에 1996년 말에 세법상 평가액을 적용한 건 죄가 안 된다는 항변도 있습니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궤변이지요. 98년에 보다 전문적인 외부평가를 시행할 수 있었다면 96년 말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 판례는 세법상 평가방식의 보충성을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事前) 실거래가는 물론 사후 실거래가를 발견한 경우에도 그것을 배척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이상 당해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다행히 에버랜드 주식의 경우에도 결정적인 참고가치를 지닌 사후 실거래가가 존재합니다.

98년 중앙일보의 계열분리 시 삼성계열사들은 중앙일보가 보유한 에버랜드 주식을 주당 10만원에 사들였습니다. 99년 50만주 물량의 유상증자를 단행할 때 에버랜드가 책정한 신주 발행가도 10만원이었습니다. 중앙일보 계열분리는 96년 말의 전환사채 발행 후 1년 반쯤 떨어진 시점에 완료됐습니다.

이 기간 중에 에버랜드 용인 땅에서 금광이 발견된 것도 아니고 보유재산의 가격이 급등한 것도 아닙니다. 놀이공원 사업에서 IT사업으로 전환한 것도 아니고 상장기업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에버랜드의 주식평가액은 7700원에서 10만원으로 무려 13배가 뛰었습니다. 그것도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종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곤두박질치던 IMF 경제위기의 한가운데서 그렇게 뛰었습니다. 그것도 독립사업자간 거래가 아니라 특수관계인간 거래에서 그렇게 뛰었습니다.

사실 공정가와 거리가 먼 약탈성 특혜가에 기초해서 13배가 뛰었다는 표현은 무의미한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98년 당시 중앙일보와 계열사간에 적용된 주당 10만원을 준독립당사자간의 실거래가로 인정하는 경우, 에버랜드 주식의 96년 말 현재 공정가는 최소한 50만원 선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 가지 전제 위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증시가 반토막 아래로 떨어진 1998년 시점에서 대량 주식거래를 하면서 경제위기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경제위기 상황 이전에는 에버랜드의 공정주가가 10만원이 아니라 20만원에 달했을 것으로 가정합니다.

둘째, 96년 말 이후 IMF 경제위기 시점까지 1년도 안 되는 기간 중에 에버랜드의 기업가치가 실질적으로 변동하진 않은 것으로 가정합니다. 96년 말에 이재용씨가 지배주주가 되는 과정에서 주식대금 96억 원만큼 현금자산이 늘었지만 에버랜드의 자산규모에 비추어 무시할만하기 때문입니다.

에버랜드 주식가치를 여전히 20만원이 아니고 50만원으로 보는 이유가 궁금하실 겁니다. 그것은 전환사채 발행으로 말미암아 주식수가 기존의 80만 주에서 2백만 주로 무려 167%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신주발행에도 불구하고 기업가치가 제자리걸음을 했다고 가정하면 2백만 주에 20만원을 곱한 금액을 80만주로 나눠서 얻은 금액, 곧 주당 50만원이 에버랜드 주식의 공정가액이 됩니다.

요컨대 경제위기로 주가가 곤두박질치던 98년 중반 에버랜드 주식이 준독립사업자들간에 주당 10만원에 거래된 사실을 기준으로 삼을 때, 96년 말 현재의 에버랜드 주식가치는 주당 50만원으로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물론 지배지분의 가격은 여기에 최소 30%에서 200% 정도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이는 게 관례입니다. 프리미엄 할증을 50%로만 잡아도 96년 말 이재용씨에게 마땅히 주당 77만원의 전환가격을 책정해야 옳았을 겁니다.

도대체 배임 범죄를 저지른 규모는 얼마인가

자, 이제 배임가액의 규모에 대해 정리하겠습니다. 96년 말부터 98년 말까지 실질주가가 내리면 내렸지 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에버랜드의 96년 말 공정주가를 준독립당사자간의 실거래가로 볼 수 있는 주당 10만원보다 낮게 볼 수 없습니다. 62.5% 지배지분의 신규발행으로 주당가치가 종전의 37.5% 수준으로 물타기된 상태에서 10만원에 거래된 사실을 감안하면 물타기 이전 상태의 주당가치가 최소한 20만원은 되겠지요. 여기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50%만 할증해도 30만원이 쉽게 도출됩니다. 실제로 대가로 지불된 주당 7700원은 이론적인 공정가액의 최소 1%에서 최대 2.5%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산법에 따라 배임금액을 환산하면 대략 4천억 원에서 1조 원이 됩니다. 에버랜드가 만약 독자적인 경영필요에 따라 같은 물량의 주식을 발행했더라면 에버랜드의 금고에 이만한 돈이 자본금으로 들어왔을 겁니다. 만약 이재용씨가 아닌 다른 제3자가 사모(私募)인수인이었다면 이만한 금액을 인수대금으로 치러야 했을 겁니다.

에버랜드 주식에 대한 객관적 가치평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배임가액이 특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배임가액에 따라 형사처벌의 수위가 달라지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지난 6월 SK 1심 판결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겁니다. 특경가법의 적용을 위해 검찰은 배임액이 최소한 50억원이 넘는다는 사실만 합리적인 수준에서 입증하면 됩니다. 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특경가법 적용이 문제되거나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이 사안에서는 설령 공정가액을 10만원으로 낮춰 잡아도 배임액이 최소한 1천억원을 넘게 됩니다. 무기징역까지 가중처벌할 수 있는 배임액 50억원을 수십 배 넘는 셈입니다.

배임액이 50억이 넘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다

그래도 ‘국가경제’를 생각할 때 삼성총수를 단죄하는 게 적지 않게 부담이 되실 겁니다. 하지만 경제는 법치가 확립돼 부패가 사라지고 배임이 처벌받아 신뢰가 살아날 때 가장 흥하는 법입니다. 재벌총수의 배임특권 척결은 경제적으로 순기능을 발휘할 겁니다. 성실한 사람들의 근로의욕과 기업의욕을 북돋을 것이며, 시장경제의 신뢰토대를 구축하고 족벌승계에 대한 국내외 투자자들의 우려를 씻어낼 것입니다.

더욱이 외국인투자가들이 말하는 주식시장에서의 Korea Discount 현상은 바로 재벌총수의 배임전횡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다는 게 정설입니다. 삼성사안 및 유사사안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는 소액주주와 외국인 투자자 보호에 대한 검찰의 의지를 과시하는 것으로서, Korea Discount를 없애고 국민경제를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겁니다. 나아가서 한국자본주의의 천민성 극복과 경제민주주의의 발전, 그리고 정경유착의 극복과 정치민주주의의 심화를 가져오는 역사적인 계기로 작용할 겁니다.

대통령과 재벌총수 자리는 국가와 시장의 최대권력으로서 가장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창출되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권력창출에 소요되는 대선자금의 모금사용 및 재벌총수의 권력창출에 소요되는 핵심주식의 확보과정에는 어떠한 불법과 편법도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불법 대선자금의 멍에에서 자유로운 존경받는 대통령, 불법 승계과정의 원죄에서 자유로운 신뢰받고 존경받는 재벌총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합법성과 정당성이 꼭대기서부터 확보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삼성 3세 승계 스캔들에 대한 철저 수사는 법질서는 물론 ‘체제수호’를 위해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시대적 과제입니다.

삼성 3세 승계 스캔들에 대한 수사는 ‘체제수호’의 문제

성역과 금기를 깨고 특권과 부패를 쳐서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 이것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국민들의 열망이자 시대의 요구입니다. 드디어 정치권의 대선자금과 재계의 경영권 세습과정에 대해서도 검찰수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진일보한 단계까지 왔습니다. 국민들은 특히, 거듭난 검찰이 종신 ‘경제대통령’의 창출과정까지 철저히 수사함으로써 법의 권위를 세우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엄중한 책무를 다할지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같은 동전의 양면으로 봐도 틀림없을 두 사안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기소는 ‘살아있는’ 정치경제권력에 대한 법의 우위를 최종 확인하는 한국 법치주의의 일대 분수령이 되는 것은 물론, 절실히 요구되는 정치개혁과 재벌개혁의 가장 중요한 계기와 토대를 마련할 것입니다.

대선자금과 삼성사안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가 원칙과 상식에 충실하게 나올 경우 한국사회는 미증유의 대폭발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한국 정치경제체제의 1급 뇌관이 터지는 셈이니까요.

한동안 종말을 거부하는 구시대의 신음소리와 성큼성큼 다가오는 새 시대의 행진소리가 뒤섞이며 한판 힘겨루기를 벌일 겁니다. 하지만 음험한 불법이 법의 빛을 이기지 못하고 낡아빠진 구습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법치주의에 충성하는 검찰은 법치가 유린당한 구시대의 악습과 기득권이 무너지며 내지르는 비명소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임전불퇴를 외치는 국민과 시대의 독려 나팔에 맞춰 오직 법치주의 일념으로 전진함으로써 국민과 시대의 바램에 부응해야 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건전한 상식과 법리에 부응하는 올바른 선택으로 최고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동시에 법의 지배 아래에 위치시킨 대한민국 최초의 ‘법대로’ 검찰총장으로 기억되시길 기대합니다.

미와 실용성 : (청주 공예비엔날레)

미와 실용성: 근대 조형예술에서의 문제

최 범

근대미학의 구조: 미와 실용성의 분리

근대미학에서 미美의 반대는 추醜가 아니라 용用이었다. 전통적으로 미의 대립물로 간주되었던 추가 미적 범주로 포섭되는 대신에, 고대로부터 자주 미와 결합되어온 실용성이 미와 분리되었다. 역사상 가장 높은 생산력을 과시하고 실용주의적 가치가 고취되었던 시기에, 이처럼 실용성이 미적인 것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사회는 미와 실용성을 분리함으로써 오히려 실용성을 전적으로 현실의 지배 속에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의 구조 내에서 미적 실천, 즉 예술이란 실용성의 장소인 일상과 대척점에 놓인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미와 실용성의 분리, 즉 과거의 모든 문화에서 언제나 일정 정도 뒤섞여 있었던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을 엄격하게 분리함으로써, 근대사회는 여기에서도 예의 근대적 합리성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적인 것은 언제나 예술과만 관계를 맺는 대신에 실용적인 것은 현실과만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근대적 인식과 실천의 내부에서 작동한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근대에서 미적인 것의 궤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즉 근대에서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언제나 대립적이거나 분리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 경계는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실용성을 배제한 순수한 미적 담지자로서의 예술과 미적 가치를 전혀 갖지 않고 오로지 실용성으로만 가득 찬 현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념적인 것이지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미학과 조형예술의 궤적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처럼 개념적으로 분리된 미와 실용성, 즉 예술과 현실이 뒤섞이고 역행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의 조형예술은 바로 그러한 진동을 보여준다. 근대 조형예술의 궤적에서 미적인 것과 분리된 실용적인 것이 다시 예술로 복귀하고 예술과 실용성이 결합하는 과정이야말로 모순적이면서도 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미와 실용성의 결합을 원했던 것은 예술보다는 오히려 현실이었다. 근대 시민사회의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은 현실적인 실용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현실은 오히려 미적인 것을 풍부하게 요구하였다. 미가 초월적인 영역보다는 현실과 더 많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인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는 서구 근대사회도 다른 모든 사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서구 근대사회는 시민 계급의 지배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미적인 것들을 생산해내었다. 오히려 순수한 미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은 그러한 미적인 상황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서구 근대에서 예술에 부여된 역할, 즉 합리적으로 조직된 일상 생활에서 결여된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보충물이자, 현실 세계가 실현시켜줄 수 없는 소망을 간직한 초월적인 진실의 세계로서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현실의 미화는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배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류 문화의 보편적 양상에 훨씬 더 가까운 현상이었다. 근대의 미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예술만을 주목한다면 그것은 미시적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대신에 예술은 물론이고, 예술을 벗어난 일상적 영역에서의 광범위한 미적 실천들까지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근대의 미적 구조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면 미와 실용성을 대립시킨 근대미학은 단지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일 뿐인가. 미를 순수한 것이며 현실적 필요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시대의 미적 태도들과 구분되는 근대미학의 독특한 관점이지만, 그것은 물론 나름대로의 인식론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현실에서 미와 실용성의 분리와 대립은 일종의 오류 또는 허구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자면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잘못 설정된 문제란 없다. 특정한 역사적인 문제 설정은 비록 그것이 다른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오류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동시대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서술적 진실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미학의 구조는 근대적인 에피스테메(인식 구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속에 자기 모순을 내장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미술과 공예: 주체와 타자화의 논리

미술이 발생하는 과정은 곧 공예가 타자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근대미학에서 미와 실용성의 분리는 각기 미술과 공예의 분리, 발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근대 조형예술의 독특한 위계적 구조가 생겨나게 된다. 요컨대 미술과 공예의 분리는 단순한 세포 분열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미술이 자신을 미적 주체로 정립하는 대신에 공예를 미적인 것을 벗어난 일상적인 기술과 노동의 영역으로 내몰아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미술은 ‘미적인 것’을, 공예는 ‘실용적인 것’을 담당하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자 문화적 의식이 되는 것은 근대미학의 정해진 행로인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과 공예의 조형적 차이가 아니라, 미적인 것을 기준으로 한 주체와 타자화의 논리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존의 미술사와 공예사, 아니 문화사의 전제를 다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공예와 미술의 발생과 분화, 그리고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이를테면 미술은 공예로부터 파생된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어떤 것인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공예가 미술에 선행先行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근대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공예는 오히려 미술에 후행後行하거나 아니면 동시 발생한 것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술이라는 대립물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공예는 차별화된 영역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미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공예는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 전체를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의 공예 개념은 상대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차라리 무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미술은 어떻게 (공예와 달리)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게 되었을까.

물론 근대 이전에도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 그 자체로서의 공예와 구분된 활동과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의 경우,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이어져온 고급한 학예, 즉 인문학liberal arts의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학문(과학)과 예술이 혼합된 영역이었다. 그리고 공예를 타자화시킨 서구 최초의 미술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미와 실용성의 분리, 즉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태로서의 미술과 공예가 처음으로 분리되는 것은 18-19세기의 가까운 근대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대략 15-16세기에 전통적인 기술(공예)로부터 벗어난 몇몇 분야-건축, 조각, 회화-가 인문학의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서구 최초의 미술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디세뇨의 기술arti del disegno’이라고 불린 미술은 ‘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인 것’으로서 오늘날의 미술보다는 과학이나 학문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도 미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이었다. 당시의 미술은 기술도 아니고, 오늘날과 같은 예술도 아닌, 인문학이었다. 아무튼 ‘미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공통점은 그것이 ‘고급한 학예liberal arts’라는 점이며, 따라서 ‘비천한 기술vulgar arts’인 공예와 구분되었던 것이다. 이제 목공이나 석공과 주물 기술 과 같은 직인의 기술이 아닌 고급한 학예로서의 미술은 기술이나 재료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떤 능력에 따라 구분되고 인식되었으며, 그리하여 요구된 것이 통합된 미술 개념이었다.

이제까지의 서구 문화사는 두 개의 통합된 미술 개념을 보여준다. 하나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의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18-19세기에 정립된 ‘파인 아트fine arts’이다. 르네상스의 ‘디세뇨’는 오늘날 디자인의 형태적 어원이 되는데, 여기에는 서구 조형예술사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디세뇨로부터 파인 아트로의 이행 과정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미술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것이 저 먼 르네상스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파인 아트임은 당연하다.

미술의 이중구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18-19세기경 서구의 조형예술은 새로운 구조를 형성한다. 이른바 ‘순수미술fine arts’과 ‘응용미술applied arts’이라는 이원적인 구조가 그것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과 저급 기술(공예)이라는 이분법의 근대적 버전이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먼저 순수미술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의 기술’과는 달리 순수한 미적 실천이라는 근대미학의 교의에 직결된 것이었고, 지식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근대는 예술과 기술만이 아니라 예술과 과학도 대립시켰기 때문이다. 근대의 예술-순수미술을 포함하여-은 18세기 칸트의 미학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다. 칸트는 미를 ‘무관심적 관심’이라고 정의하였고 예술로부터 모두 현실적 효용성을 배제하였다. 이와는 달리 현실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것을 ‘부용미附庸美’라고 불렀는데, 이른바 응용미술은 이와 관련되었다.

사실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에서 응용미술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르네상스적인 고급과 저급의 분리가 근본적으로 변화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응용미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조형예술의 한 부분을 이루는 미술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응용미술은 단순한 기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본격적인 순수미술도 아닌, 미술과 기술의 중간 영역 정도 되는 것이었다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 ‘순수미술의 조형적 원리를 실용적인 영역에 응용하는 것’이라는 응용미술의 정의가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응용미술은 완전한 미술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술이 ‘응용된applied’ 어떤 것, 즉 불완전한 미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응용미술이 조형적 성격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시대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응용미술을 르네상스의 저급 기술과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디자인의 과도기적인 중간 단계로 보는 것은 18-19세기의 응용미술의 독자성을 주목하지 않고 역사를 지나치게 발전사적으로 보는 태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미술과 기술의 중간 영역으로서의 응용미술의 위상을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저 근대의 이분법은 생각보다 악명(?) 높은 것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과 저급 기술의 대립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문화적 부작용을 낳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에 속한 분야는 사실상 몇 가지의 제한 목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근대적인 이분법은 이 세계의 훨씬 더 커다란 부분을 분할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한 것임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차별 구조를 모순이라고 여기고 변혁시키고자 한 사람은 바로 윌리엄 모리스였다. 모리스는 예술의 ‘민주화’와 ‘생활화’를 주장하였는데, 여기에는 바로 살롱예술로 전락하여버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합일시키려는 의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모리스는 ‘장인으로서의 예술가artisan artiste’와 ‘예술가로서의 장인artiste artisan’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의 진정한 의미는 미술과 공예의 동일성 주장에 다름아닌 것이다.(Arts와 Crafts 사이에 있는 ‘and’는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후에도 오랫동안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위계적인 차별은 계속되지만 적어도 이념적 차원에서 그것은 윌리엄 모리스에게서 극복된다.

물론 18-19세기에 응용미술은 비록 미학적으로는 낮게 평가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응용미술은 더욱 각광을 받았다.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계급적 지배를 확인해줄 문화적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과 일상용품에서의 장식미술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고, 날로 발전해가는 산업은 매우 현실적인 목적에 따라서 미술을 필요로 했다. 19세기에 응용미술은 미술 제조art manufacturing라고 불리면서 점차 현실적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근대 디자인과 새로운 통합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디자인은 근대 조형예술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구조 변동을 가져왔다. 그것은 디자인이, 르네상스 또는 18-19세기 이후 분리되어온 미와 실용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하면서 조형예술의 질서를 재편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가 서구 최초의 통합적인 미술 개념이었다면, 디자인은 20세기의 새로운 통합 조형 개념이었다. 디자인은 미와 실용성을 적극적으로 통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명 공예의 역사적 계승자이며 낡은 의미의 순수미술과는 대립적이었지만, 그러나 디자인과 공예, 미술의 관계들이 결코 일면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디자인은 분명 전통적인 조형예술들과의 인식론적, 실천적 단절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또한 각 장르들과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며 선별적 친화성도 가진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먼저 디자인은 공예와 마찬가지로 실용 조형의 역사적인 한 형태이기 때문에, 공예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의 조형적 형식은 오히려 동시대의 미술과 동질성을 가지며 사회문화적 기능도 공예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물론 미와 실용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야 할 가치로 본다는 점에서 디자인은 전통적인 순수미술을 부정한다. 나아가 근대 디자인Modern Design의 경우에는 아예 미술과 디자인의 구분 자체를 부정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예술과 현실의 분리 자체를 극복하고자 했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근대 디자인은 조형예술 전체를 포괄하고자 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이후 디자인은 또 하나의 조형예술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공예를 대신하여 미술과 새로운 장르적 대립 구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미와 실용성의 구분이라는 저 근대적인 이분법은 20세기 동안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견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디자인, 특히 20세기 초 근대 디자인의 관점에서 본 미와 실용성은 어떤 것이었으며, 또 근대 디자인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합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물론 근대 디자인에서 말하는 미는 순수미술에서와 같은 초월적인 미가 아니며 실용성 역시도 전통적인 공예에서와 같이 토속적인vernacular 것이 아니었다. 근대 디자인은 건축이나 일상용품 같은 실제적인 오브제를 통해서 미와 실용성의 결합을 추구하였는데, 이때의 미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형식미이며 실용성이란 요소화된 기능의 복합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고 조작 가능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근대 디자인이 추구하는 미와 실용성은 일단 전통적인 미술과 공예의 그것과는 단절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근대 디자인에서 말하는 미와 실용성의 결합 역시 자연발생적인 것도, 19세기의 장식미술처럼 표피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철저히 선험적이고 원리적이며 구조적인 것이었다. 이는 근대 디자인의 미학적 이념이자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교의에서 잘 드러난다. 기능주의는 기본적으로 미(형태)와 기능이 일치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데, 이는 기능에 충실하면 할수록-어떤 선험적 원리에 의해(?)-형태도 아름다워진다는 믿음이다. 이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선미일치善美一致(Kalokagathia) 사상의 현대적인 판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기능주의의 모토는 그러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디자인은 이러한 기능주의의 교의에 따라 형태와 기능을 조작하여 완전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디자인은 일종의 사이버네틱스이자 기호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디자인이 추구한 것이 사물이 아니라 구성이며 실체가 아니라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은 장 보드리야르의 설명을 들으면 아주 분명해진다. 보드리야르는 바우하우스를 예로 들면서, 디자인은 단순히 생산물produit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기호화된 물건objet을 만드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산업사회에서 디자인된 물건은 단순한 효용성의 담지체가 아니라 기능적 기호로서 조작되고 사회화된 것이라는 얘기이다. 바로 이점이 실용 조형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통 공예와 근대 디자인을 구분해주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공예에 대한 디자인의 단절은 조형성, 생산방식, 사회적 기능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지만, 초기 근대 디자인이 보여준 반反장식주의는 공예와 디자인의 차이, 그리고 근대 디자인이 공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징후로 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돌프 로스와 같은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은 전통적인 장식을 극렬히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는 장식이 미개한 문명 상태의 증거이며 과잉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근대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장식은 비합리적이며 비현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현대적인 생산방식과 기술, 그리고 미학의 구성물로서 디자인은 분명 비합리적인 장식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장식은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오히려 장식이야말로 전통 조형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공예의 본질에서 장식성을 부정하고 실용성만을 보려는 태도야말로 근대적인 인식틀의 전도된 투사가 아닐까. 아마도 전통사회에서 공예의 본질은 실용성 못지 않게 장식성에서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공예의 장식이란 바로 문화적 상징의 표현이자 그 자체로 조형적 문법이며, 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나 기능과 뗄 수 없는 심층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디자인이 장식을 부정한 것은 전통사회의 문화와 질서 자체를 부정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물론 근대 디자인이 전통 공예의 상징성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근대적 질서와 생산방식에 따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조형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문명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 디자인이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미와 분석적인 기능의 결합을 지향한 것도 결국은 의미의 제로 상태에서 일종의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이란 모더니스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며 그다지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근대 디자인이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20세기 디자인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현실을 더 결정적으로 지배한 것은 키치Kitsch와 같은 비합리적인 조형과 소비주의 디자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현대사회의 디자인 역시 비합리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전통 조형에서의 장식이나 현대 소비주의 디자인에서의 스타일링이나 모두 문화적 상징성에 기반하여 인간이 가진 비합리주의적인 욕망에 호소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앞서 말했다시피 20세기 초의 근대 디자인은 전통적인 공예보다는 동시대의 미술과 조형적으로 훨씬 더 동질적이었다. 디자인은 아방가르드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혁명의 일부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자인은 단순히 통합적인 조형이거나 새로운 장르의 하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이후의 순수미술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전복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바우하우스는 정확히 순수미술의 이념을 뒤집는다.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순수미술은 고급하고 완전한 것이기는커녕 오히려 디자인보다 저급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미와 기능을 함께 갖춘 실제적인 산물만이 완전한 조형이며, 순수미술과 같이 감상을 위한 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 차원이 결여된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바우하우스의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와 인식틀을 정반대로 뒤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우하우스에서도 소묘나 회화, 조각을 가르쳤지만, 그와 관련된 공방이나 학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소묘나 회화, 조각은 건축이나 디자인을 위한 조형적 기초이자 연습일 뿐이며 그 자체로 독립된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대 디자인 운동의 정점을 이루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러시아 구성주의에서 오히려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서구에서 전통적인 미술의 역할, 즉 외부 세계를 모방하는 것은 현대미술에 의해 부정되지만 러시아 구성주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의자를 그리지 않고 추상화를 그리는 것이 예술적이라면, 아예 실제 의자를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예술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에서는 예술과 기술, 창작과 생산의 구분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러시아 구성주의에 의해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혹시 미와 실용성의 거대한 분리가 존재하기 이전의 그리스적 유년기, 분화되지 않은 덩어리 그 자체로서의 카오스 또는 모든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가 그 자체로 예술이었던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바우하우스가 순수미술을 전도시키기 이전에, 이미 말레비치에 의해 회화는 논리적으로 최후를 맞았고 구성주의에 의해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은 지워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알다시피 러시아 구성주의가 결코 역사의 종점은 아니었다.

공예의 위기: 변용과 일탈

공예의 위기는 반복된다. 한번은 근대적인 생산방식과 산업사회의 대두로 인해, 그리고 또 한번 공예의 자기 부정에 의해.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면, 과연 공예의 경우에도 그런 것일까. 역사의 물질적인 전개 과정 그 자체는 차라리 냉정한 것일지언정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예의 자기 부정은 분명 희극이면서도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공예의 자기 부정과 일탈은 말 그대로 공예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더 이상 공예사에서 다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현상이 현대 공예사의 한 장면에서 ‘공예의 이름으로’ 빚어지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정작 서구보다도 비서구 제3세계 지역에서 매우 심각하게 나타남을 보게 되는데, 이는 서구의 미적 근대성이 비서구 사회에 남긴 식민의 흔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공예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산업화에 의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양상이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에서 산업화는 공예에 치명적이었지만 또 다른 사회에서는 공예가 산업화와 비교적 잘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산업화가 분명 공예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지도만큼이나 공예의 문화지리학도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일본, 스칸디나비아 등과 같이 산업화되었지만 오래된 공예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산업화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는 사회, 영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보수적인 전통으로 인해 생활 속에 공예가 살아 있는 사회, 그리고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여전히 공예가 생활의 주요 수단이 되어 있는 전前산업사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오래된 공예 전통이 없는 까닭에, 공예와 현대 미술의 구분이 불분명하여 공예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진, 그런 만큼 개념적 혼란의 원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과 같은 사회도 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공예의 성격과 위상이 주변적이고 중간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예도 물건으로서 엄연히 현대 사회의 물질적 체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그러나 현대의 지배적인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주변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주변적인 존재방식으로 인해 현재의 직접적인 물질적인 욕구와 관심성에서 비켜나 있는 만큼, 문화의 원초적 통합성을 보존하고 전산업사회의 역사적 기억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간 예술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예의 주변적이고 중간적인 성격은 일단 현대사회에서 공예의 약점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흥미로운 문화 전략적 가치를 가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전통 공예를 보존하고 지원하는 것은 집단의 문화적 기억을 유지함으로써 국민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정치적인 프로젝트의 일부라고 이해하더라도, 서구의 일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모더니즘 예술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비판 또는 여성성의 발견을 위한 수단으로서 공예적 요소들을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현대적 실천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공예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목도하게 되는 가장 심각한 현상은, 공예의 주변성과 중간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공예적 가치를 전략적으로 실천하는 대신에, 현대 문화의 중심성에 매몰되어 공예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예의 자기 부정 또는 일탈 현상이 가장 무책임하게 나타나는 곳은 한국과 같이 식민지 근대화를 경험한 사회가 아닌가 한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전산업사회의 단계에 있는 국가들이고 다른 하나는 뒤늦게 산업화가 이루어진 후발 산업국가들이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후발 산업국가들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문제는 산업화 자체가 지나치게 물신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에서는 식민지의 경험이 근대화에 대한 실패와 낙오의 산물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사회 구성원들에게 산업화는 서구보다 훨씬 더 절대적이며 강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근대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대량생산품이 전통적인 수공예품보다도 더 좋은 것이고 심지어 고급한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공예의 가치는 매우 폄하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공예의 위기는 단지 공예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착잡한 구조에 근거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공예 제도 자체가 공예의 부정에 기초해있다는 점인데, 이러한 구조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배태된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경우 전통 공예가 쇠락한 상태에서 식민지 문화 정책에 의해 자리잡은 의식과 제도가 공예 분야에도 지배적으로 작용하면서 공예의 본질을 크게 왜곡,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19세기 말 이후 전통 사회의 붕괴에 따라 전통 공예가 산업적, 문화적 기반을 급격히 상실해간 반면, 일부 공예가 1930년대의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와 같은 식민지 미술 제도 속으로 흡수되면서 감상용의 살롱 미술로 변용되어갔던 것이다.(물론 예로부터 완상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귀족 공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술공예는 근대적인 전시회 제도의 틀 내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해방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0-90년대에 오면 미국 유학생들에 의해 유입된 이른바 ‘탈기능적’ 경향이 확산되면서 한국 공예계는 마침내 ‘공예의 이름으로’ 공예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미술공예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인 공예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반면, 이른바 ‘탈기능적’ 경향은 아예 공예의 기본적인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예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 자체의 오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근본적인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거의 미술공예 속에 이미 반反공예로서의 ‘탈기능적’ 경향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용성으로부터 감상용으로 중심 이동한 미술공예에서 이미 반공예적 경향은 첫발을 내디딘 것이며, 따라서 예의 ‘탈기능적’ 경향은 그 논리적 귀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공예를 실용적인 것과 감상용, 이른바 ‘미술공예’(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와는 다르다)로 구분한 것은 바로 비서구 지역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된 일본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미술과 서구 미술, 공예(산업)와 미술이 여러 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공예가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산업화된 공예와는 달리, 미술의 일부로서 감상용의 미술공예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미술공예는 공예의 주류도 아니었으며 전통 공예의 현대화와 산업화에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주체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 과정을 통해 이식된 미술공예가 뿌리를 내리면서 향후 지속적으로 공예 제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식민지 미술 제도를 통해서든 식민지 이후의 대학 교육을 통해서든,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상관없이 외삽된 제도로서의 현대 공예는 그저 식민지적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는 모더니즘 미학이 무분별하게 공예에까지 적용된 결과이고 한국의 현대 공예가들에게 공예 장르의 역사성과 현실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반공예를 공예라고 주장하면서 담론적 합리화를 시도하고 대학 공예 교육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서구의 미적 근대성이 제3세계의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모순적으로 증폭되어 나타나는가를 잘 보여주는 징후라 할 것이다. 디자인에서의 근대 프로젝트를 통해서 전통적인 공예와 산업, 그리고 미술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결해나간 서구와는 달리, 비서구 지역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공예와 디자인, 미술이 상호 충돌하면서 갈등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는 서구의 미적 근대성 자체를 넘어서는 탈근대적 전망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근대적 분리를 넘어서: 탈근대적 전망

이제까지 우리는 서구 근대미학과 조형예술이 어떻게 가치들의 분리와 위계에 기반하여 성립되었는지, 그러나 실제 그것의 내부적인 모순과 한계가 역사적 과정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사실 어떠한 시대, 어떠한 영역, 어떠한 규범도 일정한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의해 주조될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근대 역시 자신의 고유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 일정한 현실을 생산해왔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러한 근대의 미적 인식과 실천의 모순과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할 역사적 단계에 서있음도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서구의 근대예술이 근대사회의 특수한 구조적 산물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통합적인 세계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그 결과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가치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예술은 그러한 직접적인 현실 연관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으로써 비판적 기능을 행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서구 근대예술의 전제였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적극적으로 ‘쓸모 없음’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보다 넓은 현실의 맥락에서 볼 때 모순일 수밖에 없고 실제적으로도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위해 쓸모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근대의 강박관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류 문화의 보편성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근대의 복합적인 현실과도 일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근대적 강박관념은 이른바 공예의 ‘탈기능적’ 경향이라는 것에서 가장 극단적이고전도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탈기능적’이라는 것이야말로 (전통적인) 공예의 본질을 ‘기능’으로 본다는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근대미학이 보장해주는 예술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능을 추구하든 부정하든 간에, 결국 ‘기능’을 중심으로 공예를 사고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생각보다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 ‘기능’이야말로 지극히 근대적인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예의 ‘탈기능적’ 경향은 ‘탈근대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전도된 방식으로 ‘근대적’인 것이다.

문제는 기능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능을 강박관념으로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공예의 본질은 아마도 훨씬 더 복합적일 것이다. 공예는 제의와 상징성, 미와 질서 감각, 기술과 실용성 같은 다양한 가치들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예의 복합적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기능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적인 구도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탈근대적’인 것이며 매우 역사적인 것이기도할 것이다.

공예를 실용적인 기술로 보고 저급하다고 판단한 근대적 인식은 실은 스스로가 공리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일종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근대미학의 무의식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냐 실용성이냐, 순수냐 응용이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치들이 우리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이다. 때문에 우리는 서구 근대가 분리시킨 이러한 가치들을 다시 통합하여 새로운 관계로 재배치해야 할 과제를 간직하고 있다. 새로운 탈근대적 구도 내에서 그러한 가치들은 더 이상 미적인 위계 질서가 아니라 삶에 반영된 문화적인 가치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

좋은 디자인(GOOD DESIGN)-왜 디자인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많은 디자이너에게 있어 디자인 역사는 참으로 지루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디자인 역사를 교양 정도로 취급하고 실기 위주로 교육을 받은 디자이너는 디자인 역사는 디자인비평가에게나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더나아가 주변에 디자인 역사를 공부하는 디자이너를 본다면 마치 황금률을 어기는 범법자으로 규정하는 잘못된 인식을 행하기도 한다. 좋은 디자인(GOOD DESIGN)-왜 디자인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