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입각 교육”
“현교육 평등주의 포로”?
?
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지향하는 뉴라이트 교사연합이 발족됐다.
뉴라이트교사연합 창립준비위원회는 23일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회원 5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갖고 전국중등교사회 두영택(남성중학교 교사) 회장을 상임대표로 선출했다.
[태그:] 정치
대중 : 정통 문화
잠깐 본 책, ‘문화연구와 문화이론'(현실문화연구 역)의 마르크스주의 / 프랑크푸르트학파 편을 읽다가 예술 민주화 – 디자인… 정도로 이해하던 생각의 틀에 의문이 생기는 문구를 발견했다. 마르크스적 대중예술의 해석과 정통예술의 해석에 있어 책의 한 부분은 대체로 대중예술을 계급의 유지를 위한 것으로 보며 정통예술을 지켜야 할 진보적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듯 한데, 그 이유는 대중예술은 어긋난 신화적 환상의 실재화를 통해 대중의 현실안주를 이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의 아이디어로 다뤄지고 있는 부분이지만 생각 좀 해봐야겠다. 152페이지.
문화산업의 ‘동화작용이 역사적으로 미성숙한 것이며 스스로의 지배력은 유지시키면서 다른 문화는 평등하게 만들려고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짧게 말하면 문화의 민주화는 완전한 민주주의의 요구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오며, 결국 기존 질서를 그대로 고수시키는 것이 된다.
잠깐
진보 실현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기득권층에서만 가능한 건 아닐까?
강정구와 공산주의
참 오래된 일인 것으로 기억된다. 북한의 김일성 생가 방문중에 방명록에다가 “만경대정신을 이어받겠다”는 투의 서명을 한 일로 불구속 기소된 동국대 강정구교수가 파면됐나보다.
알맹이가 가득한, 참된 사상일수록 대중들에게 가볍게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상이 무엇이건 어떤 사람에게 강요되고 지켜나가야만 하는 것으로 무겁게 결정지어진다면 그때부터 사람은 없고 공허한 생각만이 떠도는 상황이 되기 쉽지않나 싶다.. “맥아더 동상 철거”반대의 이유를 “지나가던 갈매기가 똥이라도 쌀 수 있다”고 한 어느 아는 분의 얘기처럼 일반의 가벼운 사상토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용인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같다. 지금도 대충 살맛은 나지만..
아무튼, 한국의 예술과 디자인 분야에 상상력이 부족하다면, 그 이유중에는 부족한 생각의 다양성도 들어갈거다. 그야말로 공산주의는 커녕 사회주의의 벽도 넘지 못한 한국의 민주주의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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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한 글입니다.
강정구 교수가 컬럼비아대 교수였다면
[해외리포트] 학자의 학문적 발언에 대한 두 대학의 다른 태도
강인규 _ 미국 위스콘신대 언론학 강사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과 한국의 동국대학. 두 대학교 모두 각 사회에 큰 기여를 해 온 유서 깊은 명문사학이다. 특히 동국대학교가 지식인과 학생들을 배출함으로써 한국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바는 컬럼비아대학이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에 속한 학자의 발언을 둘러싸고 보인 두 학교의 태도는 여러 모로 상반된다. 의 저자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컬럼비아대학교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사회적 발언에 소극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미국 대학사회에서 사이드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여러모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사이드는 미국의 중동정책을 맹렬히 비판했으며,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도 앞장섰다. 동양에 대한 서구사회, 특히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거리낌 없이 들춰내던 사이드의 연구와 발언은 미국 보수층의 심기를 대단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욕 먹어가면서 소속교수 보호한 컬럼비아대학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이드였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것은 그의 ‘돌팔매질’이었다. 그는 2000년에 레바논을 여행하던 중, 국경 넘어 이스라엘군 초소에 돌을 던졌다. 레바논 남부지역의 무력지배에 항의를 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당시 학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 그의 행동은 컬럼비아대학의 입장표명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당시 대학은 “그 돌은 특정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었기에 위법행위가 아니며, 당연히 학문적 발언의 하나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밝히며 징계를 거부했다. 학교 측의 이런 결정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이 결정에 반발한 사람들은 컬럼비아대학을 ‘포이즌 아이비(사악한 아이비리그 학교)’라고 비꼬았다.
미국에서 중동문제는 한국사회의 남북문제에 비견될 만큼 민감한 주제일 뿐 아니라, 유태계 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뉴욕시의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파장은 더욱 컸다. 그가 이스라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진이 미국언론에 공개되자, 보수언론은 물론 일부 동료교수와 학생들까지 그의 행동에 경악하며 파면을 요구했다. 그의 위험한 경거망동은 교수직을 박탈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은 사이드에게 대단히 가혹했다. 미국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일부 아랍 언론까지 비판에 가담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는 “아랍인들이 폭력적이라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애써 온 존경받는 교수가 이런 행동을 한 데 대해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썼다.
컬럼비아대학 측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사이드 교수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두고 교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회의와 토론을 벌여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대학은 학자의 발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당시 교수대표였던 조나단 콜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대학의 역할 가운데 학자 개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자는 사회의 다수가 믿고 있는 정치적 신념에 억눌려 자유로이 의사를 표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황 교수와 강 교수에 대한 이중적 태도
컬럼비아대학의 결정이 사이드의 행동을 지지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듯이, 적어도 이 순간 글의 목적은 강정구 교수의 발언을 옹호하는 데 있지 않다. 이 글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단 하나, 대학 내에서 지식인의 발언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발언마저 법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사회가 일반대중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만큼이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접근이 필요한 영역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인 근대사 연구는 줄기세포 연구보다 훨씬 큰 위험부담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대학의 역할이 사회의 통념을 재생산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학자들의 발언에는 일상적 담론 이상의 자율성과 관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맹목적 민족주의 담론이 황우석 교수를 성급하게 영웅으로 만들었듯이,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반공주의는 한 지식인을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매국노’로 만들었다. 한국 언론이 줄기세포의 근본적 한계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황 교수팀의 업적을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었듯이, 강정구 교수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고찰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 바빴다.
보수언론과 정계는 ‘국가를 위협하는 발언까지 학문적 발언으로 보호해줄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를 위협하지 않는 학문적 발언’이 어디까지인지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 논문이나 강의록 초고를 들고 국회나 법원, 혹은 신문사 편집부로 먼저 달려가라는 주문이 아니라면, 그 판단은 온전히 학계에 맡겨져야 한다.
사이드가 돌을 던진 뒤 5년 후 한국
에드워드 사이드는 2003년 9월, 오랫동안 앓아 온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모든 언론은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며 그의 ‘돌팔매’와 컬럼비아대학의 지지발언을 함께 거론했다. 이후로도 사이드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컬럼비아는 그의 지성을 지켜 낸 자유의 정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국대학교는 법원이 강 교수에 대해 국가보안법 기소결정을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 교수를 직위해제했다.
강정구 교수를 둘러싼 ‘논란’의 주범은 강 교수 자신만이 아니다. 오히려 학자의 발언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진지한 성찰과 토론을 이끌어 낼 인내심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회가 일으킨 소란이다. 한나라당의 의원도 말하지 않았던가. ‘한국이 성숙한 사회라면 강 교수의 주장을 무시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학자 한 명의 발언으로 ‘전복’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동국대학교는 이번 논란의 ‘주범’인 한국사회와 맞서기보다는 한 사람을 대학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간편한 길을 택했다. 물론 동국대학교로서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정 교수의 수업을 들은 졸업생들에게 취업상의 불이익을 준다’는 기상천외의 발상(이야말로 반민주적인 발언이 아닌가)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서 학교 측이 겪어야 했을 고통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어 낼 미래의 한국사회가 동국대학의 이번 조처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국대학교 측의 현명한 재고를 기대한다.
2005-12-27 15:50
ⓒ 2005 OhmyNews
한국 공예가회 10회전
한국 공예가회 10회전에 부쳐
한국의 현대공예는 전통적인 수공예와 현대적인 기계공예의 중간에 끼여서 일종의 과도기적인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머리는 앞섰지마는 손이 뒤진다는 현상을 일으키고, 이상과 현실이 유리되는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술사적인 혼란은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근대국가에서, 그의 선진화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일종의 홍역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 공예계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혼란도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해를 한다면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희망찬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공예가회는 1974년 9월에 창설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의욕적인 공예가들이 모인 단체이다. 그의 형성은 금속.도자.목칠.연직 등 네 분야에 걸쳐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래픽을 빼놓은 전 공예가 망라된 셈이다. 그러한 공예가회가 창설된지 10년이 되어서 이번에 그 10회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 10년간 그들이 시도하고 실험한 작품세계는 직접.간접적으로 우리나라 공예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현상으로서는 첫째, 교육적인 성과를 들 수 있고, 둘째, 작품적인 성과를 들 수가 있다.
첫째, 교육적인 성과라는 것은, 회원들의 거의 전부가 교육자로서 전국의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한다는 입장에 있기 ㅤㄸㅒㅤ문에, 그들 회원이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이 곧 공예상의 새로운 실험이고 성과가 되는 것이다. 이때 일어나는 현상으로서는, 디자인의 문제를 비롯해서 기능분석, 새로운 재료의 개발, 가공기술의 개선 등에 걸치고 있다.
둘째, 작품상의 성과라는 것은, 그들이 비교적 40대, 50대의 창조력이 왕성한 공예가이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 전통의 문제를 그들 나름대로 해석하고, 거기에다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하는 그들의 작품세계는 오랜 전통에서 되풀이만을 거듭했던 근대 이전의 공예에 비해서 괄목할 만한 탈바꿈을 성취하였다. 거기에다 자기들의 체질과 개성을 가미하고, 기능을 새로 개발함으로써 한국의 현대공예에 새로운 창조를 하고저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공예가회라는 집단의 힘으로, ”’아직 부분적인 면에서 과도기적인 후진속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의 현대공예가 선진화작업을 완수한다면 그보다도 다행한 일은 없다.
이러한 그들에 대한 주문은, 그들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과, 선진적인 공업화가 무었보다도 앞서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83년 10월 미술평론가 이경성
금속부문 출신교별 분류
강경희 1945 서울대 서울대대학원수료
강찬균 1938 서울대 이태리_프로렌스미술대학수학
고승관 1943 경희대교육대학원수료
고창환 1952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곽순화 1953 서울대대학원응용미술과수료
김승희 1947 서울대 미국인디애나대학원수료
김은선 1954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김재영 1946 숙명여대 홍익대대학원수료
김종두 1948 중앙대
김종식 1949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김태호 1948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김화숙 1951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김혜경 1953 서울대
남경숙 1950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노용(영)숙 1949 숙명여대 숙명여대미술대학원수료
민경운(은) 1951 국민대대학원재학
민병휘 1949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
박인철 1948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박정자 1953 효성여대대학원수료
박종성 1947 홍익대
박호성 1950 홍익대산미대학원
배창숙 1955 서울대
백인자 1955 중앙대 중앙대대학원수료
변건호 1948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송명수 —
신권희 1937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안귀숙 1954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안미형 1952 서울대
오영민 1948 홍익대대학원수료
오원택 1948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오융경 1942 홍익개대학원수료
우진순 1948 서울대 서울대대학원수료 스웨덴국립디자인공예대학
유리지 1945 서울대 미국템플대학교타일러미술학교 서울대대학원수료
윤여옥 1945 원광대대학원수료
이경자 1953 중앙대
이규현 1946 오스트리아빈국립미술대학원수료
이성근 1953 홍익대 홍익대대학원
이성원 1946 서독뉴렌베르크국립미술대학 동대학원
이은규 1944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이필재 1954 서울대대학원수료
이충우 1952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이혜란 1953 서울대 서울대대학원수료
전영순 1946 서라벌예대 홍익대대학원수료
전용주 홍익대대학원수료
정량희 재 일본(1983)
주예경 1950 홍익대대학원수료
최정자 1946 홍익대대학원수료
최현칠 1939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홍경희 1954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홍정실 1947 서울대대학원수료
황인철 중앙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독립운동
지난 18일 제출된 김 의원의 공소장에는 천정배 전 원내대표를 비롯해 이종걸?최용규?문병호?양승조, 우윤근, 이원영, 정성호, 최재천, 이상경 의원 등 현역의원 10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특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 7명이 모두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김 의원측은 ‘인지상정’이라고 설명하지만, 예상치 못한 비난 여론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 하는 심정으로 저렇게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