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o: 공장 폐쇄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원제 <No Logo>, 나오미 클라인 지음, 2000년 초판 발행)>의 9장을 요약한 메모.

이제 기업은 브랜드에 깊고 내밀한 의미를 담아내려고 하며 광고대행사는 자신이 제품을 선전해서 파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대신 참된 가치를 짜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브랜드 구축자들은 지식경제에서 제 1의 생산자들인 셈이다. 고용 환경은 변화했다. 슈퍼 브랜드 기업들은 영혼을 세우고 성가신 육체를 잘라냈다. 슈퍼 브랜드 구축과 운영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생산 관련 투자비의 축소로 해결했다. 기업의 우선순위가 바뀌자 공장 노동자와 장인으로 대표되는 실제 생산자들의 위치가 불안해졌다. 과거 생산가:소매가 1:1에 만족했던 기업들은 이제 1:4의 이윤율을 낼 정도의 저가생산처를 찾아다닌다. 생산과정과 생산자는 평가절하되고 있으며 브랜딩은 부가가치를 독차지한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배설물처럼 다뤄진다. 기업들은 제품 생산을 마치 자원 취급 기업이 구리나 나무를 조달하는 것처럼 제품을 조달한다. 생산 부문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제조업체가 노동 인력을 책임진다는 전통적 사고도 함께 빠져나간다.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근로 조건에 대한 책임을 하청 업체에게 떠넘긴다. 그리고 그저 물건을 아주 싸게 만들라고 말하면 끝이다. No Logo: 공장 폐쇄 더보기

1960 – 1997 한국현대사 연표

Chronology of Korean Modern History #
제 2 공화국(1960~1961 )

1960년
8월
제2공화국 대통령에 윤보선(尹潽善) 선출.
14일, 북한 김일성, 남·북 연방제 제의.

1961년
2월
대일정책결의안(선국교·후경제 등) 채택

5월
군사정변. 군사혁명위원회 발족(의장 장도영·부의장 박정희)
장면내각 총사퇴. 혁명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18)

7월
경제재건 5개년 계획 발표

8월
박정희 최고의장 8·12성명(정권 이양시기˙국회 구성문제 등) 발표

12월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실시.

1961년
1월
공용년호를 서력으로 변경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성안

3월
원자력연구소 원자로에 첫 점화

윤보선 대통령 사임

증권시장, 약 500억 환의 5월분 수도 결제 불이행(증권파동)

제2차 통화개혁(10대 1로 평가절하, ‘환’을 ‘원’으로 변경)

제 3 공화국(1963~1972 )

1963년
1월
민간인 정치활동 재개

2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2·18성명(민정 불참선언 및 정국수습 9개 방안 제시) 발표

10월
서울 가정법원 개원

12월
박정희 제5대 대통 령 취임, 제6대 국회 개원.

1964년
8월
한국기자 협회 발족

10월
한·월남,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 파견에 관한 협정 체결.

1965년
1월
국무회의, 비전투병력 2,000명 월남파병 의결.

3월
단일변동환율제 실시

4월
한·일협정 반대데모대, 효창공원서 시민궐기대회.

6월
한·일 협정 조인, 국교 정상화

7월
이승만 하와 이서 사망, 23일 유해 환국.

1966년
2월
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3월
국세청·수산청 발족

6월
김기수, 세계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 됨

7월
한·미행정협정 조인(1967. 2. 9. 발효)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공표

10월
존슨 미국 대통령 한국 방문

1967
3월
과학기술처 신설, 원자력원을 청으로 개 칭

6월
제6대 대통령 선거(공화당 박정희 후보 당선, 7.1. 취임).

8월
제1차 한·일각료회담 개최(도쿄).

1968년
1월
1·21사태,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입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원 산 앞바다서 북한에 피랍

2월
경전선 개통

4월
향토예비군 창설

5월
제1차 한· 미국방장관회의(워싱턴)

7월
문교부, 중학입시제도 폐지 발표

9월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막.

10월
문교부, 대학입시 예비고사제 실시 발표.

11월
시·도민증 없애고 주민등록증으로 대체

서울시의 전차 철거

12월
광화문 복원 준공

1969년
3월
국토통일원 개원

가정의례준칙 발표

김수환 대주교, 추기경에 서품

6월
3선개헌반대 학생 데모 시작

7월
경인고속도로 개통

9월
3선개헌안·국민투표법안 국회서 변칙 통과

12월
국제통화기금, 한국을 특별인출권(SDR)통과공여국 으로 지정.

1970년
4월
서울 와우시민아파트 도괴. 사망 33명

5월
서울대교 개통

금산 인공위성지구국 우주통신 중계 개시

7월
우편번호제 실시

경부고속도로 개통

10월
국토종합개발 10개년계획 확 정

1971년
2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4월
제7대 대통령선거 실시(박정희 후보 당선, 7. 3. 취임)

7월
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 발굴

12월
국가보안법 국회서 변칙 통과.

제 4 공화국 : 유신(1972~1979 )

1972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최고의 고려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直指心經)》 발견.

8월
박정희 대통령,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발표(기업사채 동결)

남북적십자사, 첫 본회담 평양에서 개막

10월
계엄사, 포고 제1호로 대학휴교, 신문·통신 사전검열제 실시

11월
유신헌법 확정

12월
첫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12월 23일, 통일주체국 민회의,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후보 선출(12. 27. 취임).

1973년
2월
비상국무회의, 국정감사 폐지법안 의결.

3월
한국방송공사 발족

4월
한국 여자탁구팀 세계 제패(유고 사라예 보)

5월
어린이 대공원 개원.

8월
김대중피랍사건 발생(일본 도쿄), 한일간 긴장 야기

1974년
1월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개헌논의 금지)·2호(비상군법회의 설치) 선포

8월
광복절기념식장서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 발생. 대통령부인 육영수 피격 서거

서울시지하철(서울역~청량리역 간) 개통.

11월
유엔군사령부,
북한은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고 남방 1`km까지 콘크리트구조물을 구축했다고 발표.

포드 미국 대통령 내한, 한·미정상회담 후 공동성명 발표.

1975년
2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찬성 73.11`%).

9월
여의도에 새 국회의사당 준공

민방위대 발대식

10월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1976년
6월
경제기획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8월
양정모 몬트리올 올림픽 경기대회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첫 금메달 획득

북한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 서 집단 도끼만행으로 미군 장교 2명 살해

10월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송·원대의 유물 대 량 인양.

1977년
5월
하비브 브라운 미국 대통령 특사, 박정희대통령과 회담, 철군문제 협의.

6월
국내 최초로 고리원자력 1호 발전기 점화

7월
부가가치세제 실시

1978년
4월
세종문화회관 개관

6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집회에서 박정희후보 제9대 대통령 당선

11월
한·미연합사 령부 발족

1979년
6월
카터 미국 대통령 내한. 1·2차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 발표

10월
국회, 김영삼의원 제명

마산·창원에 위수령 선포. 충남 삽교호방조제 준공.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정보부장에 의해 피격 사망(10·26사태).

대통령권한대행에 최규 하 국무총리 취임

제 5 공화국(1980~1988 )

1980년
2월
최규하 대통령,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 구성

5월
정부,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

광주학생시민대규모 데모(5.18 광주항쟁)

계엄하의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신설
(의장 최규하 대통령, 상 임위원장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8월
컬러 텔레비전 시판 개시

최규하 대통령 하야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9월
대학교육개혁시안 발표 (학과별 최소 졸업정원제 채택).

11월
신문협회·방송협회, 언론기관 통폐합 결정

1981년
1월
민주정의당 창당(총재 전두환)

정부, 비상계엄 전면 해제

4월
국정자문회의 발족(의장 최규하)

5월
공정거래위원회 발족.

9월
제84차 IOC총회, 제24회 하계올림픽경기대회 서울 개최 의결.

1982년
1월
중고생 교복(83년부터)과 머리형 자율화하기로 결정

1983년
1월
공직자윤리법(고위공직자의 재산등록)발표.

6월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시작. 1만 189명 혈육 상봉

10월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묘소서 북한 공작원이 장치한 폭탄 폭발,
참배 준배 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등 한국 고위관리 17명 순국.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내한(12일 1차 한·미정상회담, 14일 공동성명 발표).

88서울올림픽경기대회 휘장·마스 코트 발표.

5월
교황 바오로 2세 방한(6일 여의도에서 한국순교자 103위의 시성식 집 전).

1984년
4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한반도 안정위해 남북한과 미·중국의 4자회담 제의

홍콩서 실종된 영화배우 최은희, 감독 신상옥의 북한 납치사실 발표

5월
서울대공원 개원

1985년
6월
김영삼·김대중 회동, 민주화요구 공동발표문 채택

8월
고대 의대, 냉동정액을 이용한 수정으 로 임신된 아기가 국내에서 처음 탄생했다고 발표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 40년만에 고향방문단 혈육 상봉

한국이 참여한 첫 해외개발유전인 인도네시아 마두라 유전서 생산 개시

11월
한국, 남극자원보존협약 가입.

1986년
3월
납북된 최은희·신상옥,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

재무부, 덤핑방지관세제 실시

8월
새 국립중앙박물관, 구 중앙청청사를 개조해 개관

9월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개막(∼10월 5일)

10월
(주)삼성전자 문태원 연구원, 세계 최 초로 초소형 4mm VTR개발.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 경찰고문으로 사망.

2월
과학기술원 윤한식·손태항 박 사팀, 최강력고분자 알로이섬유 세계 최초로 개발

6월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

12월
중앙선관위 노태우 민정당후보 당선 공 포.

제 6 공화국(1988~1992 )

1988년
1월
대한상의,
공산권 경제단체와는 처음으로 헝가리 상공회의소 경제협력확대를 위 한 업무협조협정 체결

2월
금호그룹에 제2민간항공인가

보사부, 국내 첫 AIDS환자 발생 발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 제13대 대통령 취임

7월
월북작가의 해방전 문학작품에 대한 출판허용조치 발표

9월
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65개국 4,361명 참가)

11월
전두환 전 대통령,
자신의 재임 중에 일어났던 비리를 시인·사과하고 재산 일체를 국가에 헌납하 기로 발표.

1989년
2월
헝거리와 국교 수립(공산권 국가로는 처음).

3월
문익환 목사, 북경을 경유 평양에 도착, 김일성과 회담

8월
동아건설, 세계 최대규모인 리비아 2차대수로공사를 수주(53억달러)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김영삼 민주당 총재·김종필 공화당 총재,
청와대에서 3당 통합 을 선언.

2월
외무부, 모스크바주재 영사 처 개설을 발표

5월
교통부, 수도권 신공항입지를 영종도로 확정

6월
국무회의, 새 민방(民放)의 방송법 개정안 의결

12월
소련 방문(∼17일). 14일 양 국 정상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회담 후 모스크바선언

국회, 지방자치 법·지방의회선거법·지방자치단체선거법 등
지자제관계 3개법안 통과.

1991년
1월
정부, 걸프전의 군의료진지원조사단 26명 사우디에 파병

한국의료지 원단 현지로 출발

3월
시·군·구의회의원선거 실시

9월
유엔총회, 남북한유엔가입안을 만장일치로 통과

12월
새 민방 서울방송 (SBS) 개국.

1992년
1월
노태우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에서 미국측의 대북한 직접협상을 배제하고 한반도핵문제는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며, 북한은 조기에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국제 사찰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

2월
남북한, 두만강개발회담 실무접촉에서 나진·선봉지구개발에 공동보조하기로 합의

남북고위급회담(평양)에서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등 합의서 본문을 교환·발효

4월
정부,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을 개 방한다는 내용의 농산물협상이행계획서를 GATT에 제출

8월
황영조 (黃永祚), 바로셀로나올림픽경기대회 마라톤 우승

12월
, 김영삼후보 당선

대한민국 (大韓民國) 2

문민정부(1993~1998 )

1993년
2월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선언

4월
정부, 소말리아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약 250명의
건설공병부대를 파견하 기로 유엔측에 공식통보

5월
국회, 공직자윤리법 개정안 처리

8월
경부고속철도 차종을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로 확정

금융실 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

대전 엑스포 개막

9월
우리별 2호 발사 성공(프랑스령 기아나)

10월
전교조(全敎組), 해직교사의 복직문제와 관련하여 쟁점이 되어 온
전교조탈퇴 조건을 수용 복직

12월
한국 및 미국, 쌀시장개방안 타결.

1994년
1월
서울지검, 장영자(張玲子)를 107억원을 편 취하고 37억원의
당좌수표 중 5억원을 부도낸 혐의로 재구속

4월
김영삼 대통령과 이희창(李會昌) 국무총리,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의 갈등으로 국무총리 사표 제출

7월
평양방송, 김일성 사망(8일)을 보도

9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태권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경기대회 정식종목으 로 승인

10월
성수대교 붕괴

12월
기획원-재무부, 건 설부-교통부를 통합하는 등 정부조직개편.

삼성 자동차 진출 허용

WTO비준 동의안 국회 통과

1995년
1월
부동산실명제 7월 1일부터 실시하기로 확정발표

3월
케이블TV 27개채널 본방송 개시

5월
북한에 조건없이 곡물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남북 대표회담개최 제의

6월
27 일, 지방선거 실시. 서울시장 조순(趙淳) 후보 당선, 여당 참패

쌀 15만톤 북한지원 합의

서울 삼풍백화점 2개동 중 북쪽건 물 붕괴

7월
김대중 정계 복귀 선언

10월
수출 1000억달러 돌파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5.18 특별법 제정 지시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

1996년
4월
한반도 4자회담 제안

5월
2002 월드컵 일본과 공동 유치

8월
한총련 사태

9월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10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11월
조선총독부 건물 완전 철거

1997년
1월
한보 철강 부도

2월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5월
김현철 구속

8월
KAL기 괌 추락 사고

11월
IMF구제금융 공식요청

12월
IMF협상 타결 (구제금융 약 550억 달러 결정)

제 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국민회의-현 민주당) 후보 당선

되찾은 靜寂 – 자전거를 위하여

되찾은 靜寂 – 자전거를 위하여 볼프강 작스 《녹색평론》제16호 1994년 5-6월호

미래의 이미지는 현재와 대조되어 그 빛깔을 얻는다. 본래 자동차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현대인들을 짓누르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자동차가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한군데 매여있거나 나날의 생활 속에 갇혀 지내면서 연약한 육체의 힘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자동차는 약속했던 것이다. 사회적 폐쇄공포증이라는 토양 속에서만 움직임에 대한 열광이 번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대안적인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는 것은 이제 더이상 움직임이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고향상실에서 오는 번뇌였다. 바퀴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더 큰 속도나 더 많은 엔진의 힘을 약속한다는 것은 별로 매력이 없는 일이다. 도처에 자동차가 있지만 아무도 도착하는 사람이 없고, 모든 사람이 길 위에 있지만 아무와도 유대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다른 종류의 욕망이 생겨난다. 어네스트 칼렌바흐는 그의 책《에코토피아》에서 자동차가 없는 유토피아를 묘사하고 있다.

나는 가방을 챙겨갖고 바깥으로 나갔다. 내가 거리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낯선 정적이 깔려 있었다. 나는 적어도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택시가 달려들며, 사람들이 도시생활의 서두름 속에서 밀쳐대는 ― 현대 도시의 부산스러움 같은 것을 기대하였다. 최초의 놀람을 극복하였을 때 내가 발견한 것은 한때 거대한 가로로서 도시를 관통하여 부두까지 뻗어있던〈시장거리〉가 수천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책로로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전기택시와 미니버스와 짐수레들이 다니고 있는 차도는 이제는 2차선으로 줄어 있었다. 방대한 넓이의 나머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전거도로, 분수, 조각, 정자(亭子), 그리고 벤치들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정원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 위에 거의 음산한 정적이 깃들어 있었고, 이따금 급히 달려가는 자전거 소리와 아이들의 외침소리가 정적을 깨트리곤 했다. 심지어 새의 노래가 들릴 때도 있었는데, 이것은 여기가 수도의 가장 복잡한 중심가로 여겨지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 물론 소수이지만 그러나 소리높이 ― 숲이 베어지고, 동네가 찻길로 뚫어지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였고, 지난 20년 동안 자연경관이 포장되는 것에 저항하여 싸워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동차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를 정당하게 부각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는 주민투표에 반영되었다.

지난날의 약속이 그 가치를 잃어버렸고, 개인 자동차의 대중적 소유는 온갖 강제와 임무의 그물을 수반하였으며,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더욱 힘들어졌다. ― 이러한 경험은 1960년대 이후 계속하여 증가되어왔고,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구가되던 자동차주의가 이제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변화에 민감한 것은 아니다. 주민투표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본질적으로 일치된 반응을 보여주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육을 받은 스무살에서 서른 다섯살 사이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자기네 아버지들의 믿음을 포기하고 있다. 따져보면 1960년대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형성되던 연대였다 ― 그들은 자동차의 부족이 아니라 지나침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희망을 보여주던 경제적 기적의 시기에 자란 이 아이들이〈성장〉에 대한 그들 아버지들의 열광에 대하여 나타낸 것은 경멸뿐이었다. 비슷한 역사적 체험으로 인하여 그들이 갖게된 공통한 견해는 그들로 하여금 단순한 세대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집단으로서〈진보라고? 사절합니다!〉라고 하는 새로운 수정주의적 상호적 삶의 감각 속에 뭉치게 하였다.
이들의 경멸감을 자극한 것은 무엇보다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옛 열광의 표시였다. 즉, 고속도로의 새로운 연장은 사람들에게 강한 비판적 감각을 불러일으켰고, 도로를 내기 위하여 나무들이 베어넘어지는 일은 복종적인 시민들까지도 환경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자동차는〈환경의 적(敵) 제1호〉가 되었다. 운전거리 십만킬로미터마다 자동차가 공기중에 일킬로의 납을 불어넣을 때, 콘스탄스호(湖)주변 도로들로 말미암아 그곳 경관이 평균 6.3평방킬로미터의 고립된 섬들로 바뀌고, 그렇게됨으로써 보행자는 3킬로미터마다 또다른 교차로에 맞딱뜨려야만 하게 될 때, 그리고 서독에서만 거의 50만의 인명이 자동차를 위한 제단(祭壇)에 희생당해 왔다면, 자동차의 문화적 발흥을 부추겨왔던 진보에의 믿음은 어느날엔가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그린벨트 또는 목재로 지어진 오두막의 보존문제를 둘러싼 갈등들은 개별적인 사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동력을 얻는다. 실제로, 위험에 처한 나무 앞에 완강히 버티고 선 사람들은 흔히 그전에는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를 구별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대립들을 통하여 분명하게된 것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던 진보에의 환상이 깨어진 일이다. 그 환상에 의하면 미래는 약속에 가득찬 것으로서 언제나 현재를 능가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역사를 상승시키는 데는 재화의 수효에 있어서 꾸준한 증가가 계속되면 족하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베어넘겨진 나무와 해체된 오두막은 이러한 진보가 실상은 불균형한 비용전가(費用轉嫁) ― 운전자의 즐거움을 위하여 사회는 쓰레기장으로 되고 마는 ― 에 의존하고 있다는 통찰의 상징이 되었다.
쓰레기가 증가함에 따라 삶의 질이 떨어졌다.〈더 크게, 더 멀리, 더 빨리〉가 우리를 좋은 삶에 좀더 가까이 데려다 주었다는 믿음, 미래에의 강박적 관심 ― 이것이 없었다면 신기한 것과 스트레스에 대한 중독은 말할 것도 없고, 속도에 대한 광분도 번창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은 끝나버렸다. 진보와 더불어 퇴보가 나란히 행진해왔고,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을 노예화함으로써 해방시켜왔던 것으로 보였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도피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었다. 되돌아 갈 길도 막혔고, 대안들은 파괴되었으며, 미래는 식민지화되었다. 이른바 객관성의 명령이 지배하는 곳에서 미래는 그 희망과 함께 완전히 소진되어버렸다. 총체적인 자동차 사회로 전락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선택은 그 사회를 관리하는 것 뿐이다. 아무런 미래도 없다. 소수의 사람들이 말해온 것이 이제는 인구의 대다수 속에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알렌스바하의 한 조사에 의하면, 1956년에 56퍼센트가 여전히〈사람들은 보다 나은 미래로 가고 있다〉라고 믿었는데, 1980년에는 오직 28퍼센트만이 그러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한 때 사람들이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인 것은 터널과 비행기의 항로로 둘러싸인 세계였고, 환상은 어디서나 관통할 수 있는 공간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다 명상적인 이미지가 흔하게 되었다. 녹색의 풀과 자전거와 분수와 조각들, 그리고 당연히 새들의 노래로 둘러싸인 아파트 구역의 이미지가 그러한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 있어서 창조성은 낭만적 전통에 뿌리내려진 개념들과 함께 꽃피어난다. 기계들의 위압적인 힘에 의해서 건드려지지 않은 채 유지되는 삶에 대한 욕망 ― 이것은 반핵 및 평화운동뿐만 아니라 교통주민운동 속에 흐르고 있는 라이트모티브이다. 논쟁의 주의제(主議題)는 이제 진보의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삶의 식민화를 어떻게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다.〈객관성〉의 지배에 맞서는 투쟁에서〈자연〉,〈건강〉,〈자율성〉이 관건적인 단어가 되었다. 숲을 보호하려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건 건강식품에 열광하는 사람이건 또는 풀뿌리자원봉사자이건 그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은 경제적 제국주의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삶을 유지하는 일이다. 욕망의 역사는 이제 자동차의 역사에 결별을 고하려고 한다. 바퀴(자동차)로부터 아직도 자기자신을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나쁜 믿음〉으로 괴로움을 당해야 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보다 부드러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열망은 자동차와 공유하는 것이 없다. 그 열망은 자전거에 훨씬 더 많이 애착을 갖는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타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이동할 수 있는 대가들이 아닌가? 한 때 운송(運送)의 신데렐라였던 자전거는 이제 별안간 인간적인 기술의 한 상징으로서 부각되었다. 그 체인과 볼 베아링과 가벼운 금속 뼈대를 가지고 자전거는 진보된 기술의 이점(利点)을 제공하면서, 환경을 위협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행위는 힘이 드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전거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자기자신에게 달려있다. 자동차에서처럼 몸과 두뇌가 안락한 구조물 속에 들어앉아 있지 않다. 자전거타기는 기계에 우선하는 도덕적 기초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연과 육체성(肉體性)을 요구한다. 이것이 자전거의 정치적 의미이다. 자기자신의 삶의 방향을 제어하고, 단순한 고객과 소비자로서의 생존을 넘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 그들은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함부르크에 사는 카롤 카를 – 짐은 1982년에 잡지《브리기테》에서 설명하였다.

나는 매일 아침 사무실까지 15분 동안 자동차를 운전해 가야 하고, 주차할 곳을 찾느라고 그 구역 주변을 같은 시간 만큼 소비해야 하는 데 지쳐버렸다. 나는 혼자 말하였다. 함부르크는 평평하고, 비교적 많은 자전거 길을 가지고 있다. 자전거를 타면 언제든 내리고 싶을 때 내릴 수 있고, 신경을 쑤셔대는 교통혼잡 속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 자전거 타기로써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사무실에 도착하게 되고, 시간도 돈도 절약할 수 있다.

자전거와 더불어 갑자기 오래된 동기(動機)들이 되돌아왔다. 내리고 싶을 때 내리고, 우회하거나 멈출 필요가 없고, 짜증나는 교통혼잡 속에서 기다리며 앉아있을 필요가 없는 상황 ― 통근자와 승객의 시대에, 독립성에 대한 욕구가 자전거를 찾게 하는 것이다. 꽉 메인 거리도, 지각하는 일도, 수리공장으로의 방문도, 지불해야 할 보험료도 이제 더이상 없다. 자동차의 대중화로 말미암아 특이한 물건으로서의 자동차의 위엄이 박탈되고, 그것이 단지 하나의 자동 운송기계로 전락해버린 이후에 한때 자동차와 철도 사이의 대조를 규정하던 경험적 모티프가 자전거와 자동차 사이의 대조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교통체증, 고속도 경사로, 주유소, 하부구조계획, 송유관, 유조선 등등으로부터 독립한 존재로서 자전거가 등장한 것이다.
결국 자동차는 겉보기에만 자동적인 것이었다. 개인 자동차를 갖고 우리는 서로서로에게서 갈수록 독립적으로 되었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더욱 의존적으로 되었다. 석유 공급이 중단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중동에서 한 암살자가 어딘가에서 자신의 목표물을 습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부구조의 힘에 대한 조용한 두려움이 자전거에 자율성의 분위기를 부여한다. 자전거라는 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비용도 거의 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재빠르다. 자동차 한대를 사는 것은 수송기계에 대한 예속의 몸짓인 것에 반해서, 자전거 한대를 산다는 것은 사람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실제로, 자동차를 포기한다는 일은 사회적 우월성의 한 상징이 되기까지 한다. 그것은 흔히 자전거가 상품광고의 배경으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에 시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골롸즈 담배를 위한 한 광고에서, 한 젊은이가 자동차들로 몹시 붐비는 거리에서 자전거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조용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광고의 설명문에는 자동차 없이 지내는 한 생활스타일이 칭송되고 있다.〈이 남자는 어디서든 더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에 천천히 다닌다. 그는 마력(馬力)의 도움 없이 이렇게할 만큼 충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힘을 얻는다. 그는 진정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운운.〉 ― 요컨대 그는 남들보다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교통체증, 스트레스, 승객으로서의 일반적인 운명에 직면하여, 자전거 타기는 전체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우월성의 표지가 된다. 자전거 타기로써 독립성과 정숙(靜肅)함과 신체적 자신감 ― 간단히 말하여 비순응주의 ― 을 실천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함으로써 자기자신들이 아직도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자동차 운전자들과의 사이에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동차 대중화 사회에서 그들 자신이 장거리와 속도의 지배아래 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주권(主權)확보의 분위기가 자전거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진실로 자기자신의 주인들이다. 그들은 강제적 수송체계에 코웃음을 칠 수 있으며, 연료비의 상승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사정이 허락한다면 그들은 자동차 구입을 위한 돈을 저축하기 위해서 임금노동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 주 30시간으로써 그들은 더많은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다! 이제 자동차 없이 지내는 생활스타일이야말로 희소성의 꽃다발을 받는다. 대다수가 자동차를 운전하도록 강요되고 있는 곳에서 자동차 없는 사람들의 삶은 새로운 매력의 힘이 된다.

1920년대에 베르너 베르겐그루엔은 자전거를 타면서 경험하는 지각(知覺)의 풍부성에 관하여 말하였다.

내가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자전거 한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내게 동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실은, 나는 자동차를 원하지 않는다 ― 내게는 속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여행의 강도이다. 여행의 강도에 기여하는 것은 가장 미세한 차이들, 뉴앙스에 대한 경험이다 ― 자동차 운전자는 다만 큰 것들의 움직임 또는 조잡한 차이들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한 풍경에서 다른 풍경으로 또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점진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소한 세부를 경험한다.

오랫동안 자동차의 유리창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거의 감각이 죽어버린 사람들이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게 될 때 그들은 자기들이 뚫고 지나가는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다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 놀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숨겨진 길과 뜻밖의 광경을 발견한다. 세상은 그 작은 세부의 풍성한 보물을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 드러내준다. 자동차의 핸들 위에 앉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냄새나지도 않는다. 자동차의 앞창을 통해서 보는 시각(視覺)은 공간을 죽이고, 모든 공간을 단순한 수송 루트로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있는 모든 것들이 보다 예각화되어 나타난다. 자전거와 보조를 맞추는 것은 멀리 가닿는 응시가 아니라 근접한 것에 대한 주의(注意)이다.
게다가, 자전거 여행은 자동차와 같은 단조롭고 직선적인 장거리 통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전거 여행은 작은 모험과 단절을 동반하면서 진행된다. 자전거는 4 내지 5 킬로미터 거리내의 집앞에서 집앞까지 사람을 싣고 가는 어떤 다른 수송수단보다도 더 다루기 쉽고, 분명 더 빠르다.《브리기테》잡지 보고기사에서 한 응답자는 말하였다.〈내 자전거는 결과적으로 나에게 보다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나는 내게 더 자주 말하지요 ― 어떻든 내가 그 근처를 가니까 그걸 실어야지, 또는 그쪽에 볼일이 있어 가는 동안 내 여자친구도 방문해야지. 자동차라면 내가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주차할 곳을 찾아서 그 구역주변을 세번이나 돌아다녀야 할테니까요.〉
자전거로 인해 가까이 있는 세계를 우리가 소유할 수 있게 된만큼, 자전거는 탈자동차 시대의 한 이상을 대변한다. 즉, 근접지역이 우리의 집으로 탈바꿈된다는 이상 말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거리, 동네 구멍가게들, 녹색의 잔디밭, 옥상의 정원들, 태양열 집열기들 ― 우리의 희망은 도시가 이렇게 삶의 공간으로 생태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자동차에 의해 강제되어온 낡은 생활양식에 반대되는 이미지들이다. 자전거는 지역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적 참여를 필요로 하는 테크놀로지의 모범이 된다. 자전거는 보행자보다도 몇배나 큰 이동성을 모든 사람 ― 부자나 가난뱅이나 젊은이나 늙은이나 ― 이 누리게 하면서도, 그 움직임의 자유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제약을 받지 않게 하는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자전거의 부흥은 진보의 개념에 강박적으로 붙들린 정신으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찾는 사람들의 노력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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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작스 (Wolfgang Sachs) ― 독일 에쎈에 있는 Institute for Cultural Studies 의 연구원. 本誌 제8호(1993년 1-2월호)에〈개발 – 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연속에세이의 일부가 소개된 바 있다. 이 글은 최근 英譯 출간된 그의 새로운 책 For Love of the Automobile : Looking Back into the History of our Desires (1992)의 한 장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나이키 축구 유니폼 디자인 파동

한국 대표팀 유니폼

번호판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은 가운데 벌어진 또하나의 디자인논쟁이 있다. 바로 이번에 새로 발표된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을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루다가 디자인 문제가 이토록 문제가 된것은 한마디로 예전의 번호판 파동처럼 나라의 ‘얼굴’인데 왜 이모냥이냐는 것인데..

문제는 가슴 가운데의 동그란 무늬 속의 번호가 흡사 ‘버스 번호판 표절이다!!’라는 말이 있을만큼 일반인에게까지 유치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뭐, 나이키에서 스폰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나라들은 다 그런 모양을 입는다지만 ‘번호구별이 잘 되게 하려고 그랬다’는 나이키측의 설명이 번호판 파동에서 정부측이 밝힌 ‘글씨의 가독성을 높이려고…’라는 해명과 유사하다.

‘세련되고 그럴듯해질거야. 처음봐서 그래..’라는 주변 젊은 디자이너들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자동차 번호판은 그렇다 쳐도 사람 몸뚱아리에 무슨 감식표시처럼 동그라미 번호를 붙인 나이키측에 대해서는 ‘정말 미국적이군…-_-‘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아뭏든 어색한건지, 좋아질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디다스로 바꿔서 세줄짜리 유니폼을 입지 않는이상 한국대표팀의 가운데 동그라미는 없어지지 않을것은 확실한데.., 스폰서 프로그램이 뭐길래,, 나라에서 나서서 나이키 선전을 해주는가 하는 의문을 지울수 없다.

네덜란드 대표팀 유니폼

광고효과로 본다면 거의 몇겹으루다가 매스컴에 노출되는 이런 스폰서 프로그램으로 한국대표팀이 얻게되는 것이라고는 고작(?아닌가..) 협약기간동안의 유니폼과 잠바.. 공… 등의 물품들일텐데, 이번참에 나이키 스폰서프로그램을 취소하고 자체 디자인을 기획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너무 현실성이 없는것인지?? 그러고보면 과거 월드컵때 미국전에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오노의 반칙을 풍자한 세리모니를 하면서도 정작 입은 옷은 철저하게 ‘미국적 상징’ 그 자체인 나이키의 유니폼을 입었다는건 아이러니다.. 아얘 홀딱 벗고 하면 더 좋았을것같다..

일상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

일상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 – 사회민주주의의 생활습관과 윤리가 돋보였던 스칸디나비아의 첫 인상에 관하여
– 박노자 일상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