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wangjik Crafts Wor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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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tle translated excerpt from <Iwangjik Crafts Workshop and Contemporary Crafts in South Korea>, written by Gongho Choi

The development of modern crafts has not been investigated due to the lack of historical records and researches. It is a lucky that I’ve got recently found design sketches and photographs of Iwangjik’s products, so that now it has become possible to see the production process of Iwangjik though limited.

The workshop, titled as Hansung(the name of capital since the beginning of Chosun dynasty) Crafts Workshop, founded in 1908, had ran its business for 30 years till the era of Japanese occupation in Korean peninsular faced its end, in other words the end of WW2. It was a facility producing crafts and played a crucial roll in developing modern Korean crafts.

It was when various traditional, cultural values were to be destructed that the workshop was established, and the modernization in Korean peninsular was initially began in this era by external influence. the workshop’s official aim was “to encourage the nation’s craft tradition” while this institution actually restored some bits of traditional craft skills as fine as the product quality of Kyoung-gong-jang(light factory)s, which had produced for long times various office and domestic goods only for governmental bodies. Also, it was a crucial moment in the modern history of Korean crafts that the workshop, as a semi-institutional body, trained a number of craftspeople who was to make the nation’s crafts tradition survived and who later became profound influences on the restoration of previously-demolished craft traditions.

In addition, this organization claimed that “the designs planned here should be made on possible traditional ways though production processes had to be modernized” as opposed to the dominated mood of modernization or Japan-ization in Korea. This was apparently a bold, important approach to restore and cherish tradition and was when nationalistic intelligentsias were influenced by Dong-Do-Seo-Gi(Eastern world take morality or inherited identity while Western world has science or technology), which was a widespread idea for the restoration of national sovereignty at the time.

19세기 초기산업의 디자이너들

19세기에 걸쳐 ‘디자이너’라는 말은 명확하지 않고 혼란스러움에 둘러싸여있었다. 이른바 하나의 직업적 책임으로서, ‘디자이너’는 순수예술가, 건축가, 공예가, 기술자(엔지니어), 발명가, 기술자 그리고 낮게는 ‘고용자’로서 다뤄졌다. 19세기는 무자비한 변화의 시기였으며, 디자이너 ? 그 모든 변화들과 함께했던 – 는 패턴북을 만들어내던 18세기의 순수예술가들과, 디자인팀이나 메니지먼트 구조를 바탕으로 일하던 20세기의 산업디자이너들,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 두 축은 그 정체성 – 19세기를 산업디자이너의 출현에 아주 중대한 기반형성기로 자리매김한 – 을 확립하기 위한 셀수없는 노력들 위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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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생산체제의 디자이너들

초기의 대량 생산체제에서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디자인하기’가 존재하게 된 정확한 시기를 집어내는 것과 그 쓸만한 사례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디자이너의 기원을 찾는 일은 특별히 어려운데,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이나 – 혹은 디자인 과정에 개입된, 그리고 대량 생산체제의 구조를 변화시킨 – 개인들의 직업구분이 불명확하게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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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국민대논문 조각글들 모음

110. 연구목적과 방법

이 연구는 현재의 특정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에서 드러나는 대안성을 디자인사의 흐름 위에서 고찰하는 작업이다. 어떤 방식이 대안(代案) 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대신하여 변화하였다는 의미와 같다.
2000년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디자이너스브랜드와 같은 디자이너의 독립적 사업들이 출현했고, 영국, 일본 등의 해외에서는 특정한 디자이너그룹에 의해서, 과거와는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디자인전시행사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예로 든 이러한 각각의 활동들은, 디자인 외부에 의해서 통합적으로 시작되거나 관리되지 않았고, 경계 를 인정하지 않고 뒤섞이는 등, 전반적으로 과거의 통념과 거리를 두는 편이어서, 혁신을 원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흥미로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그 다양성만큼이나 산만한 모습들로 인하여 과연 이것이 일정한 비교의 대상으로 묶여질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전체를 흐르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디자인 생산, 유통과정에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이 디자인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작업은, 현재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에서 발견되는 대안성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특히 1930년대를 전후하여, 영향력 있는 유통방식으로서 디자인사에 등장하는 디자인컨설턴시, 고용디자인 등의 방식들은, 오래된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상존하는 비교대상이다. 이 논문은 크게 디자인 개념이 등장한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주된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을 다루는 부분과 대안으로서 새로이 등장한 현재의 방식을 알아보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디자인사를 다루는 여러 문헌자료들을 찾아보는 일, 특히 디자인컨설턴시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살피는 일이 과거의 상황을 살펴보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디자인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쓰여졌던 방법은, 능력 있는 개인에 집중하거나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물의 외형적 흐름을 읽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들이 담고 있는 디자이너의 눈부신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영웅들의 이야기는 현재의 디자이너들에게 설득력 있는 과거의 경험이기보다는 무용담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자는 시대의 사회상과 디자인이 가진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변화의 원인을 찾는 에이드리언 포티의 디자인 연구방법을 택했으며 , 사고의 기준을 그에 맞추려 노력했다. 이런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된 사물의 형태나 색채가 아니라 그 주변의 상세한 상황들이다.
논문에서 대안적이라고 언급되는 현재의 활동들은, 주도적으로 이뤄지는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들에 비하여 명확히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가 대안적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이 앞으로 성공할 방식임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정작 연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점을 읽는 보다 지혜로운 눈을 가지는 일이다. 새로이 등장한 대안이라는 것 또한 영원히 지켜질 무엇이기보다는, 언젠가는 또 다른 대안에 의해 사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2. 산업 디자인

1. 1750, 산업 디자인의 시작
2. 산업 디자인의 생산(디자이너)과 유통(제품)

200. 산업 디자인

영국의 산업혁명과 기계화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인 반면에, 디자인을 단순히 제품 생산에 있어 필요한 종속적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기계화가 대량생산체계를 확립하던 때에, 그것을 좀 더 잘 팔리도록 형상화하기 위해서 디자인이 시작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바로 그것인데, 대량생산과 유통의 방식이 확립된 시점인 산업혁명기나 1920년대의 미국을 본격적인 디자인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그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런 종류의 견해에 대하여, 영국의 디자인이론가 에이드리언 포티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일군의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나타났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주장하든지 그들을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이몬드 로위나 헨리 드뤼피스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이 어떤 산업분야에서는 이미 한 세기 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가 주목했던 점은 산업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확실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시점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다, 사회적 취향과 제조기술의 융합 을 이끌어내는 과정으로서의 산업 디자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점이었고, 그 기준에 의하면 두 시기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실제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8세기 영국의 웨지우드(Wedgwood) 나 매슈볼턴(Matthew Boulton) 의 회사에서는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이 제작 과정에서 분리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를 통해 생산, 소비 양측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이후의 컨설턴트 디자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디자인의 등장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결과물인 제품이나 디자이너의 성공여부에 집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핵심이, 생산공정 상에서 ‘복잡한 사회적 요소의 합성’ 인 디자인 작업이 분리된 것이며, 그러한 생산방식의 변화요인은 디자이너의 품성이나 제품 등의 결과물보다도 당시의 사회시스템에 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10. 디자인의 분리

211-0. 중세유럽의 생산

16세기 초반에 유럽의 교역량이 전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뉘렌베르크나 피렌체 등의 신흥도시들에는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 그리고 성직자들을 위한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대형공방들이 생겨났다. 이런 공방들에서는 물건들을 제작할 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공적 방법을 사용했던 반면에, 전문성은 과거에 비해 한층 높아진 상태였고, 단일한 물품들을 반복적으로 복제해냈다. 존 헤스켓(John Heskett) 에 의하면, 이 시기의 예술가와 기술자의 구분은 훈련에 의해 성취 가능한 기술적 능력에 따라 행해지는 유동적 구분이었다. 한편으로, 교역의 증가에 따라 생산양도 늘어났는데, 이에 발맞춰 물품의 외형을 보다 돋보이게 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져서 생산과정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패턴북 은 이런 요구를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응용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가구나 직물 등의 산업 전반에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고, 출판술의 발달로 인해 광범위한 영역으로 보급되었다. 결과적으로 패턴북의 사용으로 인해, 생산과정에서 장식작업에 들여야 할 직공들의 노력이 감소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될 수 있었다. 이런 패턴북이,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에 속해있던 숙련공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고, 구분된 집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제작된 것은, 디자인이 생산과정에서 분리됨으로써 비로소 구분된다는 특성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다.
국가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의 유럽은 정치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의 측면에서 근대적인 발전이 두드러지지만 과거의 봉건적 요소나 세력이 남아있는 시기였다. 이런 절대왕정국가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행정, 사법, 군사의 측면에서 중앙집권이 달성되었다. 한편으로, 국제무역이 성행하던 16세기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에 입각한 자본주의가 도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절대왕정의 핵심이었던 관료제적 중앙집권과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왜냐하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국가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상업의 중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16세기의 급격한 호황에 뒤이어 17세기의 유럽 전반은 암흑의 세기(Black Century)로 불릴 정도로 상대적인 침체를 맞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17세기는 팽창의 시기였으며 유럽 경제의 중심은 이전의 지중해로부터 북서유럽으로 이동하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그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해 궁정예술가들과 장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왕실은 다수의 공장들을 세우고 부속 학교까지 세웠는데, 1667년에 파리의 고블랭(Gobelins)에 세워진 공장의 경우 수백 명의 장인들이 일할 정도였다. 당시의 중, 서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고, 다른 중, 소 군주국들에도 프랑스식의 궁정스타일과 중상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각국의 예술, 장인 지원체계 또한 왕실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생산되는 물품을 군주들이 통제했다. 한편으로, 당시의 유럽 도자기들은 전반적으로 그 질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각국의 왕실들이 도자기공방을 세우는데 영향을 주었다. 북부 독일의 작센(Sachsen, Saxony) 지방에는 1709년에 메상(Meissen)공방이 설립되었다. 초기에 이 공방에서 만들어지던 물품들은 궁정예술가들에 의해서 장식되었으나 1720년대 중반에는 미술학교를 통해 배출된 조각가들이 고용되어 모델링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주된 디자인 소스였던 패턴북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의 물품들은 주로 왕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이 물품의 생산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물품의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는 왕실재정악화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시민계급(bourgeoisie)의 급격한 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18세기 중반, 세력이 커진 시민계급과 중산층에 걸쳐 차와 커피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도자기의 수요 또한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장의 형성으로 인해, 왕실을 대상으로 한 예술성 중심의 생산방식은 상업적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공방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서 판로의 확장, 즉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공방의 상업적 성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으로 인해 왕실이 붕괴되어 후원을 바랄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 상업적 성공에 매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의 사회상은 다른 유럽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대륙의 절대군주제하에서 왕실이 물품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것에 반해, 영국은 의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들의 지지로 웨지우드, 치펀데일(Chippendale), 매슈볼턴과 같은 사업가와 기술혁신가들의 자유무역과 개인적 이윤추구가 보장되었다.

211. 웨지우드

1759년 웨지우드는 독립적인 도자기 생산 회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의 영국 도자기 수요는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고, 식민지의 개척으로 인해 해외시장 또한 확대되었다. 과거의 주된 판매지역이었던 회사주변 지역보다, 폭넓게 확대된 국내외의 시장에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는 공장의 생산방식이 보다 효율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포티가 “웨지우드의 놀라운 성공은 공장에서의 합리적 생산방식, 뛰어난 마케팅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제품에 대한 열정에 기인하고 있다.” 고 한 것과 같이, 웨지우드는 신고전주의의 도입이나 소지의 개발과 같은 일련의 실험들을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당면한 효율화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웨지우드는 새로운 판매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매장에 방문한 고객이 견본을 보고 주문을 하면, 그 수에 따라 생산을 하는 방식, 즉 수요와 공급을 보다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주문생산방식은 불필요한 재고로 인해 자본이 묶이는 위험 에서 회사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후 웨지우드는 견본을 소지한 영업사원을 고용하여 소비자를 찾아 다니거나, 제품 카탈로그를 찍어 배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판매방식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판매 방식이 기존의 생산방식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된 품목이었던 그린웨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새 판매방식에 대한 기존 생산방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1760년대 초반, 웨지우드의 주요 상품이던 그린웨어(녹색유 도자기)로는 물건을 안정적으로 균일하게 생산할 수 없었다. 그린웨어는 틀로 찍어낸 요철 무늬에 유약이 입혀지면서 그 특성이 살아나는 것이어서 유약을 입히는 직공에 따라, 그리고 가마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어서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유약 효과의 다양함이 그린웨어의 매력이었으나 결코 균일한 상품을 만들지 못했고, 따라서 웨지우드가 도입한 판매 방식에 적합하지 않았다.”
새로운 주문판매방식을 도입함에 있어서 필요한 전제조건은, 제품의 질과 형태가 항상 균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판매방식에서, 고객들은 직접 진열된 제품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제품을 구입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에서는 소수의 견본만이 매장에 진열되었고, 그것마저 직접 구입하는 것이 아닌 주문을 위한 구경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 매장에서의 견본이나 인쇄된 카탈로그에서 보여지는 제품의 모습이 자신이 구입할 물건과 동일하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했다.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웨지우드는 그의 해박한 도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우선 그는 그린웨어 대신 크림웨어 로 주 생산품목을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균일한 결과를 얻어내는 한편, 일정한 효과를 내는 유약을 개발했다. 또한 상회전사기법 의 도입을 통해서, 직접 손으로 그리는 장식 때문에 균일도가 떨어지고 대량생산에 부적합해지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당시의 제품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쓰여졌던 것이 분명한 만큼, 기술적 개발과는 다른 균일화를 위한 요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력을 보다 실수가 없고 일정하도록 유지해가는 일이었다.

212. 공정의 세분화와 원형제작과정의 분리

직공들의 숙련도 는 균일화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였다. 17 ~ 18세기 사이의 스테포드셔 에서, 제작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의 공예적 생산방식은 자취를 감추었고, 작업과정의 분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상태였는데, 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이렇다.
“늦어도 1730년대부터 도공들은 전체 작업 과정 중 물레차기나 손잡이 달기, 유약과 이장 만들기 등, 한 가지 과정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다. …… 1750년대 월던의 공방에서는 전체 제작 과정이 최소한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직공들은 대개 그 중의 한 가지 작업에만 종사하였다. 하나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예닐곱 명의 도공들이 분담하고 있는 셈이라, 그 중 어느 누구도 제품의 특성을 크게 바꿀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체 공정들이 이미 어느 정도 분화된 상태에서 웨지우드회사의 제품들은 더욱 균일화되어야 했는데, 직공들이 빈번히 저지르는 실수를 줄이는, 일종의 인간기계를 만드는 변혁은 그래서 필요했다. 웨지우드는 공정을 더욱 세분화하여 직공들에게 부여될 개별 공정의 난이도를 줄여나가게 된다. 그들에 대한 재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이용되었으나, 진척속도가 느리고 직공들의 호응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각 공정이 더욱 세밀히 분화되고 그에 따라 직공들의 작업이 단순화되는 시점에 필요한 또 하나의 작업이 요구되었다. 과거, 하나의 도공이 모든 작업의 과정을 관리하면서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나갈 때와는 달리, 구분된 하나의 반복기계와 같은 임무를 지녔던 직공들이 따르기 위해 필요한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공정의 세분화 과정에서, 도자기의 원형을 제작하는 작업은 독립적인 단계로서 다른 공정과 뚜렷이 구분되게 되고, 또한 다른 공정들의 지침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해갔다. 동일한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는, 개별적인 직공들이 수많은 공정에서 다양한 차이점들을 만들어낼 소지가 많았고, 그것은 곧 균일화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금전적 가치는 상당했는데 이점에 대하여 포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확한 디자인을 기획하는 모델러의 가치는 그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모델러는 어떤 의미에서 도자기를 한 개 만들 때 마다 작업의 일정부분을 대신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델러가 하는 일의 금전적 가치는 실상 이 일정 부분의 가치를 모두 합친 것과 같다.”
생산량과 수익의 정도는 원형제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원형의 질에 상당히 의존적이었으며, 또한 제대로 된 원형의 금전적 가치는 생산량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한 직공들의 작업에 비해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은 중요하게 평가되었으며, 그들은 일반 직공들의 두 배에 가까운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보수가 실제 그들이 가진 금전적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았는데, 고용직으로 일했던 모델러들, 그리고 프리랜스제로 일했던 모델러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당부분의 추가적 이익들이 모두 고용주에게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는 착취의 징후가 보여진다.
한편으로, 웨지우드는 다양한 미술가들을 회사의 모델제작에 이용했다. 신고전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주 고객이었던 중, 상류계층은 그들을 타 계층과 구별하기 위해 최신의 양식들에 몰두했다. 새로운 유행인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에, 전통적인 도자기제작방식에 익숙해있던 도공 출신 모델러들은 미술가들에 비해 어려움이 많았다. 신고전주의스타일은 런던과 같은 유행의 중심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스테포드셔의 노동자계급 출신 도공들이 새로운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회사에 고용된 미술가들이 가졌던 모델러로서의 능력과는 다소 상관없이, 그들은 조직체계 안에서 곧바로 적응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규칙들이 엄격히 지켜지던 조직체계에서 그들의 다양하고도 제어 불가능한 독립적 성향들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웨지우드는 그들을 회사조직 바깥에서 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대도시에 위치한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구입하거나 의뢰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이로써 디자인작업은 제작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유행은 웨지우드가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제품 생산에 사용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독립적인 디자이너, 디자인작업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노동분화로 인해서 쪼개어진 세부적인 공정들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3. 생산방식의 변화와 디자인

제조업자들에게 필요한 디자이너란 것은, 무엇보다도 균일하고 정확한 제품생산을 가능하게 해내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모든 디자인은, 기계든 손이든 활용 가능한 생산 수단으로 작업해서 얻은 제품에, 개별적인 차이와 다양성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 인용)웨지우드의 퀸스웨어에 관한 많은 디자인사연구가 퀸스웨어의 신고전주의적 특성에 집중하지만 실로 그것은 신고전주의의 미적 특성보다는 공장의 생산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기계의 도입이 디자인을 변화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제형물레의 선반을 회전시키는데 기계를 도입했다고 말하지만, 물레질, 틀 성형, 제형 물레 성형 등의 제조기술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왔던 전통적인 기법이었고 다만 속도를 빠르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웨지우드의 성공원인은 공장에서 노동인력을 조직하는 것과 관련한 그의 새로운 방식 때문이었다. (디자인과 제작방식의 연관관계)
그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사업 초반의 그린웨어는 다양한 형태와 유약의 효과로 유명했지만 필연적으로 균일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견본이나 카탈로그를 통한 판매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새로운 방식은, 형태의 다양성은 축소하면서도 표면에 들어갈 상회장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식이었다. 상회장식은 도자기가 구워진 이후에 작업을 하면 되는 일이었고, 주문을 받고서도 바로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장식방법을 상회로 바꾸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형태의 도자기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재고준비단계나 장식공정에서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장식의 가짓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러한 장식들이 모두 들어맞을 수 있는 특별한 도자기의 디자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웨지우드 초기에 생산되던 로코코스타일의 도자기들은 굴곡이 많고 형태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단순화가 필요했던 장식공정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반면, 신고전주의 스타일은 단순하고 평평한 표면을 만들어내는데 적합한 스타일이었고, 이후 웨지우드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생산되는 제품의 균일화, 그리고 당대를 살아가던 중상류층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조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고서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었다. 두 조건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절충안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웨지우드의 모델러들이었다. 포티는 이렇게 18세기의 모델러들이 담당했던, 생산과 소비라는 두 측면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형태의 개발이라는 작업이 1920년대의 레이먼드 로위와 같은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했던 일과 다르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220. 19세기 영국의 디자인저급화와 기계화와의 관계

19세기.. 디자인 변질이 어떻게 전반적으로 걱정거리였는지 기술할 것.. 1111

기계화와 디자인의 연관성에 대하여, 기계 생산 방식의 등장이 디자인의 질을 저하시킨 주범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상태에서, 기계의 등장이 디자인 공정의 분리를 촉진했다는 그런 견해는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모리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었고 현대디자인 이론서에 자주 등장하는 니콜라우스 페브스너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재론되었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은 같은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상황을 배제한 편협한 견해일 수도 있다. 당시의 기계와 디자인의 관계를 해석한 포티의 견해에 의하면, 기계의 등장을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으로 보는 판단은 “제품의 형태에 미치는 장인의 영향력을 기계가 침탈했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다. 즉, 기계가, 외형을 다루는 과정을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분리시켜서 디자인 작업의 변질을 초래했고, 그것이 곧 제품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 생산방식이 도입되기 이전인 18세기 초에도 이미 공정의 분리를 통한 노동의 분업화가 이루어져있음을 웨지우드를 비롯한 예에서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공정의 분리가 기계의 등장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19세기의 산업체들에서 기계화가 차지하는 공정의 정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수공에 의한 생산공정이 그때까지도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수공생산은 보다 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의 장인이 작업해나가는 방식은 아니었다.
공정 분화현상은 비슷한 시기의 산업 전반에서 발견되며 이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언급된 자본주의 산업발달의 3단계과정과 들어맞는다. 그에 의하면, 개개의 장인들이 독립적으로 일해서 물건을 만드는 전 자본주의 사회가 지나면 자본주의의 첫단계가 시작된다고 했다. 첫 단계는 노동자들의 간단한 협업단계로 작업장을 공유하거나 같이 재료를 구입하고 같이 물건을 파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관리자의 지시 하에 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수공과정으로 분리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기계 그리고 공장체제의 등장이다.
18세기는 영국 대부분의 제조업분야에서 두번째 단계, 즉 수공 생산 상태에서의 분업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이는 독립적인 장인이 전체 생산과정에서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분화된 작업으로서 디자인이 새롭게 필요해졌음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인용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1725~1826)의 글을 보자.
“무지는 미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또한 산업의 어머니다. 심사숙고나 감각표현은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손이나 발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반복작업은 숙고나 감각표현과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제조업은 정신이 최소한으로 관여하는 곳, 또한 작업장을 …… 인간 부품이 장착된 엔진으로 간주할 때 번영한다.”
1767년의 이 글에서는 웨지우드 회사에서의 분업화와 작업지시체계로서의 디자인의 등장이 예견되고 있다. 디자인이 무지한 노동력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두번째 단계인 수공생산 상태에서 분업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였다.
기계의 도입은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의 변화에 작용하였던 요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노동의 분화를 더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계생산에 의해서 생산력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이 생산력의 증감여부에 생산방식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분화라는 생산방식은 생산력의 증가가 유지되는 한 함께 유지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어질 얘기 -> 기계화의 현상(직물,,, 등등 60페이지 이후의 사례들.. 그래서리,, 디자인변질의 원인은 기계화보다는 공정의 분화가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던 목판나염술은 1750년에 이르러 동판나염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방법을 이용해 공장에서는 보다 큰 면적에 보다 정교한 무늬를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수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는데, 염료를 묻히는 과정과 판을 잘 맞추어내는 것, 그리고 적당한 압력을 가해 찍어내는 작업은 날염공들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1796년에는 동판나염에 이어 롤러날염기계가 개발되었고 뒤이은 증기기관의 이용에 힘입어 생산의 속도는 열 배 이상 증가하였다. 날염작업이 수작업에서 증기 날염기계로 대체되자 기존의 장인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생산량의 증가로 인하여 새로운 디자인의 요구가 높아졌고 디자이너의 수 또한 늘어났다.
한편으로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일부의 고용된 디자이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리랜서로 자신의 디자인을 제조업자에게 파는 식으로 일했다. 그들의 보수는 당시의 다른 숙련 노동자들에 비해서 높았지만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수익에 따른 공정한 배분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날염업자들은 1830년대 초반, 저작권을 날염직물 디자인에까지 적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그것이 좀 더 좋은 디자인의 개발에 긍정적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나, 실상 저작권 적용의 목적은 그들의 재산권 확보에 있었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는 1851년의 대영박람회 디자인 부문 공식 보고서에서,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 중 하나는 롤러 날염기계의 도입에 의하여 디자이너가 통제가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고, 그들이 제조업자의 요구나 장식미술의 원리에 얽매여 쓸데없는 복잡한 식물의 곡선을 모방하는데 능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선호했던 다분히 개인적인 선호에 의한 단순한 형태의 결과물들은 보다 과거인 동판날염의 등장에 의해서 이미 사라졌던 것이었다. 사실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를 날염할 수 있었던 것은 롤러날염이 아닌 동판날염방식의 도입 때문이었다. 그는 수공으로 작업한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의 결과물들을 기계의 결과물이라고 여기며 혹평했고, 수공에 의한 완벽한 작업이라고 짐작했던 단순한 무늬의 결과물들은 실제로 날염기계에 의했던 것이었다. 디자인저급화가 기계에 의한 것이었다는 당시의 견해는 이처럼 부실한 선입견에 근거해있다.
디자인의 변질된 근본적 원인은 기계화가 아니라 양과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제조시스템이었고, 그것인 디자인을 공정에서 분리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결과물의 질을 악화시켰다. 근본적으로 이런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기득권을 가진 19세기의 디자인 개혁운동가들은 복잡한 사회문제보다는 지엽적인 생산기술상의 문제에 주력했다. 특이하게도,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모리스는, 존 러스킨처럼 물질적 진보를 모두 버리고 중세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대신에, 물질적 진보를 수용하는 대안의 가능성을 생각했었고, “디자인의 열악함이 자본주의의 탐욕 때문” 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반(反)기계적 성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반대했던 것은 단순한 생산기계 자체가 아니었다.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것은 철과 동으로 만들어진 실제의 기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억누르고 있는 포악한 상업성이라는 실체도 없는 커다란 기계다.”

1960 – 1997 한국현대사 연표

Chronology of Korean Modern History #
제 2 공화국(1960~1961 )

1960년
8월
제2공화국 대통령에 윤보선(尹潽善) 선출.
14일, 북한 김일성, 남·북 연방제 제의.

1961년
2월
대일정책결의안(선국교·후경제 등) 채택

5월
군사정변. 군사혁명위원회 발족(의장 장도영·부의장 박정희)
장면내각 총사퇴. 혁명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18)

7월
경제재건 5개년 계획 발표

8월
박정희 최고의장 8·12성명(정권 이양시기˙국회 구성문제 등) 발표

12월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실시.

1961년
1월
공용년호를 서력으로 변경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성안

3월
원자력연구소 원자로에 첫 점화

윤보선 대통령 사임

증권시장, 약 500억 환의 5월분 수도 결제 불이행(증권파동)

제2차 통화개혁(10대 1로 평가절하, ‘환’을 ‘원’으로 변경)

제 3 공화국(1963~1972 )

1963년
1월
민간인 정치활동 재개

2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2·18성명(민정 불참선언 및 정국수습 9개 방안 제시) 발표

10월
서울 가정법원 개원

12월
박정희 제5대 대통 령 취임, 제6대 국회 개원.

1964년
8월
한국기자 협회 발족

10월
한·월남,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 파견에 관한 협정 체결.

1965년
1월
국무회의, 비전투병력 2,000명 월남파병 의결.

3월
단일변동환율제 실시

4월
한·일협정 반대데모대, 효창공원서 시민궐기대회.

6월
한·일 협정 조인, 국교 정상화

7월
이승만 하와 이서 사망, 23일 유해 환국.

1966년
2월
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3월
국세청·수산청 발족

6월
김기수, 세계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 됨

7월
한·미행정협정 조인(1967. 2. 9. 발효)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공표

10월
존슨 미국 대통령 한국 방문

1967
3월
과학기술처 신설, 원자력원을 청으로 개 칭

6월
제6대 대통령 선거(공화당 박정희 후보 당선, 7.1. 취임).

8월
제1차 한·일각료회담 개최(도쿄).

1968년
1월
1·21사태,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입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원 산 앞바다서 북한에 피랍

2월
경전선 개통

4월
향토예비군 창설

5월
제1차 한· 미국방장관회의(워싱턴)

7월
문교부, 중학입시제도 폐지 발표

9월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막.

10월
문교부, 대학입시 예비고사제 실시 발표.

11월
시·도민증 없애고 주민등록증으로 대체

서울시의 전차 철거

12월
광화문 복원 준공

1969년
3월
국토통일원 개원

가정의례준칙 발표

김수환 대주교, 추기경에 서품

6월
3선개헌반대 학생 데모 시작

7월
경인고속도로 개통

9월
3선개헌안·국민투표법안 국회서 변칙 통과

12월
국제통화기금, 한국을 특별인출권(SDR)통과공여국 으로 지정.

1970년
4월
서울 와우시민아파트 도괴. 사망 33명

5월
서울대교 개통

금산 인공위성지구국 우주통신 중계 개시

7월
우편번호제 실시

경부고속도로 개통

10월
국토종합개발 10개년계획 확 정

1971년
2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4월
제7대 대통령선거 실시(박정희 후보 당선, 7. 3. 취임)

7월
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 발굴

12월
국가보안법 국회서 변칙 통과.

제 4 공화국 : 유신(1972~1979 )

1972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최고의 고려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直指心經)》 발견.

8월
박정희 대통령,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발표(기업사채 동결)

남북적십자사, 첫 본회담 평양에서 개막

10월
계엄사, 포고 제1호로 대학휴교, 신문·통신 사전검열제 실시

11월
유신헌법 확정

12월
첫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12월 23일, 통일주체국 민회의,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후보 선출(12. 27. 취임).

1973년
2월
비상국무회의, 국정감사 폐지법안 의결.

3월
한국방송공사 발족

4월
한국 여자탁구팀 세계 제패(유고 사라예 보)

5월
어린이 대공원 개원.

8월
김대중피랍사건 발생(일본 도쿄), 한일간 긴장 야기

1974년
1월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개헌논의 금지)·2호(비상군법회의 설치) 선포

8월
광복절기념식장서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 발생. 대통령부인 육영수 피격 서거

서울시지하철(서울역~청량리역 간) 개통.

11월
유엔군사령부,
북한은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고 남방 1`km까지 콘크리트구조물을 구축했다고 발표.

포드 미국 대통령 내한, 한·미정상회담 후 공동성명 발표.

1975년
2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찬성 73.11`%).

9월
여의도에 새 국회의사당 준공

민방위대 발대식

10월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1976년
6월
경제기획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8월
양정모 몬트리올 올림픽 경기대회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첫 금메달 획득

북한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 서 집단 도끼만행으로 미군 장교 2명 살해

10월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송·원대의 유물 대 량 인양.

1977년
5월
하비브 브라운 미국 대통령 특사, 박정희대통령과 회담, 철군문제 협의.

6월
국내 최초로 고리원자력 1호 발전기 점화

7월
부가가치세제 실시

1978년
4월
세종문화회관 개관

6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집회에서 박정희후보 제9대 대통령 당선

11월
한·미연합사 령부 발족

1979년
6월
카터 미국 대통령 내한. 1·2차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 발표

10월
국회, 김영삼의원 제명

마산·창원에 위수령 선포. 충남 삽교호방조제 준공.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정보부장에 의해 피격 사망(10·26사태).

대통령권한대행에 최규 하 국무총리 취임

제 5 공화국(1980~1988 )

1980년
2월
최규하 대통령,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 구성

5월
정부,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

광주학생시민대규모 데모(5.18 광주항쟁)

계엄하의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신설
(의장 최규하 대통령, 상 임위원장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8월
컬러 텔레비전 시판 개시

최규하 대통령 하야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9월
대학교육개혁시안 발표 (학과별 최소 졸업정원제 채택).

11월
신문협회·방송협회, 언론기관 통폐합 결정

1981년
1월
민주정의당 창당(총재 전두환)

정부, 비상계엄 전면 해제

4월
국정자문회의 발족(의장 최규하)

5월
공정거래위원회 발족.

9월
제84차 IOC총회, 제24회 하계올림픽경기대회 서울 개최 의결.

1982년
1월
중고생 교복(83년부터)과 머리형 자율화하기로 결정

1983년
1월
공직자윤리법(고위공직자의 재산등록)발표.

6월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시작. 1만 189명 혈육 상봉

10월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묘소서 북한 공작원이 장치한 폭탄 폭발,
참배 준배 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등 한국 고위관리 17명 순국.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내한(12일 1차 한·미정상회담, 14일 공동성명 발표).

88서울올림픽경기대회 휘장·마스 코트 발표.

5월
교황 바오로 2세 방한(6일 여의도에서 한국순교자 103위의 시성식 집 전).

1984년
4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한반도 안정위해 남북한과 미·중국의 4자회담 제의

홍콩서 실종된 영화배우 최은희, 감독 신상옥의 북한 납치사실 발표

5월
서울대공원 개원

1985년
6월
김영삼·김대중 회동, 민주화요구 공동발표문 채택

8월
고대 의대, 냉동정액을 이용한 수정으 로 임신된 아기가 국내에서 처음 탄생했다고 발표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 40년만에 고향방문단 혈육 상봉

한국이 참여한 첫 해외개발유전인 인도네시아 마두라 유전서 생산 개시

11월
한국, 남극자원보존협약 가입.

1986년
3월
납북된 최은희·신상옥,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

재무부, 덤핑방지관세제 실시

8월
새 국립중앙박물관, 구 중앙청청사를 개조해 개관

9월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개막(∼10월 5일)

10월
(주)삼성전자 문태원 연구원, 세계 최 초로 초소형 4mm VTR개발.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 경찰고문으로 사망.

2월
과학기술원 윤한식·손태항 박 사팀, 최강력고분자 알로이섬유 세계 최초로 개발

6월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

12월
중앙선관위 노태우 민정당후보 당선 공 포.

제 6 공화국(1988~1992 )

1988년
1월
대한상의,
공산권 경제단체와는 처음으로 헝가리 상공회의소 경제협력확대를 위 한 업무협조협정 체결

2월
금호그룹에 제2민간항공인가

보사부, 국내 첫 AIDS환자 발생 발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 제13대 대통령 취임

7월
월북작가의 해방전 문학작품에 대한 출판허용조치 발표

9월
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65개국 4,361명 참가)

11월
전두환 전 대통령,
자신의 재임 중에 일어났던 비리를 시인·사과하고 재산 일체를 국가에 헌납하 기로 발표.

1989년
2월
헝거리와 국교 수립(공산권 국가로는 처음).

3월
문익환 목사, 북경을 경유 평양에 도착, 김일성과 회담

8월
동아건설, 세계 최대규모인 리비아 2차대수로공사를 수주(53억달러)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김영삼 민주당 총재·김종필 공화당 총재,
청와대에서 3당 통합 을 선언.

2월
외무부, 모스크바주재 영사 처 개설을 발표

5월
교통부, 수도권 신공항입지를 영종도로 확정

6월
국무회의, 새 민방(民放)의 방송법 개정안 의결

12월
소련 방문(∼17일). 14일 양 국 정상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회담 후 모스크바선언

국회, 지방자치 법·지방의회선거법·지방자치단체선거법 등
지자제관계 3개법안 통과.

1991년
1월
정부, 걸프전의 군의료진지원조사단 26명 사우디에 파병

한국의료지 원단 현지로 출발

3월
시·군·구의회의원선거 실시

9월
유엔총회, 남북한유엔가입안을 만장일치로 통과

12월
새 민방 서울방송 (SBS) 개국.

1992년
1월
노태우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에서 미국측의 대북한 직접협상을 배제하고 한반도핵문제는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며, 북한은 조기에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국제 사찰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

2월
남북한, 두만강개발회담 실무접촉에서 나진·선봉지구개발에 공동보조하기로 합의

남북고위급회담(평양)에서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등 합의서 본문을 교환·발효

4월
정부,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을 개 방한다는 내용의 농산물협상이행계획서를 GATT에 제출

8월
황영조 (黃永祚), 바로셀로나올림픽경기대회 마라톤 우승

12월
, 김영삼후보 당선

대한민국 (大韓民國) 2

문민정부(1993~1998 )

1993년
2월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선언

4월
정부, 소말리아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약 250명의
건설공병부대를 파견하 기로 유엔측에 공식통보

5월
국회, 공직자윤리법 개정안 처리

8월
경부고속철도 차종을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로 확정

금융실 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

대전 엑스포 개막

9월
우리별 2호 발사 성공(프랑스령 기아나)

10월
전교조(全敎組), 해직교사의 복직문제와 관련하여 쟁점이 되어 온
전교조탈퇴 조건을 수용 복직

12월
한국 및 미국, 쌀시장개방안 타결.

1994년
1월
서울지검, 장영자(張玲子)를 107억원을 편 취하고 37억원의
당좌수표 중 5억원을 부도낸 혐의로 재구속

4월
김영삼 대통령과 이희창(李會昌) 국무총리,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의 갈등으로 국무총리 사표 제출

7월
평양방송, 김일성 사망(8일)을 보도

9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태권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경기대회 정식종목으 로 승인

10월
성수대교 붕괴

12월
기획원-재무부, 건 설부-교통부를 통합하는 등 정부조직개편.

삼성 자동차 진출 허용

WTO비준 동의안 국회 통과

1995년
1월
부동산실명제 7월 1일부터 실시하기로 확정발표

3월
케이블TV 27개채널 본방송 개시

5월
북한에 조건없이 곡물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남북 대표회담개최 제의

6월
27 일, 지방선거 실시. 서울시장 조순(趙淳) 후보 당선, 여당 참패

쌀 15만톤 북한지원 합의

서울 삼풍백화점 2개동 중 북쪽건 물 붕괴

7월
김대중 정계 복귀 선언

10월
수출 1000억달러 돌파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5.18 특별법 제정 지시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

1996년
4월
한반도 4자회담 제안

5월
2002 월드컵 일본과 공동 유치

8월
한총련 사태

9월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10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11월
조선총독부 건물 완전 철거

1997년
1월
한보 철강 부도

2월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5월
김현철 구속

8월
KAL기 괌 추락 사고

11월
IMF구제금융 공식요청

12월
IMF협상 타결 (구제금융 약 550억 달러 결정)

제 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국민회의-현 민주당) 후보 당선

스웨덴 가구디자인

스웨덴 가구 디자인의 배경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스웨덴에서는 현대 디자인의 모태가 되는 강렬한 예술적, 문화적 변화가 있었다. 스웨덴 디자인사에는 두가지 주목할만한 시기가 있는데, 기능주의 시대의 돌파구를 마련한 1930년 스톡홀름 전시회가 그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스웨덴 고유의 디자인과 수공예 기술에 대한 세계적 이해 기반을 마련하게 된 1955년 헬싱보리에서 열린 생활 용품 전시회 H55가 그것이다. 스웨덴 가구디자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