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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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를 들고 들어간 극장 안에서 나는 왼편의 스피커 옆에 앉아있었다. 영화는 이미 시작되었는지 어느 노인이 등장하다가 이내 해방 이후의 거리로 바뀌었다. 오십년대의 시장통에서 벌어졌을법한 수수한 일상, 그 속에서 살던 한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왼편의 스피커가 웬지 이상하더라니, 영화를 보는 내내 깜짝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총소리가 작을 수 있겠느냐 마는, 꼭 전투가 시작되는 첫 총성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앞사람의 의자를 치기도 하고, 놀라서 고개를 돌리느라 중요한 장면을 놓치기도 하였다. 그만큼 이 영화는 소리조절과 화면조절을 상당히 급박하게 전환되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나는 전쟁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평소엔 영화를 정말 안보는 편이지만, 전쟁영화는 그나마 찾아서 본 편이다. 나는 전쟁영화를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평온한 세상을 확인하고 안도하지만, 그런 안도감의 이면에는 상황을 언제건 뒤바꿀 수 있을 불안요인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함께 느끼게 된다. 전쟁영화의 시나리오나 원작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하는지 알 수 없으나 무작정 그것은 다큐멘터리라고 믿어버리기도 한다.

어설픈 점이 보였다. 반합도 모자랐을 시절에 등장하는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식판, 많이 들어서 알고 봤던 어색한 전투기 그래픽들, 그리고 잔인하게도 – 형제가 같이 끌려가서 서로 겨누다가 동생이 살아오는 – 전체적인 스토리 또한 그리 놀랍지는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눈을 적시게 된 이유는, 그런 어설픈 부분에 비해서 너무나 고마운 진일보한 균형감각 때문이었다. 형의 동생 살리기는 그래서 더 눈물겹다.

우리는 헐리우드의 눈을 통해서, 혹은 과거 군사정권의 시각을 빌린 영화들을 통해서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만났었다. 그 모든 전쟁에는 선악이 뚜렸했다. 하다못해 그 태극기마저 윗쪽의 빨간색보다 아랬쪽의 파란색이 크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원래 빨갱이만 들고 있어야 할 죽창을 들고 어색하게도 빨갱이들을 죽이는 장면과, 웬지 하면 맞을것 같은 말인 “씨팔 일정때는 나라지킬라고 싸웠지만 지금 이게 뭐하는 지랄이냐. (필자 주)”라는 공형진의 대사는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 부분, 형이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북쪽을 향해서 다시 총질을 해대고, 그런 형으로 인해 동생은 남쪽으로 살아 돌아와 어머니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그 땅,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땅이 바로 남한 땅이다. 그런 총질로 만들어진 긴장의 땅인가보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는 남쪽에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남쪽으로 돌아오는 동생으로 그려졌겠지만, 언젠가 시간이 더 흐르면 그 반대편 북쪽의 눈물나는 전쟁스토리도 들어볼 날이 있을 것이다.

덧말 : 나도 한번 아주 길게!! 써보자는 다짐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는데 결과적으로 뭐 만족스럽진 못하다. 하지만 대충 내가 이 영화를 본 느낌 중에서 중요한 몇몇은 드러난 것같다. 이런것도 막상 써보려니 어렵네그려..

아, 그리고… 이 영화속, 전장에서의 장동건의 모습은 해안선이라는 영화를 다시 생각나게 하였따.

프레시안에 뜬 “볼링 포 콜럼바인” 영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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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와 위험한 다큐멘터리 라는 이름으로 프레시안에 올라온 Bowling for Columbine에 대한 비판글.

결과적으로 판단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인것이다.

마이클 무어와 위험한 다큐멘터리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Bowling for Columbine’
2004-01-28 오후 6:16:41

영어에 ‘preaching to the choir’라는 표현이 있다. 목사가 ‘성가대원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뜻으로, 이미 내 편이거나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회유하거나 설득하려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비유다. 모르긴 몰라도, 성가대를 향해 복음의 메시지를 갈파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거나 스릴이 있는 일은 아닐 듯싶다. 결론은 이미 나 있는 바,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열성 신자들이 목사의 설교를 비판의식이나 적대감을 품고 들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교말씀의 논리가 허술하거나 억지 주장이 있더라도, 신앙적 대전제만 내 것과 일치한다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2003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포함하여 웬만한 다큐멘터리상은 죄다 휩쓴 마이클 무어 감독의 ‘Bowling for Columbine’(2002)은 ‘성가대원들에게 설교하는’ 그런 영화다. 미국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미국인을 포함한)에게 이 영화는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을 테고,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듯한 통쾌한 시각의 연속이며, 화자와 더불어 미국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한편 “아, 미국인도 이럴 수 있구나” 하며 감탄까지 하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실로 이 영화가 제기하는 미국의 폭력 문화의 문제는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Bowling for Columbine’은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 주 리틀톤에 있는 콜럼바인 고교에서 발생한 대형 총기사건을 출발점으로, 미국의 기형적 총기문화와 유혈 낭자한 폭력의 역사에 대한 고발을 시도한다. 졸업을 한달 앞둔 두 학생이 중무장을 하고 학교에 나타나 13명을 쏴 죽이고 자신들 스스로 자결한 이 사건의 원천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무어 감독은 일상화된 폭력에 멍든 미국의 치부를 들춰내고, 평온한 듯한 표면아래 깔려있는 미국인들의 공포에 질린 모습들을 찾아낸다.

이 영화는 무어 감독 특유의 블루 칼라식 접근과 비아냥조의 인터뷰가 어우러져 직설적이면서도 반어적인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그 설정과 주제 모두 가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영화가 반미감정이 팽배해 있는 유럽과 한국 등지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음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이나 유럽의 관객들은 그 유머와 재치에 매료되어 웃고 즐기는 와중에 그 논리의 허점과 뒤틀린 시각을 대충 흘려버린 것 같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자명하게 나타나는 무어 감독의 편향적 시각과 삼단논법적 논리, 그리고 선동적 화법은 이미 그와 시각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약간이라도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보는 사람은 그 속에 당치않은 결론과 함량미달의 내용이 다분히 있음을 느끼게 된다. 특히 미국 권리장전 2조의 ‘무기를 소지할 권리’를 성역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이 영화가 이 권리에 대한 여론을 호도하려는 진보주의자의 허튼 수작에 불과한 것으로 비춰진다.

미국은 지금 파랑(민주당)과 빨강(공화당)으로 뚜렷이 이분되어 있다. 크게 나누어 진보 쪽으로 기우는 민주당은 총기규제를 지지하고, 보수파인 공화당은 총기규제를 반대한다. 극도로 단순화하여, 미국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보수들이 총기규제를 반대하는데, 이들은 마이클 무어 같은 리버럴에 대한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있다. 총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마치 광기 어린 저급시민으로 묘사하는 이 영화에 대한 그들의 시선이 곱지 않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 가정의 42%가 집에 총기를 두고 있다는 통계(2000년 갤럽)를 볼 때 더욱 그렇다.

무어 감독은 이같이 가뜩이나 편이 확연하게 갈려있는 이슈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루면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치밀하고 신중한 자세로 임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사우스파크’식 애니메이션을 통해 1871년에 창립된 전국총기협회(NRA)가 마치 1866년에 창립된 KKK의 자매단체인양 묘사한 것과, 미국의 총기관련 살인 건수를 영국· 호주· 캐나다 등 타국의 수치와 비교하면서 단순하게 숫자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실제 인구대비 건수보다 훨씬 높다는 느낌을 받게 한 것 등, 불성실한 아전인수식 논리가 곳곳에 보이는 것이다.

필자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대목은, 무어 감독이 공군사관학교에 모셔져 있는 B-52기의 명판이 이 전투기가 “7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베트남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있다”고 한 부분이다. 실제로 이 명판에 새겨진 문구는 “72년 크리스마스 이브 공중전 끝에 미그기를 추락시켰다”(일부 발췌)라고 되어 있다. 무어는 여기에서 “미그기를 추락시켰다”는 부분을 “베트남사람을 죽였다”로 ‘의역’함으로써 교묘하게 민간인 학살을 연상케 하는 반칙을 범하고 있다.

마이클 무어는 ‘Bowling for Columbine’의 흥행을 계기로 뭇 총기소지자 단체를 비롯한 미국의 우익으로부터 만만치 않은 공격을 받고 있다. 그가 이 영화에서 시종 보여주는 우월감과 비아냥거림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 영화의 ‘사실 전달’ 부분을 조목조목 해부하고 여기저기서 루머를 취합해 무어의 ‘거짓’을 까발리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진위를 모두 가릴 수는 없겠으나, 우익은 물론이고 뉴욕타임스· 뉴요커·빌리지 보이스 등을 포함한 진보 언론에서까지 이 영화의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지적할 정도면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논리구조의 엉성함이 ‘옥에 티’ 이상의 수준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사실 필자가 발견한 오류만 해도 대여섯 가지가 되니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문제의 근원은 마이클 무어가 이데올로그라는 것이다. 특정이념(‘자학적 리버럴리즘’이라고 할까)에 치우친 그가 자신이 설정한 전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왜곡된 팩트로 점철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데 문제가 있고, 아울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진실의 추구보다는 편향적 메시지의 전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의 논지에는 이념과 액티비즘이 너무도 짙게 배어 있다. 그의 영화는 그 주제의 신선함이나 설득력이나 당위성의 여부를 떠나, 그 주제를 자신이 갖고 있는 이념의 도약판으로 이용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념은 여러 면에서 종교와 비슷한 양상을 띰으로, 논리나 타협이 설 자리가 변변치 않다. 그런 견지에서 이념이 원천인 무어의 작품은 결국 프로퍼갠더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프로퍼갠더의 기본 의도는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로는 46년 만에 처음으로 칸느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여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마이클 무어의 ‘Bowling for Columbine’은 프로퍼갠더 영화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무어가 ‘부시 몰아내기’를 선언하고 요즘 민주당 대통령 예비선거에 출마한 웨슬리 클라크의 열렬한 지지자로 나선 것은 그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것에 비추어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다큐멘터리의 생명은 그 차가운 시선에 있다. 차가운 눈으로 현실을 보고, 맑은 시각으로 이념이나 감정에 흐려지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여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과 같은 혼을 갖고 있다. 이만큼을 전제로, 나는 프로퍼갠더로서의 예술의 한계를 새삼 생각해 본다. 만일 ‘Bowling for Columbine’이 참으로 현실을 충실하게, 치우침 없이 파헤치고 그 의미를 전달한 작품이라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반미이든 친미이든 골고루 감동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바탕 웃고 즐기고 나서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 메시지의 거부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숙연케 하고, 고요한 성찰을 이끌어 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우익과 좌익간의 싸움을 야기하는 작품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Bowling for Columbine’은 엔터테인먼트로서는 분명 성공한 작품이나, 솔직히 다큐멘터리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성가대를 향해 하는 설교를 성가대원의 입장에서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진실을 전달한다고 하는 매개체들 속에는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것이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서 있는 요즘, 중립에 꿋꿋이 선 이들의 이념에 흐려지지 않은 차가운 시선이 아쉽다.

김명훈/재미 컨설턴트

예술 하고 계십니까?

어쩌다 들른 심스페이스란 곳의 발제문을 옮겼습니다.
대충 둘러보니 온라인 미술 커뮤니티인듯,,
썩 좋은 결과를 내고 있는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냥 ‘이런것도 있더라’라고 알려드리기 위해서.. ^^ 회원명단에는 많이 보던 이름들도 있습니다..

제가 임의로 굵은글자로 바꿨구요,
http://www.simspace.com 로부터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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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하고도 유일한 《심스페이스》의 비젼

오늘날 자의건 자의가 아니건 작가들은 사회로부터 적잖게 소외되어 있다. 점점 더 ‘예술’을덜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새로운 산업적 구조 속에서 작가들은 이전에 차지했던 권좌를 상실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산업화, 구조화되어 가고 있고, 그 흐름은 완전히 제도적으로 진행된다. ‘성공적인 예술’은 갈수록 더 설명이 난처한 개념이 되어가고 있고, 그럴수록 ‘성공한 예술가’의 개념이 그 자치를 차지해 가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기업의 기금들과 정부의 보조금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따라서 기회는 결탁한 전문가들, (좀 구식 표현을 쓰자면) 어용 작가들과 관료주의에 흥건히 젖은 이론가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흐름은 그 안에서 ‘예술’이란 것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안락한 물결 같은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이 거대하고도 도도한 흐름, 대학과 출판과 비엔날레 같은 체계 전반의 동원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조성되어지는 이 급류에 의해 점점 더 성형되어 질뿐인 하류의 돌맹이 같은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언젠가 곰브리치가 말했듯, 현대는 예술이란 식물을 키워내기에 적절한 토양이 아니다. 예술은 점점 더 그 의미를 왜곡시키려 다짐이라도 한 듯한 세계 안에서 위태로운 생존을 연명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를 빌자면 ‘예술 생산계’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현대로 올수록 예술생산이란 변별된 영역을 위한 최소한의 독립성조차 보장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소통의 황홀경’ 안에서 이끌기보다는 이끌려 가는 사람들의 부류로 재빠르게 밀려나고 있다. 그들은 영향을주기보다는 광고와 영화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부터 동일하게 영향받는다. 자신이 되려는 몰입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의지도 점점 더 이전처럼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지 못 한다.

역설적인 것은 이 희미해져가고 있는 가치들과는 상반되게 작품들은 점점 더 대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장기간과 더 많은 비용과 사람을 요구하는 것으로 되어가면서 점점 더 작가 혼자서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범주들을 넘어서고 있다. 작품생산이 점점 더 산업 생산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객들은 이전처럼 취향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취향을 대중매체에 위임하면서 인식의 파편화를 확인시켜 줄뿐이다. 그들은 그저 더 유명하고 알려진 것들을 품질로 간주하는 매체시대의 진실에 방치되면서 저널의 전략에 고스란히 넘어간다. 더구나 이젠 정보화의 시대다. 스스로를 네트웍에 노출시키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는 그런 시대. 소통은 더할 수 없이 활성화되었지만, 점점 더 한정된 네트웍에 가담해야만 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소통의 독점, 혹 독점적 소통이랄까, “어떻든 이제 쳐 박혀 있으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다!”

이같은 환경에선 스타급 작가, 거대한 상업갤러리, 그리고 유수한 미술관의 권위라는 색인표를 가진 식물들만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그리고 상황과 조건들은 이 몇몇 진정한 주체들에 의해 떡주무르듯 유연하게 조절될 수 있는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경매와 같은 미술시장 시스템은 이와 같은 질서들에 정당성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강화해 나가는데 최적의 조건들을 마련해 주고 있다.

21세기의 벽두인 이 시점은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 이전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세기초만 해도 신진 작가들은 그들을 모르는 척 하는 권력과 시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이곤 했다. 자신들과 자신들의 예술에 하등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카데미로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호흡을 같이 할 동료들, 화상과 이론가들을 찾았고, 왕래했으며 때론 밤을 세워가며 토론했다. 그렇게 피사로나 모네 인상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얼마 후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와 그룹이 출범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이었다. 젊은 작가들은 전쟁 중에도 취리히의 한 카바레에서 다다를 시작함으로써 이전엔 일면식도 없었던 프랑스의 화가와 아일랜드의 시인이 만날 수 있는 장을 스스로 마련했다. 그런가하면 에른스트나 달리 같은 화가들은 그들에게 이론과 문장을 제공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앙드레 부르통과 만났다. 이들 초현실주의자 동료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선술집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연애를 실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을 만인 앞에 알리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 작가들은 더 이상 모이기를 즐기지 않는다. 때론 의미부여조차 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점점 더 모임을 즐기지 않도록-혹 못하도록- 사회적으로 학습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동료들과 자리를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각자 철저하게 단절되는 것을 (이전과는 다르게) 창작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작가들과 이론가들, 이론가들과 화상들이 하나의 예술을 위해 모이는 일은 오늘날 지극히 드문 현상이다.

그들은 이제 다른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기다린다. 그렇다고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수록 그들 모두는 자신들에게 덜 관대해져 가는 변화된 환경에 더 절망적으로 포위되어 갈 뿐이다. 예컨대 작가들은 점점 더 눈치를 살피다가 운 좋게 캐스팅되는 배우들을 닮아가고 있다. 물론 작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사 같은 이론의 영역은 자진해서 대학 안으로 움츠려들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술사가건 기획자건 이제 어떤 호출을 기다리는 일들이 부쩍 늘었다. (이들 중 소수는 기다리는 대신 먼저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앞서 활용한다) 이 모두가 이전엔 분명 그들 손에 있었던 뭔가가 빠르게 보다 상위의 권위로 이양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대략 되어 가는 현상은 이렇다. 어떤 거대하고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있고, 작가와 같은 개인적인 전문가들은 너무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면의 진실을 목격하거나 그것과 대립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 흐름을 개인적으로 수용해 적절하게 내면화하거나 그러지 않거나(그럴 수 없거나)를 그나마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대다수는 자의건 아니건 전자를 선택한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들은 점점 더 개인화, 파편화됨으로써 불리해져 가는 계약에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노동자들을 닮아가고 있다. 이렇게 예술은 그 안에서 그 다양한 양상들이 벌어질 뿐인 생존의 영역으로 유입되고 있다.

반면, 그 흐름은 훨씬 더 우월한 박수갈채와 지원 안에서 스스로를 더 생생한 것으로 만들고, 개인적인 전문가들을 압박한다. 따라서 생각이 있는 작가와 이론가, 미술사가들이 이같은 환경에 대응하는 적절한 방식들을 찾아낼 확률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포기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와 명분을 더욱 쇠약하게 하는 쪽으로 기여함으로써, 작가와 이론가들의 개인화(파편화)를 더 부추길 수 있다.

그럼에도 작가와 미술사가와 평론가들과 미술 행정가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있다. 적어도 개인의 꿈과 그 양식화들이 이미 사회화된 그것들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표현이 지니는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겐 서로 자리를 함께 하고 나누는 것이 여전히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거나 드러낼 난처한 도전들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한 응전을 논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의 의미 같은 것….

그리고 원한다면 현시대 미술흐름의 난폭성과 조악성에 관해, 그리고 거의 노골적으로 표류하는 한국미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만나 각자의 두터운 생각들을 교환하고 내면화된 것들을 교류하며,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너나할 것 없이 서로 동료를 공감해야 할 동일하고 절박한 조건들에 맞서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실험들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몸에 벤 ‘예술의 전통’이 지시하는 것들, 즉 그 주체, 범주, 기능에 대해 재삼 헤아려 보는 자각으로부터 자신과 만나고 그것을 현재의 시간들과 교차시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진정으로’ 타자를 향하고 단절을 넘어서는 실험들에 이르기까지.

《심스페이스》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온라인 상의 한 가능성이다. 작가들과 이론가들과 감상자들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장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만남과 소통을 실현할 적절한 도구들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심스페이스》가 스스로를 출발시켰고, 또 유지해야 할 유일한 비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유의미한 출발을 앞서 포장할 필요는 없다. 《심스페이스》의 비젼은 너무나 필요한 것이지만, 이와 상반되는 상황과 조건, 심리들의 장벽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즉 장애들 속에서 소통과 만남을 꾀한다는 점에서 《심스페이스》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의 수단이며 방법론이다. 더 많은 작가들이 그 필요성에 공감하고 동참할 때, 비로소 그 유익함이 입증될 수 있을 하나의 방법론!
그러므로 현재로선 《심스페이스》와 같은 시도들이 조금씩이나마 성공을 거둠으로써, 예술에 대한 우리의 숙의들이 지속되고, 그것이 더 확대될 순 없을지라도 더 깊어질 순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볼 뿐이다.

심상용(미술평론)

이집트, 영화 매트릭스2 상영 금지

(카이로=연합뉴스) 이집트 검열당국은 최근 전세계적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 `매트릭스2-리로디드’에 대해 종교적 논란과 과도한 폭력을 이유로 상영 금지령을 내렸다. 이집트, 영화 매트릭스2 상영 금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