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일기 1

제주살이에서 시원한 풍경을 빼놓을 수는 없을 거다. 그런데, 날마다 풍경을 보며 취해 살 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서 이곳으로 힘들게 들어온 것 같지도 않다. 살아온 서울에서 꽤 먼 거리인 이곳으로 이주를 하게 되다니 …… 큰 탈 없이 마무리가 되어가는 걸 보면 운이 꽤 좋은 셈인 건 맞겠다.

낯선 곳에 왔으니 배워야 살 수 있다. 우선 쓰레기를 먼 곳에 버려야 한다.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지만 집 안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덜 버리게 되고 버릴 때 좀 더 긴장한다. 한 눈금에 2,400원 정도 한다는 LPG 가스는 샤워를 할 때에도 영향을 미친다. 머리를 적시면서 온수를 틀면 샴푸를 바른 후엔 잠시라도 끄는 습관이 생겼다. 함덕 해변까지 가야 10리터 짜리 쓰레기 봉투를 살 수 있는데 그러려면 7킬로미터를 운전해야 한다. 연비는 14킬로미터/리터 정도이니 대략 1000원은 써야 하고, 운전은 아직 나만 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달라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운다.

오늘 아침엔 8킬로미터 거리 어린이집에 큰 아이를, 거기서 7킬로미터 떨어진 어린이집에 작은 아이를 등원시킨 후 하나로마트에 가서 우유를, 그 옆 약국에서 살충제를 샀고,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몇일 전 집 둘레에 가루형 지네 퇴치약을 뿌렸는데 이번엔 창문마다 곤충을 막는 액체약을 뿌렸다. 마을 옆엔 곶자왈과 너른 밭이 있어 눈은 시원하고 푸르른 모습이지만 그만큼 온갖 종류의 곤충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익충은 그냥 둬야 하고 해충은 죽여야 한다지만 글쎄다. 그냥 사람들은 벌레를 다 싫어하는 거 아닐까.

아이들은 아직 마을 – 정확히는 마을 내부로 만든 콘크리트 길바닥 – 안에서 노닌다. 길 밖이 그들에겐 거칠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너무 연약한 것인지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판교 현대, 오늘 만진 것, 구마 겐고 당선, 416TV

영국 JHP가 디자인을 총괄한 판교 현대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백화점은 도시 생활의 꽃이자 낙엽같은 존재.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 바로 쇼핑이란 ‘경험’이다. 그 특별하다는 설명과는 달리, 무엇이 특별한지 사진만으로는 분간하기가 좀 어렵다. 지갑을 챙기고 국내 최대의 백화점을 구경해볼까?

하루동안 만지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나? 이 펭귄의 신간(Every Thing We Touch: A 24-Hour Inventory of Our Lives)은 투싼의 카우보이부터 일본의 갓난아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루동안 뭘 만졌는지?” 묻고 사진 평면으로 기록한 것. 이런 종류의 책을 보면 고생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본 올림픽 위원회가 이미 취소시킨 바 있는 자하 하디드의 설계안 대신 구마 겐코의 디자인안을 최종 설계안으로 결정했다. 구마 겐코는 <삼저주의>와 같은 저서를 통해 ‘작고’, ‘낮고’, ‘느린’ 건축을 주장해온 건축가다.

종이든 디지털 언론이든 다들 입다물어버린 상황이 되자 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이름하여 416TV. 아버지는 촬영하고 어머니는 편집을 한다고. 뉴스타파에서 촬영한 이 영상이 그나마 ‘바이럴’ 전파에 성공했다. 다들 잊지 말자. 기억은 영원하고 그 아픔의 치유는 어차피 우리 몫이다.

 

지구 온난화와 녹색 도시

* 타 프로젝트에 사용된 자료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산업혁명 이래로 지속된 세계의 산업화는 거의 대부분 석탄과 석유 등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들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화석연료 기반의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다량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켜 지구 온난화를 불러온다. 실제로 아열대성 기후로 변화한 한반도뿐만 아니라, 남태평양의 소국 투발루제도가 물에 잠겨 없어지는 등, 전 세계의 각 지역마다 급속한 기후변화를 겪고 있는 이유도 바로 화석연료의 과다한 이용 때문이다. 이렇듯 급변하고 있는 지구환경 속에서 환경친화적 도시디자인 개념은 호불호를 떠나 지역의 발전을 지속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으로 대두되고 있다.

Annual and five-year running mean temperature changes for the land (green) and ocean (purple). Credit: NASA/GISS.
Annual and five-year running mean temperature changes for the land (green) and ocean (purple). Credit: NASA/GISS.

최근에 집계된 각종 통계치들은 전지구적 환경위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인위적으로 배출된 온실가스의 양은 1970년부터 2004년까지 약70%가 증가했고, 이산화탄소 하나를 놓고 보아도 약80%나 증가했다. 그 결과 지구의 평균기온은 지난 100년간 0.74°C나 높아졌는데, 그래프에서 나타나듯 최근의 증가추세는 1900년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상승한 온도만큼 지구상에 존재하는 얼음의 양도 늘어나, 북극의 빙하 면적은 1978년 이후 매 10년마다2.7%씩 감소하였고, 해수면의 높이 또한 지난 40여 년간 매년1.8m상승하였다.

심각한 문제는, 현재와 같은 추세로 화석연료를 사용할 경우, 세기말까지 지구의 평균기온은 약6.4°C, 해수면은 59cm나 상승할 것으로 예측되는 등 현재의 개발방식으로는 지구의 지속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에 세계 각국은 리우 기후변화협약(92), 교토의정서(97) 등의 다자간 협의를 통해 선진국, 개발도상국 등에서 온실가스를 감축할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2005년 2월에 공식 발효된 교토의정서(지구온난화 규제와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는 조약에 서명한 선진 38개국이 2012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에 견줘 평균 5.2% 감축하도록 규정했다.

온실 가스를 배출하는 요인들 - Courtesy of World Resources Institute.
온실 가스를 배출하는 요인들 – Courtesy of World Resources Institute.

이렇듯 위기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 준비되고 있는 대응책은 당연히 온실가스 감축이다. 현대의 국가체제가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간사의 모든 분야는 영향을 받게 된다. 산업, 경제 분야에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구조로 국가의 산업구조를 재편하고 제품의 디자인, 생산, 개발에 있어서도 친환경적 기술과 방법론을 적용하는 동시에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제품의 수입과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또한 시민의 일상 생활 전반에 걸쳐 탄소배출을 억제하기 위해 차량보다 자전거 이용을 장려하고 행정관서의 탄소배출량을 규제하는 등, 환경친화적 삶의 분위기 조성과 기반 인프라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계 주요국의 기후변화방지 대책

  • 영국 : ‘50년까지 ‘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 80% 감축(’07.11) / ※ UK Climate Change Bill 상정(’07.6)
  • 미국 : ´25년경 온실가스 배출량 정점 후 감소 추진(´08.4.17. Bush). 2017년까지 휘발유 소비량 20% 감축을 위한 대체에너지 비중 확대(3%→15%) 등 대책 발표(‘07.1) / ※ 캘리포니아주는 온실가스 배출을 ’20년까지 25% 감축하는 법안 제정(’06), 그밖에 버몬트, 뉴욕 등 29개 주에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
  • 일본 : 지구 온난화 대책의 추진에 관한 법률 제정(’98) 및 개정(‘06) ‐ 내각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지구온난화대책 추진본부」설치. 2050년까지 현재수준 대비 60~80% 감축계획 발표(‘08.6), ’20년까지 ‘05년 대비 14% 감축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
  • 중국 : 『National Climate Change Programme』발표(‘07.6) ‐ ‘10년까지 ’05년 대비 GDP당 에너지 소비량 20% 감축, 신재생 에너지 10% 확대 목표 설정
  • 멕시코 : 『National Climate Change Strategy』발표(‘07.5) ‐ 주요 산업별로 ’07년~’14년까지 약 1억CO2톤 감축잠재량 제시

*출처: “기후변화대응 종합기본계획.” 대한민국 정부 국무총리실, 2008.

사실 온실가스 감소를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더 필요한 부분은 공공서비스나 일상생활과 관련된 분야다. <그림: 온실가스 배출요인>에서 자세히 구분하고 있듯이 전체 온실가스 배출 총량에서 운송(13.5), 전기/전열(24.6), 기타 연료의 연소(9) 등 공공, 일상 영역에서의 에너지사용이 40%가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들이 얼마나 환경친화적으로 개발되었는지가 한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 증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 최초 에너지 자급자족 주택, 솔라하우스, 프라이부르크
독일 최초 에너지 자급자족 주택, 솔라하우스, 프라이부르크
태양을 따라 회전하며 에너지를 만드는 건물, 헬리오트롭, 프라이부르크
태양을 따라 회전하며 에너지를 만드는 건물, 헬리오트롭, 프라이부르크

이제 독일의 녹색수도 프라이부르크Freiburg시의 도시디자인 정책을 예로 들어 어떤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형태의 도시가 만들어지는가를 점검해보자.

프라이부르크시는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부임과 동시에 독일의 남서부에 위치해있는 도시다. 1986년 독일에서 가장 먼저 ‘환경국’을 만든 이래로, 1992년에는 독일의 환경수도로 선정되었고, 그 이후에도 환경친화적 도시개발, 솔라‐에너지solar‐energy 관련 산업과 지식의 연구 개발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그 결과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그린시티가 되었다. 이 도시가 내세우는 지속 가능한 도시발전모델(FNP2020)은 아래의 여섯 분야로 나뉘어 추진 중이다.

  1. 토지의 절약: 한정된 토지를 보다 환경친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지이용계획(FNP2020)을 수립하고 지속적으로 대지의 사용을 줄여나간다.
  2. 생태적 도시환경: 도시의 자연, 경관, 환경, 휴양과 관련한 개발이 천연적인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도록 유도하고, 이를 통해 시 전체가 하나의 생태적 공간이 되도록 관리한다.
  3. 균형 잡힌 도시조경: 과거 호수공원이나 소공원과 같은 구역별 도시조경 개념에 주력하던 것에서 벗어나 종합적인 미래도시경관계획을 수립해서 공공성, 문화, 역사, 미학적 요소가 조화를 이루도록 전체를 통합적으로 관리한다.
  4. 국지기후 조절: 시 전역의 기후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건축물에 적용하여 도심과 시 외곽의 공기 유입과 순환이 시민의 건강에 유익하도록 만든다.
  5. 저에너지 건축: 친환경 건축 지침, 의무규정 등을 통해 위해 건축물의 저에너지화를 지향한다.
  6. 시민 참여: 크게 친환경성, 사회적 공정성, 산업성이라는 도시개발의 선도목표는 시민에 의해 만들어져 FNP2020의 기틀이 되었으며 모든 주요 규정들은 19개의 시민그룹이 참여한 토론을 통해 도출되었다.
지붕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솔라 팩토리, 프라이부르크
지붕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솔라 팩토리, 프라이부르크
태양광 발전시설이 적용된 축구경기장, 프라이부르크
태양광 발전시설이 적용된 축구경기장, 프라이부르크

이러한 프라이부르크의 환경 친화적 개발은 지역의 경제, 산업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누구보다도 앞서 진행된 환경도시의 구축은 최근 들어 새로운 시장으로 대두된 환경에너지산업 분야에서 도시가 선도적인 위치에 서도록 이끈 원동력이 된 것이다.

프라이부르크는 유럽에서 가장 큰 프라우언호프 태양에너지시스템 연구소(ISE), 국제 태양에너지 학회 (ISES) 등의 연구기관들을 비롯해, Solar‐factory, Concentrix Solar GmbH, SolarMarkt AG 등의 관련 기업들을 유치했고, 연계된 대학 교육에도 힘쓴 결과 시의 전체 고용인력에서 3%에 가까운 만 여명이 1500여 개의 환경 관련 산업체에서 근무하고 이를 통해 5백만유로의 수익을 창출해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프라이부르크는 도시디자인/개발 정책 전반에 걸쳐 에너지 사용을 억제하고 기존의 환경자원을 보전하며, 화석에너지를 대체할 친환경에너지의 개발, 이용에 앞장섬으로써 결과적으로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지표화된 삶의 질과 도시디자인

* 타 프로젝트에 활용한 자료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삶의 질’이 의미하는 바가 다양함에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어떤 도시가 우수한가를 가늠하는 지표들이 매년 발표된다. 각각의 지표들은 통상 지역 내의 경제, 사회, 문화적 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반 환경을 분석하여 거주민의 이해에 부합하도록 조성되어 있는지를 검토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거주민의 복리를 향상시키고 있는가를 평가한다. 지표화된 삶의 질과 도시디자인 더보기

한나라당원인 엄마는 러스킨을 좋아해

안녕하세요, 댓글따라서 들어왔다가 “맑스가 옳은 것도 있다고 외치는 정신못차린 공산당 잔당들이 있다”는 당황스런 문구를 보고 좀 ‘멍멍’해서 낙서질 좀 하고 가려고 해요. ^^

전 똑똑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든 고딩이든 옆집 아저씨이든 상관없이 서슴없이 ‘맑’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나 빨간색의 옛날 얘기들을 해대는 걸 보고 싶거든요. 언젠가 새로 입주한 아파트 상가에 편의점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얘야, 저런데나 마트 가는거 보다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야 그사람들도 먹고 살지.. 싸고 편하다고 그리로 몰려가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냐…

그래서 제가 그랬죠.

엄마, 엄마는 골수 민정당 한나라당원인데도 그런 생각은 완전 ‘빨갱이’같아요.

요새 난생 처음으로 책 번역을 해보는 중인데 어느 디자인사 책에 러스킨의 말이 나와요. Lawful Prey…관련된 것인데, 내용이 어머님의 말씀과 100% 똑같다고 느꼈습니다. 싼것만 찾다보면 착취당한다…는 말이죠.

어머님(1939년에 출생하셨어요)께서는 그러십니다. 사실 탈 없이 살게만 해준다면, 공산당도 상관없고, 빨갱이도 상관없지만, 당신께서 ‘무지랭이’로 살아오면서 동물적으로 느낀 ‘공감각’적 본능이 그런 ‘빨갱이’를 경멸하게 만든다고 말이죠. 물론 어머님의 말씀은, 제가 언젠가 두어시간 동안 밤새우면서 핏대올려가며 쓸데없이 신경질도 부리다가, 작전을 바꿔서 차분하게 생각을 말씀드린 후 되돌아온 진심어린 말씀이었습니다.

빨갱이도 공산당도, 어른들이 겪었을 공포스런 현실로부터 얻은 이미지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선 어설프게나마 알고있는 맑스나 사회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기타 등등도 현실로 존재하는 어느 국가의 이미지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그런건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걸까?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소소한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잡다한 단편들, 그 속에서 그런 이론들을 직접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선봉과 같은 디자인에서도 그래서 맑스는 쓸모 있는 이론이고 사회주의는 알아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현실을 좀 더 좋게 만들어볼 맛난 쏘쓰. 뭐 그런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니.. 수준 급강하는 자제해주세요.. ^^ 종종 들르겠습니다.

(이 게시물은 foog.com의 정말 맑스는 옳은 게 하나도 없을까?에 댓글을 달다가… 길어져서 엮인글trackback로 전환한 낙서입니다.)

미와 실용성 : (청주 공예비엔날레)

미와 실용성: 근대 조형예술에서의 문제

최 범

근대미학의 구조: 미와 실용성의 분리

근대미학에서 미美의 반대는 추醜가 아니라 용用이었다. 전통적으로 미의 대립물로 간주되었던 추가 미적 범주로 포섭되는 대신에, 고대로부터 자주 미와 결합되어온 실용성이 미와 분리되었다. 역사상 가장 높은 생산력을 과시하고 실용주의적 가치가 고취되었던 시기에, 이처럼 실용성이 미적인 것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사회는 미와 실용성을 분리함으로써 오히려 실용성을 전적으로 현실의 지배 속에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근대의 구조 내에서 미적 실천, 즉 예술이란 실용성의 장소인 일상과 대척점에 놓인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미와 실용성의 분리, 즉 과거의 모든 문화에서 언제나 일정 정도 뒤섞여 있었던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을 엄격하게 분리함으로써, 근대사회는 여기에서도 예의 근대적 합리성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적인 것은 언제나 예술과만 관계를 맺는 대신에 실용적인 것은 현실과만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근대적 인식과 실천의 내부에서 작동한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근대에서 미적인 것의 궤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즉 근대에서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이 언제나 대립적이거나 분리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 경계는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실용성을 배제한 순수한 미적 담지자로서의 예술과 미적 가치를 전혀 갖지 않고 오로지 실용성으로만 가득 찬 현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념적인 것이지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미학과 조형예술의 궤적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처럼 개념적으로 분리된 미와 실용성, 즉 예술과 현실이 뒤섞이고 역행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의 조형예술은 바로 그러한 진동을 보여준다. 근대 조형예술의 궤적에서 미적인 것과 분리된 실용적인 것이 다시 예술로 복귀하고 예술과 실용성이 결합하는 과정이야말로 모순적이면서도 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미와 실용성의 결합을 원했던 것은 예술보다는 오히려 현실이었다. 근대 시민사회의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은 현실적인 실용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현실은 오히려 미적인 것을 풍부하게 요구하였다. 미가 초월적인 영역보다는 현실과 더 많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인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는 서구 근대사회도 다른 모든 사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서구 근대사회는 시민 계급의 지배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미적인 것들을 생산해내었다. 오히려 순수한 미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은 그러한 미적인 상황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서구 근대에서 예술에 부여된 역할, 즉 합리적으로 조직된 일상 생활에서 결여된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보충물이자, 현실 세계가 실현시켜줄 수 없는 소망을 간직한 초월적인 진실의 세계로서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현실의 미화는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배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류 문화의 보편적 양상에 훨씬 더 가까운 현상이었다. 근대의 미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예술만을 주목한다면 그것은 미시적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대신에 예술은 물론이고, 예술을 벗어난 일상적 영역에서의 광범위한 미적 실천들까지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근대의 미적 구조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면 미와 실용성을 대립시킨 근대미학은 단지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일 뿐인가. 미를 순수한 것이며 현실적 필요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시대의 미적 태도들과 구분되는 근대미학의 독특한 관점이지만, 그것은 물론 나름대로의 인식론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현실에서 미와 실용성의 분리와 대립은 일종의 오류 또는 허구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자면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잘못 설정된 문제란 없다. 특정한 역사적인 문제 설정은 비록 그것이 다른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오류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동시대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서술적 진실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미학의 구조는 근대적인 에피스테메(인식 구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속에 자기 모순을 내장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미술과 공예: 주체와 타자화의 논리

미술이 발생하는 과정은 곧 공예가 타자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근대미학에서 미와 실용성의 분리는 각기 미술과 공예의 분리, 발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근대 조형예술의 독특한 위계적 구조가 생겨나게 된다. 요컨대 미술과 공예의 분리는 단순한 세포 분열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미술이 자신을 미적 주체로 정립하는 대신에 공예를 미적인 것을 벗어난 일상적인 기술과 노동의 영역으로 내몰아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미술은 ‘미적인 것’을, 공예는 ‘실용적인 것’을 담당하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자 문화적 의식이 되는 것은 근대미학의 정해진 행로인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과 공예의 조형적 차이가 아니라, 미적인 것을 기준으로 한 주체와 타자화의 논리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존의 미술사와 공예사, 아니 문화사의 전제를 다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공예와 미술의 발생과 분화, 그리고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이를테면 미술은 공예로부터 파생된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어떤 것인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공예가 미술에 선행先行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근대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공예는 오히려 미술에 후행後行하거나 아니면 동시 발생한 것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술이라는 대립물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공예는 차별화된 영역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미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공예는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 전체를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의 공예 개념은 상대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차라리 무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미술은 어떻게 (공예와 달리)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게 되었을까.

물론 근대 이전에도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 그 자체로서의 공예와 구분된 활동과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의 경우,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이어져온 고급한 학예, 즉 인문학liberal arts의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학문(과학)과 예술이 혼합된 영역이었다. 그리고 공예를 타자화시킨 서구 최초의 미술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미와 실용성의 분리, 즉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태로서의 미술과 공예가 처음으로 분리되는 것은 18-19세기의 가까운 근대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대략 15-16세기에 전통적인 기술(공예)로부터 벗어난 몇몇 분야-건축, 조각, 회화-가 인문학의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서구 최초의 미술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디세뇨의 기술arti del disegno’이라고 불린 미술은 ‘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인 것’으로서 오늘날의 미술보다는 과학이나 학문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도 미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이었다. 당시의 미술은 기술도 아니고, 오늘날과 같은 예술도 아닌, 인문학이었다. 아무튼 ‘미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공통점은 그것이 ‘고급한 학예liberal arts’라는 점이며, 따라서 ‘비천한 기술vulgar arts’인 공예와 구분되었던 것이다. 이제 목공이나 석공과 주물 기술 과 같은 직인의 기술이 아닌 고급한 학예로서의 미술은 기술이나 재료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떤 능력에 따라 구분되고 인식되었으며, 그리하여 요구된 것이 통합된 미술 개념이었다.

이제까지의 서구 문화사는 두 개의 통합된 미술 개념을 보여준다. 하나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의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18-19세기에 정립된 ‘파인 아트fine arts’이다. 르네상스의 ‘디세뇨’는 오늘날 디자인의 형태적 어원이 되는데, 여기에는 서구 조형예술사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디세뇨로부터 파인 아트로의 이행 과정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미술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것이 저 먼 르네상스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파인 아트임은 당연하다.

미술의 이중구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18-19세기경 서구의 조형예술은 새로운 구조를 형성한다. 이른바 ‘순수미술fine arts’과 ‘응용미술applied arts’이라는 이원적인 구조가 그것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과 저급 기술(공예)이라는 이분법의 근대적 버전이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먼저 순수미술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의 기술’과는 달리 순수한 미적 실천이라는 근대미학의 교의에 직결된 것이었고, 지식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근대는 예술과 기술만이 아니라 예술과 과학도 대립시켰기 때문이다. 근대의 예술-순수미술을 포함하여-은 18세기 칸트의 미학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다. 칸트는 미를 ‘무관심적 관심’이라고 정의하였고 예술로부터 모두 현실적 효용성을 배제하였다. 이와는 달리 현실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것을 ‘부용미附庸美’라고 불렀는데, 이른바 응용미술은 이와 관련되었다.

사실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에서 응용미술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르네상스적인 고급과 저급의 분리가 근본적으로 변화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응용미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조형예술의 한 부분을 이루는 미술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응용미술은 단순한 기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본격적인 순수미술도 아닌, 미술과 기술의 중간 영역 정도 되는 것이었다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 ‘순수미술의 조형적 원리를 실용적인 영역에 응용하는 것’이라는 응용미술의 정의가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응용미술은 완전한 미술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술이 ‘응용된applied’ 어떤 것, 즉 불완전한 미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응용미술이 조형적 성격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시대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응용미술을 르네상스의 저급 기술과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디자인의 과도기적인 중간 단계로 보는 것은 18-19세기의 응용미술의 독자성을 주목하지 않고 역사를 지나치게 발전사적으로 보는 태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미술과 기술의 중간 영역으로서의 응용미술의 위상을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저 근대의 이분법은 생각보다 악명(?) 높은 것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과 저급 기술의 대립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문화적 부작용을 낳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에 속한 분야는 사실상 몇 가지의 제한 목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근대적인 이분법은 이 세계의 훨씬 더 커다란 부분을 분할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한 것임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차별 구조를 모순이라고 여기고 변혁시키고자 한 사람은 바로 윌리엄 모리스였다. 모리스는 예술의 ‘민주화’와 ‘생활화’를 주장하였는데, 여기에는 바로 살롱예술로 전락하여버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합일시키려는 의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모리스는 ‘장인으로서의 예술가artisan artiste’와 ‘예술가로서의 장인artiste artisan’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의 진정한 의미는 미술과 공예의 동일성 주장에 다름아닌 것이다.(Arts와 Crafts 사이에 있는 ‘and’는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후에도 오랫동안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위계적인 차별은 계속되지만 적어도 이념적 차원에서 그것은 윌리엄 모리스에게서 극복된다.

물론 18-19세기에 응용미술은 비록 미학적으로는 낮게 평가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응용미술은 더욱 각광을 받았다.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계급적 지배를 확인해줄 문화적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과 일상용품에서의 장식미술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고, 날로 발전해가는 산업은 매우 현실적인 목적에 따라서 미술을 필요로 했다. 19세기에 응용미술은 미술 제조art manufacturing라고 불리면서 점차 현실적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근대 디자인과 새로운 통합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디자인은 근대 조형예술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구조 변동을 가져왔다. 그것은 디자인이, 르네상스 또는 18-19세기 이후 분리되어온 미와 실용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하면서 조형예술의 질서를 재편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디세뇨’가 서구 최초의 통합적인 미술 개념이었다면, 디자인은 20세기의 새로운 통합 조형 개념이었다. 디자인은 미와 실용성을 적극적으로 통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명 공예의 역사적 계승자이며 낡은 의미의 순수미술과는 대립적이었지만, 그러나 디자인과 공예, 미술의 관계들이 결코 일면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디자인은 분명 전통적인 조형예술들과의 인식론적, 실천적 단절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또한 각 장르들과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며 선별적 친화성도 가진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먼저 디자인은 공예와 마찬가지로 실용 조형의 역사적인 한 형태이기 때문에, 공예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의 조형적 형식은 오히려 동시대의 미술과 동질성을 가지며 사회문화적 기능도 공예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물론 미와 실용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야 할 가치로 본다는 점에서 디자인은 전통적인 순수미술을 부정한다. 나아가 근대 디자인Modern Design의 경우에는 아예 미술과 디자인의 구분 자체를 부정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예술과 현실의 분리 자체를 극복하고자 했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근대 디자인은 조형예술 전체를 포괄하고자 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이후 디자인은 또 하나의 조형예술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공예를 대신하여 미술과 새로운 장르적 대립 구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미와 실용성의 구분이라는 저 근대적인 이분법은 20세기 동안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견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디자인, 특히 20세기 초 근대 디자인의 관점에서 본 미와 실용성은 어떤 것이었으며, 또 근대 디자인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합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물론 근대 디자인에서 말하는 미는 순수미술에서와 같은 초월적인 미가 아니며 실용성 역시도 전통적인 공예에서와 같이 토속적인vernacular 것이 아니었다. 근대 디자인은 건축이나 일상용품 같은 실제적인 오브제를 통해서 미와 실용성의 결합을 추구하였는데, 이때의 미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형식미이며 실용성이란 요소화된 기능의 복합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고 조작 가능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근대 디자인이 추구하는 미와 실용성은 일단 전통적인 미술과 공예의 그것과는 단절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근대 디자인에서 말하는 미와 실용성의 결합 역시 자연발생적인 것도, 19세기의 장식미술처럼 표피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철저히 선험적이고 원리적이며 구조적인 것이었다. 이는 근대 디자인의 미학적 이념이자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교의에서 잘 드러난다. 기능주의는 기본적으로 미(형태)와 기능이 일치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데, 이는 기능에 충실하면 할수록-어떤 선험적 원리에 의해(?)-형태도 아름다워진다는 믿음이다. 이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선미일치善美一致(Kalokagathia) 사상의 현대적인 판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기능주의의 모토는 그러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디자인은 이러한 기능주의의 교의에 따라 형태와 기능을 조작하여 완전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디자인은 일종의 사이버네틱스이자 기호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디자인이 추구한 것이 사물이 아니라 구성이며 실체가 아니라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은 장 보드리야르의 설명을 들으면 아주 분명해진다. 보드리야르는 바우하우스를 예로 들면서, 디자인은 단순히 생산물produit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기호화된 물건objet을 만드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산업사회에서 디자인된 물건은 단순한 효용성의 담지체가 아니라 기능적 기호로서 조작되고 사회화된 것이라는 얘기이다. 바로 이점이 실용 조형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통 공예와 근대 디자인을 구분해주는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공예에 대한 디자인의 단절은 조형성, 생산방식, 사회적 기능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지만, 초기 근대 디자인이 보여준 반反장식주의는 공예와 디자인의 차이, 그리고 근대 디자인이 공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징후로 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돌프 로스와 같은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은 전통적인 장식을 극렬히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는 장식이 미개한 문명 상태의 증거이며 과잉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근대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장식은 비합리적이며 비현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현대적인 생산방식과 기술, 그리고 미학의 구성물로서 디자인은 분명 비합리적인 장식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장식은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오히려 장식이야말로 전통 조형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공예의 본질에서 장식성을 부정하고 실용성만을 보려는 태도야말로 근대적인 인식틀의 전도된 투사가 아닐까. 아마도 전통사회에서 공예의 본질은 실용성 못지 않게 장식성에서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공예의 장식이란 바로 문화적 상징의 표현이자 그 자체로 조형적 문법이며, 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나 기능과 뗄 수 없는 심층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디자인이 장식을 부정한 것은 전통사회의 문화와 질서 자체를 부정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물론 근대 디자인이 전통 공예의 상징성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근대적 질서와 생산방식에 따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조형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문명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 디자인이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미와 분석적인 기능의 결합을 지향한 것도 결국은 의미의 제로 상태에서 일종의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이란 모더니스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며 그다지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근대 디자인이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20세기 디자인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현실을 더 결정적으로 지배한 것은 키치Kitsch와 같은 비합리적인 조형과 소비주의 디자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현대사회의 디자인 역시 비합리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전통 조형에서의 장식이나 현대 소비주의 디자인에서의 스타일링이나 모두 문화적 상징성에 기반하여 인간이 가진 비합리주의적인 욕망에 호소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앞서 말했다시피 20세기 초의 근대 디자인은 전통적인 공예보다는 동시대의 미술과 조형적으로 훨씬 더 동질적이었다. 디자인은 아방가르드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혁명의 일부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자인은 단순히 통합적인 조형이거나 새로운 장르의 하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이후의 순수미술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전복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바우하우스는 정확히 순수미술의 이념을 뒤집는다.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순수미술은 고급하고 완전한 것이기는커녕 오히려 디자인보다 저급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미와 기능을 함께 갖춘 실제적인 산물만이 완전한 조형이며, 순수미술과 같이 감상을 위한 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 차원이 결여된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바우하우스의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와 인식틀을 정반대로 뒤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우하우스에서도 소묘나 회화, 조각을 가르쳤지만, 그와 관련된 공방이나 학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소묘나 회화, 조각은 건축이나 디자인을 위한 조형적 기초이자 연습일 뿐이며 그 자체로 독립된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대 디자인 운동의 정점을 이루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러시아 구성주의에서 오히려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서구에서 전통적인 미술의 역할, 즉 외부 세계를 모방하는 것은 현대미술에 의해 부정되지만 러시아 구성주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의자를 그리지 않고 추상화를 그리는 것이 예술적이라면, 아예 실제 의자를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예술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에서는 예술과 기술, 창작과 생산의 구분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러시아 구성주의에 의해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혹시 미와 실용성의 거대한 분리가 존재하기 이전의 그리스적 유년기, 분화되지 않은 덩어리 그 자체로서의 카오스 또는 모든 일상적 노동과 기술적 세계가 그 자체로 예술이었던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바우하우스가 순수미술을 전도시키기 이전에, 이미 말레비치에 의해 회화는 논리적으로 최후를 맞았고 구성주의에 의해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은 지워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알다시피 러시아 구성주의가 결코 역사의 종점은 아니었다.

공예의 위기: 변용과 일탈

공예의 위기는 반복된다. 한번은 근대적인 생산방식과 산업사회의 대두로 인해, 그리고 또 한번 공예의 자기 부정에 의해.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면, 과연 공예의 경우에도 그런 것일까. 역사의 물질적인 전개 과정 그 자체는 차라리 냉정한 것일지언정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예의 자기 부정은 분명 희극이면서도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공예의 자기 부정과 일탈은 말 그대로 공예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더 이상 공예사에서 다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현상이 현대 공예사의 한 장면에서 ‘공예의 이름으로’ 빚어지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정작 서구보다도 비서구 제3세계 지역에서 매우 심각하게 나타남을 보게 되는데, 이는 서구의 미적 근대성이 비서구 사회에 남긴 식민의 흔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공예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산업화에 의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양상이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에서 산업화는 공예에 치명적이었지만 또 다른 사회에서는 공예가 산업화와 비교적 잘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산업화가 분명 공예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지도만큼이나 공예의 문화지리학도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일본, 스칸디나비아 등과 같이 산업화되었지만 오래된 공예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산업화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는 사회, 영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보수적인 전통으로 인해 생활 속에 공예가 살아 있는 사회, 그리고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여전히 공예가 생활의 주요 수단이 되어 있는 전前산업사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오래된 공예 전통이 없는 까닭에, 공예와 현대 미술의 구분이 불분명하여 공예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진, 그런 만큼 개념적 혼란의 원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과 같은 사회도 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공예의 성격과 위상이 주변적이고 중간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예도 물건으로서 엄연히 현대 사회의 물질적 체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그러나 현대의 지배적인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주변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주변적인 존재방식으로 인해 현재의 직접적인 물질적인 욕구와 관심성에서 비켜나 있는 만큼, 문화의 원초적 통합성을 보존하고 전산업사회의 역사적 기억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간 예술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예의 주변적이고 중간적인 성격은 일단 현대사회에서 공예의 약점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흥미로운 문화 전략적 가치를 가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전통 공예를 보존하고 지원하는 것은 집단의 문화적 기억을 유지함으로써 국민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정치적인 프로젝트의 일부라고 이해하더라도, 서구의 일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모더니즘 예술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비판 또는 여성성의 발견을 위한 수단으로서 공예적 요소들을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현대적 실천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공예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목도하게 되는 가장 심각한 현상은, 공예의 주변성과 중간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공예적 가치를 전략적으로 실천하는 대신에, 현대 문화의 중심성에 매몰되어 공예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예의 자기 부정 또는 일탈 현상이 가장 무책임하게 나타나는 곳은 한국과 같이 식민지 근대화를 경험한 사회가 아닌가 한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전산업사회의 단계에 있는 국가들이고 다른 하나는 뒤늦게 산업화가 이루어진 후발 산업국가들이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후발 산업국가들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문제는 산업화 자체가 지나치게 물신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에서는 식민지의 경험이 근대화에 대한 실패와 낙오의 산물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사회 구성원들에게 산업화는 서구보다 훨씬 더 절대적이며 강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근대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대량생산품이 전통적인 수공예품보다도 더 좋은 것이고 심지어 고급한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공예의 가치는 매우 폄하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공예의 위기는 단지 공예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착잡한 구조에 근거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공예 제도 자체가 공예의 부정에 기초해있다는 점인데, 이러한 구조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배태된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경우 전통 공예가 쇠락한 상태에서 식민지 문화 정책에 의해 자리잡은 의식과 제도가 공예 분야에도 지배적으로 작용하면서 공예의 본질을 크게 왜곡,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19세기 말 이후 전통 사회의 붕괴에 따라 전통 공예가 산업적, 문화적 기반을 급격히 상실해간 반면, 일부 공예가 1930년대의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와 같은 식민지 미술 제도 속으로 흡수되면서 감상용의 살롱 미술로 변용되어갔던 것이다.(물론 예로부터 완상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귀족 공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술공예는 근대적인 전시회 제도의 틀 내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해방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0-90년대에 오면 미국 유학생들에 의해 유입된 이른바 ‘탈기능적’ 경향이 확산되면서 한국 공예계는 마침내 ‘공예의 이름으로’ 공예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미술공예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인 공예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반면, 이른바 ‘탈기능적’ 경향은 아예 공예의 기본적인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예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 자체의 오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근본적인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거의 미술공예 속에 이미 반反공예로서의 ‘탈기능적’ 경향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용성으로부터 감상용으로 중심 이동한 미술공예에서 이미 반공예적 경향은 첫발을 내디딘 것이며, 따라서 예의 ‘탈기능적’ 경향은 그 논리적 귀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공예를 실용적인 것과 감상용, 이른바 ‘미술공예’(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와는 다르다)로 구분한 것은 바로 비서구 지역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된 일본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미술과 서구 미술, 공예(산업)와 미술이 여러 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공예가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산업화된 공예와는 달리, 미술의 일부로서 감상용의 미술공예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미술공예는 공예의 주류도 아니었으며 전통 공예의 현대화와 산업화에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주체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 과정을 통해 이식된 미술공예가 뿌리를 내리면서 향후 지속적으로 공예 제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식민지 미술 제도를 통해서든 식민지 이후의 대학 교육을 통해서든,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상관없이 외삽된 제도로서의 현대 공예는 그저 식민지적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는 모더니즘 미학이 무분별하게 공예에까지 적용된 결과이고 한국의 현대 공예가들에게 공예 장르의 역사성과 현실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반공예를 공예라고 주장하면서 담론적 합리화를 시도하고 대학 공예 교육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서구의 미적 근대성이 제3세계의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모순적으로 증폭되어 나타나는가를 잘 보여주는 징후라 할 것이다. 디자인에서의 근대 프로젝트를 통해서 전통적인 공예와 산업, 그리고 미술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결해나간 서구와는 달리, 비서구 지역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공예와 디자인, 미술이 상호 충돌하면서 갈등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는 서구의 미적 근대성 자체를 넘어서는 탈근대적 전망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근대적 분리를 넘어서: 탈근대적 전망

이제까지 우리는 서구 근대미학과 조형예술이 어떻게 가치들의 분리와 위계에 기반하여 성립되었는지, 그러나 실제 그것의 내부적인 모순과 한계가 역사적 과정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사실 어떠한 시대, 어떠한 영역, 어떠한 규범도 일정한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의해 주조될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근대 역시 자신의 고유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 일정한 현실을 생산해왔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러한 근대의 미적 인식과 실천의 모순과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할 역사적 단계에 서있음도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서구의 근대예술이 근대사회의 특수한 구조적 산물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통합적인 세계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그 결과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가치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예술은 그러한 직접적인 현실 연관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으로써 비판적 기능을 행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서구 근대예술의 전제였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적극적으로 ‘쓸모 없음’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보다 넓은 현실의 맥락에서 볼 때 모순일 수밖에 없고 실제적으로도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위해 쓸모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근대의 강박관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류 문화의 보편성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근대의 복합적인 현실과도 일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근대적 강박관념은 이른바 공예의 ‘탈기능적’ 경향이라는 것에서 가장 극단적이고전도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탈기능적’이라는 것이야말로 (전통적인) 공예의 본질을 ‘기능’으로 본다는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근대미학이 보장해주는 예술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능을 추구하든 부정하든 간에, 결국 ‘기능’을 중심으로 공예를 사고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생각보다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 ‘기능’이야말로 지극히 근대적인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예의 ‘탈기능적’ 경향은 ‘탈근대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전도된 방식으로 ‘근대적’인 것이다.

문제는 기능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능을 강박관념으로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공예의 본질은 아마도 훨씬 더 복합적일 것이다. 공예는 제의와 상징성, 미와 질서 감각, 기술과 실용성 같은 다양한 가치들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예의 복합적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기능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적인 구도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탈근대적’인 것이며 매우 역사적인 것이기도할 것이다.

공예를 실용적인 기술로 보고 저급하다고 판단한 근대적 인식은 실은 스스로가 공리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일종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근대미학의 무의식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냐 실용성이냐, 순수냐 응용이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치들이 우리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이다. 때문에 우리는 서구 근대가 분리시킨 이러한 가치들을 다시 통합하여 새로운 관계로 재배치해야 할 과제를 간직하고 있다. 새로운 탈근대적 구도 내에서 그러한 가치들은 더 이상 미적인 위계 질서가 아니라 삶에 반영된 문화적인 가치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