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표화된 삶의 질과 도시디자인

* 타 프로젝트에 활용한 자료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삶의 질’이 의미하는 바가 다양함에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어떤 도시가 우수한가를 가늠하는 지표들이 매년 발표된다. 각각의 지표들은 통상 지역 내의 경제, 사회, 문화적 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반 환경을 분석하여 거주민의 이해에 부합하도록 조성되어 있는지를 검토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거주민의 복리를 향상시키고 있는가를 평가한다. 지표화된 삶의 질과 도시디자인 더보기

물의 브랜딩과 대안적 접근

이 글은 영국 <디자인 위크Design Week>지 7월 2일판 기사를 ‘급속번역’하고 국내 사정에 맞도록 고치고 덧붙인 글입니다. 정확한 내용을 위해서 원문이 필요하시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 쌀집아들 –

탭Tab 스티커, 이제 수도물 브랜딩의 시대로!

"생수는 쓰레기다" _ '탭' 레이블
"생수는 쓰레기다" _ '탭' 레이블

사실상 수많은 생수병들이 그저 수돗물로 채워져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수돗물로 돌려놓는 일은 아마도 매우 어려울 겁니다. 또한 수도물을 브랜딩한다는 건 당신에게는 쓸모없는 일로 들릴테지요. 하지만 당신이 환경에 대한 일말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이 소비자들의 생각을 생수병으로부터 수도물로 돌려놓는 뛰어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챌 겁니다.

윤리적 브랜드-디자인 컨설턴시인 프로보커추어Provokateur 디자인의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조슈어 블랙번Joshua Blackburn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의 브랜딩과 대안적 접근 더보기

시각과_현대성_발제문

시각과 현대성 _ 주은우 #
3장 원근법과 현대성의 사회적 조건 20040418 수유+너머 _ 시각성 세미나 _ ‘시각과 현대성’ | 최 윤 호

3. 원근법과 권력의 응시

원근법은 초월적인 시각적 주체를 포함하며 이것은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탈육화된 주체를 의미한다. 원근법적 시각양식에서의 주체는 개인의 주체성으로서의 측면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개인을 초월적인 주체에 종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p323) 이 ‘종속으로서의 주체화’를 바로 원근법이 시각의 장에서 수행하는 것인데, 개별주체는 큰 타자의 응시의 위치에서 그 큰 타자의 시각으로 관찰하게 된다. 현대성의 주체가 텅 빈 형식일 때, 사회적 담론들은 그것을 채우게 되며, 푸코는 그것을 권력이 작동하는 통로로 보았고 라캉은 에고 형성을 위한 이미지의 제공통로로 생각했다. 하여간 그 둘 모두의 경우에서, 현대성의 시각 체제는 권력 체제이며 개별 주체의 시각은 큰 타자의 응시를 통해 권력의 시각에 종속됨으로써 구성된다. 17세기 이후의 절대 군주제에서 우리는 이런 권력의 응시가 작동하는 모습, 즉 원근법과 권력의 관계를 그 시대의 시각양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 군주권력의 응시

(1) <시녀들 _ Las meninas (Diego Velázquez, 1656, Prado, Madrid)> : 재현과 응시

푸코는 17세기 고전주의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시녀들’은 ‘고전주의 재현에 대한 재현’인데 그것은 그림에서 나타나듯 재현 자체를 묘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재현의 과정들은 생략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녀들’은 고전주의적 재현의 틀 안에서는 재현행위의 재현이 불가능함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_-;;

http://15.165.94.34.xip.io/MT/archives/velazquez.meninas _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이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은 거울 속에 스펙터클로서 위치하는 왕과 왕비이다. 그림 속에서 왕과 왕비, 관람자인 나, 그리고 화가의 응시가 서로 수렴되는데, 실상 왕과 왕비는 그림 속에서 실체로서 등장하지 않으며, 그 숨겨진 거울 속의 응시는 관람자인 나의 응시와 같게 되는 것이고 ‘주권적인 중심’이다. 푸코는 이 중심이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라고 다루고 있다. 왕과 왕비가 관념적임과 동시에 실재하는 이 점에서 관람자는 재현과 연결되고, 연계성은 관람자 자신이 아닌 그림 내부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그림은 그림의 구성 자체에서 연역되며 구체적인 관람자 개인에게 준거하지 않는다는 원근법의 원리도 확인된다.

이 그림에서 주체는 생략되어있다. 시녀들의 작가로서의 주체, 관람자 자신의 주체, 돌아선 캔버스의 등장인물로서의 주체는 그림에서 드러나지 않는데, 이 생략을 푸코는 재현의 순수성과 투명성의 획득을 위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설은 화행이론의 관점에서 그의 입장을 비판했는데, 모든 회화적 명제가 가진 “나는 본다.”는 함축적 능동형이 그 비판이다. 즉 왕과 왕비가 이미 위치해버린 그곳에서 작가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인데, 벨라스케스가 군주의 시점에서 그림을 그리면서도 뒤돌아선 캔버스 뒤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실체로 드러나는 역설을 말한 것이다. 이후의 광학적 분석과 슈나이더와 코헨의 반박에서는 그 거울 속의 환영이 뒤돌아선 캔버스의 인물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나 그러한 논쟁은 ‘원근법의 구성이 그림 바깥의 실제적인 관람자의 시점에 준거한다.’는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벨라스케스는 이런 원근체계의 선입견을 역이용하고 있으며 그림에서 드러나는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이 그 함정?을 가려준다. 결론적으로 ‘시녀들’의 구도는 재현이 기하학적 조직화와 상상적 구조간의 계산된 불일치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푸코는 문과 거울의 경쟁을 지적하고 있으며 위에서 말한 불일치의 구성을 정확히 인식하고있다. 주체는 왕의 위치인 그림 외부의 중심점에서 등장하는데 그것은 권력의 시점이기도 하며 17세기의 현대성의 시각은 바로 이 권력의 시각이다.

벨라스케스는 사실보다 어둡게 그림 속에 자신을 등장시킴으로써 궁정사회의 위계와 조직화를 묘사했으며 왕이 원하는 왕 스스로의 모습을 표현했다. 왕은 드러나지 않은 채 응시를 유지하는데 이로써 권력의 응시는 더욱 강력해진다.

(2) 스펙터클과 감시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군주의 권력을 가시성의 권력으로 이해하였고, 군주의 권력이 현시되는 처형장이나 프랑스 혁명 후의 길로틴과 같은 스펙터클 속에 잔존하였다. 그러나 군주의 권력을 가시성 하나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앞의 그림에서도 드러나듯 권력의 응시는 근본적으로 비가시성의 영역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의 권력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결합, 즉 이미지 및 스펙터클의 동원과 응시 및 감시의 결합을 통해서 행사되는 것이다.

17세기 유럽의 군주제 국가들은 다양한 스펙터클들을 동원하는데, 프랑스의 궁정정원 _ 정형정원에서 드러나는 정치적인 예술형식의 이용이 대표적인 예이다. 극도로 정리된 방사형의 가로구조에서 우리는 군주의 시점과 통제를 확인한다. 가시성의 영역에 배치된 광기를 그 바깥에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고전주의 시대의 이성의 눈, 바로 이것이 현대성의 시각이며 ‘시녀들’에서의 권력의 응시와도 같다. 그러므로 스펙터클은 감시와 분리되지 않으며 가시영역의 스펙터클은 비가시적 영역의 권력의 응시에 의해 조직된다. 17세기부터는 거리에 공공적인 조명등이 설치되는데, 그 불빛은 가시성을 부과하고 감시를 행사하는 수단이었다. 대혁명을 비롯한 19세기까지의 혁명들에서 거리의 등이 1차적인 파괴의 대상이 된 것도 그런 이유이다.

2) 부르주아 감시권력의 응시

부르주아의 시대에서 감시의 권력은 그물망을 펼친 것과 같이 보편화된다. 예전의 스펙터클과 같은 것을 넘어서 개별적인 인간들의 신체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http://15.165.94.34.xip.io/MT/archives/panopticon.gif

1791년 제레미벤담이 제안한 판옵티콘은 구조적으로 원형의 개별적인 방과 그 중심의 감시자를 두고 있다. 완전한 개인화와 편리한 감시, 특별히 감시되는 수감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 감시되고 있음’을 느낄 때 그것은 상당히 경제적이다. 모든 다양한 기능들이 모두 이러한 감시를 위한 것이며 이곳에서도 역시나 관찰자인 간수는 중앙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벤담은 이러한 도식을 사회전체로 확산하려 몽상했는데 이것을 푸코는 훈육적 사회의 형성이라고 규정했다. 나중에 언급되지만, 심지어 벤담은 공중개방의 방법으로 이런 통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 판옵티콘에서의 권력의 응시는 원근법적인 기하구조에 기초하며, 계몽주의에 기초한다. 벤담은 루소의 꿈에서의 개개의 완벽한 소통을 통한 투명한 사회에 더해 지배적인 응시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상태를 조직했던 것이고 그것은 즉 권력의 행사라는 것이었다. 판옵티콘에서 체화된 권력의 시선은 원근법적인 시각공간에서 작동하며 그 가시성의 배치는 ‘시녀들’에서의 절대군주의 시선 및 가시성의 배치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그림에서 군주가 자신의 흔적을 거울에 남겼다면, 판옵티콘에서의 응시에서는 그것마저 사라지고 그 비인격성이 전면화되어있다.

판옵티콘에서 수감자는 중앙의 감시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자신을 봄으로써 훈육된 주체, 길들여진 신체, ‘정신예방적인 주체‘가 된다. 한편 주체는 자신의 에고 역시 필요한데 ’시녀들‘에서 거울에 반영된 군주의 이미지가 그것이며 19세기 이후에 부르주아 체제가 스펙터클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판옵티콘에서는 그런 대칭적인 응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판옵티콘은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설득하는 학교로서 고안되기도 했는데, 그런 점에서 ‘감시의 옆에서는 그것과 나란히 상징적인 의미의 스펙터클이 계몽의 이름으로 ….’라는 말도 설명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위의 논의를 통해 이성은 감시, 현대성의 시각은 곧 권력의 시각이었다고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그 권력의 응시는 원근법적인 기하공간의 구도 속에 자리를 잡고 가시성의 배치를 조직하는 중심축으로서 기능했으며, 그것은 시각의 문제를 사회 정치적인 문제와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시각적 권력은 교묘하다.

* Author / Gathered from : 최윤호

蓮葉(연엽)에게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고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가치마늘 같던 발아!
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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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처음으로 무학위 국립대 교수가 되었던 그가
아내의 병마를 두고 절필을 선언하다.

금속가구 디자이너 프로필

시대, 인물별로 요약된 디자이너 프로필
주로 금속가구 중심 금속가구 디자이너 프로필 더보기

이해 안되는 서울 건축상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타워팰리스’와 ‘시립미술관’이 선정된 것에 반대한다.

타워팰리스가 ‘우수한 건축물 장려’와 ‘도시 미관을 향상시키는 건축물’이라는 서울시 건축상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워팰리스는 도시 미관을 향상시킨다기 보다는 도시 전체에 위압감을 형성하는 초 고층의 거만한 형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건축 이후, 서울의 복합 주거물들이 경쟁적으로 ‘타워팰리스화’하게 되는 촉매제의 역할을 했다. 그 이름 자체가 서울 안에서의 또다른 서울을 뜻하는 위화감을 지니게 된 점은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해 안되는 서울 건축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