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가구 디자이너 프로필

시대, 인물별로 요약된 디자이너 프로필
주로 금속가구 중심

갈무리
http://www.oepa.or.kr/posco/

– 게리트 리트벨트 (Rietveid, Gerrit) 네덜란드 (1888-1964)

– 글랜 올리버 (Oliver, Glen) 독일 (1959- )

– 노먼 포스터 (Foster, Norman) 영국 (1935- )

– 디터 틸 (Thiel, Dieter) 독일 (1947- )

– 로버트 벤츄리 (Venturi, Robert) 미국 1925-

– 로빈 데이 (Day, Robin) 영국 1915-

– 론 어레이드 (Arad, Ron) 이스라엘 1951-

– 르 코르뷔제 (Le Corbusier) 스위스 1887-1965

– 리차드 마이어 (Meier, Richard) 미국 1934-

– 리챠드 사퍼 (Sapper, Richard) 독일 1932-

– 리하르트 리머슈미트 (Riemerschmid, Richard) 독일 1868-1957

– 마르셀 브로이어 (Breuer, Marcel) 헝가리 1902-

– 마르코 자니니 (Zanini, Marco) 이태리 1954-

– 마르트 슈탐 (Stam, Mart) 네덜란드 1899-

– 마이클 그레이브스 (Graves, Michael) 미국 1934-

–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 Ludwig) 독일 1886-1969

– 미켈레 데 루치 (De Lucchi, Michele) 이태리 1951-

– 베르너 판톤 (Panton, Verner) 덴마크 1926-1998

– 세바스찬 번 (Bergne, Sebastian) 영국 1966-

– 시로 구라마타 (Kuramata, Shiro) 일본 1934-1991

– 아르네 야곱슨 (Jacobsen, Arne) 덴마크 1902-1971

– 아일린 그레이 (Gray, Eilin) 아일랜드 1878-1976

– 안드레아 브란치 (Branzi, Andrea) 이태리 1938-

– 안토니오 가우디 코넷 (Gaudi Cornet, Antonio) 스페인 1852-1926

– 알렉산드로 멘디니 (Mendini, Alessandro) 이태리 1931-

– 알바르 아알토 (Aalto, Alvar) 핀란드 1898-1976

– 액토르 기마르 (Guimard, Hector) 프랑스 1867-1942

– 어니스트 레이스 (Race, Ernest) 영국 1913-1964

– 에로 사아리넨 (Saarinen, Eero) 미국 1910-1961

– 에토레 소트사스 (Sottsass, Ettore) 이태리 1917-

– 엘 리시츠키 (Lissitzky, EI) 러시아 1890-1941

– 요셉 호프만 (Hoffmann, Josef) 오스트리아 1870-1956

– 우베 휘셔 (Fischer, Uwe (ehem. Ginbande Design)) 독일 1958-

– 월터 그로피우스 (Gropius, Water) 독일 1883-1969

– 윌리엄 모리스 (Morris, William) 영국 1834-1896

– 윌리엄 버제스 (Burges, William) 영국 1827-1881

– 이사무 노구치 (Noguchi, Isamu) 미국 1904-

– 자크 에밀 룰만 (Ruhlmann, Jacques Emile) 프랑스 1879-1933

– 제스퍼 모리슨 (Morrison, Jasper) 영국 1959-

– 조나단 데 다스 (De Das, Jonathan) 이태리 1930-

– 지오 폰티 (Ponti, Gio) 이태리 1891-1979

– 찰스 레니 메킨토시 (Mackintosh, Charles Rennie) 영국 1868-1928

– 찰스 임스 (Eames, Charles) 미국 1907-1978

– 찰스 젠크스 (Jencks, Charles) 미국 1939-

– 칼 프리드디히 쉰켈 (Schinkel, Karl Friedrich) 러시아 1781-1841

– 크리스토퍼 드레서 (Dresser, Christoper) 영국 1834-1904

– 파올로 데가넬로 (Deganello, Paolo) 이태리 1940-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Wright, Frank Lloyed) 미국 1869-1959

– 필립 스탁 (Starck, Philippe) 프랑스 1949-

– 필립 존슨 (Johnson, Phillip) 미국 1906-

– 한스 홀라인 (Hollein, Hans) 오스트리아 1934-

– 헤리 베르토이아 (Bertoia, Herry) 미국 1915-1978
4.2 금속가구 디자이너 프로필

알바르 아알토(Aalto, Alvar) 핀란드(1898-1976)

핀란드의 건축가이며 디자이너, 1918-21년 헬싱키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였고, 1923년에 건축가 자격을 취득하였다. 파이미오 요양소(Sanatoruum at Paimio, 1929-33)는 근대건축의 고전적 표현이다. 같은 시기에 그는 합판 의자(Plywood chair)를 디자인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단순하면서 성공적인 가구를 보급하기 위하여 아르텍(Artek)을 1935년에 설립하였다. 그의 목재 의자는 바우하우스의 스틸 파이프처럼 켄틸레버성 방법을 지녔으며, 마감에 있어서 훨씬 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의 가구는 영국과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잭 프리처드(Jack Pritchard)에 의해 또 다른 시도로 발전되었다. 1937년부터는 비대칭적 형태와 미묘한 곡선을 사용한, 이탈라(Ittala)사를 위한 유리를 디자인하였다. 근대운동의 범주 속에 있었지만 항상 재료 가운데에서 벽돌에 민감하였으며, 근대적인 형태를 합성해 낸 거장의 한사람이다.

론 어레이드(Arad, Ron) 이스라엘 (1951- )

어레이드는 예루살렘에 있는 아트 아카데미에서 1971년부터 1973년까지 공부한 후, 그 이듬해 런던에 있는 AA(Architectural Association) 5년간 수학하였다. 그는 1981년 캐롤라인 토만(Caroline Thorman)과 함께 런던에 ‘One Off Ltd.’ 자회사를 설립하고, 1983년 런던에 ‘One Off’ 쇼룸을 열었다. 1년후 밀라노 겔러리 제우스(Zeus)에서 독자적인 전시회를 갖았으며, 1986년에는 비트라사에서 비트라 에디션을 위해 ‘웰 템펄드 의자(Well Tempered Chair)’와 ‘쉬쪼(Schizzo)’를 디자인하였다.

그는 알리슨 브룩스와 함께 1990년에 Tel Aviv 오페라 하우스의 실내를 설계하였으며, 같은 해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에서 ‘론에레이드 -스틱스와 스톤스(Sticks & Stones)’ 전시회를 열었다. 1993년에는 비엔나의 응용 예술대학에서 강의하였고, 다수의 가구회사들을 위해 디자인작업을 하였다. 또한 1995년에 헬싱키의 응용예술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갖았다.

세바스찬 번(Bergne, Sebastian) 영국(1966- )

1985년에서 1988년까지 센트럴 스쿨 오브 아트 엔 디자인(Central School of Art and Design)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고, 1990년에 왕립 미술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90년 ‘design for Manufacture’을 설립하였으며, 왕립 미술학교에 객원강사로 출강하였다.

아우테틱스(Authetics, 독일)사, 카씨나사, 드리아데(Driade)사, 오-루데(O-Lude,이태리)사와 함께 일한다. 그의 제작품은 가구 시리즈를 위한 디자인의 범주안에 있으며, 1998년에는 비트라사를 위해 유니버설(universal) 테이블인 ‘IXIX’를 디자인하였다.

헤리 베르토이아(Bertoia, Herry) 미국 (1915-1978)

이탈리아계 미국의 디자이너로서,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크랜브룩 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그곳에서 금속공예를 가르쳤다. 그는 여기에서 엘리엘과 에로 사아리넨 그리고 찰스 임스를 만났다. 그 후 1943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임스와 결합하여 의자디자인을 담당하였으며, 1952년에 놀(Knoll)사를 위한 용접 철제의자인 ‘다이아몬드(Diamond)’를 생산하였다. 1950년대에는 주로 조각가로 활동하였다.

안드레아 브란치(Branzi, Andrea) 이태리 (1938- )

이태리 건축가, 1974년까지 공동작업에 임했던 다른 건축가들과 함께 아키줌(Archizoom)을 창설하였다. 1977년에는 밀라노에서 개최된 전시회 ’50년대의 이태리 디자인(Italian Design of the Fifties)’을 기획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1979년에는 같은 제목의 책을 소개하는 글을 썼다.

그는 스튜디오 알카미아(Studio Alchymia)와 함께 작업을 하였으며, 1980년에는 멤피스 그룹을 위한 가구를 디자인하였다. 1984년에 발행된 그의 저서 [강렬한 집(The Hot House)]은 이탈리아의 새로운 디자인 물결을 훌륭하고 심도 있게 고찰하였다.

마르셀 브로이어(Breuer, Marcel) 헝가리 (1902- )

마르셀 브로이어는 1920년 그의 조국 헝가리르 떠나 비엔나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그해 말에 그는 바우하우스 학교에 입학했으며, 1924년에는 가구 작업장을 관리하게되었다. 모듈러 유니트(Modular unit)가구에 몰두했던 브로이어는 모듈러 유니트 주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8년 그는 베를린에서 건축을 하기 시작했으며, 알프레드, 에밀 로스와 함께 취리히의 돌데샬지역에 세울 아파트를 디자인했다(1933) 그 아파트는 가장 잘 알려진 국제적 스타일 건축의 하나가 되었다.

브로이어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런던에서 요크와 함께 공동으로 건축했으며,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미국에서 윌터 그로피우스와 건축했다. 이 기간동안에 브로이어는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쳤다. 그는 1946년 하버드 대학교를 떠나서 뉴욕에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가 최근에 받았던 청탁물은 네르비, 제퍼스와 함께 작업한 파리의 유네스코 건물과 뉴욕의 아메리칸 아트 휘트니 미술관 등이다. 그는 IBM 디자인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프랑스의 리고드와 플로리다 주의 보카 프리턴에 있는 IBM 연구소를 디자인했다.

마르셀 브로이어는 튜블러 강철로 의자를 디자인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개척자들 중 한명이었으며 1925년 등받이 없는 스툴, 의자와 식탁을 만들기 위해 구부러진 강철판을 계속 사용하는 일련의 디자인을 개발해냈다. 같은 해 디자인한 그의 ‘바실리’의자는 오늘 날까지도 생산되고 있으며, 튜뷸러 강철을 최초로 사용해서 만든 의자로 현대적 디자인의 고전이 되고 있다.

학생 시절 초반기의 브로이어의 작품과 대담하게 공감적인 배치를 시도했던 ‘바실리’의자가 데스트 운동과 구조주의 미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는 곧 규격화와 대량생산에 관련된 더 실제적인 원리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두소 시에 있는 신 바우하우스 건물의 가구를 디자인했는데 (1925) 브로이어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큰 작품에 적용할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으며 강당과 구내 매점에 배치한 튜뷸러 강철 의자와 스툴은 그 후에 나오게 되는 디자인들의 원형이 되었다. 1928년경에 브로이어는 그의 가구를 생산하는 스텐다드 모벨 광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가지 유형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것이라야 하며 더 이상 응용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응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만들어진 그의 캔틸레버 의자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현대적 의자들중 하나가 되었다. 브로이어는 1930년대에도 계속해서 선구적으로 가구 디자인을 개발했는데 영국회사인 이소콘을 위해 처음으로 지지대를 알루미늄으로 만든 의자뿐 아니라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는 주물 뜬 합판 의자 등을 개발해 냈다. 그의 디자인의 특징은 기능주의자들의 관심을 표현했다는 것인데, 의자의 형태와 재료에서 각 요소를 조립하여 제작했다.

윌리엄 버제스(Burges, William) 영국 (1827-1881)

영국의 건축가. 푸진과 13세기 프랑스 건축에 영향을 받았다. 1858년부터 가구디자인을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금속공예품도 제작하였다. 1865년부터 백만장자인 마퀴스(Marquis)의 후원을 받아 주로 고딕 양식을 재현함으로써 포스트모던의 색채와 유머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형태와 실내공간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다.

로빈 데이(Day, Robin) 영국 (1915- )

영국의 디자이너.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왕립예술학교에서 수학. 그가 디자인한 의자는 1948년 뉴욕에서 열린 ‘저렴 가구를 위한 국제 현상설계(International Competition Low CostFurniture Design)’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작품은 힐레(Hille)에 의해 주목 받았고, 힐레는 그를 디자인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가구는 1951년에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금상을 차지했다. 데이의 초기 작품은 합판으로 만든 40년대와 50년대의 정신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1963년에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선구적인 의자는 영국에서 미니카(Mini Car)가 디자인계에 기여한 이래 가장 중요한 기여 중에 하나였다.

데이는 1942년에 루시엔느 콘라디(Lucienne Conradi)와 결혼하였다. 1950년대의 그녀의 직물디자인은 그 시대를 통해 가장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으며, 1951년의 ‘캘릭스(Calyx)’패턴은 1952년에 미국 시장에서 가장 훌륭하게 디자인된 직물이라는 명성을 들었다.

파올로 데가넬로(Deganello, Paolo) 이태리 (1940- )

데가넬로는 1966년까지 플로렌스에서 건축을 공부하였으며 플로렌스 아키줌 그룹의 설립자 중의 한사람이다

1963년부터 1974년까지 플로렌스 칼렌타노(Calentano)를 위한 타운 계획을 하였으며,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런던 AA(Architectural Association)에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1972년에는 도무스(Domus), 카사벨라(Casabella), 모도(Modo), 인(IN) 잡지에 기사를 썼고, 그해에 아키줌이 해산되었다. 그는 1977년 ‘Collectivi Technici Progrettisti’ 그룹을 설립하였으며, 다음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였다.

1981년부터 데카넬로는 자신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여왔으며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로마의 산업디자인 연구소에서 교육활동을 하였고 카셀의 ‘도큐멘타 8’에 참여하였다. 그는 1987년에 비트라사의 비트라 에디션을 위해 ‘도큐멘타 의자Documenta Chair’를 디자인하였다. 카씨나(Cassina)를 위해 특별히 만든 1980년대 초기의 데가넬로 가구는 작품의 자유로운 형태와 비대칭이라는 측면에서 50년대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조나단 데 다스(De Das, Jonathan) 이태리 (1930- )

이탈리아의 건축가, 디자이너. 1966년 자신의 고향 밀라노에서 도나토 우르비노(Donato D’urbino)와 파올로 로마치(Paolo Lomazzi)와 함께 디자인팀을 결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아키줌(Archizoom)을 결성하였다.

그들은 막구조(Pneumatic structure) 주택과 같은 근대적 기술을 사용하였으며, 이태리 팝 디자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들의 최근 작품인 자노타(Zanotta)를 위한 가구는 비교적 과장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고 있다.

미켈레 데 루치(De Lucchi, Michele) 이태리 (1951- )

이태리의 디자이너이며 건축가인 데 루치는 1975년에 플로렌스 대학을 졸업하였고, 1977년까지 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해에 밀라노에서 열린 ’50년대의 이탈리안 디자인(Italian Design of Fifties)’을 구성하면서 브란치와 함께 작업하였다.

그는 결과적으로 스튜디오 알키미아(Studio Alchymia) 결성에 기여하였으며, 1979년부터는 올리베티(Olivetti)사의 고문으로 소트사스와 함께 일하였다. 1981년 이후로 소트사스와 함께 다시 일을 하였으며, 피오루치(Fiorucci)를 위한 상점설계와 멤피스의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뉴 웨이브(New Wave)’계열의 이탈리아 디자이너들 중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고 작품활동이 활발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크리스토퍼 드레서(Dresser, Christoper) 영국 (1834-1904 )

영국의 식물학자, 디자이너. 1847년부터 공립디자인학교(Government Schools od Design)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854년까지 식물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식물학에 관한 두 권의 저서를 가지고 있으며, 1860년 예나 대학(Jena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861년에 린나칸 협회(Linnacan Society)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는 저서 [장식디자인 예술(The Art of Decorative Design)]을 출간하고 난 1862년에 디자인 분야로 전환하였다. 책 출간은 1862년 런던 디자인 박람회에서 일본 작품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영국산 카페트와 직물을 디자인하는데 열중하였다. 1876-77년에는 미국, 일본, 중국을 여행하였고, 뉴욕에서 티파니(Tiffany)사를 위해 일본 상품을 수집하였다. 1879년에 런던에서 동양풍의 물건을 취급하는 상점을 개설하였으며, 요크셔에 있는 린드로프(Linthrope) 도기 제작소를 위해 도자기 가공품을 디자인하였다. 또한 1880년에 예술가구상 동맹(Art Furnisher’s Alliance)을 설립하여 자신의 가구디자인과 도자기 세공품을 팔았다. 그 해에 영향력있는 잡지인 퍼니처 가제테(Furniture Gazette)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저서 [일본의 건축(Japan, its Architecture)]과 [미술과 미술제품(Art and Art Manufactures)]은 1882년에 출판되었다. 1890년대에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주로 직물디자인을 담당했고, 사업차 물하우스,(Mulhouse)로 가는 도중 사망했다. 드레서는 기능주의적 금속세공품의 개혁자였으나, 그의 절충주의적 도자기 세공품은 완벽한 장식과 해학을 보여주고 있다.

찰스 임스(Eames, Charles) 미국 (1907-1978 )
미국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찰스 임스는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1930년에 자신의 사무실을 차렸다. 1936년에 그는 크랜브룩 미술학교(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엘리엘 샤리넨(Eliel Saarinen) 교장의 아들인 에로 사아리넨(Eero Saarinen)과 같이 가구를 만들었으며, 1년 뒤에 그는 실험 디자인 학과장이 되었다.

임스는 1941년 부인과 함께 남부 캘리포니아로 옮긴후 계속 가구 디자인을 했으며, 1949년 그 자신과 존 엔텐자(John Entenza)를 위해 집 두채를 지었는데, 그 집들은 조립식 가옥으로 붙여 만들었다. 임스는 엘리옷 노이스(Eliot Noyes)에게 선발되어 IBM의 사옥 디자인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며, 콜로라도에서 해마다 열리는 IDCA 회의를 위해 주역을 담당했다.

찰스 임스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40년에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이 개최한 ‘가정용 가구의 유기적 디자인(Organic Design in Home Furniture)’ 대회에서 에로 샤이넨과 공동 작업으로 우승했다. 1941년 박물관에 전시된 이 의자들은 혁신적인 것이었는데, 알토나 브로이어의 작품에서처럼 합판을 이용하여 한 가지 방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조각 같은’ 3차원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두 방향으로 주조뜬 합판(Moulded Plywood)을 이용한, 조개껍질 모양의 의자들이었다. 전쟁시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크라이슬러 회사(Chrysler Corporation)가 개발한 금속을 목재와 결합시키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허만 밀러 회사(Herman Miler Inc.)에 의해 의자 다리가 나무로 된 것도 제작되었다.

1941년부터 임스와 그의 부인은 비용이 적게 들도록 목재를 라미네이트(Laminate)판으로 주물을 뜨는 기술을 실험했다. 1946년 현대 미술 박물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있었던 개인전에는 ‘임스 의자’를 비롯한 합판 의자들이 전시되었다. 합판으로 만든 이 의자는 금속으로 의자다리를 만들었는데, 완전히 나무로만 만든 의자를 포함하여 여러 형태로 응용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임스는 시트와 구조작업을 따로따로 분리하여 작업하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전시회 때 출품한 것에는 의자 등받이를 비스듬하게 기울여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게 할 수 있도록 다른 의자다리보다 뒷다리를 더 짧게 만든 혁신적인 의자 디자인이 있다.

임스는 1948년 조개껍질 모양으로 만든 체이스 로그(chaise longue)의자를 비롯한 여러 의자들로 저렴한 가구디자인에 관한 국제 경시 대회(International Competition for Low-cost Furniture Design)에서 2등상을 받았는데, 체이스 로그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었고, 줌을 뜬 폴리에스터로 제작 생산되었다. 그리고 그는 1958년에 ‘알루미늄 그룹’과 같은 우수한 작품을 생산해 냈는데, 그것은 패드를 넣은 비닐(vinyl)로 시트를 만든 알루미늄 의자였다. 그리고 그는 검정색 가죽으로 쿠션을 만들고 광택을 낸 알루미늄으로 다리를 만든 회전 의자와, 장미나무를 이용하여 조개모양의 오토만을 만들었다.

임스는 자신을 뛰어난 건축가로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구조의 문제로서 우리 주위에 있는 문제들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 구조는 건축이다.” 그는 설계도를 그리지 않고서 디자인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고 제작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안락한지 안락하지 않은지를 테스트할 수 있었다. 그 의자 디자인들 중 상당수가 제작되진 않았지만, 더 성공적인 디자인의 기초로 이용되었다.

우베 휘셔(Fischer, Uwe (ehem. Ginbande Design)) 독일 (1958- )

오펜바흐의 디자인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였고 누렘부르그 예술 아카데미(Nuremberg Academy of Arts)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5년에 클라우스-아킴 하이네(Klaus-Achim Heine)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GINBANDE 디자인을 설립하고 런던 ‘One Off’에서 전시회를 갖았다. 또한 비트라 에디션을 포함되어있는 ‘타불라 바리아(Tabula varia)’를 디자인을 하였다. 1989년에는 안톨로지 쿼테트(Anthologie Quartett)를 위한 오피스 워크 스테이션과 밀라노의 Sawaya & Moroni를 위한 ‘SM 1’/’SM 2’ 등 다수의 디자인을 하였으며 로스앤젤레스의 퍼시픽 디자인 센터에서 ‘Designed in Germany’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비트라사를 위해 넥서스(Nexus) 테이블 시스템을 디자인하였으며, 1991년에는 베를린 아트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휘셔는 1993년 파리의 Gaz de France를 위한 ‘플레네타륨(Planetarium)’을 디자인하였으며 1994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전시장에서 ‘드라우프쉬크트(Draufsicht)’라는 제목의 설치를 하였고, 밀라노의 사와야와 모로니(Sawaya & Moroni)를 위한 피크닉이란 이름을 가진 접이 테이블을 설계하였다. 또한 1995년에는 스위스 바덴의 보그(Wogg)사를 위한 ‘WOGG 16’ 접이 테이블 시스템을 만들었고 GINBANDE 디자인은 해산되었다.

노먼 포스터(Foster, Norman) 영국 (1935- )

1935년 영국의 멘체스터에서 태어나 1961년 멘체스터 건축과 도시설계 대학(Manchester University School of Architecture and City Planning)을 졸업하였다. 1961년부터 예일대학에서 건축석사과정을 장학생으로 이수하였고, 1967년에 포스터와 파트너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140여개 이상의 상을 받았다.

그는 건축, 산업디자인 및 실내장식 등에 전문가로서, 주요 프로젝트로 홍콩의 홍콩과 상하이 은행, 런던 왕립미술원의 삭클러 겔러리 및 런던 제3 국제 공항 및 홍콩국제공항이 있으며, 1998년 비트라와 합작으로 공항 대합실을 위한 가구, 에어라인을 설계하였다.

안토니오 가우디 코넷(Gaudi Cornet, Antonio) 스페인 (1852-1926 )

스페인의 건축가. 스페인 북동부 카탈로니아 출생. 1873년부터 1878까지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공부했고, 고딕 양식의 재현에 몰두하였다. 1879년에 철로 주조된 램프를 디자인하였으며, 금속작품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부친은 금속세공가였다. 1883-85년 사이에 세워진 카사 비센스(Casa Vicens)와 귀엘(Guell) 공원에서는 아르누보에 대한 자신의 예술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조각적인 형태로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1904-05년사이에 지어진 카사 바틀로(Casa Batllo)에서 보여지는 그의 건축과 가구디자인은 비대칭 형태의 전형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가우디는 건물 군데군데를 타일과 항아리를 깨뜨려서 장식하였고, 페인트를 칠하기 전에 ‘object trouve’라는 사랑스러운 문구로 자신의 작품에 애정을 표현하곤 했다. 그의 작품은 바르셀로나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위트와 색채, 해학과 독창성의 찬사를 보낸다.

마이클 그레이브스(Graves, Michael) 미국 (1934- )

미국의 건축가. 1959년 하버드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1962년부터 프린스턴 대학에서 강의를 담당하였다. 1970년대 초에는 ‘뉴욕 파이브(New York 5)’의 일원으로서 근대디자인을 추구하였으나, 그 후 포스트모던 계열로 전환하였다.

1982년에 오레곤 주에 세워진 포틀랜드 빌딩(Portland Building)은 포스트 모던 건축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그의 드로잉은 크게 알려져있다. 1980년대에 들어 멤피스와 수나(Sunnar)를 위해 디자인한 가구와 알레시를 위해 제작한 금속공예 작품은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영역 속에서 그를 더욱 유명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아일린 그레이(Gray, Eilin) 아일랜드 (1878-1976)

아일랜드의 건축가. 1898년부터는 슬레이드 미술학교(Slade School of Art)에서, 1902년부터는 파리에서 수학했다. 파리에서 그녀는 동양의 도료(옻칠)를 전공했으며, 1922년에 전시회를 가졌다. 그레이는 데스틸과 국제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았으며, 1920년에 제작한 스틸 파이프로 된 가구는 국제주의 양식의 ‘모던’과 아르데코의 ‘모던’사이의 경계를 초월한 것이었다. 르 코르뷔제는 그녀의 작품에 고무되기도 하였다.

월터 그로피우스(Gropius, Water) 독일 (1883-1969)

독일의 건축가. 1903년과 1970년 사이에 건축을 공부한 후에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베렌스 사무실에서 근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그의 초기 작품은 신고전주의적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는 독일공작연맹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19년에는 반 데 벨레를 계승하여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바우하우스의 전신으로, 처음에는 바이마르에 있었으나, 1925년에 데사우(Dessau)에 새로운 국제주의 건물의 교사가 그로피우스 자신에 의해 세워졌다.

그로피우스 자신이 설계한 작품은 매우 적었으나, 학교의 책임자로서 자신의 스탭들에게-예를 들어 모홀리 나기 같은-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8년에 개인 사무실을 개설하였고, 바우하우스 책임자로서 한네스 메이어(Hannes Meyer)를 임명했다.

프리처드의 이소콘 그룹(Pritchard’s Isokon Group)을 위해 가구디자인을 했던 1934년과 1937년 사이의 영국 체류 이후에는 하버드 대학 건축과 교수로 취임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5년 건축그룹 TAC를 설립하였으며, 로젠탈을 위해 건축과 도자기 작업을 하였다.

액토르 기마르(Guimard, Hector) 프랑스 (1867-1942)

프랑스의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로 1885년에 에콜 드 보자르를 졸업했으며, 1890년대에는 자기 자신 특유의 아르누보양식을 개발했다. 실례로 1900년대부터의 판스 메트로(Pan’s Metro)를 위한 도자기를 디자인하기도 했으며, 청동화병도 만들었다.

기마르는 파리적인 아르누보(Parisian Art Nouveau)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까지 그의 경력은 순탄한 편이었다. 1938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뉴욕에서 일생을 마쳤다. 아르누보에 그가 미친영향이 컸기 때문에, 때때로 ‘스틸 기마르(Style Guimard)’ 혹은 ‘스틸 부쉬 드 메트로(Style Bouche de Metro)’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셉 호프만(Hoffmann, Josef) 오스트리아 (1870-1956)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그는 오토 바그너 밑에서 사사 받았으며, 1899년에 바그너는 그를 빈에 있는 응용미술대학교 교수로 추천했다. 1903년에 프리츠 바른도르퍼(Fritz Warndorfer)의 후원하에 호프만과 모저(Moser)는 부분적으로 애쉬비의 수공업 조합 조직의 영향을 받은 바이너 베르크슈태테를 설립했다.

호프만의 가장 유명한 건물은 1911년에 계획된, 브뤼셀에 있는 스토클레 궁(Palais Stoclet)이다. 베르크슈태테 시절 그의 작품은 매켄토시로부터 유래된 사각형의 형태를 강조한 모습이었고, 또한 정교한 홈파기로 네오 클레시컬(Neo-Classical)한 형태를 수용하였으며, 1920년대에 들어서느 네오 로코코(Neo-rococo)의 일면과 데카당트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는 금세기에 있어 가장 절충적이며 다재다능한 디자인너중의 한 사람이다.

한스 홀라인(Hollein, Hans) 오스트리아 (1934- )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1956년까지 빈의 그래픽 미술대학에서 수학하였고, 1959년까지는 시카고의 일리노이 공과대학에서, 1960년까지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세계 여러곳을 여행했고, 1964년에 빈에 자신의 사무소를 개설하기 전까지 스웨덴, 독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홀라인의 중요 작품으로는 빈에 있는 레티 양초가게(1965)와 슐린 보석상(1974)들을 들 수가 있다. 아마도 모든 포스트모던 건축가와 디자이너 가운데 가장 재능이 뛰어난 작가 중의 하나일 것이며, 1981년에는 멤피스를 위해, 1983년에는 알레시를 위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폴트로노바를 위한 각구도 디자인했다.

1967년 부터 뒤셀돌르프에 있는 미술아카데미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976년부터는 빈에 있는 응용 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최근 건축작품의 경향은 몬체글라드바하(Monchenglad-bach,1981)에 설계한 박물관에서 알 수 있다. 홀라인은 또한 1978년에 오토 와그너에 대한 자서전을 집필했다.

아르네 야곱슨(Jacobsen, Arne) 덴마크 (1902-1971)
덴마크의 건축가인 야곱슨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덴마크 왕립 미술학교(Royal Danish Academy of Fine Art)에서 수학했다. 1950년대의 자유로운 형태를 지닌 의자는 프리츠 한센(Fritz Hansen)을 위해 1952년에 만든 합판으로 성형된 의자가 시초였으며, 50년대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의자 ‘에그(Egg)’와 스완(Swan)’은 1958년에 코펜하겐의 스칸디나비아 항공호텔(Scandinavian Airline Hotel)을 위해 제작되었다. 특히 스텔턴(Stelton)을 위해 제작한 스테인리스 파이프로 만든 그의 디자인은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으며, 그 작품에 나타난 ‘실린더(Cylinda)’ 형태는 1967년에 덴마크 산업디자인상을 수상했다. 또한 야곱슨은 1963년에 옥스퍼드의 성 캐서린 대학(St. Catherine’s College)를 위해 가구를 디자인했다.

찰스 젠크스(Jencks, Charles) 미국 (1939- )

미국의 비평가. 1965년에 건축 학위를, 1961년에 영문학 학위를 하버드 대학에서 받았으며, 1970년에 런던 대학에서 건축사 박사를 받았다. 그는 근대(Modern)와 탈근대(Postmodern) 건축에 관한 탁월한 저서를 남겼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건축에서의 근대운동(Modern Movements in Architecture, 1973), 포스터모던 건축 언어(The Language of Posmodern Architecture,1977), 포스트모던 고전주의(Postmodern Classicism, 1980)등이 있다. 저술활동과 병행하면서 젱크스는 런던에 있는 ‘주제가 있는 집(Thematic House)’을 위해 ‘상징적인 가구(symbolic furniture)’를 설계했다. 1983년에 테리 파렐(Terry Farell)과 파트너가 되어 작품 활동을 하였다.

필립 존슨(Johnson, Phillip) 미국 (1906- )

미국의 건축가. 1923-30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였고, 1930년-36년에 뉴욕 근대미술관(MOMA)의 건축부의 첫 부장직을 역임하였다. 1940-43년에 다시 하버드로 돌아와 그로피우스와 브로이어 밑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42-46년 케임브리지에 개인 사무소를 개설하였고 다시 1946년 MOMA의 건축부 부장직을 맡았다. 1954년부터는 뉴욕에서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1932년에는 히치콕크(H. R. Hitchcock)와 함께 ‘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이라는 영향력 있는 책을 발간하여 근대건축의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1934년에 ‘근대미술(Modern Art)’ 전시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후에 존슨은 국제주의적인 근대건축에 반기를 들었으며, 1970년대 중반에 시작하여 1984년에 완공된 AT&T빌딩은 근대건축으로부터 포스트 모던 건축으로 향한 방향 전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67년부터 존 버기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시로 구라마타(Kuramata, Shiro) 일본 (1934-1991)

1953년까지 동경 공업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구라마타는 동경의 쿠와사와 디자인 연구소(Kuwasawa Institute for Design)에서 캐비넷 제작 훈련을 받았다. 1957년에서 1964년까지 산-아이(San-Ai)의 멤버였으며, 1965년 동경에 쿠라마타 디자인 사무실을 설립하였다. 그는 1969년에 동경에 있는 주드 클럽(Judd Club)의 실내를 디자인하였고, 1981년 일본 디자인을 위한 문화상을 수상한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밀라노의 멤피스 그룹을 위해 디자인하였고, 1987년에는 동경, 뉴욕, 파리에 있는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부티크의 실내를 디자인하였다. 또한 비트라사의 비트라 에디션 콜렉션을 위해 철망으로 된 ‘How high the Moon’ 암체어를 디자인하였다.

르 코르뷔제(Le Corbusier) 스위스 (1887-1965)

르 코르뷔제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건축가이다. 그의 도시 계획, 공공 건물, 주택과 디자인 등에서의 근본적인 계획들은 어떻게 하면 만족스런 현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완전히 새롭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의 다른 어떤 건축가들보다도 일찍 건축을 기능적으로 해야 하며 미학적인 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런 그의 이론과 작품은 현대 건축의 발달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르 코르뷔제는 찰스 에드워드 제너렛이라는 이름으로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응용 미술 학교인 라 쇼 드폰즈에서 공부했다. 그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집중적인 훈련을 했는데, 그 기간 동안 유럽을 여행하면서 빌딩들을 스케치하고, 그 당시 유명한 건축가들 -조셉 호프만, 강화된 콘크리트를 만들어 낸 어거스트 퍼렛과 르 코르뷔제에게 현대적 디자인을 소개해준 피터 베런스 등-을 만났다.

그후 12년 동안 르 코르뷔제는 일련의 작품들과 저서들, 즉 도미노 주택, 시트로앙 주택과 1920년의 아메데 오장팡과 협력해서 창간해 낸 정기 간행물 [레스프리 누보]에 실린 건축에 관한 기사들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응용 장식을 완전히 거부한, 기본적으로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하여 편리한 실내 생활을 할 수 있는 주택에 대한 그의 신념은 1925년에 열린 파리 박람회 때의 레스프리 누보 전시관과 가르체의 빌라 스테인, 포이시에 있는 빌라 사보이와 같은 건물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1930년대 르 코르뷔제는 파리 대학교를 위해서 스위스 기념관과 같은 대규모 계획들과 도시 계획안을 작성했는데, 스위스 기념관은 수많은 주택의 모델이 되었고, 마르세이유에 있는 르 코르뷔제자신의 유니테 다비타숑을 이와 비슷하게 지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했는데, 그의 작품에는 롱챔프교회, 라 토레트와 샹디가르를 위한 계획들이 있다.

르 코르뷔제의 가구는 그의 건축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산 방법, 재료, 사회적인 추세가 디자인상의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케 한다는 그의 믿음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는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미학적 형태로 지난 인습을 완전히 뜯어고치려 했으며, 그가 만든 의자들은 디자인 역사상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르 코르뷔제는 초반기에 디자인한 주택들에 토네 의자들을 이용했는데, 르 코르뷔제가 디자인한 의자들도 대량 생산에 적절한 상품을 제작하기 위해 관심을 두고 만든 것이었다.

그의 기본적인 디자인들 -그랜드 컴포트 의자(Comfort chair), 셰이즈 롱, 배스큐런트 의자 세즈 토르낭 의자와 소파 등- 은 몇 가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생산되었으며, 세련된 기하학적인 선들은 구조적 요소들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용자에게 의자들의 크기, 설치, 위치, 붙박이 여부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이용자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고, 의자들은 필요 조건들과 기능을 만족시킬 수 있게끔 유용하게 디자인되었다. 그의 디자인들은 독특한 비례를 이용하여 제작되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의자들이 널리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유용성이 입증되고 있다.

르 코르뷔제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디자인들은 사촌들인 피에르 제너렛과 샬럿 페리안드와 합작해서 작품활동을 하던 시기에 제작했던 것이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토네 회사가 제작했으며, 1950년대 후반 이후로는 독일에 있는 웨버가 대량으로 생산했고, 최근에는 이탈리아에 있는 카지나가 생산해 내고 있다.

엘 리시츠키(Lissitzky, EI) 러시아 (1890-1941)

러시아의 건축가이며 예술가. 1909-14년 다름슈타트의 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였다. 1919년 말레비치를 만났고, 1921년에는 모스크바 아카데미에서, 1922-25년에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그는 구성주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노비스(UNOVIS)그룹과 연결되어 자신의 프로운(PROUN)에서 슈프레마티즘(Suprematism)을 개발하였다.

1920년대 그는 자주 여행을 다녔으며, 다다(Dada)예술가와 독일의 바우하우스, 네덜란드의 데 스틸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1924년에 스위스에서 마르트 쉬담(Mart Stam)을 만났으며, 1925년에 실내장식, 가구디자인, 금속공예를 강의하기 위해 브쿠테마스로 돌았다. 1930년에 바우하우스의 실험에 입각한 안락의자(armchair)를 디자인했으며, 모홀리 나기처럼 디자인, 사진, 픽토그램, 그래픽 예술과 표지 디자인을 행하였다.

그는 또한 타틀린의 제 3인터내셔널 기념탑과 유사한 레닌 연설대(1920)를 선보였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철구조로 된 이 작품은 표현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풍기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는 러시아 구성주의와 1920년대의 서유럽의 아방가르를 연결시켜주는 대표적 인물로서, 그의 미래 지향적인 역동적 개념은 1970년?의 하이테크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찰스 레니 메킨토시(Mackintosh, Charles Rennie) 영국 (1868-1928)

영국의 건축가이며 디자이너. 1885년부터 글래스고 미술학교에서 수학. 1889년에 허니먼 케피(J. Honeymann & Keppie)사의 제도사로 채용되어 1913년까지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1904년부터 이 회사의 파트너가 되었으며, 맥내어(H.J. Macnair)를 만났다. 매킨토시와 맥내어는 맥도널드 자매인 프란세스(Frances)와 마가렛(Magret)과 함께 일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포스터와 금속공예품을 디자인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스튜디오(Studio)’지에 실렸다.

1987년 글래스고 미술학교 신축 건물 공모전에 당선되어 1898-1909년 사이에 지어졌다. 그가 디자인한 실내장식과 가구디자인 작품은 직선과, 밝은 색조에 바탕을 둔 정교하면서도 단순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는 빈에서 특히 유명했으며, 1898년 뮌헨 가구 전시회 이후 유럽 대륙에 알려졌고, 1900년 빈에서 개최된 분리파 전시회에 초대되어 스코틀랜드 섹션을 디자인하였다. 매킨토시의 디자인은 미술공예(Arts and Crafts), 라파엘 전파(Pre-Raph-aelitism), 켈틱 리바이벌(Celtic Rivival)과 연계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르누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1913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가구디자인과 날염 wlranafel자인에만 국한하여 활동했다. 1920년 은퇴하여 포트벤드레스에서 수채화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다 1928년 런던에서 작고하였다.

리차드 마이어(Meier, Richard) 미국 (1934- )

미국의 건축가. 코넬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957∼63년까지 SOM의 스키드모어, 오잉스, 메릴, 그리고 마르셀브로이어와 함께 여러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그는 1963년에 자신의 사무실을 개설하였으며, 1년 후 뉴욕 쿠퍼 유니언(Cooper Union)의 건축디자인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뉴욕(New York 5)의 일원으로서 코르뷔제의 건축 정신에 근접해 있었다.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아 알레시를 위한 은세공품 세트를 디자인하기도 하였으며, 스위드포웰(Swid Powell)을 위해 철제 세공품을 디자인 하였다. 그의 작품은 포스트모던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네오모던적인 것으로서, 모던디자인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 멘디니(Mendini, Alessandro) 이태리 (1931- )

이태리 디자이너. 1970년까지 고향 밀라노에서 니졸리 현회(Nizzoli Associates)와 함께 일했다. 1970-76년까지 카사벨라(Casabella) 건축지의 편집을 담당했으며, 1979년에는 도무스(Domus)지의 편집위원이 되었다. 그는 ‘평범한(banal)’이라는 디자인의 개념을 슬루건으로 세우면서 ‘스튜디오 알카미아(Studio Alchymia)’와 함께 협동 작업을 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40년대에 칸딘스키에 duddgiddfm 받은 장식된 찬장을 1978년에 재구성한 작품이며, 같은 해에 구성적인 테크닉이 구사된 ‘프로스트(Proust)’라는 안락 의자를 디자인하였다.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의 ‘평범한 대상(The Banal Object)’ 이라는 테마는 앞으로의 빈 디자인(anti- design)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83년 알레시 공모전엥서 은제품을 디자인하였고, 빈 디자인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Ludwig) 독일 (1886-1969)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모더니즘을 창립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가장 완벽한 현대 건축가고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으로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 라는 그의 금언에 따라서 구조의 명쾌함과 자유로운 공간 배치와 세심한 세부 묘사 등을 들 수 있다.

미스는 부르노 폴의 사무실과 피터 베런스의 사무실에서 건축을 경험하고 나서 1912년 자신의 건축사업을 시작했다. 비록 초기의 그의 설계는 거의 실행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명성을 얻었고 11월 그룹의 건축 부장, 독일의 공업조합의 부사장, 바이젠호프지두룽 주택전시회의 창립 위원장과 바우하우스 학교의 교장 등을 지냈다. 1938년에 독일 나치를 벗어나서 시카고에 있는 IIT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1948년에는 그 학교의 학장이 되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그의 작품은 -폭스 리버에 있는 판스워스 저택, IIT의 여러 건물들, 시카고의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들, 뉴욕의 시그램 오피스 빌딩- 유럽의 현대 운동을 미국에 소개시킨 것이다.

그는 20세기 건축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의자 디자이너들 중 한 명이며 그가 디자인한 의자의 범위는 -기능적으로 단순하게 만든 켄틸레버 의자에서부터 매우 안락하게 만든 바르셀로나 의자에 이르기까지- 찰스 임스 작품에 필적할 만한 것이다. 마르셀 브로이어나 마르트 슈탐과 달리 미스는 기능주의와 경제적인 대량 생산의 제한점을 무시했다. 그 결과 그의 의자들은 그 자체로 예술품이 될 만한 작품이 되었다. 그는 건축에 대한 자신의 심미주의적인 관심을 반영시켜 주의 깊게 세부를 묘사했고 공간을 분위기 있게 할 수 있는 의자를 디자인했다.

미스가 최초로 디자인한 의자는 MR 의자였는데 그것은 튜뷸러 강철을 사용해서 만든 켄틸레버 의자로 시트와 등받이는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1926년 바이젠호프지드룽 주택 전시회를 위한 1차 회의 때 마르트 슈템이 말했던 모델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던 것이다. 1927년 8우러 24일 미스는 튜뷸러 강철로 만든 켄틸레버 의자로 특허를 받았는데 ‘강철관의 탄성적 성질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일’이라는 그의 주장을 잘 반영한 것이었다. MR 의자를 응용한 많은 의자들이-팔걸이가 있는 의자, 시트와 등받이를 등나무 줄기로 엮어 만든 모델- 생산되었다. 튜뷸러 강철을 이용한 그의 다른 디자인으로는 라운지 의자와 튜뷸러 강철로 골격을 만들고 한 장의 긴 가죽에 쿠션을 넣어 볼록하게 주름지게 한 체이스 로그 등이 있다. 1926년에 미스는 바르셀로나 만국 박람회의 독일관을 위에 유명한 바르셀로나 의자를 디자인했는데, 그 의자는 크롬을 도금한 강철로 프레임을 만들고 말털 쿠션을 가죽 끈으로 의자에 묶었다. 미스는 그가 디자인한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의자를 배치했는데 바르셀로나 의자는 프레임이 너무 무거워서 쉽게 옮길 수 없었다. 강철과 X’ 이음매는 손으로 힘들게 작업하여 결합시켜야 하므로 대량 생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 의자는 현재 화려한 디자인의 고전이 되고 있으며 우리 시대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제스퍼 모리슨(Morrison, Jasper) 영국 (1959- )

제스퍼 모리슨은 1984년 베를린 예술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으며, 런던의 왕립 미술학교를 1985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986년 그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었고 1987년 카셀(Kassel)의 ‘도큐멘타 8(documenta 8)’에서 로이터 뉴스 센터를 위한 설치를 디자인하였다. 그는 1988년에 베를린의 ‘Some new items for the house I’을 설계하였고 1989년에 밀라노에 비트라사를 위해 “Some new items for the house II”를 설치하였다. 1991년에는 비트라사와 협력하여 의자, 테이블, 소파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였다. 1993년에는 Applied Art Vienna 미술관을 위해 설치하였고, 1995년 보르도의 건축 센터 ‘Arc en r?e’에서 독자적인 전시회를 갖았다.

윌리엄 모리스(Morris, William) 영국 (1834-1896)

영국의 미술가, 디자이너, 작가이며 사회개혁가. 1953년 옥스퍼드의 엑세터(Exeter)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여기에서 에드워드 번 존스와 만나 함께 존 러스킨의 저서를 읽고 미술과 건축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는 1956년 고딕 리바이벌 건축가인 스트리트(G, E. Street)의 사무실에서 건축을 배웠고, 이곳에서 필립 웨브를 만났다. 1857년 로제티(Rossetti) 형제를 중심으로 한 라파엘전파 서클에서 화가로 활동하면서 로제티 밑에서 회화를 배웠다. 또한 건축가 푸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감성적인 측면에서는 러스킨의 영향을 받았다. 중세의 영적, 미적 원리들을 낭만적으로 재현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당시의 절충주의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1859년 필립 웨브로부터 의뢰받아 설계한 ‘레드 하우스(Red House)’는 영국 주거 건축의 이정표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1861년에는 포드 매도스 브라운(Ford Madox Brown)과 번 존스, 필립웨브, 로제티 등과 함께 모리스, 마샬, 폴크너사(Morris, Mashall, Faulkner & Co.)를 설립하였다. 1862년 강의를 시작하였고, 같은 해 고건축 보존 협회(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Ancient Building)를 설립하였으며, 해머스미스(Hammersmith)에서 카펫을 만들고 직조하기 시작하였다. 1881년 직기를 만들기 위해 머턴 어베이 (Merton Abbey)로 이주하였으며, 여기에서 친구인 미술공예(Arts and Crafts)의 타일 제작자 드 모건(De Morgan)과 가깝게 지냈다. 모리스의 마지막 미술공예의 성향은 1891-98년 사이에 아름다운 수공예로 제작된 책을 생산하는 켐스곳(Kelmscott)인쇄소를 통해서 구현되었다. 이 인쇄소는 모리스의 유명한 시를 출판하였다. 모리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기예를 그들 자신 스스로의 기쁨으로 대할 수 있는 생활 방식으로서의 의식적인 전환에 해당되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 지속적으로 사회주의에 관심을 나타냈으며, 크레인과 애쉬비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장식예술의 재구성은 영국, 미국, 벨기에, 독일에 있는 많은 그룹에 영향을 미쳤다.

이사무 노구치 (Noguchi, Isamu) 미국 (1904- )

미국의 조각가이며 디자이너,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1918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1921-24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후에 뉴욕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술학교 교장이 되었다.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구겐하임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1927-29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 브랑쿠시(Brancusi)에게 사사 받았다. 1930-31년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였고, 그 후 예술연맹(Federal Arts)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1940년대에 유명한 가구와 램프디자인을 시작하였다.

글랜 올리버(Oliver, Glen) 독일 (1959- )

1985년까지 독일 붑퍼탈 대학교(Wuppertal University)의 산업 디자인 기능학과에서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1986년 그의 컴펙트 카(compact car) 디자인 연구는 밀라노의 도무스 아카데미로부터 ‘디자인의 마스터’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까지 안토니오 시테리오 스튜디오의 사원으로 일하였으며, 1990년도에는 안토니오 시테리오의 파트너로서 비트라사의 사무용 가구 제작을 포함한 안졸그사, 비페(Bieffe)사, 플로스(Flos)사, 카텔(Kartel)사, 막스데이타(MaxData)사, 올리베티(Olivetti)사, 신티시스(Synthesis) 및 비트라겼을 위해 수많은 제품의 디자인작업을 하였다. 카텔사를 위한 ‘Mobil’ 컨테이너 시스템은 the Compasso d’Oro로부터 상을 받았다.

베르너 판톤(Panton, Verner) 덴마크 (1926-1998)

1941년에서 1951년까지 코펜하겐의 왕립 미술학교에서 건축을 수학하였으며, 아른 야곱슨(Arne Jacobsen) 건축 스튜디오에서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일하였다. 1957년에는 카드보드(판자) 주택을 디자인하였고, 1966년에 ‘Rosenthal Studio-Preis’를 수상하였다.

1967년 비트라사를 위해 판톤 의자(Panton Chair)를 만들었으며, 1969년에는 함부르그의 Spiegel publishing house의 실내를 디자인하였다. 1987년과 1988년에 코펜하겐과 부르셀의 가구 페어에서 회고전을 가졌고, 1998년 비트라사는 판톤 의자를 재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지오 폰티(Ponti, Gio) 이태리 (1891-1979)

이태리 건축가이며 디자이너, 1898-1921년 사이에 그의 고향 밀라노에 있는 공예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였다. 바이너 베르크슈태테의 영향을 받은 도자기공예품을 디자인하기 전인 1921년에 밀라노 건축사무소에서 일하였으며, 1923-30년까지는 리챠드 기노리(Richard Ginori) 공장을 위해 일하였다. 1920년대부터 건축가로 활동하였으며, 1928년에는 유명한 디자인 전문지 도무스(Domus)의 편집인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편집을 담당하였다. 폰티는 몬차(Monza) 비엔날레의 운명 책임자였으며, 1925-79년까지 밀라노 공예학교의 건축학부 교수로 있었다. 건축가로서 유명한 그는 1956년 구조 기술자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Pier Luigi Nervi) 와 함께 전후 가장 유명한 피렐리 마천루(Pirelli Office Tower)를 계획하였다.

어니스트 레이스(Race, Ernest) 영국 (1913-1964)

영국의 디자이너로 1932년부터 1939년까지 바틀렛(Bartlett) 건축학교 런던 대학에서 실내디자인을 공부했으며, 1937년-39년까지 인도에서 직조를 하였다. 그는 항공기 파괴(쇠부스러기)에서 유출된 금속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던 1945년에 ‘레이스 가구(Race Furniture)’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945년에 제작된 그의 ‘BA’의자와 알루미늄으로 주조된 다른 가구는 1946년에 개최된 ‘영국은 그것을 만들 수 있다(Britain can make it).’라는 전시회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48년에 근대미술관(MOMA)에서 개최한 ‘저렴한 가구 공모전’에 가구를 출품하였으며, 1951년의 대영제국 축제(Britain Festival)를 위해 야외용 의자를 디자인하였다. 그는 굽은 형태의 가벼운 강철 제품을 ‘스프링복(Springbok)’과 ‘안텔로프(Antelope)’라고 명명하였으며, 그러한 명칭은 많은 축제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굽은 모양의 합판 의자 ‘안텔로프’는 마르셀 브로이어와 찰스 임스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레이스는 1945년까지 ‘레이스 가구’의 책임자로 있었으며, 이후 죽기 전까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리하르트 리머슈미트(Riemerschmid, Richard) 독일 (1868-1957)

독일 건축가. 뮌헨에서 화가로서의 수업을 마친 후, 윌리암 모리스와 미술공예의 영향을 받아 가구와 섬유, 유리, 융단 등을 디자인하였고, 1900년 무렵에는 건축도 디자인하였다. 1897년 ‘뮌헨 미술과 수공예공방협회(Munich Vereinigten Werkstatten fur Kunst und Hand-werk)’의 창단 멤버의 한 명이었으며, 1920-26년부터는 퀼른 직업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 그의 건축은 고전적 스타일을 수용하였으며, 디자인 작품은 미술공예 가구에서부터 아르누보 양식의 도자기공예품과 바우하우스의 전형인 단순성을 지닌 기계로 제작된 공예품에 이루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게리트 리트벨트(Rietveid, Gerrit) 네덜란드 (1888-1964)

네덜란드의 가구디자이너이며 건축가. 1899년부터 1906년까지 우트랙(Utrecht)에 있는 부친의 가구점과 보석상에서 견습공으로 있었으며, 1911년부터 독자적으로 가구 제조업을 시작하였다. 1918년 로버트 반 토프(Robert van t’Hoff)와 가까이하면서 데스틸 창립멤버와 접촉을 갖게 되었고, 1931년까지 이 운동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제작된 가구디자인과 실내구성에는 데스틸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특희 1918년에 제작된 유명한 ‘레드 블루(Red & Blue)’의자는 3원색을 사용한 몬드리안의 3차원적 구성의 탐구에 양향을 받은 것이며, 1920년에는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흔들리는 램프(Hanging Lamp)를 디자인하였다. 그는 근대디자인 운동뿐만 아니라 라이트의 건축에 양향을 받기도 하였다. 1924년 그의 친구인 실내장식가 슈뢰더(Truns Schroder)를 위해 데스틸의 프로그램적 표현이 담긴 주택을 지었다.

리트벨트의 가구는 바우하우스에 있는 마르셀 브로이어의 영향을 받았으며, 레드-블루(Red & Blue)’ 의자는 20세기 가구디자인의 임지를 구현한 것이었다. 그의 가구는 아직까지 이탈리아에서 카시나(Cassina)에 의해 생산되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 나타난 색채의 영향은 멤피스 그룹의 작품이나 최근 이탈리아의 생산 제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자크 에밀 룰만(Ruhlmann, Jacques Emile) 프랑스 (1879-1933)

프랑스의 가구디자이너이며 제작자. 1910년부터 Salon d;Automne에서 그의 가구를 전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디자인을 실제로 제작하기 위해 자신의 회사를 건립하였다. 그의 가구는 종종 18세기 선례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마호가니(mahogany), 암모니아(am-boyna), 마카사 에보니(macassar ebony)와 같은 풍부한 목재를 사용했으며, 종종 아이보리로 상감을 하기도 했다.

파리의 모더니즘과 함께 18세기의 화려함을 결합한 혼상적 표현은 아르데코 양식으로 예시되어 나타나며, 1925년의 파리 전시회에서 많은 시선을 끌었다. 1927년에 호화 여객선 일 드 프랑스(lle de France)의 다방(tearoom)의 장식을 의뢰받았고, 1930년에는 정부기관 ‘Chambre de Commerce’의 장식을 요청받았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 해에 앵도르(Indore)의 마하라자(Maharajah) 궁전을 위해 화려한 가구에 어울리도록 크롬 도금 강판을 사용하였다.

에로 사아리넨(Saarinen, Eero) 미국 (1910-1961)

핀란드 태생의 미국 건축가이자 디자인너로 1923년에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29년 그의 부친이 있던 킹스우드(Kingswood) 여학교를 위해 가구디자인을 했으며, 1930년-31년 파리로 건너가 Academie de la Grande Chaumiere에서 조각을 공부하였다. 1931-34년 예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1934년-36년 유럽여행 중 크랜부룩(Cranbrook)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또한 1937년에는 부친의 파트너로 일했다. 1940년에 찰스 임스와 함께 MOMA가 주최한 ‘유기적 가구(Organic Furniture)’공모전에서 우승하였다. 사아리넨의 전후 작품 속에는 유명한, 플라스틱으로 구성된 의자 ‘웜(Womb,1946 )’과 플라스틱좌석과 알루미늄 촛대 받침을 지닌, ‘튤립(Tulip. 1957)’이라는 의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건축의 흐름은 뉴욕에 있는 TWA 공항 터미널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작품은 1956년에 시작하여 1962년에 완공되었으며, 콘크리트에 의한 곡선의 표현이 비행기가 비상하는 은유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리챠드 사퍼(Sapper, Richard) 독일 (1932- )

독일 태생 디자이너. 1952-56년 그의 고향 뮌헨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1957년까지 머세데스 벤츠(Mercedes-Benz)를 위해 디자인을 하였다. 1958년에 밀라노로 가서 1959년까지는 폰티(Ponti)를 위해 일하였고, 1975년까지는 마르코 자누소(Marco Zanuso)와 함께 일하였다. 사퍼와 자누소는 1970년대 디자인에 있어서 최고의 제품 일부를 담당하였다. 아테미드(Artemide)를 위해 디자인된 사퍼의 플라스틱과 알루미늄 제품의 테이플 램프 ‘티치오(Tizio)'(1972)는 화려한 70년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알레시’를 위한 주전자 ‘볼리토레(Bollitore)'(1983)는 포스트모더니즘과 70년대의 하이테크의 유산이 풍부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는 1970년에 자신의 사무실을 개설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왔으나, 지속적으로 이탈리안 디자인과의 연관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칼 프리드디히 쉰켈(Schinkel, Karl Friedrich) 러시아 (1781-1841)

러시아의 건축가이며 화가, 디자이너. 쉰켈은 1794년부터 베들린에서 공부하였으며, 1797년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념비를 계획한 프리드리히 길리(Friedrich Gilly)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798년에 건축 공부를 위해 길리의 구성원이 되었다. 쉰켈은 신고전주의와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1789년부터 새롭게 등장한 베를린의 바우아카데미(Bauakademie)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는 프라하, 빈, 트리에스테, 베니스와 로마를 1803-04년에 여행하였으며, 나폴리와 시실리를 방문한 후 파리에서 그의 여행을 끝냈다. 프러시아로 귀국하자마자 화가와 무대디자이너로 작업하였으며, 1810년부터 프러시아 공공건물의 건축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15년에 그는 프러시아 노동부(Prussian Works Departments)의 부책임자가 되었고, 1830년에는 책임자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양식과 고딕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은 베를린에 있는 쉰켈의 건물은 두 가지 양식으로 디자인되었다. 그는 영국 건축에 대한 드로잉을 하였고, 1826년에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였다. 그는 젬퍼, 루스, 미스, 스털링 등의 작품과 포스트모던 고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에토레 소트사스(Sottsass, Ettore) 이태리 (1917- )

이태리의 건축가이며 디자이너. 1935년부터 1939년까지 튜린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였고, 군복무 후인 1946년에 밀라노에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였다. 그는 1958년부터 올리베티(Olivetti)사의 디자인 고문이 되었고, 1960년에는 튜린 근처 이브레아(Ivrea)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세웠다. 1963년과 1969년의 ‘프락시스(Praxis)’와 ‘빌렌타인(Valentine)’ 타이프라이터뿐만 아니라, 1959년에 올리베티를 위한 ‘엘레아(Elea)’컴퓨터를 디자인하였다.

소트사스의 작품은 ‘좋은 형태(good-form)’의 실증적인 사례를 보여준 반면, 반 디자인(anti-design)의 커다란 전조가 되었다. 그는 1966년부터 폴트로노바를 위해 팝 아트에 기초한 가구를 생산하였으며, 1969년에는 인디안풍의 세라믹 세공품을 생산하였다. 그의 작품의 반 디자인적 상황은 스튜디오 알키미아(Sudio Alchymia)에 가담할 당시인 1979년 이후에 증대되었다. 1981년에 그의 이러한 전통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멤피스 그룹을 형성하였다. 소트사스의 멤피스 디자인-예를 들면 1984년의’하이야드(Hyatt)’테이블-은 심지어 한스 홀라인에 의한 포스트모던 고전주의적 경의를 표한것이기도 했다. 소트사스 디자인의 애매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국면을 형성하고 있다.

필립 스탁(Starck, Philippe) 프랑스 (1949- )

1966년부터 1968년까지 파리의 the Ecole Centrale des Arts D?oratifs에서 수학하였으며, 1971년부터 1년간 피에르 가르뎅 스튜디오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하였다.

그는 1980년에 스탁 프로덕트(Starck Products) 자회사를 설립하고 2년 후 엘리제궁의 President’s private chambers를 디자인하여 유명해졌다. 1984년에는 파리의 Costes 카페를 디자인하였고, 1986년 밀라노의 도무스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1989년에는 동경의 아사히 양조장을 위한 그의 첫 번째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그는 1990년에 뉴욕의 파라마운트 호텔의 실내와 파리의 Teatriz를 설계하였으며, 비트라사와 협력하여 루이 20과 W.W. 스툴, 닥터 울라(Dr.Ooola)를 디자인하였다. 또한 1933년에 Les 3 Suisses회사를 위해 Starckinette 조립식 주택을 설계하였고, 알레시(Alessi)사를 위한 디자인작업을 하였다. 1994년 이후로도 비트라사를 위한 디자인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마르트 슈탐(Stam, Mart) 네덜란드 (1899- )

네덜란드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마르트 슈탐은

글쓴이

Yoonho Choi

independent researcher in design, media, and locality & working as a technology evangelist in both design and media indu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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