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들른 심스페이스란 곳의 발제문을 옮겼습니다.
대충 둘러보니 온라인 미술 커뮤니티인듯,,
썩 좋은 결과를 내고 있는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냥 ‘이런것도 있더라’라고 알려드리기 위해서.. ^^ 회원명단에는 많이 보던 이름들도 있습니다..
제가 임의로 굵은글자로 바꿨구요,
http://www.simspace.com 로부터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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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하고도 유일한 《심스페이스》의 비젼
Ⅰ
오늘날 자의건 자의가 아니건 작가들은 사회로부터 적잖게 소외되어 있다. 점점 더 ‘예술’을덜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새로운 산업적 구조 속에서 작가들은 이전에 차지했던 권좌를 상실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산업화, 구조화되어 가고 있고, 그 흐름은 완전히 제도적으로 진행된다. ‘성공적인 예술’은 갈수록 더 설명이 난처한 개념이 되어가고 있고, 그럴수록 ‘성공한 예술가’의 개념이 그 자치를 차지해 가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기업의 기금들과 정부의 보조금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따라서 기회는 결탁한 전문가들, (좀 구식 표현을 쓰자면) 어용 작가들과 관료주의에 흥건히 젖은 이론가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흐름은 그 안에서 ‘예술’이란 것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안락한 물결 같은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이 거대하고도 도도한 흐름, 대학과 출판과 비엔날레 같은 체계 전반의 동원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조성되어지는 이 급류에 의해 점점 더 성형되어 질뿐인 하류의 돌맹이 같은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언젠가 곰브리치가 말했듯, 현대는 예술이란 식물을 키워내기에 적절한 토양이 아니다. 예술은 점점 더 그 의미를 왜곡시키려 다짐이라도 한 듯한 세계 안에서 위태로운 생존을 연명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를 빌자면 ‘예술 생산계’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현대로 올수록 예술생산이란 변별된 영역을 위한 최소한의 독립성조차 보장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소통의 황홀경’ 안에서 이끌기보다는 이끌려 가는 사람들의 부류로 재빠르게 밀려나고 있다. 그들은 영향을주기보다는 광고와 영화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부터 동일하게 영향받는다. 자신이 되려는 몰입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의지도 점점 더 이전처럼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지 못 한다.
역설적인 것은 이 희미해져가고 있는 가치들과는 상반되게 작품들은 점점 더 대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장기간과 더 많은 비용과 사람을 요구하는 것으로 되어가면서 점점 더 작가 혼자서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범주들을 넘어서고 있다. 작품생산이 점점 더 산업 생산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객들은 이전처럼 취향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취향을 대중매체에 위임하면서 인식의 파편화를 확인시켜 줄뿐이다. 그들은 그저 더 유명하고 알려진 것들을 품질로 간주하는 매체시대의 진실에 방치되면서 저널의 전략에 고스란히 넘어간다. 더구나 이젠 정보화의 시대다. 스스로를 네트웍에 노출시키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는 그런 시대. 소통은 더할 수 없이 활성화되었지만, 점점 더 한정된 네트웍에 가담해야만 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소통의 독점, 혹 독점적 소통이랄까, “어떻든 이제 쳐 박혀 있으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다!”
이같은 환경에선 스타급 작가, 거대한 상업갤러리, 그리고 유수한 미술관의 권위라는 색인표를 가진 식물들만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그리고 상황과 조건들은 이 몇몇 진정한 주체들에 의해 떡주무르듯 유연하게 조절될 수 있는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경매와 같은 미술시장 시스템은 이와 같은 질서들에 정당성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강화해 나가는데 최적의 조건들을 마련해 주고 있다.
Ⅱ
21세기의 벽두인 이 시점은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 이전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세기초만 해도 신진 작가들은 그들을 모르는 척 하는 권력과 시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이곤 했다. 자신들과 자신들의 예술에 하등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카데미로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호흡을 같이 할 동료들, 화상과 이론가들을 찾았고, 왕래했으며 때론 밤을 세워가며 토론했다. 그렇게 피사로나 모네 인상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얼마 후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와 그룹이 출범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이었다. 젊은 작가들은 전쟁 중에도 취리히의 한 카바레에서 다다를 시작함으로써 이전엔 일면식도 없었던 프랑스의 화가와 아일랜드의 시인이 만날 수 있는 장을 스스로 마련했다. 그런가하면 에른스트나 달리 같은 화가들은 그들에게 이론과 문장을 제공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앙드레 부르통과 만났다. 이들 초현실주의자 동료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선술집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연애를 실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을 만인 앞에 알리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 작가들은 더 이상 모이기를 즐기지 않는다. 때론 의미부여조차 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점점 더 모임을 즐기지 않도록-혹 못하도록- 사회적으로 학습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동료들과 자리를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각자 철저하게 단절되는 것을 (이전과는 다르게) 창작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작가들과 이론가들, 이론가들과 화상들이 하나의 예술을 위해 모이는 일은 오늘날 지극히 드문 현상이다.
그들은 이제 다른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기다린다. 그렇다고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수록 그들 모두는 자신들에게 덜 관대해져 가는 변화된 환경에 더 절망적으로 포위되어 갈 뿐이다. 예컨대 작가들은 점점 더 눈치를 살피다가 운 좋게 캐스팅되는 배우들을 닮아가고 있다. 물론 작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사 같은 이론의 영역은 자진해서 대학 안으로 움츠려들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술사가건 기획자건 이제 어떤 호출을 기다리는 일들이 부쩍 늘었다. (이들 중 소수는 기다리는 대신 먼저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앞서 활용한다) 이 모두가 이전엔 분명 그들 손에 있었던 뭔가가 빠르게 보다 상위의 권위로 이양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대략 되어 가는 현상은 이렇다. 어떤 거대하고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있고, 작가와 같은 개인적인 전문가들은 너무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면의 진실을 목격하거나 그것과 대립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 흐름을 개인적으로 수용해 적절하게 내면화하거나 그러지 않거나(그럴 수 없거나)를 그나마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대다수는 자의건 아니건 전자를 선택한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들은 점점 더 개인화, 파편화됨으로써 불리해져 가는 계약에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노동자들을 닮아가고 있다. 이렇게 예술은 그 안에서 그 다양한 양상들이 벌어질 뿐인 생존의 영역으로 유입되고 있다.
반면, 그 흐름은 훨씬 더 우월한 박수갈채와 지원 안에서 스스로를 더 생생한 것으로 만들고, 개인적인 전문가들을 압박한다. 따라서 생각이 있는 작가와 이론가, 미술사가들이 이같은 환경에 대응하는 적절한 방식들을 찾아낼 확률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포기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와 명분을 더욱 쇠약하게 하는 쪽으로 기여함으로써, 작가와 이론가들의 개인화(파편화)를 더 부추길 수 있다.
그럼에도 작가와 미술사가와 평론가들과 미술 행정가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있다. 적어도 개인의 꿈과 그 양식화들이 이미 사회화된 그것들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표현이 지니는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겐 서로 자리를 함께 하고 나누는 것이 여전히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거나 드러낼 난처한 도전들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한 응전을 논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의 의미 같은 것….
그리고 원한다면 현시대 미술흐름의 난폭성과 조악성에 관해, 그리고 거의 노골적으로 표류하는 한국미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만나 각자의 두터운 생각들을 교환하고 내면화된 것들을 교류하며,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너나할 것 없이 서로 동료를 공감해야 할 동일하고 절박한 조건들에 맞서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실험들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몸에 벤 ‘예술의 전통’이 지시하는 것들, 즉 그 주체, 범주, 기능에 대해 재삼 헤아려 보는 자각으로부터 자신과 만나고 그것을 현재의 시간들과 교차시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진정으로’ 타자를 향하고 단절을 넘어서는 실험들에 이르기까지.
《심스페이스》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온라인 상의 한 가능성이다. 작가들과 이론가들과 감상자들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장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만남과 소통을 실현할 적절한 도구들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심스페이스》가 스스로를 출발시켰고, 또 유지해야 할 유일한 비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유의미한 출발을 앞서 포장할 필요는 없다. 《심스페이스》의 비젼은 너무나 필요한 것이지만, 이와 상반되는 상황과 조건, 심리들의 장벽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즉 장애들 속에서 소통과 만남을 꾀한다는 점에서 《심스페이스》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의 수단이며 방법론이다. 더 많은 작가들이 그 필요성에 공감하고 동참할 때, 비로소 그 유익함이 입증될 수 있을 하나의 방법론!
그러므로 현재로선 《심스페이스》와 같은 시도들이 조금씩이나마 성공을 거둠으로써, 예술에 대한 우리의 숙의들이 지속되고, 그것이 더 확대될 순 없을지라도 더 깊어질 순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볼 뿐이다.
심상용(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