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의 철학 _ 아르놀트 하우저

III. 심리학적 방법에 관하여 _ ~ p97 발제 최윤호 20040601

1. 승화와 상징화

프로이드에 의하면, 예술가는 ‘승화능력’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방어 매커니즘’을 통해서, 비현실적인 요구들을 정신영역 안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전화시킨다. 예술가는 그로인해 허구의 세계에 갇히게 되며 노이로제를 앓는 사람들과 같이 현실세계와 차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가와 노이로제 환자들과의 차이점은, 예술가들은 유연성을 가지고 현실에 다가서거나 멀어지는 것을 제어할 수 있으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은 예술작품에서 실현된 성취에 대신 참여하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의 결과를 통해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누린다. 프로이드는 예술을 통해서 얻어지는 만족의 ‘보상적인 성격’에 관한 진술과 더불어 형식의 아름다움도 관심을 ‘유인하기 위한 프리미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은 예술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며 ‘삶에 대한 문제’가 바로 예술의 목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과거에 간과되었던 예술가의 창조적 충동 및 리비도 충동간의 여러 관계를 드러내주었다.
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 얼마나 의미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예술창작 행위를 해석하는 데에 유용하느냐와 같은 물음이다. 프로이드의 ‘승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심리적 전환’에 불과한데, 예술이 성취된 즉 ‘승화’된 형식에서는 처음의 충동이 전환되는 과정은 볼 수 없고 그 목적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공적인 승화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과 주변여건을 알아야 하며 그 승화란 것이 충동 자체의 소산인지 아니면 예술가의 역사적 혹은 사회적 조건들에 의존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때에 따라 달라지는 충동-예술 사이의 전환과정에서의 ‘차이를 만드는 원리’를 찾지 못하는 한 승화이론으로 예술비평을 시작하기는 어렵다.
프로이드는 그런 승화의 미비한 부분을 수긍했는데, 욕구의 리비도적인 성질이 그것이 승화된 형태 속에 그대로 존속한다는 것과 그러한 욕구의 ‘환상적인 만족’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한 부분이 그것이다. 프로이드는 최종적으로 ‘승화란 충동으로부터 쾌락을 추구하고 그 쾌락을 부여하는 성질을 박탈하지 않은 채 그것의 공격성을 벗기는 일’이라고 함으로써 보다 합당한 진술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이론들과의 일치를 이룩했다.

본능적 충동은 반작용 형성과 승화를 통해서 그것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데 반작용 형성이 억압을 전제한데 반해 승화는 반대로 그것을 해소한다. 여기서 승화와 상징화의 구분이 필요하다. 상징과 승화는 유사한 역학적 기능을 가지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승화란 심리적 과정이 진행되는 요소들의 단순한 변경 – 이런 구조적 변경은 예술비평과 관련하여 아무런 말도 안한다. – 을 의미하지만 상징은 그와 달리 프로이드의 꿈에 대한 해석에서 이용되는 ‘다원적 결정에 의한 이미지’와 같아서 풍부한 업적을 예술비평에 남겼다. 그런 다원적으로 결정체로서의 상징은 예술가나 관객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어니스트존스처럼 자발적,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발생된다고 전제한다면 예술창조의 과정을 ‘신비화’시키는 일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으로 의식되어지지 않을 수는 있으나 무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문화발달에 대한 정신분석적 개념은 여전히 레비브륄과 같은 낭만주의적 인류학에 의존한다. 즉, 비합리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근원적인 것이라고 보는 낭만주의적 입장 말이다. 그러나 상징적 형식에서 특징을 찾는다면 그것은 불투명성이나 애매함이 아니라 해석의 가변성에 있다. 성적 상징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예술이 무의식적인 본능적 충동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욕구의 표현인 한, 예술이 성적 이미지로 가득 찬 상징언어를 – 수직선이 남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등의 –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면적인 예술을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단조로우며 실제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에서, 우리는 예술이 언제나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가져오기 쉽다. 그러므로 역사적 성격규정이나 예술작품의 해석은 단순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적합과 부적합, 자명한가와 촛점이 흐린가, 주제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가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지는 것이라야 한다.

정신분석은 그러나 수확이 없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감수성을 꿰뚫어 보면서, 예술에 새로운 특징들을 불어넣어 윤택하게 했다. 어떤 예술의 전체를 나타낼 수는 없으나 그 의미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포괄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이런 모티브의 고찰을 단념할 수는 없다.

2. 낭만주의와 잃어버린 현실

반 정신분석적 비평가들은 예술가를 노이로제 환자와 같은 범주로 묶은 프로이드의 해석에 반대했다. 프로이드의 해석에 따르게 되면 삶의 파탄이 곧 예술 창조의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노이로제와 예술은 현실로부터 심리적으로 떨어져있다. 그러나 노이로제가 현실의 부정이 아닌 망각인데 비해 예술은 현실을 대체하길 원한다. 정신분석적 예술해석이 사실세계의 파괴와 같은 감수성에 우리의 관심을 관련시켜주었다면 우리는 먼저 이런 해석의 낭만주의적 한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프로이드의 예술인식은 성급한 일반화에 기초한다. 예술은 변화무쌍하며 그렇게 조리가 정연한 정신적 태도를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다양한 형식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의 예술의 목적과 경향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가 진술한 의미에서의 예술가 개인의 요구와 사회 집단적 요망의 불일치는 바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졌다. 낭만주의 시대 이전의 예술은 삶과 교환하여 얻은 대용물로서의 의미가 아니었다. 낭만주의 이전 예술창작의 선행조건으로 삶의 상실을 드는 것은 그래서 들어맞지 않는다.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현실의 거부는 예술 창조에 동반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공적 예술 창작에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즉, 예술은 삶의 보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복사가 아닌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것은 삶의 향유라는 차원과 양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표현이지 소유가 아니며, 말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낭만주의 예술가는 그가 살고 싶었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낙오자였다.

정신분석적 예술이론에 내재되어있는 낭만주의적 성격은 예술적 창조성에서의 비합리적이고 직관적인 요소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낭만주의와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예술적 천재를 정의함에 있어서도 영감을 기교와 취미로 대체시켜버린다. 윌리엄모리스는 “영감에 대한 그 따위 이야기들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장인의 손재주에 불과하다.”라며 낭만주의 이전의 가치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예술가가 정신적인 선각자의 노릇을 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다. 과학과 결합한 예술은 지위를 획득하고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애매한 천재의 지위로 만들어 일반인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노이로제와 같은 낭만주의적 정신체질은 정신사적 맥락에서 보면 예술이 사회적 역할을 상실했을 때 두드러졌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에 걸쳐 드러나는 낭만주의적 기질은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도전자로서 보이고자 했던 -그러나 희생양에 불과했던 – 것에 불과하며 끊임없는 경쟁으로부터 야기된 초조함의 소산이며 물질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불안의 결과이다. 정신분석은 개인의 삶과 작품이, 그의 사생활과 공적인 기능이 따로따로 떨어진 두 영역으로 분리되어버린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3. 대용만족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언제나 삶의 교정이며 우리의 현존이 안고 있는 결함에 대한 보상을 표현하는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예술은 삶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수단을 지니고 있다. 예술의 효과는 운명의 압도적인 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괴로움을 충분히 지각 가능하게 만드는 점에서 단순한 마취적 효과와는 차이가 있다.

예술을 승화, 상징화, 대리만족의 수단으로 보는 정신분석적 설명은 하나의 본질적 특징을 공유하는데 바로 ‘예술체험의 역동성’이 그것이다.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세계와 끊임없는 불화관계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변화하는 ‘자아’에 대한 발견은 프로이드가 거둔 가장 큰 결실이다.
정신생활이 발생하는 것은 충동이 어떠한 저항, 즉 억압하는 힘의 저항에 부딪혔을 때이다. 정신에 있어 의식과 무의식은 항상 대립하는데, 충동을 억압하여 무의식 속에 잠겨두거나 밝은 의식으로 올려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억압은 더할 나위 없이 동적인 개념이다.

정신활동을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닌 감추어진 공격 . 방어적 책략으로 이해하는 노출심리학에 예술비평이 얼마나 힘입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정신분석이 예술이해에 근본적인 공헌을 한 점은, 예술작품의 근원이 리비도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등의 생물학적 정의에 있다기보다는, 예술 창작을 합리화시킨 데에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예술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흠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정신분석의 사고방식이 충분히 역동적이지 못했던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보다 융통성 있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면 예술의 독특한 형식과 가변성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며 훨씬 포괄적이고도 덜 독단적인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심리주의와 정신적 구조물의 자율성

정신분석학 이전의 심리학이 대체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차용하여 인간 정신을 비인격화시킨 것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어느 정도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적 체질을 생물학의 유일, 불가변적 표현으로 파악했다. 그것에 의하면 과거에 우연적으로 취급되던 비합리성, 불규칙성, 강박행동, 공포마저도 순전히 정신적으로 결정된 현상이다. 프로이드 학설의 의의는 이처럼 교육되어질 수 있는 최초의 심리학 이론이라는 데에 있다.

예술비평에 대해 정신분석이 갖고 있는 방법적인 특징은 으뜸간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형식적인 구조를 통해 표현되는 예술의 해석에 얼마나 올바르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이다.
정신은 작품의 생성을 가능하게는 하지만 작품을 이루고 있는 재료 자체는 아니다. 어떤 감정적 동기가 예술적 의미를 얻는 것은 그 동기가 들어가 있는 ‘작품의 전후관계’에 힘입은 것이지, 그 동기를 담고 있는 ‘체험의 전후관계’에 있지 않다. 우리가 ‘작품의 기원’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멀리 그것의 ‘예술적 의미’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작품을 작가의 전기에 지나치게 연관시키는 것은 심리학의 남용이다.

프로이드는 “작가의 창조력은 반드시 그의 의지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며, 작품은 때때로 작가와 맞서서 그와 독립된 낮선 존재가 되기도 한다.”라고 밝혔는데, 여기서 우리는 예술 창작과정에 비심리적인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의 모든 특징은 두가지 방식으로 결정된다. 첫째는, 그것이 겨냥하는 효과에 의해서이며 둘째는, 그것의 근원적 체험에 의해서이다. 예술작품은 여러 동기가 작용하는 다원적 결정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예술작품은 예술가를 제외한 채 예술비평이나 예술사로서 설명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그 예술작품이 생성되는 상황과 연관되지 않는 한 설명이 불가능한 것도 있다. 그럼 면에서 정신분석학은 정신의 의식적인 과정과 무의식적인 과정의 연관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추구하는 주관적인 태도에 대한 이론이지 객관적인 연관들을 밝힌 학설은 아니다. 그것이 설명하는 것은 정신의 매커니즘이다.

5. 정신분석, 사회학, 역사

정신분석의 관점은 반역사적이다. 프로이드는 사회학과 역사학을 심리학의 하위로 종속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 분석에 있어서 사회학적, 역사학적 개념을 흐려버렸다.
그가 정신분석이 유기적인 생물학적 사실 위에 세워진 체계라고 한 점은 타당하다. 그러나 애초의 ‘충동’이 ‘비본능적인 동기’에 의해 감시받고 억제되는 그런 정신구조에 ‘본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했던 것은, 정신분석에 따른 오류의 근원이기도 하다. 실지로 본능은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했다.

사회학은 심리학 보다 더 우위에 있다……

프로이트는 집단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개인만이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잊은 것이다…

정신분석적 개념이 갖고 있는 비역사적인 성격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출처가 자연과학에 있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정신분석과 관련한 사고 전체를 시간적인 범주보다는 공간적인 범주에 한정하여 ‘계량화’했다.

양적 평가는 정신의 표명에 적합하지 않다. 그가 예술향수와 위트의 효과를 에너지절약으로 설명하려 했을 때, 사실 그는 낡은 전(前)분석적 심리학의 기계론적 견해로 복귀한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그의 사고의 혁명적 영향력이 가장 적게 느껴지는 부분중 하나이다.

* Author / Gathered from : ?예술사의_철학 (아르놀트 하우저)의 부분을 SSALL이 요약

미국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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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브룩에서 유학중인 후배 정지원의 졸업작품인 Ballistic vase라는 작업.
911사건을 비롯한 폭력과 전쟁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이 작업은 젤라틴 재질의 덩어리에 직접 탄환을 관통시킴으로써 신체의 파열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을 투명한 신체대응재질의 파열을 통해 직접적인 시각 이미지로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이 작업은 꽃병이라는 다소 ‘아름다운’ 용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능은 인체의 탄환에 대한 관통 저항력과 유사한 젤라틴에 만들어진 ‘관통공’에 의해서 완성된다. 꽃병에 꽃을 꼽는 관람자/이용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극히 끔찍한 살상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수도 있다.

일상에서 경험한 충격에 대한 표현의 노력은 또하나의 충격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작업자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느정도 수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작업을 통해서 나는 또하나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은 ‘폭력의 일상화’였다.

작업한 정지원씨의 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작품사진입니다. 주제는 {Ballistic vase}
오른쪽에 보이는 노란색 은 Ballistic gelatin (탄도젤라틴)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화병입니다. FBI나 test Lab에서는 같은 물질로 블럭을 만들어 총을 쏘아보아 총알의 성능을 조사합니다. 특별히 이 재료가 쓰여지는 이유는 10%의 ballistic gelatin은 인간 체조직과 매우 비슷한 물질적 성격 을 가지고있기때문입니다. (Ballistic gelatin is designed to simulate living soft tissue… and the direct relation of gelatin test results to effectiveness of firearms against humans ../ Report:Ballistic Gelatin / Applied research Laboratory_Penn state university)
그간 저는 상징적 요소(사회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제품디자인에 대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특히, 총은 그간의 9.11 terror를 비롯한 각종 지역분쟁과 테러로 민감해진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폭력, 전쟁]의 의미를 담은 아이콘으로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총과 관련된 작업으로서 졸업 작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화병은 실제 총으로 쏘아져 만들어졌습니다. 총알이 지나가면서 만든 터널은 꽃을 꽂을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그 엄청난 폭발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주변의 상처나 튕겨나간 파편들은 (끔찍하나) 아름답게도 장식적인 요소가 됩니다.

옆에 있는 초록색의 화병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Gelatin이 천연재료인 이유로 방부제를 넣었다 하더라도 건조로 인해 오랫동안 간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볼수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 젤라틴과 비슷한 강도를 갖고 있는 실리콘으로 화병을 만들었습니다.

오는 여름에 덕원 갤러리에서 크랜브룩 졸업생들의 전시회가 있습니다.
부디 관심과 방문을 🙂

파란갱이?

나 스스로, 날이 갈수록 파란색에 대한 선입견이 높아져서 걱정이다. 이러다 나이를 먹으면, 누굴 보고 파란갱이.. 파란갱이…. 그러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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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소장.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 ⓒ2004 네이버 백과사전

선관위에서 프리챌의 노란색을 열린우리당의 상징색과 같다는 이유로 경고조치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보통 승용차는 모두 자민련 차량이고, SK텔레콤은 한나라당인가..?

각 정당에서 색을 이용하는 것을 먼 산 보듯 바라보다가, 불쑥 노란색에 대한 트집을 잡는 일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선거운동에 어떤 이미지를 도입하느냐, 마느냐는 논란거리임에 틀림없지만, 선관위에서는 사전에 일관적인 기준을 마련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요즘의 선관위는 기준 없이 왔다 갔다 하는 통에 그 의도를 파악하기도 힘이 든다.

현대사회에서 광고의 효과는 실로 막대하며, 미디어수단이 발달할수록 광고방법은 더욱 더 직관적, 선정적으로 변해간다. 광고시장에서는 그에 맞춰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규칙이란 것이 있다. 상표와 의장에 관련된 법률도 그중의 하나이다. 법률은 기업들이 자신의 기업이미지나 상품에 대한 아이덴티티 작업에 투자한 노력을 지키기 위해서 일정한 규칙을 적용한다. 그러나 치열한 기업들의 광고시장에도 색에 대한 원초적인 규제는 없다. 색의 분류란 것은 그 소유권이 어디에 있다고 가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용되는 과정에서의 도안(디자인)작업을 통해서 그 권리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선관위가 말한 진노란색 위주로 사이트를 구성한 것‘에 대한 규제는 잘못된 것이며, 잘못되다 못해 바보스럽다. 혼란한 상황에 대해서 일정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명확하고도 수긍할 수 있는 기준이 먼저 만들어졌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번의 선거를 통해서 어떤 색에 대한 우리나라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이 왜곡될 것 같아 안타깝다. 색채에 대한 선입견은 한 나라의 시각문화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얼마간 논란거리였던 ‘살색과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가 색 하나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이야기했던 것 처럼,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빨강색을 쓰는데 자유스럽지 않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태극기의 빨강과 파랑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나이가 먹어서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 거기에 더해 주황색까지 선거전에 모두 뛰어든 지금의 현실은, 정책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부실한 정치권의 단면을 보여준다. 디자이너로서, 요즘의 정치권에서 색깔론, 색깔론 하며 색 운운하는 것은 그래서 더 짜증난다.

색 장난 좀 그만 치자.

조금은 읽기 편한 신문

Financial TImes
Financial TImes

영국문화원에서 아침에 공짜로 나눠주는 신문 “파이낸셜 타임즈”
당연하게도, 내용이 순 영어인데다가 엄청 지루한 경제뉴스들이 대부분이라 그림의 공짜? 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공짜신문을 무심결에 집어들었는데, 놀라운 생활의 발견..
신문에 쓰인 사진의 느낌이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느낌이 틀렸는데 이건 중요한 건 아니고, 이상하게도 좌우마진이 상당히 두꺼워서,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그 해답은 바로 신문을 쥐고있는 내 손에 있었는데 위의 사진을 보면 알아차릴 수 있을것이다. 그 후 집에 오면서 우리말 신문을 한장 사서 비교를 해봤더니, 무심결에 엄지손가락을 올리면서 위태롭게 신문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신문이 외국엔 많은지 모르겠지만, 내심 놀라고야 말았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섬세함에 찬사를 보내며..
특허같은 것이 없다면 우리나라의 신문들도 이렇게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봄. 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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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광화문을 오가는 아침형 인간 쌀.
겨울동안 주체할 수 없을만큼 불어난 몸을 어떻게건 가볍게 만들어보려는 시도로,
12월을 마지막으로 창고에 모셔뒀던 자전거를 꺼내어 시험운행을 시작했다.

첫날, 신설동 로터리에서 바퀴살이 하나 빠지는 대형사고 발생. 택시비 5000원 + 수리비 5000원 날리다.

둘쨋날(오늘), 조금 더 진전된,,, 숭인동 지하철공사장 부근에서 어이없게도 페달 축 부러지는 사고 발생. 택시비 3500원 + 수리비 15000원 날리다.

총 25000원… -_- 중고 자전거 하나 사도 될듯..

출혈이 컸지만, 자전거 타고 맞는 햇볕은 기가 막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