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o: 브랜드라는 꼬리표를 단 새로운 세계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원제 <No Logo>, 나오미 클라인 지음, 2000년 초판 발행)>의 1장을 요약한 메모.

지난 15년간(85’~90s) 다국적기업들이 쌓아올린 부와 문화적 영향력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1980년대, 경기 후퇴기(70’~80’) 이후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 경영학자들: 제품보다 브랜드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
  • 오랫동안 제조업은 산업경제의 핵심. 제조업체들은 모두 제품 생산에 주력할 시기 “…… 구매력은 공장과 땅 밑에서 나온다(1938년 포춘).”
  • 기업들이 몸집을 불려오다 과고용을 감당 못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여론 대두.
  • 그런데 MS, Tommy Hilfiger, Intel 등은 이 때 제품 생산이 ‘지엽적’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내놓았고, 마케팅은 중요 실무, 생산은 하청에 맡기는 방식을 취했다. 강력한 이미지를 만드는 업체가 승리하는 시기가 되다.

90년대의 재계 합병 바람은 이상한 현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합병은 업체의 외형을 확대하면서 제조업 부문의 매각을 가속화하는 작업이었다. 유명한 제조업체들은 이제 제품을 구매하고 거기에 상품을 붙인다. 1부에서는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집착하는 기업이 공, 사적 공간에서 벌이는 치열한 전쟁에 대해 살펴본다.

브랜드 탄생 비화

대규모 마케팅 활동은 19세기 후반에 처음 시작되었다. 브랜드를 부각시킨 첫 번째 제품은 발명 자체를 활용한 광고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 기술적으로 ‘공장’이 탄생하고 대량생산이 처음 구현된 시기다. 같은 물건들이 시장에 넘치니 차별화된 “브랜딩 작업은 기계시대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 때의 광고와 브랜딩은 딱딱한 과학적 설명에 가까웠다.

1920년대, 브루스 바터는 제너럴 모터스를 ‘개인적이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미국 가정을 상징하는 존재로 탈바꿈시켰다. 1940년대, 브랜드는 제품 라벨 수준에서 벗어나 총체적 브랜드 아이덴티티나 ‘기업의식’을 가지는 수준이 되었고 제품 자체의 속성에서 벗어나 인간 생활에서의 문화적 의미 등을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생산에 대한 집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1988년, 필립모리스가 크래프트사를 126억 달러에 매입하면서 브랜드 가치에 대한 열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가격은 크래프트사의 장부상 가치의 6배에 달했는데, 달리 말해 6배의 브랜드 가치가 실제로 평가된 것. 이후 상표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브랜드 사망 선고 : 지나치게 과장됐던 루머

브랜드 가치에 대한 열광은 9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런데 1993년 4월 2일, ‘말보로 금요일’이라 불리는 이 날에 필립모리스는 값싼 경쟁 브랜드들의 시장 잠식에 맞서서 담배값을 20퍼센트나 인하했다.  전문가들은 브랜드가 죽었다고 공언했고 월가와 기업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소비자들에게는 유명 상표 외면 현상이 나타났다. 가격에 눈을 돌린 소비자들을 상대할 저가 제품들이 범람했다.

1990년대 초의 말보로 금요일 이후 광고비는 감소했고 대신 기업들은 판촉 활동에 열을 올렸다. 브랜드의 전성기는 끝나는 듯 했다. 그런데 어째서 타이드나 말보로 브랜드의 부고를 접한 우리가 토미 힐피거나 나이키, 캘빈 클라인을 선전하는 대대적인 지원군을 다시 맞이하게 된 걸까? 그 복귀를 가능케 한 건 누군가?

브랜드의 귀환

타이드나 말보로와는 다르게, 나이키, 애플, 바디샵 등의 성공 기업들은 브랜딩 작업을 총체적이고도 완벽하게 실행해왔다.  이들은 브랜딩이라는 개념을 진정한 기업 조직으로 통합시켰다. 뼛속까지 브랜딩이 되어 있었다. 말보로 금요일 이후 이런 90년대식 마케팅과 소비자 주권 주의 둘은 동시에 발전하게 된다.

마케팅 비용은 공통적으로 증가했다. 나이키는 스타 운동선수와 결합해 사이비 과학을 선전했고, 베네통과 캘빈클라인은 외설, 혹은 진보정치와 결합된 라이프스타일 마케팅을 실행했다. 앱솔루트 보드카는 더욱 추상적인 방법으로 일명 ‘문화 스펀지’처럼 그들의 브랜드를 재창조했다.  GM은 소비자를 초대해 공장에서의 저녁식사를 주선했고 MS와 애플은 인간과 기계의 새로운 관계를 상품으로 팔았다. 갭, 이케아, 바디샵, 스타벅스 등도 단순한 광고가 아닌 복합적으로 소비자와의 관계를 끌어내는 마케팅 기법을 활용해서 완벽한 브랜드를 창조했고 그걸 팔았다.

이쯤 되자 제품 생산자가 아닌 ‘의미 중개자’임을 자각하고 내세우는 전혀 새로운 기업들이 등장해서 브랜드를 외치며 마케팅 르네상스를 촉구했다. 나이키와 같은 회사는 파는 대상이 제품이 아니라고 공언했고,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기업, 온라인 브랜드가 등장하자 이런 개념은 훨씬 더 설득력을 얻는 단계로 발전했다. 회사들은 제품을 생산하지 않고 덩어리째 납품만 받으며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재계가 일용품 시장이라는 제단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제 기업들은 오로지 미디어라는 우상만 숭배한다. 톰 피터스의 말대로 “브랜드 브랜드 브랜드!!!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 이것이 핵심이다.”

인디아나폴리스 뜬 섬 – 미국 [퍼온 글]

<멋마련 곰팡이 배양기>의 허락을 얻어 올리는 글입니다. [원문 출처]

뜬 섬 *Photos by Jessica Dunn and Michael Runge

인디아나폴리스 섬은 안드레아 지텔이 만든 작품이며 이번 여름에 미대 학생 제시카 던과 마이클 런쥐가 살 곳이다. 인디아나폴리스 미술관의 100에이커 미술과 자연 공원 행사 때문에 만든 8개 작품 중 하나다. 지름 6미터, 인디아나폴리스 섬은 유리섬유와 발포플라스틱으로 만들었고 사람이 임시로 기거하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앞으로 여름을 4번 지나는 동안, 지역 미대 학생 1명 혹은 2명이 이 섬에서 살아 볼 예정이다. 자기가 필요한 대로 지텔과 함께 이 섬의 구조를 조정하고 바꾸었다. 인디아나폴리스 뜬 섬 – 미국 [퍼온 글] 더보기

투명한 의자 디자인, 허먼 밀러 회사 _ Herman Miller Company

글 : 2010년 4월 5일, 라이언 아담스Ryan A. Adams _ 텍사스 대학교 디자인사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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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40년대, 디프리D.J. Defree와 그의 장인 허먼 밀러Herman Miller는 허먼 밀러 회사Herman Miller Company를 키워냈다. 이 둘은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잘 나가던 당대의 가구 디자이너들을 고용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최신의 모더니즘 디자인을 통해 가정과 사무용 가구들, 그리고 작업 공간의 격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허먼 밀러 회사에서 일했던 디자이너들 가운데 가장 유력했던 인물로 조지 넬슨George Nelson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디프리에 의해 허먼 밀러 회사의 디자인 디렉터로 선임되어 회사의 초창기 디자인을 이끌었다. 넬슨은 흔히 그의 디자인 방법론과 관련하여 모험가로 불리며, 어떤 이들은 그가 디자인을 재정립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일 대학교Yale Univ.와 로마에서 건축을 배우긴 했지만 그가 가장 성공한 분야는 글 쓰기와 가구 디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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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도시들, ‘거대 광역 도시’를 형성 _ 국제연합UN 리포트

홍콩, 선전, 광저우가 연결되어 형성된 세계 최초의 메가시티mega-city 모습, 총 인구는 1억 2천만이다. * 사진: NASA

글 : 영국 <가디언>지 2010.3.22일자 기사  _ 환경 전문 에디터 존 바이달John Vidal

전 세계의 대형 도시들이 거대한 ‘거대 광역mega-regions’을 형성하기 위해 통합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도시는 국경을 가로질러 수 백 킬로미터나 확장되는 동시에 1억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게 될 것이라고 국제연합UN의 리포트가 전했다. 세계 최대의 도시들, ‘거대 광역 도시’를 형성 _ 국제연합UN 리포트 더보기

‘총균쇠’ 요약문_18. 남북아메리카가 유라시아보다 낙후된 원인

정복의 궁극적 요인인 식량 생산과 가축화ㆍ작물화의 상관성 : 1492년 당시 유라시아에는 가축화된 13종의 대형 포유류가 있었지만 남북아메리카에서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는 단 1종(라마)이었다. 작물화에서는 동물성 먹거리의 생산만큼 불균형이 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북아메리카는 유라시아에 비해 수렵 채집민이 차지한 지역이 훨씬 더 넓었다. 아메리카에는 가축화ㆍ작물화할 만한 야생 동식물이 없었고 지리적 생태적 장애물로 인해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작물화된 식물이나 가축화된 소수의 동물들이 도입될 수도 없었다. ‘총균쇠’ 요약문_18. 남북아메리카가 유라시아보다 낙후된 원인 더보기

Modernism, 형태와 기능을 둘러싼 이야기들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웨인라이트(Wainwright) 빌딩, 미국 세인트루이스, 1891.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이미지 by whitewall buick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웨인라이트(Wainwright) 빌딩, 미국 세인트루이스, 1891.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이미지 by whitewall buick

* 타 프로젝트에 사용된 자료를 재구성하였습니다.

형태와 기능(form and function)에 대한 고민은 모던 디자인 운동에서 빠지지 않는 화두였다. 더욱 정확히 하자면, 20세기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 오늘날의 현대적 풍광과 생활환경의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모던디자인운동의 초기,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이념과 맞닿은 질문이었다. 20세기는 모더니즘, 혹은 모던디자인운동이 지배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그 모더니즘만으로 설명하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오늘날의 디자인이다. 실제로 요즘의 시장에서 팔려나가는 소비재들 가운데 기능 이외의 다른 특별함으로 성공하는 경우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고, 소비자의 요구 또한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서 일련의 해석 과정을 필요로 한다.

모더니즘 디자인 논의에 자주 등장하는 두 개념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루스가 1908년에 주장한 “장식은 범죄(ornament is a crime)”라는 개념, 그리고 미국의 조각가인 호레이쇼 그리너에 의해 처음 논의되고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1896년에 주장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ever follows function)”는 개념이 바로 그것. 기능이 없는 장식이 지닌 무의미함을 비판함과 동시에 기능성에 근거한 조형을 강조하는 이 두 가지 개념은 – 예컨대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건물의 장식은 건축주나 입주자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거리를 지나는 행인은 장식을 통해 그 건물을 다른 건물과 구별할 수도 있는 등의 – 이견이 없지 않았음에도 기능주의의 원리로 정착되어 이후의 20세기 모던디자인 경향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철 골조로 디자인된 마천루건축을 처음 확립한 인물이었고,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루이스 설리번. 그는 19세기 말엽부터 미국에서 고층빌딩의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던 인물이다. 당시의 미국은 엘리베이터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 철과 같은 신소재의 대량생산, 새로운 취향에 대한 요구, 강성해진 경제력 등이 한꺼번에 융합되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도시는 보다 대규모의 건축물을 필요로 했다. 건축가였던 그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형태가 관습을 따라(form follows precedent)” 과거의 경향을 답습하던 당시의 건축에 반대하고, 목적에 근거한 건축디자인, 즉 건물의 사용목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더도 덜도 없는 기능적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가 디자인한 웨인라이트 빌딩은 완전한 모더니즘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장식적 문양을 차용하는 등 절충적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합목적적 디자인’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이후 설리번의 합목적적 디자인상은 제자였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비롯한 수많은 건축가, 디자이너들에 의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계승되었다. 예컨대 1950년대에 자동차나 기관차와 같은 운송수단의 디자인에 폭넓게 유행한 유선형(streamlining) 스타일에서도 공기역학적인 합목적성을 추구한 기능주의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시점을 현재로 옮겨보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된 합목적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의 주장이 되어버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선언 대신 “형태는 재미를 따른다(form follows fun)”거나 “형태는 감성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는 주장들, 혹은 “형태는 욕망을 따른다(form follows desire)”는 다소 비판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 속에서 디자인의 의미를 이야기할 때마다 이 명제는 거듭 변형되고 있다. 달리 말해 이러한 현상은 모더니즘 이후의 디자인에서 어떤 ‘가치’들이 기능을 대신해 중요시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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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icy Salif, 레몬 스퀴저, 필립 스탁 디자인, 알레시 제작, 1990. *출처: 플리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이미지 by Just Bru

형태가 기능을 따르지 않는 경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필립 스탁의 ‘주시 살리프(Juicy Salif)’를 꼽을 수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즙 짜개’라는 엄연한 기능을 갖고 있는 주시 살리프. 알레시가 1990년부터 제조하기 시작한 베스트셀러 주시 살리프는 우리나라의 백화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주시 살리프는 그 불합리성 때문에 더 유명해졌고 역으로 이러한 엉뚱함이 판매를 지속시키는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영국의 디자인학자 가이 줄리어(Guy Julier)가 다소 비꼬아 기술한 주시 살리프에 대한 해석은 그 불합리성을 잘 설명해준다.

가냘픈 세 다리는 섬세한 발목 위로 뻗어 올라간다. 이상하리만치 높은 무릎에서 꺾인 곡선은 세로로 홈이 파인, 중앙의 눈물 방울처럼 생긴 덩어리와 맞닿는다. 항공공학적인 형상을 지닌 거미 모양의 받침은 그것을 감탄의 시선이 향할 천상의 위치에 올려놓는다. 최상의 ‘외관’을 갖도록 완벽하게 만들어진 이 삼각대는 이 도구의 알뿌리 같고도 남성숭배적인 머리의 노골적인 모습을 하늘 위로 떠받들고 있다. 사용하려면 기술과 힘 모두 필요하다. 누군가 과일을 쥐고 비틀고 누르기를 반복할 때면 이 레몬스퀴저의 받침은 약간 기우뚱거린다. 레몬은 아래로 부서져 내리고, 손은 힘으로 쥐어짠 후 남겨진 찌꺼기로 범벅이 된다. 머리를 장식하는 홈들을 따라 흘러내린 과즙은 아래의 뾰족한 부분으로 천천히 흘러 모여든다. 그 후엔 반짝이는 흘러내림, 그리고 배설의 만족스러움이 깃든 소리와 함께 아래의 그릇으로 떨어진다.

가이 줄리어는 주시 살리프의 기능적 불완전함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금속(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이 도구는 실제 사용에 있어서 특징적인 형태로 인해 사용자에게 과도한 집중을 요구한다. 또한 개방된 구조나 강산성인 레몬과 화학적으로 반응하는 재질 때문에 비위생적이기도 해서 부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물건이다. 그렇지만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알레시가 꾸준히 주시 살리프를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아닌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담긴 독특한 상징성 때문이다. 가이 줄리어의 말대로 주시 살리프는 “성 도착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디자이너인 필립 스탁 스스로 주시 살리프의 “또 다른 기능”이라고 이야기한 ‘스타가 디자인한 물건 써보기’ 정도의 의미를 떠올릴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재미 삼아 사용해보려고 이 물건을 구입할 것이다. 변형된 설리번의 명제들로 이 제품을 설명하자면, 주시 살리프는 “형태가 욕망을 따른” 경우이거나 “형태가 재미를 따라” 디자인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가이 줄리어는 비판적인 시각이긴 해도 이러한 주시 살리프의 다양한 ‘변태적 의미들’ 자체가 이 제품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듯 하다.

이미 형태와 기능을 고민하는 디자인은 ‘공식적’으로 폐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