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국민대논문 조각글들 모음

110. 연구목적과 방법

이 연구는 현재의 특정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에서 드러나는 대안성을 디자인사의 흐름 위에서 고찰하는 작업이다. 어떤 방식이 대안(代案) 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대신하여 변화하였다는 의미와 같다.
2000년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디자이너스브랜드와 같은 디자이너의 독립적 사업들이 출현했고, 영국, 일본 등의 해외에서는 특정한 디자이너그룹에 의해서, 과거와는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디자인전시행사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예로 든 이러한 각각의 활동들은, 디자인 외부에 의해서 통합적으로 시작되거나 관리되지 않았고, 경계 를 인정하지 않고 뒤섞이는 등, 전반적으로 과거의 통념과 거리를 두는 편이어서, 혁신을 원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흥미로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그 다양성만큼이나 산만한 모습들로 인하여 과연 이것이 일정한 비교의 대상으로 묶여질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전체를 흐르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디자인 생산, 유통과정에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이 디자인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작업은, 현재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에서 발견되는 대안성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특히 1930년대를 전후하여, 영향력 있는 유통방식으로서 디자인사에 등장하는 디자인컨설턴시, 고용디자인 등의 방식들은, 오래된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상존하는 비교대상이다. 이 논문은 크게 디자인 개념이 등장한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주된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을 다루는 부분과 대안으로서 새로이 등장한 현재의 방식을 알아보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디자인사를 다루는 여러 문헌자료들을 찾아보는 일, 특히 디자인컨설턴시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살피는 일이 과거의 상황을 살펴보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디자인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쓰여졌던 방법은, 능력 있는 개인에 집중하거나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물의 외형적 흐름을 읽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들이 담고 있는 디자이너의 눈부신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영웅들의 이야기는 현재의 디자이너들에게 설득력 있는 과거의 경험이기보다는 무용담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자는 시대의 사회상과 디자인이 가진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변화의 원인을 찾는 에이드리언 포티의 디자인 연구방법을 택했으며 , 사고의 기준을 그에 맞추려 노력했다. 이런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된 사물의 형태나 색채가 아니라 그 주변의 상세한 상황들이다.
논문에서 대안적이라고 언급되는 현재의 활동들은, 주도적으로 이뤄지는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들에 비하여 명확히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가 대안적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이 앞으로 성공할 방식임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정작 연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점을 읽는 보다 지혜로운 눈을 가지는 일이다. 새로이 등장한 대안이라는 것 또한 영원히 지켜질 무엇이기보다는, 언젠가는 또 다른 대안에 의해 사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2. 산업 디자인

1. 1750, 산업 디자인의 시작
2. 산업 디자인의 생산(디자이너)과 유통(제품)

200. 산업 디자인

영국의 산업혁명과 기계화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인 반면에, 디자인을 단순히 제품 생산에 있어 필요한 종속적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기계화가 대량생산체계를 확립하던 때에, 그것을 좀 더 잘 팔리도록 형상화하기 위해서 디자인이 시작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바로 그것인데, 대량생산과 유통의 방식이 확립된 시점인 산업혁명기나 1920년대의 미국을 본격적인 디자인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그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런 종류의 견해에 대하여, 영국의 디자인이론가 에이드리언 포티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일군의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나타났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주장하든지 그들을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이몬드 로위나 헨리 드뤼피스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이 어떤 산업분야에서는 이미 한 세기 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가 주목했던 점은 산업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확실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시점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다, 사회적 취향과 제조기술의 융합 을 이끌어내는 과정으로서의 산업 디자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점이었고, 그 기준에 의하면 두 시기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실제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8세기 영국의 웨지우드(Wedgwood) 나 매슈볼턴(Matthew Boulton) 의 회사에서는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이 제작 과정에서 분리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를 통해 생산, 소비 양측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이후의 컨설턴트 디자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디자인의 등장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결과물인 제품이나 디자이너의 성공여부에 집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핵심이, 생산공정 상에서 ‘복잡한 사회적 요소의 합성’ 인 디자인 작업이 분리된 것이며, 그러한 생산방식의 변화요인은 디자이너의 품성이나 제품 등의 결과물보다도 당시의 사회시스템에 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10. 디자인의 분리

211-0. 중세유럽의 생산

16세기 초반에 유럽의 교역량이 전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뉘렌베르크나 피렌체 등의 신흥도시들에는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 그리고 성직자들을 위한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대형공방들이 생겨났다. 이런 공방들에서는 물건들을 제작할 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공적 방법을 사용했던 반면에, 전문성은 과거에 비해 한층 높아진 상태였고, 단일한 물품들을 반복적으로 복제해냈다. 존 헤스켓(John Heskett) 에 의하면, 이 시기의 예술가와 기술자의 구분은 훈련에 의해 성취 가능한 기술적 능력에 따라 행해지는 유동적 구분이었다. 한편으로, 교역의 증가에 따라 생산양도 늘어났는데, 이에 발맞춰 물품의 외형을 보다 돋보이게 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져서 생산과정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패턴북 은 이런 요구를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응용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가구나 직물 등의 산업 전반에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고, 출판술의 발달로 인해 광범위한 영역으로 보급되었다. 결과적으로 패턴북의 사용으로 인해, 생산과정에서 장식작업에 들여야 할 직공들의 노력이 감소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될 수 있었다. 이런 패턴북이,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에 속해있던 숙련공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고, 구분된 집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제작된 것은, 디자인이 생산과정에서 분리됨으로써 비로소 구분된다는 특성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다.
국가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의 유럽은 정치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의 측면에서 근대적인 발전이 두드러지지만 과거의 봉건적 요소나 세력이 남아있는 시기였다. 이런 절대왕정국가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행정, 사법, 군사의 측면에서 중앙집권이 달성되었다. 한편으로, 국제무역이 성행하던 16세기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에 입각한 자본주의가 도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절대왕정의 핵심이었던 관료제적 중앙집권과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왜냐하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국가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상업의 중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16세기의 급격한 호황에 뒤이어 17세기의 유럽 전반은 암흑의 세기(Black Century)로 불릴 정도로 상대적인 침체를 맞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17세기는 팽창의 시기였으며 유럽 경제의 중심은 이전의 지중해로부터 북서유럽으로 이동하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그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해 궁정예술가들과 장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왕실은 다수의 공장들을 세우고 부속 학교까지 세웠는데, 1667년에 파리의 고블랭(Gobelins)에 세워진 공장의 경우 수백 명의 장인들이 일할 정도였다. 당시의 중, 서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고, 다른 중, 소 군주국들에도 프랑스식의 궁정스타일과 중상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각국의 예술, 장인 지원체계 또한 왕실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생산되는 물품을 군주들이 통제했다. 한편으로, 당시의 유럽 도자기들은 전반적으로 그 질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각국의 왕실들이 도자기공방을 세우는데 영향을 주었다. 북부 독일의 작센(Sachsen, Saxony) 지방에는 1709년에 메상(Meissen)공방이 설립되었다. 초기에 이 공방에서 만들어지던 물품들은 궁정예술가들에 의해서 장식되었으나 1720년대 중반에는 미술학교를 통해 배출된 조각가들이 고용되어 모델링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주된 디자인 소스였던 패턴북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의 물품들은 주로 왕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이 물품의 생산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물품의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는 왕실재정악화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시민계급(bourgeoisie)의 급격한 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18세기 중반, 세력이 커진 시민계급과 중산층에 걸쳐 차와 커피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도자기의 수요 또한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장의 형성으로 인해, 왕실을 대상으로 한 예술성 중심의 생산방식은 상업적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공방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서 판로의 확장, 즉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공방의 상업적 성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으로 인해 왕실이 붕괴되어 후원을 바랄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 상업적 성공에 매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의 사회상은 다른 유럽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대륙의 절대군주제하에서 왕실이 물품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것에 반해, 영국은 의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들의 지지로 웨지우드, 치펀데일(Chippendale), 매슈볼턴과 같은 사업가와 기술혁신가들의 자유무역과 개인적 이윤추구가 보장되었다.

211. 웨지우드

1759년 웨지우드는 독립적인 도자기 생산 회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의 영국 도자기 수요는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고, 식민지의 개척으로 인해 해외시장 또한 확대되었다. 과거의 주된 판매지역이었던 회사주변 지역보다, 폭넓게 확대된 국내외의 시장에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는 공장의 생산방식이 보다 효율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포티가 “웨지우드의 놀라운 성공은 공장에서의 합리적 생산방식, 뛰어난 마케팅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제품에 대한 열정에 기인하고 있다.” 고 한 것과 같이, 웨지우드는 신고전주의의 도입이나 소지의 개발과 같은 일련의 실험들을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당면한 효율화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웨지우드는 새로운 판매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매장에 방문한 고객이 견본을 보고 주문을 하면, 그 수에 따라 생산을 하는 방식, 즉 수요와 공급을 보다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주문생산방식은 불필요한 재고로 인해 자본이 묶이는 위험 에서 회사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후 웨지우드는 견본을 소지한 영업사원을 고용하여 소비자를 찾아 다니거나, 제품 카탈로그를 찍어 배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판매방식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판매 방식이 기존의 생산방식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된 품목이었던 그린웨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새 판매방식에 대한 기존 생산방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1760년대 초반, 웨지우드의 주요 상품이던 그린웨어(녹색유 도자기)로는 물건을 안정적으로 균일하게 생산할 수 없었다. 그린웨어는 틀로 찍어낸 요철 무늬에 유약이 입혀지면서 그 특성이 살아나는 것이어서 유약을 입히는 직공에 따라, 그리고 가마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어서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유약 효과의 다양함이 그린웨어의 매력이었으나 결코 균일한 상품을 만들지 못했고, 따라서 웨지우드가 도입한 판매 방식에 적합하지 않았다.”
새로운 주문판매방식을 도입함에 있어서 필요한 전제조건은, 제품의 질과 형태가 항상 균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판매방식에서, 고객들은 직접 진열된 제품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제품을 구입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에서는 소수의 견본만이 매장에 진열되었고, 그것마저 직접 구입하는 것이 아닌 주문을 위한 구경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 매장에서의 견본이나 인쇄된 카탈로그에서 보여지는 제품의 모습이 자신이 구입할 물건과 동일하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했다.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웨지우드는 그의 해박한 도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우선 그는 그린웨어 대신 크림웨어 로 주 생산품목을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균일한 결과를 얻어내는 한편, 일정한 효과를 내는 유약을 개발했다. 또한 상회전사기법 의 도입을 통해서, 직접 손으로 그리는 장식 때문에 균일도가 떨어지고 대량생산에 부적합해지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당시의 제품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쓰여졌던 것이 분명한 만큼, 기술적 개발과는 다른 균일화를 위한 요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력을 보다 실수가 없고 일정하도록 유지해가는 일이었다.

212. 공정의 세분화와 원형제작과정의 분리

직공들의 숙련도 는 균일화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였다. 17 ~ 18세기 사이의 스테포드셔 에서, 제작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의 공예적 생산방식은 자취를 감추었고, 작업과정의 분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상태였는데, 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이렇다.
“늦어도 1730년대부터 도공들은 전체 작업 과정 중 물레차기나 손잡이 달기, 유약과 이장 만들기 등, 한 가지 과정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다. …… 1750년대 월던의 공방에서는 전체 제작 과정이 최소한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직공들은 대개 그 중의 한 가지 작업에만 종사하였다. 하나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예닐곱 명의 도공들이 분담하고 있는 셈이라, 그 중 어느 누구도 제품의 특성을 크게 바꿀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체 공정들이 이미 어느 정도 분화된 상태에서 웨지우드회사의 제품들은 더욱 균일화되어야 했는데, 직공들이 빈번히 저지르는 실수를 줄이는, 일종의 인간기계를 만드는 변혁은 그래서 필요했다. 웨지우드는 공정을 더욱 세분화하여 직공들에게 부여될 개별 공정의 난이도를 줄여나가게 된다. 그들에 대한 재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이용되었으나, 진척속도가 느리고 직공들의 호응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각 공정이 더욱 세밀히 분화되고 그에 따라 직공들의 작업이 단순화되는 시점에 필요한 또 하나의 작업이 요구되었다. 과거, 하나의 도공이 모든 작업의 과정을 관리하면서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나갈 때와는 달리, 구분된 하나의 반복기계와 같은 임무를 지녔던 직공들이 따르기 위해 필요한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공정의 세분화 과정에서, 도자기의 원형을 제작하는 작업은 독립적인 단계로서 다른 공정과 뚜렷이 구분되게 되고, 또한 다른 공정들의 지침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해갔다. 동일한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는, 개별적인 직공들이 수많은 공정에서 다양한 차이점들을 만들어낼 소지가 많았고, 그것은 곧 균일화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금전적 가치는 상당했는데 이점에 대하여 포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확한 디자인을 기획하는 모델러의 가치는 그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모델러는 어떤 의미에서 도자기를 한 개 만들 때 마다 작업의 일정부분을 대신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델러가 하는 일의 금전적 가치는 실상 이 일정 부분의 가치를 모두 합친 것과 같다.”
생산량과 수익의 정도는 원형제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원형의 질에 상당히 의존적이었으며, 또한 제대로 된 원형의 금전적 가치는 생산량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한 직공들의 작업에 비해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은 중요하게 평가되었으며, 그들은 일반 직공들의 두 배에 가까운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보수가 실제 그들이 가진 금전적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았는데, 고용직으로 일했던 모델러들, 그리고 프리랜스제로 일했던 모델러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당부분의 추가적 이익들이 모두 고용주에게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는 착취의 징후가 보여진다.
한편으로, 웨지우드는 다양한 미술가들을 회사의 모델제작에 이용했다. 신고전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주 고객이었던 중, 상류계층은 그들을 타 계층과 구별하기 위해 최신의 양식들에 몰두했다. 새로운 유행인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에, 전통적인 도자기제작방식에 익숙해있던 도공 출신 모델러들은 미술가들에 비해 어려움이 많았다. 신고전주의스타일은 런던과 같은 유행의 중심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스테포드셔의 노동자계급 출신 도공들이 새로운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회사에 고용된 미술가들이 가졌던 모델러로서의 능력과는 다소 상관없이, 그들은 조직체계 안에서 곧바로 적응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규칙들이 엄격히 지켜지던 조직체계에서 그들의 다양하고도 제어 불가능한 독립적 성향들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웨지우드는 그들을 회사조직 바깥에서 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대도시에 위치한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구입하거나 의뢰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이로써 디자인작업은 제작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유행은 웨지우드가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제품 생산에 사용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독립적인 디자이너, 디자인작업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노동분화로 인해서 쪼개어진 세부적인 공정들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3. 생산방식의 변화와 디자인

제조업자들에게 필요한 디자이너란 것은, 무엇보다도 균일하고 정확한 제품생산을 가능하게 해내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모든 디자인은, 기계든 손이든 활용 가능한 생산 수단으로 작업해서 얻은 제품에, 개별적인 차이와 다양성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 인용)웨지우드의 퀸스웨어에 관한 많은 디자인사연구가 퀸스웨어의 신고전주의적 특성에 집중하지만 실로 그것은 신고전주의의 미적 특성보다는 공장의 생산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기계의 도입이 디자인을 변화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제형물레의 선반을 회전시키는데 기계를 도입했다고 말하지만, 물레질, 틀 성형, 제형 물레 성형 등의 제조기술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왔던 전통적인 기법이었고 다만 속도를 빠르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웨지우드의 성공원인은 공장에서 노동인력을 조직하는 것과 관련한 그의 새로운 방식 때문이었다. (디자인과 제작방식의 연관관계)
그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사업 초반의 그린웨어는 다양한 형태와 유약의 효과로 유명했지만 필연적으로 균일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견본이나 카탈로그를 통한 판매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새로운 방식은, 형태의 다양성은 축소하면서도 표면에 들어갈 상회장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식이었다. 상회장식은 도자기가 구워진 이후에 작업을 하면 되는 일이었고, 주문을 받고서도 바로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장식방법을 상회로 바꾸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형태의 도자기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재고준비단계나 장식공정에서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장식의 가짓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러한 장식들이 모두 들어맞을 수 있는 특별한 도자기의 디자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웨지우드 초기에 생산되던 로코코스타일의 도자기들은 굴곡이 많고 형태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단순화가 필요했던 장식공정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반면, 신고전주의 스타일은 단순하고 평평한 표면을 만들어내는데 적합한 스타일이었고, 이후 웨지우드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생산되는 제품의 균일화, 그리고 당대를 살아가던 중상류층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조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고서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었다. 두 조건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절충안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웨지우드의 모델러들이었다. 포티는 이렇게 18세기의 모델러들이 담당했던, 생산과 소비라는 두 측면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형태의 개발이라는 작업이 1920년대의 레이먼드 로위와 같은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했던 일과 다르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220. 19세기 영국의 디자인저급화와 기계화와의 관계

19세기.. 디자인 변질이 어떻게 전반적으로 걱정거리였는지 기술할 것.. 1111

기계화와 디자인의 연관성에 대하여, 기계 생산 방식의 등장이 디자인의 질을 저하시킨 주범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상태에서, 기계의 등장이 디자인 공정의 분리를 촉진했다는 그런 견해는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모리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었고 현대디자인 이론서에 자주 등장하는 니콜라우스 페브스너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재론되었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은 같은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상황을 배제한 편협한 견해일 수도 있다. 당시의 기계와 디자인의 관계를 해석한 포티의 견해에 의하면, 기계의 등장을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으로 보는 판단은 “제품의 형태에 미치는 장인의 영향력을 기계가 침탈했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다. 즉, 기계가, 외형을 다루는 과정을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분리시켜서 디자인 작업의 변질을 초래했고, 그것이 곧 제품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 생산방식이 도입되기 이전인 18세기 초에도 이미 공정의 분리를 통한 노동의 분업화가 이루어져있음을 웨지우드를 비롯한 예에서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공정의 분리가 기계의 등장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19세기의 산업체들에서 기계화가 차지하는 공정의 정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수공에 의한 생산공정이 그때까지도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수공생산은 보다 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의 장인이 작업해나가는 방식은 아니었다.
공정 분화현상은 비슷한 시기의 산업 전반에서 발견되며 이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언급된 자본주의 산업발달의 3단계과정과 들어맞는다. 그에 의하면, 개개의 장인들이 독립적으로 일해서 물건을 만드는 전 자본주의 사회가 지나면 자본주의의 첫단계가 시작된다고 했다. 첫 단계는 노동자들의 간단한 협업단계로 작업장을 공유하거나 같이 재료를 구입하고 같이 물건을 파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관리자의 지시 하에 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수공과정으로 분리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기계 그리고 공장체제의 등장이다.
18세기는 영국 대부분의 제조업분야에서 두번째 단계, 즉 수공 생산 상태에서의 분업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이는 독립적인 장인이 전체 생산과정에서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분화된 작업으로서 디자인이 새롭게 필요해졌음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인용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1725~1826)의 글을 보자.
“무지는 미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또한 산업의 어머니다. 심사숙고나 감각표현은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손이나 발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반복작업은 숙고나 감각표현과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제조업은 정신이 최소한으로 관여하는 곳, 또한 작업장을 …… 인간 부품이 장착된 엔진으로 간주할 때 번영한다.”
1767년의 이 글에서는 웨지우드 회사에서의 분업화와 작업지시체계로서의 디자인의 등장이 예견되고 있다. 디자인이 무지한 노동력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두번째 단계인 수공생산 상태에서 분업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였다.
기계의 도입은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의 변화에 작용하였던 요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노동의 분화를 더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계생산에 의해서 생산력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이 생산력의 증감여부에 생산방식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분화라는 생산방식은 생산력의 증가가 유지되는 한 함께 유지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어질 얘기 -> 기계화의 현상(직물,,, 등등 60페이지 이후의 사례들.. 그래서리,, 디자인변질의 원인은 기계화보다는 공정의 분화가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던 목판나염술은 1750년에 이르러 동판나염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방법을 이용해 공장에서는 보다 큰 면적에 보다 정교한 무늬를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수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는데, 염료를 묻히는 과정과 판을 잘 맞추어내는 것, 그리고 적당한 압력을 가해 찍어내는 작업은 날염공들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1796년에는 동판나염에 이어 롤러날염기계가 개발되었고 뒤이은 증기기관의 이용에 힘입어 생산의 속도는 열 배 이상 증가하였다. 날염작업이 수작업에서 증기 날염기계로 대체되자 기존의 장인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생산량의 증가로 인하여 새로운 디자인의 요구가 높아졌고 디자이너의 수 또한 늘어났다.
한편으로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일부의 고용된 디자이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리랜서로 자신의 디자인을 제조업자에게 파는 식으로 일했다. 그들의 보수는 당시의 다른 숙련 노동자들에 비해서 높았지만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수익에 따른 공정한 배분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날염업자들은 1830년대 초반, 저작권을 날염직물 디자인에까지 적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그것이 좀 더 좋은 디자인의 개발에 긍정적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나, 실상 저작권 적용의 목적은 그들의 재산권 확보에 있었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는 1851년의 대영박람회 디자인 부문 공식 보고서에서,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 중 하나는 롤러 날염기계의 도입에 의하여 디자이너가 통제가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고, 그들이 제조업자의 요구나 장식미술의 원리에 얽매여 쓸데없는 복잡한 식물의 곡선을 모방하는데 능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선호했던 다분히 개인적인 선호에 의한 단순한 형태의 결과물들은 보다 과거인 동판날염의 등장에 의해서 이미 사라졌던 것이었다. 사실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를 날염할 수 있었던 것은 롤러날염이 아닌 동판날염방식의 도입 때문이었다. 그는 수공으로 작업한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의 결과물들을 기계의 결과물이라고 여기며 혹평했고, 수공에 의한 완벽한 작업이라고 짐작했던 단순한 무늬의 결과물들은 실제로 날염기계에 의했던 것이었다. 디자인저급화가 기계에 의한 것이었다는 당시의 견해는 이처럼 부실한 선입견에 근거해있다.
디자인의 변질된 근본적 원인은 기계화가 아니라 양과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제조시스템이었고, 그것인 디자인을 공정에서 분리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결과물의 질을 악화시켰다. 근본적으로 이런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기득권을 가진 19세기의 디자인 개혁운동가들은 복잡한 사회문제보다는 지엽적인 생산기술상의 문제에 주력했다. 특이하게도,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모리스는, 존 러스킨처럼 물질적 진보를 모두 버리고 중세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대신에, 물질적 진보를 수용하는 대안의 가능성을 생각했었고, “디자인의 열악함이 자본주의의 탐욕 때문” 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반(反)기계적 성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반대했던 것은 단순한 생산기계 자체가 아니었다.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것은 철과 동으로 만들어진 실제의 기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억누르고 있는 포악한 상업성이라는 실체도 없는 커다란 기계다.”

You are the perfact cr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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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문화를 비판하는 시사+그래픽 전문지인 Ad Busters에서 가져온 그림입니다.
경제학을 배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를 한눈에 파악될까???,, 궁금합니다.

전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이유없는 (직관적인) 반감만 자꾸 쌓여가니 ..

헛,, 섬뜩한 것이..

이미지 : Adbusters

이 땅의 소중한 연금술사들 _ 전용일

알케미스츠 ALCHEMISTS

우리 시대, 연금술사는
‘물질을 자기 믿음에 따라 다루는 자’,
‘물질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자’,
‘물질의 차원을 격상시킬수 있는 자’를 상징한다. 이 땅의 소중한 연금술사들 _ 전용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