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국 <디자인 위크Design Week>지 7월 2일판 기사를 ‘급속번역’하고 국내 사정에 맞도록 고치고 덧붙인 글입니다. 정확한 내용을 위해서 원문이 필요하시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 쌀집아들 –
탭Tab 스티커, 이제 수도물 브랜딩의 시대로!
사실상 수많은 생수병들이 그저 수돗물로 채워져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수돗물로 돌려놓는 일은 아마도 매우 어려울 겁니다. 또한 수도물을 브랜딩한다는 건 당신에게는 쓸모없는 일로 들릴테지요. 하지만 당신이 환경에 대한 일말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이 소비자들의 생각을 생수병으로부터 수도물로 돌려놓는 뛰어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챌 겁니다.
윤리적 브랜드-디자인 컨설턴시인 프로보커추어Provokateur 디자인의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조슈어 블랙번Joshua Blackburn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의 브랜딩과 대안적 접근 더보기
한국에서 디자인은 ‘생산될 제품의 이익을 극대화’할 때 효용성을 인정받는다. 창작물의 가치가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쓰일 수 있다고 믿는 디자이너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극한 경쟁의 자본주의 기업사회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독립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어렵고, 자신의 사회적 발언을 창작물에 담는 것을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한편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미디어에 의해 화려하게 포장되어왔다. 언제부터인가 ‘디자인’이란 단어는 ‘고급스러움’으로 많은 이들에게 각인되었고, 그런 이미지는 디자인을 마치 기업가에게는 ‘돈 더 벌어주는 기술’로,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는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이노디자인의 김영세씨 처럼 유명세를 갖고 나타났던 소위 ‘잘나가는 디자이너들’ 이후, 디자인계는 ‘스타디자이너만들기’에 혈안이 된지 오래인데, 이것은 연예계의 스타만들기와 정말 비슷하다.
사실 그들의 모습은 대다수의 디자이너들, 즉 스텝 디자이너staff designer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유명하고 ‘잘나가는’ 그들은 이미 독립적인 기업이나 디자인 컨설턴시를 운영하는, 이를테면 ‘자본가’ 부류의 말단에 선 이들이고, 게다가 이미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한국의 디자인이 가진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찾기는 힘들다. 그들의 성공사례는 일종의 ‘신화’가 되고, 미술학원을 기웃거리는 입시생들이 디자인을 미래의 직업으로 삼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 자료에 관심을 둔지 정말 오래이지만 다시 꺼내보면, 한국의 디자인관련대학 졸업자수는 미국과 비슷하며 영국보다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다.
국가명 / Part-time, 2년제 / Full-time, 4년제 / 총 인구 한국 / 125,413 / 91,539 / 48,598,175 미국 / 220,000 / 33,000 / 293,027,571 영국 / 2,795 / 48,245 / 60,270,708
*주의: 건축을 제외한 공예(도예, 금속, 염직, 목), 산업(공업, 시각, 제품)디자인, 기타 응용미술학과를 포함. *출처: (1999, KIDP), (1999-2000, 미연방교육통계청), (2002-2003, 영국고등교육통계원), (CIA World Fact Book 2004.7).
디자이너 노조를 들어본 일이 있나요?
많은 수의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그저 보통의 ‘노동자’로 불리기에 앞서, ‘잘나가는’ 그들처럼 ‘예술가’적 디자이너가 되기를 꿈꾼다. 디자이너 노조를 들어본 일이 있는가? 디자인이 애써 노동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얼까? 한번은 어떤 디자이너가 “비싼 화실이나 미술학원에는 같이 다녔는데..”라고 비교를 하면서 어차피 그리는 직업이니 “하는 것도 예술가처럼 해야..”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같이 화실에 다녔으니, 그래서 돈좀 들였으니, 그래서 “우리도 예술가처럼 세상을 등지는것”이라는 간편함. (사실 진정한 예술가들처럼 사회적인 사람들도 없다.) 획일적인 미술대학입시는 이런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요즘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적어도 80~90년대를 화실에서 보냈던 오늘날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그렇게 입시의 과정을 거쳤다. 그야말로 겹겹으로 복잡스러운 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자아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 때문인지는 분간하기 힘들지만, 디자인 잡지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사상 최초의 ‘디자인’지면을 만든 조선일보에 이르기까지, 매주 매월마다 상당히 고상한 투로 하나하나의 디자이너들을 독립 예술가, 혹은 연예인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무진 애를 써왔다. 또한 오세훈 시장이 추진한 ‘디자인 올림픽’ 준비가 한창인 지금, – 디자인에 올림픽이 생겼으니 이제 모든 디자이너들은 바통들고 달리기 시합을 준비해야 하는거다! 디자인 선수촌이라도 만들어서! – 디자인은 이제 권력과의 융합을 막 시작했다. 바야흐로 경쟁의 시대인지라 디자이너도 그 선진국형 경쟁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중요하다는 디자인을 바라보는 대중의 판단은 어떤가? 정부나 기업, 그리고 스스로 경쟁대상이라고 여기는 ‘오리지날 예술’의 평가는 어떤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새 디자인은 썩 잘 알려지지만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 따위의 움직임들은 미미하다. 아니, 활발한가 싶다가도 어느새 털털거리는 것이 ‘공공디자인/미술’ 분야다. 그나마 ‘공공디자인’처럼 무형의 탈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대중의 삶 속에서 디자인에 대한 반응을 찾아내는 것은 참 어렵다.
얘기가 좀 벗어났지만, 아무튼 직접 디자인을 한다는 사람들, 또한 그걸 해보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디자인 직종의 단편성은 사회에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속 ‘커리어우먼’의 단골 직업으로 등장하고, 언제나 인테리어디자이너들은 불우한 가정의 집을 새로 ‘리노베이션’해주거나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는 ‘경제적 성공’을 과시하기도 한다. 절대로 쪽방에서 웹사이트 코딩과 디자인을 함께 하는 라면매니아 최모 디자이너나 한달에 50만원 받고 일하는 제품디자이너 김모양과 같은 얘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과연 디자이너란 앞서의 성공적 모습과 최저임금의 두 모습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1차 걸프전이 벌어졌을 당시, 애드버스터즈 재단의 잡지인 애드버스터를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다니던 학교의 디자인도서관에는 매달마다 각종 분야의 디자인잡지를 구비해놓았었는데, 한쪽 구석에 떡하니, 이라크전에서 폭발한 미군차량에 널려있는 미군의 시체를 찍은, 끔찍스런 사진이 나와있는 것이었다. 디자인잡지코너의 한 부분을 차지한 이색적인 이 잡지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버렸다. 의외였던 것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잡지’스럽지 않은, 세련되고 깔끔한 모양새였다.
영국에 도착한 이후 도시에서 가장 크다는 보더스BORDERS 서점에서 난데없이 그 잡지를 다시 만났다. 부시의 모습이 파란 표지를 장식한 그 잡지는 여기에서도 예술문화잡지가 가득한 서가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나 보다 더 급진적인 빨갱이 잡지나 저널들이 화려한 잡지들과 뒤섞인 풍경은 정말 나에겐 낮선 모습이었다. 이 잡지는 ‘광고 뽀개기’라는 잡지이름이 말해주듯 미국중심의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파생된 소비문화나, 그와 연관된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는 잡지이다. 따라서 잡지 내부의 광고 페이지들에도 실제 기업주를 위한 광고는 없고, 다국적 기업의 유명광고를 패러디한, 그러나 그런 거친 내용을 담아낸 지면의 구성은 여느 상업지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 정갈한 구성과 짜임새를 보여주는 지면으로 채워져 있었다. 반자본적인 잡지의 내용상 당연한 일이지만, 광고에 쓰인 글꼴의 저작권도 단체의 공격대상이기 때문에 실험적인 잡지용 글꼴들이 새로이 만들어져 편집에 이용되기도 한다.
디자인의 효용성이 반자본주의적 매체인 애드버스터즈에 효과적으로 이용되는 이유는 바로 ‘디자인’이 가진 자본주의와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현대적 광고의 세련된 모습이 비틀어져 이용되는, 그러나 여전히 세련된 애드버스터즈만의 편집디자인을 통해서, 그들의 메시지는 보다 파괴적으로 변화된다. 이 애드버스터즈재단은, 디자이너들에게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일 저작권이나 사회적인 이슈들에 관한 급진적 메시지를 아이러니컬하게도 잘 ‘디자인’된 틀 속에 담고있다. 상식의 거부, 다시말해 디자인을 저작권 혹은 경제적 이익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인식의 파괴를 통해서,소비문화의 비판이라는 단체의 명확성이 더욱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에 도착해서 만난 또하나의 잡지 이름은 바로 BIG ISSUE. 이 잡지의 기본 아이디어는 참 흥미롭다. 첫째로, 잡지의 내용은 빈곤의 문제와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슈들, 그리고 대중문화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잡지의 내용이 빈곤과 소수자의 고통 등에 맞춰져 있으나, 일반적인 잡지들과 비슷한 연예관련 기사등에도 소홀하지 않아서 누구나 읽어볼만 한 가벼운 잡지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잡지의 판매는 길거리의 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재단은 잡지를 60펜스에 인증된 걸인에게 판매하고, 이 걸인 판매자는 잡지를 1.4파운드에 거리에서 재판매한다. 독자들이 이 잡지를 사려면 속칭’걸인 빅이슈 판매인’에게 구입해야만 한다. 이쯤되면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이 잡지는 거리 빈민(실업자만 가능)에게 일정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안정적인 일거리를 만들어주고, 잡지를 구입하는 독자들에게도 빈곤문제를 굉장히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빅이슈는 여느 한국 잡지의 편집진들보다도 탄탄한, 전문적 편집진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있다. 매주마다 발행되는 이 잡지는 글과 사진의 질, 기사의 배치와 구성 등에서, 일반 잡지에 결코 뒤지지 않으며, 편집자, 컨텐트디렉터와 아트디렉터 체계, 광고전담부서 등, 갖출것은 다 갖추고 있다. ABC부수인증(매주 지역판 포함 20만부 이상)까지 받은 이 잡지의 후원에는 방송사인 ITV와 통신사인 로이터, 그리고 전문 사진가들과 언론인들이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잡지와 재단은 작년(2007) 말에 세상을 뜬 여류 사회운동가이자, 친환경 바디샵BodyShop을 설립한 기업가인, 아니타로딕의 남편 고든 로딕이 설립했다.
다양성은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앞서 다룬 사례들은 여러 전문가들의 사회를 향한 표현의 결과로인해 얻어진 것이고, 그 결과의 이면에는 자기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와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 도전적인 참여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사회의 진보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다는 점을 위의 작은 사례들 말고도 더 찾아볼 수 있을것이다. 최근들어 시민운동의 새로운 역할모델을 찾으려는 몇몇 운동가들이 만든 새로운 형태의 연구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3월 정도에는 한국판 빅이슈를 만들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사회적인 고민에 파묻힌 수줍은 디자인 전문가들이 좀 더 용기를 갖고 그런 일들에 참여해보기를 권한다.
최초의 자전거를 가리는 건 쉽지 않지만 오늘날의 자전거에 큰 영향을 미친 물건으로 꼽는 것이 사진에 보이는 ‘드레이지네’라는 물건이다. 당시에는 이렇게 굴러가는 물건들, 즉 인력거나 풍력거등의 개발이 붐을 이루는 때였다. 비슷한 여러가지의 물건들이 참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드레이지네가 좀 다른 건 앞바퀴를 좌우로 비틀어 조향이 가능하다는 것.
드레이지네
독일의 삼림관리원인 ‘칼 폰 드라이스’가 만든 이 물건은 프랑스 빠리의 쎄느강 남쪽에 ‘룩셈부르크공원’에서 귀족들을 대상으로 1817년에 처음 시연되었다. 드라이스는 넓은 숲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여러가지의 ‘구루마’를 만들어 시험했다. 요즘에도 열차선로에 얹어서 쓰는 인력구동차량을 영어로 ‘Drasine’이라고 부르는데, 이름처럼 그가 발명한 것이다. 하지만 사진에 보이는 드레이지네라는 물건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고 재빠른 런던의 사업가들이 불법 복제해서 대 히트를 치게 된다. 특허를 내고 자전거 판매를 시도하던 드라이스는 결국엔 병에 걸려서 말년을 보내다 죽고 말았다.
귀족 출신의 드라이스는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는 바람에 발명품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최근의 연구들은 이 물건을 자전거의 시초라고 보고 있는데, 그동안 이탈리아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낙서를 근거로, 프랑스에서는 ‘시락’의 벨로시페드를, 영국에서는 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나온 구루마의 모습을 증거로 삼아 자기 나라가 자전거를 개발했다고 주장했으나 모조리 가짜로 판명되었다. 아직도 유럽 각국은 자기 나라가 처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딱히 누군가가 발명했다기보다는 서서히 진화했다고 보는것이 옳다.
프리 휠Free-Wheel 이전의 위험한 자전거 사고들
페달을 계속 움직이지 않아도 바퀴가 굴러가는 장치를 ‘프리 휠(Free-wheel)’이라고 하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개발되었다. 요즘은 프리 휠이 모두 적용되어 페달을 거꾸로 돌려도 바퀴는 그대로 앞으로 굴러가지만, 19 세기 후반의 영국에서 한창 자전거가 유행할 당시의 모습은 바퀴가 그대로 페달에 고정된 원초적인 자전거의 형태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각광받던 철도에 비해 도로들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요즘과 같은 타이어 대신 철 바퀴를 그냥 쓰거나 통고무를 덧대어 쓰는 정도였던 초기의 자전거는 고르지 못한 길에서 흔들림을 줄이기 위해 앞쪽 바퀴가 대책 없이 커지기도 했다.
빈발하던 자전거 사고와 관련해 이런 저런 소문도 많았다. 실제로 영국의 국립기록원에서 ‘자전거’로 검색을 해보면 자전거 사고로 사망하거나 입원한 사람의 기록들이 꽤 많고, 자전거 개발자들 가운데 내리막에서 굴러 떨어져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영국의 어떤 잡지는 “그렇게 페달을 쉴새없이 밟다보면 뼈의 형태가 변할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여성과 자전거, 그리고 바지
이런 자전거 역사에 빠지지 않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여성 운동과 자전거의 관계. 자전거가 유행하던 19세기, 여성의 자전거 타기는 하나의 투쟁이었다. 다르게는 치마를 입고 타는 자전거를 만드느냐, 아니면 바지를 입고 똑같은 자전거를 타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었다.
드레이지네도 귀족의 놀잇감 정도로 소개되었지만, 당시의 자전거는 ‘천박한 장난감’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물건을 여성이 타고 즐기는 건 쉽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발 빠른 자전거 공장들은 앞 바퀴가 큰 ‘오디너리’ 자전거를 개조해 여성이 치마를 입고 탈 수 있도록 페달이 한쪽으로만 달린 특수한 오디너리를 만들었다. 아얘 자동차처럼 사륜을 달아 ‘신사 숙녀용’의 품위 있는 자전거가 나오기도 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훗날 이 공장들은 대부분 자동차회사로 전업했다.
한편에서는 승마복과 같은 간편한 바지 복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여성 자전거족이 등장했다. 복장을 편하게 하고 남성들과 똑같은 자전거를 타는 그들의 모습은 당시로서는 아주 충격적인 일이었다. 1897년 캠브리지 대학교에서는 여권 운동을 비판하는 대대적인 시위 자리에 자전거타는 여성을 인형으로 만들어 상징적으로 공중에 매달아놓기도 했다.
결국 자전거 형태를 아주 심하게 변형했던 모델들은 사라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가진 보통의 자전거들만이 살아남았지만 요즘에도 자전거와 여성성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남아있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면 성기능에 장애가 생긴다는 이상한 소문도 있지만, 직접 장시간 자전거를 타본 바로는 남성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적당히 타면 별 문제는 없을듯.
저번주에 한국의 전쟁기념관 + 영국의 제국전쟁박물관(IWM)의 비교 PT를 했는데요. 결과적으로 국수주의적인 한국전쟁기념관의 어두운 면이 많이 부각된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전쟁기념관을 설명하자니 구한말과 한국전쟁, 미군점유지였던 기념관부지에 대한 얘기도 하게 되었고요.
이름만 보자면 Imperial War Museum.. 제국주의적인 시각으로 재단된듯 보이지만, 그리고 말을 들어보니 80년대까지도 그러했지만, 최근 20년간에 걸쳐 이 영국 제국박물관의 전시들이 정말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헨리무어의 조각전(주로 인간, 기계, 폭력, 전쟁이 주제)이 2층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전쟁을 비판한 철 조각품들과 1층에 벌려져있는 2차대전 당시의 무기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기념관과 영국 제국전쟁박물관IWM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