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o: 공장 폐쇄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원제 <No Logo>, 나오미 클라인 지음, 2000년 초판 발행)>의 9장을 요약한 메모.

이제 기업은 브랜드에 깊고 내밀한 의미를 담아내려고 하며 광고대행사는 자신이 제품을 선전해서 파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대신 참된 가치를 짜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브랜드 구축자들은 지식경제에서 제 1의 생산자들인 셈이다. 고용 환경은 변화했다. 슈퍼 브랜드 기업들은 영혼을 세우고 성가신 육체를 잘라냈다. 슈퍼 브랜드 구축과 운영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생산 관련 투자비의 축소로 해결했다. 기업의 우선순위가 바뀌자 공장 노동자와 장인으로 대표되는 실제 생산자들의 위치가 불안해졌다. 과거 생산가:소매가 1:1에 만족했던 기업들은 이제 1:4의 이윤율을 낼 정도의 저가생산처를 찾아다닌다. 생산과정과 생산자는 평가절하되고 있으며 브랜딩은 부가가치를 독차지한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배설물처럼 다뤄진다. 기업들은 제품 생산을 마치 자원 취급 기업이 구리나 나무를 조달하는 것처럼 제품을 조달한다. 생산 부문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제조업체가 노동 인력을 책임진다는 전통적 사고도 함께 빠져나간다.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근로 조건에 대한 책임을 하청 업체에게 떠넘긴다. 그리고 그저 물건을 아주 싸게 만들라고 말하면 끝이다. No Logo: 공장 폐쇄 더보기

시험대가 된 런던 트라팔가스퀘어

<트라팔가 스퀘어>

Fourth Plinth
Fourth Plinth

런던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렀을 트라팔가 스퀘어, 그 양쪽에는 조각상이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본 이들이라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왼쪽편에 위치한 포트 플린스Fourth Plinth, 바로 ‘네번째 대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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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란 이름의 ‘황금 우리’

필자는 귀국하여 ‘교수님’으로 지칭될 때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 누구와도 이름만 부르는 사회에서 ‘타이틀’ 위주의 사회로 옮겨오면서 느끼는 ‘온도차’ 때문만은 아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으로 대학사회에 발을 내디뎠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교수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적 교수’라는 말을 들을 때 형용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내외 ‘강단 진보’의 맹점은 무엇인가? 마르쿠제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대학이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곳이라고 주장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은 기업을 닮아간다. 대학원생·시간강사의 착취가 심한 미국·한국과 대학 하급 구성원의 생계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유럽은 다른 면이 많지만, 정규직 교수가 비정규직 지식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수취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럽은 교수가 중간급 공무원에 해당되어 숙련 노동자 평균 연봉(약 3만달러)의 2~3배 봉급을 받는다. 임금차이가 심한(사립대학교의 경우) 미국에 비해 착취체제의 일원으로서의 지위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규직 교원의 ‘안정’이 비정규직 교원들의 희생으로 보장되는 점에서는 똑같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 한, 정규직 교수가 아무리 관념적 혁명의식을 지녔다해도 사회적 정의 실천에 앞장설 확률은 높지 않다.

정규교수들이 반체제 의식을 과시해도 실제 생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현재 위치의 유지·강화 (즉, 승진), 그리고 그 주된 수단인 연구를 위한 연구비 등을 구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국가관료나 대자본의 재단·기금들과의 ‘네트워크 만들기’도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소홀히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연구·저술할 때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원로·선배, 연구비 지급을 좌우하는 관리자들의 시각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저절로 성역들을 비켜가게 된다. 예컨대, 한국 관변 쪽 연구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해외 한국학 분야에서 과연 한국 사학재단의 내부 구조나 일상적 군사주의, 이주 노동자의 착취 문제에 대한 저서나 논문이 많은가? 그런데, 초미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진보적 내용의 연구라 해도 해당 학계를 의식하는 나머지 이론적 접근이나 의제 설정, 용어·문체 선택 등에서는 학계의 관례와 유행을 따르게 되어 그만큼 ‘일반’ 독자로부터 멀어진다. 이와 같은 일상적 순응주의에 빠지지 않고 꿋꿋하게 온갖 성역을 깨치고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한 간결한 문체로 저술하는 노엄 촘스키와 같은 사람도 있지만 아웃사이더 취급받는 그들의 저술을 학술 논문에서 언급할 수 없음은 불문율이다. 학계의 자기 완결적 구조는 무서운 배타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필자가 ‘상아탑’이 순응주의·서열의식을 강요하고 반체제적 실천을 원천 봉쇄하는 자만적 별천지라는 ‘자아비판’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필자를 포함한 강단의 자칭 진보파들은, 위계적·폐쇄적 공간에서 전개되는 ‘진보’ 담론이 과연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평등과 정의를 ‘바깥’을 향해서 외치기 전에 먼저 ‘우리’ 사회 안에서 실천해야 하지 않는지를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진보사회라 해도 교수집단의 일원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권력화하는 경향이 있는 바,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꿋꿋한 ‘진보 학자’였던 전직 교수가 장관이 된 뒤에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볼 수 있는데 이는 교수집단 ‘진보성’의 허와 실, 겉과 속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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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컬럼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5/03/001000000200503131919035.html

추한 다이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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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금속공예라는 분야를 전공하면서 나는 어떤 현실과 학문과의 입장차이를 좁힐 수가 없었다. (물론 그 ‘학문’이라는 것이 작업이라고 불리워지는 현실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그보다는 이상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그 중의 하나인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이다. 추한 다이아몬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