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의 철학 _ 아르놀트 하우저

III. 심리학적 방법에 관하여 _ ~ p97 발제 최윤호 20040601

1. 승화와 상징화

프로이드에 의하면, 예술가는 ‘승화능력’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방어 매커니즘’을 통해서, 비현실적인 요구들을 정신영역 안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전화시킨다. 예술가는 그로인해 허구의 세계에 갇히게 되며 노이로제를 앓는 사람들과 같이 현실세계와 차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가와 노이로제 환자들과의 차이점은, 예술가들은 유연성을 가지고 현실에 다가서거나 멀어지는 것을 제어할 수 있으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은 예술작품에서 실현된 성취에 대신 참여하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의 결과를 통해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누린다. 프로이드는 예술을 통해서 얻어지는 만족의 ‘보상적인 성격’에 관한 진술과 더불어 형식의 아름다움도 관심을 ‘유인하기 위한 프리미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은 예술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며 ‘삶에 대한 문제’가 바로 예술의 목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과거에 간과되었던 예술가의 창조적 충동 및 리비도 충동간의 여러 관계를 드러내주었다.
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 얼마나 의미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예술창작 행위를 해석하는 데에 유용하느냐와 같은 물음이다. 프로이드의 ‘승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심리적 전환’에 불과한데, 예술이 성취된 즉 ‘승화’된 형식에서는 처음의 충동이 전환되는 과정은 볼 수 없고 그 목적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공적인 승화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과 주변여건을 알아야 하며 그 승화란 것이 충동 자체의 소산인지 아니면 예술가의 역사적 혹은 사회적 조건들에 의존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때에 따라 달라지는 충동-예술 사이의 전환과정에서의 ‘차이를 만드는 원리’를 찾지 못하는 한 승화이론으로 예술비평을 시작하기는 어렵다.
프로이드는 그런 승화의 미비한 부분을 수긍했는데, 욕구의 리비도적인 성질이 그것이 승화된 형태 속에 그대로 존속한다는 것과 그러한 욕구의 ‘환상적인 만족’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한 부분이 그것이다. 프로이드는 최종적으로 ‘승화란 충동으로부터 쾌락을 추구하고 그 쾌락을 부여하는 성질을 박탈하지 않은 채 그것의 공격성을 벗기는 일’이라고 함으로써 보다 합당한 진술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이론들과의 일치를 이룩했다.

본능적 충동은 반작용 형성과 승화를 통해서 그것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데 반작용 형성이 억압을 전제한데 반해 승화는 반대로 그것을 해소한다. 여기서 승화와 상징화의 구분이 필요하다. 상징과 승화는 유사한 역학적 기능을 가지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승화란 심리적 과정이 진행되는 요소들의 단순한 변경 – 이런 구조적 변경은 예술비평과 관련하여 아무런 말도 안한다. – 을 의미하지만 상징은 그와 달리 프로이드의 꿈에 대한 해석에서 이용되는 ‘다원적 결정에 의한 이미지’와 같아서 풍부한 업적을 예술비평에 남겼다. 그런 다원적으로 결정체로서의 상징은 예술가나 관객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어니스트존스처럼 자발적,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발생된다고 전제한다면 예술창조의 과정을 ‘신비화’시키는 일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으로 의식되어지지 않을 수는 있으나 무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문화발달에 대한 정신분석적 개념은 여전히 레비브륄과 같은 낭만주의적 인류학에 의존한다. 즉, 비합리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근원적인 것이라고 보는 낭만주의적 입장 말이다. 그러나 상징적 형식에서 특징을 찾는다면 그것은 불투명성이나 애매함이 아니라 해석의 가변성에 있다. 성적 상징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예술이 무의식적인 본능적 충동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욕구의 표현인 한, 예술이 성적 이미지로 가득 찬 상징언어를 – 수직선이 남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등의 –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면적인 예술을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단조로우며 실제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에서, 우리는 예술이 언제나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가져오기 쉽다. 그러므로 역사적 성격규정이나 예술작품의 해석은 단순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적합과 부적합, 자명한가와 촛점이 흐린가, 주제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가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지는 것이라야 한다.

정신분석은 그러나 수확이 없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감수성을 꿰뚫어 보면서, 예술에 새로운 특징들을 불어넣어 윤택하게 했다. 어떤 예술의 전체를 나타낼 수는 없으나 그 의미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포괄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이런 모티브의 고찰을 단념할 수는 없다.

2. 낭만주의와 잃어버린 현실

반 정신분석적 비평가들은 예술가를 노이로제 환자와 같은 범주로 묶은 프로이드의 해석에 반대했다. 프로이드의 해석에 따르게 되면 삶의 파탄이 곧 예술 창조의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노이로제와 예술은 현실로부터 심리적으로 떨어져있다. 그러나 노이로제가 현실의 부정이 아닌 망각인데 비해 예술은 현실을 대체하길 원한다. 정신분석적 예술해석이 사실세계의 파괴와 같은 감수성에 우리의 관심을 관련시켜주었다면 우리는 먼저 이런 해석의 낭만주의적 한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프로이드의 예술인식은 성급한 일반화에 기초한다. 예술은 변화무쌍하며 그렇게 조리가 정연한 정신적 태도를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다양한 형식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의 예술의 목적과 경향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가 진술한 의미에서의 예술가 개인의 요구와 사회 집단적 요망의 불일치는 바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졌다. 낭만주의 시대 이전의 예술은 삶과 교환하여 얻은 대용물로서의 의미가 아니었다. 낭만주의 이전 예술창작의 선행조건으로 삶의 상실을 드는 것은 그래서 들어맞지 않는다.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현실의 거부는 예술 창조에 동반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공적 예술 창작에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즉, 예술은 삶의 보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복사가 아닌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것은 삶의 향유라는 차원과 양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표현이지 소유가 아니며, 말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낭만주의 예술가는 그가 살고 싶었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낙오자였다.

정신분석적 예술이론에 내재되어있는 낭만주의적 성격은 예술적 창조성에서의 비합리적이고 직관적인 요소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낭만주의와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예술적 천재를 정의함에 있어서도 영감을 기교와 취미로 대체시켜버린다. 윌리엄모리스는 “영감에 대한 그 따위 이야기들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장인의 손재주에 불과하다.”라며 낭만주의 이전의 가치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예술가가 정신적인 선각자의 노릇을 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다. 과학과 결합한 예술은 지위를 획득하고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애매한 천재의 지위로 만들어 일반인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노이로제와 같은 낭만주의적 정신체질은 정신사적 맥락에서 보면 예술이 사회적 역할을 상실했을 때 두드러졌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에 걸쳐 드러나는 낭만주의적 기질은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도전자로서 보이고자 했던 -그러나 희생양에 불과했던 – 것에 불과하며 끊임없는 경쟁으로부터 야기된 초조함의 소산이며 물질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불안의 결과이다. 정신분석은 개인의 삶과 작품이, 그의 사생활과 공적인 기능이 따로따로 떨어진 두 영역으로 분리되어버린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3. 대용만족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언제나 삶의 교정이며 우리의 현존이 안고 있는 결함에 대한 보상을 표현하는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예술은 삶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수단을 지니고 있다. 예술의 효과는 운명의 압도적인 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괴로움을 충분히 지각 가능하게 만드는 점에서 단순한 마취적 효과와는 차이가 있다.

예술을 승화, 상징화, 대리만족의 수단으로 보는 정신분석적 설명은 하나의 본질적 특징을 공유하는데 바로 ‘예술체험의 역동성’이 그것이다.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세계와 끊임없는 불화관계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변화하는 ‘자아’에 대한 발견은 프로이드가 거둔 가장 큰 결실이다.
정신생활이 발생하는 것은 충동이 어떠한 저항, 즉 억압하는 힘의 저항에 부딪혔을 때이다. 정신에 있어 의식과 무의식은 항상 대립하는데, 충동을 억압하여 무의식 속에 잠겨두거나 밝은 의식으로 올려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억압은 더할 나위 없이 동적인 개념이다.

정신활동을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닌 감추어진 공격 . 방어적 책략으로 이해하는 노출심리학에 예술비평이 얼마나 힘입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정신분석이 예술이해에 근본적인 공헌을 한 점은, 예술작품의 근원이 리비도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등의 생물학적 정의에 있다기보다는, 예술 창작을 합리화시킨 데에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예술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흠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정신분석의 사고방식이 충분히 역동적이지 못했던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보다 융통성 있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면 예술의 독특한 형식과 가변성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며 훨씬 포괄적이고도 덜 독단적인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심리주의와 정신적 구조물의 자율성

정신분석학 이전의 심리학이 대체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차용하여 인간 정신을 비인격화시킨 것에 반해, 정신분석학은 어느 정도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적 체질을 생물학의 유일, 불가변적 표현으로 파악했다. 그것에 의하면 과거에 우연적으로 취급되던 비합리성, 불규칙성, 강박행동, 공포마저도 순전히 정신적으로 결정된 현상이다. 프로이드 학설의 의의는 이처럼 교육되어질 수 있는 최초의 심리학 이론이라는 데에 있다.

예술비평에 대해 정신분석이 갖고 있는 방법적인 특징은 으뜸간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형식적인 구조를 통해 표현되는 예술의 해석에 얼마나 올바르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이다.
정신은 작품의 생성을 가능하게는 하지만 작품을 이루고 있는 재료 자체는 아니다. 어떤 감정적 동기가 예술적 의미를 얻는 것은 그 동기가 들어가 있는 ‘작품의 전후관계’에 힘입은 것이지, 그 동기를 담고 있는 ‘체험의 전후관계’에 있지 않다. 우리가 ‘작품의 기원’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멀리 그것의 ‘예술적 의미’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작품을 작가의 전기에 지나치게 연관시키는 것은 심리학의 남용이다.

프로이드는 “작가의 창조력은 반드시 그의 의지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며, 작품은 때때로 작가와 맞서서 그와 독립된 낮선 존재가 되기도 한다.”라고 밝혔는데, 여기서 우리는 예술 창작과정에 비심리적인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의 모든 특징은 두가지 방식으로 결정된다. 첫째는, 그것이 겨냥하는 효과에 의해서이며 둘째는, 그것의 근원적 체험에 의해서이다. 예술작품은 여러 동기가 작용하는 다원적 결정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예술작품은 예술가를 제외한 채 예술비평이나 예술사로서 설명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그 예술작품이 생성되는 상황과 연관되지 않는 한 설명이 불가능한 것도 있다. 그럼 면에서 정신분석학은 정신의 의식적인 과정과 무의식적인 과정의 연관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추구하는 주관적인 태도에 대한 이론이지 객관적인 연관들을 밝힌 학설은 아니다. 그것이 설명하는 것은 정신의 매커니즘이다.

5. 정신분석, 사회학, 역사

정신분석의 관점은 반역사적이다. 프로이드는 사회학과 역사학을 심리학의 하위로 종속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 분석에 있어서 사회학적, 역사학적 개념을 흐려버렸다.
그가 정신분석이 유기적인 생물학적 사실 위에 세워진 체계라고 한 점은 타당하다. 그러나 애초의 ‘충동’이 ‘비본능적인 동기’에 의해 감시받고 억제되는 그런 정신구조에 ‘본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했던 것은, 정신분석에 따른 오류의 근원이기도 하다. 실지로 본능은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했다.

사회학은 심리학 보다 더 우위에 있다……

프로이트는 집단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개인만이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잊은 것이다…

정신분석적 개념이 갖고 있는 비역사적인 성격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출처가 자연과학에 있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정신분석과 관련한 사고 전체를 시간적인 범주보다는 공간적인 범주에 한정하여 ‘계량화’했다.

양적 평가는 정신의 표명에 적합하지 않다. 그가 예술향수와 위트의 효과를 에너지절약으로 설명하려 했을 때, 사실 그는 낡은 전(前)분석적 심리학의 기계론적 견해로 복귀한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그의 사고의 혁명적 영향력이 가장 적게 느껴지는 부분중 하나이다.

* Author / Gathered from : ?예술사의_철학 (아르놀트 하우저)의 부분을 SSALL이 요약

문화관광부의 ‘새예술 정책’ 시안

컬쳐뉴스 [기획] 새예술 정책 미리보기 / 4. 시각예술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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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대미술관 전경. 시민들의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문화관광부는 문예진흥원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칭) 개편 등 새로운 예술환경에 발맞춘 ‘새예술 정책’을 2월말에 발표할 예정으로 현재 의견수렴 중에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새예술 정책'(시안)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향후 이 정책에 대한 각계의 의견개진을 기대합니다.(문화부 정책토론방 바로가기)

이 기사는 컬쳐뉴스의 기사를 갈무리했습니다.

글 싣는 순서
1. 총론 -①
2. 총론 -②
3. 문학부문
4. 시각예술부문
5. 공연예술부문
6. 전통예술·지역문화부문

4. 시각예술부문

(1)환경변화와 수요 전망

시각예술분야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환경변화는 지식정보와 사회로 인한 디지털 문화의 확산이다. 첨단매체의 활용이 증가하는 것과 함께 장르 해체와 복합화 경향이 증대하고 있으며 미디어 아트가 새 장르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인 환경의 변화로는 △주5일제 확대와 소득증대로 인한 삶의 질 추구 가치 확산 △민주주의 발전과 시민사회 성장 △지방자치제의 정착과 지역분권을 통한 지역문화 활성화 요구 증대 등이 꼽힌다. 이밖에도 새예술정책은 지자체와 민간이 주도하는 각종 국제미술 행사가 증대하는 등 세계화 및 동북아 지역의 블록화가 진행됨에 따라 해외미술시장 진출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2)기존 정책의 문제점

새예술정책은 시각예술분야 기존 정책의 문제점을 대략 다음의 여섯 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1)순수미술 위주의 지원정책으로 인한 사진, 디자인, 공예 등 장르간 지원 불균형 초래 2)창작스튜디오 개념 미비, 문예진흥기금 절대액 부족 등 창작지원의 문제 3)국립현대미술관의 접근성 문제, 공립미술관 절대량 부족, 사립미술관 지원 미비 등 인프라 조성의 문제 4)건축물 미술장식제도 시행상의 혼란 등 예술향수 부문의 문제 5)미술시장의 장기침체, 해외미술시장 개척을 위한 지원, 사진에 대한 진흥책 미비 등 미술시장 문제 6)국제비엔날레 참가 및 이론적 학술적 교류를 포함하는 국제교류 지원 부족 등이다. 추진전략 및 정책의 방향은 이 문제점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3)중점 추진과제

과제1. 국립미술관 체제 개편 및 운영 활성화
국립미술관의 운영 활성화를 위해서는 ①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시내 이전 추진 ②국립현대미술관 조직개편 및 전문인력 확충 ③덕수궁 분관의 근대미술 연구 및 전시 기능 강화 ④국군기무사 부지 활용방안 마련 등이 과제로 꼽혔다. 시민들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을 서울로 이전, 전문인력 확충을 통해 조직구조를 개편하는 것은 물론, 덕수궁 분관을 이용한 근대미술연구를 강화하고 사간동 기무사 부지에 국립21세기 미술관을 설립하여 미디어아트 분야의 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과제2. 등록미술관 확충 및 운영 활성화
등록미술관 운영활성화 항목에는 ①공립미술관 확충 및 운영활성화 ②사립미술관 확충 및 운영활성화 ③학예사 제도 개편 및 미술관 전문인력 양성 등이 과제로 선정됐다. 현재 절대량이 부족한 공립미술관의 확충을 위해 1시도 1미술관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규모에 따른 운영기준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수적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립미술관에 대한 실태조사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학예사 제도를 개편하는 것과 함께 연수프로그램 확대, 전문인력간 네트워크 구축, 인턴제도 확대 등이 제시되었다.

과제3. 젊은 미술가의 실험적, 대안적 창작 지원
신진작가 지원을 위해 ①마로니에 미술관을 영국 ICA나 프랑스 팔레 드 도쿄와 같은 지원센터로 육성하는 동시에 ②대안공간에 대한 지원기준을 정비하고 지원의 다각화를 통해 민간 비영리 미술공간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과제4. 창작스튜디오 확충 및 레지던스 프로그램 도입
작가들의 창작활동지원을 위해 ①창작스튜디오 설치 근거법 제정②국립창작스튜디오 운영개선 및 국제창작스튜디오 조성③공립 창작스튜디오 확충 및 운영 활성화④개인 및 민간 창작스튜디오 지원⑤전국 창작스튜디오 네트워크 구축 등이 과제로 꼽혔다.

과제5. 공공부문의 미술품 활용 증대
미술품 활용을 통해 공공기관을 문화적으로 리모델링하는 동시에 신진작가의 작품 구입을 통해 창작을 지원하는 방안이다. 구체과제로 ①미술은행 제도 도입 ②공공기관 대민서비스 공간 개선 시범사업 실시 등이 선정되었다.

과제6. 건축물 미술 장식제도를 공공미술제도로 전환
건축물 미술 장식제도는 제도 도입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 이의 해결을 위해 ①미술장식 개념을 공공미술로 확대 ②민간건축주 미술장식비용 기금출연시 할인혜택 부여 ③국가 등 공공기관의 미술장식비용을 1% 이상으로 환원 ④제도의 투명한 관리를 위해 공공미술 데이터베이스 구축 ⑤공공미술 중개업체 등록제도 도입 및 중개수수료 양성화 ⑥공공미술센터를 설치하여 시행 평가 및 감리기능 강화 등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과제7. 문화도시 조성을 위한 건축의 역할 증대
도시의 문화경쟁력을 제고하고 문화공간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건축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①문화공간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문화부 내 조직체계 일원화 ②문화공간 인증제도의 도입 ③가로, 공원, 광장, 어린이 놀이터 등의 문화적 리모델링 사업 추진 ④도시문화 거점공간 조성 ⑤도심 내 사용하지 않는 공장, 발전소, 공공시설 등을 문화시설로 전환 ⑥도시 역사문화 회복과 근대건축물의 보존 및 지속가능한 활용 등을 과제로 선정하고 있다.

과제8. 디자인의 문화적 가치 확산
디자인에 대한 문화정책적 접근은 사회 전체의 문화 수준과 삶의 질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새예술정책은 이를 위해 ①디자인 문화원 설립 ②국공립미술관 디자인부 설치 ③디자인미술관 개편 ④공공디자인 및 디자인 교육 전시회 개최 ⑤각종 공공사업에서 디자인 실시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을 제시하고 있다.

과제9. 공예의 예술적, 산업적 가치의 조화발전
관광기념품 개발 정도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공예의 예술·산업적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①한국공예문화진흥원 확대 개편 및 예술산업과로 이관 ②공예미술관 설립 ③인증 및 공모전 통합관리 시스템 지원 ④공예산업 클러스터 조성 등이 제시되었다.

과제10. 사진문화 진흥
이미 주요 예술형태로 등장한 사진문화 진흥을 위해 ①사진아카이브 설립 ②국가 및 지자체 공공건설 및 공공행사시 사진기록 의무화 ③젊은 세대 사진작가의 창작활동 지원을 위한 사진센터 설립 ④국립현대미술관 사진영상 콜렉션 체계화 등이 과제로 선정됐다.

과제11. 미술품 유통구조 개선 및 시장 활성화
작년 말, 미술품 종합소득세법이 폐지되었지만 미술시장의 침체는 여전하다. 불합리한 유통구조를 개혁하고 시장을 활성화 하기 위해 ①법인의 미술품 투자 규제 철폐 ②개인의 미술품 구입 우대방안 마련 ③미술품 감정연구소 설립 지원 ④화랑의 전속작가제도 운영 지원 ⑤미술품 경매 참여자의 신원 보장 ⑥해외시장 진출 화랑 및 경매사에 대한 융자지원제도 도입 등이 과제로 제시됐다.

과제12. 국제미술교류 확대
국제교류가 활성화되지 못해 세계 미술계에서 인지도·지명도가 낮은 한국미술의 현황을 타개하기 위해 ①국내 국제비엔날레 운영 효율성 제고 ②해외 국제비엔날레 참가 지원 ③외국 주요미술관 전시 유치 및 전국 순회전 지원 ④미술인 펠로우쉽 도입 등이 과제로 제시됐다.

[ATHⓒ컬처뉴스] 2004-02-11 오후 8:33:37

투명한 곳에서 똥 싸는 상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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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에 올라온 기사.
이탈리아의 한 예술가가 런던 시내에 설치한 공중화장실이 화제이다.
경찰드라마의 취조실에 자주 등장하는 일방투과형 유리거울을 이용해서 만든 이 화장실은 겉에서 보는 그 모습보다.. ‘저 속에서 일보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듯..

정말 기분 묘하겠네.. ㅋㅋ

‘투명화장실’서 일 보실 분?

사방이 유리…런던거리 현대미술 작품
안에선 밖 보이고 밖에선 내부 안보여

관광객이 북적이는 영국 런던 시내 한복판에 사방이 유리로 된 공중화장실(사진)이 등장했다고 인터넷판이 24일 보도했다.

이탈리아 출신 예술가 모니카 본비치니가 만든 ‘한 순간도 놓치지 말라’는 제목의 현대미술 작품이기도 한 이 화장실은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거울로만 보이는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사람들만 많을 뿐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보도는 전했다.

화장실 인근의 테이트 미술관 직원 제프 볼로턴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못 볼 것이라고 믿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거리 한복판에 앉아서 가장 원초적 행위를 한다는 생각은 기괴하다”고 말했다.

한편, 작가는 구경거리가 생겼을 때 아무리 생리현상이 급해도 현장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볼 일을 보면서도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빠짐없이 구경하라”는 뜻에서 이 화장실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강김아리 기자 ari@hani.co.kr

캄파냐(humberto campana) 형제


humberto and fernando campana
? designboom

페르난도(fernando)와 훔베르또 캄파냐(humberto campana) 형제

페르난도(1961)와 훔베르또(1953)형제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들 중 하나이다. 건축학교를 졸업한 페르난도와 법을 공부한 훔베르또는 1983년부터 디자인 (혹은 디자인과 예술 사이에서보다 더 뛰어난) 분야에서 함께 일해왔다.

그들이 함께 일하는 스튜디오는 브라질의 사웅파울루에 위치한 한 창고인데, 그들은 매일 그리고 자주 이미 만들어진 공업생산품들 같은 레디메이드 소재를 이용해서 스튜디오를 채울 가구를 만들었다. 그들의 디자인들 중 몇몇은 에드라(edra)와 카펠리니(cappellini)에 의해서 제작되어졌다.

디자인붐에서 발췌


campana’ s ideal house in cologne 2004


‘sushi fruit ‘ bowl, manufactured by studio campana, 2002
photo andr?s otero


‘zig zag’ table + chair, detail, furniture for ‘l ‘est parisien’ cafe,

paris, 2002


‘anemona’ chair, manufactured by edra, 2000
photo andr?s otero


‘bolas’ children chair, manufactured by bozart, 2002



‘azul’ chair , manufactured by edra, 1993
photo andr?s otero



‘bamboo acrylic’ manufactured by studio campana, 2000
photo andr?s otero

예술 하고 계십니까?

어쩌다 들른 심스페이스란 곳의 발제문을 옮겼습니다.
대충 둘러보니 온라인 미술 커뮤니티인듯,,
썩 좋은 결과를 내고 있는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냥 ‘이런것도 있더라’라고 알려드리기 위해서.. ^^ 회원명단에는 많이 보던 이름들도 있습니다..

제가 임의로 굵은글자로 바꿨구요,
http://www.simspace.com 로부터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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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하고도 유일한 《심스페이스》의 비젼

오늘날 자의건 자의가 아니건 작가들은 사회로부터 적잖게 소외되어 있다. 점점 더 ‘예술’을덜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새로운 산업적 구조 속에서 작가들은 이전에 차지했던 권좌를 상실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산업화, 구조화되어 가고 있고, 그 흐름은 완전히 제도적으로 진행된다. ‘성공적인 예술’은 갈수록 더 설명이 난처한 개념이 되어가고 있고, 그럴수록 ‘성공한 예술가’의 개념이 그 자치를 차지해 가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기업의 기금들과 정부의 보조금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따라서 기회는 결탁한 전문가들, (좀 구식 표현을 쓰자면) 어용 작가들과 관료주의에 흥건히 젖은 이론가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흐름은 그 안에서 ‘예술’이란 것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안락한 물결 같은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이 거대하고도 도도한 흐름, 대학과 출판과 비엔날레 같은 체계 전반의 동원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조성되어지는 이 급류에 의해 점점 더 성형되어 질뿐인 하류의 돌맹이 같은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언젠가 곰브리치가 말했듯, 현대는 예술이란 식물을 키워내기에 적절한 토양이 아니다. 예술은 점점 더 그 의미를 왜곡시키려 다짐이라도 한 듯한 세계 안에서 위태로운 생존을 연명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를 빌자면 ‘예술 생산계’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현대로 올수록 예술생산이란 변별된 영역을 위한 최소한의 독립성조차 보장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소통의 황홀경’ 안에서 이끌기보다는 이끌려 가는 사람들의 부류로 재빠르게 밀려나고 있다. 그들은 영향을주기보다는 광고와 영화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부터 동일하게 영향받는다. 자신이 되려는 몰입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의지도 점점 더 이전처럼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지 못 한다.

역설적인 것은 이 희미해져가고 있는 가치들과는 상반되게 작품들은 점점 더 대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장기간과 더 많은 비용과 사람을 요구하는 것으로 되어가면서 점점 더 작가 혼자서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범주들을 넘어서고 있다. 작품생산이 점점 더 산업 생산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객들은 이전처럼 취향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취향을 대중매체에 위임하면서 인식의 파편화를 확인시켜 줄뿐이다. 그들은 그저 더 유명하고 알려진 것들을 품질로 간주하는 매체시대의 진실에 방치되면서 저널의 전략에 고스란히 넘어간다. 더구나 이젠 정보화의 시대다. 스스로를 네트웍에 노출시키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는 그런 시대. 소통은 더할 수 없이 활성화되었지만, 점점 더 한정된 네트웍에 가담해야만 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소통의 독점, 혹 독점적 소통이랄까, “어떻든 이제 쳐 박혀 있으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다!”

이같은 환경에선 스타급 작가, 거대한 상업갤러리, 그리고 유수한 미술관의 권위라는 색인표를 가진 식물들만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그리고 상황과 조건들은 이 몇몇 진정한 주체들에 의해 떡주무르듯 유연하게 조절될 수 있는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경매와 같은 미술시장 시스템은 이와 같은 질서들에 정당성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강화해 나가는데 최적의 조건들을 마련해 주고 있다.

21세기의 벽두인 이 시점은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 이전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세기초만 해도 신진 작가들은 그들을 모르는 척 하는 권력과 시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이곤 했다. 자신들과 자신들의 예술에 하등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카데미로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호흡을 같이 할 동료들, 화상과 이론가들을 찾았고, 왕래했으며 때론 밤을 세워가며 토론했다. 그렇게 피사로나 모네 인상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얼마 후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와 그룹이 출범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이었다. 젊은 작가들은 전쟁 중에도 취리히의 한 카바레에서 다다를 시작함으로써 이전엔 일면식도 없었던 프랑스의 화가와 아일랜드의 시인이 만날 수 있는 장을 스스로 마련했다. 그런가하면 에른스트나 달리 같은 화가들은 그들에게 이론과 문장을 제공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앙드레 부르통과 만났다. 이들 초현실주의자 동료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선술집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연애를 실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을 만인 앞에 알리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 작가들은 더 이상 모이기를 즐기지 않는다. 때론 의미부여조차 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점점 더 모임을 즐기지 않도록-혹 못하도록- 사회적으로 학습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동료들과 자리를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각자 철저하게 단절되는 것을 (이전과는 다르게) 창작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작가들과 이론가들, 이론가들과 화상들이 하나의 예술을 위해 모이는 일은 오늘날 지극히 드문 현상이다.

그들은 이제 다른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기다린다. 그렇다고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수록 그들 모두는 자신들에게 덜 관대해져 가는 변화된 환경에 더 절망적으로 포위되어 갈 뿐이다. 예컨대 작가들은 점점 더 눈치를 살피다가 운 좋게 캐스팅되는 배우들을 닮아가고 있다. 물론 작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사 같은 이론의 영역은 자진해서 대학 안으로 움츠려들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술사가건 기획자건 이제 어떤 호출을 기다리는 일들이 부쩍 늘었다. (이들 중 소수는 기다리는 대신 먼저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앞서 활용한다) 이 모두가 이전엔 분명 그들 손에 있었던 뭔가가 빠르게 보다 상위의 권위로 이양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대략 되어 가는 현상은 이렇다. 어떤 거대하고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있고, 작가와 같은 개인적인 전문가들은 너무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면의 진실을 목격하거나 그것과 대립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 흐름을 개인적으로 수용해 적절하게 내면화하거나 그러지 않거나(그럴 수 없거나)를 그나마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대다수는 자의건 아니건 전자를 선택한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들은 점점 더 개인화, 파편화됨으로써 불리해져 가는 계약에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노동자들을 닮아가고 있다. 이렇게 예술은 그 안에서 그 다양한 양상들이 벌어질 뿐인 생존의 영역으로 유입되고 있다.

반면, 그 흐름은 훨씬 더 우월한 박수갈채와 지원 안에서 스스로를 더 생생한 것으로 만들고, 개인적인 전문가들을 압박한다. 따라서 생각이 있는 작가와 이론가, 미술사가들이 이같은 환경에 대응하는 적절한 방식들을 찾아낼 확률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포기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와 명분을 더욱 쇠약하게 하는 쪽으로 기여함으로써, 작가와 이론가들의 개인화(파편화)를 더 부추길 수 있다.

그럼에도 작가와 미술사가와 평론가들과 미술 행정가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있다. 적어도 개인의 꿈과 그 양식화들이 이미 사회화된 그것들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표현이 지니는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겐 서로 자리를 함께 하고 나누는 것이 여전히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거나 드러낼 난처한 도전들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한 응전을 논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의 의미 같은 것….

그리고 원한다면 현시대 미술흐름의 난폭성과 조악성에 관해, 그리고 거의 노골적으로 표류하는 한국미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만나 각자의 두터운 생각들을 교환하고 내면화된 것들을 교류하며,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너나할 것 없이 서로 동료를 공감해야 할 동일하고 절박한 조건들에 맞서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실험들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몸에 벤 ‘예술의 전통’이 지시하는 것들, 즉 그 주체, 범주, 기능에 대해 재삼 헤아려 보는 자각으로부터 자신과 만나고 그것을 현재의 시간들과 교차시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진정으로’ 타자를 향하고 단절을 넘어서는 실험들에 이르기까지.

《심스페이스》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온라인 상의 한 가능성이다. 작가들과 이론가들과 감상자들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장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만남과 소통을 실현할 적절한 도구들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심스페이스》가 스스로를 출발시켰고, 또 유지해야 할 유일한 비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유의미한 출발을 앞서 포장할 필요는 없다. 《심스페이스》의 비젼은 너무나 필요한 것이지만, 이와 상반되는 상황과 조건, 심리들의 장벽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즉 장애들 속에서 소통과 만남을 꾀한다는 점에서 《심스페이스》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의 수단이며 방법론이다. 더 많은 작가들이 그 필요성에 공감하고 동참할 때, 비로소 그 유익함이 입증될 수 있을 하나의 방법론!
그러므로 현재로선 《심스페이스》와 같은 시도들이 조금씩이나마 성공을 거둠으로써, 예술에 대한 우리의 숙의들이 지속되고, 그것이 더 확대될 순 없을지라도 더 깊어질 순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볼 뿐이다.

심상용(미술평론)

빛의 축제 ‘부천 루미나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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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수)부터 20일(월)까지 20일간 부천 상동 호수공원에서 이탈리아 빛의 축제인 ‘루미나리에’가 국내 최초로 개최된다. ‘400년 전 르네상스의 빛을 한국에서 만난다’라는 주제로 진행될 이번 행사는 이탈리아 장인 정신이 깃든 찬란하고 장엄한 조명예술의 백미를 선보인다.

경기도 부천시는 ㈜엠앤엠 코리아와 예솔 그룹과 함께 ‘부천 시승격 30주년 기념행사’로 ‘부천 루미나리에’를 개최한다고 16일 발표했다. 이번 행사 작품의 제작은 100여 년간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조명업체로 손꼽히는 마리아노라이트社가 직접 참여한다.

행사명 빛의 축제 ‘부천 루미나리에’
행사컨셉 400년 전 르네상스의 빛을 한국에서 만난다.
행사기간 2003. 10. 1 ~ 10.20 (20일간)
행사시간 17:00 ~ 23:00
행사장소 경기도 부천시 상동 호수공원
주최 부천 루미나리에 조직 위원회
주관 ㈜ 엠앤엠 코리아, 예솔 그룹
후원 문화관광부,부천시,부천시의회,한국관광공사,이탈리아대사관,메모리얼타임즈
제작 MARIANO LIGHT (이탈리아)

루미나리에는 16세기 후반 남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성자를 기리는 의식’에서 비롯됐다. 초기에는 전나무 조각에 등불과 촛불을 달아 도시의 축제를 밝히기 시작했다. 전기가 발명된 이후에는 입체적 목조 건축물과 다양하고 화려한 조명이 어우러진 빛의 예술 축제로 발전해 왔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과 무늬를 본 뜬 웅장한 건축물에 현란한 현대 조명 기술의 예술적인 접목은 새로운 삼차원의 공간 예술로 전 세계인의 눈을 사로 잡고 있다.

현재는 이탈리아 전역을 비롯하여 독일,스페인,미국 등에서 개최되고, 아시아는 일본의 고베에서 10년 전부터 크리스마스를 밝히는 축제로 매년 500만명이 몰리는 성황을 이루고 있다. 1999년 12월에는 도쿄 중심가 마루노우치에서 밀레니엄 행사로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내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부천 루미나리에’는 부천 상동 호수공원의 5만 4천 평 부지에 조성되며,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5시간 동안 34만개의 전구와 함께 세계적 명성의 조명 예술이 선보인다. 이는 고베 루미나리에의 1.5배의 규모로 아름다운 호수 전경과 어우러져 가을 밤의 환상적인 야경이 연출될 예정이다.

이번 행사에 선보이는 작품은 4가지 테마로 구성되며, 3개의 대형 건축물과 40여 개의 소형 건축물로 제작된다. 가장 눈에 띄는 테마는 ▶’평화의 기원’으로 높이 24m, 폭 40m, 길이 100m의 거대한 규모와 웅장함으로 조성되며, 이는 전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에서 평화의 염원을 형상화한다. 또한 ▶ ‘복사꽃 세레나데’는 60m 길이의 빛 터널로 머리 위로 쏟아지는 현란한 빛의 소나기를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호수를 따라 설치된 40여 개의 조형물로 구성되는 ‘빛의 호수’는 호수의 물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산책의 즐거움을 더해 주며, ▶콜로세움 형태의 원형 구조물인 ‘르네상스의 빛’은 20m 높이로 세워져 구조물의 중앙에 서서 360도로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참고자료 6-7 page 사진 참조)

‘부천 루미나리에’ 조직 위원회는 이번 행사를 빛의 축제를 넘어서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문화 축제로 가족과 연인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할 계획이다.

특히 금난새가 지휘하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홍보 대사로서 임명되어 폐막식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한다. 국내의 대표적인 교향악단의 참여로 빛과 조형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클래식 선율의 우아함이 조화를 이루는 입체적인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