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발제문

4. 인상주의 (2) _ 최윤호 발제 (수유연구실 예술세미나 자료)

영국에서의 모더니즘

1660년의 왕정복고 이후의 영국에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처럼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는 없었다. ‘대불황(1870)’을 거치면서 영국의 시민계급은 자신감을 상실했고 부르주아지들에게 있어 확고했던 경제적 자유주의가 쇠퇴했으며 사회주의 운동이 힘을 얻게 된다. 이런 변화들 – 경쟁력 있는 외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식 – 은 외국으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특별히 프랑스의 문학은 당시 영국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러시아소설, 바그너, 입센, 니체 등의 영향이 프랑스로부터의 자극을 보완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부르주아지들의 자기의식이 동요되었다는 점인데, ‘영국만이 유일한 신의 사명을 가졌다는 믿음’이 흔들린 점과 ‘1880년대의 새로운 사회주의운동의 대두’가 그것이다. 이후 영국의 정신적 태도는 모든 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시기, 젊은 세대의 미학적·도덕적 표어는 모더니즘이었다. 이들이 부르짖는 자기실현이라는 말이 매우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세계의 도덕적 안정은 무너지고 말았으며, 사회생활의 모든 규범은 구속력을 상실했고 모든 것은 문젯거리가 되었고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880년대 영국 문예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비정치적인 개인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철저히 반부르주아적이었지만 결코 민주주의자들이거나 사회주의자들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의 향락적인 감각주의와 쾌락주의는 반사회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반속운동(反俗運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에 대한 반대였다. 이러한 속물혐오는 인습이 되고 마는데 영국의 모더니즘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속물혐오의 경향이며 인상주의가 영국에서 겪는 많은 변화는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속물혐오는 이미 과거의 일이었고, 상징주의자들은 보수적인 부르주아지에 대해 일종의 공감마저 느꼈다. 그에 반해 영국의 데까당스 문학은 – 프랑스에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가 각각 나누어 행했던 – 파괴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 시기의 영국문학은 ‘경박스런 표현방법에 대한 집착’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현상은 단순한 반항 심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본래의 목적은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려는데 있었다.

댄디즘

댄디즘 예술가의 언사나 사고방식, 그리고 특이성과 매너리즘은 예술의 멋을 모르는 위선적인 속물적 세계관에 대한 항의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댄디가 보헤미안의 대응현상 이었듯이, 영국에서는 댄디의 일부가 보헤미안의 지위를 차지한다. 보헤미안이 프롤레타리아트로 떨어진 예술가라고 한다면, 댄디는 상층계급 쪽으로 탈락해나간 부르주아 지식인인 셈이다. 둘 다 기계적이고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삶에 대한 항의의 표현인데, 영국인에게는 댄디의 모습이 더 선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댄디즘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탁월함과 독립이며, 일체의 존재와 행동에 있어 아무런 실제적인 목표나 동기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들레르는 댄디를 예술가보다도 상위에 두었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들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종의 장인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댄디는 추구하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댄디의 이런 태도는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명예마저 던져버리겠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오스카와일드 가 자신의 생활을 예술작품화하고 자신의 문학작품보다 더 높게 평가한 것을 보면, 그가 어떤 효용이나 동기,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보들레르의 댄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가 자만심과 교태가 가득하다는 점이 영국 데까당스의 특색인 딜레땅띠즘과 유미주의의 결합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에서는 예술의 장식적인 면과 정교하고 화려한 면이 부각되며, 예술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며 완성된다. 프랑스에서 회화가 모든 예술의 표본이었다면 영국에서는 귀금속 세공이 표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체험의 결실이 아니라 체험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다…. 이 황홀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의 성공을 의미한다.”라고 페이터는 그의 저서에서 말하는데, 이 몇 마디에 모든 유미주의 운동의 강령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월터 페이터는 러스킨에서 시작하여 윌리엄모리스로 이어지는 발전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선구자들의 사회적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심미적 체험의 강도를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그의 경우, 인상주의는 향락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유미주의 운동과 프랑스 인상주의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비어즐리의 미술인데,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공예적·장식적인 필법은 프랑스의 거장들이 피했던 방법이며, 부르주아지들이 애호하는 세속적인 삽화화가와 무대장식가들을 낳게 되는 일련의 발전, 인상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발전의 시발점인 것이다.

지성주의

프랑스 문학에서 직관주의의 흐름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경향을 이루는 지성주의는 영국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와일드는 비평가를 예술가보다 상위에 두어, 세계를 비평가의 눈으로 보고자 했다. 동시대인들의 딜레땅뜨 적 인상은 여기서 연유한다. 이 지성주의의 기반 위에 메레디스와 헨리제임즈가 있다. 영국 문학사에서, 죠지엘리어트가 지적 수준은 높으나 훨씬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는데 반하여, 메레디스와 헨리제임즈의 작품은 극소수의 지식층만이 읽었을 뿐이었고,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나 다양한 인물들보다는 흠잡을 데 없는 문체와 인생에 대한 원숙하며 권위 있는 판단을 요구했다. 두 작가 중 헨리제임즈의 경우, 흔히 지적 정열에까지 도달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두 작가 모두가 현실에 대해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관련을 갖는 예술을 대표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국제적 인상주의

19세기말에 이르러 인상주의는 유럽 전역에 걸쳐 주도적인 양식이 된다. 시인들의 관심사는 객관적 현실이 아닌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이었으며 이런 기분과 분위기의 예술이 문학의 모든 형식을 서정위주, 혹은 이미지와 음악, 색조와 뉘앙스로 변하게 한다.

프랑스 이외의 경우 묘사의 인상주의적 특징들은 상징주의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나, 프랑스 문학만을 염두에 둔다면 인상주의는 상징주의와 동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적이요 감각주의적인 데 반해, 상징주의는 어디까지나 관념론적이며 정신주의적이다. 결정적으로 프랑스의 상징주의는 항상 행동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으나, 빈·독일·러시아·이탈리아의 인상주의는 수동적이며 환경에 무저항적인 탐닉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양자 모두가 가진 비합리적 요소는 수동성마저도 분별없는 행동주의로 변하게 하기도 했다. 일체의 행동성을 외면하는 인상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대표하는 것은 빈의 시인들인데, 빈의 인상주의가 그 특유의 섬세하고 수동적인 성격을 갖게 된 데에는 도시가 가진 특성이 한 몫을 했다. 빈의 문학은 부르주아지의 자식들을 비롯한, 제2세들의 신명 없는 쾌락주의를 표현하는 문학인데, 회의적이고 자기 풍자적이며 인상주의의 잠재적 내용인 ‘먼 것과 가까운 것의 합치’,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들의 서먹서먹함’, ‘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되어있다는 느낌’ 등이 그 기본적 체험이 된다.
“어찌 된 일인가, 바로 어제 같은 나날들이 영원히 흘러가서 완전히 없어져버린 것은?”이라는 호프만스탈의 물음과,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죽는다.”는 발자끄의 말에서, 소외와 고독의 의식이 1830년 이후의 유럽사회에 지배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호프

유럽의 인상주의 역사에서, 러시아가 인상주의를 받아들여서 인상주의운동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체호프와 같은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까지는 계몽주의적인 분위기였으며, 유미주의나 데까당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러시아에서 그런 인물을 대하게 되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기술발달로 인하여 사상이 빠르게 전파되었고, 서구의 산업화된 경제형태가 도입되었으며, 그로 인해 서구와 유사한 지식인에 해당하는 계층과 ‘권태‘ 비슷한 생활감정을 낳는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드가가 중요한 부분을 그림의 가장자리로 몰아내어 액자에 의해 끊어지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호프는 그의 소설과 희곡을 ‘발단’에서 끝맺음으로써 작품이 도중에 중단되었거나 우연히 아무렇게나 끝맺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정공법과는 반대되는 우연의 형식원리를 따르고 있다. ‘잘 만들어진 각본’의 경우 중요한 특색이던 여러 효과들을 포기하기에 이르는데, 과거 무대에 잘 맞는 희곡이 플롯의 통일성, 완결성, 균형성의 형식원리를 따름으로써 성공했던 데 비해, 체호프의 인상주의 희곡은 사건이 적고 극적인 갈등조차 전무했다. 등장인물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서서히 망해가며, 아무 사건도 시간도 없는 삶의 일상성 속에 휩쓸려 들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인생을 고스란히 내맡기는데, 이 운명은 파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환멸을 통해 완성된다.

자연주의 연극의 문제

플롯이나 극적 진전이 없는 이런 연극의 존재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어왔다. ‘잘 만들어진 각본’의 연극은 비록 그것이 자연주의의 어떤 요소들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희곡의 무대기술적 관습과 영웅적 주인공의 이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주의가 극예술을 정복하는 것은 1880년대, 즉 소설에서의 자연주의가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다음이다. 앙리베끄와 그의 후계자들은 발자끄나 플로베르에 의해 이미 문학의 공유재산이 된 것을 무대에 써먹은 것에 불과했지만 부르주아 관객들의 반응은 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연주의 연극은 프랑스 바깥에서, 즉 스칸디나비아제국과 독일 및 러시아에서 형성되었다. 자연주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자연주의 연극의 관습을 받아들였으며 적어도 입센, 브리외, 쇼 등의 희곡에 한해서는 그들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해 공격적인 그 태도를 탓할 뿐, 연극양식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드디어는 반부르주아적인 희곡 자체도 부르주아 관객들을 사로잡아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자신의 생존능력을 스스로 증명한 자연주의 연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와 미학자들은 고전주의적인 희곡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고전주의 연극에서의 간결성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는 점, 공연시간에 제한이 없는 점, 그리고 극중 대화가 잡다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운명, 성격, 행동의 고찰이 아니라 현실의 세부적인 복사’라면서 자연주의 연극을 비판했다. 하지만 실제로 자연주의 연극에서 달라진 것은, 현실 자체가 구체적 제약과 더불어 ‘운명’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라는 것이 다면적이고 복잡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는 것뿐이다.

연극에서 사건의 줄거리가 사라져가는 것은, ‘이야기적 요소가 제거되어가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예술분야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었는데, 미술 분야에서 일화적 회화를 옹호하던 평론이 거의 없었던데 반해, 연극에서는 플롯 경시에 대한 격렬한 비난이 있었다. 특히 독일에서 가장 심했던 자연주의 연극에 대한 반대에는 여러 가지의 상이한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반동의 경향은 간접적인 것에 불과했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념비적 연극’이라는 구상이 갖는 유혹이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함께 자라난 자연주의보다도, 과거의 귀족 및 부르주아지의 고전주의 쪽을 장래의 민중연극을 위한 양식으로 생각했던 것은 당시의 개념혼란을 여실히 보여준다.
새로운 연극에 가해진 가장 격렬한 비판은 그 결정론과 상대주의에 대한 것이다. 내적 자유·외적 자유가 없고 절대적 가치나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도덕률이 없는데 어떻게 진정한 희곡(비극적인 희곡)이 가능하겠냐고 새로운 연극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윤리적 규범이 상대적인 것이고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 인정된다면 진정한 극적 갈등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런 일련의 논의는 개념의 혼동, 사이비문제들과 궤변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는 비극적 희곡을 희곡 전체와 혼동하거나 적어도 이상적 희곡의 형식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이런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상대적인 가치로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얼마든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 비극적 효과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신봉하는 관중에게 그러한 가치위협의 현상을 꼭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관중 자신이 그러한 가치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말이다.

입센

입센은 당대의 세계관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가장 강렬하게 희곡으로 표현한 사람이었다. 입센의 윤리적 정열, 선택과 결단해야만 한다는 의식, 자신에 대한 심판으로써의 작품 활동 등, 이 모든 것은 키에르 케고르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전적으로 비 낭만적이요 일체의 유미주의와 결별한 그의 윤리관 자체가 키에르 케고르의 영향인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들이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키에르 케고르는 이러한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종교적·윤리적 체험이 미나 천재와 전혀 무관하며, 신앙상의 영웅이란 예술적인 천재와 전혀 별개의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의 비현실주의란 것은 당대의 일반적 과제들 중 하나로서, 이 문제와의 대결을 위해서 특별한 자극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전체가 이상과 현실, 시와 진실, 시와 산문의 갈등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었으며 19세기의 중요한 사상가들은 누구나 현대문화의 치명적 불행이 현실감각의 결여에 있음을 지적했다. 이 점에서 입센은 여러 선구자들의 싸움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입센이 이 공동의 적에 가한 치명타는 바로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에 내재하는 희비극성의 폭로였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그 주인공에게 동정으로 대했던 것에 비해, 입센은 브란드나 페르귄트와 같은 그의 인물들을 도덕적으로 철저히 파멸시킨다. 이런 낭만주의적 인물들의 이상적 요구는 이기주의이며, 그 냉혹성은 순진함 만으로 완화되지는 않는다. 돈키호테의 이상주의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서 준열했던 데 반해 입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은 오로지 남에 대해서만 준엄한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입센이 당시의 젊은이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 것은 그의 개인주의에서 비롯된다. 그는 근본적으로는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로서 개성적 자유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았으며, ‘개인은 그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사회는 개인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라고도 했다. 그는 사회문제 자체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다. 그의 사고는 개인적 윤리문제를 중심과제로 삼았고, 사회 자체는 그에게 있어 ‘악의 원리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사회에서 어리석음과 편견과 폭력의 지배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성향은 결국 귀족적, 보수적 영웅주의 윤리에 도달하게 된다.

유럽에서 그가 진보적 인사로 통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조국 노르웨이에서는 비외론슨의 급진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파의 대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영향력은 작품에서보다는 그의 선동가적·교훈자적 역할에 힘입은 바가 컸고, 사람들은 그를 불굴의 투사로서 존경했지만 정치가로서의 입센은 적극적인 무언가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부르주아적 편견과 기존의 사회에 맞섰지만 자유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가 믿지 않았고, 종국에 가서는 서글픈 숙명론자로서의 정체가 드러나고 마는 개혁가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인 루베크는 예술가에 대한 입센의 생각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인물이다. “이레네여, 그대와 함께, 아 그대와 함께 비다에서 하루의 여름밤을 보낼 수 있었더라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었을 것을!” 하고 부르짖는 이 절규야말로 현대예술 전체에 대한 심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버나드 쇼

버나드 쇼는 낭만주의에 대한 입센의 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계속하고, 유럽이 당면한 중대한 문제에 관한 토론을 심화시킨 유일한 작가이다. 이때에 이르러 낭만주의적 영웅들의 극적이고 비극적인 거창한 제스처에 대한 신앙이 깨뜨려진다. 순전히 장식적인 것, 거창하게 영웅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것들이 모두 회의의 대상이 되고, 일체의 감상성과 비현실주의가 속임수요 엉터리 수작임이 폭로된다. 자기기만의 심리학은 쇼 문학의 근원이다.
그는 거짓말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와 사회적 욕망에 의해 제약되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이 지나친 합리적 사고로 인해서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따라서 쇼의 목표는 합리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이며 그의 주인공들의 주요 정신능력은 이성이 아닌 의지였던 것이다. 그가 극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문학형식 중 제일 동적인 장르에서 그의 사상에 가장 알맞은 형식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지성주의적·주지주의적 성격을 띠었는데 그것은 비극적인 효과를 만들기 위한 측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연극을 ‘극적 토론’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연극이 소화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은 사람들이 인기 있는 오락적 작품들에 둘러싸여있었기 때문이며, 비평가와 관객이 모두 이런 새로운 연극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들이 과거의 선구자들보다도 더 엄격한 지성주의를 유지했던 반면에,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수준 높은 관객들은 그의 연극들을 즐기기에 더없이 적당했다.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쇼의 공격이 그들의 돈을 빼앗아가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순간, 쇼의 현란한 지적 곡예조차 안심하고 즐겼던 것이다. 결국에 가서 밝혀진 일이지만, 쇼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계급과의 연대감에서 움직인 작가였고, 예로부터 이 계급의 정신적 습성의 하나인 ‘자기비판의 메가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폭로의 심리학

전환기에 있어 세계관의 기본 방향을 규정해주는 심리학은 ‘폭로의 심리학’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정신생활의 표면이 감정 및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하거나 왜곡한 것이라는 인식을 했었는데, 이런 기만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창시 후의 인간타락에 있었으며, 이런 인간의 나약함과 원한을 윤리적 가치와 이타적·금욕적 이상으로 내세우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들의 폭로작업에 동원된 사고방식은 역사적 유물론에서 처음 쓰인 방식이었는데, 맑스가 강조하는 것 역시 ‘인간의 의식은 왜곡되고 상처 입은 것이며, 의식은 그 자체의 편향된 시각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에서의 ‘합리화’의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형성, ‘허위의식’의 개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맑스의 역사철학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은 ‘계급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올바른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통찰’이다.

한편으로, 이런 역사적 유물론 자체는 그 폭로의 대상이었던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세계관의 한 소산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가 서구의 의식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가 되기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이래의 새로운 사고방식의 근본원칙은 바로 ‘의심의 태도’였는데, 이미 널리 퍼져있었던 만큼 개개인의 사상가와 학자가 자신이 역사적 유물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이런 폭로의 이념은 이 세기의 공통의 재산으로서, 니체와 맑스, 프로이트간에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느냐를 말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들이 시대의 위기적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유럽이 그 넘치는 자신감을 상실한 심리상태의 표현이었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이론 또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론 형성이 상당히 진전되어서야 정신분석의 여러 문제들의 근원이 된 기본적 체험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그 기본적 체험이란 바로 ‘문명에 대한 거북스러움’이었다. 그는 그 ‘불안한 균형의 느낌’이 인간의 본능생활, 특히 성애충동에 가해진 억압에서 연유한다고 보았다.
노이로제는 삶의 요소들 중에서 경제·사회·정치적 부분들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없지만, 프로이트는 철저히 자연과학적인 그의 세계관으로 인해서 사회학적 요인들을 올바로 포착하지 못했다. 그에 의하면 문명의 형태는 역사적·사회적 형성물이 아닌, 여러 충돌들의 기계적 발현이다.
성욕충동을 모든 창조적·정신적 원천으로 삼는 그의 이론은 ‘인간본성’이라는 불변의 설정으로 인해서 보수적 관념론의 잔재를 보존하고 있다며 맑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그 비난은 타당하다. 반면에 정신분석이 부르주아지들의 퇴폐적 산물이요, 이 계급과 동시에 사라질 운명이라고 하는 맑시스트들의 비난은 독선이다.
토마스만은 프로이트가 세기말의 비합리주의에 연루되어있음을 강조하지만, 단지 인간내면의 어두움에 집중한 신낭만주의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만이 아니라, 문명과 이성 이전의 경지를 논하려는 낭만주의적 사고 전체의 시작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정신분석의 위험은 원시적 인간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그것이 근본적으로 충동과 생물학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험적으로 주어져 변화가 불가능한 모든 비변증법적 인간개념에는 비합리주의적 보수주의적 경향이 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비관주의자이거나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성에 대한 회의를 품었지만 동시에 충동을 지배하는 수단으로서 우리의 지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했다.

그의 폭로의 심리학은 인상주의적 생활감정이나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만의 개념은 하나의 인상주의적 사상이며 프로이트가 말한 ‘인간은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모두 숨겨진 삶을 산다.’는 이론은 인상주의가 나오기 이전에는 아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사고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실용주의

니체는 ‘진리가 어떤 절대의 팔에 매달려 있던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진리라고 일컫는 것들은 실상 삶을 촉진시키고 삶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하며 권력을 고양시키는 거짓말 들이라고 그는 주장하는데, 실용주의의 진리개념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행동주의적·공리주의적 성격의 것이다.
효과적이고 유용하고 쓸모 있는 것, 세월에 견뎌내는 것, 윌리엄 제임즈의 표현대로 ‘수지가 맞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것인데, 인상주의와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인식이론은 상상하기 어렵다. 모든 진리는 일정한 현실성을 지닐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된다. 그것 자체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느 것과도 무관하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이란 떼어놓을 수 없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서 그 개별적인 구성요소는 서로서로의 의존관계를 떠나서는 규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실용주의는 예술가의 인상주의적 체험에서 나왔다.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이 진리에 대해 갖는 관계야말로 실용주의 철학이 경험 일반에 대해 설정하는 관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베르그쏭과 프루스트

인상주의적 사고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 특히 인상주의의 본질에 밀착된 모체인 ‘시간’에 대한 베르그쏭의 해석에서 가장 순수한 표현을 얻는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되풀이되지 않을 ‘순간의 일회성’이라는 것이 19세기의 기본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주의 소설 전체가, 그중에서도 특히 플로베르의 작품은 이러한 체험의 묘사이자 분석이었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베르그쏭의 세계관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는, 플로베르는 아직도 인생의 이상적 실체를 갉아먹는 하나의 ‘파괴요인’으로 시간을 파악했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시간관, 그리고 체험적 현실 전체에 대한 평가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서 먼저 인상파의 그림에서, 다음에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 끝으로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며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오히려 지나가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이런 프루스트의 소설에 와서 베르그쏭의 시간관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최선의 것이 고뇌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열반으로 생각하리라.

사람들은 낭만주의가 나타난 이후, 거듭 되풀이하여 인생의 상실에 대한 책임을 예술에게 물어왔고, 플로베르가 말하는 인생의 소유와 표현간의 선택을 비극적인 양자택일로 보아왔다. 이에 반해 관조, 회상, 예술의 길이 우리가 인생을 소유하고 체험하는 오직 단 하나의 가능한 형식이라고 본 최초의 인물이 프루스트이다. 버뜨,,,,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간관이 이시대의 유미주의 자체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런 것은 외관상의 온순함일 뿐, 왜냐 하면 프루스트에 의한 인생가치의 전도는 병든 한 인간의, 생매장된 한 인간의 자위와 자기기만이었기 때문이다.

* Author / Gathered from : 최윤호가 ?문학과_예술의_사회사 부분을 요약함

한국 공예가회 10회전

한국 공예가회 10회전에 부쳐

한국의 현대공예는 전통적인 수공예와 현대적인 기계공예의 중간에 끼여서 일종의 과도기적인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머리는 앞섰지마는 손이 뒤진다는 현상을 일으키고, 이상과 현실이 유리되는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술사적인 혼란은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근대국가에서, 그의 선진화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일종의 홍역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 공예계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혼란도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해를 한다면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희망찬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공예가회는 1974년 9월에 창설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의욕적인 공예가들이 모인 단체이다. 그의 형성은 금속.도자.목칠.연직 등 네 분야에 걸쳐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래픽을 빼놓은 전 공예가 망라된 셈이다. 그러한 공예가회가 창설된지 10년이 되어서 이번에 그 10회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 10년간 그들이 시도하고 실험한 작품세계는 직접.간접적으로 우리나라 공예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현상으로서는 첫째, 교육적인 성과를 들 수 있고, 둘째, 작품적인 성과를 들 수가 있다.
첫째, 교육적인 성과라는 것은, 회원들의 거의 전부가 교육자로서 전국의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한다는 입장에 있기 ㅤㄸㅒㅤ문에, 그들 회원이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이 곧 공예상의 새로운 실험이고 성과가 되는 것이다. 이때 일어나는 현상으로서는, 디자인의 문제를 비롯해서 기능분석, 새로운 재료의 개발, 가공기술의 개선 등에 걸치고 있다.
둘째, 작품상의 성과라는 것은, 그들이 비교적 40대, 50대의 창조력이 왕성한 공예가이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 전통의 문제를 그들 나름대로 해석하고, 거기에다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하는 그들의 작품세계는 오랜 전통에서 되풀이만을 거듭했던 근대 이전의 공예에 비해서 괄목할 만한 탈바꿈을 성취하였다. 거기에다 자기들의 체질과 개성을 가미하고, 기능을 새로 개발함으로써 한국의 현대공예에 새로운 창조를 하고저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공예가회라는 집단의 힘으로, ”’아직 부분적인 면에서 과도기적인 후진속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의 현대공예가 선진화작업을 완수한다면 그보다도 다행한 일은 없다.
이러한 그들에 대한 주문은, 그들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과, 선진적인 공업화가 무었보다도 앞서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83년 10월 미술평론가 이경성

금속부문 출신교별 분류

강경희 1945 서울대 서울대대학원수료
강찬균 1938 서울대 이태리_프로렌스미술대학수학
고승관 1943 경희대교육대학원수료
고창환 1952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곽순화 1953 서울대대학원응용미술과수료
김승희 1947 서울대 미국인디애나대학원수료
김은선 1954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김재영 1946 숙명여대 홍익대대학원수료
김종두 1948 중앙대
김종식 1949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김태호 1948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김화숙 1951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김혜경 1953 서울대
남경숙 1950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노용(영)숙 1949 숙명여대 숙명여대미술대학원수료
민경운(은) 1951 국민대대학원재학
민병휘 1949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
박인철 1948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박정자 1953 효성여대대학원수료
박종성 1947 홍익대
박호성 1950 홍익대산미대학원
배창숙 1955 서울대
백인자 1955 중앙대 중앙대대학원수료
변건호 1948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송명수 —
신권희 1937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안귀숙 1954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안미형 1952 서울대
오영민 1948 홍익대대학원수료
오원택 1948 홍익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오융경 1942 홍익개대학원수료
우진순 1948 서울대 서울대대학원수료 스웨덴국립디자인공예대학
유리지 1945 서울대 미국템플대학교타일러미술학교 서울대대학원수료
윤여옥 1945 원광대대학원수료
이경자 1953 중앙대
이규현 1946 오스트리아빈국립미술대학원수료
이성근 1953 홍익대 홍익대대학원
이성원 1946 서독뉴렌베르크국립미술대학 동대학원
이은규 1944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이필재 1954 서울대대학원수료
이충우 1952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이혜란 1953 서울대 서울대대학원수료
전영순 1946 서라벌예대 홍익대대학원수료
전용주 홍익대대학원수료
정량희 재 일본(1983)
주예경 1950 홍익대대학원수료
최정자 1946 홍익대대학원수료
최현칠 1939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홍경희 1954 홍익대 홍익대대학원수료
홍정실 1947 서울대대학원수료
황인철 중앙대 홍익대산미대학원수료

나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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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나를 벗어나 나를 보게 되는 기회였다. 나는 또래의 다른 이들에 비해서 스스로 감내해야할 고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문제와 마주했을 때 떠난 여행을 매번 후회하게 되었지만, 그 여행이 가져다 준 경험도 만만치 않게 나의 부분을 이루어나갔음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비슷한 여행을 거듭할수록, 나는 여행이 순간의 고통을 피하는 도피가 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비참한 여행이란건 바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어딘가를 향하는 행위는 나와 잠시나마 결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나는 현실로부터 떠나오지 않은 ‘즐거운’ 여행에 대해 들어보지를 못했다.

도미토리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진다. 폐쇄적인 내부가 되어버리는 싱글 룸에 비해서 처음에는 생소하기만 했던 도미토리는 나의 여행에서 하나의 문화적 공간이었다. 만약 어느 투숙객이 가진 것이 너무도 많다면 그는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어떤 종류의 가치이건 일단 소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나의 투쟁도 시작된다.

내가 어떤 가치를 소유한다는 건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누가 나의 가치를 빼앗을 것이라는 믿음은 내가 소유한 가치의 절대적 효용마저 잊어버리도록 끊임없이 유혹했다. 어떤 이유에서이건 일상과 거리를 두게 마련인 여행을 하면서도, 그 일상과의 거리를 좁히는 가치들을 끊임없이 찾으려는 건 여정에서 심각한 모순의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여행하면서 자주 여행지에서의 삶과 나의 실제 위치를 뒤섞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보다 못 먹는 것에 대한 연민, 나보다 잘 사는 것에 대한 부러움, 나와는 다른 가치에 대한 불신, 나와는 다른 얼굴에 대한 거부감들까지, 사소한 어느 것 하나도 비교되고 비교하기를 거듭하다보면 결국 총체적으로 다른 그들과 나의 간극을 확인하는 것으로 여행은 끝이 나버린다. 그 즈음이 되면 여행 이전의 그 떠나온 곳에 서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목적이라면 어설픈가?

관찰자의 기술

4. 관찰자의 기술 _ 최윤호 발제 (수유연구실 예술세미나 자료)

19세기 초의 괴테에 이르러 잔상과 같은 주관적 시각현상은 과거의 소외된 위치에서 벗어나 광학적 진리의 위치를 획득한다. 이런 ‘주관적 현상에 일치하는 새로운 객관성’이 갖는 의미는 아래와 같다.

# 잔상의 특권화로 인하여, 인간은 감각적 지각을 외부지시체와 어떤 필연적인 연계가 단절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의 감각의 출현, 잔상과 그것이 수반하는 변조는 주체에 의해서 생산되고, 주체 안에서 생산된 자발적인 시각의 이론적이고 경험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 시간성이 관찰의 구성요소가 되다.”’

그 당시, 시간 속에서 경험한 자기 자신의 주관성이 전환되는 과정은 ‘보는 행위’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는 대상에 완전한 초점을 두고 있는, 관찰자에 대한 데카르트적 이상을 해체시켜갔다. 잔상과 주관적 시각의 시간성의 문제는 19세기에 큰 인식론적 이슈가 되었다.

# 셀링(Schelling)의 ‘일시적 중첩에 기초한 시각’의 묘사 : … 단편적인 방식으로 조각조각 생산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 스스로 완성하기 위해서 각각의 사물은 특정 순간들을 통과해 간다. – 서로를 따라가는 과정들의 계열이, 뒤의 것들이 언제나 앞의 것을 포함하며 각각의 사물들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 헤겔 : 로크적 지각을 거부하고 일시적이고 역사적인 펼쳐짐 안에 지각을 전개. “진실은 조폐국에서 틀에 맞춰 발행되는 동전과 같지 않으며 … ” 감각지각의 명백한 확실성을 공격.
# 괴테 : “일종의 대립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눈은 극단과 극단을, 중간적인 것과 중간적인 것을 대조시키는 속에서 이런 대립적인 인상들을 조합한다. 인상이 연속적이건 동시적이건 전체를 구성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이룬다.”

로크와 꽁디악이 관찰을 감각들의 연속체로 이해했다면 괴테와 헤겔은 관찰을 힘과 관계들의 상호작용이라고 보았다. p154 당시의 다른 작가들은 지각을 연속적 과정, 일시적으로 퍼져있는 내용들의 흐름으로 묘사했다. 앙페르 : “연속적인 차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결과”

허바트(Johann Friedrich Herbart)는 정신적 경험을 지배하는 수학법칙을 공식화함으로써 “자극-반응 심리학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었다. 칸트가 경험을 종합하고 배열하는 정신의 수용능력을 고려했다면, 그는 주체의 내적 비일관성과 탈조직화에 대한 경계를 드러냈다. 그에게 있어 의식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무질서한 흐름으로부터 시작한다. 관념들은 이전이나 동시에 발생한 관념들 또는 ‘현시’와 융합되고 희석되며 뒤섞인다. 그는 관념들의 충돌과 융합의 과정에서 진실을 추출해낸다. 이런 지각을 수학화, 계량화하려는 복잡한 시도는 이후의 수량적 감각 연구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으며 한편으로 그의 작업은 훈육적, 도덕적인 관념의 주입과 관련한 그의 교육학적 이론과도 결부되어있었다.

1820년대까지 유럽 전역에서는 잔상에 대한 계량적 연구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독일의 푸르기니에는 잔상의 지속과 변조에 관한 괴테의 연구를 이어가게 되는데, 그의 연구는 잔상의 지속시간과 조건에 따른 변화와 관련한 것이었다. 다음세대의 연구자들은 푸르기니에의 경험적 연구와 허바트의 수학적 방법을 병행할 것이었다. p158,159그림 푸르기니에는 최초로 잔상의 상이한 형태를 구분했는데 그의 그림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이 역설적으로 객관적인 것임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연구는 17-8세기의 굴절계의 투명성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유효성과 적합성이라는 다양한 영역을 가진 생산적 영토로서 눈을 재배치했다.

1820년대 중반부터는 그동안의 경험적인 잔상연구의 결과로 수많은 광학기구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초기에 그것은 과학적 관찰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곧 대중의 오락물이 되었다. 그런 기구와 기술들은 지각이 순간적이지 않다는 개념과 대상 사이가 분리되었다는 개념을 사용했는데, 잔상연구는 감각이 혼합되거나 융합되는, 그런 ‘보는 행위와 얽힌 지속성’을 통해 지각의 변조와 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p161,162그림 회전판(thaumatrope, 1825 John Paris) _ “… 1/8초 동안 잔상이 지속된다. …” 이런 “철학적 장난감”의 단순함은 이미지의 직조되고 환각적인 본성과 지각과 그 대상 사이의 단절 모두를 명확하게 해주었다.

로제트(1825)와 물리학자 패러데이(Michel Faraday)는 회전하는 바퀴의 착시현상을 연구했으며 1820년대 후반에 벨기에의 플라토(Joseph Plateau)도 잔상의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매우 유력한 “시각의 잔존” 이론을 만들었다. p166 1830년대 초 그는 페니키스티코프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제트와 페러데이 등의 연구와 그의 연구를 통합한 것이었다. p164,166그림 이후의 쉬탐페의 스트로보스코프아래그림와 호너의 주트로프도 유사하다.

이런 장비의 영화사적 맥락에서의 접근은 각각의 장치가 가진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특이성들을 무시한다. 시각의 잔존이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설명력을 갖고 작동하는 조건과 환경들, 그리고 그것이 가정한 역사적 주체/관찰자이다. p169 모든 연구들에서 조사의 대상은 관찰자 자신의 자기-관찰과, 생활에서의 경험들이었다.

페니키스티스코프는 19세기에 “기술이 복잡한 훈련들로 인간의 감각중추를 지배해왔다.”는 벤야민의 주장을 구체화시킨다. 이 도구가 관찰자에게 요구한 물리적 위치는 ‘즉시 구경꾼이 되어버리는 개별적 육체’, ‘경험적 연구와 관찰의 주체’, ‘기계 생산의 한 요소’라는 세 가지의 혼재였다. 이점이 스펙터클과 감시가 대립하는 푸코의 주장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이다. p171 19세기 관찰자의 생산은 규율과 규제의 새로운 절차와 일치했다.

# 디오라마 : 움직이지 않는 관찰자를 기계 속에 통합. 자발성 제거 p172,173

1815년 브루스터경이 발명한 만화경은 페니키스티스코프의 훈육적인 구조와는 급진적으로 달라보였는데 그것은 보들레르에게는 근대성 그 자체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의식을 부여받은 만화경”이 되는 것은 “보편적인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목표였다. 한편 맑스와 엥겔스에게 만화경에서의 다중성은 거울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사진술을 제외하면 19세기 시각이미지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입체경이었는데 그것은 공간이 천부적인 것인지에 관한 당시의 공간지각 논쟁과 관련이 깊다. 1830년대에 과학자들은 보는 육체를 양안적이라고 규정하고 두 시각축의 각도상의 차이를 양화했으며 생리학적 근거를 설명했다. 특별히 1833년에 휘트스톤은 ‘근접한 대상’에 있어서의 시각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의 이론에 의하면 지각경험은 본질적으로 ‘두 눈의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브루스터도 그런 차이에 대해서 ‘그건 마술과 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라고 확신했다. p183@ 휘트스톤은 입체경을 통해 회화와 같은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물리적 물체의 존재를 ‘흉내’내려고 했다. 그는 이미지와 대상의 완전한 등치를 추구했고, 그런 면에서 디오라마에서 이용된 회화의 기술들과 달리 입체경의 ‘가까운 대상’이 더 생생하다고 생각했다. ‘만질 수 있는..’ 19세기의 어떠한 재현의 형태들도 실제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을 그만큼 융합시키지 못했다.

입체경의 조사

이미지 안의 두 시각축이 수렴하는 각도에서 중요한 변화를 요구하는 지점들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물체로 가득 찬 공간이어야 하고 당시의 부르주아들이 가졌던 비어있음에 대한 공포와도 연관된다. p178그림 이런 이미지에서의 깊이는 사진이나 회화에서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입체경에서의 이미지를 조직하는 것은 ‘평면’이다. 물체들 사이의 공간은 점진적인 후퇴가 아니며 형태는 불확실하게 분리되는데 이것은 고전적인 무대 디자인과도 유사하다.
입체경은 근본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모여 있기만 한 장(場)을 드러낸다. 우리 눈은 3차원 전 영역을 완전히 파악하기보다는 분리된 지역에 대한 국지경험으로서 인식한다. 19세기 회화의 범위는 집단들과 평면들 간의 비일관성에 주목했는데, 입체경과 회화에서는 동일하게, 새로이 구축된 시각공간의 출현과 광범위한 관찰자의 변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p191

재현의 수단으로서 입체경은 ‘외설적’이다. 그것은 카옵의 극장적인 배치에서의 무대장치 같은 관계, 즉 눈과 이미지와의 거리를 파괴했고, 벤야민이 ‘근대성의 시각문화’에서의 핵심으로 보았던 것의 완성이었다.

1838년 휘트스톤의 문제는 ‘물체 그 자체’와 평평한 표면에 투사되는 ‘그것’에 관한 것이었다. 입체경을 통해 보는 것은 이미 재생산된 조각난 세상을 두 개의 비정체적인 모델이며 기계적인 재구축을 통한 것이었다. p193 탈중심화된 관찰자와 입체경의 분산-중복된 기호들의 제도화는 수세기동안 관찰자와 대상에 상호 부여되었던 ‘조망점’의 근절을 뜻한다. p193그림 ‘바르뜨의 준거적 환영??’p194

입체경은 육체적 ‘근접성’과 ‘부동성’을 요구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눈과 시각기구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환유’가 된다. 둘은 동일한 활동 평면에 있는 인접한 장치였다. p195 시각장치는 맑스의 ‘도구’와 같은 변화를 겪는다. “적절한 도구가 인간에 의해 채택되는 순간, ….기계는 단순한 도구들을 대체한다.” p197 도구는 인간주체의 타고난 힘과 환유적인 관계였다. 19세기의 도구주의는 “인간의 본성은 도구가 되는 것, 그의 소명은 그의 지위에 의해 설정되고 일하기 위해 배치된다는 은연중의 가정”에 기초한다. p198

1830, 1840년대의 광학기구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들이 수반하는 억압의 형태와 작동구조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광학적인 경험은 기구 안의 이미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페나키스티스코프나 입체경들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발명과 개선과정의 일부로서가 아니었으며, 그 초기의 형태들이 당대의 욕구와 용도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라짐의 이유 중 하나로 ‘요술환등기’를 들 수 있는데, 그것과 달리 입체경에서는 그 생산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산이 엄폐되지 않는’ 입체경은 기구의 물리적 성질에 의존했다. 그 허상은 더욱 완전한 보전을 하는 형태에 자리를 내어준다. 카옵에서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직 사실적이라는 허구를 재생산하고 지속하게 했다. 사진은 자연스러운 그림코드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여겨졌는데, 사진은 좁은 범위의 기술적 가능성에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카옵에서의 관찰자와의 관계성을 이미 없애고 단일한 것이 되었으며 새로운 카메라를 관찰자와는 기본적으로 독립된 별개로 취급했다. 그러나 카메라는 자신을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비물질로 가장하고 있었다.

스펙터클의 앞선 역사, 그리고 모더니즘의 순수지각은 새롭게 발견된, 완전히 드러난 관찰자의 영역에 위치한다. 그러나 양자의 최종적 승리는 시각의 바탕으로서의 ‘육체의 부정’과 그 맥동 및 환영에 의존하고 있다.

* 관찰자의_기술을 요약함.

2005년 국민대논문 조각글들 모음

110. 연구목적과 방법

이 연구는 현재의 특정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에서 드러나는 대안성을 디자인사의 흐름 위에서 고찰하는 작업이다. 어떤 방식이 대안(代案) 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대신하여 변화하였다는 의미와 같다.
2000년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디자이너스브랜드와 같은 디자이너의 독립적 사업들이 출현했고, 영국, 일본 등의 해외에서는 특정한 디자이너그룹에 의해서, 과거와는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디자인전시행사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예로 든 이러한 각각의 활동들은, 디자인 외부에 의해서 통합적으로 시작되거나 관리되지 않았고, 경계 를 인정하지 않고 뒤섞이는 등, 전반적으로 과거의 통념과 거리를 두는 편이어서, 혁신을 원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흥미로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그 다양성만큼이나 산만한 모습들로 인하여 과연 이것이 일정한 비교의 대상으로 묶여질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전체를 흐르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디자인 생산, 유통과정에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이 디자인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작업은, 현재의 디자인 생산과 유통방식에서 발견되는 대안성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특히 1930년대를 전후하여, 영향력 있는 유통방식으로서 디자인사에 등장하는 디자인컨설턴시, 고용디자인 등의 방식들은, 오래된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상존하는 비교대상이다. 이 논문은 크게 디자인 개념이 등장한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주된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을 다루는 부분과 대안으로서 새로이 등장한 현재의 방식을 알아보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디자인사를 다루는 여러 문헌자료들을 찾아보는 일, 특히 디자인컨설턴시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살피는 일이 과거의 상황을 살펴보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디자인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쓰여졌던 방법은, 능력 있는 개인에 집중하거나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물의 외형적 흐름을 읽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들이 담고 있는 디자이너의 눈부신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영웅들의 이야기는 현재의 디자이너들에게 설득력 있는 과거의 경험이기보다는 무용담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자는 시대의 사회상과 디자인이 가진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변화의 원인을 찾는 에이드리언 포티의 디자인 연구방법을 택했으며 , 사고의 기준을 그에 맞추려 노력했다. 이런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된 사물의 형태나 색채가 아니라 그 주변의 상세한 상황들이다.
논문에서 대안적이라고 언급되는 현재의 활동들은, 주도적으로 이뤄지는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들에 비하여 명확히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가 대안적 디자인 생산, 유통방식이 앞으로 성공할 방식임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정작 연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점을 읽는 보다 지혜로운 눈을 가지는 일이다. 새로이 등장한 대안이라는 것 또한 영원히 지켜질 무엇이기보다는, 언젠가는 또 다른 대안에 의해 사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2. 산업 디자인

1. 1750, 산업 디자인의 시작
2. 산업 디자인의 생산(디자이너)과 유통(제품)

200. 산업 디자인

영국의 산업혁명과 기계화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인 반면에, 디자인을 단순히 제품 생산에 있어 필요한 종속적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기계화가 대량생산체계를 확립하던 때에, 그것을 좀 더 잘 팔리도록 형상화하기 위해서 디자인이 시작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바로 그것인데, 대량생산과 유통의 방식이 확립된 시점인 산업혁명기나 1920년대의 미국을 본격적인 디자인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그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런 종류의 견해에 대하여, 영국의 디자인이론가 에이드리언 포티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일군의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나타났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주장하든지 그들을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이몬드 로위나 헨리 드뤼피스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이 어떤 산업분야에서는 이미 한 세기 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가 주목했던 점은 산업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확실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시점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다, 사회적 취향과 제조기술의 융합 을 이끌어내는 과정으로서의 산업 디자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점이었고, 그 기준에 의하면 두 시기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실제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8세기 영국의 웨지우드(Wedgwood) 나 매슈볼턴(Matthew Boulton) 의 회사에서는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이 제작 과정에서 분리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를 통해 생산, 소비 양측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이후의 컨설턴트 디자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디자인의 등장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결과물인 제품이나 디자이너의 성공여부에 집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핵심이, 생산공정 상에서 ‘복잡한 사회적 요소의 합성’ 인 디자인 작업이 분리된 것이며, 그러한 생산방식의 변화요인은 디자이너의 품성이나 제품 등의 결과물보다도 당시의 사회시스템에 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10. 디자인의 분리

211-0. 중세유럽의 생산

16세기 초반에 유럽의 교역량이 전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뉘렌베르크나 피렌체 등의 신흥도시들에는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 그리고 성직자들을 위한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대형공방들이 생겨났다. 이런 공방들에서는 물건들을 제작할 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공적 방법을 사용했던 반면에, 전문성은 과거에 비해 한층 높아진 상태였고, 단일한 물품들을 반복적으로 복제해냈다. 존 헤스켓(John Heskett) 에 의하면, 이 시기의 예술가와 기술자의 구분은 훈련에 의해 성취 가능한 기술적 능력에 따라 행해지는 유동적 구분이었다. 한편으로, 교역의 증가에 따라 생산양도 늘어났는데, 이에 발맞춰 물품의 외형을 보다 돋보이게 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져서 생산과정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패턴북 은 이런 요구를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응용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가구나 직물 등의 산업 전반에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고, 출판술의 발달로 인해 광범위한 영역으로 보급되었다. 결과적으로 패턴북의 사용으로 인해, 생산과정에서 장식작업에 들여야 할 직공들의 노력이 감소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될 수 있었다. 이런 패턴북이,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에 속해있던 숙련공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고, 구분된 집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제작된 것은, 디자인이 생산과정에서 분리됨으로써 비로소 구분된다는 특성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다.
국가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의 유럽은 정치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의 측면에서 근대적인 발전이 두드러지지만 과거의 봉건적 요소나 세력이 남아있는 시기였다. 이런 절대왕정국가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행정, 사법, 군사의 측면에서 중앙집권이 달성되었다. 한편으로, 국제무역이 성행하던 16세기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에 입각한 자본주의가 도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절대왕정의 핵심이었던 관료제적 중앙집권과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왜냐하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국가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상업의 중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16세기의 급격한 호황에 뒤이어 17세기의 유럽 전반은 암흑의 세기(Black Century)로 불릴 정도로 상대적인 침체를 맞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17세기는 팽창의 시기였으며 유럽 경제의 중심은 이전의 지중해로부터 북서유럽으로 이동하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그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해 궁정예술가들과 장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왕실은 다수의 공장들을 세우고 부속 학교까지 세웠는데, 1667년에 파리의 고블랭(Gobelins)에 세워진 공장의 경우 수백 명의 장인들이 일할 정도였다. 당시의 중, 서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고, 다른 중, 소 군주국들에도 프랑스식의 궁정스타일과 중상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각국의 예술, 장인 지원체계 또한 왕실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생산되는 물품을 군주들이 통제했다. 한편으로, 당시의 유럽 도자기들은 전반적으로 그 질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각국의 왕실들이 도자기공방을 세우는데 영향을 주었다. 북부 독일의 작센(Sachsen, Saxony) 지방에는 1709년에 메상(Meissen)공방이 설립되었다. 초기에 이 공방에서 만들어지던 물품들은 궁정예술가들에 의해서 장식되었으나 1720년대 중반에는 미술학교를 통해 배출된 조각가들이 고용되어 모델링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주된 디자인 소스였던 패턴북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의 물품들은 주로 왕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이 물품의 생산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로 물품의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는 왕실재정악화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시민계급(bourgeoisie)의 급격한 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18세기 중반, 세력이 커진 시민계급과 중산층에 걸쳐 차와 커피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도자기의 수요 또한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장의 형성으로 인해, 왕실을 대상으로 한 예술성 중심의 생산방식은 상업적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공방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서 판로의 확장, 즉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공방의 상업적 성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으로 인해 왕실이 붕괴되어 후원을 바랄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 상업적 성공에 매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의 사회상은 다른 유럽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대륙의 절대군주제하에서 왕실이 물품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것에 반해, 영국은 의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들의 지지로 웨지우드, 치펀데일(Chippendale), 매슈볼턴과 같은 사업가와 기술혁신가들의 자유무역과 개인적 이윤추구가 보장되었다.

211. 웨지우드

1759년 웨지우드는 독립적인 도자기 생산 회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의 영국 도자기 수요는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고, 식민지의 개척으로 인해 해외시장 또한 확대되었다. 과거의 주된 판매지역이었던 회사주변 지역보다, 폭넓게 확대된 국내외의 시장에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는 공장의 생산방식이 보다 효율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포티가 “웨지우드의 놀라운 성공은 공장에서의 합리적 생산방식, 뛰어난 마케팅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제품에 대한 열정에 기인하고 있다.” 고 한 것과 같이, 웨지우드는 신고전주의의 도입이나 소지의 개발과 같은 일련의 실험들을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당면한 효율화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웨지우드는 새로운 판매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매장에 방문한 고객이 견본을 보고 주문을 하면, 그 수에 따라 생산을 하는 방식, 즉 수요와 공급을 보다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주문생산방식은 불필요한 재고로 인해 자본이 묶이는 위험 에서 회사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후 웨지우드는 견본을 소지한 영업사원을 고용하여 소비자를 찾아 다니거나, 제품 카탈로그를 찍어 배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판매방식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판매 방식이 기존의 생산방식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된 품목이었던 그린웨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새 판매방식에 대한 기존 생산방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1760년대 초반, 웨지우드의 주요 상품이던 그린웨어(녹색유 도자기)로는 물건을 안정적으로 균일하게 생산할 수 없었다. 그린웨어는 틀로 찍어낸 요철 무늬에 유약이 입혀지면서 그 특성이 살아나는 것이어서 유약을 입히는 직공에 따라, 그리고 가마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어서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유약 효과의 다양함이 그린웨어의 매력이었으나 결코 균일한 상품을 만들지 못했고, 따라서 웨지우드가 도입한 판매 방식에 적합하지 않았다.”
새로운 주문판매방식을 도입함에 있어서 필요한 전제조건은, 제품의 질과 형태가 항상 균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판매방식에서, 고객들은 직접 진열된 제품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제품을 구입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에서는 소수의 견본만이 매장에 진열되었고, 그것마저 직접 구입하는 것이 아닌 주문을 위한 구경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 매장에서의 견본이나 인쇄된 카탈로그에서 보여지는 제품의 모습이 자신이 구입할 물건과 동일하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했다.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웨지우드는 그의 해박한 도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우선 그는 그린웨어 대신 크림웨어 로 주 생산품목을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균일한 결과를 얻어내는 한편, 일정한 효과를 내는 유약을 개발했다. 또한 상회전사기법 의 도입을 통해서, 직접 손으로 그리는 장식 때문에 균일도가 떨어지고 대량생산에 부적합해지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당시의 제품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쓰여졌던 것이 분명한 만큼, 기술적 개발과는 다른 균일화를 위한 요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력을 보다 실수가 없고 일정하도록 유지해가는 일이었다.

212. 공정의 세분화와 원형제작과정의 분리

직공들의 숙련도 는 균일화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였다. 17 ~ 18세기 사이의 스테포드셔 에서, 제작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의 공예적 생산방식은 자취를 감추었고, 작업과정의 분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상태였는데, 이에 대한 포티의 언급은 이렇다.
“늦어도 1730년대부터 도공들은 전체 작업 과정 중 물레차기나 손잡이 달기, 유약과 이장 만들기 등, 한 가지 과정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다. …… 1750년대 월던의 공방에서는 전체 제작 과정이 최소한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직공들은 대개 그 중의 한 가지 작업에만 종사하였다. 하나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예닐곱 명의 도공들이 분담하고 있는 셈이라, 그 중 어느 누구도 제품의 특성을 크게 바꿀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체 공정들이 이미 어느 정도 분화된 상태에서 웨지우드회사의 제품들은 더욱 균일화되어야 했는데, 직공들이 빈번히 저지르는 실수를 줄이는, 일종의 인간기계를 만드는 변혁은 그래서 필요했다. 웨지우드는 공정을 더욱 세분화하여 직공들에게 부여될 개별 공정의 난이도를 줄여나가게 된다. 그들에 대한 재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이용되었으나, 진척속도가 느리고 직공들의 호응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각 공정이 더욱 세밀히 분화되고 그에 따라 직공들의 작업이 단순화되는 시점에 필요한 또 하나의 작업이 요구되었다. 과거, 하나의 도공이 모든 작업의 과정을 관리하면서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나갈 때와는 달리, 구분된 하나의 반복기계와 같은 임무를 지녔던 직공들이 따르기 위해 필요한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공정의 세분화 과정에서, 도자기의 원형을 제작하는 작업은 독립적인 단계로서 다른 공정과 뚜렷이 구분되게 되고, 또한 다른 공정들의 지침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해갔다. 동일한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는, 개별적인 직공들이 수많은 공정에서 다양한 차이점들을 만들어낼 소지가 많았고, 그것은 곧 균일화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금전적 가치는 상당했는데 이점에 대하여 포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확한 디자인을 기획하는 모델러의 가치는 그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모델러는 어떤 의미에서 도자기를 한 개 만들 때 마다 작업의 일정부분을 대신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델러가 하는 일의 금전적 가치는 실상 이 일정 부분의 가치를 모두 합친 것과 같다.”
생산량과 수익의 정도는 원형제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원형의 질에 상당히 의존적이었으며, 또한 제대로 된 원형의 금전적 가치는 생산량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한 직공들의 작업에 비해 원형제작자들의 작업은 중요하게 평가되었으며, 그들은 일반 직공들의 두 배에 가까운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보수가 실제 그들이 가진 금전적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았는데, 고용직으로 일했던 모델러들, 그리고 프리랜스제로 일했던 모델러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당부분의 추가적 이익들이 모두 고용주에게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는 착취의 징후가 보여진다.
한편으로, 웨지우드는 다양한 미술가들을 회사의 모델제작에 이용했다. 신고전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주 고객이었던 중, 상류계층은 그들을 타 계층과 구별하기 위해 최신의 양식들에 몰두했다. 새로운 유행인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에, 전통적인 도자기제작방식에 익숙해있던 도공 출신 모델러들은 미술가들에 비해 어려움이 많았다. 신고전주의스타일은 런던과 같은 유행의 중심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스테포드셔의 노동자계급 출신 도공들이 새로운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회사에 고용된 미술가들이 가졌던 모델러로서의 능력과는 다소 상관없이, 그들은 조직체계 안에서 곧바로 적응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규칙들이 엄격히 지켜지던 조직체계에서 그들의 다양하고도 제어 불가능한 독립적 성향들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웨지우드는 그들을 회사조직 바깥에서 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대도시에 위치한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구입하거나 의뢰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이로써 디자인작업은 제작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유행은 웨지우드가 미술가들의 디자인을 제품 생산에 사용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독립적인 디자이너, 디자인작업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노동분화로 인해서 쪼개어진 세부적인 공정들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3. 생산방식의 변화와 디자인

제조업자들에게 필요한 디자이너란 것은, 무엇보다도 균일하고 정확한 제품생산을 가능하게 해내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모든 디자인은, 기계든 손이든 활용 가능한 생산 수단으로 작업해서 얻은 제품에, 개별적인 차이와 다양성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 인용)웨지우드의 퀸스웨어에 관한 많은 디자인사연구가 퀸스웨어의 신고전주의적 특성에 집중하지만 실로 그것은 신고전주의의 미적 특성보다는 공장의 생산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기계의 도입이 디자인을 변화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제형물레의 선반을 회전시키는데 기계를 도입했다고 말하지만, 물레질, 틀 성형, 제형 물레 성형 등의 제조기술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왔던 전통적인 기법이었고 다만 속도를 빠르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웨지우드의 성공원인은 공장에서 노동인력을 조직하는 것과 관련한 그의 새로운 방식 때문이었다. (디자인과 제작방식의 연관관계)
그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사업 초반의 그린웨어는 다양한 형태와 유약의 효과로 유명했지만 필연적으로 균일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견본이나 카탈로그를 통한 판매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새로운 방식은, 형태의 다양성은 축소하면서도 표면에 들어갈 상회장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식이었다. 상회장식은 도자기가 구워진 이후에 작업을 하면 되는 일이었고, 주문을 받고서도 바로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장식방법을 상회로 바꾸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형태의 도자기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재고준비단계나 장식공정에서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장식의 가짓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러한 장식들이 모두 들어맞을 수 있는 특별한 도자기의 디자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웨지우드 초기에 생산되던 로코코스타일의 도자기들은 굴곡이 많고 형태가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단순화가 필요했던 장식공정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반면, 신고전주의 스타일은 단순하고 평평한 표면을 만들어내는데 적합한 스타일이었고, 이후 웨지우드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생산되는 제품의 균일화, 그리고 당대를 살아가던 중상류층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조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고서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었다. 두 조건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절충안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웨지우드의 모델러들이었다. 포티는 이렇게 18세기의 모델러들이 담당했던, 생산과 소비라는 두 측면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형태의 개발이라는 작업이 1920년대의 레이먼드 로위와 같은 전문적인 산업디자이너들이 했던 일과 다르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220. 19세기 영국의 디자인저급화와 기계화와의 관계

19세기.. 디자인 변질이 어떻게 전반적으로 걱정거리였는지 기술할 것.. 1111

기계화와 디자인의 연관성에 대하여, 기계 생산 방식의 등장이 디자인의 질을 저하시킨 주범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상태에서, 기계의 등장이 디자인 공정의 분리를 촉진했다는 그런 견해는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모리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었고 현대디자인 이론서에 자주 등장하는 니콜라우스 페브스너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재론되었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은 같은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상황을 배제한 편협한 견해일 수도 있다. 당시의 기계와 디자인의 관계를 해석한 포티의 견해에 의하면, 기계의 등장을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으로 보는 판단은 “제품의 형태에 미치는 장인의 영향력을 기계가 침탈했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다. 즉, 기계가, 외형을 다루는 과정을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분리시켜서 디자인 작업의 변질을 초래했고, 그것이 곧 제품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 생산방식이 도입되기 이전인 18세기 초에도 이미 공정의 분리를 통한 노동의 분업화가 이루어져있음을 웨지우드를 비롯한 예에서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공정의 분리가 기계의 등장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19세기의 산업체들에서 기계화가 차지하는 공정의 정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수공에 의한 생산공정이 그때까지도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수공생산은 보다 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의 장인이 작업해나가는 방식은 아니었다.
공정 분화현상은 비슷한 시기의 산업 전반에서 발견되며 이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언급된 자본주의 산업발달의 3단계과정과 들어맞는다. 그에 의하면, 개개의 장인들이 독립적으로 일해서 물건을 만드는 전 자본주의 사회가 지나면 자본주의의 첫단계가 시작된다고 했다. 첫 단계는 노동자들의 간단한 협업단계로 작업장을 공유하거나 같이 재료를 구입하고 같이 물건을 파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관리자의 지시 하에 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수공과정으로 분리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기계 그리고 공장체제의 등장이다.
18세기는 영국 대부분의 제조업분야에서 두번째 단계, 즉 수공 생산 상태에서의 분업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이는 독립적인 장인이 전체 생산과정에서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분화된 작업으로서 디자인이 새롭게 필요해졌음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인용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1725~1826)의 글을 보자.
“무지는 미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또한 산업의 어머니다. 심사숙고나 감각표현은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손이나 발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반복작업은 숙고나 감각표현과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제조업은 정신이 최소한으로 관여하는 곳, 또한 작업장을 …… 인간 부품이 장착된 엔진으로 간주할 때 번영한다.”
1767년의 이 글에서는 웨지우드 회사에서의 분업화와 작업지시체계로서의 디자인의 등장이 예견되고 있다. 디자인이 무지한 노동력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두번째 단계인 수공생산 상태에서 분업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였다.
기계의 도입은 직접적으로 생산과정의 변화에 작용하였던 요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노동의 분화를 더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계생산에 의해서 생산력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이 생산력의 증감여부에 생산방식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분화라는 생산방식은 생산력의 증가가 유지되는 한 함께 유지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어질 얘기 -> 기계화의 현상(직물,,, 등등 60페이지 이후의 사례들.. 그래서리,, 디자인변질의 원인은 기계화보다는 공정의 분화가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던 목판나염술은 1750년에 이르러 동판나염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방법을 이용해 공장에서는 보다 큰 면적에 보다 정교한 무늬를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수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는데, 염료를 묻히는 과정과 판을 잘 맞추어내는 것, 그리고 적당한 압력을 가해 찍어내는 작업은 날염공들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1796년에는 동판나염에 이어 롤러날염기계가 개발되었고 뒤이은 증기기관의 이용에 힘입어 생산의 속도는 열 배 이상 증가하였다. 날염작업이 수작업에서 증기 날염기계로 대체되자 기존의 장인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생산량의 증가로 인하여 새로운 디자인의 요구가 높아졌고 디자이너의 수 또한 늘어났다.
한편으로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일부의 고용된 디자이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리랜서로 자신의 디자인을 제조업자에게 파는 식으로 일했다. 그들의 보수는 당시의 다른 숙련 노동자들에 비해서 높았지만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수익에 따른 공정한 배분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날염업자들은 1830년대 초반, 저작권을 날염직물 디자인에까지 적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그것이 좀 더 좋은 디자인의 개발에 긍정적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나, 실상 저작권 적용의 목적은 그들의 재산권 확보에 있었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는 1851년의 대영박람회 디자인 부문 공식 보고서에서, 디자인 질 저하의 원인 중 하나는 롤러 날염기계의 도입에 의하여 디자이너가 통제가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고, 그들이 제조업자의 요구나 장식미술의 원리에 얽매여 쓸데없는 복잡한 식물의 곡선을 모방하는데 능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선호했던 다분히 개인적인 선호에 의한 단순한 형태의 결과물들은 보다 과거인 동판날염의 등장에 의해서 이미 사라졌던 것이었다. 사실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를 날염할 수 있었던 것은 롤러날염이 아닌 동판날염방식의 도입 때문이었다. 그는 수공으로 작업한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의 결과물들을 기계의 결과물이라고 여기며 혹평했고, 수공에 의한 완벽한 작업이라고 짐작했던 단순한 무늬의 결과물들은 실제로 날염기계에 의했던 것이었다. 디자인저급화가 기계에 의한 것이었다는 당시의 견해는 이처럼 부실한 선입견에 근거해있다.
디자인의 변질된 근본적 원인은 기계화가 아니라 양과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제조시스템이었고, 그것인 디자인을 공정에서 분리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결과물의 질을 악화시켰다. 근본적으로 이런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기득권을 가진 19세기의 디자인 개혁운동가들은 복잡한 사회문제보다는 지엽적인 생산기술상의 문제에 주력했다. 특이하게도,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모리스는, 존 러스킨처럼 물질적 진보를 모두 버리고 중세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대신에, 물질적 진보를 수용하는 대안의 가능성을 생각했었고, “디자인의 열악함이 자본주의의 탐욕 때문” 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반(反)기계적 성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반대했던 것은 단순한 생산기계 자체가 아니었다.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것은 철과 동으로 만들어진 실제의 기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억누르고 있는 포악한 상업성이라는 실체도 없는 커다란 기계다.”

Tokyo Designersblock 문서들 모음

1968 Revolutions #

Oct. 7th thu. – 11th mon., 2004

Main Areas:
At galleries, boutiques, vacant land, in Aoyama, Shibuya, Harajuku, Daikanyama

1968 was the year that reflected the period of revolutions and turbulence.
Music transcended the time and design reflected the period. Political movements such as May revolution in Paris and Shinjuku riot in Tokyo left impact on people’s life.
The impact of this year grows to become the hope for people to be able to change the world by themselves.
But if we look back at those days, questions proposed at that time may remain unsolved.

The unsolved question sparked Nationalism and Globalization.
New waves of incidents happened: Short board surfing was born in Australian coasts.
Young people putting on jeans pants showing part of their hips were wandering on the streets.
The Beatles’ White Album created new phase of musical culture.
These changes were revolutions in 1968 that opened up people’s desire to answer the fundamental questions.
SURF REVOLUTIONS LIFE REVOLUTIONS

This year, 2004, has the similarity in terms of desire for changes.
It is now that we question the fundamental questions once again from universal views.
What was the question that was asked all around the world in those days?
What are the questions we are asking ourselves this year: What is the design? What is the space design? What are life and living?
DESIGN REVOLUTION

We once again question the cultures born in 1968.
We create new values regardless of concepts that have already been made.
Now, what truly changes the world is the design that possesses the essential of living.
We are convinced of the power of the design.

Producer of Tokyo Designers Block

Teruo Kurosaki

* 저자 / 출처 :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4/designer/

[edit]
tokyo designers block #

oct. 7 – 11, 2004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4

most pictures by janine parker, some by mno design.

1968…

‘1968 was the year that reflected the period of revolutions and turbulence. music transcended the time and design reflected the period. political movements such as may revolution in paris and shinjuku riot in tokyo left impact on people’s life. the impact of this year grows to become the hope for people to be able to change the world by themselves. but if we look back at those days, questions proposed at that time may remain unsolved.

the unsolved question sparked nationalism and globalization. new waves of incidents happened: short board surfing was born in australian coasts. young people putting on jeans pants showing part of their hips were wandering on the streets. the beatles’ white album created new phase of musical culture. these changes were revolutions in 1968 that opened up people’s desire to answer the fundamental questions.

SURF REVOLUTIONS LIFE REVOLUTIONS

this year, 2004, has the similarity in terms of desire for changes. It is now that we question the fundamental questions once again
from universal views. what was the question that was asked all around the world in those days?

what are the questions we are asking ourselves this year: what is the design? what is the space design? what are life and living?
DESIGN REVOLUTION

we once again question the cultures born in 1968. we create new values regardless of concepts that have already been made. now, what truly changes the world is the design that possesses the essential of living. we are convinced of the power of the design.

text by teruo kurosaki


the producer of this five-day event ‘tokyo designers block is teruo kurosaki. he started an international empire of interior innovation through his idée and sputnik furniture lines. kurosaki wants now, via the staging of the fifth tokyo designers block, to exhibit the virtues of japanese design culture to the rest of the world. though not himself a designer, kurosaki has been called the ’terence conran of japan’ and become synonymous with a new wave of lifestyle design that is, first and foremost,
born out of tokyo’s peculiar urban milieu.

he studied physics and was supposed to be scientist or an engineer but decided that he wanted to work with interiors, architecture and the environment. in the 1980s, kurosaki opened a small interior design workshop in tokyo’s aoyama district and began making the acquaintance of the then still unknown designers philippe starck and marc newson. he exhibited his line ‘sputnik’ in the london designers block and could relate with those people, with their more edgy, alternative ways of showing design.

london designers block was the initial inspiration for the TDB. ”

* Author / Gathered from : http://www.designboom.com/snapshots/tdb04/1.html

[edit]
Tokyo Designers Block Registration Overview #

1968…..is the concept coined for Tokyo Designers Block 2004.
We are looking for participants to join us in creating designs that flow from the “happy chaos” which permeates the city of Tokyo.

Tokyo Designers Block Registration Overview

Date

Oct. 7th thu – 11th mon 2004

Period of Registration

June 1st tue – July 31st sat 2004
Individual entry
Corporate or group entry

June 1st tue – July 1st thu 2004
Sponsored entry

Conditions

Tokyo Designers Block is open to any and all designers, artists and creators, professionals and non-professionals.

*The entries, after being exhibited, are scheduled for publishment in a TDB official publication.
In this case the applicant does not receive any payment. The applicant is deemed in compliance with the above mentioned regulations, once the entry is submitted.

Details

There are three ways to participate in TDB.
Individual entry, Corporate or group entry, and sponsored entry.

1. Entry for individuals

This is for individual entry, but is not limited to a single product by an individual. The details are shown below.

The designer will automatically be eligible for the TDB Award and any other awards.
TDB committee will help in finding the exhibition spaces.
Designer will be introduced through the TDB official media outlets, (booklet and the website)
Blog(Weblog system) account will be distributed.
TDB tools will be distributed. (1 TDB flag / 1 official booklet / 1 name plate / invitation for official party / designers kit….)

2. Entry for Corporate or Group

This is for corporations or groups wishing to participate in TDB, exhibit their work, and jointly submit entries.

The designers will automatically be eligible for the TDB Award and any other awards.
TDB committee will help finding the exhibition spaces.
Designer will be introduced through the TDB official media, (booklet and the website)
Blog (Weblog system) account will be distributed.
TDB tools will be distributed. (1 TDB flag / 1 official booklet / 1 name plate / invitation for official party / designers kit….)
3. Sponsored entry

TDB will support individual designers and creators who present work that the TDB committee feels is new and unique. You may note your desire to be a sponsored entry when you submit your application.

Possible number of sponsored entry
10 designers (about)
Detail of sponsored entry
Designers will be exempt from entrance fee. TDB will assist in the exhibition of these works, logistics, and related PR work.
Registration Procedure
Please enter by registering for sponsored entry. After the entry is done, please fill in the application format and send it with other materials indicated by the TDB committee.
Deadline for the registration and submition
July 1st 2004
Announcement
July 15th (Will be posted on this website)
Things to submit
+ Entry sheet
+ Concept sheet of the exhibition
+ Portfolio (will not be sent back)

Entry Fee

for individual designer 105,000 JPY (tax included)
for corporate or group 525,000 JPY (tax included)

* Bank account and other details on the payment of entry fee will be sent to you as an invoice format after your registration is completed. (We will ask for the entry fee to be transferred to the appointed bank account)

Flow of Entry

Please register through this website.
To register, please click on the “To registration procedure” button and go to the page that reads, “TDB Terms & Conditions”. If you accept the terms and conditions, please follow with the registration procedure.
Deadline of registration: July 31st 2004
(Deadline of sponcered enry is July 1st)

After you have completed your registration, the invoice for the entry fee will be sent to you. It should be sent to you within about a week. Please transfer the entry fee to the appointed bank account.

Your registration will be fully completed after we confirm your payment. Then we will e-mail a password to you, and this is what you will need to access information about your exhibition and other such details.

Please register your exhibition details; such as exhibition location and the exhibition contents, through the website. What you input here, will be what is written about you in the booklet and the official website.
Deadline of registration: August 10th 2004

* 저자 / 출처 :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4/designer/en/tdb.do

[edit]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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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yo Designers Block 2003 #

Tokyo, is an intriguing and interesting city.
Addresses certainly exist, but unlike Western countries where they are based on streets, numbers are appointed to areas making it difficult to find your destination at first glance. Funky cafes, and hip stores are hidden on the back streets, rather than main streets and avenues.
Inspired by Designers Block in London, I have tried to emanate the spirit in which designers collaborate and express themselves. What makes London Designers Block distinctive is that young designers rely very little on commercial enterprises and do not use conventional means of exhibiting their work. Instead they collaborate and rent old brick warehouses, creating a more individualistic and interesting approach to express themselves.

Reflecting on the landscape of Tokyo, we see a situation in which many different aesthetic tastes and expressions of design co-exist. Right before our eyes a new cultural appreciation is being born and is re-shaping our society. Designers use aesthetics as a weapon to cut through societal restrictions and conventions; to recreate and redesign society.

In this way the landscape of Tokyo is changing slowly, bit by bit, and this is what we desire and hope to achieve through TDB.

Producer of Tokyo Designers Block
Teruo Kurosaki

* 저자 / 출처 :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3/designer/

[edit]
TDB 2003 Competition #

In 1950, Edgar Kaufman Jr. wrote a book called, Introduction to Modern Design: What Is Modern Design & What Is Modern Interior Design, (published by MOMA Publications). He was a curator at the Museum of Modern Art in NY, and was the co-founder of the GOOD DESIGN? competition with Charles and Ray Eames, and Eero Saarinen. “Good Design” quickly became a coin word for product design that was both excellent and endurable. The revived awareness of “Good Design” in a contemporary landscape catapulted into a pursuit for products that were considered to be well-designed. This consciousness of design excellence was pivotal in paving the way for design today.

Now, 50 years later, more and more people have begun to doubt the concept of a solitary meaning of “good design”. Originally, the concept was an effective way to develop design based on function and aesthetic appeal. In the process of globalization and diversification of values among people in the modern world, however, defining one standard of design, that is considered to be ‘good’, proved to be a difficult task. Of course, what we have developed in the process and pursuit of good design cannot be denied, but the questions of how these standards are decided and judged must be re-addressed.

With the Tokyo Designers Block competition titled, “Bad Design in the Worst Spaces”, we are challenging this concept of ‘good design’ and suggesting a reevaluation in the way design is judged. This is by no means, a call for badly designed products, but more of a call for people to open their mind and let go of definitive standards of design excellence.

As I mentioned above, in accepting diversified values among people, good design has a direct correlation to when, where and by whom it is used, in order for it to be judged as good. If bad design is used in the ‘worst’ space, it could be a viable choice for the designer. In considering the product, what is considered the ‘best’ design is between the designer and user of the product, not an acceptance by general opinion.

For this competition, it is really important to consider the space and environment in which the product will be used, considering the specific user, not consensus of what type of design is considered to be ‘good’. We are really looking forward to designed furniture and interior products based on a more free way of thinking about design!

* 저자 / 출처 :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3/designer/en/competition.do

[edit]
2003 #
[edit]
Introduction of TDB 2002 #

lf you get in a taxi in Tokyo, tell the destination to the driver. Or, you can hardly get there. There is certain adress, but it’s just difficult or vacant understandable to reach the exact adress here. If you go to the back streets around Harajuku or Aoyama, you can walk around safely, and you will find some small trendy cafes, shops, galleries, and even pretty flower shops. There, it exists that some senses of the design. but, it’s not easy to tell you what it is.

We want to spot light and emphasize this approch to the beauty of the city. Tokyo Designers Block is not a design event nor a trade show of products designs. We are willing to make fun of design and try the best how design can do to the society in Tokyo city.

Dear my friends designers, let’s play with Tokyo City with us. Design has no Boundaries
Tokyo Designers Block Producer
Kurosaki Teruro

Event
Tokyo Designers Block 2001
Period
October 10th (Thu.) – 14th (Mon.), 2002

Areas
Aoyama
Harajuku
Shibuya
Daikanyama
Roppongi
Ebisu

Sponsor
Tokyo Designers Block Committee

* 저자 / 출처 : http://www.tokyodesignersblock.com/2002/about/index.php?page=about